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6차 교육과정기의 역사교육- 목 차 -Ⅰ. 머리말Ⅱ. 5차 교육과정과 역사교육1. 5차 역사 교육과정의 특징2. 5차 역사 교육과정의 내용 변화(1) 초등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2) 중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3) 고등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3. 5차 역사 교육과정의 문제점Ⅲ. 6차 교육과정과 역사교육1. 6차 역사 교육과정의 특징2. 6차 역사 교육과정의 내용 변화(1) 초등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2) 중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3) 고등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3. 6차 역사 교육과정의 문제점Ⅳ. 역사과 교육과정의 나아갈 방향Ⅴ. 맺음말Ⅰ. 머리말교육과정과 관련하여 역사교육의 문제를 살펴보면, 해방이후 지금까지 교육과정은 역사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더 높이고 효율적인 역사학습을 도모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이 교육과정,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전국규모의 획일적인 규모와 수준의 교육과정이 한 교과나 과목의 교육적 의미와 효용성에 관해 대립 혹은 갈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주체와 역사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 간에 적지 않은 견해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의 간극은 좁혀져 가고 있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욱 벌어져 가고 있다. 이제 한편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역사교육을 정상화하여야 한다는 여론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이러한 상황과 시점에서 지금까지 제정되고 시행되었던 역사과 교육과정의 변천을 검토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5, 6차 교육과정기의 역사교육을 검토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과 교육과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Ⅱ. 5차 교육과정과 역사교육1. 5차 역사 교육과정의 특징5차 교육과정은 1985년 3월 발족한 교육개혁심의회가 제시한 ‘21세기를 주도할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며 도덕적인 한국인상 창조’라는 교육개혁의 기본 방향에서 영향을 받았다. 국민학교 1왕을 주어로 하는 서술의 변경, ‘동학운동’을 ‘동학농민운동’으로 바꾸는 등 일부 용어의 개정도 나타나고 있다.2. 5차 역사 교육과정의 내용 변화1) 초등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5차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역사 분야의 사회과로서의 통합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5, 6학년에 집중 편성되던 역사 내용이 지리, 공민 분야와 통합되어 3, 4학년으로 확대 분산되었다. 5학년 문화사 중 학문, 기술, 교육, 종교, 예술의 발달은 우리 문화생활의 발달이라는 시각에서 통합되었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변천은 4학년의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우리나라 산업의 발달은 대표적인 통합 단원인 우리나라의 산업 발달에서 다루도록 편성되었다. 또한 중?고등학교 역사교육과의 계열성을 고려하여 사례사, 생활사, 인물사, 사건사를 역연대적으로 또한 주제적 접근 방식으로 전개하여 통사적 성격을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학년별 내용 체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역사 분야 내용 체계학년단원명단원 내용3학년라) 우리 고장의 변화와 발전(1) 우리 고장의 옛날과 오늘(2) 우리 고장의 전통(3) 우리 고장의 발전을 위한 노력4학년다) 우리 민족의 생활 자취(1) 우리나라의 내력(2) 여러 가지 문화재5학년마) 우리 문화생활의 발달(1) 학문과 기술의 발달(2) 종교와 예술의 발전6학년라) 우리 민족의 형성과 발전(1)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2) 나라를 지켜 온 우리 조상(3) 문화를 발전시켜 온 우리 민족마) 근대화의 길(1) 근대화를 위한 노력(2) 국권 수호바) 대한민국의 발전(1) 민주 국가의 건설(2) 자랑스러운 우리나라내용 편성은 동심원적인 지역 확대법과 시간 소급법의 상호 보완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내용 구성상의 원칙으로 하고 있다. 즉, 학생들의 시간 의식의 발달 단계를 고려하여 3학년에서는 향토사적인 접근을 통하여 우리 고장의 옛날과 오늘, 우리 고장의 전통 등을 통하여 고장의 변화를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4학년에서는 향토사, 생활사, 문화사적정 내용 분석고등학교 국사와 세계사의 내용 체계는 과 같다.국사는 4차 교육과정 때에 비하여 2개 단원이 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중에서 ‘선사 문화와 국가의 형성’은 종래 고대 사회에 포함되었던 것을 단원으로 분리한 것이다. 이는 논란이 되었던 고조선의 역사성과 국가적 성격을 새롭게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민족의 독립 운동’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된 후의 민족 독립 운동을 체계적이면서 주체적 입장에서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세계사의 내용 체계국사세계사1) 선사 문화와 국가의 형성2) 고대 사회의 발전3) 중세 사회의 발전4) 근세 사회의 발전5) 근대 사회의 태동6) 근대 사회의 발전7) 민족의 독립 운동8) 현대 사회의 전개1) 세계사와 우리의 생활2) 고대 문명의 성립3) 아시아 세계의 전개4) 유럽 세계의 전개5) 근대 유럽 사회의 발전6) 근대 아시아 사회의 발전7) 현대 세계의 시련8) 현대 세계의 변화내용 구성은 연대사적 구조와 분류사적 구조를 조합하여 8개의 단원은 연대사로 설정하고 31개의 주제는 분류사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각 단원은 첫째 주제는 전환기의 역사로, 둘째 주제는 정치사로, 셋째 주제는 사회?경제사로, 넷째 주제는 문화사로 하였다.세계사는 4차 교육과정보다 단원수가 2개 늘어났는데, 1단원을 도입 단원으로 하여 세계사의 성격과 학습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세계사 학습을 위한 안내의 성격을 나타냈으며, 현대사의 비중을 높여 종래의 1개의 단원으로 하였던 현대사를 2개의 단원으로 구성하였다. 내용 구성상의 특징은 주제 접근 방법과 연대사적 접근 방법을 절충한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아시아와 유럽 사회로 나누고, 그 안에서 각 문화권의 발전 과정을 주제로 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연대사적인 학습을 할 수 있게 하였다.3. 5차 역사과 교육과정의 문제점5차 교육과정까지의 국사 내용 구조상의 계열적 특성을 국민학교의 생활, 인물, 사례를 중심으로 한 생활상 중심의 역사, 중학교육과정 결정의 분권화, 교육과정 구조의 다양화, 교육과정 내용의 적정화, 교육과정 운영의 효율화를 내세웠다.역사교육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제3차 교육과정부터 독립교과로 유지되어 오던 국사과가 폐지되어 교육과정 편제상으로 사회과 속에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국사과와 사회과 속의 세계사라는 이원적인 역사 교육 체제로부터 사회과 속의 국사와 세계사라는 일원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다만 국사의 경우는 중학교에서도 다른 사회과목과 별도의 교과서를 만들고, 별개의 수업시수를 편성하여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과 통합을 강화하여 고등학교에서 「공통사회」를 신설하고 필수 과목으로 배우도록 하였다.제6차 교육과정 중학교 사회과의 내용 구성을 보면 사회1은 지리?세계사 영역, 사회2는 세계사?지리?일반사회 영역, 사회3은 일반사회?지리 영역을 담고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중학교 2학년과 3학년에는 국사 영역을 편성하였다. 고등학교 국사는 사회과의 한 과목으로 6단위를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국사과가 사회과에 포함되었으므로 중학교의 경우에 국사과 목표는 별도로 제시되지 않았고, 역사, 지리, 공민 영역을 포괄하는 사회과 목표가 제시되었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사회과 목표를 포괄적으로 제시한 다음에 과목별로 목표를 별도로 제시하였다. 영역별 목표 제시로 볼 때 6차 교육과정에서는 지식?이해 영역의 목표가 강조되었고, 가치?태도면의 목표가 감소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사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우리 문화와 민족사의 발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하였고, 인류 생활의 발달과정과 각 시대의 문화적 특색을 파악하게 하였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이전과 거의 비슷한 목표가 제시되었다.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중학교의 경우에 국사가 사회과에 포함되면서 지도방법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 역사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탐구과정의 중시, 극화활동과 사료학습의 강조, 역사적 사건, 제도, 현상 등과 현재사회의 관련성 강조 등을단원명단원 내용3학년(3) 고장 생활의 변화(가) 조상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것들(나) 생활 도구 및 교통?통신의 변화(다) 전해 내려오는 놀이와 행사4학년(1) 우리 시?도의 모습과 내력(가) 자연의 모습과 지도, 도표(나) 내력과 연표5학년(3) 우리 민족의 문화생활(가) 옛 도읍지와 문화재(나) 조상들의 교육, 학문, 과학 기술, 종교에 나타난 슬기(다) 조상들의 예술 생활에 나타난 멋6학년(1) 민족과 국가의 성장(가) 우리 겨레, 우리 나라(나) 역사를 빛낸 조상들(다) 겨레의 해외 활동과 외침의 격퇴(2)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건설(가) 외래 문화와의 만남(나) 새로운 사회로의 움직임(다)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3) 민주 국가로의 발전(가) 광복과 대한민국내용 면에서 이전 교육 과정과 대동소이하다. 공간 확대 원칙이 명확하게 적용되어 3학년은 고장, 즉 시?군?구, 4학년은 시?도 지역, 5학년은 국가, 6학년은 우리나라와 세계 수준에서 서술하도록 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3학년은 약 100년 정도의 시간을 소급하여 가족 및 고장 생활의 변화를 인식하도로 하고 있으며 4학년은 역연대적 접근과 구체적 생활 경험 자료를 통한 시도 지역의 변화를 인식하도록 하고 있으며 4학년은 역연대적 접근과 구체적 생활 경험 자료를 통한 시도 지역의 변화를 인식하고 한국사 학습의 입문으로서 우리나라 왕조명의 개략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5학년은 역연대적 접근을 통해 민족 생활의 변천을 경제 문화 생활 발달을 중심으로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6학년의 경우, 이전과는 달리 전근대사의 경우 ‘위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민족 국가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인식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근현대사는 개화, 즉 근대화와 독립운동을 강조하고 해방 이후 발전상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2) 중학교 역사 교육과정 내용 분석중학교 국사는 대단원을 없애고 중단원-소단원 체제로 구성하였다. 단원명은 그 단원에서 서술하고 있는 사회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주제로 설정하였다. 세계사는 1학년징이다.
『중학교 역사(상)』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와 교류 서술 검토Ⅰ. 머리말Ⅱ. 학계 연구 성과1. 통일신라의 문화1) 국학과 독서출신과2) 불교의 대중화(1) 원효, 불교 대중화를 완성하다(2) 의상, 대중을 향해 포교하다(3) 화엄종과 정토 신앙(4) 교종과 선종3) 불국사와 석불사(1) 불국사와 석불사, 언제 세웠을까(2) 불국사와 석불사, 왜 세웠을까2. 발해의 건국과 발전1) 발해사 연구 현황2) 발해사의 논쟁점(1) 대조영과 지배세력(2) 지방통치와 수령(3) 대외관계와 국가위상3) 발해의 문화4)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의 문제Ⅲ. 각급 교육과정의 서술된 내용 검토1. 초등 국사 교과서의 서술 검토1) 초등 국사 교과서의 내용 편제2) 초등 국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 검토2. 중등 역사 교과서의 서술 검토1) 중등 역사 교과서의 내용 편제2)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 검토 Ⅳ. 맺음말Ⅰ. 머리말역사는 지나버린 과거 사실을 탐구하는 것이므로 간접 체험으로 학습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역사 지식은 주로 언어와 문자로 전달되며, 교사와 교과서가 핵심적인 매개 기능을 담당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역사교과서가 교사와 학생간의 수업 과정을 연결해주는 매우 중요한 도구라는 점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라는 학문에 입문하게 되는 학생들의 교과서는 매우 신중하게 서술되어야 한다. 역사교과서의 내용이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에 비추어 얼마나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서술되었으며, 최근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는가 하는 문제는 교과서 서술 분석에 대단히 중요한 기준이 된다.따라서 본 글에서는 2007 개정 교육과정에 의해 편찬된 중학교 역사(상) 「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와 교류」의 학계 연구 성과와 각급 교육과정에 서술된 내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배움책 주제를 재구성 하는 과정에서 발해의 건국과 발전을 추가로 삽입하였으며 통일 신라와 발해의 대외 교류 부분은 삭제하였음을 미리 알려둔다.Ⅱ. 학계 연구 성과1. 통일신라의 문화1) 국학과 독서출신과국 동시에 보살로서 자비심을 가지고 모든 중생을 구호해야 하므로 권력의 전횡을 삼가고 선정을 베풀 것을 요구받았다. 그리고 신자들도 살인?간음?도둑질 등 계율에서 금지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금지조항을 지켜야 했다. 그 밖에도 8세기 이후 여러 승려들이 연구한 『범망경』의 보살계에서는 재물과 법을 베풀어 이타행을 실천하고, 부모와 스승에 대한 효순심(孝順心)과 형제와 친척에 대한 공경심을 지니며, 도량형을 속이면 안된다는 등의 올바른 직업 윤리에 대한 내용을 고취하여 적극적으로 선행하도록 하였다.그동안의 신앙 연구는 신앙자 집단의 정치적 성격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왔다. 아미타신앙은현실의 삶이 고단한 하급귀족?촌주?평민?노비 등이 주로 믿었고, 이들은 현실 사회에 불만이 많아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소극적 비판세력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미타신앙이 모든 계층에 널리 퍼졌으며 귀족과 평민들이 함께 결사에 참여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지나치게 계층의 대립만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신라 하대의 미륵신앙은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한 사실과 관련하여 메시아적 존재인 미륵을 희구하는 미륵하생신앙이 지배적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나 미륵신앙의 근거지인 금산사 진표 계열의 미륵신앙을 하생신앙으로서 신라 하대 농민반란의 사상적 배경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미륵상생신앙자로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해 점찰법(店察法)을 택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동일한 불교신앙이라도 신앙자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서 다양한 성격으로 받아들여짐을 감안하면서 연구해야 할 것 같다.(3) 화엄종과 정토 신앙선종이 들어오기까지 신라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이 가장 선호한 불교 종파는 화엄종이었다. 신라 화엄종을 연 승려가 의상이다. 의상은 당에서 귀국한 뒤에 태백산에 부석사를 세우고(676), 오진?지통?표훈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리고 오악(五岳)을 위시한 전국 각 명산에 화엄 계통의 사찰을 세워 전교하였는데,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사중(寺中)의 기록' 을 보면 김대성이 751년(경덕왕10) 불국사 건설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에 대성이 죽자 국가가 이를 완성했다고 되어 있어, 혜공왕 10년 이후에 국가가 불국사를 완공했음을 알려준다. 반면 『삼국유사』를 보면, 불국사와 석불사의 창건 설화를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 라는 항목에 게재하여 김대성이 신문왕대에 전생과 현생의 2세 부모를 위해 두 사찰을 건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렇다면 김대성이 불국사를 세운 시점은 정확히 언제일까? 그러나 정작 김대성이란 인물은 다른 믿을 만한 사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점에서 두 사찰의 창건 시기는 물론 김대성의 존재 자체까지도 의심해볼 만하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현생과 전생을 결부한 설화적 이야기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신빙성은 더욱 의심될 수밖에 없다.『불국사고금창기』에는 『삼국유사』와 전혀 다른 전승이 전한다. 『불국사고금창기』를 보면 법흥왕 15년(528) 왕모(王母) 영제부인이 화엄불국사를 세웠으며, 이를 화엄법류사라 불렀다. 진흥왕 35년(574)에는 왕비 지소부인이 불국사를 중창하였다 하며, 문무왕 10년(670)에는 절의 강당인 무설전을 짓고 신림과 표훈 등 의상의 제자들을 머무르게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김대성이 불국사를 세웠다는 전승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신림과 표훈 등이 불국사에 머무른 시점이 경덕왕대가 아니라 문무왕대로 되어 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한 대목이다.『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를 종합해보건대, 불국사는 불교가 공인된 직후에 토함산 기슭에 건립되었다가 중창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 뒤 통일기인 문무?신문왕 어간에 이르러 일대 국가적 사찰로 정비되었을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석불사도 불국사가 최종 정비되는 통일기에 창건되지 않았을까. 『삼국유사』에서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 라는 제호(題號)를 붙인 것은 불국사와 석불사의 대대적 정비 시점이 신문왕대였을 가능성을 높아진다. 이것은 발해 건국집단 내지 지배계층에서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고구려인의 비율이 높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말갈인의 비중이 높았던 사실을 반영한다.(2) 지방통치와 수령처음에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지배체제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고구려 지역에서는 과거의 지배구조를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을 택하였으니, 이 때문에 초기에 목저주나 현도주와 같은 고구려식 지명이 등장한다. 반면에 순수 말갈 지역에서는 독립적인 지배자들인 수령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일정한 단위로 묶어 통제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8세기 중반에 당 제도를 수용하면서 일원적인 지방제도인 부주현제(府州懸制)를 마련하기 시작하였고, 9세기 전반에 영역이 확정되면서 5경, 15부, 62주에 이르게 되었다.발해 지방사 연구는 두 가지 주제 곧 지리 고증과 수령 연구에 집중되어 왔다. 지리 고증은 정약용, 한진서 등과 같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길을 열었고, 20세기에는 중국과 일본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주로 지리 고증에 매달렸던 것은 가장 기본적인 행정구역마저 그 소재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고고학 조사는 이러한 지리 고증에 더욱 힘을 실어 주어, 이제는 행정구역의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수령 연구는 1970년대 말에 일본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고대사에서 논의되어 왔던 재지수장제론의 시각에서 발해 수령이 내부적으로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존재였음을 규명하였으며, 이러한 발해의 사회체제를 수령제라 명명하였다.(3) 대외관계와 국가위상중국학계는 발해가 당과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고, 또한 당나라 기미부주의 하나였던 사실을 들어서 발해를 독립국가가 아닌 ‘당 지방정권’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던 모든 나라가 당의 지방정권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발해가 당의 기미부주인 홀한주도독부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8세기에는 이미 당나라의 기미체제가 쇠퇴하였으므로 이 또한 명목적인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등 국사 교과서도 이러한 시각 자료를 교과서에 최대한 포함하는데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다만 제한된 지면이기 때문에 이들 자료는 신중하게 선택되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야 기대했던 학습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볼 때 현 초등 국사 교과서는 개선되어야할 점이 적지 않다. 초등 국사 교과서의 지도 자료가 기왕의 국정 중등 교과서의 지도 자료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왕의 지도 자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이 현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통일신라와 발해(p.45)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영역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지도에는 통일신라의 5소경, 발해의 5경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 중에는 이와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없다. 5소경과 5경이 왜 지도에 표시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도만으로도 본문과 무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최소한 해당 지도에 캡션의 형태라도 부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2. 중등 역사 교과서의 서술 검토1) 중등 역사 교과서의 내용 편제학년영역8학년9학년10학년한국사영역?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삼국의 성립과 발전? 통일신라와 발해? 고려의 성립과 발전? 고려 사회의 변천? 조선의 성립과 발전? 조선 사회의 변동? 근대국가 수립 운동? 대한민국의 발전? 우리 역사의 형성과 발전? 조선사회의 변화와 서구 열강의 침략적 접근?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근대 국가 수립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전체주의의 대두와 민족운동의 발전? 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정세의 변화? 세계화와 우리의 미래세계사영역?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종교의 등장? 다양한 문화권의 형성? 교류의 확대와 전통사회의 발전? 산업화와 국민국가의 형성? 아시아ㆍ아프리카 민족운동과 근대국가 수립 운동? 현대 세계의 전개⑶ 통일 신라와 발해 (8, 9학년)고구려의 대외 항쟁부터 삼국통일 과정을 거쳐 남북국 형세를 이룬 통.
【지역과 역사】 2012.5.22.조선후기 서학의 수용과 발전Ⅰ. 머리말Ⅱ. 조선후기 서학유입과 서기수용론1. 17~18세기 전반 서학인식과 서학유입2. 18세기 후반 서양인식과 서기수용론Ⅲ. 정조의 서학 정책과 천주교 정책1. 정조의 과학기술 인식과 서학 정책2. 정조의 천주교에 대한 기본 정책3. 정조의 '正學 = 經學'觀과 서학정책의 관련성Ⅳ. 정약용의 사상에 나타난 서학과 유학1.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나타난 서학의 수용 양상2. 정약용의 사상에 나타난 서학과 실학의 갈림길Ⅴ. 맺음말Ⅰ. 머리말조선후기 사상계에는 정학(政學)으로 불리던 조선 성리학과 실학(實學), 그리고 지배층에 의해 ‘사학(邪學)’으로 지탄받던 여러 사상들이 병존하고 있었다. ‘사학’은 불교 특히 미륵신앙이나 비결신행과 같은 전통적 사유형식과 함께 서학과 동학 등 신종교사상을 지칭하던 개념이었다.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서학(西學)사상이 새롭게 전래되어 신봉되고 있었다. 이 서학사상은 중국에서 한문으로 씌어진 서학 서적들을 통해 조선에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서학이라는 용어 안에는 서양의 과학 기술이라는 개념과 함께 서양의 종교사상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엽 이후 조선에서 서학이라 할 때는 대개의 경우 천주교신앙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조선에 천주교신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784년 조선 교회의 창설을 그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조선 교회는 대략 1882년경에 이르러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을 때까지 지속적인 탄압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바로 조선왕조의 봉건체제가 급격히 붕괴되어가고 있던 때였다.조선후기 서학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용한 계층은 성호 이익의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양반신분층이었고 기호 남인으로서 중소지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들의 가문은 ‘경신 대출척’ 이후 오랫동안의 휴지기를 거치고서 정조년간의 탕평책에 힘입어 조정에서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학을 수용한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며 학문 연등이 神宗에게 서양 문물을 헌상한 공으로 第宅을 하사받아 건립된 것인데 1723년까지 남당, 동당, 북당, 서당 등 모두 네 곳이 세워졌다.18세기에 들어 서학서의 유입이 활발해짐에 따라 서학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서교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등장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서학이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던 차원에서 벗어나고 있던 것을 보여 주며 이제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의 방식을 마련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2. 18세기 후반 서양인식과 서기수용론서양에 대한 관심의 확산을 반영하듯 18세기 후반에는 각종 서학서가 지방사회에까지 유포되고 있었으며 이는 다시 서양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 지방에 활동했던 황윤석의 경우 지방사회에서 10여 종의 서학서를 구할 수 있었으며 그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보다 다양한 서학서를 구해 서학에 관한 이해의 범위를 확장시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8세기 후반 서양에 대한 관심은 정조의 적극적인 학술정책에 의해 『고금도서집성』이나 『사고전서간명목록』등이 입수되면서 확산되고 있었다.이처럼 서학서의 유입과 유포가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서양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주목되는 점은 서양이 세계사 인식체계 내에 새롭게 편입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同文廣考』는 중요한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同文廣考』는 '동문'이라는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면서 다른 여러 나라의 사정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西洋記」라 하여 서양에 대한 부분이 별도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四夷의 서술부에 「서양기」를 포함시킴으로써 세계는 여전히 중국 중심적인 질서 속에서 파악되었지만 서양이 자리매김되고 있던 사실 자체는 지식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서양을 세계사 인식 체계 내에 흡수하려 했던 예는 『?瀛誌』를 편찬했던 장흥지방의 학자 위백규(存齋,'중국 원류설'에 입각한 서기 수용론은 그 입지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에 따라 서기수용론은 새로운 방향의 전환을 모색해야만 했다.Ⅲ. 정조의 서학 정책과 천주교 정책1. 정조의 과학기술 인식과 서학 정책정조대는 북학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지만 동시에 기존의 전통적 인식을 고수하려는 반발 또한 만만치 않은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보다 고민이 큰 사람은 두 힘 사이에 파생되는 갈등을 조정해가며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국왕 정조였다.기본적으로 정조는 正學을 중심으로 하되 事功을 아우르는 학풍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학풍은 심성론 위주의 학문 풍토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의 태도는 학문의 목적은 실용에 있다며 체용이 결합된 학문태도를 중시하고 '富國'과 '裕民'을 위해서는 管仲과 상용의 공리와 실용을 추구하는 학문도 취할만한 점이 있다던 박지원 등 북학론자들의 주장과 상통한다.대외 정책에서도 의리?경세 절충 인식은 견지되었다. 영조로부터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킬 것을 당부받은 바도 있던 정조는 존주론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지니고 있어 집권 기간 내내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였다. 존주론을 강조하면서도 정조는 실리적 관심을 견지하였다. 중국과의 사대는 주고 받는 것이 비슷하여 문제되지 않지만 일본과의 교린에서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며 경제적 관점에서 사대교린 관계를 파악한 것은 공리적 관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정조는 물품은 사용에 편리하고 생활에 윤택한지를 따질 뿐 옛날과 지금, 중화와 이적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며 북학적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정조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천문?역학이 지니는 상징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기술의 실용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다.하늘의 뜻을 파악하는 천문?역학은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제왕학으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표준시간 체제의 정비(1789년), 전국팔도의 북극고도 산정(1791년), 집에서 이승훈 등이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는 것을 형조 관원들이 우연히 목격하여 적발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서학이 邪學으로 규정되었고, 이를 성토하는 통문과 상소가 잇달아 최초로 전통의 유교와 서학인 천주교가 충돌하게 되었다. 마침 형조에서는 역모사건을 수사하다가 우연히 천주교의 은밀한 모임을 발견한 터라, 천주교에 대한 의심은 조정과 사회의 기강차원에서 비롯되었다. 더구나, 교리서의 내용 중 천주에 대한 신앙은 無父無君으로 규정되었고, 천당지옥설은 혹세무민하는 것으로 비판되었다. 이로써 관련자가 엄중히 처벌되고, 서학서에 대한 탐구는 금지되었다.한동안 잠잠하던 서학문제는 泮會事件(정조 11년;1787)으로 다시 불거졌다. 이것은 이승훈?정약용 등이 과거공부를 핑계로 성균관 근처 마을 반촌에서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다 같은 남인인 유생 李基慶에게 발각?폭로된 사건이다. 반회사건은 서학문제를 확대시키지 않으려는 정조의 의지에 따라 연경으로부터 책자 유입을 금지하고 천주교 관련 서적과 물품을 소각하는 선에서 매듭지어졌다.천주교 문제는 그 다음 해에 채제공이 우의정으로 발탁되면서 본격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부각된다. 노론 신하들이 공격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조 12년(1788) 8월에 당시 정언이던 이경명이 상소를 하여 서학을 엄히 다스릴 것을 요청하자, 정조는 다음 날 어전회의를 열어 서학의 유포상황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 채제공은 서학에 대해 "無父無君으로 인륜을 무시하는 것이 불교의 별파이며, 무지한 백성은 쉽게 현혹되어 금지하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요지로 정리하고, 정조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비답을 내린다.① 일을 확대하지 말 것 ② 서학은 육학(陸學)?왕학(王學)?불도(佛道)?노도(老道)의 종류와 같은 이단일 뿐이며, 따로 禁令을 설치할 것 없다. ③ 서학에 빠지는 원인은 經學을 하지 않는 것 때문이다. 正學을 밝히면 邪學은 없어진다. 사학에 빠진 사람은 사람으로 만들고, 책은 불태워라 ④ 문체와 소설의 문제가 크다.여 다스리고, 한 당파에서 충신이 나오면 반드시 반대 당파의 충신과 대비시켜 표창하는 통치방식'을 뜻한다.셋째, 과학기술과 천주교가 혼합된 상태로 유입된 서학은 정조시대에 이르러 제사폐지문제와 관련하여 신앙차원에서 천주교를 수용하려는 사람들과 학문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로 분기되었다.3. 정조의 '正學 = 經學'觀과 서학정책의 관련성정조에게는 실학=경학=정학이라는 개념구조가 성립된다. 이점에 있어서 정조의 실학적 학문의 추구란 정학의 수호이며 경학의 추구이다. 정조는 經書 중에서는 四書를 중시했고, 사서 중에서는 『大學』을 중시했다. 『대학』은 六經四書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모든 經을 『대학』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했다. 정조는 『대학』의 요체는 敬이라 하고 이런 의미에서 그는 모든 經을 敬과 誠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또 그 의미를 추출해내려 했다.정조에 있어서 經學의 중시는 수양론으로 귀결된다. 정조는 그 수기론은 '事君'의 忠과 연결시켜 당시 붕당 정국에서 미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연결시킨다. 또, 理?欲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理一分殊說의 입장에서 왕은 理一之理이고 신하는 分殊之理로 보아 왕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왕 자신을 理로, 신하를 欲에 대비시켜, 理가 항상 欲을 제어해야한다는 이 논리는 전적으로 왕권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萬治의 근원은 왕이라는 이 생각은 역으로 그 근원이 바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왕 자신의 수신을 강조하고, 아울러 欲으로 흐르지 않도록, 바꾸어 말해 분수지리는 늘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정조는 기본적으로 朱子尊信의 토대 위에,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설의 권위에 놓여 있던 종래의 학풍에서 벗어난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갖고 있어서, 경전의 주석에 있어서도 주자의 주석과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발견된다. 더 나아가 그의 이러한 학문 연구의 개방성은 이단의 선택적 수용이라는 데까지 이른다.Ⅳ. 정약용의 사상에 나타난 서학과 유학1.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나타난 서학의겠다.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의 『채찍질』에 나타나는 르네상스기 회화의 특징베른트 뢰크가 짓고 최용찬이 옮긴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는 책의 제목부터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저자는 책의 제목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이 분명하다.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는 적합한 제목이었으니 저자의 의도가 반쯤은 성공한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작가는 어떠한 내용을 우리에게 소개하려고 한 것일까?책의 부제는 '르네상스 명화에 숨겨진 살인사건'이다. 저자는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의 「채찍질」이라는 그림의 숨겨진 진실을 추적하면서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상 및 르네상스의 회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채찍질」은 미술사에서 이만큼 많이 연구?저술되고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된 그림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67.5×91센티미터 크기의 패널화가 보르고 싼쎄뽈끄로 출신의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에 의해 그려졌다는 사실 뿐이다. 제작연도에 대해서도 1444년에서 1478년 사이로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채찍질」의 핵심문제는, 채찍질당하는 그리스도를 묘사한 왼쪽 후경과 오른쪽 전경의 세 남자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이 책이 세우는 중심가설은 1444년 7월 22일 오단또니오가 자신의 궁정에서 살해당했고 살해범으로는 이복형제인 페데리꼬 다 몬떼펠뜨로가 유력하다는 것이다. 이를 여러 가지 자료를 이용해 입증하면서 작가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을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에게 주문한 사람 즉 후원자도 밝혀보려 하고 있다. 페데리꼬 다 몬떼펠뜨로와 적대 관계에 있던 꼴론나 가문과 오단또니오의 누이들, 몬떼펠뜨로 가문에 적대적인 이탈리아 리미니 지역의 군주 말라떼스따 가문, 그리고 스포르짜 같은 용병 군주 등의 대치 관계를 추적해 가고 있다. 그렇게 주제의 3요소 살인자, 화가, 후원자의 삼각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끝까지 후원자의 행방은 찾지 못하고 여러 추리들만 남긴 채 글을 마무하였다.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상황은 새로운 유형의 지배자를 낳게 하였다. 르네상스의 전성기인 15세기는 전제군주의 시대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재능과 현실적인 타산만을 믿는 자들이었다. 종교적?윤리적 규범을 무시하고, 음모?모략?암살?독살 등을 태연하게 자행하였다. 지배하기 위하여, 또한 지배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는 그들을 가리켜 "당시 이탈리아 이외의 군주에게는 몽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수단에 대한 의식적인 타산이 영토 내에서의 절대적인 권력의 확립과 더불어 매우 특수한 인간과 생활양식을 낳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전제군주 자신이 매우 개성적인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던 것이다.또한 르네상스기는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인생관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이 싹트게 되었다. 인문주의의 융성은 문학의 영역을 넘어 고대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이에 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세계와 인간을 발견하게 하였다. '세계의 발견'은 인간외적 세계, 즉 자연에 대한 중세와는 다른 태도를 뜻한다. 그것은 자연 속에 신의 섭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고 묘사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르네상스기에 비로소 근대적인 자연과학의 싹이 트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름대로 문장이나 화폭에 자유롭게 묘사하게 되었다.그리고 인간의 발견은 인간에 대한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인식을 뜻하며,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간관은 근대적인 인간이 형성되고 발전할 출발점이 되었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서는 신분이나 사회계층, 또는 혈통 같은 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르네상스가 인간의 본질을 철저하게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르네상스는 인간의 전체적인 완전한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세인(世人)에게 제시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간을 개성적인 존재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르네상스는 인간성을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이 그의 타고난 개성을 상스의 이념을 회화에 담았던 대화가로서 인식되었다. 청년기에는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의 조수로서 피렌체에서 제작하고 수학에 대한 관심도 이 시기에 높아졌지만 작업을 주로 했던 곳은 토스카나 남부의 여러 도시였었고 각 도시에 영향을 끼쳤다. 초기의 작품에 1445년 제작한 '자비의 성모'가 있는데 성모의 육신을 촉감화시킨 양감은 마사치오의 영향이라 보이지만 구도를 지탱하고 있는 엄격한 기하학적 구도는 마사치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며 크기가 다른 인물과 금색의 배경은 고풍스러우면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인문주의적인 울비노의 궁정문화 속에서 군주의 모습을 그린 '울비노 공 부처상'과 '프렐라의 제단화'를 완성시키고 피렌체의 기하학적 공간과 북방적 색채와 빛의 표현을 통합한 공적은 높게 평가된다. 그의 대표작인 '성 십자가 전설'은 벽화들로서 야콥스 데 볼라키네의 '황금전설'을 소재로 한 것인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책형에 사용된 십자가의 유래와 역사를 그린 '성 십자가의 발견과 증명', 당당한 인물표현과 건축적 배경이 그려진 '시바여왕의 예배', 훌륭한 밤의 장면이 묘사된 '콘스탄티누스의 꿈' 등이 질서와 정밀성을 갖고 그려졌었다.『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는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인자, 화가, 후원자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1~3장 살인자, 4~9장 화가, 10~15장 후원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구별없이 서술된 장들이 보이기 때문에 삼분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는지 의문스럽고 큰 의미는 없어보인다. 예를 들면 6장 ‘유다와 루벤, 그리고 제후의 아들‘ 같은 경우는 살인자에 대한 서술로 볼 수도 있다. 또 11장 ’명작의 탄생‘, 13장 ’유다의 화가‘, 14장 ’키테라섬으로의 출발‘의 경우 화가에 대해 쓴 것으로 생각되어지기도 하다. 「채찍질」이라는 작품은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우르비노라는 도시의 마르케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점은 베른트 뢰크가 살인자라고 주장했던 페데리꼬단또니오가 타락한 악덕군주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는 전혀 없다며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유보하고 있다. 어느 것이 역사적 진실인지 의문스럽다.저자는 '회화의 군주'다운 삐에로의 모습을 예시를 통해 곳곳에서 서술하고 있다. 먼저 그는 빛을 잘 사용하는 작가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삐에로는 「채찍질」에서 두가지의 '존재론적 차원'을 보여준다는 인상은 빛의 흐름에 따라 더욱 강화된다. 채찍질 장면에서는 빛이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반면, 바깥 광장에 서 있는 세 남자에게는 왼쪽에서 비친다. 그리스도 위에 있는 상자 모양의 천장 부분은 상상의 근원에서 들어오는 또 한 가닥의 빛을 받고 있다. 래빈이 표현했듯이, 건물 내부는 신성한 분위기로 변해 있어서 이곳의 영원한 빛은 바깥세상의 빛과 대비된다.그리고 삐에로는 공간 활용에 능통하며 고전문화를 결합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우리는 대리석과 '고풍스러운 녹색'으로 꾸며진 사치스러운 공간을 보고 있다. 혼합양식의 화려한 주두가 얹힌 홈 파인 기둥들이 이 공간을 떠받친다. 그 기둥들은 가볍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엔타씨스를 갖춘 고전적 모범을 따른 것으로, 삐에로의동료화가들이 보여준 네온관이나 나무줄기 양식과는 다르다. 회화 속 건축에서 말하는 고전미를 특징짓기 위해 로베르또 롱기가 멋지게 비유한 바 있다. 즉 「채찍질」은 에게해 부근 왕궁에서 벌어진 호메로스식 사건과 같다.뿐만 아니라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그렸음을 설명하고 있다.삐에로의 고고학은 빌라도가 앉은 의자 같은 세부요소까지도 계산에 넣는다. 다리가 휜 접이식 의자인 고대 '대관의자'를 정확히 모사했는데, 이는 로마시대에 높은 관청에서 재판이나 업무용으로 쓰이던 것이다. 원근법 덕에 이 모든 '고대'의암호가 15세기 회화의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실재와 똑같아 보이는 고상한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베른트 뢰크의 가장 독특한 점은 유사성에 주목한다는 것이었다. 신약과 삐에로 시대라는 두 차원의 형태상의 일치성을 설명하는 점은 가히 없다. 예를 들면 북구 장인들의 전문분야인 희미한 주름이 물결치는 듯한 값비싼 재질을 모사하는 기술은 삐에로의 정밀한 손놀림을 잘 묘사한다. 원근법은 이제까지 세계를 바라보지 못했던 바대로 공간환영을 열어주고 장엄한 명암처리는 그 대조가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눈에 튀지 않으면서도 장면을 입체적으로 잘 드러낸다.그러나 빌라도의 옥좌 계단 아래 고대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싸인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나머지 삐에로를 신격화시킨 것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그는 새로운 시대의 첫 번째 예술의 왕이자 그 이상이다. 즉 법정의 기둥 사이에서 신성한 광채를 띤 '형태상의 파트너'이자 사실상의 '제2의 신', 즉 선들의힘으로 고유한 실재를 만들어낼 줄 알았던 창조주다.저자는 「채찍질」을 그린 이후 삐에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설명을 이어나간다.이후 삐에로는 우르비노 궁전으로부터 궁전으로부터 두가지 중요한 주문을 받는다. 「빨라 몬떼펠뜨로」라는 대규모 제단화와 페데리꼬와 바띠스따 스포르짜의 초상이 포함된 이중제단화였다. 그리하여 삐에로는 공교롭게도 몇 년 전 그가제2의 유다이자 빌라도이며, 형제 살인자이자 배신자라고 조소했던 그 사나이의일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당시의 예술과 예술가들이 오늘날과 같은 순수예술 창작자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예술은 언제나 부와 권력과 함께 하였으므로 예술가는 그들의 재능을 팔고 재력가는 예술을 통해 부를 과시하였으며, 권력자는 이를 통해 그의 과시하였다. 당시 중세적 상황에서 상업을 통해 이윤과 이자소득을 획득한다는 것은 고리대금업으로 취급되어 종교적 파문을 선고받을 정도로 큰 죄악이었으니, 신흥자본가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교회에 막대한 헌금을 납부하여야 했다. 하지만 점차 교회는 이들의 헌금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고, 부자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가문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교회를 신축하거나 개축하는 데에 헌금을 하는 대신 교회장식에 .
【동양사연구의최근동향】중국의 중화주의와 소수민족정책Ⅰ. 머리말Ⅱ. 중국 민족주의의 구조와 특성1. 중국 민족주의의 구조2. 중국 민족주의의 특성Ⅲ. 중국 소수민족정책의 형성과 전개Ⅳ. 중국 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사회의 변화1. 조선족의 형성과 이주 역사2. 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문제점3. 조선족 사회의 과제와 전망Ⅴ. 맺음말< 부록 > 티베트와 위구르의 분리주의 운동Ⅰ. 머리말중국은 고구려사 문제, 발해 문제 등을 놓고 우리나라와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논리를 보면 현재 중국 땅에 살고 있는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 중국의 강역 내에 살았던 모든 민족 집단이 다 자기들의 중화민족이라는 것이다. 고구려를 자신들의 지방 정권으로 보고, 오늘날 대한민국과 무관함을 주장하며 나아가 고구려의 중화민족설을 정설화하려는 것은 현재주의 역사관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면서 방송에서는 '주몽', '대조영'과 같은 드라마를 앞 다투어 방영하고, 대학입시에서도 국사 과목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정책들이 나오게 되었다.이러한 현상이 초래된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나라의 애국주의와 중국의 애국주의가 충돌하는 데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 시대다 지구촌 사회다 하여 평화공존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아시아 각국은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주의가 여전히 내부적으로는 포기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예부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임을 강조하며 애국주의를 강요해왔으나 중국은 민족구성면에서 우리와는 입장이 다르다. 중국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소수민족의 수가 55개에 이르며 그들 스스로 다민족통일국가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한족(漢族)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영역에서 중심적 지위를 점하는 일민족우위의 국가라 할 수 있다. 2005년 중국의 한족인구는 118,295여만명으로 중국 전체인구의 90.56%를 차지하고 기타 55개 민족인구는 12,333여만명으로 중국 전체인구의 9.44%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위의 두 논리에 대해 역사적·민족적·국가적 정당성과 정체성에 대한 과학적 이론 틀을 부여해주는 역사적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삼자는 상보성(相補性)과 정합성을 이루면서 중국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이념적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중국 민족주의의 핵심요소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그 이론은 오늘날의 정치적 필요성과 당위성에 의해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민족과 역사의 귀속성을 판단하는 현재주의적 역사관을 중국역사 전반에 소급·적용시켜 민족과 역사의 귀속성을 자의적으로 규정해버린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역사적 현상들을 단순화·획일화·규범화·현재화시켜 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또한 그 이론에서는 특정왕조(특히 정복왕조)내에서의 각 민족 간의 갈등·충돌·대립·분열 양상을 의도적으로 축소·은폐시키고 이들 민족의 교류·융합의 양상만을 과장되게 부각시켜 역사의 초기단계부터 구성원들이 통일 지향적이었다고 주창한다. 끝으로 이 이론에서는 근대이전 중국 내 각 민족이 선험적으로 '유사(類似) 중화민족'적 민족의식이나 정체성을 가졌던 것처럼 역사논리를 합리화하고 있다.다음으로 중국의 애국주의에서는 민족·국가·조국·집체(集體)·사회에 대한 충성·사랑·배려 등이 최우선적인 가치로 주창되고 있다. 중국에서의 지나친 애국우의의 고취는 비(非)국민을 배제하고 다양성·이질성을 억압하는 획일화된 '국민'을 양산해낼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던져주고 있다. 또한 중국전통의 문화적 우월성을 전제로 민족적 배타성을 지닌 민족주의로 변질된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중화민족의 중화의식으로 집약되는 중국의 민족주의에서는 반제(反帝) 반봉건(半封建)의 신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시기를 거치면서 비판받았던 전통적 중화문화 패권주의로서의 '중화주의'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중화민족의 중화의식과 조국의식으로 무장된 중국 민족주의는, 중화주의 전통을 '비판적더라도 티베트, 위구르, 내몽골 등의 경우 중화세계와는 다른 별개의 문화권과 정치공동체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의식과 문화적 배경이 아직도 강력히 잔존하는 등 민족국가 구성의 정당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 역시 최종적으로는 현재보다 훨씬 완화되고 느슨한 형태의 민족통합체제를 목표로 발전해 나갈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Ⅳ. 중국 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사회의 변화1. 조선족의 형성과 이주 역사현재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의 이주 역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첫째, 이 지역의 토착민족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 동북지역에는 우리 민족이 세운 고조선, 고구려 등 고대국가가 존재하였고, 발해를 건국하였으며, 그 후 요?금?원?명대에는 이 지역에서 다른 민족과 잡거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조선족의 시원은 고구려 내지 고조선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려 때 중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은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明末?淸初에 이주한 무리도 있고, 근대 이후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착민족설에 대해 “조선민족의 선조가 건립하였다는 고조선이나 고구려는 독립국가로서 한국사의 범주에 속하며,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유민은 혈통 상에서나 민족성에 있어서 지금의 조선족과 직접적인 연계가 없다.”고 하여 현재 조선족의 직접적인 선조로 보기 어렵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둘째,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족 역사학자들은 중국 조선족을 ‘遷入民族’, 혹은 ‘跨境民族’으로 규정하면서 대체로 한반도에서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을 개척하면서 삶을 영위해 온 것으로 설명한다. 다만 이들이 언제 이주해 오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또 몇 가지 견해가 있다.① 조선족의 천입 시작을 원?명 시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 하지만 당시 이주하였던 조선인들은 이미 동화되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또 그 후손들을 찾을 수도 없교들은 경험있는 교원의 부족으로 머리를 앓고 있다. 교원부족으로 기인되는 조선족학교 교육질의 하강은 학생들의 중퇴와 한족학교를 찾게 하는 원인으로 되고 있다. 집거구 해체가 물의를 빚고 있는 또 다른 원인은 민족언어문자의 상실을 가속화한다는 것이다.연변자치주의 경우 조선족인구비례가 감소되고 농촌인구의 대량적인 유실로 하여 조선족의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가 문제시되고 있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당시 여기에 거주하는 조선족 인구는 350,898명으로서 자치주 전체 인구의 62%를 차지하였으나 2000년 말에는 자치주 전체 인구 2,184,502명의 38%선인 842,135명으로 떨어졌고, 2005년에는 33% 수준으로 떨어졌다. 현재 자치주 지정의 최소 요건 즉, 소수민족 비율이 30% 이상이어야 한다는 요건을 충족하는 문제에 대한 회의가 커져 가면서 조선족 자치주 해체에 관한 논의들이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다음으로 '한국바람'은 조선족 공동체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조선족 인구유동을 가속화한 최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1992년 한중수교는 중국조선족에게 한국입국이 제한적이나마 확대되어 조선족의 외지유출현상을 전면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수년간을 지낸 조선족들은 이 기회를 중국내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과정으로 이용한다. 조선족들은 한국방문으로 인해 민족공동체에 대한 응집력을 강화하기보다는 중국으로는 돌아가더라도 다른 지역의 이동을 꾀함으로써, 중국 조선족 사회의 해체에 일조를 하게 되는 셈이 된다.한국방문 뿐 아니라 중국 조선족이 한국 및 한국인과의 관계에서 겪은 모든 문제를 '한국바람'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조선족 삶과 인식의 변화는 '한국바람'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모국신화를 꿈꾸며 발전된 한국으로 이주해 온 대다수 중국 조선족들은 그러한 값싼 노동력의 주요 공급원으로서 한국사회 어느 법의 틀에서도 확실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계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자료를 조사하는 데 있어서 정확한 통계치라던지 최신의 자료가 많지 않아 중국 소수민족의 실태를 아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을 이들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그에 대한 처방 또한 최신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중국의 민족관계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들이 남는다. 첫째, 중국 건국 초기인 1950년대 초 중공이 민족평등과 단결을 내세우며 상당한 자원과 인원을 투입하여 원시부족 정도의 집단에게 '소수민족'의 지위를 인정한 것은 그들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으로서는 지나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55개의 다양한 종족집단을 왜 '민족'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인정했을까 하는 점이다. 인구 1천6백만의 장족, 그밖에 몽골족 티베트족 등의 민족과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한 종족집단을 똑같은 기준으로 인정했다는 점은 상당한 의문을 품게 한다.소수민족의 소요와 저항, 분리 및 독립 운동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전개될 것으로 짐작되지만, 가까운 장래에 소수민족의 현 상황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으며, 소수민족 문제만으로 현재의 중국 정치가 중대한 위기에 처할 개연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 사회의 다른 문제와 연동될 경우 그 파급효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다.그렇다면 중국 민족관계의 갈등과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을 실시해야 할까. 중국과 소수민족의 차이를 없애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즉, 한족지역과 소수민족지역 발전의 격차를 줄이고, 빈곤문제를 해결하며, 실질적인 민족자치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실질적 의미의 민족자치가 시행될 수 있도록 법적 장치와 제도적 틀을 갖추며, 정치, 경제, 사회, 교육부문에서 소수민족들을 위한 우대 정책을 펴야 한다.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조치들이 시행된다고 할지라도 중화주의에 입각한 한족우월주의의 관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