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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중세사]부곡인의 신분적 위치 고찰 - 양인론을 중심으로
    부곡인의 신분적 위치 고찰양인론을 중심으로{< 목 차 >1. 서론2. 천인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3. 부곡인의 신분적 위치 고찰3.1. 관직에 대한 규정3.2. 교가소산자녀(交嫁所産子女)의 귀속 규정3.3. 수취제도의 적용4. 양인으로서의 부곡집단의 존재 원인5. 결론6. 참고 문헌1. 서론고려시대 신분제는 양천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역사에 나타났던 모든 신분층은 일차적으로 양신분과 천신분의 어느 한쪽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려시대 국가적인 신분질서가 이러한 양천제를 표방하였다 하더라도 특히 양인신분 내부에는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였고 그러한 양인계층을 국가질서에 포섭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일정한 운영원리가 있었으며, 바로 그 속에 고려시대 신분제의 고유한 특성이 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양신분과 천신분의 범주를 확립하는 일은 이 시기 국가적인 신분 질서였던 양천제의 구조와 특성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문제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향·소·부곡 등 이른바 부곡인 의 신분적인 지위에 관한 것이다. 향·소·부곡에 대한 기록은 지리지 등에 대부분 그 명칭만 실려 있어서, 약 900여 개로 추정되는 부곡집단의 실체에 대해 해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박종기, 『고려시대 부곡제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머리말에서 인용.지금까지 이들 부곡집단에 대한 논의는 천인론과 양인론 두 가지의 상반된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중 부곡집단을 한국 고대 사회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 오랜 시간 존속해 온 천인집단으로 규정하는 천인론의 주장에는 이를 당대의 사회구조와 긴밀하게 연관 지어 접근하지 못한 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이러한 천인론의 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고려시대 부곡인들의 신분적 지위가 천인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이들에 대한 고려시기의 법제적 규정과 수취체제를 살펴봄으로써 고려시대 부곡인들의 신분이 양인이었음을 주장하대의 중국과 일본에 실재했던 부곡 이란 개념이 천인신분을 의미했음에 주목하여, 이를 한국사에도 적용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 부곡의 개념에 인간(人) 을 지칭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의 부곡은 향·소·처·장 등과 함께 단위조직 , 집단 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는 곧 한국의 부곡 개념에는 인간 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중국의 용어에서 부곡인들을 남녀로 구분하여 표현하였던 것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이러한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박종기, 위의 책, p. 20.이처럼 중국의 부곡과 고려의 부곡이란 용어는 그 개념범주가 다른 것이므로 하나의 층위에서 언급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천인론의 대표적 연구자라 할 수 있는 백남운은 사적 유물론의 전제 아래 부곡제를 고대 노예제의 한국적 지표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부곡집단 을 부족단체 로 규정하고,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부족단체 간의 분열과 전투로 인해 지배·피지배 관계가 형성되는 가운데 피지배 부족집단이 부곡 으로 형성된다고 하였다. 즉 백남운은 전술한 논의에 입각하여 부곡을 집단적 노예, 종족적 노예로서 규정한 것이다.{)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개조사, 1993.임건상 역시 백남운과 같은 시각에서 천인론의 논거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는 부곡의 발생을 촌락 공동체의 보존 과 발전 (예속관계의 전개)이라는 모순 대립의 발전과정에서 찾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 기원전후 철기문화의 전래로 사회적 분업이 발전하여 지방 토호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강화되자, 소국의 분립과 소국 간의 투쟁이 빈번해지는 데서 발생한 광범한 예속민집단을 부곡집단의 시원적인 형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시원적 형태로서의 예속적 촌락공동체 집단인 부곡이 이후 삼국의 정치적인 통일과정에서 군현제의 일환인 천인적 특수촌락으로 제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임건상, 『조선의 부곡제에 관한 연구』, 1963. 박종기, 앞의 책 p.13 에서 재인용.백남운과 임건상의 논의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계적인 사회의 제반구조가 형성되기 전단계의 예속민집단을 고려시대의 부곡인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를 지닌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개 농업에 종사하며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고, 추가로 특정의 역을 부담하는 등 국가에 대해 권리와 의무를 지녔던 고려의 부곡인을, 국가에 대해 그 어떤 권리와 의무도 지니지 못했던 천인들과 동일시 한 것 역시 천인론자들이 지니는 커다란 문제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본고에서는 지금까지 백남운과 임건상으로 대표되는 천인론자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들의 논리상의 오류를 살펴봄으로써, 고려시대의 부곡인을 천인으로 규정지을 수 없음을 밝혀보았다. 후술할 항목에서는 고려시대 부곡인들에 대한 법제적 규정 및 수취체제와 연관 지어 부곡집단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들의 신분적 지위가 양인이었음을 알아볼 것이다.3. 부곡인의 신분적 위치 고찰3.1. 관직에 대한 규정부곡인들에 대한 법제적 규정을 살펴보면, 이들은 제한적이었지만 관직으로의 진출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관직의 진출이 근본적으로 봉쇄되었던 고려시기의 천인들과 부곡인들이 신분적으로 동일한 집단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가장 주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부곡인이 관직에 진출했던 구체적인 사례로써 유청신 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부곡 출신이었으며, 유청신 자신 역시 부곡인이었다. 그는 역관으로서 원의 조정에 드나들면서 공을 세운 대가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부곡인은 공이 있더라도 관품이 오품을 넘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에 왕이 특별히 교를 내려서 그에 한해 삼품까지 관품을 내렸다. 여기서 부곡인의 경우 원칙적으로 5품을 한품(限品)으로 하는 법제적인 규정이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 천인신분층의 대표적인 노비는 국가에 대공이 있더라도 일체의 관직을 제수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도 천인 자체는 관직으로의 진출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천 이하 불효까지를 향, 부곡, 잡류의 자손과 같이 구체적인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고려사』권95.그러나 이미 잡류에 대한 과거응시가 허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하여 볼 때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천 이하 불효까지를 구체적인 사람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다음에 나오는 향, 부곡, 악공, 잡류의 자손을 수식하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자손들 중에서 국가에 대해 오천, 오역, 불충, 불효와 같은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과거응시가 허용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원칙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는 한 과거응시는 법제적 측면에서 부곡인들에게 허용되었던 것이다.{) 부곡인에게 과거응시가 허용된 것은 고려시대 역제 운영과도 또한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고려정부는 직역부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각종의 권리를 법제적으로 보장하였다. 구체적으로 직역부담층에 대해 전시과와 같이 국가적 토지 분급체계하에서 토지를 지급하거나 각종 사관직(仕官職)을 부여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시대 관료기구의 특 안에서 존재하는 제계층의 현실적인 신분지위가 결국 그들이 국가에 부담하는 역의 내용에 따라 일차적으로 결정되어질 수 있었던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은 일반 농민층이 국가에 부담하는 일반 요역이 아니라 특정한 역인 직역이다. 부곡인은 이러한 신분구조 아래 있었던 존재로서, 법제적으로 양인신분의 소지자였던 동시에 특정한 역 부담자였다.3.2. 교가소산자녀(交嫁所産子女)의 귀속 규정고려사회가 법제적으로 부곡인과 군현인의 혼인을 허용하였던 사회였음을 증명해 주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郡縣人與津驛部曲人 交嫁所生 皆屬津驛部曲 津驛部曲與雜尺人 交嫁所生中分之 剩數從母{) 『고려사』권84.위의 예문은 군현인이 진· 역· 부곡인과 혼인하여 낳은 자녀는 모두 진· 역· 부곡에 속하고 진· 척· 부곡인이 잡척인과 혼인을 하였을 때 낳은 자녀는 반으로 나누고 수 있을 것이다. 천인이 양인과 교혼할 수 없었다는 것은 노 (奴)가 양인과 혼인하는 경우에 노뿐만 아니라 노의 소유주와 양인의 가족까지 처벌하고 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 『고려사』권85, 형법 2.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며, 이는 고려시대 천인과 양인 사이의 혼인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부곡인의 신분 규명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3.3. 수취제도의 적용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려는 양천제를 신분제운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이를 바탕으로 한 일차적인 국가의 목표는 보다 더 많은 양인을 확보하여 국가의 재정적인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국가는 신분을 양인화하려고 하였으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에서 천인계층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노비를 살펴보면 국가나 개인에게 소속되어 단순히 신역만을 부담하였을 뿐 국가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나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다. 부곡인이 군현인과 함께 국가에 대하여 조세를 부담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양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일반 군현인과 부곡인이 국가에 대하여 나란히 조세를 부담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국가에 대한 공역 부담자층인 공민이었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군현인과 부곡인은 국가에 조(租)와 포(布)를 납부하였다. 일반 군현인과 함께 부곡인이 국가에 대하여 부담했던 조세 내용이 포괄적으로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조 · 조 · 역을 부담하였다.{) 『고려사』권80.부곡인은 군현인과 함께 또한 잡물(雜物), 요공( 貢) 등을 부담하였다. 고려시대 천인신분인 노비는 해당 관청이나 개인에게 예속되어 필요에 따라 토지경작이나 잡역에 동원되어 신역을 부담하였던 존재였다. 이들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 · 공물 · 요역 등 일체의 공적인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고려사』권85, 一兩班奴婢以其主役各別 自古未有公役雜 .따라서 이들은 수취체계상 공적인 영역에 포섭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이른바 국가적 수취체제하에 포섭되는 공민적 존재는 신분적으로 양인신분에 국한
    인문/어학| 2005.12.11| 7페이지| 1,000원| 조회(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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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사]존 스타인벡 - 분노의 포도 서평 평가A좋아요
    서론1929년 10월 29일 암흑의 화요일(Black Tuesday)' 주식 시장의 대붕괴를 시작으로 미국은 번영의 1920년대를 끝내고, 1930년대 대공황기를 맞이하였다. 경제 다양성의 부족, 부의 불균등 분배, 금융권 부실과 지불능력이 없는 가계채무의 누적, 국제무역시장에서의 수출 감소, 유럽국가에 대한 거대한 채무 등이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 결과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디플레이션이 심화되어 실업률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후버에 이어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는 대공황을 타계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실시한다.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는 이러한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우리가 대공황하면 흔히 떠오르는 1929년의 주가폭락, 도시에서의 실업과 산업부흥을 위한 뉴딜를 다루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배경은 농촌이며, 자연재해와 불황, 대자본가의 횡포와 기계화에 따라 땅에서 쫓겨난 농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대공황과 뉴딜정책의 설명에 있어서는 농업부분에 제한될 것이며, 다루고 있는 것이 소설인만큼 대공황기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당시 사회상은 소설의 구체적 서술을 통해 살펴볼 것이며 또한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작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존 스타인벡은 1902년 2월 2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리군 샐리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 이민의 후손으로 군청 재무관이었고, 어머니는 북아일랜드계 이민의 후손으로 결혼 전에 교사였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농장일을 거들며, 1919년 샐러너스 고등학교를 졸업한다.1920년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1921년엔 오랫동안 학교를 결석하고 노동자로서 사회의 밑바닥과 그 곳에서 일하는 서민들의 생활을 체득한다. 1922년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해 나가면서, 교내잡지인 「스탠퍼드 스펙테이터」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1925년 학자금 부족으로 대학을 중했고,『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Our Discontent, 1961)』로 성공을 거두며, 한물간 작가로 치부되었던 그는 노벨 문학상(Nobel Prize for Literature)을 거머쥐게 된다.「뉴스데이」지의 특파원으로서 1965년에는 유럽과 중동지방을 여행했으며, 1966년에는 베트남 전선에 나갔다. 이듬해 5월에 귀국하나 자리에 눕게 된 스타인벡은, 1968년 12월 지병인 심부전증의 악화로 뉴욕의 자택에서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작가와 『분노의 포도』스타인벡은 이주민의 후손으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고, 가난했던 젊은 시절 각종 막일을 해야했다. 캘리포니아는 그의 작품 속 배경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토지와 농민·노동자의 삶은 초기작품들의 주요소재가 된다. 그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33세에 부인과 함께 멕시코를, 35세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였으며, 38세 때는 해양 생물 채집차 40일간 캘리포니아 만을 항해하였다. 40세 때는 신문사 특파원으로 영국 및 지중해 방면 전선을 시찰하였고, 45세 때 소련을 여행한다. 50세 세 번째 아내와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을 여행하고 반년 후 귀국하였으며, 58세에 직접 캠프 카를 운전하여 한달 동안 대륙일주를 하였다. 그 다음해 10개월 간 유럽 여행길에 올랐으며, 61세 때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소련을 방문했다.기행문을 남겼으며, 신문사 기자로서 오랜 경력을 쌓았고, 자신이 속한 사회현실을 고발하는데{) 스타인벡은 작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장 가깝게 기록하여야 하며, 사회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불의를 공격하고 결함을 비판하기 위하여 사회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적극적인 등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분노의 포도』는 이러한 작가 자신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인 조드 일가는 오클라호마의 이주민의 후손으로서 땅을 잃고 가뭄에 쫓겨, 일거리를 찾아 66번 도로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향하고 있다.실제다. 대공황이 계속되었던 1929년 3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만 4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에 전체 농가의 14.3%에 이르는 89만 7천 농가가 파산하여 농토를 팔아야만 했다. 이제 농민들은 남의 소유가 되어버린 이전의 자기 농토를 경작하는 소작농이 되어 반자연경제(물물교환경제) 체제 내로 흡수되거나, 가재도구를 싸 짊어진 채 가족들을 거느리고 이미 방대해진 실업자군의 일원으로서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게 된다.2. 농업방면의 뉴딜정책1933년 3월초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33년 5월 12에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가 채택된다. 이 법의 목적은 농산물의 가격을 적정수준으로 유지시키고 농민들의 구매력을 높이는데 있었다. 이에 따라 7가지의 기본 품목(밀, 면화, 옥수수, 돼지, 쌀, 담배, 유제품)의 생산량을 제한하게 되었다. 농업 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 AAA)가 설치되어 개별 농민에게 생산할 양을 정해주고, 유휴 경작지에 대해 보조금을 지불했다.그러나 농업 조정청의 지원 혜택은 소농보다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갔다. 농지에서 직접 일하는 일들이 아니라 토지 소유자들에게 보조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소농들은 자신들의 경작지에서 얻어지는 수확량의 감소로 파산에 직면하곤 했다. 따라서 농업조정국의 활동은 농민들의 계급분화를 강화하면서 농업부분에서의 집중화 과정을 가속화시킨 결과를 낳았다.농업조정법에서는 이처럼 농산물 통제 조항뿐만 아니라 농가의 저당설정 채무의 변제를 자금지원을 통해 도와주는 조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농가신용 대출국이 설치되어 농가의 저당설정 채무액의 이자율보다 낮은 이자율로 농가대출을 실행해나갔다. 이 신용대출국이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대출한 총액은 20억 달러나 되었다. 하지만 이 지원금은 주로 은행과 보험회사 및 여타 독점 신용업체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소농의 경우 정부의 대출조건Gone with the Wind, 1936)』와 허비 앨런(Hervey Allen)의 『불운의 앤소니(Anthony Adverse,1933)』였으며, 이는 이전 시대를 무대로 한 낭만적 서사시였다. 이 시기의 주요 잡지들은 국가의 사회 상황보다는 패션, 묘기, 풍경, 그리고 예술에 더 초점을 맞췄다. 1936년 창간되어 인기를 끈 「라이프(life)」지는 정치와 공황기의 경제 상황에도 약간의 페이지를 할애했으나, 그보다는 스포츠와 연극, 자연풍경, 그리고 인상적인 공공 프로젝트에 대한 근사한 사진으로 더 유명했다.그러나 공황기에 등장한 또다른 문학 작품들은 명확하게 미국 대중 문화의 지배적 가치관에 도전했다.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 몇 편은 미국인 삶의 거침과 공허함에 대한 신랄한 초상을 그려 냈다. 존 도스 패서스(John Dos Passos)의 3부작 『미국(U.S.A.,1930~1936)』은 미국 문화의 물질주의적 광기를 공격했으며, 잭 컨로이(Jack Conroy)는 『폐적자(The Disinberited, 1933)』에서 탄광 노동자의 삶을 거칠게 그려냈다. 제임스 퍼렐(James T. Farrell)은 『종마 로니건(Studs Lonigan, 1932)』에서 갈 길을 잃고 비정해진 노동 계급 청년의 초상을 제시했고, 소설가 제임스 애기(James agee)와 시진 작가 워커 에번스(Walker Evans)는 『유명한 이들을 이제 찬양하도록 하자(Let Us Now Praise Famous Men, 1941)』에서 소작농과 농촌의 빈곤을 이야기했다.작품구성1. 신화적 모티브: 구약성서 「출애굽기」작품의 구성은 구약성서 「출애굽기」편과 매우 흡사하다. 즉, 이집트에서 압박받는 이스라엘 민족은 경제공황으로 은행과 지주에게 토지를 강탈당하는 농부들이고, 이스라엘 인들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조드 일가가 약속의 땅 캘리포니아를 향해 핍박받는 땅 오클라호마를 떠나는 것과 흡사하다. 40년의 갖은 고생 끝에 도착 데 크게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살인죄로 4년간 교도소에 가 있던 톰 조드는 가석방되어 트럭을 얻어타고 집으로 향한다. 트럭 운전사와 톰의 대화를 통해 부자들은 트럭 운전사들이 다른 사람을 태워주는 일까지도 금지시킬 정도로 비인간화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운전사는 소처럼 껌을 씹는가 하면, 자연의 재해와 부자들의 압력 때문에 소작인들은 자꾸만 떠나고 있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앞세운 근대적 기계문명에 의해 인간의 삶이 내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인간다운 삶은 기대할 수 조차 없고 사람들은 그저 쫓겨나거나 버티고 있는 실정이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인도하던 전도자는 종교를 부인하고 종교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삶 속에서 물질적인 욕구가 형이상학적인 종교나 철학의 담론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나는 바로 거기 놓아둔 훌륭한 복음서를...... 여기저기 들춰보고 하느라고 아주 너덜너덜 걸레를 만들어버렸지. 지금도 나는 가끔 영혼이 내 속에서 움직이지만 설교할 거리가 없단 말이야. 사람들을 인도하라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만 어디로 인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단 말이야.(28-29쪽)당시의 부조리한 상황은 출옥한 죄인으로 하여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서 다시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오게 한다.(36쪽) 인간의 운명은 산술적 계산에 의해서 좌우되고, 그들은 다양한 반응을 통해서 그 계산법에 종속되어 조종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인간은 사고하거나 감정 갖기를 꺼려하는 기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떤 자는 자기들을 몰아세우는 산수(算數)를 미워했고, 어떤 자는 두려워했으며 어떤 자는 산수를 숭배했다. 사고나 감정으로부터 피난처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었다.(42쪽)그리고 기계를 사용해서 인건비를 줄이려는 지주측 대리인들과 일할 수 있는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소작인들 간에 갈등이 일어난다. 기계를 대표하는 트랙터는 열두가구를 땅에서 몰아내며, 과거 같은 농부였던 자가 날마다 들어오는 3달러의 수입을 위해서 트 있다.
    독후감/창작| 2005.12.11| 10페이지| 1,000원| 조회(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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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서경천도 운동의 검토
    서경천도운동의 검토목 차서 론본 론1. 서경천도 운동의 배경(1) 국내1) 문벌귀족사회의 내부적 모순2) 예종의 왕권강화와 이자겸의 난(2) 국외1) 여진족의 성장과 사대외교2.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3. 서경천도 운동의 해석(1)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2) 왕권강화를 목적으로결 론서 론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그동안 역사가들에 따라 다양한 견해와 해석을 취해 왔다.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 즉 고려와 조선을 합친 1천년 동안 제일 중요한 사건으로 정의 내렸다. 그는 묘청의 서경 파를 낭가(고유의 신선신앙), 불교의 진취사상에 바탕을 둔 독립당이라 규정하며 이에 대립적인 세력으로 김부식 으로 대표되는 개경 파에 대해 한학의 보수사상에 바탕을 둔 사대당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서경천도운동을 이 두 세력의 다툼으로 바라보았다. 연구자들의 시각에 따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이병도는 그의 연구에서 풍수도참사상에 입각하여 묘청의 난을 해석 하였는데 묘청이 주장한 칭제건원, 금국정벌은 서경천도를 이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고, 인종 12년대에 가서 묘청 반대파의 세력이 강해져서 서경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자 반란을 일으켜서라도 서경천도를 강행하려 했다고 파악하였다.{) 이정신, 1996 ■묘청의 대외관계와 묘청의 난■ 재인용. 이병도, 1980『고려시대사 연구』김상기는 그의 연구에서 묘청일파가 대위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세운 것은 중앙에 대한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을 꿈 꾼 것으로 추정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이정신, 1996 「묘청의 대외관계와 묘청의 난」 재인용. 김상기, 1960 「묘청의 천도운동과 칭제건원론에 대하여」또한 하현강은 인종이 횡포해진 개경세력의 포위망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경세력을 이용하였으며, 결국 서경천도는 개경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실현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정신, 1996 「묘청의 대외관계와지를 살펴보며, 아직 공부하는 학부생의 입장에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도록 하겠다.본 론1.서경천도 운동의 배경(1) 국내1) 문벌귀족사회의 내부적 모순- 인주이씨를 중심으로 바라본 족벌세력고려중기 중앙에서 실력을 쌓은 문벌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정계를 좌지우지 하게 된다. 특히 음서제를 통한 관직의 독점과, 공음전과 녹봉(녹봉은 과전(전시과 토지)과는 별도로 국가에서 관리에게 미곡이나 포 등의 현물로 지급하는 급료제도)을 통해 경제적 특권을 누림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왕실의 외척이 되거나 귀족간의 통혼을 통해 배타적인 족벌을 형성하게 된다. 대표적인 족벌로써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 경주 김씨 해주 최씨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중 인주이씨 가문은 문종 이후 7대 80여 년간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 인주이씨 가문과 왕실과의 관계는 현종의 장인이었던 김은부가 인주이씨 가문의 이허겸의 사위가 사위였던 데에서 비롯되게 된다. 이렇게 왕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인주이씨는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 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써 등장하게 된다. 이자연은 1024년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부낭중, 어서잡단, 우승선을 거쳐 지중추원사, 중추부사 등을 지내다가 문종대에 이르러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임명된 후 정계의 핵심역할인 내사시랑 평장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세 딸(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을 문종에게 시집보내어 강력한 권력자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이 후에도 인주이씨에서는 순종, 선종의 왕비 여섯 명 중 네 명이 인주이씨 출신일 정도로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이 가운데 인주이씨 가문에서는 왕실의 후계자 싸움에 뛰어 들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자의의 난이다. 선종이 세상을 떠나자 헌종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더욱이 헌종은 몸이 쇠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때 중추원사였던 이자의는 자신의 생질(원신궁주의 아들)믿고 그의 왕위를 어린 태자에게 넘겨주면서 인종대의 정치적 혼란은 발생하게 된다. 인종대의 정치적 혼란의 근본적 원인은 이자겸 일파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예종 죽음 당시 관료세력들은 어린 태자보다는 왕의 아우들 중 한 명에게 선위하는 것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반해서 태자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형성된 외척 및 그 주변 사람들이었으며, 예종은 이자겸의 힘을 믿고 어린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후 이자겸은 한안인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히 하며, 이후 인종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그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이에 불만을 가진 인종과 그의 측근들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나 도리어 이자겸의 사위인 척준경의 활약으로 왕이 이자겸의 집에 유폐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후 이자겸은 수차례에 걸쳐 인종의 암살과 왕위를 찬탈하려 하나 그의 사위인 척준경과의 관계악화와 이를 이용한 인종과 그 측근에 의해 타도되게 된다.(2) 국외1) 여진족의 성장과 사대외교서경파의 금국정벌론 에 대한 주장은 당시의 국제정세(동아시아에서 강력한 존재로 떠오르고 있던 금나라의 위상)로 보면 허황된 주장으로 보이나 고려의 자주성 회복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서경파의 금국정벌론 이 현실적인 타당성을 떠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보이므로 우선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해 살펴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1107년(예종 2) 여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는 윤관으로 하여금 9성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영구히 고려의 영토로 삼고자 하였으나 여진족의 계속적인 공격과 애원의 강원작전에 밀려 결국 이 지역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여진족은 이 지역을 근거지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예종 10년에는 금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이후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1122년(예종 17)에는 요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함락시켰으며 결국 1125년(인종 3)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키자겸의 난으로 고려왕실은 완전히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자겸의 난을 겪으면서 인종은 개경의 귀족 세력이 왕권을 수호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국도를 옮겨 왕실의 위상을 되찾고자 하였다. 마침 그때 개경의 지덕이 다하여 국도를 서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대두 되었다. 풍수설에 근거한 이 같은 주장은 인종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였으며, 결국 서경천도론은 조정의 중론으로 떠오르게 된다.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서경의 승려인 묘청 이었으며,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풍수설에 바탕을 둔 서경 세력을 규합하였으며,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아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그의 주장에 따르게 된다. 이후 서경파는 국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인종의 허락으로 1128년 11월 김안으로 하여금 궁궐을 신축하게 하였다. 궁궐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여 낙성식을 가졌다. 그때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표문을 올려 칭제건원(왕을 제라 칭함)할 것을 권고하고, 주변국과 협공하여 금을 치자고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대화궁 축성이후 한동안 인종은 서경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 이듬해 서경 중홍사 탑이 화재를 당하였으며, 여러 가지 상서롭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들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인종은 오히려 묘청을 더욱 총애하였다.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 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 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대립되어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대화궁 건설 후 잇따른 재화에 묘청의 입지는 상당히 약화되게 된다. 이에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은 인종에게 서경 행차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과 병부상서 유참, 사재소경 윤첨이 옥에 갇히자 조광은 항복을 해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결사항전을 다짐하게 되고 약 1년여 동안의 항전 끝에 서경성은 함락되게 된다.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휘관들이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묘청의 난은 완전히 종결되게 되었다. 묘청의 난이 제압됨으로써 고려 조정 내의 서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으며, 불교 세력도 크게 쇠퇴하게 된다. 반대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묘청의 난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많은 역사가들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와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인종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는 견해를 검토해 봄으로써 이 사건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 더 나아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올바른 판단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보도록 하겠다.3. 서경천도 운동의 해석(1)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신채호 선생을 들 수 있을 것이며, 다양한 책과 학자들 또한 이 같은 견해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우선 이들은 서경파의 사상에 대해서 전통적인 풍수지리설과 불가가 융합된 형태를 가졌으며, 북진정책과 고구려 계승의식 칭제 건원(자주성 확립)등 의 사상과 주장을 하는 세력으로 개경파의 경우 유교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와 신라계승의식 북진정책에 대한 반대 등의 사상과 주장을 한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의 결과 발생한 사건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라 보는 견해이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있어서 묘청의 서경파가 내세운 것은 풍수지리설에서 나온 지덕설이다. 원래 풍수, 도참 사상은 고려 초기 이래로 크게 인심을 지배하여 왔다. 더욱이 1126년(인종 4년)이자겸의 난으로 인하여 궁궐이 거의 다 불타 버리고 천재지변이 연이어 일어난 그 시점에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개경의 지덕이식」
    인문/어학| 2005.12.11| 9페이지| 1,000원| 조회(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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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고려시대 귀족제 사회에 대한 비판적 고찰
    - 韓國 中世史 -『高麗時代貴族制社會에 대한 批判的 考察』{목 차Ⅰ. 서 론Ⅱ. 귀족 · 귀족사회의 개념Ⅲ. 고려사회는 전형적 귀족사회였는가?1. 법제상 세습특권의 존재 여부-음서제의 검토2. 반귀족제적 요소의 검토(1) 음서제의 반귀족제적 성격(2) 과거제의 성격(3) 실제적 성격Ⅳ. 고려사회는 실제적 귀족사회였는가?1. 실제적 귀족사회론의 이론적 근거 검토2.실제적 귀족사회론의 실증적 근거 검토 : 고려 문벌 의 특성3. 실제적 귀족사회라는 범주 설정의 문제점Ⅴ. 고려사회를 정의하는 제학설들의 검토1. 관료제사회설에 대한 검토2. 귀족관인사회설에 대한 검토Ⅵ. 결 론1. 본론의 요약2. 대안 및 전망참고 문헌I. 서론1) 문제의 제기종래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고려시대를 귀족사회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귀족사회론은 오늘날까지 확고부동한 통설로 자리 잡아 왔다{) 高麗時代史(上),박용운, 일지사, 1989,pp.66~67..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연구자에 따라 다소의 출입을 보였다 하더라도 1920년대 초의 개설서로부터{) 이기백,「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세력」,『한국사』4,국편위, 1974, p.152에서 안확저『조선정치사』,1923등을 들면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60년대 후반의 발표된 전문적인 논문에 이르기까지 대략 타당성 있는 견해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문벌이 누대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음서의 특권을 누리며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귀족 사회론은 실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귀족사회론에서 제시하는 고려의 사회상은 한마디로 문벌이 모든 사회적 특권을 사실상 독점하였다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의 사회실상의 중요한 일면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소수의 지배층이 모든 사회적 특권을 사실상 독점한다 는 명제는 비단 고려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사회까지를 포함한 그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명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설명으로는 고려사회가 지닌 특성을 드러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신라골품제사회를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신분이라는 범주의 용어에 부합되는 대상으로서 귀족만큼 뚜렷한 것이 없다. 따지고 보면 신분이라는 개념 자체가 귀족을 모형으로 하여 만들어진 개념이라 할 수 있다.이상과 같은 귀족의 개념이나 지표 자체는 별다른 이견없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귀족사회론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려시대 연구자가 실제의 작업과정에서 귀족의 개념이나 지표를 임의로 확대하거나 변개하여 사용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귀족의 분류·검출을 위하여 개념의 구성요소 내지 지표를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우선, 귀족의 첫 번째 지표인 법제적 특권의 향유 에서 법제적 특권의 조건은 첫째, 사회적 서열을 결정하는 데 간접적으로 은폐된 형태로 작용하는 법제가 아니라 사회적 서열을 결정하는 직접적이고도 명시된 법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지배층은 여러 가지 사실상의 특권을 누리게 마련이며, 오늘날의 선진사회 라 하여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둘째, 후천적으로 성취한 지위에 따른 특권은 귀족의 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처럼 얼마든지 법제적 특권이 부여될 수 있지만 이것과 귀족이 향유하는 특권은 그 원리가 다르다. 하나는 성취를 원리로 하여 부여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출생을 원리로 하여 부여되기 때문이다.다음으로는 귀족의 두 번째 지표 지위의 세습 에서, 세습은 단순히 세습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회균등이라고 말해지는 오늘날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거듭하여 사회적 지위가 고정되고 세습되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계급현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오늘날의 계급과 전근대사회의 신분을 동일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귀족이라면 그 지위의 세습이 법제에 의해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습이란 1 가문이나 혈통 자체를 기준으로 한 전수, 2 부조와 자손 사이의 지위의 일치, 3 지위의 계승에 대한 영구없으며 특별한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음서에 애당초 관품 즉 성취적 지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기회가 모든 관인, 나아가서는 사환권을 가진 모든 자에게 열려 있다. 일단 5품에 도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특전을 받게 되고 5품에 오르지 못하는 한 유음자손이라도 자동적으로 탈락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음서제는 귀족제와는 원리가 다르며 그 안에 귀족제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다.2. 반귀족제적 요소의 검토(1)음서제의 반귀족제적 성격음서제는 귀족제적 요소만이 아니라 반귀족제적 요소도 함께 지닌 제도였다. 음서제에는 능력주의와 경쟁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음서제는 귀족제와 다른 원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귀족체제를 무너뜨리는 역할도 할 수 있게 된다. 가령 국왕이 가문의 배경은 보잘 것 없으나 능력이나 충성이 남다른 자를 중용하고자 하면 음서제는 기존의 명문에 속하지 않는 자로 하여금 국왕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유발하는 강력한 유인책이 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자손까지 복무시킴으로써 기존의 관료집단을 대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음서제는 기성의 고관이 자신의 가문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새로운 참여자를 끊임없이 유입시킴으로써 기존의 역관계를 해체시키는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그러한 실례로서는 위진남북조 시대 진에서 시행한 음서제 즉 임자제(任子制)를 들 수 있다. 미야자키는 임자제도를 법제화한 것은 확실히 새로운 경향이었다. 왜냐하면 귀족인 자는 오랜 역사의 퇴적에 의해서 생긴 때문에 몇 세대나 관계하여 비로소 이 은전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풍운을 타서 고관이 되는 데 성공한 자여도 고위의 관료라는 지위에 의해 그 자를 비서랑으로 기가(起家)시킬 수 있는 것이다. 명백히 이것은 귀족주의의 정신과는 상용되지 않는 이질의 것이다 라 하여, 음서제가 지닌 반귀족제적 속성을 설파한 바 있다.이처럼 음서제는 반귀족제적 요소도 강하로 채택되었다는 것은 고려사회가 전형적 귀족사회일 수 없는 무엇보다 뚜렷한 증거가 된 것이다.왕족을 정치권력에서 배제해버린 것도 고려사회가 지닌 반귀족제적 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간과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된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나 가장 대표적인 귀족은 왕족이었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왕족보다 더 우월한 혈통을 가진 귀족이 있을 수 없다. 전시대인 통일신라사회만 하더라도 왕족인 진골은 최고귀족으로서 귀족회의를 구성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고위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왕족은 종친불임이사 의 원칙에 따라 실직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김성준, 1964,「종친부고」,『사학연구』18최고의 혈통, 최고의 가문이라 할 왕족을 이처럼 권력에서 소외시킨 조치는 세습귀족제 폐기에 대한 사회적 공간대가 폭넓게 형성되지 못하였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Ⅳ. 고려사회는 실제적 귀족사회였는가?1. 실제적 귀족사회론의 이론적 근거 검토이 장에서는 과연 고려사회가 실제적 귀족사회였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전형적 귀족사회가 아니어도 실제적 귀족사회론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일까. 1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법제상 세습특권을 갖지 않아도 사실상 세습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집단이 있다면 이들이 곧 귀족이요, 이러한 귀족이 지배층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면 그러한 사회를 귀족사회라 할 수 있다. 2 귀족의 존재형태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전형적 귀족사회라는 것은 서구에서나 존재한 것이니 서구의 경우와 다르다고 고려사회를 귀족사회가 아니라 주장할 수 없다.우선 시대나 지역차를 고려하여 고려사회의 독자적인 귀족·귀족사회의 개념이나 지표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를 검토해 보자. 오늘날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귀족사회의 像은 본래 서구의 것{)noble·nobility, aristocrat, peer등을 번역한 용어가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세미나 석상에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제시한 6가문 역시 그 문벌로서의 대두나 유지의 결정적 계기는 대체로 과거급제에 있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예컨대 직계로 따져 가장 많은 대수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정안 임씨의 경우는 재상 전원이 과거 합격자로 나타나며 다른 가문들도 대체로 그러하다. 고려 전후기를 통틀어 최대 문벌이라 할 경원 이씨 역시 가문의 터전을 닦은 이자연이 수석 합격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음서 역시 중요한 사환으로서도 이용도가 높았고 음서만으로도 현달할 수 있었다. 문벌의 자제들은 그만큼 음서의 이용도 많았고 음서를 이용하여 재상이 된 자도 많았다. 이자겸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음서를 이용하여 재상이 되는 경우는 거의 틀림없이 같은 시기에 다른 성원이 과거합격자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는 시기였다는 사실이다.고려의 경우에도 혈통·가문의식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강도는 의외로 미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고려사회에서는 신인이나 신흥가문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나 배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첫째, 비명문 출신자가 특별한 공로 없이도 당대에 재상, 심지어는 수상까지 오르는 예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이름난 명문들로부터 대부분 그렇게 해서 가문을 일으켰다. 해주 최씨에서 부·온은 한낱 해주의 향리에 불과하였는데 최충(崔沖)은 목종 8년, 22세의 나이로 과거에서 수석 합격하면서 중장무대에 대두하여 재상을 거쳐 문종 원년에는 마침내 수상의 지위에까지 도달하였다.파평 윤씨를 일으킨 윤관의 경우도 유사하다. 그는 결코 기성의 명문과 견줄 수 없는 가문 출신인데도 문종조에 등제한 후 예종 3년에 수상까지 올랐다.{)「고려시대의 해주 최씨와 파평 윤씨 가문 분석」p.141.윤관은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그의 출세는 이미 여진정벌 이전의 일로써 윤관은 문벌 귀족세력을 억제하고자 하였던 숙종의 의도에 의해 정계의 주요인물로 부각되었다.{)1.
    인문/어학| 2005.12.11| 21페이지| 1,500원| 조회(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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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당, 당간, 당간지주
    당 · 당간 · 당간지주1. 당간지주의 의미당(幢)이란 본래 사찰의 마당이나 문앞에 꽂는 깃발의 일종으로서 그 표면에 불화가 그려져 있으며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당간 정상에 달도록 되어있는 것이다.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간을 고정하여 세우기 위한 지주이며, 당간은 당을 걸기 위한 시설물이다. 당은 일찍부터 사찰의 장엄용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이 불교 경전에 보이고 있다.이러한 당은 오늘날 깃발과 같은 형태의 것으로 번(幡)과 같이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워졌으며, 불전(佛殿)을 장엄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천으로 제작되었다. 당간지주는 기단부를 마련하고 2개의 돌기둥을 양쪽으로 세워 마련한다. 돌기둥의 각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당간은 양지주 사이에 나무나 돌, 철 등을 활용하여 세우는 높은 깃대와 같은 것이다.2. 당간지주의 기원우리나라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번과 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간지주를 세워 당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도 없다. 당간지주를 세워 당을 걸기 시작한 것은 남아있는 유물들로 보아 통일신라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불교 전래 이후 삼국시대 말기에는 당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통일신라 초기에는 당을 걸기 위한 당간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당간지주는 동양의 같은 불교국가였던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한국이 많은데, 이러한 이유는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불교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과 관련하여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있었던 한국의 고유한 신앙형태로 삼한의 소도신앙이 주목된다. 당시 불교 전래 직후에도 소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어떤 형태의 신성구역이 존재하였으며 이를 표시하기 위한 조형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많은 솟대와 장승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다.3. 당간지주의 등장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직후에 등장하여 여러 종류의 당간지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전국 사찰에서 가람 구성의 필수적인 건조물로 사찰 입구에 세웠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가 대대적으로 건조된 시기는 대승불교의 등장으로 불도들의 수가 증가하고, 밀교의 등장으로 의례와 사찰의 외형적 측면을 중시하는 풍조가 형성되어 각 절의 위상과 종파적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남에 따라, 필요성이 증대하여 대대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당간지주는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절의 위상을 분명히 해야할 필요성으로 더욱더 건립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절의 위상과 불도들에게 사찰의 위엄을 보임과 동시에 경내는 승려들의 신성한 공간으로서 불도들이 드나들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인식을 유도하였을 것이다.4. 가람에서의 당간지주당간지주는 사찰 가람의 중요한 부속물로서 사찰의 입구에 세워졌다. 이것은 당간이 상징성과 관련하여 사찰의 전체적인 건축 공간을 배려한 배치임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를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배치하여 경내로 들어가는 불도들에게 불심을 갖고 신앙심을 유도하기 위한 조형물이었다. 나아가 당간을 용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사찰로 들어오는 악마를 막고 불법을 수호하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에 사찰의 입구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당간지주의 양지주가 마주보고 있는 방향은 사찰 가람에서 건축물들의 배치를 추정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만약 당간지주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면 사찰의 건축물들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을 중심으로 하여 배치된다.5. 당간지주의 의의특히 당간의 형태를 용으로 형상화한 것은 당간이 단순히 당을 걸기 위한 시설물이 아니라 당간의 정상부에 당을 걸어 사찰로 들어오는 악귀를 막고 사찰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불법을 수호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의식과 행사시에 당을 걸 필요성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 통일신라와 고려가 불교국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볼 때, 신도들의 증가로 법회시 모든 신도들이 석가모니불과 대면하여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더욱더 필요성이 증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이 가장 많지만,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형식은 유지되면서 부분적인 변화를 보이며 계속적으로 제작되고 있어 사찰에서 꼭 필요한 건조물이었다.간대 - 기단부 위인 양지주 사이에 결구되는 부분으로 당간을 받치는 부분이다. 앞뒤면에 연화문 등으로 장식하기도 하며 기단부와 같은 높이이거나 높게 설치된다. 가운데에는 원좌와 원공이 시설되어 있다.원좌 - 간대부 상면에 원형으로 돌기된 부분으로 당간의 하단부를 받치는 역할을 한다.원공 - 원좌 안쪽으로 뚫린 원형의 구멍으로 당간 안쪽의 심주를 끼워 단단하게 고정하는 부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각형으로 홈을 파기도 한다.간 - 양지주 사이에 서는 당간을 지주부에 견고하게 연결시켜 고정시키는 철로 만들어진 띠를 말한다. 당간에 접착시키거나 원형의 당간을 한바퀴 돌려 간구나 간공으로 연결시켜 준다.간공 - 지주 안쪽면 중간 부분에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홈으로 당간을 세워 고정시키는 간을 끼워 고정하는 구멍이다. 보통 1∼2개의 구멍을 마련하는데, 지주부를 관통시켜 원형이나 사각형으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다간구 - 지주 안쪽면 꼭대기에 나있는 구멍으로 당간의 윗부분을 지주에 고정시키기 위한 간을 끼우는 부분이다.7. 종문대 - 지주부 각면의 외곽이나 바깥면 중앙부에 일정한 넓이로 띠를 돌리거나 돌기된 형태로 장식한 띠를 말한다.
    인문/어학| 2005.12.11| 5페이지| 1,000원| 조회(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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