Ⅰ 아도르노의 생애(Theodor W. Adorno, 1903∼1969)아도르노는 190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아버지는 포도주 회사를 경영한 재력가였으며, 어머니는 이름난 성악가였다.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 재학 시 아도르노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이미 칸트,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괴테, 실러를 위시한 작가들의 문학에 통달해 있었다. 192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한 아도르노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음악학 등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음악 평론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대학 시절 아도르노에게 깊은 감명을 준 책은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이었으며, 이는 아도르노가 예술, 사회, 역사를 하나의 연관 관계에서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데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http://app.dreamwiz.com/kunbary/cgi-bin/hbbs.cgi?b=dlsanf&c=v&n=22&m=&lc=15- 103인의 현대사상, 민음사, 1996 (아도르노편)1924년 훗설의 현상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아도르노는 알반 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우려고 빈으로 가며, 1927년 「선험적 영혼론에서 무의식의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 취득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빈에서 음악 잡지 편집자로 일하면서 연구를 계속해 1931년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획득한다. 교수 자격 취득 기념 강연인 「철학의 현재적 중요성」과 이듬해의 강연 「자연사의 이념」에서 젊은 아도르노는 자신의 철학이 명백하게 정립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철학적 개념이 대상을 지배하는 것을 비판하는 입장과 예술의 영역에 역사가 퇴적되어 있다는 인식을 두 강연에서 알렸다.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칸트, 헤겔에서 정점을 보인 독일 관념 철학, 훗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키 둘째 방향은 이 이론을 실지로 검증하는 여러 논문과 여러 가지 의식과정, 이데올로기의 과정, 사회 과정의 분석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방향은 파시즘비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이 학파의 중요한 연구 분야가 대중문화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의 주류를 이루어 왔던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그리고 마르쿠제를 계승한 대표적 사회비판이론가는 위르겐 하버마스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1930년대의 사회비판이론은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1970년대에는 그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비판론은 철학이론으로서 불완전하고 여러 가지 이론적 소산을 수집해 놓은 단순사회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회비판이론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신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있으나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제 시각에서 출발한 새 시대의 비판적 사회철학이라 할 수 있다.비판이론은 1960년대 및 70년대 초반에 구미를 휩쓸었던 신좌파운동 및 학생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비판이론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또는 세상을 보는 안목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2.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의미계몽주의에 있어서 비판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소수의 비합리적 권위에 도전하는 다수의 합리적 사유을 일컫는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인식을 말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하여 지칭하게 되었고, 헤겔의 제자들에 있어서 비판은 왜곡된 제약의 체계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비판은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비판을 일컫는 것이었다.비판이론가들은 이들 비판의 다양한 개념을 수용하여 철학, 문학, 심리, 대중문화의 비판에 적용하여 그것들이 내재한, 현상유지를 위한 허위 의식을 폭로하고 그런 허위 의식의 극복을 통해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려 한 것이었다.3.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적 배경1920년대 말다. 이 사유의 개념 자체에―이 사유가 얽혀 들어간 구체적인 역사형태나 사회제도에 못지 않게―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이 숨어 있다는 것을. {) 앞의 책. 36쪽 인용.계몽이 신화로 퇴보하게 된 원인은 이러한 퇴보를 위해 고안된 민족주의, 이교적 또는 다른 현대적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직된 계몽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앞의 책. 52쪽 인용.아도르노 역사인식의 특징은 역사인식의 부정성이라는 기본 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의 필연을 받아들이면서 과거로 향하는 퇴행적이고 도피적인 사고를 용인하지 않는데 있다. 이것이 아도르노 사상을 낭만주의적인 도피심리와 구별시켜준다. 역사의 진행은 필연적인데, 불행의 씨앗은 인간이 자연종속성을 망각한 채 자연을 단순히 지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의 대립은 또한 자연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모든 생명체의 진정한 법칙인 자기보존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존재자체, 주체성자체가 원죄가 된다. 인간에게는 자연에 굴복 하든가 아니면 자연을 굴복 시켜야 한다는 두 가지 가능성만이 주어지게 된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쫓겨 위협적인 자연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투쟁하면서 정신 없이 자연지배의 길은 걷게 된다. 이제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은 깨어지고 만다. 이러한 자기보존을 위한 추구는 도구적 이성{) 도구적 이성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이성이 자기 유지의 도구로 전락한 상황을 지칭하는 개념 이다. 이성의 이념을 구상한다면 이성이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규제하는 것 이상을 성취해 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목적을 이해하고 이를 규정하는 도구이다 . 이러한 올바른 이성 개념에 비추어볼 때 도구적 이성은 개별 개인의 자기유지라는 파편적 이해를 위한, 반성되지 않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케 하는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은 목표 자체가 이성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앞의 책.메시스는 인식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적인 목표로서 객체를 주체의 실용적인 목적에 종속되는 대상으로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형상을 사용하는 미메시스는 대상에의 동화를 통해 실제대상을 만나지만 추상적인 개념 속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해진다. 신화는 모든 현상들을 의인화하는 표상세계를 구현하고 이 때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분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학문적 사고가 신화를 대체함에 따라 이러한 주객관계는 파괴되고 인식주체와 인식되는 객체사이의 균열은 영구화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힘이 행사되는 대상으로부터의 소외이다.개념적 인식에서는 특수자가 추상적인 보편성 속에 종속되어 내용적으로 규정될 것을 놓치게 된다. 외부세계의 대상을 파악하는데 기여하는 개념은 그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동일화하는 현상과 거리가 생긴다.보편개념은 그때 그때의 개별적인 특수한 범례들을 무차별하게 상위에 있는 類에 포섭해버린다. 언어적인 동일화시도는 항상 불충분하다. 모든 것을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평준화, 획일화시키는 추상화, 그리고 이 추상화가 봉사하는 산업의 지배아래 대중은 놓이게 된다. 사유의 보편성, 즉 개념영역에 있어서의 지배는 실제적인 지배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계몽은 모든 것을 물화 시킨다. 계몽은 예전의 부당한 불평등, 즉 매개를 모르는 주인의 의식을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보편적 매개, 즉 개개의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영구화한다. 인간은 실제적인 획일화를 강요당하며, 인간에게 자아란 좀 더 확실하게 획일화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강압을 분쇄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지 더욱 깊이 자연의 강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계몽은 자연을 탈신화화 했지만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물질생산은 본래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부터 그 자체 목적이 된다.이제 계몽은 신화와 뒤엉키게 되는 것이다.아도르노가 계몽을 전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계몽은 지배를 더욱서는 안되고 오직 부정적으로만 가능하다. 부정변증법은 개념 없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인정하는 철학이다. 모든 목적론적인 역사구성은 잘못된 현실을 이상적인 조화의 가상 밑에 숨기는 이데올로기라 비판받는다. 부정변증법은 변증법을 긍정적인 본질로부터 구해내고 어떠한 확정성도 남겨놓지 않으려고 한다. 모순에서 종합으로 가는 길은 긍정의 의혹을 받기 때문에 거부된다. 부정변증법은 부정과 안티테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앞의 책. 125∼127쪽 요약사고의 보편적 동일성의 기본전제는 지나간 것을 현재 속에서 확정할 수 있는 개별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나 통일적인 확고한 자아동일성은 역사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자기 자신과 개인적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결코 동일하지 않은 비동일성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자아동일성을 확립한 주체는 동일화시키는 개념을 통해 무정형한 현상의 흐름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사물의 동태적인 속성이 정적인 동일성의 개념장치 속에 맞추어지게 된다. 동일성의 원리는 자연을 정신에 환원시킨다. 이는 그 지식을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개념적 지식, 주관적 지식이 이미 전체이고 객관적이라 생각하며 물자체가 개념과 일치한다는 가상을 만들어낸다.이에 반해 변증법적인 사유는 객체를 주관성이라는 집 속에 밀어 넣지 않으며 객체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있은 그대로의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철학의 과제는 개념과 사물의 비동일성을 지각하면서 사물을 주체에 동일화함이 없이 사물의 자기동일성을 생각하고 사물을 시간의 대해 속에 묻힌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고 그 변화 가능성을 함께 반성하는 것이다. 이제 아도르노에게 전체는 비진리로서, 특수자의 권리를 찾아줄 유일한 가능성은 총체성의 카테고리 대신 현존하는 것에 대한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이다. 특정한 부정을 통해 나온 결과는 긍정적이거나 궁극적일 수 없다. 궁극적인 것은 다만 비판으로서의 특정한 부정 그 자체이다. 모순에 대한 지적에한다.
{¶부버의 생애와 저서Ⅲ. 부버의 만남의 교육1. 부버의 생애와 저서{) 강선보, 『마르틴 부버의 「만남」의 교육』(양서원, 1992), p.17∼58의 부버의 생애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1878년 2월 8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탄생했다. 그의 부모는 특별히 지성적이거나 종교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중산층의 유대인이었다. 3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14세때까지 조부모 슬하에 지냈다. 그의 조부모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조부 솔로몬 부버(Solomon Buber, 1827∼1906)는 히브리어 학자이면서 히브리 문학의 특수한 장르인 미드라쉼(Midrashim){) 문학적 해석과는 달리 성서 속에서 의미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 미드라쉬이다. 미드라쉬의 어 원인 다라쉬(darash) 는 조회하는 것(to inquire) 혹은 조사하는 것(to investigate)"을 의미 한다. 미드라쉬에는 할라카 지향의 미드라쉬와 아가다 지향의 미드라쉬의 두 유형이 있다. 전 자는 성서로부터 율법을 추출하고자 애쓰며, 후자는 윤리적·도덕적 함축을 탐색한다. 탈무드 와 동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집성되었다.-성서해석, 잠언 그리고 귀중한 전설의 독특한 혼합체-의 비판적 저서를 계속 출간할 정도로 그 방면의 권위자였다. 동시에 그는 하스칼라 운동(Haskalah Movement){) 히브리어 Haskalah는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뜻이다. 18세기에 유럽 중부에서 발생한 이 계몽운동은 오로지 종교적 탐구에만 빠져있는 유대인들이 세속적 탐구를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도록 촉진했다. 하스칼라는 유대인들이 탈무드와 성서에만 의존하여 탐구하는 것 을 지양하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유럽식 해방의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힘썼다. 이러한 세 속적 계몽운동을 따르는 무리들을 마스킬림(Maskilim)이라 부른다.의 뛰어난 학자였다. 솔로몬과 그의 부인 아델라(Adela)는 박식한 유대인이었다. 즉, 그들은 별다른 부담감없이 늘 토라렘 중심부의 시온이 라는 약속된 땅, 즉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 의 운동. (네이버 백과사전)에 가담하면서 유태 민족성의 근원인 유태교의 정신을 찾았고, 유태민족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싹텄다. 1916년 부버는 시오니즘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選民(선민)」(Der Jude)을 창간하여 1924년 폐간할 때까지 주필로 활약하면서 독일계 유대인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주의 구실을 했다.1920년 그는 로젠쯔바이크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유대인 성인 교육기관인 유대인개방학교(Freies Judisches Lehrhaus) 을 설립하여 1938년 그가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때까지 계속했다. 이 학교는 그 당시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유대종교, 역사, 신학, 성경, 히브리어 및 문학 등의 과목을 개설한 유일한 학교였다. 프랑크푸르트는 유대인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유대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유일한 장소로 기여했다. 이런 교육운동 외에도 그는 로젠츠바이크와 함께 구약성서를 현대 독일어로 번역했다.처음에 그는 독일 신비주의자와 동양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써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차츰 초기의 신비주의적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19세기의 사상가들 특히 키에르케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등의 영향을 받아 실존적인 종교 경험의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또한 그 위에 하시디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상은 더욱 고유한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런 계보로 1923년 「나와 너」(Ich und Du)의 사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이 책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서양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얇은 책에서 그는 자신의 성숙한 대화철학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라는 것이다. 부버의 주요 관심사는 이 세계에서의 인간의 전체적 상황이다. 인간은 여러 수많은 유형의 관계를 접하게 된다. 그 관계들은 매우 복잡해서 인간은 그 관 엿볼 수 있다. 그때 300명의 히브리 대학생들은 횃불행진으로 부버집까지 와서 그들의 존경심을 표했고, 그리고 부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해 7월에 에라스무스상을 받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여행했는데, 그 상은 유럽 사회의 정신적 통일에 기여한 자에게 수여하는 상이었다.별일 없이 잘 지내던 부버가 1965년 4월에 침대에서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주기적으로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임종이 다가왔음이 거의 확실했다. 1965년 6월 13일, 일요일 오전 10시 45분에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묘비에는 시편 제 3권 73편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나니 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부버는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침묵 했고, 그는 놀랄 정도로 안정 되었다. 그의 임종직후인 6월 14일자 뉴욕타임즈의 사설을 다음과 같이 그의 생애를 평가하였다.부버가 거듭 창조한 사랑은 실존적 신비에 이르는 열쇠이며 신성(神性)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는 모든 낱낱의 너를 통해 영원한 너를 접할 수 있다. 인간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 이외의 방법은 있을 수 없다.마르틴 부버는 유대인으로서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종교 사상가였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 마르틴 부버의 삶으로 인해 그가 없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준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부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부버 기념관이 히브리 대학에 설립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사상은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구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출판은 그의 그칠 줄 모르는 학문의 열정을 입증한다.이상에서 부버철학의 성립배경이 되는 사상적 편력을 그의 생애와 더불어 고찰하였다. 현대문명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제시를 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높이 평가받으며, 동시대 및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부버방관자·관찰자·조정자로서 세계와 관계하는 자는 나-그것 의 나 이다.그러나 나-너 의 세계는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의 너 는 뭇성질로 분해할 수 없는 전존재이다. 따라서 사람은 나-너 의 관계에서 서로 전존재를 기울여 참인격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관계는 직접적이며 상호적이요 근원적이다. 이러한 나-너 의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 곧 나 와 너 의 만남 이다. 이처럼 세계와 상호관계하는 자는 나-너 의 나 이다.그러므로 나-너 관계에서의 나 와 나-그것 관계에서의 나 는 서로 다르다. 나-그것 의 나 는 개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자기를 경험과 이용의 주체로서 의식하는 반면에, 나-너 의 나 는 인격으로 나타나고 자기를 종속적인 속격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주체성으로 인식한다.이처럼 부버는 관계의 개념으로 인간의 위치 및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참다운 인간 존재는 고립된 실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형성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부버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관계를 통해 그의 실존을 형성해 나가는 창조자로 파악된다. 즉 그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사상을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사실은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 으로 함축성 있게 표현하였다. 이처럼 그의 인간학이 인간의 전체성 에 관한 탐구이기 때문에 그의 교육론의 주조음도 학생의 전체성 에 관한 탐구, 즉 전인교육론이라고 볼 수 있다.3) 인간교육론부버의 교육관은 그가 행한 두 연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1925년에 하이텔베르그에서 열린 제3회 국제교육대회에서 아동의 창의력 개발 이란 제목으로 행한 연설과, 1939년에 텔아비브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교사대회에서 성격교육 이란 제목으로 행한 연설이 그것이다. 이것들에서 드러난 그의 교육관을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강선보,「마르틴 부버의 만남의 교육」(양서원, 1992), p.135∼143첫째, 아동을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지닌 하나의 현실(reality)로 본다. 고결하고도 무한한 가치를 지닌, 역사 창조에 이바지하는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전존재로 행동하는 자이며, 주어진 상황의 독특성에 조화롭게 반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우리가 바라는 인간상인 것이다.부버는 현대의 위시상황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인간과 인간간의 참된 관계형성, 즉 만남 을 통해 회복하고자 했다. 그가 주장한 인격적 만남 에 의한 인간성 회복의 문제는 사람됨의 문제이며, 이러한 사람됨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에 현대의 비인간화된 교육마당에서 만남 이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철학적 인간학이 오늘날 더욱더 우리 가슴에 깊숙이 와닿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화 교육은 현대교육이 걸머져야 할 중대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4) 교사-학생 관계론{) 강선보,「마르틴 부버의 만남의 교육」(양서원, 1992), p.179∼192부버는 현대사회에는 비인간화의 문제가 있고 더 큰 문제는 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에 교육이 편승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같은 문제의식하에 그는 교육에 대한 인간주의적 접근, 그 중에서도 교사-학생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학생의 인간성(사람됨)은 인간적인 교사의 인간적인 교육방법에 의해 계발될 수 있다. 교육내용이 아무리 인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성이 결여된 교사에 의해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르쳐진다면, 학생들은 결국 비인간적인 어떤 것 을 학습하게 된다. 결국 인간화 교육은 인간적인 교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교사가 학생을 수단시하지 않고 인격적 주체로 파악하는 상호인격적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고 본다.그러기에 교사와 학생간의 참된 관계는 교육내용에 선행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버의 「만남」의 사상은 바로 교사-학생간의 관계 본질의 요약인 것이다. 모든 참된 삶이 「만남」이듯이, 참된 삶을 다루는 교육은 「만남」 그 자체여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부버는 여타의 실존주의자들과는 달리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를 중요시한다.그러면 부버의 「만남」의사상과 교육관에 투.
비연속적 교육패러다임~*선행되어야 할 과제*~실존주의자들의 주장의 특징을 알자!1. 체제성의 대비 개념인 개체성을 강조(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2. 지식뿐만 아니라 감정, 의지까지도 포함한 체험의 세계를 중시.3. 존재의 불합리성(불가피한 죽음, 불안, 우울 등)을 엄연한 사실로 인정.4.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의 자유와 결단을 촉구.5. (각자가 자유로운) 두 존재 사이에 공감적 참여 또는 만남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의미의 사회가 형성될 수 있다고 믿음.- 실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몇몇 대표적 인물로는 오래 전의 소크라테스, 아우구스티누 스, 파스칼, 니체 등이 있으며, 현대의 대표적 실존주의자로는 키에케고어, 하이데거, 야 스퍼스, 사르트르, 까뮈 등이 있음.- 그리고 교육(학)을 실존주의적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볼르노(O. F. Bollnow), 부 버(M. Buber) 등이 있음.(1)위기란 무엇인가?희랍어 Krisis에서 유래, 원래 결단(decision)과 판단(judgement)을 의미한다.실존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위기란 항상 가장 진지한 자세로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서, 그것은 궁극적 가치의 실현 또는 궁극적 가치에의 저항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것은 퇴보, 몰락, 죽음의 가능성을 내포하거나 아니면 구원, 치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볼르노(Otto F. Bollnow)도 이러한 관점에서 위기를 판가름이라고 보면서, 그 의미를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라고 풀이했다.(2)위기를 기회로..!두 갈래 길에서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위기적 상황이라면, 치유의 잠재성 또한 위기의 현실 속에 있으며, 정말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희망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위기의 심연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위기의 개념은 재앙 내지는 절망적인 파멸의 개념과는 구별된다. 즉 위기상황이라는 것은 반전을 위한 긍정적 기회인 것이다.(3)위기에 강한 에서 철저한 의심에 빠지게 된다. 위기 속에서, 그리고 위기 때문에 인간은 현실과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위기는 어떤 대처방안을 생성해내는 특징이 있다. 즉 포기하는 대신에, 의심을 극복하는 자는 '독창적인 힘'(original strengths)을 상기할 수 있으며, 그것을 이용해서 상황의 반전을 꾀한다.(4)신학적 관점으로써의 위기위기는 인간실존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즉 인간은 위기에 처해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비약적 발전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이전에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위급한 때에, '위기순간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적나라한 실제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5)역풍을 순풍으로 역이용할 줄 알자!위기 및 위기상황은 그 자체가 반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위기 및 위기상황이 반드시 끝장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위기에 대한 이 같은 긍정적, 낙관적 관점을 지닐 수 있겠다.(6)위기와 교육많은 학자들이 위기와 교육 간의 관계를 논의해 왔다. 이들은 위기와 위기상황을 인간과학의 한 탐구영역으로 보면서, 위기와 교육의 관련성을 논의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자신의 일상생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 개인적 위기(질병 등) 및 사회적 위기(전쟁, 기근 등)가 비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본 것이다.이들은 일상을 초월할 때, 극심한 정치적 격랑의 시기에, 그리고 실존적 분열의 시기에 인격의 심연에 이를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에서 학습이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위기에 대처하는 것' 이며, 교육은 위기상황의 사회 속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열려진 광장을 제공하므로 '복잡한 현대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7)위기상황에서의 교육 목도 감당할 수 있는 자,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한 인간의 영혼을 감지함으로써 영혼이 평온한 자,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견지함으로써 안정감을 가지고 현재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위협적이고 파괴적이고 무기력한 상황, 즉 불확실하고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다시 말해 위기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을 제공하는 힘을 발견해내는 것이 필요하다.(8)흔들리지 않는 안정성바로 자기 성찰이다. 자기성찰은 현실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기비판적으로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해야만 한다. 솔직한 자기성찰은 인간 삶의 시작이다. 즉 그것은 인간다운 길의 거듭남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하게 수행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 특히 개선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자기성찰의 과정은 그 시기의 지정한 상황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며, 삶의 깊은 내면에까지 이르게 해주며, 시람들 사이의 결속이 가능하도록 해준다.(9)위기와 관련된 교육적 표어- 위기가 곧 기회 이다.- 위기가 곧 교육적 기회이고 발전적 기회비연속적 교육패러다임 의 개념을 음미하여보자!1920년대까지의 교육은 인간 안에 부여되고 있다고 여겨진 창조적 능력에 대한 확신 위에 서 있었다. 이런 확신은 루소에서 대략 다음 세 가지 전제 위에 서 있었다.■ 그릇된 사회를 우리는 인간교육을 통해서 개혁할 수 있다.■ 교육은 내재적이며 본원적인 인간의 선을 계발하는 일이며, 또 그것은 조화롭게 계발될 수 있다.■ 이 내재적인 인간의 능력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같은 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요인을 제거해야 하며, 또 그것은 가능하다.-첫째는, 현대의 기술문명과 노동조건이 인간의 능력을 조화적으로 발전시키기에는 너무 부 정적 요인으로 대두되었다.-둘째는, 아동의 유전적 조건은 의도적인 교육적 정열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셋째는, 1954년 전후의 전란과 전쟁 등.=>현대의 상황과 모순되는 과거의 낙천적 교육관에 입각한 대전제를 점검하고 실존에 알맞은 새 교육관을 모색할 필요성 인식.볼르노(O.F.Bollnow 1903-1991) : 실존주의 사상을 교육학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학자.*교육사상 - 딜타이의 생(生)의 철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위에 형성된 것으로 이 두 입장에서 인간교육의 현실을 고찰코자 하는 동시에 교육과 철학을 강력히 결부시킬 것을 강조. *연속적인 교육관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기계론적으로 만드는 교육 과 유기론적으로는 식물의 성장을 기르는 교육 으로 비유* 만남이 교육에 앞선다 고 하는 교육이전에 만남 의 중요성을 강조함. 이는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마음 전체로 끌릴 때 비로소 교육의 터전이 이루어지며, 이 터전위에서 본래적인 의미의 교육이 전개될 수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 같은 만남 을 엄연한 사실로 많이 발견할 수 있다.(ex:플라톤의 소크라테스와의 만남, 베드로의 예수와의 만남, 이승훈의 안창호와의 만남, 그리고 김교신의 우찌무라와의 만남 등..) 이들의 만남은 참으로 경천통지할 인격적인 만남이었다. 이 영혼 대 영혼의 만남에 의해 새로운 인간, 즉 자신의 몫을 찾아 본래적인 자신의 될 인간이 탄생했고, 또 이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의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일은 이 같은 만남 자체는 미리 면밀히 짜놓은 조직적 교육, 즉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며 계속적인 교육의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직적 교육 이전에 인격적 믿음을 자아내는 만남이었다. 만남으로 해서 비로소 본래적인 자기를 각성시켜 자기가되게 하는 교육의 터전이 마련되었음을 말한다.계몽주의로부터 영향을 받는 기계론적 교육관(Mechanische Auffassung)과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유기론적 교육관(Organische Auffassung)으로 구분하고 있다.* 기계론적 교육관-기계론적 교육관은 교육자가 의도했던 목적과 목표에 따라 그에게 맡겨진 피교육자를 어떤 일정한 ex : 공장에서 장인이 물건을 만들어 내듯이 학생이라는 재료를 의도한 목표에 따라서 교사의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수공업적인 교육이해이다. =>기계론적 교육관은 교육을 적극적 형성 작용으로 본다.* 유기론적 교육이해-유기론적 교육관은 인간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목표를 지향하며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기대한다. 이 때의 교육이 갖는 의미는 「기르는 작용」으로 이해된다. (ex : 농부가 작물을 재배하듯이 학생 안에 내재된 고유한 가능성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교사가 보호하고 도와주는 과정으로 이해된다.)=>교육을 자연적 성장 과정에 있어서의 소극적 보호 작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이해는 교사가 적극적으로 학생을 만들어가든 혹은 소극적으로 학생의 고유한 가능성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든지 간에 공통적으로 점진적이며 연속적인 과정으로 파악된다. 볼르노는 이러한 공통점에 바탕에서 이들 두 근본적인 교육이해를 연속적인(stetige) 교육이해로 규정하였다.이에 비해서 실존철학에서는 삶의 과정을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과정으로 파악한다. 실존철학에서 실존은 삶 속에 언제나 일상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직 삶의 특수한 순간에만 참된 실존에 이를 수 있고 또 곧 사라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연속적인 과정으로 교육을 이해할 때 실존주의적인 인간이해는 교육 안으로 수용되기 힘들다. 그렇지만 볼르노는 실존적인 순간이 갖는 삶에 있어서의 전환과 급격한 성숙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특징들을 교육적인 사건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비록 실존에 이르는 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고 따라서 연속성에 바탕한 계획의 수립과 실천이 불가능하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성숙과 전환은 교육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특징에 주목해서 볼르노는 기존의 연속적인 과정으로만 교육을 이해하는 것에 대비해서 비연속적인 교육의 형식을 제안하였다.비연속적 교육관 - 자연적으로 주어진 .
★ 강 조(EMPHASIS)문장의 특정어구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강조구문(어구)을 사용하거나 어순을 도치하는 방법이 있다. 그럼, 강조구문이나 강조어구를 사용하는 경우와 어순을 도치하는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강조구문(어구)를 사용하는 경우1. 동사의 강조 : do(does, did)를 동사의 원형 앞에 쓴다.do(does, did)에 강세를 두고 로 해석한다.* Do be quiet ! She does love you.I do hope you will get better.He said he would come and he did come.2. (대)명사의 강조1 : 강조하고자 하는 말의 바로 뒤나 문장의 끝에 재귀대명사를 둔다.* He himself did it. Have some cake ! I made it myself.I saw Miss. Lee herself. I myself saw Miss. Lee.2 : : 명사 바로 앞에 the very를 쓴다.* He is the very man that I am looking for.This is the very novel that I want to read most.3. 동일한 어구의 반복에 의한 강조* She waited and waited, but he did not appear.I tried to solve the problem again and again.It is getting hotter and hotter.4. : 강조구문1 평서문의 강조문장안의 S, O, 부사(구) 등을 강조하여 의 뜻.강조하고자 하는 말을 It is[was] 와 that 사이에 둔다.* John broke the window yesterday.→ It was John that broke the window yesterday. : John강조→ It was the window that John broke yesterday. : the window 강조→ It was yesterday that John broke theuhgt the novel ?Who was it that discovered penicillin ? It was A. Fleming.3 의 강조 : It is not until ∼ that S + V …Not until ∼ that do(does, did) + S + V … : not …until ∼의 강조구문* We do not know the value of health until we lose it.= It is not until we lose it(health) that we know the value of it(health).= Not until we lose it(health) that do we know the value of health(it).5. 비교급, 최상급의 강조1 비교급의 강조 : : much, still, even, far(훨씬), any(얼마간, 조금은), no(조금도∼아니다),a little, a lot 등이 자주 쓰인다.* She is much older than you.Jim came home far earlier than usual.A fresh and merry heart is far better than money.2 최상급을 강조1 최상급 앞에 much, by far, by no means (결코 ∼하지 않다),not ∼at all (조금도 ∼않다), the very 등을 쓴다.* He is much the cleverest boy of them. 단연코This dictionary is much the best. = This is the very best dictionary.2 뒤에 possible, imaginable 등을 쓴다.* It was the most wonderful scenery imaginable.6. 부정문(어)의 강조 : 부정어가 있는 문장에 at all, in the least, whatever 등이 첨가되면 부 정어가 한층 강조된다., 등의 형태로 부정의 의미를 강조* I am not sle조동사가 없는 일반 동사인 경우: 로하여 do[does, did]를 주어 앞에 놓는다.2 be동사, 조동사인 경우 : * Not a single word did he say. ← He did not say a single word.Never have I seen such a big dog. ← I have never seen such a big dog.Little did I dream that I saw him here . ← I little dreamed that I saw him hereNo sooner[Scarcely, Hardly] had he seen me than[when, before] he ran away.← He had no sooner[Scarcely, Hardly] seen me than[when, before] he ran away.2 : : , 일반 동사라도 do[does, did]를 쓰지 않음* Down came the rain. ← The rain came down.Down he fell. ← He fell down.3 목적어의 강조 : 목적어는 강조되어 문두에 오더라도 보통 도치가 일어나지 않는다.단, 부정어를 수반하면 반드시 도치된다.* This trip to Chicago, I will never forget.Not a word did I say.4 보어의 강조보어를 문두에 두어 강조할 경우 주어가 명사이면 , 주어가 대명사이면 어순이 된다.* So great was his astonishment that he was speechless.← His astonishment was so great that he was speechless.Happy are those who are always in good health.← Those who are always in good health are happy.2. 관용적 도치(문법상 도치)1 의문문, 기원문, 감탄문* When did you come here ? What a prettit to you.= Did I possess the book, I would lend it to you.If it were not for your help, I could not finish the work.= Were it not for your help, I could not finish the work.2 가정법과거완료 : 의 had를 문두에 써서 문장이 도치가 되어 가 된다.* If I had tried harder, I could have passed the exam.= Had I tried harder, I could have passed the exam.If I had not met her them, I would have lost my way.= Had I not met her then, I would have lost my way.3 가정법미래 : 의 should를 문두에 써서 문장이 도치가 되어 이 된다.* If it should be fine tomorrow, I will play tennis.= Should it be fine tomorrow, I will play tennis.If you should want to contact me, call this number.= Should you want to contact me, call this number.6 as를 사용한 양보절 = (though + S + V ∼>* Young as he is, he is very careful.Woman as she is, she is very bold.Rich as she was, she was not contented.7 대명사 so를 사용한 구문1 : (so=also, too)* I am tired. - So am I. (= I am tired, too)I like classical music. - So do I. (= I like classical music, too)You must go to bed now. - So must you.He .* I am your friend," said Tom. → Tom said, "I am your friend."I am your friend," he said. → He said, "I am your friend."⑽ The + 비교급 …, the + 비교급 ∼ : * The more we have, the more we want.The sooner(younger, more), the better.The higher we go up, the colder it becomes.The harder we study, the more ignorant we find ourselves.★ 생 략(OMISSION)글의 전후관계로 보아 문중의 일부를 생략하더라도 이해에 지장을 주지 않을 때 동일어구의 반복을 피하고 글의 문장을 간결하게 하기 위해 일부를 빼서 간결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Mary has washed the dishes, Mary has dried them, and Mary has put them in the cupboard.→ Mary has washed the dishes, she has dried them, and she has put them in the cupboard.→ Mary has washed the dishes, has dried them, and has put them in the cupboard.→ Mary has washed the dishes, dried them, and put them in the cupboard. (가장 자 연스럽다)▷ 생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일어난다.1. 반복되는 어구의 생략 : 반복을 피하기 위해and, but 등위절에서 주어, 동사, 혹은 가 반복되면 뒤의 것은 생략한다.1 주어의 생략* The girl got hurt and (she) went to hospital.He made a speech and (he) was applauded by the audience.2 동사의 생략* Some we사절의
◐ 일제의 한국강점(韓國强占) ◑일본 제국주의는 1905년 11월 강압과 기만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을 강요한 이후 한국 강점을 위한 책동을 계속하였다. 일제는 1907년 6월에 일어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려 갖은 압박을 가하였다. 같은 해 7월 6일 이등박문은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을 불러 "황제가 한일협약을 무시하고 일본에 대해 공연히 적대 행위를 함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귀하는 수상인 책임을 지고 황제에 주문(奏聞)하여 처결을 촉구하라"고 명령했다.이 같은 사주를 받은 이완용은 황제를 물러나도록 할 공작을 개시하여 황급히 전 대신을 불러놓고 경운궁에 가서 황제에게 어전회의를 강청하였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은 황제에게 "이번 일은 그 책임이 폐하에게 있으므로 친히 동경에 가서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장곡천 주둔군사령관을 대한문 앞에 맞아 면박(面縛)의 예를 하라"고 윽박질렀다. 황제는 "경은 누구의 신하냐"고 화를 내며 퇴장하였다.7월 12일 일본 정부는 '제국 정부는 현하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국 정부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한다. 그 실행에 대해서는 실지의 상황을 참작하여 행함이 필요하므로 이를 통감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의 대한(對韓) 방침을 결정하여 이등박문에게 보냈다. 이완용은 다시 7월 16일 밤 입궐하여 황제에게 일본 외무대신이 서울에 오기 전에 황태자에게 선양하여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7월 20일 고종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되었고, 일제는 7월 24일 새로운 협약을 강요하였다.협약의 주된 내용은 통감의 권한 강화, 사법권의 일본에의 위임, 한국 군대 해산, 일본인 차관 채용 등으로 사실상 일본의 지배를 확립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인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협약의 본문에는 구체적 내용을 명시하지 않고, 한국에 대한 침탈 내용을 자세히 규정한 부속각서를 따로 만들고 이를 극비에 붙이는 교활한 태도를 보였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금지하는 신문지법,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도 강제로 시행케 하였다. 이들 법령을 근거로 의병에 대한 토벌 작전, 계몽 운동 단체에 대한 해산,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에 대한 폐간 등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체의 교육기관, 신문, 잡지, 서적이 모두 불태워지고 폐지되어 한국인은 암흑의 지옥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직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7월 31일 통감은 일본으로부터 증원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비밀리에 한국 군대 해산의 조칙을 발포케 하였다. 이 조칙은 '짐(朕)'이 명한다 하여 한국 황제의 뜻인 듯 위장했지만 실제는 통감과 매국노 이완용 등이 합작하여 조작한 것이다. 이 같은 사태에 당하여 서소문 안에 있던 한국군 시위보병 제1 연대 제1 대대 대대장 박승환은 일제의 만행에 항의하여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란 내용의 짧은 유서를 남기고 39세로 자결 순국하였다. 군대 해산은 의병 항쟁에 불을 붙이는 작용을 하였다.일제는 전국을 뒤흔든 의병 전쟁에 대항해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투입하여 무자비한 초토화 살육 작전을 전개하며 고비를 넘겨갔다. 이와 함께 일본 본국 정부는 1909년 7월에 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탈취하고 군부를 폐지했으며, 나아가 [한국 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극비에 만들어 내각 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1910년 5월 30일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한 테라우치 마시타케(寺內正毅)는 한국 강점 책동을 급속도로 진행시켰다. 그는 1910년 7월 전국을 사실상 계엄 상태로 만든 뒤, 8월 22일 사기와 강압으로 합병 조약을 성립시켜 8월 29일 뒤늦게 공표하였다.이 같은 일제의 강압적 노예화 책동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 전체는 한결같이 줄기찬 항행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부의 친일 매국분자들과 그들이 만든 괴뢰 단체들은 일제에게 나라와 민족을 헌납하기에 앞장섰다. 특히 일진회는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친일 여론 조성 책동 등에 앞장서 왔으며, 1909년 12월 4일에는 '합방(合邦)만이 살 길'이라는 내용의 소위 '합방선언서'를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렇게 날뛰던 일진회도 강점 직후인 1910년 9월 12일 '집회·결사 엄금'이라는 구실로 해산시켜 버렸다.◐ 일제강점(日帝强占)에 대한 항쟁(抗爭) ◑러·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적극화됨에 따라 우리 민족의 항쟁도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서울의 언론들은 항일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민중들의 집단 시위와 철시(撤市) 투쟁이 이어졌다. 정부의 관료 중에 민영환, 조병세 등은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또한 전국 각지에서는 무장단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적극 전개하는 의병 부대들이 속속 결성되었다. 이들 의병 부대들은 일본군과 군사 시설, 그리고 친일 세력들을 응징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항일 의병 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서울 및 지방 도시의 자산가, 지식인, 개명 관료, 개신 유학자들은 교육과 언론 활동, 산업 진흥을 통해 민족의 문화·경제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 회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이들 계몽 운동가들은 당시 세계 질서가 치열한 힘의 각축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한편 침략의 원흉들을 처단하는 의열(義烈) 투쟁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특히 장인환·전명운 의사, 안중근 의사의 투쟁은 큰 영향을 끼쳤다.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기 위해 외교 고문으로 데려왔던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일본의 한국 통치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고, 기자 회견을 청해 "한국 황실과 정부는 부패했고, 국민들이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는 나라다"라는 등의 망언을 서슴치 않고 내뱉었다. 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던 한국인 교포들은 격분했으며, 그들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모여 대표자를 뽑아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대표들이 찾아가 기사의 취소를 요구했으나 스티븐스는 오히려 "한국에는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등박문 같은 통감이 있어 한국인들이 행복하다"는 등의 망언을 계속하며 취소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표들 중 한 명이 그를 구타하고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육탄전이 벌어졌고, 혼비백산한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떠나기 위해 오클랜드 정거장으로 향했다. 스티븐스가 역 구내로 들어서자 전명운 의사가 먼저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이었다. 그러자 장인환 의사가 3발을 쏘아 2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관통했고, 나머지 1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장인환 의사에 대한 재판은 280일 동안 계속되었고 통역은 신흥우가 맡았다. 전명운은 무죄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등 살인범으로 25년 징역형을 받았다가 10년으로 감형되어 1919년에 출옥하였다.1909년 10월 26일 연해주 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러시아 정부와 회담을 갖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사살하였다. 일제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사형 당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최후 진술 및 옥중 기록을 통해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 중국, 일본이 대등한 상태에서 협력해야 하며, 일본이 침략으로 동양의 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에 그 하수인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며 이는 당연하고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4촌 동생이던 안명근 의사도 항일 투쟁을 적극 전개하였다.우리 민족의 줄기찬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우리 민족을 강점하는 지경에 이르자 국내외 각지의 동포들은 그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국내에서는 매천 황현이 망국(亡國)의 상황에 처해 자결로써 그 부당성을 만천하에 알렸다.국외에서는 1910년 8월 17일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던 교포들은 일제강점의 부당성을 각 국 정부에 호소하기 위해 성명회를 결성하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는 1910년 9월 1일 일제강점을 부인하며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공동 대회를 개최하였다. 각 지방 동포 10명마다 대표 1명씩을 소집하여 왜적(倭敵)을 성토하고 강점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연합통신으로 발표하였다. 이는 민족 전체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독립 선언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교육 ◑교육은 인간 개인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체제 유지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일제는 “내선일체”의 기조 위에서 교육목표를 조선의 “황민화”에 두었다. 강점직후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에서의 교육목적을 “충량한 국민” 양성에 두었다. 이것은 일제의 교육정신이 담긴 “교육에 관한 칙어”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조선인에게는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을 중심으로 약간의 전문적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교육만 허용되었다. 보통교육을 통하여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고 실업교육을 통하여 하급지식을 갖춘 직업인을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