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 여주인공의 행동을 배려윤리의 관점에서 정당화 하라.콜드마운틴의 여 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이 군대를 버리고 오면 자신의 나라를 위한 전투에서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가 자신을 만나러 와주길 바란다. 이 행동은 나딩스와 길리건이 주장한 배려윤리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길리건이 했던 제이크와 에이미의 실험(하인즈와 아내와 약사의 딜레마) 에서, 여자아이인 에이미는 남자아이인 제이크와 다르게 그 딜레마를 인간활동에 적용되는 추상적인 수학문제로 보지 않고 시간의 흐름이 개입된 인간관계 안에서 고려한다. 에이미는 이 세계는 규칙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관계들로 이루어진 곳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 딜레마는 약사가 하인즈 아내의 필요에 응답하지 못한데서 생겨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제이크는 연역적 논리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생명권과 재산권 사이의 충돌을 발견했으나, 에이미는 대화를 통해 해소 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분열을 발견한다. 제이크는 자신의 책임을 먼저 고려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고, 에이미는 선택을 하는 사람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맥락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것이다.배려 윤리는 관계적 윤리를 주장한다. 개인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는 추상적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배려윤리는 상호의존성, 의사소통, 그리고 책임을 고려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정의윤리가 친밀감에서 정체감의 위협을 느끼는 반면, 개인화나 분리상황에서 정체감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것으로 여 주인공이 어째서 그렇게 위협을 느끼고 남자에게 절실하게 돌아와 달라는 행동이 설명되는 것이다. 그녀는 전쟁상황에서 그 곳에 혼자 버려져있게 되었고, 거기에서 심한 정체감의 위협을 느껴 그가 돌아오면 다소 전쟁은 위험해질수 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연결지어 볼 때 그가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2. 의 남주인공의 행동을 콜버그의 관점에서 비판하라.콜드마운틴에서 남자주인공은, 자신이 떠나면 전쟁에서 이탈하는 것이며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고 동료들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인을 위해 전장을 이탈한다.콜버그의 정의윤리는 권리간의 갈등을 도덕적 문제로 보며, 자아를 분리된 개별적 존재로 정의하고, 권리와 규칙에 대한 이해를 도덕발달에 중심에 둔다. 또한 정의윤리는 의무, 책무, 헌신, 원리를 고려하며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앞에서 밝힌것처럼 친밀감에서 정체감의 위협을 느낀다. 배려윤리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정의윤리는 다른사람을 부당하게 대하지 말라는 형식을 취한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의무나 책임을 버리고 사람사이의 관계에 얽매여 전장을 이탈한 남자주인공은 콜버그의 인습 제 1단계인 개인간의 기대, 관계, 동조의 관계에 머무른 셈으로, 콜버그는 보통 여성들이 이 수준에서 머무르며, 남성들은 이 상위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이 남자주인공은 인습 2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3. 배려윤리와 정의윤리는 상충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생각해보라.정의와 배려의 윤리는 각각 그 나름대로의 장.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배려윤리는 정의에 대한 교려를 배제하고 보살핌에 대한 보살핌만을 강조할 때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여성의 종속적 의도를 반영하는 의미로 전락할 수 있고, 정의윤리 또한 그 자체로는 개인들을 자족적인 존재로 봄으로써 다른 권리들을 부차적으로 본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 의무의 범위를 계약적 모델을 초월하여 더 확장시킬 것을 요구하는 데에 있어 배려윤리가 필요하게 된다.그러므로 정의와 배려윤리 모두를 남녀 모두에게 보편적인 도덕성으로 인식하고, 도덕교육을 통해서 정의와 배려의 도덕성을 함께 교육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도덕성을 성과 연관시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도덕성이 남성적 도덕성 여성적 도덕성으로 정의되면 이미 그 도덕성은 특정성에만 요구되는 특수한 윤리, 보편성을 상실한 윤리로 전락하게 될 뿐만 아니라 특정 성을 억압하거나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배려 윤리는 여성적 도덕성이 아니라 정의의 도덕성과 함께 보편적 도덕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도덕적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배타적으로 어느 한 쪽의 윤리적 입장만을 취하게 된다면 결국 어느 쪽도 온전하게 발전할 수가 없다.배려윤리와 정의윤리를 상보적 관점에서 하나의 도덕적 관점으로 통합하여 정의 윤리와 보살핌 윤리가 모든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는 것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내재된 두 도덕성의 특성들을 함께 발달시킴으로써, 도덕적인 문제해결이나 도덕성의 발달에 있어서 훨씬 성숙된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제 7차 도덕교육의 목표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인으로서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생활 습관과 예절 및 도덕규범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도덕적 문제를 바람직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판단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여기서 배려윤리에 기초를 두고 분석하면, 기본생활 습관과 예절 및 도덕규범을 익히고 바람직하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판단능력을 기르는 것은 전통적으로 강조되어온 학문적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배려관계와 배려하고자 하는 열망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태도나 기능을 발달시키는 목표진술 로는 부족하다.
장정일, [아담이 눈뜰 때]를 읽고.장정일. 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다. 워낙 떠들썩했던 사건 이다보니, 그 당시 국내 문학보다는 일본 문학이나 영미 문학에 관심이 있던 나로서도 잊기 힘든 이름 이었다. 책을 읽고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라는 소설이었다. 우선 성장소설 이라는 것. 그리고 세기말적인 분위기.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정체성을 잃고 섹스, 마약, 등등에 헤매는 젊은이들의 모습. 그 속에서 탈출구를 찾으려는 모습들.이 글은 주인공이 가지고 싶어 했던 세 가지를 얻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타자기와 뭉크화집.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 테이블.단지 그것만이, 열아홉살 때 그가 세상에서 얻고자하는 유일한 것. 전부의 것이었다.이 책을 고등학교 때 봤으면 오히려 더 공감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은 이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보았기 때문에 공감되는 것일까. 그때 정말로 가지고 싶었던 것은, 노트북. 일본음악 정품 CD. 일본 패턴디자인 정품 화집 이라던가. 지금은 손에 넣었고 조금 무리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 하지만 그 당신의 나에게는 정말로 절실했었다. 물론 지금도 가지고 싶은 것이라면 정말로 잔뜩 있지만.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싶었던 작은 것들을 생각하면 왜 그런 것들에 그렇게 절실했을까.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주인공인 아담과 헌재, 은선은 모두 정체성을 상실하고 흔들리는 인물들이다. 이들을 통해서, 작가는 탈출구를 찾아가는 모습을 섹스와 자살로 표현해낸다. 세기말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인물로 제시된다는 느낌에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떠올랐었다.아담은 자신을 둘러싼 가짜세계. 추악한 세계를 부수어내지 못한다.[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큰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짜 낙원에서 잘못 눈을 뜬 아담처럼. 내 이브는 창녀였으며, 내 방은 어둡고 습기가 차있다.어쩌다 책이 썩는 냄새를 없애려고 창문을 열면,내온의 십자가 아래서 세상은 내 방보다 더 큰 어둠과 부패로 썩어지고 있다.나는 내가 눈뜬 가짜 낙원이 너무 무서워서 소리내어 울었다.]이 부분과, 앞부분에 언급했던 글의 첫머리 부분. 그 부분이 이 소설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되었다.나는 무라카미 류의 몇몇 책들을 읽고, 와인에 대해 알고 싶었었다. 이 글에는 짐 모리슨, 등의 록 음악가수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런 느낌의 소설들을 읽을때마다, 좀 더 많은 것을 듣고, 읽고, 느껴본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 만약 내가 짐 모리슨에 대해 알고있었더라면. 이 소설에 대해서도 몇 배는 더 깊이 느낄수 있을텐데. 라고. 성장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아직 난해하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글들을 계속 읽다보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공주교육대학교 컴퓨터교육학과 20031221 안지영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읽고.이 글을 처음 읽은 것은 2학년 여름방학 이었던 것 같다. 공지영의 소설들은, 자신의 20대를 반성하는 글들이 많다고 한다. 이 글도 그 종류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학생운동시절의 내용을 소재로 한 소설이, 지금의 우리들의 마음에 확 와 닿는 내용은 아니다. 그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우리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들은 여러 글에서 보았다. “지금의 시대에 대학생은 없다”. “그 시절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어설픈 자기항변. 오히려 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이런 글들을 많이 보았지만...그래도, 나도 여전히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나도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철없는 대학생일 뿐이니까.《인간에 대한 예의》의 주인공은 그 달에 화제가 되는 책을 선정해서 그 작가를 인터뷰하고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6페이지 짜리 기사를 맡고 있는 기자이다. 6월 호엔 장기수였던 권오규 선생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책을 소개하기로 했지만, 편집장의 변덕으로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이민자를 찾아간다. 여기서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작품의 주 내용이다.인간에 대한 예의. 이것에 대해, 지난 겨울방학동안 심각한 고민을 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컴퓨터뿐 아니라,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성과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 이라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결국 선택한 것은, 교대였다. 지금의 상황에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경했던 직업이기에,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 내가 올해 졸업예정이었던 친구가 미리 일하고 있었던 디자인 팀에서 잠시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하지만 그 회사에서 - 비록 큰 일은 아니고 그냥 일을 돕는 일이었지만 - 그분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교대생 이라는 것에 대해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내가 무서워서 도망쳤던 것들을 힘들게 이겨내고 그 자리에 서있는데. 나는 한번 도망쳐서 안정적인 자리 하나 확보해놓고, 당신들이 힘들게 일궈낸 곳에 뻔뻔하게 서 있습니다. 라는 생각에, 도저히 말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정말로 그건, 그들의 노력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면 경멸할지도 모른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데이비드 에드먼즈, 존 에이디노, [비트겐슈타인은 왜?]를 읽고.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때, 나는 대개의 “철학서”가 주는 공포감에 떨고 있었다. 몇 년간 교과서의 몇 줄에 축약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철학들에 시달려온 결과, 아직도 철학이란 말은 그저 어렵게만 느껴진다.하지만 책을 펴들고 몇 페이지 읽어가다보니, 이 책은 기존의 철학서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철학 자체의 의미를 주기보다는 그 철학을 하게 되기까지의 철학자의 모든 주위 배경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다. 책의 3분의 2 정도는 그냥 쉽게 읽어내려갔지만, 남은 부분에서 그 논쟁의 요지를 갑자기 꺼내고 있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읽어야 했다.하지만 긴장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논쟁의 의미를 반도 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 그들의 ‘철학’을 알고 싶었다면 이 책보다는 철학 입문서쪽을 먼저 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서라기보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인물 평전으로써 즐겁게 읽었기 때문이다.나처럼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일단 몸서리부터 쳐지는 사람들에게, 철학자에 대한 것부터 접근시켜 슬슬 공포감을 풀어주려는 의도라면, 기꺼이 이 책을 추천하게 될 것 같다. 10분간의 일화를 통해 다큐멘터리와 추리소설의 느낌을 유지하면서 두 철학자의 사회, 정치적 차이를 밝히고 그에 따른 철학적 입장의 차이를 밝혀냈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른 철학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까지 끌어간다.이 책을 읽고나면,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입장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부분들이 보이게 된다. 러셀에 대한 관계, 빈 학회에 대한 관계 등에서,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의 그늘에 가려진 2인자로만 취급된다는 느낌이다. 정작 내가 교과서에서 한번이라도 본 이름은 포퍼(반증주의)였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그 둘은 비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과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 포퍼의 집은 상류층에 속하다가 어느 순간 몰락해버렸고, 비트겐슈타인의 집은 여전히 부유했다. 둘 다 교사의 길을 걸었지만 포퍼의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선택,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아마도 그 둘의 철학적 사상의 차이는 이런 주위 환경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주교육대학교 컴퓨터교육학과 안 지영원자력 발전.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르노빌” 이나 “핵폐기물” 이라는 단어를 쉽게 떠올려 낸다.그 끔찍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16년이 지나갔지만, 그 후유증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아직도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 매년 국가예산의 20%를 투입하고 있으며, 끝 모르고 치솟는 벨라루시 공화국 어린이들의 갑상선암 발병률은 처음에 그 사실을 부정하던 국제보건기구로 하여금 결국 이것이 체르노빌 후유증임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산타클로즈와 루돌프 사슴의 안식처인 핀란드의 숲은 당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체르노빌에서 날아온 방사능 낙진에 뒤덮여 방사능 숲으로 변했으며, 이 숲의 풀을 먹고사는 사슴들은 아직도 심각한 방사능 축적으로 도축과 육류의 식용가공이 금지되고 있다.원자력 발전. Nuclear Power Generation. 이것은 핵분열 반응에 의하여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한 발전으로, 원자로에서 발생한 열을 전기로 변환하기 위해서는 증기터빈이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고온가스로와 가스터빈의 조합. 그리고 이온성 유체를 사용한 직접발전 등이 연구되고 있으나 실용화 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오늘날의 원자력 발전소는 기존의 화력발전 기술을 대폭 도입함 으로써 단기간에 실용화 된 것들이다. 실용화 되면서 원자력 발전소는 대형화되기도 하였는데, 재료의 개발, 기존 기술과의 결합. 소화가 아직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방사성 폐기물의 최종 처분과 함께 많은 기술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원자력 발전은 다른 발전시설과 달리 여러 가지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첫째, 원자력 발전은 군사적 활동에서 파생된 것이므로, 군사적 목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원자력 발전은 원자무기 개발이라는 군사적 활동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현재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에너지원 취급을 받고 있어서 군사적 목적과뒷받침 한다. 군사적 목적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의 관리실태는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 세심한 시찰을 나오기도 한다. 사용 후에 핵연료에서 나오는 플루토늄이 재처리 과정에서 추출되어 원자무기로 전용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둘째, 원자력 발전은 현대 거대과학 기술의 전형이다. 원자력 기술에는 핵연료의 생산, 사용, 폐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의 과학과 기술이 복합적으로 응용되고 많은 과학 기술자가 참여한다. 핵연료 생산과정에는 화학과 재료공학이, 그것을 태워서 발전하는 과정에는 물리학, 통계학, 원자력공학, 기계, 전기, 전자공학이, 폐기처분 과정에서는 지질학, 생물학까지도 필요한 것이다. 또한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에, 원전을 둘러싼 국가관리, 국가 통제가 강화된다.셋째, 에너지원으로서 다른 에너지원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핵에너지가 도입되기 전까지 인류가 사용했던 에너지는 거의 모두 태양에너지로부터 온 것이었다. 생물자원, 풍력, 수력, 화석연료는 모두 태양에너지가 변형된 것이다. 그리거나 핵에너지는 물질 자체의 내부구조를 변형해서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에너지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이 세 가지 특징에서도 우리는 원자력 기술의 폐해가 어떤 점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점으로는 지금 사회에서 일고 있는 반핵운동의 물결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조금 더 세부적인, 원자력 발전이 사회와 환경에 해를 끼치는 특이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첫째, 원자력 발전은 반생명적이다. 그것은 인간 자신에 의해서 개발된 기술이지만 생산에서 폐기물 처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인간으로부터 엄격하게 분리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방사능이라는 위험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공정이 자동장치에 의해, 또는 육중한 차폐장치와 함께 이루어지게 된다. 한 예를 들자면, 증기발생기보수는 사람 손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만 그 속은 방사능으에서 원자력 발전은 비민주적이라 볼 수 있다. 핵폐기물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딜레마, 주민투쟁, 국가폭력의 행사도 이러한 특성에서 연유한다.셋째, 위에서 말했던 원자력발전의 특이성 세 번째와 연관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원자력은 물질자체의 내부구조를 변화시켜 에너지를 얻는 것으로서, 이는 태양에너지, 조력, 지열에 의해 균형을 이루어 왔던 지구의 에너지 흐름 속에 핵에너지가 새롭게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고. 지구의 에너지 총량의 인위적인 증가를 의미한다. 이 증가가 지속 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은 지구의 온도평형의 파괴와 이에 따라 도래할 수 있는 기후변화이다.이와 같은 특성 외에도, 원자력이 반사회적인 에너지로 불리우는 것에는 또 하나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체르노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단어. 바로 “핵폐기물” 문제이다. 일본의 다카기 진자부로라는 원자핵화학 전공자는 자신의 강연에서 핵폐기물을 “죽음의 재” 또는 “벌건 숯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원자로 운전을 정지해도 원자로의 정지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제어봉을 삽입하여 원자로를 정지시켜도 원자로는 정지된 것이 아니다. 바로 핵폐기물. 죽음의 재. 가 남기 때문이다. 죽음의 재에서는 방사능과 열이라는 형태로 죽음의 기운이 계속해서 방출된다. 몇 년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도.핵폐기물은 시간지평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폐기물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첫째, 핵폐기물은 현 세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 세대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모든 세대에 해를 가하는 영구적인 문제이다.둘째, 핵폐기물은 지층 깊은 곳에 처분한다 해도 그 지층 자체의 움직임을 장기적으로 예측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문젯거리다. 모든 지층은 조금씩이라도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안전한 지층은 없다고 할 수 있다.셋째, 핵폐기물은 완벽하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과학적으로는 그것을 지을 못하고 있다. 미국은 저준위 폐기물을 땅속 얕은 곳에 묻어서 처분하고 있으나, 고준위 폐기물은 아직까지 처분 장소도 확실하게 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셀라필드와 라 아그 재처리 시설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있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와 재처리 과정에서 나오는 액체 폐기물을 이곳에 입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핵폐기물 영구처분장 후보지를 선정해 지층조사를 해왔으나 지층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아 아직도 처분장을 확정하기 못한 형편이다. 핵폐기물처리가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스웨덴에서조차도 사용 후 핵연료는 영구 처분되지 못하고 임시 저장소에서 냉각되고 있다. 사용 후 핵연료는 여기서 30-40년 보관된 다음 영구처분 되도록 되어있는데, 영구 처분장은 2020년에나 완성될 예정이라고 한다.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연일 신문 1면을 차지하며 전국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이슈, 전북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에 대해 아직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정부에서는 핵폐기물, 즉 방사선 폐기물 처리시설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고 올해 초 전북 고창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총 3군데의 후보지를 선정하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 세 군데의 후보지에서 반발이 너무나 심해서 세군데 모두 핵폐기물 처리 시설을 짓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정부에서는 어느 정도의 보상을 약속하고 또한 핵폐기물 처리 시설을 짓는 지방자치 단체에 많은 돈의 지원금을 약속하고 기존의 정부 선정 대신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에 전북의 도지사와 부안군수가 부안군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도에 핵폐기물처리시설유치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부안군민들은 반대를 했지만 조그마한 섬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위도면 사람들은 그 보상금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고 유치 신청에 찬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핵폐기물처리시설 유치신청서는 전국에서 부안군 위도면 하나만 신청서를 접수안군 위도주민과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핵폐기물 처리장 건립 문제는 지난 17년간 영원한 과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몇 번이나 많은 도시가 후보에 올랐었지만 그때마다 반대시위와 여론에 부딪혀 정부 측에서 의견을 굽혔던 것이다. 핵 추진론자들은 핵발전소와 핵 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NIMBY'현상이라고 비난한다. 이에 반해 반핵운동가들은 핵 폐기장은 내 뒷마당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뒷마당에도, 즉 전국 어디에서도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건설되어야 한다면 핵 발전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보고 있는 서울에, 그것도 국회가 있는 여의도에 건설하라고 반핵운동가들은 주장한다. 핵 폐기장은 국가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핵발전소 없이도 잘살 수 있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우리나라는 1978년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상업적 전력생산을 시작한 이래 모두 9기의 원자로를 가동하고 있으며,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1993년 방사성 폐기물 관리사업의 촉진 및 시설 주변지역의 지원에 관한 법률을 채택하고, 이를 시행할 예정이나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현재 우리나라 정부의 주장은 원자력 말고는 대안이 없다. 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으로는 한국은 과거보다 못하지만 다른 OECD 다른 회원국들과는 달리 전력소비가 여전히 빠르게 늘어나는데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원자력만큼 값싸고 신뢰성 있는 발전원이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원전은 정말 불가피 한 선택인가. 핵은. 원자력은 아직도 ‘꿈의 에너지’ 인가. 이 시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은 원자력 발전소를 어디에 짓느냐. 가 아니라 원자력발전을 계속해야 하느냐. 인 것이다.정부의 주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한국이 OECD 다른 회원국들과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OECD 회원국 상당수가 원자력발전의 확대를 중단했거나 단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