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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뒤르껭의 집단적 의식의 내면화란 무엇인가
    ◈ 뒤르껭의 ‘집단적 의식의 내면화’란 무엇인가?⇒ 이기적, 반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집단적 의식을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그를 사회적 존재로 형성하는 과정을 말한다.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을 가장 정확하고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은 ‘어린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 사회화’라는 정의이다. 이는 ‘이기적, 반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집단적 의식을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그를 사회적 존재로 형성하는 과정’을 가리킨다.교육은 사회 속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사회가 존속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사회와의 관련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교육을 이해하는 것은 곧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사회’는 개인들이 존재하는 소멸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계속되며 지역의 변동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세대의 소멸을 초월하여 영속하면서 세대와 세대를 결속시켜 주는 도덕적 인격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회’는 ‘집단적 의식’ 또는 ‘집단 수준의 의식’에 의하여 규정된다.집단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내용의 총체이며, 따라서 교육을 통하여 개인이 습득해야 할 정신적 내용의 총체이다.(뒤르껭의 저서 ‘교육과 사회화’에서는 이 집단적 의식이 ‘집단적 개념과 정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사회 또는 집단적 의식은 개인을 초월한 그 자체의 실체로서 존재하며 그것은 그 구성원인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개인은 사회의 일방적인 영향력을 거의 수동적으로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는 집단적 관념과 정조의 분위기 속에 묻혀서 살고 있다. 교육의 실체가 근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집단적 관념과 정조’이다.Q. 만약 개인이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회 또는 집단적 의식을 수동적으로 내면화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면, 개인은 견딜 수 없는 폭군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A. 그렇지 않다.- 사실에 있어서 개인의 그 복종은 개인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을 통하여 집단적 영향이 우리 각자에게 형성해 주는 새로운 존재는 우리 각자가 될 수 있는 최상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서 교육(즉, 사회화)의 책임을 맡은 부모와 교사의 권위 문제가 있다. 이기적, 반사회적 존재를 사회적 존잴 변형시키는 데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강요가 불가피하게 요청되며, 이 강요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 일을 담당한 사람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의 효과는 부모와 교사가 아이에게 사회에 대한 복종과 의무를 정정당당하게 강요하는 데서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교육에 있어서의 부모나 교사의 권위는 그 개인적 업적이나 자질에 의하여 보상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업무를 위임한 사회에 의하여 보장된다. 이 점에서 부모나 교사의 권위는 성격상 성직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성직자는 자신을 초월하는 위대한 도덕적 인격체(즉, 사회)의 대행자이며 신의 해석자 이듯이, 교사는 그 시대, 그 국가의 위대한 도덕적 관념의 해석자이다.그런데 뒤르껭은 교과수업과 그 밖의 사회화의 구분이나 관련에 관하여 전연 언급하지 않으며, 오히려 교과수업을 통하여 전달되는 ‘기본개념’이나 ‘지식에의 갈증’은 사회가 우리 각자에게 형성해 주는 ‘모든 좋은 것’의 한 부분인 만큼 그것의 전수는 집단적 의식의 내면화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Q. 개인이 집단적 의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A. 후세대의 입장에서 짐작해 본다면, 번스타인의 ‘언어사회화 이론’과 유사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번스타인의 이론은 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을 검증 가능한 형태로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번스타인의 이론은 언어가 사회구조를 영속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여기서 사회구조라 함은 영국의 계층조직(중류계층과 노동계층)이라고 불리는 두 계층의 특이한 생활 방식과 문화를 일컫는다. 한 계층에서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구어양식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감정의 전달방식을 통하여 그 계층의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수해 주며, 이점에서 언어는 번스타인의 자신의 용어로, 사회적 유전인자를 담고 있다. 대중어적 어법(상스러운)과 공식어적 어법(점잖은 말씨)은 노동계층과 중류계층의 특이한 세계관과 생활방식을 반영하며 그것을 다음 세대로 영속화하는 수단이 되는 이론이다. 따라서 ‘제도화된 행동에는 그것과 일관된 정신적 요소가 내재해 있으며 제도 안에서의 삶은 구성원으로 하여금 정신적 요소를 내면화하도록 한다.’는 것이다.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한 사회(또는 문화권) 안에서의 삶은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사회 안에서의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동은 그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에서의 삶이 총체를 이루는 한 제도적 의미 또한 총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하는데, 여기서 제도적 의미의 총체란 제도에 내제해 있는 정신적 요소 또는 뒤르껭이 사회적 동질성의 근거라고 본 ‘집단적 의식’, 도는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문화’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제도 속에서 삶을 살 때, 그리고 삶을 이루는 여러 가지 행동을 할 때, 개인은 비록 제도 속에 내재해 있는 의미 또는 정신적 요소를 언어로 명문화하여 진술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정신적 요소를 행동으로 표현하며, 행동을 통하여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또한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적어도 그 의미 있는 측면에 있어서는, 일체가 제도화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행동의 원천은 수행자가 개인인 것과는 달리 제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학| 2006.06.27| 3페이지| 1,000원| 조회(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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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교육의 목적은 ‘주어져’ 있는가 아닌가?
    ◈ 교육의 목적은 ‘주어져’ 있는가 아닌가?(공학적 개념에서는 이를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어떤 방향으로 행동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는 이미 주어져 있으며, 교육은 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서 출발한다.‘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교육의 정의는 곧 ‘조작적 정의’로 볼 수 있다. 조작적 정의는 ‘한 개념이 관찰되는 사태를 정의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정의에서 조작은 ‘계획’ 또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계획’ 또는 ‘교육 프로그램’은 교육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변화’, 즉 ‘인간행동의 변화’가 관찰되도록 사태를 마련하는 일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활동이 교육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활동(즉, 교육 프로그램 또는 조작)이 의도하는 인간 행동의 변화가 실지로 관찰 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그 변화가 실지로 관찰되면 그것은 교육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조작적 정의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경 과학적으로 의미 있게(그것이 길러졌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교육은 참으로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되려고 하면, 인간행동의 변화를 실지로 일으켜야 하고 또 일으킨 변화를 명백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의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는 말하자면 이중의 의미에서 ‘조작적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먼저, 인간 행동 그 자체가 조작적으로 정의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변화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변화를 위한 실증적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데에 필요하다. 이 실증적 프로그램 자체가 하나의 조작이며, 교육이라는 활동의 의미가 바로 이 조작에 의하여 파악된다.공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있으며, 이 점에서 공학의 핵심적 개념은 ‘의도적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룩하기 위한 실증적 활동이다. 교육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든지,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반드시 결과를 이루기 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교육이 의도적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다른 공학들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교육에 이러한 공학적 측면이 있다는 사실, 교육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모종의 ‘의도적 변화’를 위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일체의 교육은 공학적 시각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범모 교수의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는 그러한 공학적인 시각에서 파악되는 교육, 즉 교육의 공학적 개념을 나타낸다. 이렇게 교육을 공학적 개념으로 파악할 경우, 공학의 일반적 특징은 교육을 보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학의 일반적인 특징으로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공학은 ‘목적’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사나 토목기사들이 ‘목적(건강한 상태, 좋은 다리)’이라는 문제에 관해 논의한다면 그것은 이미 결정된 목적을 전문적으로 상세화하는 정도일 것이다.정범모 교수는 이른바 ‘좋은 교육과 나쁜 교육’ 문제에 대해 견해를 보임으로써 공학적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범모 교수는 가치관에 따라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길러내는 교육은 따라서 좋은 교육, 나쁜 교육이 된다고 하였다. 정범모 교수는 이 문제를 변화 자체의 과학적 문제라기보다 변화시켜야 할 것의 ‘가치관’의 문제라고 하였다. 이 ‘가치관의 문제다’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들 중 한 가지는 ‘어떤 방향으로 행동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는 교육에서 이미 주어져 있으며, 교육은 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한다’는 것이다. 정범모 교수는 ‘교육이론에 관한 한, 교육의 이념이나 향방의 결정은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과학적인 교육이론 외에 속하는 규범적, 표의적인 진술에 의한 사고가 결정해 주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과학적인 이론’으로서의 교육목적 이론은 주어진 이념이나 향방에 따라 변화시켜야 할 인간특성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데에 그 임무가 있다.
    교육학| 2006.06.27| 2페이지| 1,000원| 조회(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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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고립된 경험과 대립되는 듀이의 용어를 찾고, 그 의미를 설명
    ◈ 고립된 경험과 대립되는 듀이의 용어를 찾고, 그 의미를 설명하라.⇒ 고립된 경험과 대립되는 듀이의 경험은 이차적 경험이며, 하나의 경험, 활성적 경험, 경험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대개, 인간의 감각이나 내성을 통해 얻는 행동 또는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 시간의 흐름에 따른 행동 및 과거의 나열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듀이가 생각하는 경험은 이것과 의미상의 차이를 가진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경험은 듀이가 언급하는 ‘고립된 경험’에 가까운 것이다. 이 때 말하는 고립된 경험이란 지식의 주입, 단편적 지식의 암기, 단순한 기능적 훈련 등과 같이 단편적이고 구획적인 경험을 말한다. 때문에 고립된 경험을 ‘메마른 경험’, ‘비활성적 경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면, 듀이가 말하는 경험은 총체적인 것을 말한다.듀이의 교육이론의 핵심은 바로 ‘경험’이다. 그러나 이 때 그가 말하는 경험이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나 과거의 나열이 아니다. 듀이는 진보주의 교육자이며 학생 개인을 중시했다. 때문에 일반적인 지식이나 생각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닌, 성장을 돕기 위해 경험의 계속적 재구성을 제시했다. 경험의 재구성이란, 여러 가지 경험을 제공하거나 자발적 활동 참여를 위한 유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판적 사고과정을 통한 것을 말한다. 이처럼 대립되는 경험(총체적 경험과 고립된 경험)에 대한 내용 및 이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첫째, 듀이는 경험을 상호작용을 통한 ‘이차적 경험’이라고 하였다. 그는 덩어리째 존재하는 막연한 경험(일차적 경험)에 반성적 사고를 개입시킴으로서, 보다 정돈된 이차적 경험을 성립시킨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상호작용의 과정을 말한다. 결국, 인간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전의 경험을 확대시킴으로써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둘째, 듀이는 경험을 ‘하나의 경험’이라고 하였다. 반성적 사고에 의한 이차적 경험이 성립되어 그 내용이 제대로의 과정을 따라서 기능을 발휘한다면 하나의 완전한 경험이 된다. 하나의 절대적인 경험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서로 교차하는 개별적인 경험들이 있고 각각의 경험은 내적 복합성과 통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다원주의를 가정한 총체주이라고 보았다.셋째, 듀이는 경험을 ‘활성적 경험’이라고 하였다. 경험은 목적을 지닌 경험이며, 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 문제사태가 발생된 경험이다. 지력은 문제사태를 타개하거나 회피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을 생산하는데, 지력이란 그 자체 속에 자기를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힘으로 경험의 성장은 지력에 의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력은 하나의 전체로서 진행되는 구체적인 경험을 의미하는 활성적 경험에서 작용하는데, 이러한 지력이 작용하는 경험이 본연의 활성적 경험이다. 경험은 기억 속에 혹은 의식에 주어진 것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실험적 노력이 오히려 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하였다. 즉, 앞을 내다보고 미지의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그런 경험이 살아있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교육학| 2006.06.27| 2페이지| 1,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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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피터즈에 따르면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은 공학적 개념에서의 교육의 목적과 어떻게 다른가? 평가B괜찮아요
    ◈ 피터즈에 따르면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은 공학적 개념에서의 교육의 목적과 어떻게 다른가?⇒ 피터즈에 따르면 교육의 목적은 규범적, 인지적, 과정적 기준을 충족시켜 가치 있는 활동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으로 사람들을 입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공학적 개념에서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두 가지 유형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 각각의 내용과 방법으로 교육을 할 때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에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차이가 생길 것이 예상된다고 하고 ,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모습의 인간을 기르는 일을 동일하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근본적인 것이라고 하자. 공학적 개념의 정의인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것에 의해서는, 내용과 방법이 인간행동의 변화를 초래하는 데에 효과를 가지는 한, 위의 두 경우를 차별한 근거가 없는데 차별한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위의 두 경우를 동일하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가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정의에 구애를 받지 않을 때이다. 그리하여 교육이 목적에 대하여 중립적이라는 사실은, 공학적 개념에 구애되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공학적 개념에 근본적인 애매성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된다.피터즈의 교육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는 윤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어떤 측면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가, 거기서 논의되는 문제는 어떤 것들이며 그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가에 있다. 윤리학적 논의는 ‘마땅하다, 옳다, 바람직하다, 가치 있다, 좋다’등을 특유의 개념으로 하는 실제적 논의의 일종이며 과학적 논의와 구별되는 특유의 논의방식 또는 절차가 있다. 교육에 윤리학적 논의가 끼어드는 측면은 크게 보아서 내용과 방법의 두 가지 이다. 교육에서 무슨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특유한 윤리학적 개념으로 논의되어야 하며, 이 점에서 그 두 가지 측면에 윤리학적 논의가 끼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의 가치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이러한 것이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기본전제가 되어 있다.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은 교육내용이다. 교육방법상의 원리들, 즉 자유, 평등, 인간존중 등은 교육과 관련하여 특수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말하여 그것들은 교육 이외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관련해서도 논의될 수 있고 또 논의되고 있다. 교육내용의 문제, 즉 무엇이 가르칠 만한 내용인가 하는 문제는 유동 교육에만 관련되는 문제이다. 이것은 곧 교육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교육내용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을 시사한다.피터즈는 윤리학적 관점으로 교육을 ‘문명된 삶의 형식에로의 성년식’이라고 정의하였다. ‘문명될 삶의 형식’이라는 표현 이외에도 ‘가치 있는 삶의 형식’, ‘공적 유산’, ‘가치 있는 활동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 ‘분화된 사고의 형식’,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활동의 틀’ 등의 표현은 문명된 삶의 형식의 동의어이거나 문명된 삶의 형식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된 삶의 형식은 여러 가지 표현이 의미하는 내용을 포괄적으로 지시하고 있다.피터즈는 정범모 교수의 정의와는 달리, 그의 교육의 개념을 한 가지 정의로 요약하여 진술하고 시종 그 정의를 해설해 나가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교육은 그 개념 안에 붙박혀 있는 세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치 있는 활동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으로 사람들을 입문시키는 성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치 있는 활동들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으로 사람을 입문시키되, 그것이 교육의 개념에 논리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세 가지 기준은 첫째, 교육은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함으로써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규범적 기준, 둘째, 교육은 지식과 이해, 그리고 모종의 지적 안목을 길러주는 일이며 이런 것들은 ‘무기력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인지적 기준, 셋째, 교육은 교육받은 사람의 의식과 자발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 전달과정은 교육의 과정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과정적 기준이다.규범적 기준은 교육과 가치 사이의 개념적 관련, 즉 교육이라는 말에는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한다는 뜻이 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인데,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대한 찬반양론이 근본적으로 이 말의 해석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피터즈 자신의 해석에 의하면 규범적 기준은 교육을 통하여 전달되는 가치의 내용과 그 정당화 방식을 거의 정학하게 지시한다. 피터즈는 교육의 개념적 기준 중에서 규범적 기준은 단순히 교육이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 가치가 ‘내재적 가치’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교육학| 2006.06.27| 2페이지| 1,000원| 조회(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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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이론적 교과(보는 교과)의 가치는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이론적 교과(보는 교과)의 가치는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피터즈는 이론적 교과의 가치를 ‘선험적 논의(先驗的 論議)’ 또는 ‘논리적 가정에 의한 논의 (論理的 假定에 의한 論議)’로 정당화 하였다.이론적 교과는 선험적(경험이전) 논리 형식에 의해 정당화 된다. 이러한 논의형식을 ‘선험적 논의’ 또는 ‘논리적 가정에 의한 논의’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실제적 논의를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그 논의의 논리적 가정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믿음을 명백히 드러내려는 논의 형식’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실제적 논의’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마땅하다, 옳다, 바라직하다, 가치 있다, 좋다’등을 핵심개념으로 하는 논의를 말한다. ‘합리적으로’라는 말은 실제적 논의가 갖추어야 할 형식적 요건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하여’, 모종의 믿음을 전제로 받아들인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믿음이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다. 이 논리적 가정은 그 사람이 지금 하고 있는 실제적 논의가 의미를 가지기 위한 필수적 요구조건이며,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실제적 논의를 하면서 그것이 의미를 가지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논리적 가정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논의를 무효화하는 셈이 된다. 이것이 ‘선험적 논의’ 또는 ‘논리적 가정에 의한 논의’라고 불리는 논의형식이다.만약 정의가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 된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다면, 정의는 그 사람이 실제적 논의에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에 의하여 정당화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정의는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의는 요컨대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 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원리이며, 이 원리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제적 논의는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의의 가치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그 논리적 가정인 정의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피터즈의 말과 같이, 실제적 논의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 실제적 논의를 사용하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피터즈는 위의 논의형식이 교육의 내용에도 의미 있게 적용된다고 보았다. 위의 논의형식을 교육내용에 적용하면,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 또는 ‘왜 당구나 바둑과는 달리, 역사나 문학은 학교의 교과로서 배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역사나 문학 등, 이론적 교과(즉, 지식의 형식)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이다. 물론, 그 근거는, 그런 이론적 교과의 가치는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라는 데에 있다.지식의 형식을 발전시켜 오는 동안 인간은 ‘마치’ 후세의 인간이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준 것과 같다. 왜냐하면, 지식의 형식에 그 어떤 것이 들어 있든지 간에, 거기에는 또한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의미 있게 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답하고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지식의 형식을 떠나서는 무의미하다. 지식의 형식은 그 질문과 대답을 하는 사람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지식의 형식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질문을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여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한다는 믿음은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성립하는 데에 필요한 논리적 가정이며, 바로 이 점에서 정당화된다.
    교육학| 2006.06.23| 2페이지| 1,000원| 조회(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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