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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남아시아 해외 문화 탐방 계획서 평가A좋아요
    해외탐방활동 계획서■ 테마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구를 통한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해양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팀명팀장팀원■ 목 차 ■Ⅰ. 탐방테마 및 지역 선정 이유Ⅱ. 해상 실크로드의 발전과 쇠퇴1. 동서문화 교류의 새로운 패러다임, 해상 실크로드.2. 해상 실크로드의 발전, 전성기 그리고 쇠퇴.Ⅲ. 해상 실크로드와 동남 아시아 네트워크1. 동남아시아 무역항의 발전2. 동남아시아의 특징Ⅳ.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무역항 분석1. 해양실크로드의 무역거점, 아유타야2. 해양실크로드의 살아있는 화석, 싱가포르3. 무역중심지였던 말라카4. 베트남의 주요항구, 호이안Ⅴ. 탐방 목적 및 계획Ⅵ. 탐방 일정 및 예산1.탐방기간 및 내용2.여행 경비 및 내용Ⅰ. 탐방테마 및 지역 선정 이유국내체류 외국인 현황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아시아의 역사는 동북아시아의 역사였다. 동남아시아는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동북아 중심의 역사관에 밀려 아시아에서 늘 변방이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은 작게는 동북아시아와 인도의 사이의 해상무역이 활발한 곳이었고 크게는 해상 실크로드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동서 교류의 고속도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규모는 2007년 현재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하고 그 중 동남아시아인이 두 번째로 많은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동남아시아는 어떤 의미인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동남아시아, 동남아인이란 이른바 ‘불법 체류자’와 ‘베트남아가씨’등으로 인식되어지고 있으며 이는 또한 경멸적인 시선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잘못된 시선 때문에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동화하지 못하고 무시당해왔고 또한 그러한 시선은 아직까지도 바뀌지 않는다. 외국인들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서양인 특히 백인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당한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단순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라서 이러한 인식이아만이나 홍해에 이르는 길이다. 이 해상 실크로드에 의하여 비단·도자기 등의 중국 물자가 서남아시아로, 유리·향신료 등의 서남아시아 물자가 중국으로 운반되었다. 동진(東晉)의 법현(法顯)과 당(唐)나라의 의정(義淨) 등은 인도에서 돌아올 때 이 바닷길을 오가는 남해선(南海船)에 편승하였다.해상의 실크로드는 어느 한 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교역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교역을 담당한 교역로이다. 이 해상의 실크로드가 동아시아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었던 문화적?지리적 이유와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내용까지 살펴보고자 한다.동아시아는 그 내재적인 다양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지역적 정체성이 형성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역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지역 국가들의 공통의 정체성을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지리적?역사적?문화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단순히 특정 국가나 민족 또는 대륙적 관점에서 찾기보다는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를 연결하는 해양 중심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또 다른 동아시아의 역사적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먼저 동아시아의 해양지리 적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해안을 따라 여러 해양들은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S자 곡선을 형성하고 있는데, 각종 해양들에 의해 형성된 사슬 형태의 반도와 부속 도서들은 동아시아의 지리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공간을 제공한다. 해양지역이란 대양보다는 작으며 내륙보다는 만이나 내해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해양의 교차’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무역 연계망도 S자 곡선에 따라 한반도의 부산, 일본 열도의 나가사키, 중국의 상해 및 홍콩, 말라카 반도의 싱가포르 등과 같은 무역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연계하는 중국의 동부해안은 동남아 지역의 말라카 해협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인도양으로 통하는 출입로가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형성된 해안 영역, 해안 주변 그리고 이와 연계된 바다7척의 범선과 28,00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무적함대의 면모를 갖춘 정화 함대는 베트남의 해안을 통과하여 자바?수마트라?스리랑카를 거쳐 인도 서남부의 캘리컷에 이르렀다. 4차 원정 때에는 함대의 일부가 호르무즈 해협까지 갔으며, 5차 원정 이후로는 홍해 입구의 아덴과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의 소말리아와 케냐 해안까지 진출했다.마르코폴로와 정화의 원정로그러나 정화의 함대는 전투?탐험?통상 등의 모적을 추구한 함대로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중국 역대 왕조가 항상 그랬듯이 여러 나라들에 은혜를 베풀고 그들이 중화 중심 질서에 동참하도록 강요하는 사신들의 행차에 지나지 않았다. 함대의 중심을 이루는 거함인 ‘보선’은 각지의 지배자에게 사여할 ‘황제의 하사품’과 각지의 물품들을 황제에게 헌상하는 ‘보물을 싣는 배’였다. 요컨대 정화의 원정은 중국 황제의 도량을 베푸는 데 주목적이 있었던 것이다.정화의 원정 이후 중국이 해외진출을 중단하고 내부로 돌아섰을 때에도 포르투갈의 해양탐험은 계속되었다. 엔리케에 이어 실제로 포르투갈의 대탐험 시대를 연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마침내 1488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에 이르렀다. 디아스의 뒤를 이어 포르투갈의 위대한 군주 동 마누엘의 명을 받아 1497년 리스본을 떠난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이 12,000마일의 항해 끝에 인도의 캘리컷 인근에 도착한 것이 1498년 5월이었다.바스코 다 가마가 1497~1499년까지 그리고 1502~150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성공적인 인도 항로를 개척한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고아와 코친에 총독을 두어 전력 거점을 설치했다. 이들은 나아가서 인도와 동남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이르는 이른바 해상 실크로드의 요충지마다 전략적인 해안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륙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요새와 항구를 통해 현지 국가들을 통제하면서 동방무역을 주도한다는 전략이었다.인도에 전진기지를 확보한 포르투갈은 1511년 . 당시 인도는 로마에서 금화를 수입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69-79)에 금 수출이 중단 되면서 인도 상인들은 새로운 금 공급처를 찾아야 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 해상 실크로드가 육상 실크로드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해상왕국으로서 스리위자야의 출현은 중국과 인도, 말레이 지역과 중국 사이에 있건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이루어진 무역과 동남아시아 내에서의 무역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리위자야가 동남아시아 해상 무역을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스리위자야 통치자의 혜안이었다. 그들은 수마트라 내륙의 자신의 영토를 공고하게 했고 경쟁관계에 있던 항구와 영토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이로 인해 말레이 지역의 농업, 삼림, 대양의 생산품은 스리위자야의 항구에 집중되었고, 스리위자야는 또한 무역 자원을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교적 전략적이지 못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선단은 결국 스리위자야가 말레이 지역의 서쪽의 무역을 장악할 수 있게 해주었고 해적과 다른 나라의 공격으로부터 근해를 보호했다. 또한 중국을 보호자로 인정하고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침으로서 스리위자야의 배들은 중국의 항구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해상왕국으로서 스리위자야는 생존을 위한 전략을 취했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스리위자야는 살아남기 위해 잠재적인 위협이었던 두 개의 초강대국과 외교관례를 맺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레이 지역 내에서 세력을 강화하고 확장하였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차 주변의 무역 중심지와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292년 이후 마자파히트 왕조에 의해 스리위자야는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해상 무역로를 잃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4세기 말이 되면서 마자파히트 왕국은 독립하고자 했건 봉신들로 인해 내부 분쟁이 일어났다. 마자파히트 왕조로부터 잘려 나왔던 그 중 하나는 말레이 무역체제의 중심, 즉 말라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신화이다. 푸난이 쇠퇴하고 첸라(Chenla)라고 하는 크메르 왕국이 현 캄보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앙코르 제국으로 발전했다. 앙코르 제국의 건축물을 보면 힌두교와 불교가 절묘하게 조합되어있다. 7세기경부터 수마트라에서 크게 번성하던 해양 국가 스리비자야(Srivijiaya)에서는 대승 불교가 발전했고, 8세기경부터 자와 지역에서 흥기한 사일렌드라(Sailendras)가 남긴 보로부드르(Borobbudur)사원은 불교 세계와 관련된 부조로 유명한 불교 사원이다. 그러다가 13세기부터 크게 발전한 마자파히트(Majapahit) 제국에서 마지막 불교-힌두교의 전통이 보이고, 이후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을 이슬람화되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베트남만 제외하고 소승 불교화되었다. 베트남은 인도의 영향에서 예외이다. 현 베트남 북부 지역에 이미 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영향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다가 10세기경 독립한 이후에는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곧이어 남쪽으로 영토를 팽창하여 중국적 요소를 현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 지역까지 전파했다. 베트남이 한자와 대승 불교, 젓가락 등 북동 아시아적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동남아시아로 분류되는 요인 중의 하나는 베트남이 인도 문명권으로 진입하고, 또 일정부분 그 문화를 흡수했다는 것이다. 영토를 확장하고 사람들을 베트남화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부의 참파나 남부의 크메르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 사이공의 중심지에서 힌두교 사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메콩 유역에는 크메르 사원들이 많이 남아있다. 중부에서는 참파 고탑(古塔)과 사원들이 그대로 남아 베트남 문화유산이 되어있다.● 공통점동고동남아시아 문화권의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보면√첫 번째로 공동의 문명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다. 동고(銅鼓 bronze drum)이라는 것이 있는데, 절구를 뒤집어 놓은 듯 하게 생긴 이 유물은 표면에 공통적으로 태양 문양이 있다. 동고는 베트남의 이다.
    인문/어학| 2009.06.04| 25페이지| 5,000원| 조회(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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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통의 리더쉽 평가A+최고예요
    소통의 리더쉽목 차Ⅰ. 소통의 리더쉽이란 무엇인가?1. 소통의 리더쉽의 등장 배경2. 소통의 리더쉽 정의Ⅱ. 리더를 통해 본 소통의 리더쉽1.솔직하고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화신 프랭클린 루즈벨트2.뉴딜정책3.제2차 세계대전4.루즈벨트 리더쉽의 평가Ⅲ. 맺음말Ⅰ. 소통의 리더쉽이란 무엇인가?1. 소통의 리더십의 등장 배경과거부터 인류의 역사는 리더를 중요하게 여겼고 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중심의 역사는 그 리더를 뒷받침 해 온 대다수의 대중들의 역할을 매우 소극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 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요인으로는 프랑스혁명 이후 출현하게 된 근대국민국가의 성립을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은 대중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피지배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그들이 국가의 주체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국가의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역할에 의해 국가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절대 왕정기 전제왕권의 힘의 강제로 이루어지던 국가는 이제 대중들의 다수와 회의로 변하게 되었고 지도자들도 이제는 특별한 계급에 위치해 있던 왕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나온 인물들로 변하게 된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근대국민국가들은 초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파시즘 정권의 등장은 이러한 대중과 지도자와의 관계가 얼마만큼 타락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일으킨 유래없는 대전쟁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제도까지 오게 되는 과정 속에서 대중들의 역량은 과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지게 되었고 지도자들이 과거와 같은 ‘나를 따르라’ 식의 전통적인 리더쉽이 더 이상 대중들에게 수용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권력적이고 일방적인 리더십이 점차 퇴색하고 통합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겪는다. 소통의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인터넷 세계에서조차 말은 일방적이고 억지여서 소통과 거리가 먼 상황을 본다. 이러한 것은 단지 일상에서 뿐 만 아니라 조직체, 즉 기업이나 국가에 있어서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된다. 특히 한 국가를 구성하는 수많은 공동체의 다른 이념이나 인식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며 모든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사람 혹은 집단들을 이끌어가야 하는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며 공동의 이익 추구라는 대 전제하에 다른 의견에 대해서 충분히 수용하고 설득하며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소통을 위해선 겸허한 자세와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소통에서 필요한 것은 달변이 아니라 경청이라는 점도 명심할일이다. 우선 앞으로 살펴볼 소통의 리더십이란 간단하게 정의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더라도 설득과 소통을 통해 공동이익이나 공동의견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통의 리더십은 협력적 리더십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데 협력적 리더십에서 진정한 리더십은 상호간의 환경 내에서 일어나며, 공통의 가치와 비전에 기초하여 조정된 행동이다. 소통의 리더십의 요소에는 상호존중의 태도, 공개적이고 투명한 태도, 동반적 리더십, 결단보다 타협 중시, 대등한 인간관계 존중, 자발적 동의 중시, 토론 과정 중시 등이 있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서 권위주의형 리더십과의 차이점도 파악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소통의 리더십에서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토론과 토의를 거쳐 결정에 도달하는 의사소통 과정이 핵심으로 간주된다.Ⅱ. 리더를 통해 본 소통의 리더쉽최근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광우병소 수입조항에 대해 준비성 없는 조약, 졸속 조약이라는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익과 경제발전에 이바지함이 쇠고기 협상의 목적일지라면 국민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여론은 그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에 대한 그의 전망은 사후에 국제 연합 결성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에 네 번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했던 장기 집권자이기도 하다. 그가 대통령직임 중에는 여러 차례의 위기가 있었기에 우리는 루즈벨트의 정책을 살펴보고 그 정책에서 의사소통의 리더십을 살펴보도록 하겠다.2. 뉴딜 정책올해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발표, 시행한 지 75주년이 된다.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는 가운데 미국인들은 경제적 수렁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21세기의 루스벨트’를 고대하고 있다. 루스벨트가 제3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1933년 3월 미국의 경제상황은 최악이었다. 1929년 10월24·29일 뉴욕증시의 폭락은 대공황의 신호탄이었다.1929∼1933년 사이 실업률은 4%에서 25%로 급등했다. 산업생산은 35% 줄었다. 농산물가격도 60%나 급락, 농업의 근간이 흔들렸다. 200만 명이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았다.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로 문을 닫는 은행들이 속출했다. 그는 이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가 취임한 1933년 처음으로 당시에 이미 널리 보급된 라디오를 통하여 국민에게 소신을 피력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졌다. 솔직하게 국가의 상황을 설명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국민의 변화를 유도했기 때문에 반대세력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으나 1934년 중간선거에서 미국 유권자는 1860년 양당체제 이후 처음으로 여당의 의석을 늘려 주었다. 그의 정책에 대한 신뢰와 그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됐다.뉴딜 정책은 1차 뉴딜(1933∼1934)과 2차 뉴딜(1935∼1936)로 나눌 수 있다. 뉴딜 정책에서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한 예는 은행의 구제에 있다. 우선 은행들에 ‘휴업(bank holiday)’명령을 내렸다. 은행들을 재무부의 감독 아래 두고, 필요할 경우 연방은행에서 자금을 지원토록 한 긴급은행법이 통과됐다일부 경제학자들은 뉴딜정책으로 경제공황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연방정부의 개입과 각종 규제정책의 도입으로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다른 경제학자들은 뉴딜정책 때문에 경제회복이 오히려 더뎌졌다고 비판한다. 뉴딜 정책을 성공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뉴딜 정책의 성공의 원동력이 루스벨트 개인의 능력도 출중했지만 주위에 강력한 지지자들과 뛰어난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다고 보았다. 루스벨트는 서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하도록 만드는 데 달인이었다.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결론을 도출해 내라고 다그쳤고, 결국 이들은 타협을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았다. 루스벨트는 상당히 인간적인 면이 강했던 대통령이다. 특히 의사소통 능력이 탁월했다. 매주 일요일 대국민라디오 담화, 이른바 ‘노변정담’이 대표적이다. 국민들은 경제건 전쟁이건 루스벨트만 믿고 따르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또한 뉴딜 정책이 실패라고 보는 사람들도 루즈벨트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는데 이 이유로는 변화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이를 솔직하게 알리고 대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민 혹은 주위의 인재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했기 때문에 신뢰를 얻게 되었다.3. 제2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은 뉴딜 정책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뉴딜 정책은 반쪽의 성공에서 완전한 성공으로 이루게 한 것에 2차 세계대전이 큰 원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루즈벨트의 소통의 리더십은 발휘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럽전선에 아이젠하워장군을 파견하여 영국군, 프랑스레지스탕스들을 비롯한 연합군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고 태평양전선에서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군을 요격하기 위해서 맥아더장군을 태평양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연합군을 간접적으로 지휘하였다. 그 결과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얄타체제라 불리는 흑해연안의 휴양도시인 얄타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수상, 소련 스탈린이 모여서 회담을 벌여 추축국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공감을 이끌어 냈던 것이 그것이다.4. 리더십 평가루즈벨트의 핵심역량은 탁월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는 여러 채널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명한 노변담화(fireside chat)였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새로운 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직접적인 연설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좋은 효과가 있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루즈벨트는 진실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실체가 없는 환상에 빠지지는 않았다. 환상에 빠질 경우, 정부와 그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이 깨지고, 무엇보다 국민이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은행권 위기에 관한 노변담화에서 그는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긍정적인 내용이 부정적인 내용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국민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가 만들어낼 수 없는 기적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려 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재임기간 중에 세계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를 겪었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33년 3월 4일 첫 취임식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에 휩싸여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막연하고 이유도 없고 정당하지도 않는 두려움입니다.”라고 말하며 현실적인 확신과 낙관주의를 발산하며 취임했다. 막연하게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움의 실체를 알고 하나하나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아 1500만 여명이 실업상태에 빠졌고,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연쇄도산으로 광범위한 공포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경제 프로그램보다 자신감 회복이 경제 불황 극복에 급선무임을 루즈벨트는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져오는 끝없는 불안과 패배주의가 바로외쳤다.
    사회과학| 2008.07.13| 7페이지| 2,000원| 조회(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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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인과 된장
    현대인과 된장Ⅰ. 머리말Ⅱ. 된장의 영양성분과 신체 내 효과 분석1. 콩의 영양성분2. 된장의 성분과 체내기능3. 된장의 항암효과Ⅲ. 맺음말현대인과 된장 1.hwpⅠ.머리말예로부터 된장은 우리밥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된장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원전 3세기에 쓰인 중국의 ‘주례’라는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장에는 ‘해’와 ‘혜’로 나눌 수 있다. ‘해’는 짐승고기나 물고기를 가리지 않고, 이것을 햇빛에 말려서 고운 가루로 하여 술을 담그고 여기에 조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잘 섞어 항아리에 넣고 밀폐하여 100일간 어두운 곳에서 숙성시켜 얻은 것이며, ‘혜’는 재료가 ‘해’와 같으나 청매즙을 넣어서 신맛이 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처음 발효시킨 장은 고기로 담근 중국의 장이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콩을 재료로 하여 만든 우리의 장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히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살펴 보면 ‘고구려인은 장 담그는 솜씨가 훌륭하다’, ‘발해의 명물은 책성에서 생산되는 된장’ 이라는 기록이 나와 그 솜씨가 중국에까지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 중에서 된장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인데 그 내용을 살펴 보면 신라 신문왕 3년(683년)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면서 폐백품목이 15수레 쌀, 술, 기름, 꿀, 포, 식혜를 비롯하여 간장, 된장 등이 135수레···라고 적혀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신라시대 초기에 이미 간장, 된장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현종 10년에는 거란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된장을 나눠줬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문종 6년(1052년)에 개경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매주를 나눠 줬다는 기록으로 보아 장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식품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장을 담그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황보유방’을 살펴보면, “콩 1말을 무르게 삶아 밀 5되를 볶아 함문조사에서 된장찌개는 인기메뉴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을 만큼(1위 김치찌개 14.2%, 2위 비빔밥 13.2%, 3위 된장찌개 7.4%, 직장인 1066명 대상, 2007.10.31, 조사기관 취업포탈 커리어) 지금도 한국인이 많이 섭취하는 것은 바로 된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된장은 과연 어떠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우리 몸에 들어와서 어떤 효과를 내는 것일까? 또한 된장은 알려진 것처럼 완벽한 식품이며 단점은 없는 것인가?본 보고서에서는 한국인들이 많이 섭취하는 이 된장의 영양과 효능에 대해 살펴보고 과연 된장을 제대로 섭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된장의 영양성분과 신체 내 효과 분석1. 콩의 영양성분된장의 주재료인 콩은 그 구성성분 중 약 40%가 단백질이다. 콩의 단백질은 그 질이 매우 뛰어나 일명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 부른다. 우리 몸의 성장과 건강유지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생체물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콩성분의 25%를 차지하는 탄수화물은 불용성 탄수화물로서 섬유소와 반섬유소, 펙틴을 지니고 있다. 콩껍질 속의 대부분에는 섬유소가 들어 있으며 반섬유소와 펙틴은 세포벽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물질들은 식이섬유라 불리면서 최근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콩기름에는 다량의 불포화 지방산이 함유되어 있다. 특히 콩속에 들어있는 인지질의 일종인 레시틴은 몸 안의 중요한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막의 주성분으로 최근 크게 각광받고 있는 물질이다. 콩은 다른 곡물에 비해 비타민B1과 비타민E를 많이 함유하고 있다. 또한 수용성 비타민과 지용성 비타민이 골고루 들어 있어 영양학적인 면에서도 바람직한 식품이다. 콩나물은 콩에 있는 올리고당이 비타민C로 환원되면서 좋은 비타민C의 공급원이 된다. 또 지용성 비타민인 비타민A는 베타 카로틴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정제 과정 중에 대부분이 파괴된다. 비타민E, 즉 토코페롤은 노화를 막는 항산화제의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성분이다. 콩의 무기질에는 포타슘되면서 생기는 성분이다. 올리고당은 인체 내의 소화효소에 의해 분해되지 않아서, 장까지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올리고당은 인체에 유익한 유산균 비피더스균의 좋은 먹이가 되므로 비피더스균의 증식을 돕고 장을 깨끗하게 해주며, 변을 보다 쉽게 볼 수 있는 효과를 준다. 따라서 꾸준히 섭취했을 경우 신진대사가 원활히 되며 결장이 좋아져 변비와 치질 예방에도 큰 도움을 준다.단백질 같은 경우에는 된장의 단백질은 콩보다 약 30% 이상 몸에 흡수가 더 잘된다. 단백질은 우리 몸의 근육과 뼈를 구성하여 성장과 체격을 유지하게 한다. 된장은 콩에 적당한 농도의 소금을 가해서 미생물의 작용으로 분해한 발효식품이기 때문에 콩의 성분들을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콩은 100g당 단백질의 양이 38g으로 쇠고기의 2배가 넘을 정도로 단백질의 함유량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된장의 단백질 양은 콩보다는 적지만, 콩은 몸에 흡수되는 단백질의 비율이 낮은 편이다. 하지만 된장은 콩이 발효되면서 큰 분자의 영양소를 잘라 사람들이 소화하기 쉬운 영양소가 되기 때문에 콩을 그냥 먹는 것보다 된장을 먹는 것이 30%이상 몸에 흡수가 더 잘된다.지방은 주로 에너지원으로 이용되면서 중요한 인체의 장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된장에는 콩의 지방 성분이 발효되어 나온 리놀레산이라는 성분이 있다. 리놀레산은 우리 몸속의 나쁜 콜레스테롤(LDL)을 줄여 혈관을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항암효과를 높이는 기능도 있다. 콩으로 만든 식품을 지속적으로 먹으면 혈중 콜레스트롤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람도 수치가 낮아진다.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1972년부터 콩의 효능을 검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통상 혈청 콜레스테롤치가 3백이 넘는, 즉 유전적으로 콜레스테롤치가 높은 사람들에 대해 고기 및 유제품 대신 콩을 먹게 했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 혈중 콜레스테롤치는 물론, 인체에 해로운 LDL 콜레스테롤이 15~200% 정도까지 낮아졌다. 콩을 먹으면 인체에 유익한 HDL 콜레스테롤이 늘어나 관상동맥성 심장이소플라본이 존재하고 있다. 이소플라본의 유도체는 일명 식물성 에스트로겐으로 뼈의 재흡수를 막고 뼈를 형성하여 여성의 골다공증도 예방할 수 있다. 버섯 중에는 Vitamin-D가 풍부해 칼슘의 흡수를 돕고 뼈와 이를 튼튼하게 하는 작용이 있어 골다공증 예방에 매우 유용하다. 장기간의 인공 에스트로겐 요법(HRT)이 유방암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르자, 미 국립보건원(NIH)에서는 섬유질, 단백질이 풍부한 콩으로 된 음식을 자주 섭취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미국이 콩의 위력을 발견해낸 것은 날씬하고 성인병이 적은 동양 사람들의 식생활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부터였고 , 콩을 먹지 않던 미국에서의 유방암 발생률이 한국의 10배 정도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였다.동물실험에서 이소플라본을 포함하고 있는 콩단백은 유방암의 형성을 억제하였다. 폐경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이소플라본을 포함하고 있는 콩단백은 유방암과 같은 호르몬 의존성의 질병을 예방하는 대안으로 이용 될 수 있으며 폐경후 여성에서 인공 에스트로겐 대체요법을 위한 사용 가능성이 연구되고 있다. 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보맨그레이 의대 연구진은 미국 심장협의회에 제출한 임시 보고서에서 호르몬 대체요법에 발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인공 에스트로겐의 대체가능 물질로서 콩에서 추출한 호르몬을 시험한 결과 콩이 중.노년기 여성들의 폐경 증상 및 골다공증치료에 기존의 호르몬 요법보다 훨씬 효과적인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콩에 풍부한 이소플라본은 폐경기 증세(건망증, 불안, 발한, 안면홍조, 골다공증, 심장질환 등)와 암의 예방을 위해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의 하나인 간은 섭취한 영양소를 여러 곳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간의 기능이 나빠지게 되면 영양소의 축적이 일어나서 비대해질 뿐만 아니라 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져서 간염이 되기 쉽고 각종 간질환의 원인이 된다. 재래된장의 간 기능 촉진효과는 최근에 밝혀졌으며 간 혈전을 녹여 혈전에 혈액이 흐르는 것을 원활하게 도와주어 성인들의 건강에도 좋다.우리 된장에서 나오는 특수 단백질이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혈전을 녹여주는 효과가 있으며 이 효과가 일본의 낫토보다 3~4배, 심지어 인체에서 생성되는 혈전분해 단백질인 플라스민보다도 4~5배 뛰어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된장은 식욕을 돋구는 음식인 동시에 소화력이 뛰어난 식품으로서 음식을 먹을 때 된장과 함께 먹으면 체할 염려가 없다. 민간요법에서는 체했을 때 된장을 묽게 풀어 끓인 국을 한 사발 먹으면 체한 기가 풀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된장은 비만에도 탁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된장, 비만억제에 효과 탁월”부산대 박건영 교수팀, 쥐 실험결과 된장 >쌈장 >고추장順으로 효과 높아된장이 비만억제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특히 된장은 비만 억제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진 고추장보다 효과가 훨씬 뛰어나고, 고추장과 된장을 섞어 만든 쌈장의 효과도 고추장보다 높다는 것이다.23일 부산대 식품영양학과 박건영 교수팀에 따르면 143g짜리 실험용 쥐에 30일간 돼지기름 등 고지방 음식을 하루에 19g씩 먹인 결과 체중이 287.4g으로 늘어났으나, 된장 1.9g을 섞은 고지방 음식 19g을 먹인 쥐의 체중은 246.6g에 불과했다.또 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쌈장을 1.9g 넣은 고지방 음식을 먹인 쥐는 258g이었으며, 고추장1.9g을 함께 먹인 경우는 263.1g으로 측정됐다. 이들의 체중은 모두 고지방 음식이 아닌 일반음식을 먹인 쥐(269.2g)보다도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실험용 쥐의 간 무게도 고지방 음식만 먹인 쥐는 11g이었으나, 고지방 음식에 된장을 먹인 쥐는 8.7g이었고, 쌈장과 고추장을 추가한 경우도 각각 9.4g과 9.6g으로 나타나 된장이 항비만 효과는 물론 내장의 지방축적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또 간의 콜레스테롤 함량도 고지방 음식만 먹인 쥐는 가정 체중 100g당 66.3g이었으나 된장을 추가하면 48.4g으로 줄어들었고, 한다.
    생활/환경| 2008.07.13| 9페이지| 2,000원| 조회(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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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문화 탐방 보고서-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방을 통한 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
    The Silk Voyager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방을 통한 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 해양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테 마 : 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방을 통한 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 해양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팀구성 : The Silk Voyager방문국 : 태국(방콕, 아유타야), 캄보디아(시엠립),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 멜라카)제9기 해외 봉사 ? 문화 탐방목차머리말Ⅰ. 태국Ⅱ. 캄보디아Ⅲ. 말레이시아맺음말머리말동남아시아는 동서 교류의 중심지로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만나는 교차로였다. 양대 문화는 해양 도시로부터 강줄기를 타고 동남아시아 전체로 뻗어나갔다. 이런 지리적 배경 때문에 동남아시아세계의 특징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이번 탐방을 통해 알게 된 우리가 새로운 사실은 동남아시아 세계도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국,캄보디아,베트남,라오스,미얀마로(동남아시아 5개국) 이루어진 국가들과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말라카해협에 접한 국가들이 바로 그것이다. 크게 동남아시아 5개국은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건축양식이나 종교 등에서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된 특징이 있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앞에 국가들과는 차별되게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 그리고 중국문화가 융합되는 특성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이번 동남아시아 탐방을 통해 방문한 국가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해양실크로드 상에 있는 국가들이 다양한 여러 문명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옛 수도인 아유타야는 항구도시로서 해양실크로드에서 받아들인 여러 문화를 짜오프라야강을 통해 동남아시아 내륙으로 확산시켰다. 또한 이렇게 확산된 문화는 동남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메콩강의 강줄기를 타고 동남아시아 내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메콩강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톤레삽호 근처에서 성장한 제국인 앙코르제국은 바로 이러한 동서교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앙코르의 유적들은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문명의 정수를 이루는 것으로 베에서’는 태국인들이 국보 1호로 꼽는 높이 66cm, 폭 48.3cm 크기의 신비스러운 에메랄드 불상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15세기 에 조각되어 라오스 비엔티안에 있던 것을 라마 1세가 들여 와 18세기 말에 안치시킨 것이라고 한다. 녹색의 玉을 깎아 만든 이 불상은, 1434년에 태국 북부 치앙라이에 있는 한 사 원의 무너진 탑속에서 발견되었다고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발견 당시만 해도 이 불상은 흰 석고로 둘러 싸여져 있어서 그저 평범한 불상으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다가 탑에 벼락이 떨어져 석고가 벗겨지면서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자 비로소 불상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에메랄드 불상은 오랜 세월을 걸쳐 세 차례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이 불상은 일 년 중 세 번(하기, 우기, 건기) 계절에 맞는 승복을 입고 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태국 국왕이 직접 불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예식을 거행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건기였기 때문에 조금은 두터운 승복을 입고 있는 듯 했다. 또 이 불상은 “붓싸복” 이라는 태국 전통양식의 목각 옥좌에 가부좌를 한 상태로 법당 안 중앙에 아주 높이 안치되어 있어서 육안으로는 불상의 진정한 모습을 확실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에메랄드 불상은 태국 국민들에게 본존불로서 숭배되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카메라로는 촬영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법당 내 촬영 자체가 금지되어 있어 제대로 살펴보며 느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나가면서 본 태국인 왕궁 가이드는 코팅한 에메랄드 불상 사진을 아주 소중히 하는 듯 자랑하며 내보여 주기까지 했다. 태국인들이 불상을 얼마나 숭경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이 불상을 소유한 왕조에는 행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태국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덕분인지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반면 태국은 외세의 지배 없이 독립을 유지하며 순조롭게 발전해온 것 같다.에메랄드 사원과 태국의 왕궁은 연결되어 있어서 왕궁 입장으로 함께 관람이 가능했다. 사원과 연결돼 간 흉한 모습을 한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사원 중앙에 높이 솟은 프랑과 사방에 8개의 작은 프랑이 세워져있으며 작은 프랑 내부에는 벽화가 남아있는데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프랑 사이에는 12개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사원은 1767년 버마에 의해 파괴되면서 군대 주둔지로 사용되고 했으며 1987년 보수공사를 시작해 1992년에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쑤리요타이 쩨디 The Chedi of Queen Suriyothai아유타야 짜끄라빳 왕의 왕비였던 쑤리요타이는 태국에서 여자영웅으로 칭송 받는 여왕이다. 이는 1548년 버마의 침략에 대항에 왕을 보좌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해 왕을 구하고 목숨을 버리면서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다. 왕비의 죽음 이후 왕비를 위한 쩨디를 만들고 그녀의 유골을 안치했다고 한다. 최근에 태국에서 영화화돼 최고 흥행을 올리기도 했던 영화 '쑤리요타이'로 더욱 유명해졌다.짜오 쌈 프라야 국립박물관 Chao Sam Phraya National Museum로짜나 거리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으로 태국관광청 맞은편에 위치한다. 두 개의 전시관과 전통 태국 가옥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에는 아유타야 양식을 포함한 롭부리, 우텅, 쑤코타이, 드바라와티 양식의 불상과 목조 조각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왓 마하탓과 왓 프라람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사학도인 우리 팀에게 매우 흥미로운 전시물들 이었고 그 곳 역사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아유타야 탐방 후기우리들의 숙소가 있었던 방콕 카오산로드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아유타야는 사원을 제외하면 여전히 낙후된 지방 도시였다.아유타야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비교할 수 있는 도시이다. 우리는 아유타야를 두발로 직접 걸어 다니며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역시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도시 곳곳에 역사적인 유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유물과 유적들은 너무도 초라하고 더럽게 그대로 방치되어 안타깝기도 했었다. 그들의 불심은 우리들 스스로 불상위치한 쩨디는 코끼리가 탑을 받치고 있는 황금색 쩨디인 창롬 체디를 볼 수 있다. 왓 치앙 만에서 랏차파키날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위치한 작은 사원인 왓 람창에도 코끼리 상이 탑의 사방을 받치고 있는 쩨디가 있는 작고 이쁜 사원으로 코끼리 상이 사원의 상징처럼 사원 내부에 들어서 있기도 하다.왓 람창에서 나와 빠뚜 창 푸악과 인접한 프라뽁까옥 거리의 타이항공 사무실 건너편에 왓 후아 쾅이 있다. 왓 후아 쾅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원 아니지만 황금색의 쩨디가 아닌 전탑양식의 쩨디를 볼 수 있다. 사원은 신축중인 현대적인 건물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지만, 왼편은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된 우보쏫과 사원 뒤뜰의 가네쉬(코끼리 모양의 힌두신)가 쩨디와 함께 사원 내부를 구성하고 있다.사원을 나와 프라뽁까오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공원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다. 작은 공원에 위치한 건물은 구 시청으로 건물 바로 앞의 동상은 태국 북부의 주요한 세 명의 왕으로 파야오의 응앙무앙 왕, 란나의 멩라이 왕, 쑤코타이의 람캉행 왕 동상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워져 있다. 1296년 치앙마이를 건설한 멩라이 왕의 동상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멩라이 왕은 주변 국가와 더불어 태국 초기 왕조인 란나 왕조를 유지한 왕이기도 하다. 동상이 위치한 공원에서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랏차담넌 거리와 교차하는 곳에 있는 멩라이 사당이 시내 중심가로 새로이 옮겨진 것으로 벽면에는 왕의 생애를 묘사한 타일이 붙여져 있다. 멩라이 사당이 위치한 랏차담넌 거리와 교차하는 프라뽁까오왓 쩨디 루앙(Wat Chedi Luang)거리에 위치한 카페 칙을 지나면 나무로 만들어진 불당이 있는 왓 빤 따오는 공작새 조각이 인상적인 사원이었다.왓 프라 씽 (Wat Phra Singh)왓 빤 따오와 인접한 왓 쩨디 루앙은 60미터 높이의 쩨디로 유명한 사원이다. 쩨디는 1401년에 90미터 높이로 세워졌으나 1545년 지진에 의해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60미터 높이로 잘 보존 되어있다. 입구 왼쪽에의 특징은 넓은 이마. 내려감은 눈, 넓은 콧등, 끝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미소짓는 두꺼운 입술 등이다. 이 미소 때문에 ‘바이욘의 미소’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압쌀라바이욘은 3개의 층을 이루고 있는 구조이다. 첫 층과 2층은 그 벽에 부조가 조각된 회랑이 있는 사각형 구조이고, 3층 중앙 사원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비록 3층 구조이지만, 그속은 회랑이 미로처럼 되어 있고, 통로들이 실제로 구별이 힘든 층들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매우 복잡하게 되어 빛의 조절과 좁은 미로와 낮은 천정 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바이욘의 동쪽 입구에 들어서면 첮번째로 눈에 띄는 것이 바이욘 사원의 1층 외벽의 회랑이다. 이 회랑은 8개의 고푸라에 세워졌는데. 각 모퉁이와 각 변 중앙에 하나씩 있다. 이 고푸라는 모두 십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회랑들은 원래 목조 지붕으로 덮여 있었던 것 같다. 동쪽 고푸라의 앞에 있는 기둥에 조각된 압쌀라들은 바이욘 특유의 스타일로서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압쌀라의 춤 모양이 되풀이된 것이지만, 그 처리 방법이 모두 다르다. 전총적인 기법과 구성은 3명의 압쌀라들이 연꽃 밭 위에서 춤추는 모습이다. 주로 삼각형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의 압쌀라 무리가 양쪽보다 조금 크게 조각되어 있다. 배경은 무희들과 꽃들과 잎사귀 무의에 패턴이 융단처럼 가볍게 에칭괸 조각들로 섞여져 잘 어울리고 있다. 또 3명의 무희들이 통상 한 군을 이루지만 한 명이나 두명의 압쌀라만 이는 경우도 있다.코끼리 테라스코끼리 테라스앙코르 톰의 왕궁 정월을 마주보고 있으며 이곳은 왕궁 처였지만 실제로 왕궁은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코끼리 테라스에는 왕궁을 증축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왕궁의 중 개축은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코끼리 테라스는 그 길이가 300m가 넘는데, 바푸욘 사원에서 문둥이 왕 테라스까지 나위어져 있어 아주 깊게 부조되어 있다. 남쪽의 계단에있다.
    인문/어학| 2008.07.13| 24페이지| 4,000원| 조회(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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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잔티움 세계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의의 평가B괜찮아요
    비잔티움 세계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의의1.예루살렘의 문화유산 겟세마네 교회(사진출처:http://blog.naver.com/bss2079/60013519721)겟세마네는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감람산의 기슭에 위치한 동산으로 성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처형당하기 전날 예수가 이곳에서 최후의 기도를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로 인해 겟세마네 동산은 크리스트교도들에겐 성소로 인식되었으므로 크리스트교를 내세웠던 비잔티움은 이곳에 379년에 예배당을 지었다.예루살렘 지역이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었고 유대국가가 항상 외침에 시달려 왔었기 때문에 이 교회역시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어졌었다. 그 후 12세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십자군 원정군들에 의해 재건될 수 있었으나 십자군이 패배하고 예루살렘에서 물러나자 다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 이 교회는 1919~24년에 다시 완성되었고 16개 국가의 헌금을 모아 지어졌기 때문에 만국교회라고 불린다. 교회의 천정에는 그 국가들의 표지가 새겨져 있으며 교회 내부에는 예수가 그 자리에서 고뇌했었다는 바위가 놓여져 있으며,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예루살렘이라는 곳은 유대인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성지중의 한곳이고 예수가 활동하고 죽은 곳이라는 이유로 크리스트교도에게 또한 매우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무하마드 역시 이곳에서 승천, 일곱하늘을 돌아보고 왔다는 이유로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서도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성지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성지에 각 종교의 상징물인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럼으로 이곳 예루살렘은 각 시대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 의해 기독교적 문화가 생기기도 하고 이슬람의 문화가 번성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국가였던 비잔티움 또한 예루살렘을 간과하지 않았었다. 즉 성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자기 국가가 내세우고 있는 종교의 위대함을 부각시킬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국의 우월성을 내보일 수 있는 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2.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사진출처:http://cafefiles.naver.net/data4/2004)로마의 문명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퍼져나가 비잔티움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의 시작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서부터 시작된다. 위 사진의 개선문은 315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서로마, 동로마 통일을 기념하여 로마 원로회가 세운 건축물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 즉 비잔티움 오늘날의 이스탄불로 옮기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수도 이전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상업과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있다.콘스탄티누스는 312년부터 324년 까지 서로마에서만 통치했다. 그러나 324년 이후 그가 죽던 해인 337년까지, 그는 권력의 공유를 중단하고 제국을 재통합시켜 제국 전부를 지배했다. 기독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모든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거의 같은 노선을 따라 통치했다. 관료 제도가 강화되었고, 국가가 도시 거주자 및 농업 노동자의 이직을 물샐틈없이 막아냈기 때문에 사회는 카스트 제도로 경직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는 명색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한 순간도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궁정 의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고, 대게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이 행동했다. 그가 330년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도시 이름을 정한 것도 이런 그의 태도와 같은 맥락이다. (중략) 그리고 그 이동은 로마 문명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동방 지향적인 통신, 무역, 방어의 요충지로서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가 육지는 성벽으로 보호된 이 도시는 거의 난공불락이었으며,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한 로마 정부의 핵심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서양 문명의 역사1 번즈, 러너, 미첨 지음, 박상익 역, p.250)이렇듯 콘스탄티누스는 개인적인 이유와 당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정점에 올라 이제 쇠퇴의 길만 남은 듯한 제국의 모습에 개혁을 가하고자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동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 이유 또한 여러 설들이 존재한다.단순하게는 한 전쟁을 앞두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로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라는 꿈을 꾼 것에서 크리스트교의 국교화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당시 크리스트교도들의 전도들로 인해 로마제국엔 이미 많은 수의 크리스트교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크리스트교가 용인되자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는 것이 국가의 통일이나 정체성 등에 있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당시 유럽 어쩌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로마제국의 이와 같은 변화는 서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현재까지 서구 사회를 강력하게 이끌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유럽의 판도가 서쪽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까지 이동하면서 새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이슬람 세력과 끊임없이 부딪히면서도 이슬람의 발전된 과학, 지식 등을 유럽이 습득하여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러시아를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키면서 러시아 또한 비잔티움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국가로 남겨지게 된다.3.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사진출처: http://kr.img.blog.yahoo.com/ybi/1/dc/67/funnyblog/folder/1610411)위 사진은 건축 및 예술 분야에서 비잔틴의 가장 훌륭한 업적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 비잔티움, 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의 모습이다. 가장자리에 있는 4개의 뾰족탑은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인 투르크 인에게 함락된 뒤 추가된 것이다.(서양 문명의 역사2. 번즈, 러너, 미첨 지음. 박상익 옮김. p.304)이 건축물은 소아시아 출신의 두 건축가, 남부 리디아의 트랄레스 출신 안테미우스와 카리안 해안의 밀레투 출신의 이시도루스가 총책임을 맡았다. 기술자인 동시에 유능한 수학자였던 안테미우스는 세계 건축사에서 대담하고 독창적인 건축물 중 하나를 만드는 데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휘했다. 이 거대한 건물 안으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체인으로 지탱되는 것 처럼 보이는’ 돔을 둘러싼 창문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으며, 그 내부에는 여러 색채가 화려하게 섞여 있었다. 제국 각 지역에서 구해온 다채색 대리석이 벽을 덮었으며, 로마의 태양 신전에서 온 반암 기둥과 에페소스의 장관들이 선물한 초록색 대리석 기둥이 8개 있었다. (중략) 이 모자이크는 지금 모두 사라졌으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자이크는 성상 파괴운동(8~9세기)이 끝난 843년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도시로 읽는 세계사. 크리스토퍼 히버트 지음. 한은경 옮김. p.90~91)앞에서 보듯 성 소피아 성당은 비록 비잔티움이 투르크 족에게 함락당하면서 투르크족의 모스크로 이용되긴 하였으나 비잔티움 문화 더 나아가서는 크리스트교 전체의 가장 아름다운 문화 유산중에 하나이다.왜 많은 물질적 정신적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이런 성당을 건축하였을까. 이는 성당, 교회 등의 성전은 크리스트교를 보여주고 상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에 의해 사실상 멸망하면서 새로 유입된 종족들에게 로마 제국의 종교인 크리스트교를 알리기 위해 분명 성경에서는 우상을 만들거나 경배하는 것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상이나 성화 등을 만들어 그들에게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상징물들은 그 어떠한 설교보다도 설득력 있게 이민족들에게 다가갔고 서유럽에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민족들에게 크리스트교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크리스트교를 모르는 세계에 그들의 종교를 전도함으로써 타 민족 또한 로마의 시민, 비잔티움의 시민으로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 또한 이러한 목적에 부합해서 그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되어졌을 것이다.
    인문/어학| 2007.11.26| 5페이지| 1,000원| 조회(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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