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의 생애2. 「유토피아」의 시대적 배경 -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1) 문화적 배경(2) 역사ㆍ사회적 배경3. 「유토피아」의 내용(1) 「유토피아」 제1부(2) 「유토피아」 제2부4.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다양한 평가Ⅲ. 결 론 - 유토피아를 향한 나의 의견참고 문헌Ⅰ. 서 론작품 「유토피아」)는 유토피아 어원을 제시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려니와 가장 대표적이고 출중한 유토피아 작품으로 평가된다.「유토피아」는 16세기 영국 헨리 8세 치하의 행정계와 법조계 등에서 봉사하다 생애를 마친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가 1516년 라틴어로 출판, 그의 사후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은 모어가 38세 때(1515년) 통상문제로 네덜란드에 건너가 외교교섭위원단의 일원으로 여행하던 중 안트워프(Antwerfe)에서 만난 피터 자일즈와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라는 두 명의 대화자와의 대화를 통해 가상의 이상국가 ‘유토피아’를 묘사하고 있는 형식의 가상적 픽션이다.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자유정신과 진보주의적 태도가 전편에 흐를 뿐 아니라 흥미 넘치는 대화형식을 통해 예리한 역설, 비판, 그리고 현명한 제안과 위트로 충만한 문학작품이다. 앞으로 본문에서는 이러한 「유토피아」와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다양한 평가들을 통해 ‘유토피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Ⅱ. 본 론1. 토마스 모어의 생애서구 사상가 토마스 모어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1966년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 감독의 가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의 명감독이 만든 이 작품은 아카데미 6개 부문의 영예를 안기도 했지만 관객동원에서도 크게 성공한 영화였다. 역사적 인물을 영화소재로 삼을 경우 영화흥행 성공의 가능성이 낮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이 영화는 왕에 저항하는 신념 강한 토마스 모어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를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통할 수 있는 도덕적 인문화적 부흥ㆍ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 시대, 유토피아는 영국에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 속에 내재된 휴머니즘이라든지, 진실한 의도가 간접적으로 우회되어 표현되는 풍자성은 르네상스 사상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1500년 당시,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탈리아에서는 그 본질이 관능주의와 이기주의로 물들어 말기적 증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유럽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 영국에서는 이제 막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당시의 영국 왕 헨리 8세가 이런 학자들을 원조해 주면서 영국의 인문주의는 크게 발달한다.그 중에서도 모어는 제 2세대의 영국 인문학자들을 대표하며, 영국 문예부흥의 중심인물로 손꼽힌다. 제 1세대의 인문학자들은 예술, 문화 쪽 보다는 전형적인 북유럽 르네상스의 일부분으로서 과학, 윤리, 신학 쪽이라는 좀더 딱딱한 쪽에 더 치중을 하였다면, 모어 같은 제 2세대 인문학자들은 모두 사상적으로나, 소재 면으로나 훨씬 더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토마스 모어는 일찍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자 중 한사람인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었는데,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보이는, 르네상스 문학의 기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능숙한 비유와 신랄한 풍자 방법들은 바로 에라스무스에게 영향 받은 것들이다.(2) 역사ㆍ사회적 배경뒤에서 다루어지겠지만, 「유토피아」라는 소설은 모어가 살던 시대의 상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시대적 상황을 아는 것은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모어 시대의 영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유토피아」라는 소설 안에서도 라파엘의 지적으로서 다루어지는 ‘인클로저(Enclosure)’)라는 것이다. 그 당시 농민들의 상황은 심각했다. 영국과 주변 국가에서 모직물 공업이 발전해 양모 값이 크게 오르자 농사를 지어 곡물을 수확하는 것보다는 양을 길러서 양모를 시장에 파는 것이 훨씬 유리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지주 귀족들은 농민들을 내쫓고 이 땅에 울타리를 쳐서 둘러막은 다음 양떼를 기르기누었는데, 그는 죄수를 다루는 법이나 법률에 대해 예를 들어가며 범죄자들에 대해 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 왕의 권력과 고문의 역할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모습을 보인다.결국 라파엘은 평등한 사회야말로 정말 행복한 사회라 말하고, 모어는 이에 모든 것이 공유되고 평등만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다시 라파엘은 유토피아라는 곳의 평등한 사회의 풍습과 법률을 이야기하면서, 그 나라의 법률과 풍습이 지금 이 나라의 것보다 더 훌륭하고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라파엘은 사유재산이 존속하는 한 인류는 빈곤과 수난의 고통에 허덕이며 고생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주장하면서 공동소유체제로서 자신이 5년 이상 머물렀던 유토피아에 대해서 살짝 언급했는데 그리하여 모어는 유토피아에 대해 듣고자하는 욕망이 생겼으며, 라파엘이 보았던 유토피아에 대한 여러 가지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2) 「유토피아」 제2부유토피아란 섬은 중앙부의 폭이 200마일이며, 섬 전체는 끝 쪽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같은 폭을 갖고 있어, 양끝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둥글게 구부러져서 전체적으로 초생달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끝은 약 11마일 넓이의 해협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데 이 해협을 통해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 섬 내부를 항구로 만들고 있으며, 섬 어디서나 보트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편의를 준다. 그러나 바다 속의 많은 암초들 때문에 유토피아 인들의 안내 없이는 섬에 들어오기가 어렵고 뱃길도 해안에서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한 수비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섬의 지형을 이루게 된 것은 자연의 힘만은 아니었다. 반도였던 유토피아가 섬이 된 것은 유토포스가 섬을 정복한 이후이며, 섬을 천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지형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유토피아란 명칭은 유토포스로부터 유래했지만 그전에는 아브락사(abraxa)) 라고 불렸다.이 섬에는 같은 언어, 법률, 관습, 제도를 가진 54개)했거나, 또는 비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적은 시간에 좋은 물품을 풍부히 생산해 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우리보다 노력을 덜 들이면서도 꼭 필요한 일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 시간이 감소되는 것이다. 이렇듯 유토피아에서는 경제 전체의 주요 목표를 사회의 필요가 허용하는 한 육체노동에서 해방시켜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갖도록 하는 데 두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 각자는 각자의 마음을 계발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이 행복한 생활의 비결이라고 생각하였다.이제는 그들의 사회조직, 곧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었으며, 그들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물품은 어떻게 분배 되는가 등에 대해 설명하겠다. 유토피아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는 가정이다. 여자는 자라서 결혼을 하면 남편의 가정에서 함께 살지만, 아들과 손자들은 가장 나이 많은 남자 친척의 감독을 받는다. 각 도시는 농촌을 제외하고 6000세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인구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가정도 어른을 10명 이상 16명 이하로 두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만약 어른이 초과하는 경우에는 모자라는 가정으로 이주시키며, 섬 전체의 인구가 초과되면 각 도시의 일정한 국민에게 도시를 떠나 대륙의 가장 가까운 곳에 식민지를 세울 것을 명령한다. 또 그들은 원소유자가 스스로 이용하지 않고 단지 무용한 재산으로 소유하고만 있는 토지로부터 생산품을 얻어내는 자연권을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거부하는 경우, 전쟁은 아주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각 가정은 나이 많은 남자의 다스림을 받고, 아내는 남편에게, 자식은 어버이에게,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모든 도시는 동일 규모의 4개의 구(區)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가정의 생산품은 한데 모아 시장의 창고에 저장되며, 필요한 물품은 값을 치르지 않고 청구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이 풍부하여 쌓아둘 필요가 없으며, 허영심이 없기에 탐욕도 없다. 짐승의 도살과 죽인 짐승의 처리는 노예들이 하며 일반 시민은 을 하더라도 약한 시민은 건드리지 않으며, 전쟁이 끝나면 패전국이 모든 지출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유토피아에는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기를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다른 나라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가 없으나 이웃나라에서 그들의 시민에게 해를 끼치면 즉각 선전포고를 하고 그 범죄자를 처벌하기 전에는 전쟁을 끝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유혈로 얻은 승리보다 지혜로 얻은 승리를 더 자랑스러워한다.끝으로 유토피아 인들의 종교 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섬에는 실제로 몇 가지 이질적인 종교가 존재하나 그들은 그들이 믿는 모든 신들을 통칭하여 ‘미트라스’)라고 부른다. 그들은 창조와 사멸, 성장, 발전,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신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행동에 대하여 말해주었을 때 놀랍게도 영감에 감화 받았는지 쉽게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재산을 공유하는 생활을 명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척 큰 감동을 받았던 것 같았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귀의해서 영세를 얻었다. 물론 기독교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독교를 택하는 것을 막거나 공격하지는 않았다. 신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숭배받기를 원하므로 사람에 따라서 믿는 바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종교의 선택은 개개인이 그 자신의 사상에 따라 결정해야 할 자유로운 문제로 남아있다.라파엘은 교회와 예배의 이야기들로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라파엘은 자기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점을 말했다. 앞에서 얘기한 것들, 즉 유토피아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국가일 뿐 아니라,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다른 나라는 공공의 이익을 말하면서도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유토피아에서는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열성적으로 일하게 되며 이러한 유토피아에는 정의와 공정이 존재한다. 오만은 우리를 뒤로 잡아당기고 훌륭한 생활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방해한다. 인간의 천성에 뿌리박힌 오만 때문에 우리는 우
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사상과 관습2. 토지 개혁과 대약진 운동3. 정치 운동 - 사청 운동과 문화 대혁명4. 사회 문제5. 가족계획운동6. 1990년대 린 마을의 변화Ⅲ. 결 론Ⅰ. 서 론린 마을 이야기는 1949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중국 동남부 연안지역의 린 마을에 사는 공산당 간부 예서기의 눈을 통해 한 개인, 한 마을, 그리고 한 국가로서의 중국이 지난 40년간 동안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어떻게 성장ㆍ혼란ㆍ변화되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이 책에서 저자는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관리인 예서기의 상세한 인생사와 함께 린 마을과 인근 지역 주민들과의 면담도 덧붙여, 객관적으로 중국 혁명의 다양한 국면들이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보여주고 분석하였다.책으로만 읽던 중국 현대사의 사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농촌에서 받아들여졌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또 이 책은 저자와 예서기 간의 대화로 서술되어 있어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 재미있으면서도 사실적이며, 당시 농촌의 생활상에 대해 좀더 자세히 그리고 좀더 실감나게 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지금부터 수업 시간에 배웠던 중국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Ⅱ. 본 론1.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사상과 관습중국인의 생활에서 가족이라는 제도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전통 중국에서 농민의 사회생활을 안정시킨 가장 큰 요인 역시 이러한 가족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가족은 살아있는 구성원의 총합 그 이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가족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전히 가부장적인 모습과 남아선호사상 등의 모습이 남아있었다.한편 중국인들은 어떤 계급이나 신분에 속해 있건 간에 몇 세기에 걸쳐 신비한 힘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린 마을 사람들 역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조상 대대로 풍수사상을 중요시 하여 집을 지을 때나 조상의 묘 자리를 선택할 때에도 풍수를 절대적인 기준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들의 민간신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중국 농촌사람들은 ‘청명(淸明)’이라는 명절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청명절이 돌아오면 그들은 의례 조상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조상의 묘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무덤을 돌본다. 또 매달 음력 1일과 15일에는 문구공(門口公)이라 불리는 떠돌이 귀신을 모시는 종교적인 제례도 존재하였는데, 그날 정오가 되면 길과 면해 있는 대문에 긴 나무의자를 놓고 그 위에 떠돌이 귀신들을 달래기 위한 음식을 놓아 떠돌이 귀신들을 달랬다.한편, 그들은 인성제공(仁聖帝公)과 지부왕야(池府王爺), 유부원수(劉府元帥) 등 세 신(神)이 린 마을을 지킨다고 믿었다. 린 마을 사람들은 이들에 대한 기원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이 신들이 그들을 보호해 준다고 굳게 믿으며 오랜 관습처럼 때마다 마을사원에서 축하의례를 올렸다.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이러한 ‘봉건적 미신’을 타파하고, 전통적인 가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계속적인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린 마을에서와 같이 농촌사회에서 그 가치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적인 사상과 관습들은 그들의 생활을 계속 지배하고 있다.2. 토지 개혁과 대약진 운동1949년 중국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을 이룬다. 이후 중국 정부는 소작제를 폐지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는데, 이러한 토지개혁은 봉건제도를 타파함으로써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단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개혁 때문에 지주와 부농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가지고 있던 땅과 지위를 모두 잃어버리고 계급의 적으로 몰려 박해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이후 1958년 인민공사의 설립으로 중앙정부로부터 농민 통합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대약진 운동과 함께 농업에는 관심을 버리고 제철에만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단기간이었지만 어느 정도 농민들은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959년 수확기에 기근이 밀어닥쳐 농민들은 아무 것도 거둬들일 수가 없었으며, 그 이후로 20년 동안 기근문제는 농촌 삶의 일부로 변해버렸다.정부에서는 농민들을 위한 개혁이라고 단행한 것들이었으나 농민들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이 그들에게 이롭게만 작용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대지주가 몰락하고 초기 당 간부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 시키는 작용을 하였던 토지 개혁은 다시 농촌 마을에 갈등과 증오의 씨앗만 남겼으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시행되지 않았던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농민들은 더 힘겨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3. 정치 운동 - 사청 운동과 문화 대혁명1964년 새로운 정치운동이 중국 농촌사회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일환인 사청 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의 목적은 농촌 정부 단위의 무능력한 간부들을 재교육하거나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청운동이 있은 후 1966년에는 문화 대혁명이라는 것이 실시되는데, 이는 정치권력이 한 파벌에서 다른 파벌로 빈번하게 넘어갔던 혼란스러운 시기로 농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문화 대혁명은 내부의 갈등과 증오로 가득 찬 광란의 시기 중 하나였다. 정치적 광신은 전염성이 아주 강해, 끊임없는 파벌싸움으로 가득 찬 환경에서 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해지고 비합리적으로 변해갔다. 문화대혁명은 모든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들었던 것이다.1978년 사인방의 체포와 더불어 문화 대혁명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으며, 1970년대 말 이후 정부의 농촌 통제가 느슨해짐으로써 마을 생활은 활기가 넘치고 역동적으로 변해갔다. 1978년 중국 정부는 모든 계급구분을 철폐하기로 결정했는데, 정부는 이 뿐만 아니라 반혁명분자나 우파분자와 같이 지난날 계급의 적에게 붙여졌던 모든 꼬리표를 제거하겠다고 공포했다. 이러한 조치는 농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 농촌에서 가장 곤란했던 문제 중 하나는 농민들이 우대받는 계급 대 비판받는 계급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이었는데, 농촌에서 계급의 꼬리표가 사라짐에 따라 중대한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4. 사회 문제1970년대 이전 린 마을에서의 내부 갈등의 주요 유형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었으며, 정치 운동 때 많은 사람들은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 이후에는 정치적 갈등이 많이 줄어든 대신 절도ㆍ간통ㆍ도박과 같은 다른 종류의 갈등이 증가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격렬했던 사청 운동과 문화 대혁명 이후 중국인의 정치적 열정이 사그라지는 것은 거의 불가피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잃게 되었고, 그들의 에너지를 생산 활동에 쏟게 되는데, 이후 생활여건이 개선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경제가 급성장한 최근 도박은 더욱 더 심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마작ㆍ카드ㆍ주사위ㆍ장기 등의 도박에 중독 되었다. 특히 청장년층의 도박은 심각한 문제였는데, 그들은 밤늦게까지 도박을 하고 다음 날은 하품을 하며 자기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또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고, 도박으로 돈을 잃으면 가정에 불화가 생기기도 했다.5. 가족계획운동1985년 5월 린 마을에는 하나의 운동이 하달되었는데, 이것은 마을사람들의 생활방식과 가족구조를 근본적으로 크게 변화시켰다. 산아제한운동이라 불리는 이 정책은 농촌지역에서 현행 두 자녀 정책 대신 가족 당 한 자녀만 허용한다는 것으로,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여자들은 병원에 데려가서 인공유산을 받아야만 했다.앞서 중국의 도시들은 1979년부터 한 자녀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도시 사람들은 실리적인 이유에서 한 자녀 정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농촌의 상황은 이와는 전혀 달라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도시와는 다르게 농촌의 생활공간은 제한되어 있지 않았으며, 농촌사람들은 각자의 노동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어서 도시인들과는 달리 나이가 들어 기댈만한 연금조차 이들에게는 없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족의 대를 잇는 아들에게 이들은 나이가 들면 의지해야 했는데 갑작스런 산아제한운동의 시행으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6. 1990년대 린 마을의 변화린 마을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황교수는 1996년 12월 린 마을로 돌아가 한 달 동안 체류하였다. 중국의 몇몇 농촌지역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샤면 시를 둘러싸고 있는 푸젠 성의 동남부 지방이 보여준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1985년 황교수가 머물렀을 당시 농업지향적인 공동체였던 린 마을은 공업지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마을 인구도 증가된 모습을 보였는데, 마을의 토착민의 수는 1985년 1047명에서 1996년 1280명으로 늘어났으며, 린 마을에 단기간 거주하는 이주민들도 4천 여 명이나 되었다.
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황제 제도2. 중앙집권제도의 수립3. 경제ㆍ사회적 통일정책4. 문화적 통일정책 - 분서갱유(焚書坑儒)5. 흉노(匈奴) 정벌 - 만리장성 구축6. 궁전과 분묘의 건설Ⅲ. 결 론참고 문헌Ⅰ. 序 論진(秦)(B.C. 221~206)은 한(韓)ㆍ위(魏)ㆍ조(趙)ㆍ초(楚)ㆍ연(燕)ㆍ제(齊)등 전국 시대 패권을 나눠 가지고 있던 여섯 나라를 차례로 공격하여 B.C. 221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러한 천하 통일은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 무엇보다 막강한 군사력과 탁월한 통치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통치자를 돕는 이들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데는 누구보다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인 영정(?政)의 공이 컸다.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만약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시키지 못했다면 현재의 중국 대륙은 유럽과 같이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을지도 모른다. 또 중국과 같은 대륙 국가에서 그 많은 인구가 한 가지 문자를 통용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것 역시 시황제의 업적 중 하나로 그의 문자의 통일이 없었다면 현재 중국은 수많은 문자가 통용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이처럼 중국봉건사회의 역사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를 이루었던 그의 통일사업은 놀랍게도 B.C. 230~221년까지의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B.C.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과연 최초의 통일제국을 지속시켜 나가기 위하여 어떠한 정책을 실시하였는가. 본문에서는 그의 통일정책과 함께 진의 통일에 대한 역사적 의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Ⅱ. 本 論1. 稱號의 制定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의 통일정책의 기본방향은 법가주의(法家主義)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하는 데 있었다.시황제는 우선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하여 종래 사용하던 왕(王)의 칭호여 당시까지 사용되었던 시법(諡法)을 불경한 행위로 간주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는 시황제라 부르게 하고 이후 황제는 이세(二世)황제, 삼세(三世)황제라 부르도록 정하였다. 또한 황제의 자칭(自稱)으로는 ‘짐(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신하에게는 이 말의 사용을 금지하도록 결정하였다. 더욱이 황제가 신하와 백성에게 내리는 명령을 ‘제(制)’와 ‘조(詔)’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칭호의 제정은 시황제가 중국통일에 얼마나 커다란 긍지를 가졌으며, 또한 그 정책완수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통일정책 가운데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2. 中央集權 制度의 樹立육국(六國)을 멸망시킨 후 진에서는 전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하나는 승상 왕관(王?)의 의견으로 다른 제후국들은 거리가 멀어 중앙에서 통치하기가 어려우니 주(周)가 시행했던 것처럼 왕자들을 왕에 봉하여 새로이 병합한 지역을 다스리게 하자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정위(廷尉)인 이사(李斯)는 주왕실의 자제일족에 대한 봉건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혈연이 소원해지고 결국에는 서로 쟁투하여 주의 천자조차 이를 막을 수 없게 되어 혼란의 시대를 초래하게 되었으니 애써 통일을 완성한 이상 모든 지역을 군현(郡縣)으로 편재하여 지방관을 파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또 이사는 자제나 공신에게는 나라의 조세에서 충분한 은상을 주고 후에 반역의 뜻을 갖게 됨을 방지하는 것이 천하를 안정시키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여 왕관 등의 의견에 반대하였다.시황제는 위의 의견 중 이사의 의견을 채용하여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한다. 그리하여 B.C. 221년에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은 몇 개의 현(縣)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 중앙으로부터 군수(郡守), 현령(縣令) 등의 지방장관을 임명하여 정치ㆍ군사ㆍ감찰업무를 수행케 하였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봉록을 지급받는 관리로서 세습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인사권은 황제가 장악하여 세력을 부식하며 할거하게 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중앙에는 황제를 정점 승상을 보좌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삼공을 두었다.지방관으로서는 군수ㆍ현령 이외에 군에는 군사를 주관하는 군위(郡尉), 군수를 감찰하는 감어사(監御史)가 있었으며, 현의 장관은 관할하는 호수가 1만호 이상인 경우는 영(令), 이하는 장(長)이라 불렀다. 영과 장 아래에는 현승(縣丞)이 있어 보좌역으로서 문서ㆍ사법을 관장했으며, 현위(縣尉)는 군사를 맡았다. 이들 군현의 관리는 황제가 임명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여러 관리는 군수나 현의 영장(令長)이 그 지방의 유력자들로부터 임명하였다.이렇게 영토를 분할하여 제후를 세우던 이제까지의 귀족 세습 제도는 소멸되고 최고의 지위인 황제에서 최하급 관리인 이정(里正)에 이르기까지의 지배기구, 즉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제주의적인 중앙집권적 국가 기구가 세워졌다. 그러나 군수나 현령에는 대부분 통일과정에서 공적이 있었던 군인들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들 지방관은 민정에 익숙치 못하고 강압적인 통치를 추진하는 약점을 초래하여 후에 진에 대한 반란을 야기 시켰던 원인이 되었다.3. 經濟ㆍ社會的 統一政策시황제의 경제ㆍ사회적 통일정책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시황제는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무기를 모두 몰수해 군에서 모아 녹여 청동의 거대한 인상(人像)ㆍ악기를 만들고 함양궁(咸陽宮) 내에 두었다. 이 금인(金人)은 하나의 무게가 약 30톤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다시는 마음대로 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것이고 이에 의하여 저항이나 반란을 방지하려 하였다.두 번째로 그는 전국 각지의 부호 12만 호를 도읍인 함양(咸陽)으로 옮기고 그 일부는 사천(四川)에까지 이주시켰다. 이들 부호는 상공업자이면서 대토지 소유자로서 대부분 고리대를 겸하여 농민을 수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후진적인 도시였던 수도 함양을 번영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세 번째는 문자의 통일이다. 진나라에서는 법령이나 공문서의 문자를 토대로 이를 개량하여 소전(小篆)과 예서(隸書)의 서체를 만들어 문자를 통일하였다. 이 문자의 통일은(分銅) 등을 각지에 반포했는데, 이는 재정ㆍ경제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수레바퀴의 간격을 6척(尺)으로 통일하고 전국에 걸쳐 도로망을 정비하였는데, 이것은 교통ㆍ상업ㆍ도시 계획 등 다방면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왔다. 화폐도 각국의 포전이나 도전을 모두 폐지하고 원형방공(圓形方孔)의 반량전으로 통일했다. 또 일(鎰: 20냥)을 단위로 하는 금화도 주조되었으며, 이와 함께 공통의 법률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4. 文化的 統一政策 - 焚書坑儒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진의 정치는 법가사상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는데, 시황제의 냉혹한 법가 주의적 통일정책은 필연적으로 법가를 제외한 제자백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유가의 반대를 가장 강하게 받았다. 이에 대하여 시황제는 B.C. 213년 이사의 건의에 기초해 사상탄압을 진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악명 높은 분서갱유이다.이에 따라 의약, 복서(卜筮), 농업 이외의 서적은 관청에서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몰수하여 30일 이내에 소각시켰다. 또한 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유가의 주장을 선전하는 자는 사형에, 옛것을 찬미하고 당시 시행되던 법가사상을 근거로 한 통일정책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 전체를 죽인다는 분서령을 내렸다).현세에 있어서 모든 욕망을 이룬 시황제가 마지막으로 구한 것은 불로장생이었다. 점차 노쇠해가는 자신의 육체를 의식함에 따라 생에 대한 강열한 집착심을 갖게 되어, 그는 동쪽 대양 멀리에 불사의 선인이 살고 있는 섬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섬에 탐험대를 보냈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분서령이 시행된 그 이듬해 신선도(神仙道)를 주장하는 방사(方士)뿐 아니라, 유자(儒者) 중에 시황제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경한 탄압을 가해 유자 460여 명을 함양에서 흙구덩이에 파묻어 생매장하는데, 이를 갱유사건이라 한다.5. 匈奴 征伐 - 萬里長城 構築한편 천하통일을 이룬 시황제에게도 계속 부담이 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에 요동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완성하였다.만리장성은 흙을 쌓아 굳힌 토성(土城)으로 전국시대에 북방 유목민을 막기 위하여 연(燕)ㆍ조(趙)ㆍ진(秦)에서 만들었던 성벽을 보수ㆍ연결한 것으로 원래 이 장성은 단순히 대립하는 두 군사력의 경계라는 의미뿐 아니라 농경세계와 유목세계라는 자연조건을 근거로 한 생활문화의 경계였다는 점과 중국의 북변경계를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리장성은 중국민족 발전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념비이며 그것은 동시에 중국에 처음 군림한 절대자 시황제의 위대한 권력의 상징이었다.6. 宮殿과 墳墓의 建設시황제는 위엄의 상징으로 함양의 수도에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리는 거대한 궁전들을 건설했는데 여기에는 70여만 명이 넘는 인부가 동원됐다. 아방궁은 계획된 신궁전 중 전전부분에 해당하며, 시황제 생존 중에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 규모는 동서 약 700m, 남북 약 120m, 그리고 전상에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대한 궁이었다.또한 시황제 즉위와 동시에 착공된 거대한 능묘인 여산능이 있다. 이는 서안(西安) 동쪽 임동현(臨潼縣) 근처의 여산(驪山)에 위치한 것이며, 거대한 분구(墳丘)로 높이 120m, 한 변이 600m인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묘실 안에는 궁전이 건조되고 백관의 자리도 정해져 있었다. 또한 남아 있는 이 묘의 바닥에는 황하와 양자강 등의 주요하천이 만들어지고 물 대신에 수은이 유동하는 것처럼 장치되어 있으며, 천장에는 옥과 돌로 해와 달이나 별 등을 만들어 기계로 움직이게 했다고 한다. 즉 사후에도 호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현세를 그대로 재현하려 했던 것이다).Ⅲ. 結 論진의 통일제국은 불과 15년간 계속되었으며 시황제가 사망하자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중요하며 시황제의 통치 스타일은 이후 역대의 통일제국 전제군주에게 그대로 답습되어 통치의 정형(定型)으로 계승되었다.진의 통일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의 출현이란 사실이다. 은있다.
Ⅰ. 서 론요즘의 교육문제들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시대가 변화함으로 인해 그에 따라 변화하는 교육정책에서 많은 문제점이 야기되고 있는데, 이중 고교 평준화 정책은 평등권과 학교선택권, 또 학교 교육의 정상화와 교육의 수월성 문제 등이 얽혀 그동안 뜨거운 감자가 되어왔다.최근에는 교육인적자원부가 고교 평준화 실시 지역 지정권한을 시도교육감에게 위임하는 내용의 ‘초ㆍ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 하면서 춘천, 원주, 강릉 등 비평준화 지역에서 평준화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데, 이러한 찬반 논쟁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이념논쟁으로까지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이렇듯 본고에서는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고교 평준화 정책과 고교 평준화 정책의 쟁점들을 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Ⅱ. 본 론1. 고교 평준화 정책우선 고교 평준화의 뜻을 알아보자. 교육 평준화는 교육의 평등주의 이념과 보통교육 정신을 바탕으로 국민의 균등한 교육기회를 보장하고 과도한 입시경쟁을 해소함으로써 중등교육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고교 평준화 정책은 한마디로 추첨배정방식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 같은 경우는 내신 성적이나 시험을 통해서 고등학교 입학을 할 수 있게 하여 명문고부터 성적이 높은 학생을 뽑았으나, 고교 평준화 정책은 고등학교 진학을 지원한 학생들을 무작위로 나열한 후 추첨을 하여 정원만 뽑아가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고교 평준화 정책의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정치적 배경으로서 유신정부의 탄생이다. 무리하게 출범한 유신정부는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할 획기적 개혁사업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정치적 필요를 느꼈다.둘째, 당시 교육사회에 만연한 문제는 고등학교 입시과열과 관련된 것이었다.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해져 많은 부작용을 낳자 1969년에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가 먼저 시행되었다. 이에 따른 중학교 교육의 팽창은 곧이어 순차적으로 고교입시에 영향을 미쳤다. 고교입시의 경쟁과열, 중학교 교육과정의 비정상적 운영 등의 폐해가 극심하고 나아가 전국적인 과외열풍이 몰아쳐 이로 인해 과외망국론으로까지 비화되는 사회상황이 전개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평준화 정책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의 문제점들이다.입시위주의 파행적인 교육과정 운영으로 인한 중등교육의 비정상화, 중학생의 전인적 성장 저해, 학교 간 격차의 심화와 학교 서열화로 인한 병폐, 일류고교나 대도시 명문고교 입학을 위한 학생 인구의 도시 집중, 과열과외로 인한 공교육의 공신력 실추 및 사교육비 부담으로 인한 계층간 위화감, 재수생 누적과 재수풍조 만연 등 이러한 여러 이유가 복합되어 1974년부터 서울과 부산에서 고교 평준화 정책을 실시되게 된다.2. 평준화 정책의 경과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당시 유신정부의 문교부는 ‘입시제도 연구협의회’에 고교입시제도의 근본적인 개선방안을 연구하도록 위탁하였고 연구보고서를 토대로 1973년 2월 인문고교 추첨입학제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고입제도 개선안을 발표하기 위해 일련의 절차를 밟는다. 그 절차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972년 10월 17일 유신선포1972년 10월 24일 민관식 문교부 장관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평준화 정책 구상 피력1972년 12월 ‘입시제도연구협의회’발족1973년 2월 고등학교 입시제도 개선 방안 발표1973년 6월 고교입시제도 확정 발표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고교 평준화 시행1975년 서울과 부산에 추가하여 인천, 광주, 대구 등 5개 지역에서 평준화정책 실시위에 제시된 바처럼 최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문교부 장관이 평준화 정책 구상을 언급한 후 약 한달이 경과한 후에 입시제도 연구협의회를 구성하고 3개월간의 짧은 연구ㆍ협의 활동을 거쳐서 연구결과로서 정책방안이 제출ㆍ보고 되었다. 73년 2월 정책방안이 발효된 후 73년 6월 확정안 발표까지 보완 과정을 거치긴 했으나 다방면의 다수의 전문가들에 의한 치밀한 연구와 판단을 적절히 반영하기는 부족한 절차였다.3. 고교 평준화 정책 논란의 배경현재 고교 평준화 정책은 서울, 부산 등 7개 특별, 광역시와 함께 수원, 전주, 청주, 창원, 제주 등 23개의 시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교육부가 평준화 실시 권한을 시도교육감에게 위임하는 내용의 ‘초ㆍ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비평준화 제도를 택하고 있는 지역에서 고교입시제도 개선 요구가 더욱 증폭되고 있다.현재 고교 평준화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는 시는 경기 안산, 광명, 의정부를 비롯해 춘천, 원주, 강릉, 김해, 포항, 안동, 전남 목포, 여수, 순천 등으로 경기지역의 경우 광명교육연대 등 12개 시민단체가 고교 평준화 도입을 위한 시민연대를 결성하여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도교육청을 압박하고 있다. 또 포항지역의 21개 단체로 구성된 ‘포항 고교 평준화 추진위원회’도 최근 활동을 본격화하고 있으며, 김해의 12개 단체도 올 초 ‘김해지역 고교 평준화 실현을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구성하여 서명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 고교 비평준화 유지를 지지하는 모임도 속속 생겨나면서 평준화 도입 여부를 둘러싸고 극단적인 대립양상까지 나타나고 있다.4.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찬반 쟁점고교 평준화 정책은 고교교육 정상화와 고교입시 과열과외 억제라는 명분을 얻은 대신, 교육의 자유를 억압하는 억압적인 요소를 상당히 가지고 태어났다. 이렇기 때문에 이런 양면성을 가진 고교 평준화 정책은 끊임없는 쟁점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교 평준화 정책은 학부모의 집단 항의 데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의 집단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였다.고교 평준화 정책은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 학교 간 교육격차 완화, 과열 고입경쟁 해소, 과열과외 완화, 지방학생의 대도시 집중 완화, 지역간ㆍ사회계층간 위화감 해소 등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왔다. 특히 고교 평준화 정책으로 고교 교육기회가 확대된 점은 가장 큰 성과로 볼 수 있다.그러나 학급 내에 능력 차이가 있는 학생들이 함께 공부함으로써 수월성 교육이 어렵고 이로 인한 교육의 획일화, 학력저하, 교육경쟁력 저하, 학교 붕괴, 과열과외 및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 교육이민과 기러기 가족 문제, 학생의 학교선택 제한, 능력 있는 학생에 대한 역차별 문제, 사립고의 자율성 제약 등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고교 평준화’라는 용어의 문제점도 많이 지적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문자 그대로 고교의 평준화는 실종되고 사실상 남아 있는 것은 학생을 학군별로 추첨하여 강제 배정하는 제도하는 것이다. 시행 초기에 비해서 개선된 것은 근거리 우선 배정원칙과 선지원 후 추첨이 보완된 점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추첨 방법이 구슬추첨에서 컴퓨터 추첨으로 바뀌어 시행된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따라서 ‘인문고추첨배정제’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명칭이라는 것이다.
갈등이론과 교육현상서론교육의 기회균등이니 자유경쟁이니 하는 이상론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기능이론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하면서 갈등이론이 등장하였다. 현대 학교제도에 대한 비판은 갈등론적 시각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는데 갈등이론가들은 교육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계급에 평등하게 주어지기보다는 사회 저변에 널려있는 불평등과 불공정을 강화, 유지함으로써 평등사회의 실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현행 학교교육을 비판한다. 이들은 현대의 학교교육제도가 사회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며, 학교교육의 내용도 특정 사회계급의 지식을 교육과정을 통하여 전수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앞으로 나는 이와 같은 갈등이론가들의 입장과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교육현상을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몇 가지 이론과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1. 경제적 재생산 이론경제적 재생산론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학교교육은 경제적 모순을 은폐하고, 불평등한 구조를 존속, 유지, 심화시켰으며, 아울러 지배계급의 위치를 정당화하는 도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데, 학교교육은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 합법화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위치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보울즈와 긴티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위계관계를 정당화하는 학교교육의 역할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대응원리를 제시하였는데 이를테면,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복종, 순응, 시간엄수 등과, 중등학교에서는 지식, 가치, 규범 그리고 고등교육에서는 독립심, 창조력, 리더십 등을 배웠는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초등학교에서는 하위직에 적합한 것을 중등학교에서는 중간직, 고등교육에서는 경영자에 적합한 인성체계를 은밀히 전수받아 기존의 경제 권력의 구조를 교묘히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예를 들어 대응이론을 살펴보자. 학창시절 우리는 학기 초에 부모님의 직업과 학벌을 조사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교사는 학생들의 초기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서, 그들의 부모가 갖는 직업 문화와 상통하는 일정수준의 정형화된 기대를 학생들에게 하게 된다. 즉, 하층이면 하층의 학생들이 어떤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어떠한 문화적 경험을 할 것인가 등의 기대가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초기 사회경제적 지위는 교사의 기대와 1:1로 대응하고 있으며, 교사의 기대에 맞추어서 학생들은 판단되고 그 학생들에 맞는 교육과정이 짜여진다. 어렸을 때라 그때는 우리의 선생님들이 그것을 왜 조사하는지도 몰랐었지만 정말로 우리 선생님들은 대응이론처럼 사회경제적 지위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셨던 것일까?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지만 나 또한 교사가 되어 내 학생들을 처음 접할 때 그렇게 평가하게 되지는 않을까?한편, 학교교육이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 시키는 예인 자립형 사립고의 경우를 살펴보자. 자립형 사립고란 탈규제학교와 같은 개념으로 학교 운영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학교로 지식기반사회를 맞아 학습자의 소질, 적성 및 창의성 개발을 지원하고 학생ㆍ학부모의 다양한 요구 및 선택기회 확대를 위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자립형 사립고는 저소득층 학생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교육인적자원부는 2002년부터 시범운영해온 전국 6개 자립형 사립고 평가결과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자립형 사립고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의 월 평균 소득이 도시근로자의 평균 소득에 비해 1.6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자립형 사립고 중 민족사관고 학부모의 경우 월소득 7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 비율이 35% 이상으로 조사되었다. 이처럼 자립형 사립고는 학교교육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경제적 모순을 확연히 드러난 경우로 원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자립형사립고는 시행된 지 3년 만에 엘리트 귀족학교로 변질되고 있다.2. 문화적 재생산 이론문화적 재생산론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이유를 지배계급이 선호하는 문화를 학교교육에 투입시켜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즉, 교육제도야말로 계급관계의 구조를 재생산하면서도 중립적 태도를 표방함으로써 수행하고 있는 기능을 은폐하기 때문에 권력과 특전의 세습이 철저히 부정되는 사회에서 계급관계의 구조를 아무런 말썽 없이 재생산해내는 교묘하고 편리한 제도인 것이다.문화적 재생산 이론의 이론적 핵심은 문화자본과 습성이다. 문화자본이란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언어적 능력과 문화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결정된 취미라든가 지식, 언어 형태, 능력, 또는 사회로부터 불공평하게 배분된 앎의 형태 등을 의미한다.학교는 지배계급의 문화를 강조하고 있으며, 따라서 계급적 배경이 다른 문화자본을 가진 아동들은 학업성취 면에서 열등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나아가 미래에 차지할 직업적 지위에도 영향을 주었다.최근 서울대 자체적으로 서울대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서울대 합격생들 중 서울, 수도권, 광역시 출신이 74%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중 38.5%는 서울, 22.8%는 광역시, 나머지 12.7%는 수도권 출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기타 도시지역은 19.2%, 읍면 지역 출신은 4.1%에 불과했다. 이렇듯 서울대 합격생들의 심한 지역편차는 그들의 부모의 직업과도 무관하지 않았는데, 조사결과 신입생의 아버지의 직업은 판사, 검사, 의사, 변호사, 교수 등의 전문직이 18.1%, 경영 관리직이 20.6%, 사무직이 24%인 반면 농축산업은 2.3%에 그쳤다.또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김광억 교수 연구팀의 연구 자료를 살펴보면, 고소득 계층이 모여 사는 서울 강남권 고등학교의 서울대 입학률이 전국 고등학교 평균 보다 2배에서 3.5배까지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전문직과 4급 이상 공무원, 간부급 회사원 등 고소득 직군의 아버지를 둔 자녀가 기타 계층의 자녀에 비해 서울대 입학률이 무려 1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연구팀의 이 같은 결과는 사교육의 격차가 학력 수준의 세습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며 그동안의 입시제도가 사회 계층의 고착화를 막는데 효과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정부가 추진해온 학교교육 정상화와 교육기회 균등을 위한 입시제도가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오히려 고학력층이 세습되는 사실이 연구조사 결과 밝혀진 것이다.요즘의 우리 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강남불패’, ‘고액과외’ 등이 그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엄마들의 입시전략』이란 책이 등장해서 불티나게 팔리는 시대, 이렇듯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만의 벽을 쌓아 그 안에서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자본을 그들의 자식들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이처럼 부모세대의 생활양식과 경험, 또 부모들이 누리는 고급문화와 지배문화를 자식세대에 전수해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고액과외를 통해 상위학교로 진급한 이들의 자녀들은 또 다시 하류층과는 다른 그들만의 문화자본을 전수받게 되고 이러한 순환은 졸업증서와 학위를 수여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