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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일합일적 사유모델의 이해
    천일합일적 사유모델의 이해목 차Ⅰ. 서 론Ⅱ. 천인합일론의 인식론적 고찰Ⅲ. 천인합일론의 사유모델1. 천인합일론과 천인상분론2. 천인감응론 (제한적 대립과 제한적 통일)Ⅳ. 결 론참고 문헌Ⅰ. 서 론역사의 구분은 대부분 서양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예컨대 마르크스적 관점에서는 역사를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로 발전 등으로 구분한다. 이를 ‘역사 발전 단계론’이라 한다. 이 역사 발전 단계론을 기준으로 중국 역사를 어디에 둘 것인지 대해 20세기 초반까지 활발한 논쟁이 있었다. ‘모든 땅은 왕의 소유’라는 왕토 사상에 의거해 중국의 농민은 토지를 갖지 못했다고 주장이 주를 이뤘다. 이 같은 역사는 헤겔에 의해 체계화되었고, 그들에 의하면 중국의 역사는 서양의 고대 사회 이전에 해당된다. 이러한 시각을 흔히 ‘서양 중심적 사고’라고 말한다. 역사의 기준을 ‘토지의 사적 소유권’으로 삼는다면, 색다른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서양에서는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사적 소유권이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이미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소유의 의미를 넘어, 유학의 발전으로, 나아가 국가 운영의 한 축으로 귀결됐다. 지주地主는 생활이 안정화되고, 이 조건을 기반으로 자식을 교육시켰다. 이렇게 교육받은 이들이 유학자로 성장했고, 이들의 지식은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았다. ‘학자이면서 지주이자 관료인 계층’이 생겨난 것이다. 이 계층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황제지배체제 밑에서 권력의 한 축을 차지했다. 이 같은 관계는 서로 견제하고, 연대하는 구조이다. 불안정 속 안정된 구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유생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귀족의 힘을 약화하고자 황제를 두둔한다. 또 한편으로는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귀족과 일시적 연대를 맺기도 한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동중서를 대표로 한 한대漢代의 유생들은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제시했고, 이 사상을 기초로 천인감응天人感應 이론을 체계화한다.Ⅱ. 천인합일론의 인식론적 고찰동양의 사고는 이론과 실천, 물질과 정신의 영역이 일원론적이고 지행합일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고 부른다. 천인합일 사상은 한대 동중서의 사유에서 최초의 형태를 찾는다. 그러나 그것이 동양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사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서양의 르네상스 시기에도 천인합일과 유사한 경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인상분天人相分 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당시의 철학적 문제의식과 오늘날의 문제의식을 사실적, 비판적으로 규명하고 양자의 연결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펑유란馮友蘭은 중국 철학에서 인식론이 발전되지 못한 이유를 ‘我(개인, 주관)’와 ‘非我(우주, 객관)’의 분리에서 찾았다. 절대 왕정과 절대 인격신에게서 해방된 유럽 근대사회와 비교할 때, 동양의 근대사회는 여전히 혈연 중심적인 ‘가족’ 사회였다. 인식론이 발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공동 생산과 공동 소비의 경제 체제에서 개인적 주장은 불필요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니 말이다.Ⅲ. 천인합일론의 사유모델1. 천인합일론과 천인상분론인류는 생존을 위해 자연에 순응하기도 하고,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 관계는 양방향이었다. 노동을 통해 생산 수단이 창조되었고, 개발된 생산 수단에 의해 인간의 인식이 발전했다. 생산 수단의 사용은 인간이 자연과의 ‘종속적 관계’를 극복하였음을 의미한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를 ‘종속성의 원칙’이라 칭하고, 중국인의 의식 세계는 아직도 이 원칙에 지배를 받아 개체의 자유가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대漢代의 중국은 이미 고도의 문물을 창조하던 사회였고, 주관과 객관의 분리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천인합일의 자연관에서도 이 분리는 전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동중서는 ‘자연과 인간을 하나 天人一也’라고 주장했을까? 그 이유는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가 사회의 특징인 황제지배체제의 확립과 정치 권력의 토대인 ‘가족 중심적 토지 사용권’을 위하여 천과 인은 분리이면서, 미분리라는 이중적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천인상분天人相分의 순간을 내재하고 있는데 그 역시도 마찬가지다.2. 천인감응론 - 제한적 대립과 제한적 통일동중서가 살았던 약 2000년 전 중국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당시를 선명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그때의 사회적 문제와 관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유생들은 하늘의 뜻 자체를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天의 운행 방식인 음양오행의 상징체계로서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天이 자신의 뜻을 음양을 통해 드러내고, 인간은 그 음양을 밝혀 오행을 분별함으로써 천과 인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이災異의 변화로서 음양의 운행을 해석하는 동중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동중서는 이 같은 사상 기반으로 천과 인간의 본질이 같다고 상정했다. 이것을 동류상동同類相動, 동류상응同類相應이라고 한다. 동중서의 천인상응天人相應은 천과 인의 질적 동일성에 근거한 것이며, 동일한 종류는 상호 호응할 수 있는 관계라고 해석한 것이다.
    인문/어학| 2022.05.13| 3페이지| 1,000원| 조회(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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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철학사와 청대의 실학사상
    중국철학사와 청대의 실학사상목 차Ⅰ. 서 론Ⅱ. 청대 실학의 특징1. 왕부지王夫之의 기氣철학2. 경전經典으로의 회귀 ( 황종희黃宗羲와 고염무顧炎武)3. 경세치용과 실사구시 ( 안원顔元과 대진戴震)Ⅲ. 고증학考證學과 공양학公羊學Ⅳ. 결 론참고 문헌Ⅰ. 서 론명왕조(1368~1644, 276년)말에 극심한 사회적 혼란은 기존의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양명의 주관성 강조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것이 객관적·역사적 사실에 대한 강조였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강조는 청대 학자들의 기본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청대 철학을 대표하는 실학 즉 경세치용(經世致用:학문은 반드시 세상을 경영하는 데에 유익해야 한다)과 실사구시(實事求是:실증에 근거하여 참되 지식을 탐구한다)의 정신, 그리고 고증학의 번창은 역사적 사실의 강조와 경전의 중시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Ⅱ. 청대 실학의 특징1. 왕부지王夫之의 기氣철학왕부지(王夫之,1619~1692, 403세)는 장재張載(1002세)의 기철학을 계승한 대표적 학자다. 왕부지는 기철학을 중심으로 성리학과 심학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주자학은 리와 기를 존재론적으로 나누고(理氣二元論), 리만이 순수한 선이며 기는 선과 악이 혼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부지의 생각은 달랐다. 리가 기 자체의 원리이므로 기 자체는 선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의 성을‘기질지성氣質之性’과‘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분리하고 본연지성만 순수하게 선하다는 주자의 관점에 비판을 가한다. 사람의 성은‘기질지성’일 뿐이며, 기질지성은 자체로 선하다는 것이 왕부지의 입장이었다. 왕부지는 특히 심학에 대해서는 불교와 같은 이단으로 취급했다. 유학 본연의 자세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을 외면하고 마음공부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이다. 왕부지는 왕양명(550세)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대해서‘행과 지의 구분을 없애고 지 안에 행을 포함시켜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구체적인 인간, 구체적 사물에 관계맺기(行)를 통해서만 그 안에 있는 왕부지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왕부지의 생각은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 추상적인 원리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공리공담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 경전經典으로의 회귀 ( 황종희黃宗羲와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1610~1695, 412세)와 고염무(顧炎武,1613~1682, 409세)는 이후 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염무는 청대 고증학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다. 황종희와 고염무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경전을 중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황종희는 유학이‘천지를 경영하기 위한’ 실질적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황종희는 유교경전(六經)이 ‘모두 도를 게재한 서적’이고, ‘모두 실질 정치와 일상생활의 실행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까닭에 황종희는 성인의 도가 담겨있는 경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전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해석뿐만 아니라 경전이 실행된 당시의 문물제도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나 문자의 훈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전과 객관적·역사적 사실을 더욱 중요시한 것은 고염무였다. 고염무의 저서《일지록日知錄》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은 박학어문博學於文, 행기유치行己有恥, 호고민구好古敏求로 대변된다. 세 구절 모두《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박학어문은 문물에 관해 널리 배우는 것을, 행기유치는 부끄러움을 알아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을, 호고민구는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염무는 성현의 도는 오직 경전에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고염무도 황종희처럼 경전에 나오는 성현의 도는 실제로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경학을 강조한 고염무는 자연스럽게 경전 탐구를 위해 고증을 중시하는 수순을 밟는다. 실제로 그는 전국을 여행하면서 경전에 나와 있는 지리, 역사, 제도, 문물 등을 직접 고증하기도 했다. 또 경전이 쓰여진 시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후대에 잘못 고쳐 쓴 내용을 바로잡기 위해서 음운의 변천을 연구하기도 했고, 석경石經과 비문碑文을 연구명시대 학자의 어록에 매달린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황종희와 고염무는 모두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리가 기에 내재한다는 기 중심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에 언급할 안원과 대진에게도 나타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청대 중기까지의 학풍은 기본적으로 리의 독립적 실재성을 거부하고 기 중심으로 리를 통합하려는 기철학적 경향성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3. 경세치용과 실사구시 ( 안원顔元과 대진戴震)흔히 청대(1636~1912, 276년) 철학을 경세치용과 실사구시의 사상이라고 칭한다. 이를 대표하는 청대의 인물로 안원(顔元,1635~1704, 387세)과 대진(戴震,1723~1777, 298세)을 들 수 있다. 안원은 송나라 멸망 원인이 주자학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실천 없이 독서와 명상에만 치우쳐 이민족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원은 송대 유학에 대해 이전의 불교와 도교의 집대성자이지 유학의 정통 계승자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병폐는 육구연(883세)과 왕양명(550세)의 심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의 반성으로 안원은 실천 우선의 학문을 강조한다. 안원이 보기에 주공과 공자(2573세) 시대의 교육은 삼물三物로 대표된다. 삼물은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를 일컫는다. 이 가운데 육행과 육덕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예가 먼저라고 생각하여, 이를 학문과 교육의 핵심이라고 여겼다. 안원은 ‘기가 우주의 근본’이고 ‘리는 기와 하나로 융합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형形과 성性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안원에 의하면 눈은 기질로 이루어진 형태(形)이고 눈의 본성(性)은 시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눈 없이 시력만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안원의 생각이다. 이러한 안원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주자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눈과 시력의 관계로 본다면 주자의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의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좋은다. 따라서 좋은 것을 보는 실천을 쌓아 나가야 비로소 눈도 시력도 선하게 된다. 안원의 주장은 실천중심 사상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대진戴震은 청대 고증학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대의 중심인물이었다. 대진 역시 기본적으로는 고증 학자였지만 다른 고증학자들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대진도 리理 개념에 대해 송대 유학자 특히 성리학자들을 비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음양오행은 모두 도道의 실체였다. 음양오행은 기氣이므로 기가 도의 실체라는 말이다. 대진은 기의 변화(氣化)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는데, 기의 변화에는 일정한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필연성이 바로 리理다. 따라서 리는 사물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대진戴震의 주장은 철저하게 객관적 사실에는 객관적 원리(理)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의 생각을 통해 당시 고증학자들의 기본적인 학문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실사구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육서(六書: 한대 학자들은 한자의 구성과 사용 방식을 여섯 가지 유형으로 요약하여 육서라고 한다)를 통해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또한 글자의 의미를 정리하여 경전의 의미와 통하게 하는 훈고, 경전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여 잘못된 곳을 교정하는 교감校勘의 방법에 대해서도 비교적 정확한 표준을 제시하기도 했다.Ⅲ. 고증학考證學과 공양학公羊學황종희, 고염무의 뒤를 잇는 인물들이 고증을 강조하면서 그리고 청? 왕조의 비정치적 학문 선호, 대대적인 출간 사업과 맞물리면서 전형적인 고증학이 성행하게 되었다. 건륭제(乾隆)와 가경제(嘉慶)의 시대를 황제의 명칭을 따서 건가시대(乾嘉時代, 1736~1820, 84년)라고 부른다. 이때가 청대 가운데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앞서 언급한 대진도 이 시대의 대표적 학자였다. 그런데 대진을 제외한 건가시대의 학자들은 순수한 고증학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황종희, 고염무의 학문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 과제나 적극적 현실 참여보다는 고증학 자체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乾嘉時代) 고증학의 정신은 과학 정신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진이 제시했던 선입견의 배제와 객관적 사실의 중시, 귀납적 학문 방식은 과학정신과 매우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이 때문에 근대 중국의 변법파 학자인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 149세)도 그의《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에서 건가시대 고증학의 정신이 과학 정신을 대표한다고 말하고 있다.가경제 이후 도광제(道光帝, 1820~1850) 시기에 이르면 중국은 다시 혼란기로 접어든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성향이 짙은 개신교가 중국에 전파되고, 아편鴉片무역이 성행하여 결국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로운 경향의 학문이 성장하는데 바로 공양학의 등장이 그것이다. 공양학의 특징은《춘추》의 해설서인 , , 가운데 공양전을 매우 중시한다. 공양학이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고문이었던 것에 반해 은 금문金文이다. 이 때문에 청대 공양학은 ‘금문공양학’이라고도 불리며 ‘청대 금문학’이라고도 불린다. 과 이 역사적 맥락에서 《춘추》를 해설한 반면, 은 《춘추》를 정치적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공양학의 목표는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히는 데 있었다. 공자가 《춘추》에 남겨 놓은 상징적인 말(微言)에서 후대를 위해 남긴 위대한 의미(大義)를 밝힌다는 뜻이다. 정치적 예언을 강조한 공양학의 학풍에서 청말 변법자강 운동의 주역이자 공자교 운동을 주창했던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 164세)를 배출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말에 캉유웨이康有爲와 함께 최후의 공양학자였던 랴오핑(廖平,1852~1932,170세)은 고문학(고증학)과 금문학(공양학)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랴오핑에 의하면 고문학자들은 주공周公을 원조로 하고 주례周禮를 위주로 한다. 또한 공자가 장년기에 주장했던 내용을 중시하고, 경經은 역사책을 윤색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금문학자들은 공자를 원조로 하고 개혁을 주장하며 공자가 말년에 주장했던 내용각한다.
    인문/어학| 2022.05.13| 3페이지| 1,500원| 조회(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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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철학사상과 사회진화론의 수용의 논고
    중국철학사상과 사회진화론의 수용의 논고목 차Ⅰ. 서 론Ⅱ. 사회진화론1. 사회계약론2. 진화론3. 사회진화론Ⅲ. 중국의 사회진화론 수용Ⅳ. 중국 사회진화론 수용의 한계Ⅴ. 결 론참고 문헌Ⅰ. 서 론사회진화론은 이론적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진화와 사회진화를 같은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라 할 수 있다.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불만과 위기감을 느낀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거의 전면적으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사회진화론에 대한 고찰이다. 사회라는 개념은 동양의 전통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19세기 후반 일본의 지식인들에 의해 서양의 ‘society’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계약론과 진화론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둘째 중국의 사회진화론 수용 양상을 살펴보겠다. 셋째, 중국에서 사회진화론 수용의 한계와 아나키즘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결론 부분에서는 사회진화론과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에 의해 새롭게 조망 받는 사회생물학을 살펴보고,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해 볼 것이다.Ⅱ. 사회진화론1. 사회계약론서양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근대적 사고방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권위가 낮아졌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의 권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되면서 개인주의가 출현하고, 심지어 무정부주의까지 생겨났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주장과 칸트가 “너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이다.”라고 한 말에서 근대라는 개념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까지 인간을 神의 피조물로 보았던 기독교 중심의 사고가 점차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 개념의 변화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자행된 면죄부 판매와 王權神授說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고 새로운 개념의 정치?사회이론을 요구하게 되었다. 홉법 집행권(로크의 경우), 또는 자신의 인신과 소유물 및 이에 대한 권리와 힘(루소의 경우)을 계약으로 설립되는 국가에 상호 동등하게 전적으로 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사회계약은 인간의 이성 능력에 근원을 두고 이루어진다. 이처럼 이들에게 있어 자유는 중세적 神이나 王權神授說에서 벗어난 자유이며, 국가란 이성을 가진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계약 때문에 구성된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필자는 중국―조선을 포함해서―에서 전통사회가 무너지고 근대 사회를 지향하던 시대에 사회계약론자들이 말하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개인’이 중국에도 존재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고자 한다.2. 진화론다윈은 종의 기원 과 인간의 유래 를 통하여 인간은 다른 동물에서 유래되었지 특별하게 창조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그가 제시한 진화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식물 개체군의 모든 개체는 야생이든, 가축이든, 재배식물이든 간에 변이가 일어나는데 이들 변이의 일부는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 둘째, 만약 자연상태의 개체군이 일정 기간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면 번식기에 도달할 수 있는 개체보다 더 많은 자손이 태어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특정한 변이는 그 변이를 갖춘 개체에게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줄 수 있으며[자연선택], 이러한 개체는 자손에게 그들의 형질과 변이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지질학적으로 오랜 시간을 거치며 이러한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새로운 종의 진화가 일어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갈 것은 진화론에서 항상 언급되고 있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초기 다윈에게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찰스 다윈을 진화론의 시조라고 보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종의 기원 이 출판되기 이전인 19세기 초중반의 유럽 지성계에서는 생물의 진화는 부인할 수 없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스펜서의 진보의 법칙과 원인 은 다윈의 종의 기원 이 출판되기 2년 전(1857)에 나왔려고 했다. 브로카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여성보다 남성,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보다 비범한 사람들, 열등한 인종보다는 우월한 인종의 뇌가 더 크다.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지능의 발달과 뇌의 용적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관계가 있다.브로카는 1880년에 죽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뛰어난 뇌의 목록 작성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사람의 몸의 크기를 재는 인체 측정학은 오늘날에는 과학의 최첨단을 달리는 인기 분야가 아니지만, 19세기에는 오랫동안 인문학을 지배했고, 지능 검사가 인종, 계급, 남녀 등을 부당하게 비교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머리뼈 측정, 즉 머리뼈의 여러 부분의 크기를 재는 학문을 가장 큰 주목과 경외를 받고 있었다. 이 영역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인자였던 폴 브로카는 파리 대학교 의학부의 외과학 교수로, 그의 주위에는 문하생과 아류들의 일파가 모여들었다. 브로카의 수제자였던 폴 토피나르(Paul Topinard, 1830~1911년)는 시대가 흐르면서 남녀의 뇌 용량에 차이가 벌어진 것은 우월한 남성과 열등한 여성에게 각기 다른 진화적 압력이 가해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생존을 위해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남자, 내일에 대한 모든 우려와 책임을 짊어지는 남자,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항상 능동적인 남자는, 그가 보호하고 부양하는 여자, 정신적 부담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남성과 섹스를 하는 등의 수동적인 역학을 주된 임무로 삼으며 늘 앉아서 일하는 데 익숙해진 여자보다 더 큰 뇌를 필요로 한다. 1879년에 브로카 진영에서 여성 차별주의자의 기수였던 구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 1841~1931년)은 이러한 자료를 이용해 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파리 사람들처럼 가장 지적인 인종에서도 뇌의 크기가 가장 잘 발달한 남성의 뇌보다는 고릴라에 더 가까운 여성들이 많다. 이러한 열등성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더구나 이러한 적자생존의 진화는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는 것으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러한 생존경쟁의 장을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인간을 통하여 식물계의 일각에 작동된 우주 에너지, 즉 원예사의 에너지는 자연상태를 통해 작동된 같은 우주 에너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갈리는 어느 곳에서나 이와 비슷한 대립 관계가 존재한다. 자연상태 자체 안에서만 보더라도, 생존경쟁이란 바로 생명계 안에서 우주 과정의 결과물들 상호 간에 일어나는 대립 관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공’과 ‘자연’을 대립시키고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이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대립과 정복은 자연계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정원사의 비유는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식민지가 형성되는 과정과 정원이 만들어지는 과정 사이의 유비 관계는 매우 교훈적인 함의를 제공해 준다.……그들 자신은 적대적인 옛 왕국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자신의 정원을 지키는 정원사였다. 크게 보아서, 식민지란 옛 자연상태에 도입된 복합적인 조직체이며, 따라서 정복 아니면 사멸이라는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 던져진 경쟁의 주체인 것이다.……이렇게 문명이 진보하는 단계마다, 식민지 개척민들은 점점 더 자연상태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가며, 그들의 삶은 인위적인 상태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관리자는 이러한 변화를 진작시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착민들의 용기와 근면함과 협동 정신을 얻어 내야 한다. 한 집단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구성원의 비율이 증가하는 데 따라서, 그리고 이와 같은 성격이 결핍된 구성원의 비율이 감소해 가면서 밝아질 수 있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다시 말해 관리자는 선택을 통해 이상적인 집단을 지향할 것이다. 정원사로 비유되는 식민통치자는 미개사회를 문명사회로 변화시키는 주체이며 이는 자연적인 것을 넘어 일종의 사명으로 인식된다.적합한’ 자로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지난 400~500년 동안 영국인들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본성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설사 우리의 국민성에게 어떤 눈에 띄는 영향을 미쳤다면(그랬을 리는 없지만), 그 영향은 사회 내에서의 투쟁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의 군사적인 충돌이나 산업 전쟁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작동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부적격자’에서 영국인은 제외되며 이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 흑인, 아시아인, 아메리카 인디언. 아랍인, 심지어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까지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아시아 문화의 심오한 깊이나 정교함은 백인 인종차별 주의자에게는 몹시 곤혹스러운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특히 중국 사회는 유럽 문화가 아직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무렵에 이미 고도로 세련된 상태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종은 이 풀기 힘든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아시아인의 지적인 힘은 인정하지만, 그 능력은 혁신적인 천재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남의 것을 잘 흉내 내는 능력에 불과하다는 식의 설명을 붙인 것이다. 종합하면, 사회계약론에서 계약의 주체는 로마 가톨릭으로 대변되는 神과 왕권신수설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이성적 개인으로 정의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접목하여 스펜서는 인간의 범위에서 유럽인만을 사회 주체로 인정하고 있으며 헉슬리는 유럽인을 야만 사회를 개척하는 정원사에 비유하면서 그들만이 야만 사회를 문명사회로 이끌 책임을 지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잔인한 폭력마저도 용인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은 유럽 백인 성인 남성이었으며 더 좁게는 영국인에 한정된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야 흑인 노예무역, 아편정쟁,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유대인 학살, 그리고 근대화의 모범생인 일본에 의해 자행된 난징 대학살의 논리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Ⅲ. 중국의.
    인문/어학| 2022.05.13| 9페이지| 1,500원| 조회(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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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명학과 동양철학사상사 - 육구연의 사상적 논의와 주자학의 대립적 해석을 중심으로 -
    양명학과 동양철학사상사- 육구연의 사상적 논의와 주자학의 대립적 해석을 중심으로 -목 차Ⅰ. 서 론Ⅱ. 육구연의 사상 논의Ⅲ. 양명학의 발흥Ⅳ. 주자학과 양명학의 대립Ⅴ. 결 론참고 문헌Ⅰ. 서 론성리학에 반대한 심학의 등장 (주육논쟁) 과 함께, 성리학 이후의 사상의 흐름은 ‘내’와 ‘외’의 대립 및 투쟁사로 여길 수 있다. ‘내’의 입장에서 ‘외’를 비판한 학술 및 사상 활동의 출발점으로 육구연의 심학을 들 수 있다. 육구연의 심학은 ‘내’의 우위를 확고하게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이후 주자학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심학의 사상체계를 수립한 양명학의 효시가 되었다. 송학의 발당에서 육구연의 의의는 주자학의 이론 체계가 지닌 문제점을 간파하여 현실적으로 성리학이 야기 할 수 있는 논리적 모순을 예견하였다는 점에 있다. 육구연은 주자가 도를 초경험적인 실체로 귀속시키는 것을 비판하였다. 육구연에게 도와 사는 나눌 수 없는 것이며 도는 결코 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기이원론과 ‘성즉리’설은 활발하고 자유로운 ‘심’을 자칫 규범과 형식의 객관 타당성을 정당화 시키는 보수주의의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성을 갖게 된다. -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의 출발하였다. 주자학의 당면한 이론적 실천적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규범과 형식의 객관 타당성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성(性)’의 유일 절대성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을 규범과 형식의 ‘외’로부터 가져와 본래의 위치인 무형 및 무적의 의미와 원리의 영역인 심의 ‘내’에 안치시키려는 것이 심즉리였다. 결과적으로 심학은 주관 지향적이며 주자학은 객관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 지향적 사상은 절대성을 부인하고 상대성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Ⅱ. 육구연의 사상 논의육구연은 리를 형이하의 기의 밖에 있는 초경험적인 실체로 귀속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도를 마음 한가운데에 두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마음을 가지고 있고 마음에는 모두 이 리를 갖추고 있으니 마음이 바로 리이다.. 우주가 바로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우주이다. 인식론과 방법론에서 간결한 공부를 주장하며 분석을 배제하고 전체를 통괄할 것을 강조하였다. 절대 사를 논하거나 말단적인 것을 논하지 말고 오로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육경이 모두 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본래의 마음을 인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육경의 권위를 제약하고자 하는 탈권위적인 성격을 지님과 아울러 자아의 견해를 최고의 준칙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주관적 독단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Ⅲ. 양명학의 발흥1. 양지양명학은 왕양명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철학 사조로서 명대 중엽에 일어났다. 양명학의 발생은 중기의 사회 역사적 상황과 주자학의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1) 역사적 상황: 명대 중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혼란기였다. 지배계급은 정치적 특권을 이용해 대규모 토지침탈과 점유를 늘려갔다. 토지를 빼앗기고 세금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유랑민이 된 농민의 숫자가 많아지고 농민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2) 주자학의 변화: 주자학이 점점 보수화 되어 형식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학술 사상이 팽배해졌다. 왕양명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주자학의 변화의 원인이 학술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보편적 ‘리’와 주체의식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뜻했다. 왕양명은 보편의 ‘리’가 나의 마음과 결합 되어 내재적인 도덕의식으로 전환되어야만 비로소 주체의 행위를 규범에 잘 들어맞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주체 의식을 ‘양지’라고 하였는데 ‘양지’는 이미 개체속에 내재해 있을 뿐 아니라 보편적인 규범을 구성하는 것이었다.2. 지행합일과 치양지당시 명대 사회는 상품 경제의 발전으로 이미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었다. 자본주의적인 요소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으로 당대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이 전통적인 삼강오륜과 도덕이었다. 이익을 다투고 부를 추구하는 사회풍조는 상층의 사대부들한테도 영향을 미쳐 조정과 시정을 막론하고 이익추구를 유교적 윤리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고 왕양명은 주체가 일단 선천적인 양지를 자각하기만 하면 외적인 이익 추구에 동요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지만 후천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선천적인 양지는 종종 나쁜 습관에 가려짐으로써 주체의 행위에 내적인 제어 작용을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자연히 “어떻게 하면 선천적인 양지에 이룰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왕양명은 행(行)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지행합일설에서의 행은 주체의 실체적 실천이다. 이것의 다른 표현이 치양지로서 몸으로 힘써 행하여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양지에 진정으로 이르는 과정으로 표현된다.3. 심즉리왕양명은 주자학이 ‘심’과‘리’를 둘로 나눈 것을 의심하였다. 심과 리를 둘로 나눈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는 심 위에서 리를 구한다는 것으로 천리를 심체 위에 있는 초경험적인 본체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왕양명은 리에 의한 장애라고 불렀다. 둘째는 보편적인 리를 주체 의식과 분리하는 것이다. 주자학의 가장 큰 결함이 바로 세계를 이원화하고 리의 외재적 강제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왕양명은 심과 리를 육구연과 같이 하나로 본 것이다.4 만물일체상기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의 논의를 연결하면 당연히 마음속의 양지는 외부의 리와 일치하게 됨으로서 외부의 모든 사물은 마음으로부터 인식되는 하나의 물(事)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왕양명은 외부 사물들이 ‘심’의 작용에 의해서만 의미가 있다는 만물일체설을 주장하게 된다.Ⅳ. 주자학과 양명학의 대립《대학》은 《예기》중의 한편으로 수록돼 후대에 전해져 오는 저작으로 주자에 의해 사서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대학》이라는 경전이 체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정이천, 정명도 형제와 주자의 작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남겨진 《대학》이라는 저작은 주자의 재정리 작업을 거쳐 태어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유학사 속에서 《대학》이 지니는 위상은 주자가 확정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발흥한 신유학, 이른바 송학의 형성과정에서 주자의 《대학》이 끼치고 있는 영향은 상당했다. 하지만 왕양명은 주자에 의해 개조된 《대학》을 부정하고 원래의 《대학》판본을 원본으로 인정함으로써 《대학》에 대한 명대 유학의 내부의 논의를 촉발시키게 된다.1. 주자의 격물치지와 왕양명의 성의주자는 격물치지라는 단계만 있고 그에 대한 설명구가 존재하지 않는 원래의 《대학》을 불완전하다고 보고 이 부분을 134자나 써 넣어서 보완해 놓는다. 이는 격물치지부터 평천하에 이르는 수양과 행위의 논리를 명실상부하게 그 첫머리에 놓여있는 격물치지를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의도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왕양명은 이것을 원본 《대학》의 기조를 흔들어 놓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왕양명은 격물치지 대신 ‘성의’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대학》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학에서의 지식과 행위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학》에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8조목이 있다. 주자는 수양이라는 측면에서 공부를 수행해 나가며 진리를 파악하는 지식론의 측면에 집중하는 반면, 왕양명은 진리를 드러내는 심성론의 측면에 치중한다. 주자의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관찰함”을 통해 “지식을 확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나의 지식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사물에 직면하여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함을 뜻한다. 하나하나의 사물들의 이치를 계속 수렴해 들임으로써 내 마음속에 본구되어 있는 이치는 조금씩 자각의 영역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자가 생각했던 진리의 확장이라는 것은 이런 단계를 거치는 작업이었다. 반면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있고 이 지각 능력은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인 양능이라는 것에 의해 주도된다고 믿었다. 때문에 양명이 생각하는 진리의 확장이라는 것은 양능이 제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할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양능의 방해물은 욕망이므로 자신의 마음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 지식 행위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왕양명은 ‘격물’을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만드는 것(正)이라고 생각했다. 왕양명의 ‘양능’이 드러내 주는 지식은 이치로서의 지식이고 도덕적 원리로서의 지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적 실체로서 마음속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행위의 동기로서 주어진다. 이로써 “지식은 행위의 시작이고 행위는 지식의 완성이다”라는 왕양명의 선언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22.05.13| 4페이지| 1,500원| 조회(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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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과 중국의 만남
    서양과 중국의 만남목 차Ⅰ. 서 론Ⅱ. 서양속의 중국Ⅲ. 근대유럽과 중국문화와 철학의 수용1. 중국학자 박학자(Polyhistor)2. 마테오 리치의 타협적 전도정책과 전례典禮논쟁3. 라이프니츠의 단자론과 유기체적 자연관4. 중국사상에 대한 관용과 불관용5. 중국철학에 대한 관념론적 편견Ⅳ. 결 론참고 문헌Ⅰ. 서 론중국철학전통을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동중서(董仲舒, 기원전179~104)로 대변되는 ‘天人感應論’에서 그 대표적 사유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天人感應·天人相應의 사유는 漢대에 돌출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대의 종법사회에서 발전된 천天과 인人의 밀접한 인과관계에서 원형이 나타났으며, 자연관을 중심으로 볼 때 도가적 사유 역시 원형적 천인합일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인합일사상(Univeralismus)은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신체와 사회, 그리고 우주를 서로 상응하는 세 가지 요소로 파악하는데, 이러한 유기체적 세계관이 중국의 전통적 자연관에 준 영향은 지대하다. 1950년대 중반의 Needham도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최초로 중국의 자연관을 ‘유기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분석하였다. 주자학은 유·불·도사상이 혼합 융합되는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 신유학 등의 이름으로 불린 주자학의 엄격주의는 ‘중세적’ 사회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정신의 우대와 육체의 멸시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의 중세시대에도 통용되는 윤리였다. 서양 중세기독교의 사회적 역할과 전통 중국사회에서의 유학의 역할은 동일한 것이었다.Ⅱ. 서양속의 중국16세기말에서 17세기 사이 동서양이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른다. 이 시대는 근대 초 중국의 사상이 서양에 전해질 때 중국선교사China-Mission가 매개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17세기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들이 유럽에 전한 보고서와 여행기는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유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원인도 있고, 또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지적 분위기있다. 서양에 소개되었던 중국사상이 전달자였던 서양의 눈을 통해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보편과 특수는 결국 개별 속에 매개되어 인간에게 인식된다. 유럽인이라는 개인에게 특수하게 다가왔던 중국은 인간의 해방과 복지를 자각하고 있던 유럽의 계몽주의적 인간관이라는 보편의 지평에서는 역시 하나의 개별을 의미했다. 중국과학기술사분야에서 선구적 연구를 펼쳤던 니덤Joseph Needham의 표현을 빌자면 ‘ 서양’이라는 강과 ‘중국’이라는 강이 ‘근대’라는 바다에 합류하였고, 각각의 강은 상호배타적이 아닌 일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서 중국의 여러 철학사상은 그 자체로 소개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16~17세기의 종교적 열정에서 또는 19세기 산업화가 진척되는 정도와 함께 제국주의적 팽창과정 속에서 재해석 되었다. 중국선교사 특히 예수회의 활동과 예수회와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교단 사이의 이해대립은 근대유럽에서의 중국문화 전반 그리고 중국 철학수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Ⅲ. 근대유럽과 중국문화와 철학의 수용1. 중국학자 박학자(Polyhistor)17세기 예수회 소속의 중국선교사들이 유럽에 전한 보고서와 여행기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사회적 방향을 초래하였다. 지구상의 발견과 더불어 진행된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세계 각국의 언어, 역사, 그리고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쏟았던 당시의 지식인을 박학자Polyhistor라 부른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중국과 중국철학은 ‘중국전도’라는 시대적 조건에서 수용되었고, 여전히 르네상스적 분위기가 강했던 예수회 신부는 귀족적이며 인문주의적인 중국의 사대부를 통해 그들과 상응되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와의 교류가 필요하였고 또 그들과 어느 정도 정서적 친화성을 갖고 있던 신부들이 관심을 보였던 중국철학은 儒家이론이었다. 직업적 전문성Professionalism보다 교양취 중국어를 훌륭히 구사하였고 중국의 고전을 철저하게 검토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과 수학, 지도 제작에 관한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중국에서 마음껏 펼쳐 나갔다. 물론 이것은 중국 황제와 여러 고위관리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 유가사회에 접근할 때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을 주요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과학 학문을 통한 전도정책’ 이라고 칭한다. 당시의 서양의 선교사들은 모두 빼어난 과학적 지식 이를테면 수학, 천문, 측정, 지도제작, 지질, 화약, 무기제조 실력 등을 소유한 사람들이 뽑혀서 중국에 파견되었다. 알려진 것처럼 당시의 유럽은 과학혁명의 시기였다. 예수회 신부들이 유럽인들의 과학체계의 일정부분을 설명해 주긴 했지만, 중국인 대화 상대자들은 그것이 창조주인 유일신의 존재 필연성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회 신부들을 존경하지는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사대로 그리고 중국인들은 중국인들대로 상대방을 이상한 미신을 숭상하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로 대변되는 예수회의 선교정책은 ‘보유론(補儒論, The Accommodation of Christianity to Confucianism)’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보유론의 핵심은 가톨릭교리가 유가의 가치관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가이론을 보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유가의 이론이 기독교의 이론과 흡사하므로 양자는 상호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유가가 기독교를 배척할 근거가 없으며 수용·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예수회는 유가와 마찬가지로 도가 특히 불가를 민간신앙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폄하하였지만, 도가와 불가가 기독교 전파에 있어 강력한 경쟁자임을 알았다. 유가와 함께 공식적으로 도가와 불가에 대한 대립적 입장을 공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회의 르네상스적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의 정통적 전례典禮인 하늘숭배(祭天), 공자숭배(祀이런 이유에서 마테오리치의 후예들은 유학의 ‘변형되기 이전의 흔적’을 중국고전에서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주역周易》은 이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서적이었다. 중국의 경전은 이때부터 서양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유가의 경전번역은 16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노장老莊의 도가경전은 19세기에 비로소 완역되었다.3. 라이프니츠의 단자론과 유기체적 자연관라이프니츠 (Leibniz, 1646~1716)는 20세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전 생애에 걸쳐 중국과 관계를 맺었다. 라이프니츠와 중국의 만남은 동서 문화 교섭사와 비교철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르네상스적 세계관, 근대적 낙관주의, 초기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라이프니츠는 모든 민족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근본철학사상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라이프니츠의 지평은 순수한 이론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 사회 참여 행위 속에 있었다. 실제로 그는 당대에 철학자이기보다 외교가, 수학자, 자연철학가, 궁중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성찰은 이른바 ‘단자론’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살아있는 거대한 유기체로 여겼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단자’라는 개념을 개발한다. 단자는 ‘실체’를 의미하며, 그 본질적 특성은 바로 ‘힘’이라는 것이다. 단자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구조’로 이해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구조는 각각의 부분들이 하나의 연관 속에 결합되어 모든 가능한 상호 작용하는 조건과 관계의 총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실천의 삶속에서 라이프니츠는 중국과 만났고, 중국의 전례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마테오 리치의 중국 접근방식을 적극 찬성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중국에 관해 유일하게 간행된 「중국의 새로운 소식」의 서문에서 ‘보유론補儒論’적 관용을 위해 전례논쟁에 가담한다고 말한다. 또한 수많은 중국선교사와 편지왕래를 통해 중국사상에 담겨진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이 편지에서 이진법적 체계에 의한 64괘 卦해석이 등장하는데 라이프니츠가 주역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판정이 내려져서 타협적 전도방식이 공식적으로 불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로마의 결정은 곧 바로 중국내 기독교 전도 허용의 철회로 이어지며, 긍정적이며 환상적인 중국상과 중국 철학 수용은 이제 역행하기 시작한다. 중국이라는 개별의 특수성을 인정하였던 예수회 리치의 관용((Toleration) 과 중국의 개별성을 거부하는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의 유럽 중심적 불관용(Intoleration)의 사이의 갈등 속에서 중국사상은 유럽에 소개되었다. 또한 당시의 유럽 사회 발전과 맞물려서 유가의 정치사회 이론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에 의해 조화롭고 목가적으로 이해되었다. 계몽 군주 강희제는 유럽의 절대 왕정의 모범으로 이해되었다. 당시의 청조 강희제와 건륭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역설적으로 예수회의 수도회 활동은 루터식의 종교개혁에는 반동적 입장이었으나, 중국이라는 특수 관계에서는 근대적 입장을 취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관용을 유감없이 실현하려 노력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국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던 라이프니츠와 프랑스 계몽주의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기도 하다.5. 중국철학에 대한 관념론적 편견중국인의 학문적 사고 능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다시 말하면 중국인들이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킬 수 없는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철학자는 헤르더(Herder, 1744~1803)와 헤겔(Hegel,1770~1831)이었다. 이들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진보적인 성향을 띠는 것으로 찬사를 받아왔던 중국인은 이제 역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19세기 초 중국철학사는 헤겔에 의해 철학사에서 제외되기에 이른다. 헤르더와 헤겔은 중국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되는 핵심적인 가설을 내 놓았다. 첫째는 아시아 문명 특히 중국 문명의 불변성不變性이며, 둘째는 그 지배 구조의 전제專制적성격(Oriental Despotism)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중국인의 무능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인문/어학| 2022.05.13| 5페이지| 1,500원| 조회(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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