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립중앙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박물관이다. 원래 경복궁내에 있는 중앙박물관 사회교육원을 증·개축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다가 2004년 10월에는 2005년 10월까지 약 1년 동안 용산 새 박물관 개관준비로 국립중앙박물관이 휴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5년 10월 28일부터 용산으로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였다. 그 규모가 세계에서 여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로 크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전 행사로 무료입장을 할 때 한번 가보았다. 그 때도 거대한 규모에 놀랐지만 이번에 3여년 만에 다시 찾았지만 여전히 거대한 규모였다.국립중앙박물관은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고 두 관 모두 3층으로 되어있다. 서관은 기획전시를 위한 공관과 어린이 박물관과 연구실로 되어 있는 별관에 가깝다. 동관은 그야말로 전시관인데 1층은 고고관과 역사관, 2층은 미술관Ⅰ과 기증관, 3층은 미술관Ⅱ와 아시아관으로 되어있다.아무리 작은 박물관도 하루 안에는 보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넓은 국립중앙박물관을 하루 동안 보는 것은 너무 무리였다. 그래서 중심적으로 미술관을 보기로 하고 고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고관은 구석기 시대부터 통일신라, 발해까지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학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회가 한국고대사연구회인지라 눈에 들어오는 유물들이 많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특히 신라시대 금관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반가웠다. 미술사 시간에 배운 사슴뿔 머리장식과 나뭇가지 장식을 보며 같이 간 일행에게 실컷 잘난 척을 해주었다. 발해를 끝으로 고고관을 나오는데 경천사십층석탑이 눈에 보였다. 13.5m나 되는 이 경천사십층석탑은 1907년에 일본이 무단으로 가져갔다가 1918년에 다시 돌려받은 탑이었다. 그 후 경복궁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옮기며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10층이나 되는 높이도 감탄할 일이지만 불상이 조각되어있는 모습에 더 감탄했다. 하지만 유물에서 나타나는 감탄과 달리 탑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그리고 혹시나 이번 발표주제인 장승업의 작품이 있을까라는 기대도 해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불교회화실에서는 아는 작품은 없었지만 그림에서 나타내는 주제나 보살상의 의미를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특히 부석사의 괘불은 너무 반가웠다. 답사 때 한번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 전시 때문일까? 그래도 괘불 앞에는 자세한 설명과 괘불 그려져 있는 부처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괘불에서 여러 부처들을 찾아보고 목칠공예실로 갔다. 각종 목가구들과 나전칠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분야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지식이 없었기에 그냥 둘러보는 정도로 그쳤다. 나전칠기의 제작 기법이도 나와 있었으면 관찰해가며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래도 전시실 중앙에 조선시대 집안 모습을 재현해 놓은 기와집 모형이 있어서 고고관에서 본 암기와, 수기와, 수막새등을 찾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이렇게 미술관Ⅰ을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기증관이 나왔다. 나는 당연히 미술관Ⅱ로 들어 갈 줄 알았는데 기증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3층으로 바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3층으로 올라가 바로 미술관Ⅱ를 보고 다음에 아시아관까지 보고나서 마지막으로 기증관에 들어 가야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1층에서 1층 전시실을 다 보고 나서 2층으로 올라가는 구조라서 2층도 당연히 2층 전시실을 다 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판플렛에 나와 있는 이동경로를 보니 3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솔직히 기증관에 들어간 게 시간이 좀 아까웠다. 물론 기증관도 여러 유물이 있었으나 한 가지 주제로 모아 놓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기증한 유물을 모아 놓은 거라 여러 시대 유물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설명 또한 부실하게 있어서 실망이 적지 않았다. 최영도실에 장군이란 그릇이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술이나 간장등 액체를 담았던 그릇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이다.3층에 올라와 드디어 미술관Ⅱ로 향했다. 미술관Ⅱ에는 먼저 불교조각실이 있었다. 불교조각한 것이 아쉬웠다.금속공예실은 그 이름답게 역시나 화려했다. 정교한 무늬를 새겨 넣은 솜씨를 보며 연달아 감탄했다. 그 중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감은사 동탑 사리구”였다. 이번 추계정기학술답사 때 감은사를 방문했었기 때문이다. 감은사는 681년에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는데 문무왕의 왕릉인 대왕암이 바로 앞 동해바다에 있다. 감은사의 서탑은 복원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동탑은 볼 수 있었다. 감은사 동탑을 보면서 사리구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박물관에서 보게 되어 좋았다.답사 때 추억을 떠올리며 도자공예실로 이동하였다. 먼저 청자들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고려시대의 많은 청자들이 있었는데 특이한 모양의 청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참외 모양과 비슷했는데 이러한 모양 때문에 유물의 이름 또한 참외 모양의 청자였다. 국보 94호로 지정되어있었다. 여기서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 참외 모양의 청자는 고려 17대 인종(仁宗, 1122~1146)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청동기인 준(尊)이라는 술병에서 유래하는 이 병은 북송시대에 도자기로 제작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병은 입 부분이 과장되고 몸체가 풍만하며 굽이 낮아 둔중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이 병은 형태의 완벽한 균형과 비색(翡色) 유약의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어 고려청자 고유의 조형미가 돋보여 이 병은 12세기 중엽 경의 고려청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자, 유색과 형태에서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명품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따로 조사해보고 알 수 있었지 박물관 내에서는 알 수 없었다. 이 유물 옆에 간략하게 소개라도 해 놓았더라면 유물을 더 자세하고 깊게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이러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분청사기실을 지나 백자실로 갔다. 백자실에 온 나는 조금 의아했다. 백자라고 하면 순백의 미로 잘 알려져 있는데 했다.국립고궁박물관은 1908년 9월에 황실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8월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경복궁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이전하여 부분 개관을 하다가 다시 2007년 11월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전관 개간하였다.처음에 고궁박물관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고궁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박물관이 경복궁 옆에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500년 조선 왕실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의 한 왕조만 소개하는 박물관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설레였다.국립고궁박물관은 관람 경로도 특이했다. 지상에서 지하로 관람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처음 코스인 2층으로 향했다. 2층은 제왕기록실, 국가의례실, 궁궐건축실, 과학문화실, 왕실생활실과 기획전시실로 나뉘어 있었다. 기획전시실은 지하 2층까지 관람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보기로 하고 먼저 제왕기록실로 향했다. 이곳에는 어진, 어보, 어책, 의궤 등의 전시를 통해, 왕의 즉위와 공식 행사나 일상생활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어진, 어보, 의궤와 같은 유물들은 보고 ‘이런 것을 사용했구나!’ 라고 알 수 있었지만 막상 책 종류는 실록을 제외하고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특히 선원록(璿源錄)과 같은 책은 나중에서야 왕실 족보로 국가에서 관리하는 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 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국가의례실로 향했다. 여기에는 제례에 사용된 각종 제기와 악기, 예복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각종 제기들과 악기, 예복 등은 제례에 관련된 것들이어서 이 전시실에 있는 것이 이해가 되었지만 명릉도(明陵圖)와 같이 숙종과 숙종비의 왕릉을 그린 그림은 국가의례실보다 회화관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궁궐건축실로 오고 나서야 ‘아! 고궁박물관에 온 것 같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전시실에서 왕궁의 구조와 각종 장식물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쌍용각보개(雙龍刻교육이 엄격하고 하루 종일 이루어졌던 것을 보면서 왕실의 세자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왕실문예실에는 어제, 어필과 왕실소장 인장 등이 전시되어있었는데 어제나 어필, 인장들이 왕실문예와 어떤 관계인지 의문만 들게 되었다. 처음에 단지 전시관이 왕실문예실이라고 되어있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뒤로하고 대한제국실로 향했다. 대한제국실에서 대한제국기의 유물, 근대기 신문과 왕실 사진자료, 궁중 생활공간 재현 모습을 보고 마지막 층으로 향했다.마지막 층은 지하 1층은 궁중회화실, 궁중음악실, 어가의장실, 자격루실 그리고 기획전시실Ⅱ로 나뉘어 있었다. 기획전시실Ⅱ는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갈 수 없었다. 먼저 궁중회화실은 왕실의 권위를 아름답게 꾸며 주었던 장식병풍, 궁중기록화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였다. 2층의 제왕기록실에서 한 번 보았기 때문이다. ‘왜 병풍이 여기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회화실에 와서야 일월오봉도는 왕권을 상징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던 병풍 그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궁중음악실에서는 조선의 예악(禮樂)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궁중악기들이 전시되어있었고 전통악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다음 어가의장실에서는 국가의례를 치르는 국왕행차에 등장했던 가마와 인장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격루실에는 옛 자격루를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었다.이렇게 마지막 층까지 돌아보고 나서 다시 2층으로 올라와 기획전시실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수자기(帥字旗)-136년 만의 귀환’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가 있었다. 깃발 한 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혀있는 수자기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이며 전시된 것은 강화도를 지키는 부대 진무영(鎭撫營)에 있던 것으로 1871년 고종8년 신미양요 때 어재연(魚在淵)장군이 광성보를 본진으로 삼아 미군과 싸웠을 때 걸었던 깃발이다. 미군이 이 깃발을 가져갔다가 136다.
제6강 17~19세기 일본사회7. 봉건사회 해체기의 문화사학과 20040301 전종선봉건질서의 경사와 조닌 예술의 난숙상품경제의 발전에 기인한 무사와 농문의 곤궁은 시세가 진행됨에 따라서 한층 더 심각해졌다. 1716년 교호(享保 1) 제8대 쇼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享保改革)은 이러한 추세를 억제해서 봉건질서를 다시 강화하려는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1787년(天明 7)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의 밑에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로주(老中))에 취임해서 이른바 간세이 개혁(寬政改革)을 시작했다. 다시 복고주의적 정책이 채용되어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재정 재건을 목표로 해서 검약을 권장하고 사치를 억제하며 무사들을 구제하고 농촌의 황폐를 방지하는 방책을 마련하는 등의 여러 조치가 강행되었다.그런데 1793년(寬政 5) 사다노부가 물러나고 쇼군 이에나리가 실권을 행사하게 되자 이른바 숙정정치(肅正政治)는 중단되고,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감각적 향락을 추구하는, 이른바 분카분세이(文化文政)의 난숙 시대(爛熟時代)가 전개되었다.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의 밑에서 로주가 되었던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가 시도한 덴포 개혁(天保改革)은 이러한 시세를 쫓아서 이루어진 봉건제를 다시 강화하기 위해서 마지막 노력으로 검약을 장려하고 풍속을 숙정해서 재정의 정비를 꾀했다. 또한 에도(江戶)의 10리 사방 지역을 막부의 직할지로 삼는다든지, 농촌의 신흥상인을 막부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둔다든지 하는 등의 절대주의적 색채를 띤 중앙집권 강화정책을 실시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1843년(天保 14)에 다다쿠니는 실각하고, 그후에도 막부는 줄곧 쇠퇴했다.이처럼 봉건사회의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서 그러한 큰 흐름을 억누르려는 복고적 간섭정책과 흐름에 순응하려고 하는 현실적인 방임정책이 번갈아 이루어지는 속에서 시대는 흘러가고 있었다. 복고적인 개혁정책이 시행되는 시기에는 풍속의 숙정이 행해져서 항상 조닌 문화에 대한 가혹 그림이나 삽화가 구사조시의 큰 매력이었던 것인데, 그점에서 예전의 에마키모노 등을 계승하는 점이 특이한 문예 형태이다.) 그러나 내용은 현실에서 벗어난 황당무계한 것이 많고, 삽화에 가부키의 무대 연기를 도입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더욱 문예로서의 자율성을 상실하는 성향이 뚜렷해졌다.이들과 비교하면 향락가에서 효캬쿠(?客))와 창녀와의 대화를 극명하게 묘사한 사례혼은 지루하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현실에 충실한 만큼 자연스럽다. 사례혼에서 나온 곳케이본의 대표작인 시키테이 산바(式亭三馬)의 《우키요후로(浮世風呂)》와 《우키요도코(浮世床))》등에는 공중목욕탕이나 이발소에 모여드는 시정의 남녀노소의 대화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 서민사회의 분위기를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사례혼의 또 하나의 부산물은 닌조본은 다메나가 슌스이(鳥永春水)의 《슌쇼쿠 메고요미(春色梅兒譽美)》가 대표작이다. 화류계서의 남녀의 심리적인 갈등을 이 또한 삽화를 통해서 부각시키는 그 배경의 정조와 함께 차분히 그려내는 등, 난숙한 조닌 생활의 한 단면을 포착하고 있는 점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소설로서의 스케일이 작고 사상적인 깊이도 고상한 품위도 부족한 것으로 무어라고 해도 퇴폐기(頹廢期)의 잔재주를 보여주는 것 이상은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 조닌 문예의 한계점을 느끼게 된다.문자에 의한 문예 외에도 민중의 오락장소로 요세(寄席))가 발생해서 고단(講談)), 라쿠고(落語))와 같이 귀로 듣는 대중문예가 발생한 것은 서민문화의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다.자카마쓰가 활동하던 때에는 한 사람이 부리던 인형이 마침내 세 사람이 부리게 되는 등 닌교조루리의 연출 기법에 지식이 축적되는 사운데 각본의 구상도 복잡한 줄거리와 다양한 취향을 다루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은 한 곡 전체로서의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해도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는 비인간적인 봉건도덕에 대한 민중의 감춰진 비판을 느낄 수도 있어서 감동적인 무대예술의 본령을 잃지 않고 있다.희곡으로는 가부키의 각본이 날카롭게 파악한 걸작이 많다. 같은 곳케이 시인 31문자로 된 교카(狂歌))와 더불어 태평한 세상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익살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생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나 인생에 대한 통렬한 풍자는 생겨나지 않고 뒤에는 우가치(うがち))나 샤레(しゃわ))에서 기지를 다투는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다음에 조형미술로 눈을 돌리면, 우키요에의 판화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극채색(極彩色)안 니시키에(錦繪))를 찍어내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전대 이래 우키요에의 주된 제재인 미인화에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 배우의 초상화를 잘 그린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와 같은 명가가 배출되었다. 하루노부나 우타마로의 미인화는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일본적 여성미를 그려내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어떤 인물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서 개성미의 묘사가 약한 것은 물론이고, 겐로쿠 시대의 미인화에 비교해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무기력함을 느끼게 해서 퇴폐적 사회에서 사는 여성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인물이나 풍속의 묘사가 한계에 부딪히자 이를 타개하고자 우키요에 풍경화의 개척이 진행되었으며 막말기(幕末期)에 가까워지면서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와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라는 두 천재가 나타났다. 특히 언행이 괴이하고 기발한 경향이 없지 않았던 호쿠사이보다도 히로시게의 침착한 필치는 예술적 깊이나 날카로움이 없다고는 하지만 비, 바람, 눈 등의 사계절에 따라서 달라지는 풍물로 꾸며진 일본의 풍토를 차분한 분위기를 불어넣어서 묘사하는 작업에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우키요에 판화 외에도 사생을 중시하는 마루야마 오쿄(圓山應擧)의 마루야마파(圓山派), 고슌(吳春)의 시조파(四條派)가 교토 부근의 풍경을 온아한 필치로 그려서 교토 부근에 살던 호상에게 환영받았다는데 예술로서는 어중간하다고나 할까 그다지 특색이 없는 작품이었다.이 시대의 조형미술의 영역에서 대서특필해야 하순수한 일본의 고도를 추구하기 위해 고전의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다.말하자면 소라이학의 중국 숭배를 뒤집어놓은 형태로 일본 중심주의를 주창한 것인데, 유교의 사변적이고도 도학적 주장과 같은 성격의 사상이 실증적 학문 연구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었던 것으로, 그점에서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탈피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유학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중국의 고전만 읽고 있는 것을 공격해서 일본 고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하나의 진보이다. 그렇다고 해도 국학자의 시야가 고전의 연구에 신천지를 타개하는데 그치고 고전의 틀에서 벗어나서 직접 살아 있는 현실에 대응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커다란 결점이었다.국학의 주류가 현실로부터 유리된 고전의 문헌학적 연구에 파묻히고 게다가 그러한 문헌학적 객관주의마저 스스로 지키지 않고, 세계관의 측면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신비주의로 타락한 일면도 지녔던 것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과학적인 태도가 강했던 것은 난학 내지는 양학이었다.쇄국정책으로 인해서 국민의 시선은 세계의 움직임과 차단되었으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서양문화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쇄국을 취하던 시대에 일본에 남아 있던 유일한 창구는 나가사키였다. 이곳을 통해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서 서양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열성적 노력이 계속되었다.또한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봉건사회를 보강하기 위해서 서양의 근대과학과 그 기술을 이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제8대 쇼군인 요시무네와 같은 경우는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 실학(實學)을 중시했으며 그러한 견지에서 네덜란드의 천문과 역학 등에 관심을 쏟아서 난학을 장려했다. 단 기독교를 금지시키기 위해서 서양 서적을 읽는 것은 엄격히 제약했기 때문에 서양 학문을 배우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막말기에 이르자 네덜란드만이 아니라 널리 유럽 제국의 근대적 학술과 기예에 대한 학습도 행해져서 난학보다도 넓은 양학이라는단(海國兵談)》을 저술해서 서양 제국의 진출을 예언, 경고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그를 처벌했고, 인민이 세계정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막기에만 급급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도 시대 양학은 사회현상이나 인생관의 분야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정신을 일본인 사이에 퍼뜨리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혁신적인 사회사상의 전개철학이나 사회사상의 영역에 대한 연구를 방기했던 에도 시대 양학자들은 실천적 행동원리에 있어서는 여전히 봉건윤리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은 봉건제를 보강하기 위해서 양학을 채용했던 지배계급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동양의 도덕, 서양의 예(藝)’)라는 시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말은 봉건 윤리를 주체적 입장으로 삼고서 자연과학 및 응용기술을 이용한다는 양학의 존재 형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그러나 봉건사회의 해체과정이 진행되는 이 시대의 역사적 추세는 일본인의 체험을 통해서 봉건사회 또는 막번체제(幕蕃體制)에 대한 비판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서양의 근대적 사회사상을 조직적으로 학습하지 않았다고 해도 스스로 혁신적 사고방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1752년을 전후한 시기에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시젠신에이도(自然眞營道)》와 《도도신덴(統道眞傳)》등을 저술해서 독창적 철학체계를 세웠다. 그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 농사에 종사해서 곡물을 생산하여 생활해야 하는 것으로, 스스로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생산한 곡물을 무상으로 입수해서 생활하는 것은 도둑과 다를 바 없다는 전대미문의 명제를 그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이 근본원리를 적용해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근본 문제와 정면으로 충돌해서 노동 백성의 입장을 올바르게 대변하는 철학을 수립한 쇼에키는 일본 사상사에서 지극히 커다란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쇼에키는 고대의 자연세(自然世)로의 복고를 지향하는 복고주의적 논리를 갖고 있었으며, 현.
일리아드 줄거리- 트로이의 또다른 명칭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며 십 년 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을 노래한 것이다. 트로이전쟁을 중심으로 아킬레우스(Achilles)의 무공과 그의 분노들이 빚어내는 전쟁의 이야기이다.트로이에서는 푸리아모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파리스라는 사내아이를 낳을 때 왕비가 불길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이번에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트로이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꿈이었다. 그래서 왕은 파리스를 낳자마자 트로이에서 보이는 이다라는 산의 숲 속에 버린다. 버림 받은 파리스는 양치는 사람에게 구원되어 양육된다. 그는 성장한 후 양치기를 하면서 유년을 보낸다.이때 신들의 세계에서는 10년이나 걸렸던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올림푸스의 산상에서의 연회에 여신 세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초대 되었으나 전쟁의 신인 아레스가 초대 받지를 못한 것이다. 초대 받지 못해 화가 난 아레스는 신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기 위해 “가장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세긴 한 개의 황금사과를 던진다.여신들은 모두 그 황금사과를 가지고 싶어 했으나 그 중 아름다움으로 손꼽히는 세 여신 즉 제우스의 처이며 가정의 신인 헤라, 승리와 수예의 여신 아테네, 미와 사랑의 신 아프로티테가 서로 그 황금사과를 차지하려 한다. 그런데 제우스는 이 경쟁의 심판관으로 이다산의 파리스를 임명 한다. 세 여신은 자신이 제일 아름답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각자 파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제안을 하는데 헤라는 “만약 나를 선택 한다면 권력과 부를 주고 아시아의 왕을 삼겠다”라고 하고 아테네는 “그대를 연전연승의 영웅으로 삼겠다”고 했으며 아프로티테는 “그대에게 세계에서 제일의 미인을 택하여 주리라”고 했다. 파리스는 세 가지 제안 중에서 아프로티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이에 아프로티테는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파리스가 트로이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를 트로이에 가도록 한다. 트로이에가멤논은 늙은 신관에게 오히려 모욕을 주어 쫓아 버린다. 이에 화가 난 아폴로 신은 그리스군에게 복수하게 되고 이 사실을 안 아킬레우스는 구류세스를 돌려 줄 것을 종용 한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오히려 아킬레우스에게 “아킬레우스 그대는 푸리세우스라는 아름다운 포로를 잘 간직 하게. 이 아가멤논이 그대의 왕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지. 그리고 구류세스를 그 늙은 신관에게 돌려보내 주리라”하고 외쳤다. 이렇게 되어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은 서로 반목하게 되고, 푸리세우스를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홀로 회색빛 바닷가에서 소리 높여 울었다. 이 모습을 본 해왕의 딸이자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이며 아킬레우스를 불사의 강에 넣어 손으로 붙잡은 부분인 발목을 제외한 온몸을 불사로 만들었던 해저의 신 테치스가 제우스에게 아들의 복수를 탄원 한다.다음날 파리스는 그리스의 장군들에게 용감한 대장과의 단기전으로 전쟁의 승부를 결정 짓자고 제의한다. 이에 먹이를 본 사자처럼 용맹하게 나타난 그리스의 무장은 스파르타의 용감한 왕 메넬라우스였다. 메넬라우스를 본 파리스는 겁을 먹고 그를 피하고자 하였으나 헥토르의 꾸중을 듣고 할 수없이 싸우게 된다. 두 사람은 싸움의 승자가 헬레네를 아내로 할 것과 진 사람은 승자에게 평화를 맹세할 것을 약속 한다. 그러나 결국 역부족으로 파리스가 위태롭게 되자 그의 수호신인 아프로티테가 그를 안아 성으로 데려가 버린다.그때 파리스의 동생이자 트로이 제일의 용사 헥토르는 싸움이 한 참 무르익은 전쟁터에서 잠시 성에 들어 왔다가 헬레네와 같이 편안히 의자에 앉은 채 환락에 취해 있는 파리스를 보고 분함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고는 다시 전쟁터에 나간다. 동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 파리스도 다시 출전하여 동생과 함께 용감히 싸우게 된다.두형제의 활약과 테치스의 애원을 들은 제우스신의 도움으로 그리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이에 정신을 차린 아가멤논이 주위의 권고로 아킬레우스에게 사죄의 사자를 보내나 아킬레우스는 거절한다.다음날 전날의 승리에 고취된 트로체를 인도해 줄 것을 애걸한다. 그의 모습에 감복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주고 12일간의 휴전을 허락한다. 한동안 소강상태가 계속 되다가 영웅중의 영웅인 아킬레우스도 푸리아모스의 왕녀를 사랑 하게 되고 양군은 강화 담판을 하게 되어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 성안으로 갔다가 파리스가 쏜 독화살을 맞아 죽고 만다. 그러나 파리스도 추방인인 문둥병자가 신수 풀이로 밤중에 쏜 독화살에 맞아 헬레네의 부드러운 팔에 안긴 채 죽게 된다.그러나 뛰어난 지모를 갖춘 오디세우스는 지혜와 계략을 써서 목마를 만들어 수십 명의 용사를 숨기고는 짐짓 돌아가는 척 한다. 트로이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목마에 숨어 있던 용사들이 트로이시 곳곳에 방화를 하고 이것을 신호로 그리스군은 열린 성문을 통해 물밀듯이 들어와 트로이 성을 함락 시킨다. 세 여신의 아름다움의 다툼으로부터 한 사람의 아름다운 여자 헬레네를 빼앗기 위해 막대한 국비를 허비하고 십만의 대군을 동원함으로써 일어난 이 지루한 십년간의 전쟁도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또한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레네는 죽지 않는다. 그의 남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는 다시 그녀를 데리고 자기의 왕국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죽음과 비탄을 가져오게 한 헬레네는 다시 왕비로 평화롭게 슬펐던 과거를 회상하며 다라를 다스리게 된다.전문가의 논평- 《일리아드》란 작품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보는 시각에 따라서 무훈 서사시일 수도 있고, 신화의 연장일 수도 있고, 요즘 식으로 하면 "환타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전쟁" 이야기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참혹하고 사실적인 전쟁 이야기"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신과 인간이 어우러져서 뒤죽박죽 돌아가는 전쟁 이야기가 뭐 얼마냐 사실적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일리아드》를 읽다 보면, 아킬레우스의 위풍당당함이나 헥토르의 자신만만함,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지혜와 아이아스의 힘과 아가멤논의 권위 같은 주인도 "청동기"를 들고 다니던 시절, 즉 청동기 시대의 원시인들이 벌이는 참혹한 전쟁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어떤 전쟁을 다룬 현대의 작품보다도 더 압도적이고 생생하고 참혹하고 감동적이다.전쟁은 참혹하다. 전쟁은 한 인간의 무력함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화약이 펑펑 터져나가면서 피와 살이 찢어지고, 칼과 창과 화살이 날면서 인간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광경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오금이 저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취미로라도 전쟁놀이를 하려는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군복이니 총기니, 다른 무엇들은 내게 있어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정말로 지금 당장 전쟁이 벌어지면 그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생자"일뿐, 결코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날아오는 총알이며 폭탄에 그냥 죽어가는, 인격을 박탈당한 시체가 될 뿐이다. 그러나 노신이 이른바 "나폴레옹이니, 알렉산더니 하는 살인마들을 '영웅'이고 '위인'이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한 개인의 야심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과연 역사에 어떤 공헌이나 인류에 어떤 기여를 했다는 것일까? 이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의 시대에서부터 진리였다. 전쟁을 통해 얻는 명예나 이익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없이 전쟁을 벌인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교훈은 못 배우는 셈이다. 물론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쟁은 이른바 "신들의 계략"에 의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뜻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그 신들이란 자신들의 여흥이나 자존심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 불화를 만들어 서로를 죽이도록 부추기는 한편, 정작 인간들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을 운운하며 냉담하기 그지없다. 결국 이 신들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섬뜩한 동반자인, 결코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으며, 비인격적이고 무관심한 존재인 "운명"의 의인화가 아닐까? 그렇게 보자면 《일리아드》에서 벌어지는 전쟁 자체도 어떤 그의 영혼이 탄식하며 하데스로 떠나"기 이전에, "연로하신 아버지와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일리아드》를 역사상 최초의 반전 문학으로 봐야 할까? 아니, 그렇게 보자면 너무 멀리 나가는 셈이 아닐까.문득 고전은 왜 고전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거기 나온 이야기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돈 키호테》나 《햄릿》을 읽으면 너무나도 대조적이고 극단적인 인물과 사건에 충격을 받게 되지만, 우리는 지금도 종종 주위 사람을 가리켜 "이 돈 키호테 같은 녀석"이니 "햄릿형 인간"이니 하고 언급하곤 한다. 즉 고전은 우리에게 어떤 "전형"을 보여준다. 《일리아드》와 마찬가지로 신들의 계교에 의한 도시국가와 연합국 사이의 대립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뜻과는 달리 먼 전쟁터로 끌려가 목숨을 잃은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그들의 가족이 흘리는 눈물과 슬픔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일리아드》에는 그런 사실적인 묘사 말고도 신들의 독특한 성격처럼 기발하고도 신비로운 상상력에서 비롯된 이야기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쉽게 "판타지"니 "환상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보다는 아무래도 인간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터의 긴박한 상황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고전을 해석하는 방법은 가지가지다. 모두 자기 주관과 편견과 생각에 사로잡혀 고전을 읽기 때문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지금 한창 관심을 갖고 있는 것과, 혹은 이런저런 편견에 따라서 고전에 대한 해석 역시 달라지게 마련이다. 내 경우에는 가급적 아무런 편견도 개입시키지 않고 읽자고 작정한 순간부터 《일리아드》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 즉 전쟁과 죽음에 관한 고찰에 그야말로 매료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전쟁에 관한 서사시"로 해석했다. 어쩌면 내가 요즘 전쟁에 대한 생각을 몇 번것이다.
헬레니즘 사상*스토아1. 창시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이다.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를 대표한다.초기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은 과거에 나타난 다른 학파들의 영향을 받았다. 단순하고 간결한 생활을 추구하였던 키니코스 학파, 이성의 위력과 변화의 영원함을 가르쳤던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 소크라테스 등이 그들이었다. 키티온의 제논은 이러한 초기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철학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스토아 철학의 원리를 세웠다.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채색주랑?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주랑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2. 대표 인물- 클레안테스 : 에서 우주의 질서와 이성 및 법칙을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칭송.- 크리시포스 : 클레안테스의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 논리학 분야에서 메가라 학파와 회의주의에 맞서 확실한 지식 개념을 방어했으며 연결사를 갖는 비분석적 명제를 연구하여 고대 논리학과 그 이후 논리학의 발전에 이바지함. 또한 그는 자연학에서 운명과 자유의지를 서로 배제하지 않는 개념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의 원리를 세움.- 파나이티오스 : 스토아 철학을 로마에 전함. 스토아 철학을 순전히 실천적인 면에서 파악. 스토아 학파의 자연법이론과 로마사람의 현실법을 결합시킴.- 포세이도니오스 : 도덕철학과 자연과학에 관심을 기울여 스토아 철학이 로마에서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데 이바지했으며 스토아 철학에 실용적인 경향을 띠게 함.- 세네카 : 윤리학에서는 종교적인 색체를 강하게 띄고 있음. 그는 육체와 지상의 비애에서의 해방을 바라며 죽음을 새로운 생활의 참된 시초라고 하며 죽음을 찬미.- 루푸스 : 세네카보다 더 순수 윤리학적 문제를 연구하였며,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철학을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①논리학논리학은 수사학과 변증론으로 양분되어 있다. 수사학에 있어서는 기호로서의 말과 기호로 표식된 사상을 존중하는 동시에 문법학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변증론은 철학적 중요성을 지닌다. 사람이 처음 날 때에는 정신이 백지와 같으므로 외물에 의한 인상에 따라 표상이 나타나며 이 표상의 기억이 결합되어 경험을 형성한다는 일종의 인식론(감각론적 인식론)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본질파악은 이성적인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②자연학자연학은 올바른 행동을 결정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스토아 학파는 전세계를 통일된 물체적인 실체로 보는 유물론적 자연론을 주장하였다. 사람은 우주의 일원으로서 정의(正義)라고 하는 물질이 그 체내에 내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스토아 철학은 물질 속에는 이성적인 힘이 있으며 그 힘의 근원은 신(神)이라고 하였다. 또 세계는 필연성에 의해 생성되며 그것은 사람에 있어서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을 동포라고 하며 세계시민을 주장하였으며 제논은 이상적인 세계국가까지 계획하기도 하였다.③윤리학윤리학은 스토아 사상에 있어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닌다. 사람의 목적, 즉 내적 만족과 행복은 그 자신과의 일치, 자연과의 일치, 자연에 맞추어 사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개인의 최고 목적은 보편적인 것에서 완전히 그 자신을 몰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에 합치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덕은 쾌락과는 다르고 덕만이 행복을 가져온다. 따라서 그 덕은 지덕(知德)이 아니고 행덕(行德)이었다. 여기서 스토아 학파에 있어서 유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이성과 우주의 통일원리인 로고스를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았다.스토이시즘은 이성을 극히 존중하였고, 이성에 쫓아서 생활할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이성을 지니고 있는 한 평등하고, 전 세계 인류는 형제이며 동포이자 같은 시민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의 자연은 욕심이 없고, 그 지배원리인 로고스의 분신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은 마땅히 욕구나 유혹에 동요되어서는 안 되며, 이성에서 비롯되는 양심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철저한 극기와 금욕 및 준엄한 도덕주의를 강조하였다. 스토이시즘은,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타당성을 갖는 자연 이법에 절대로 순응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근대 자연법 사상의 원천이 되었으며, 로마의 만민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또 외부의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통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초연한 무감동의 경지, 즉 이성적인 극기와 금욕에 의하여 감정과 욕구를 억누를 부동심의 상태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규정하여, 그것이 현자의 생활이상이요. 인간의 최고선이며 덕의 근본이라고 보았다.*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과 전체성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논리학?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에피쿠로스1. 창시스토아 학파와 동시대에 걸쳐 있으며, 또 동일한 문제를 대하면서도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선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이 학파의 개조는 에피쿠로스(Epikuros: 341~270 B.C.)로서, 그는 사모아섬에서 출생하여 후에 아테네에 와서 그곳에서 교수하였다. 그 인물이 온후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또 그의 철학은 실용을 위주로 하고, 교수방법이 학술적 수련이 없는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녀자들까지도 그 문하에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시민으로 규정하고, 윤리성을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의무의 총체로 본 것과는 달리, 에피쿠로스는 인간을 행복을 추구하는 한 개인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에피쿠로스에게 인간이란, 공동체 내에 속한 구성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3. 윤리학에피쿠로스는 철학을 개인의 쾌락, 즉 행복을 찾는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학문이건 도덕이건 모두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쾌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쾌락을 지상으로 삼는 그는 쾌락이란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적극적인 쾌락이 있기는 하지만, 쾌락이 생애의 지상과업이 될 때에는 다소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쾌락주의자는 무작정 모든 쾌락을 취하여 도리어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고통에 빠지지 않고 지각에 의해서 쾌락과 고통을 비교·선택하여, 영속적인 쾌락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쾌락은 일시적인 환락에 취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욕망을 끊음으로써 불만이 없는 생활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진정한 쾌락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은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적극적 쾌락을 취하는 것보다, 오히려 마음이 안정된 무욕의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마음의 이러한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ataraxia 平靜心)라고 불렀다.쾌락을 감각의 동적 쾌락과 고통의 부재인 정적 쾌락으로 구별했으며, 감각의 쾌락이 감각기관의 본성에 유익한 운동이기 때문에 좋다고 가르쳤다. 쾌락의 본질은 존재가 자신과 평형을 이루어 아무런 고통도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한 삶의 궁극목표라고 결론지었다.현자가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방식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욕구를 최소로 줄이고 인간들 사이의 경쟁과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은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이라는 사적 약속을 법으로 나타나는 공적 약속에 덧붙이는 것이다. 우공포와 번뇌를 없애주는 한에 있어서만 유용하다고 보았다.이러한 입장에서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물리설 즉 원자론이 그러한 목적에 적합한 것으로 보아 이를 채택하였다. 존재는 오직 허공(공간)과 그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뿐이고 만물은 예외 없이 원자가 뭉쳤다 흩어졌다 하는 데 따라서 생성·소멸되기 때문에 세계에는 불가사의한 요괴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원자론을 취함으로써 철저한 기계론을 주장한 점은 스토아 학파가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정신적 원리를 허용하여 목적론을 주장한 것과는 반대된다.인간의 영혼은 매끈매끈하고 작아서 움직이기 쉬운 불의 원자로 되어 있는 뜨거운 숨결(호흡)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이 원자가 흩어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가 죽은 뒤에도 영혼은 남아 내세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후에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죽음과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는 죽음과 부딪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은 없는 것이며, 또 죽음이 올 때에는 이미 우리는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신이 있기는 하나, 그 신은 ‘신주단지 뚜껑을 떼어서 멀리 골짜기 아래 내던지고, 그 술통 옆에 잔뜩 누워 있어, 인간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고, 광택 있는 세계에 둘러싸인 신의 황금의 궁전 위에는 잔 비늘구름이 떠 있다’고 했고, 또 신은 창조주가 아니고, 인간과 같은 자연의 소산으로서 지상의 행복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예배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했다.*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윤리학에 포함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주의는 에피쿠로스에 의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이론화한 삶의 태도로서 인간이 처신하는 중요한 행동형태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에피쿠로스주의는 심지어 은둔과 고독 속에서 조차 사람들과의 만남을 부정하지 않고, 이러한 만남에서 삶의 순수한 기쁨을 찾는 금욕주의의 한 유형을 성취했다고도 말할다.)
처음 이 책을 보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읽었던 친구에게 책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듣게 되었다. 그 친구가 말하길 이 책의 저자는 열린교육, 인성교육 등을 비판하고 주입식 교육을 찬양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나는 깜짝 놀랐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구시대적 발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아.. 책을 잘못 골랐구나’ 라는 후회마저 들었다. 나의 이런 생각 때문에 책을 읽기 전부터 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읽으면서도 이 저자의 생각에 대해서도 내 나름대로 반박하면서 읽게 되었다. 하지만 읽어가면서도 어느 정도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나는 저자의 생각에 대해 동의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조하고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반박을 하며 글을 써내려가기로 하겠다.저자는 미국의 교육은 부잣집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이 서로 차별된 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대부분의 부잣집 아이들은 사립학교를 다니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상으로 교육을 시켜주는 공립학교를 다닌다고 말한다. 게다가 본문 에선 ‘1998년 미국 대입수능시험에서 공립학교 아이들은 평균 1,011점을 얻은 반면 카톨릭계를 포함한 종교계 학교 학생들은 평균 1,042점을, 명문 사립학교의 학생들은 1,111점을 얻었다. 공립과 사립의 점수 차이는 100년을 두고 계속되고 있으며, 당연히 사립학교 출신의 부유층 아이들이 무더기로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교육대통령을 자임한 클린턴이 주위의 비난과 반대를 무릅쓰고 딸 첼시를 사립학교에 보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면서 이렇게 부자들이 더군다나 교육대통령이라고 자처한 클린턴까지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의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는 이유를 리틀턴의 컬럼바인 공립 고등학교와 샌티에이고 시에 위치한 샌타나 공립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격 난사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위험한교를 나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년 교육예산으로 3000억 달러 이상 쓰고 있는 미국의 공립학교들이 사립학교들과 이렇게나 차이가 날 줄을 몰랐다. 게다가 나도 사립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내가 다닌 사립학교와 다른 친구들이 다닌 공립학교와 별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미국의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차이점들을 더욱 느끼지 못한 것 같다.저자는 이렇게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공립학교가 무너지고 이렇게 황폐하게 되었는지를 말한다.먼저 저자는 적성교육의 문제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적성검사로 아동의 적성을 족집게처럼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적성검사의 결과는 항상 아동의 학습 성적에 큰 영향을 받으며, 아이의 학업 성적은 타고난 가정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받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 좋은 부잣집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게 되고 적성검사 결과도 공부를 더 하라는 식으로 나오게 된다. 그 반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부잣집 아이들에 비해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취업같이 생계를 이어나가라는 식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그러나 저자가 너무 적성교육에 대해서 비판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적성교육을 받고 자신만의 특기를 살려 그 길로 나가는 것은 나쁜 일만이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 때 방과 후 특기적성 활동을 통해서 플룻을 배운 친구가 지금도 작은 연주회에도 나가고 상도 타온다. 나는 그런 친구를 볼 때 부러운 마음도 들고 정말 자기의 적성에 맞는 것을 하면서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측면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너무 적성교육에만 의존하면 안 되지만 적절히 적성교육도 활용하면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적성교육 때문에 학과지식교육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저자의 우려에는 찬성한다. 적성교육도 중요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공부하면 되고 재미없는 기히 받았다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역사과목만 해도 그렇다.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선 논리성과 직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논리력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당연히 유리하다. 또한 역사철학을 공부할 때 영어 등의 외국어에 능통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학생들이 자기의 적성을 알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결국 그 학생은 물론 우리나라의 발전에도 이바지 할 것이다.다음으로 저자는 인성교육을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성교육에만 치중하여 학력경쟁과 학과지식교육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학우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협조하고 도와주며 살기,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기 등 온갖 인간적인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실시되었다. 그러나 인성교육의 결과는 참담하기만 하다. 아이들이 착해지고 순진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난폭해졌고 학과 공부만 더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학교 수업시간에 정작 중요한 공부는 안 가르치고 그저 착해지라면 손에 손을 잡고 놀게 했더니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학교의 수업일수, 수업시간을 줄여 학생들에게 범죄를 일으킬 시간을 준 것 역시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지식교육을 시키다 보면 학생들은 학과공부를 하는 동안 인내심등 인성을 키울 수 있고, 학교에 오랜 시간 있으면 밖에 나가 사고를 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더 많은 지식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 는 것이 저자의 논리이다.하지만 학생들이 난폭해지고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학교에서 지식교육을 하고 학생들을 더 오래 붙잡아 놓는다고 좋아질 수 있을까? 물론 몇몇 학생들은 그럴 것이다. 학과공부를 하는 동안 인내심등을 길러 인성교육역시 같이 이루어 질 수도 있고, 학교에 붙잡혀있느라 사회에 나가 사고를 일으키는 시간이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에서는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고 더 많은 가르침을 주기위해서 그랬지만 학생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통해 성적이 향상되고 기뻐했던 학생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일부분도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으로 취급되는 아이들만 해당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와서 자거나 출석만 부르고 도망가거나 놀러 나갔다 들어오는 행동을 한다. 오히려 교복을 입고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사고를 치는 일이 많아졌다.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학생들을 통재한다고 학생들의 일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인성교육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인성교육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많은 문제를 만들었고, 학생들의 일탈을 부추긴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인성교육이 학교에서보단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인성교육의 책임을 가정에만 두고 있는 것은 역시 잘못이다. 학교에서도 분명 일정부분의 인성교육을 실시해야한다. 물론 인성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업성취나 학과공부시간이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을 정서와 지식 그리고 육체가 조화를 이루는 전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인성교육만 강조하는 것이나 지식만 강조하는 것이나 모두 문제가 있다. 우리의 학교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면서도 인성이나 육체적인 성장도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그리고 저자는 실용주의 교육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실용주의 교육이 최고라며 학과 지식 위주의 교육을 팽개치고 학교를 재미있게 만든다며 학습량을 줄였다. 실생활과 연관된 생명력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학과 위주 교육을 고리타분한 구시대 학교에서나 하는 시간 낭비라고 치부하면서 학과 수업의 양과 질을 낮추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모든 교육과정에서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이 사라지고 모든 학과 과목에서 어휘 수가 줄어들었다.’ 라고 말한다.그래서 학과기초과목을 통해 간접적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 즉 논리력?사고력법일 뿐 그자체가 지식교육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서술 방식은 마치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 지식교육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서술을 하고 있다. 열린교육은 주입식, 암기식교육을 지양하고자 하는 것이지 지식교육을 지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창의력은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의력을 키우고자 한다면 지식교육은 필수인 것이다.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지식이 과연 진정한 지식인가에 대한 의문 또한 생긴다. 주입식, 암기식의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그야말로 죽은 지식일 뿐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외우고 머릿속에 집어넣어도 그런 지식들로는 논리력도, 사고력도, 그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 없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은 단어를 외우고 있다는 자기만족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식의 구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지식의 암기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요인일 뿐이다. 지식의 구조를 획득하기위해 기초지식의 암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의지, 즉 동기가 필요하다. 지식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동기를 자극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이라 생각한다. 열린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지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동기를 심어줄 필요가 있다.그 다음으로 저자는 수행평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수행평가는 학생들의 순위를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없고, 이는 동기의 부재를 가져온다. 또한 수행평가라는 처지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다 우수한 아이들을 죽이는 역차별 현상을 가져오고 즉 균등하자고 우수성을 잡는 모든 아동의 획일적인 하향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수행평가의 치명적인 결함은 신빙성과 정확도의 결여에 있다. 평가자의 주관적인 시각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수행평가로 학력을 측정하면 부정과 불신이 꼬리를 물고 급기야는 돌이키지 못할 사회 부조리를 초래할 수 있다. 모든 학습 성취의 결과를 인위적으로 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