薯童說話에 나타난 역사적 해석Ⅰ. 머리말II. 백제 무왕의 출생과 왕권 확립 과정III.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실재 가능성과 선화공주 설화(說話)의 의미Ⅳ. 맺음말I. 머리말백제 무왕(武王,? ~ 641)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선화공주(善花公主,? ~ ?)나 서동요(薯童謠) 등이 거론될 수 있다. 특히 서동설화(薯童說話)는 소설이나 방송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하여 대중에게 익숙한 설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서동설화와 관련지어 서동요인 경우도 국어 교과서에 주로 언급되는 고전작품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서동설화(薯童說話)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서동설화를 연구하는데 주요 지표가 되는 것은 단연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삼국유사』만큼 서동설화를 자세하게 언급한 사료(史料)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서동설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인물로는 백제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眞平王,? ~ 632)의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이다. 서동설화의 주 내용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과정이다. 여기서 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백제 무왕의 출생, 무왕의 아내인 선화공주의 내력과 두 인물의 혼인과정, 백제와 신라 두 왕실의 관계 등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설화 그대로 믿기에는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우선 백제 무왕이 서동(薯童)의 신분에서 왕이 되는 과정까지 단지 신라의 도움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무왕이 즉위했을 때에는 백제 성왕(聖王, ? ~ 554)이 패사(敗死)한 이후의 일로 백제와 신라 간의 국제관계는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점에서 볼 때 선화공주와의 혼인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백제 입장에서는 적국의 인물인데 혼인 자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수습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기록에서 볼 때 백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유력한 귀족출신으로 보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라 법왕의 서자(庶子)로 보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유독 무왕에 대해 단지 법왕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도 무왕 계통이 정실 계통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법왕의 아들’로 간략하게 표기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법왕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상대적으로 무왕의 어머니가 미천한 출신이거나 그 신분을 드러내기에 문제가 있었던 계층임을 추측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혹은 ‘법왕의 아들’은 단지 무왕의 즉위에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료 조작을 한 것이며 실제로는 몰락한 왕족의 후손으로 보는 설도 있다. 그 근거로 법왕의 통치 기간이 지극히 오래가지 못한 상황에서 법왕의 아들이 재빠르게 통치권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 쉽게 가능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성왕(聖王) 사후로 반(反) 신라적인 여론이 강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왕의 아들’이 적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신라 진평왕과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여기서 분명한 것은 무왕의 출신이 왕위계승권의 정통성에서 본다면 그리 높지 않았으며, 왕위계승과정 또한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왕을 지지하는 일련의 세력과 무왕이 결합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무왕이 왕위에 오를 시기에는 단지 마를 캐는 인물이 아니라 어느 정도 왕권 깊숙이 개입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점에서 볼 때, 무왕이 소외된 왕족의 후손이기 보다는 법왕의 서자(庶子)인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더욱이 만일 무왕이 소외된 왕족이라면 위덕왕(威德王)의 왕자인 아좌(阿佐)를 비롯한 위덕왕 계열이 더욱 정통성이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무왕(武王) 본기(本紀)에서 보면 무왕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한 김부식(金富軾, 1075 ~ 1151)의 서술이 반감을 가진 일련의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국가 통치자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세력권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왕인 경우는 법왕의 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도 정치적인 식견을 갖추었기 때문에 반대파에게 있어서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무왕이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은 아마 반대파 세력의 축출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귀족에게 있어서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왕이 집권하게 된다면 왕권을 견제하는데 제약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왕이 집권 과정에서 법왕의 통치체계를 계승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는지, 혹은 그 반대의 구호를 내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왕권을 확립하면서 새로운 지배체제를 형성할 가능성이 충분하다.)한편 서동설화(薯童說話)에서 보면 무왕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많은 양의 황금을 신라 진평왕에게 바쳤고 이를 계기로 진평왕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게 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설화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무왕의 집권 과정에서 친신라 세력이 존재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친신라 세력의 존재 가능성은 당시 국제 정세로 따졌을 때, 대규모의 세력이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후 무왕의 정책이 반신라 정책이었음을 볼 때, 친신라 세력이 무왕의 세력을 구성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주목할 핵심적인 구문은 신라에 많은 양의 황금을 바친 것과 무왕이 인심을 얻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설화의 내용을 어느 정도 사실로 입각해서 해석한다면, 무왕이 새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신라 또한 백제의 새로운 왕위 쟁탈전에 대해 주목했을 것이다.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신라 진평왕에 대해 저자세로 나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만약 저자세로 나갔다면 이 또한 치밀한 정치적인 계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대국인 신라에게 자신이 반 신라적인 인물이 아님을 내세워 왕위 쟁탈전에 있어서 신라의 개입을 방지통해 백제 왕후와 선화공주와 동일선상의 인물인지 추론해볼 수 있다. 「금제사리봉안기」에서는 백제 왕후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상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인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여기서 확인해볼 수 있는 내용은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에 봉안에 관련된 인물이 백제 왕후라는 것이다. 또한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위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하자면 무왕과 결혼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미륵사의 창건에 관여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분명 미륵사의 창건에 관여한 것은 백제 왕후가 맞지만 왕비의 출생은 신라 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가문이기 때문이다. 나경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서동설화는 위기를 맞았다고 하면서 선화공주의 존재가 실재한 인물이 아님을 주장했다.이에 대해 홍윤식은 사리의 봉안과 관련된 인물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존재 또한 인정하고 있다. 홍윤식의 견해에 따르면 미륵사의 창건 발원자는 선화공주이며,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나온 백제 왕후는 서탑 사리봉안의 발원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서 보았을 때, 백제 무왕의 왕후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두 명으로 신라 출신 선화공주와 백제 사택 가문의 딸인 사택왕후로 칭할 수 있는 인물이다. 조경철의 논문)에서도 미륵사의 창건 중심인물에 대한 여러 가설로 선화공주와 사택 가문 출신의 백제 왕후를 동일선상에 놓는 가설을 유력한 가설 중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특히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에는 선화공주는 물론 미륵신앙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는 것에 주목하여, 639년 창건된 서원과 629 ~ 639년에 세워진 동원은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목탑화신(化身)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 꿈에 한 중이 태천(態川, 지금의 공주) 수원사(水源寺)의 미륵선화(彌勒仙花)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진자가 찾고자 하는 미륵의 화신은 수원사의 미륵선화인데 미륵선화의 ‘仙花’와 선화공주의 ‘善花’는 한자가 다르지만, 둘 다 미륵과 관련되어 나오므로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선화공주라는 존재는 불교적 관념이 투영된 인물이며, 불법을 전하는 상징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불법을 전하는 것의 실현으로서 선화공주는 미륵사를 창건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선화공주(善花公主)의 이름 외에도 서동설화(薯童說話) 자체가 불교적이라는 점에서도 볼 때 서동설화의 내용이 결국 불교의 영험 강조하는 이념적 역할을 전하고 있음을 뜻한다. 서동설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하나로 지명법사(知命法師)로 무왕(武王)과 선화공주가 처한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존재로 나온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서동설화에서 지명법사가 한 행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 (지명)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師子寺) 앞에 가져다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날라다 주었다.)2)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하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1)의 상황은 무왕(武王)이 마를 캐던 곳에 쌓여 있는 금을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부탁해 신라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며, 2)의 상황은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자사(師子寺)를 가던 도중 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연못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자 선화공주가 큰 가람을 세우겠다고 왕에게 허락을 맡는다. 그 뒤 선화공주가 지명법사에게 부탁해 못을 메울 일을 논의하는 내용이다. 서동설화(薯童說話)의 내용의 결말은 선화공주의 부탁으로 큰 가람(미륵사, 彌勒寺)이 세워진 것으로 끝난다. 결국 미륵사가 세우게 된 과정을 말하기 위해)
융 ? 건릉(隆健陵)1. 개관능(陵)은 중국의 한(漢) 때부터 중국 황제의 무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즉 능이라는 말은 무덤의 형식이나 규모가 커다란 언덕처럼 만들어졌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반면 조선의 왕릉은 중국 왕조에 있던 황제의 능과 비교한다면, 우리의 전형적인 봉분(封墳) 형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면서도 조선시대의 능의 명칭이 정해져 있는 양상을 살펴보면, 하나의 구릉 즉 언덕으로 간주되는 전반적인 형태의 무덤양식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 왕실 구성원의 분묘는 능 외에도 원(園) ? 묘(墓)가 있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국왕의 사친(私親)이나 추존된 국왕의 사친으로서 선왕의 후궁들의 무덤이고 묘는 여러 왕자나 공주, 옹주, 일반 후궁들의 무덤이다. 즉, 조선시대의 능의 정의는 국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이다.조선사회에서는 유교의 여러 윤리 규범에서 효(孝)가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기 때문에 상례와 장례가 중요시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특히 왕실과 왕실 구성원들은 사회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최고의 권위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모든 신료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으며, 이에 따라 상례와 장례의 거행에 큰 공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왕조사회에서 국왕의 정상적인 즉위는 선왕(先王)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왕으로서의 자질 중 상당 부분이 선왕에 대한 상례와 장례를 얼마나 잘 치렀는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하였다.융 ? 건륭은 사도세자(장조, 莊祖, 1735 ~ 1762)와 그의 아들 정조(正祖, 1776 ~ 1800)가 잠들고 있는 곳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1735 ~ 1815)가 묻힌 합장릉이다. 한편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1753 ~ 1821)가 묻힌 합장릉으로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사도세자가 안장된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했다.현륭원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추숭하고자 한 노 정도로 울음을 삼키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대신들은 천봉을 반대하지 못했다. 이에 정조는 대신들에게 능이나 원으로 쓰기 위해 둔 곳 중에서 수원읍을 최종 낙찰지로 선정하였는데,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오직 수원읍내에 봉표해 둔 세 곳 중에서 관가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고, 옥룡자가 이른바 반룡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年運) ? 산운(山運) ? 본인의 명운(命運)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이다.『정조실록』 정조 13년(1789) 7월 11일)그런데, 반룡농주(盤龍弄珠)형은 한가로운 차림새(盤)의 용(龍)이 앞에 놓여있는 여의주(珠)를 희롱(弄)하는 모양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융릉 앞에는 여의주를 상징하는 봉우리의 위치는 없었기 때문에 반룡농주형이 아니었다. 반룡농주형이라고 한 것은 정조의 고집에 가까운 입장으로 아에 그렇게 선포해버리자 대신들은 이를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영의정 김익은 앞산에서 여의주 봉우리를 보았다며 정조를 기쁘게 했다. 대신들은 용의 구슬의 형체와 조경문제를 의논하였고, 정조는 능의 좌향을 여의주 봉우리에 맞추어 잡으라는 말을 하였다. 선친의 묘를 천장한 이후 반룡농주의 지기를 더욱 보완하고자 현륭원 주위 다섯 군데에 여의주에 해당하는 인위적인 소봉을 만들었다. 용이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정조가 용에 대한 고집을 보였던 것도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서 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용에 대한 고집은 융릉의 원찰인 갈양사를 용주사로 개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이렇게 여론을 조성하게 된 정조는 자신의 의도대로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이름을 고친 뒤에 화산(花山)으로 이장시켰다. 또한 해마다 1월이나 2월에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하였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현륭원 참배를 13회 실시하였다. 정조의 현륭원 참배는 짧게는 2박 3일에서 길게는 4박 5일이 걸렸다.그런데 특이한 점은 정조의 화성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고치고 능을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이듬해인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리고, 능 이름을 융릉이라 했으며, 12월 19일에는 묘호를 장종에서 장조로 바꾸고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했다. 묘의 위치는 본래는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으나, 아버지의 존호를 올리게 되면서 1789년 현재의 위치로 묘를 옮긴 것이다. 정조가 아버지에 대해 애도하고자 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사도세자의 존호를 추후하여 올려 ‘장헌’이라 하고, 수은묘의 봉호를 ‘영우원’이라 하고, 사당을 ‘경모궁’이라 하였다. 이어서 존봉하는 의절을 송나라 복왕의 고사에 따라 마련하고, 봉원도감을 추숭도감에 합쳐 설치하도록 명하였다.시호를 의논한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에서 시호를 ‘사도’라고 하신 것은 성스러운 뜻이 있으신 것인데, 지금 내가 오직 종천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이다. 옛적부터 제왕들이 시법을 간여하려 하였음을 내가 일찍이 그르게 여겨 왔다. 만일 혹시라도 지나치게 아름다움이 넘치도록 한다면 어찌 나의 본뜻이겠느냐? 여러 신하들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1776) 3월 20일)사도세자는 영조가 아들 장헌세자를 땅에 묻고 나서 후회하며 붙여준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데 일조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으로는 노론에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1762년(영조 38) 임오화변 때에 세자가 죽었기 때문에 왕비 책봉을 받지 못하였다. 또한 혜경궁 홍씨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 당시 영조의 첫 아들이었으나 10살 때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실에서의 공식적인 지위도 대왕대비, 왕대비, 중전 다음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생모이자, 순조의 조모가 되기 때문에 이후 왕들에게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된다. 혜경궁이라는 궁호도 정조가 즉위하며 받은 궁호이며, 1815년(순조 15) 12월 15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었던 사도세자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자서전적 소설로 쓴 『한중록(閑中錄)』을 남겼다.2) 능의 구조와 구조물정조는 현륭원을 조영할 때 조선시대의 어느 원보다 후하고 창의적인 조영이 되도록 명하였다. 영릉(寧陵))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조영할 때 폐지하기로 한 호석(護石))을 만들게 하면서 모란과 연화문을 조각하였다. 장명등(長明燈)은 조선 초기 8각형 형태의 양식과 숙종 ? 영조 대의 4각형 양식을 합하여 운족(雲足))형태로 새겨진 새로운 형태의 양식을 만들었는데 이는 정조의 건릉, 철종(哲宗)의 예릉(睿陵)의 장명등에서도 쓰이게 된다. 또한 문인석은 금관(金冠)을 쓰고 있으며 추존왕릉으로는 특이하게 무인석도 배열하였다. 배치는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순으로 배치하였다.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정자각(丁字閣)은 격식에 맞도록 조성되었으나 월대(月臺))는 크게 하여 전체 규모를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직선으로 축을 맞추었으나 뒤의 능과는 맞추지 않았다.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이 홍살문에 가깝고 참도(參道)) 길이가 짧아지는데 이는 후기 왕릉 배치의 특색 중 하나이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융릉의 비각에 있는 비문에는 ‘대한 장조의황제융릉 헌경의황후부좌(大韓 莊祖懿皇帝隆陵 獻敬懿皇后?左)’라고 적혀있다.(2) 건릉사적 제206호1) 역사(歷史)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 되던 때에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821년(순조 21)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이에 따라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건릉의 위치를 현 위치인 서쪽 언덕으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함께 장사토록 하였다. 이는 훗날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김조순의 딸로 이미 이때부터 김조순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순조가 즉위할 당시 묘호를 정종(正宗)으로 했다가, 1899년(광무 3) 12월 19일 정조(正祖)로,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나서는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이다. 이름은 산(?), 호는 홍재(弘齋)이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종묘사직을 이을 기대주로 촉망받아 나이 7살이 되었을 때 세손에 책봉된다. 그러나 불과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였고 이는 어린 정조에게 큰 상처와 한이 되었다. 정치적인 위기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왕이 오르게 된 정조는 등극 뒤 첫 사업으로 규장각을 설치한 뒤 『속오례의(續五禮儀)』,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등 많은 저작들이 규장각을 통해 새로 편찬 ? 발간되었다. 또한 인재 등용 시 고루 인재를 등용토록 하였으며, 수원성 축조를 시작으로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일환으로 묘지를 이장하는 등 일련의 개혁과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효의왕후는 좌참판에서 영의정으로 승직된 김시묵의 딸로 영조 38년에 세손빈으로 책봉된다.
수원화성(水源華城)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사적 제3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 개관수원 화성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위치하고 있는 석축 평산성으로 평지성과 산성을 복합적으로 이용한 성곽이다. 조선 정조때 기존의 수원성을 새로 축조하여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이 성설(城說))을 설계 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 구조물이다.지형적으로 서쪽으로 팔달산(八達山)이 높이 솟아 진산이 되고 그 앞으로 안산(案山)이 있으며 그 사이로 하천이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동쪽을 향하여 앞이 훤하게 트여 멀리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 동서 구릉사이로 수원 시가지가 전개되고 있다.성곽의 전체 둘레는 5.74km이며,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성벽의 높이는 4~6m이다. 평지의 경우 기반을 돌과 모래로 다진 후 배흘림을 준 규형(圭形))의 성벽을 축조하였고, 산지의 경우에는 경사면을 절개한 후 기단을 놓고 석축하는 내탁식으로 축조하였다.주요시설로는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등 4대문을 비롯하여 치성, 옹성, 장대지, 포루, 적대, 각루, 노대, 공심돈 등 48개소의 시설물이 성내에 있다.축조에 있어 돌과 벽돌을 혼용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이전시기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들로 조선시대 성곽 기술의 정점이자 문예부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2. 축조배경1776년 22번째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열 살 나던 해 아버지가 당쟁과 세도정치에 휘말려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하게 죽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특권 양반세력은 왕권을 무시하고 나라의 기강마저 흔들면서 자신의 권력과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들의 방해를 받아가면서 아슬아슬한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정조의 뇌리에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형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축조된 읍성에서 그 예를 흔히 볼 수가 있다. 화성의 축성시기에 읍기(邑基))가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 사면에서 적을 맞는 형세이므로 지형적으로 축성이 불가하다는 논의도 있었는데 우하영(禹夏永))은 예부터 중국의 성지는 평야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는 점을 들어 축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조선 초기 이전의 전통에 바탕을 둔 유성룡(柳成龍))의 산성론(山城論))과는 다르며, 유형원(柳馨遠)의 평지읍성론(平地邑城論))과 같은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산성위주의 방어책을 강구하였고, 읍성의 군서 방어적 효용성이 낮게 인식되면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읍성 경영이 대부분 부실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에는 산성이나 읍성을 막론하고 형편이 지킬 만 한 곳은 성곽을 수선토록 하였었다. 영조 10년에 전주부성을 수축한 조현명(趙顯命))은 산성은 요충지를 공제하고 울타리가 되지 못하므로 왕실을 보호하지는 못한다고 하여, 유형원의 평지읍성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화성이 위치한 팔달산 주변은 평지가 대부분으로 논과 밭 같은 생산시설의 조성이 유리한 지형적 이점이 있으나, 토양이 척박하고 용수의 공급이 수원천 주변으로 한정되어, 관개시설의 확보와 개간의 필요성이 높았다. 초기에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교통과 운송의 이점을 살린 상업적인 도시 부흥 방안을 수립하였다면, 성곽도시 조성 시기에는 자급자족 도시로서, 식량을 확보하고 상업의 활성화와 부의 축적을 위해 양잠사업을 시도하고자 이를 위한 식목사업을 진행하였다.이로 인해 팔달산 주변에는 소나무, 유실수, 화목류를 심었고 수원천 주변과 행궁 남측 개천 주변에는 다수의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동장대와 북문 주변과 읍치 중간 중간에는 유실수를 심었다. 대체로 산과 인접한 지역에는 소나무와 다수의 화목류가 심어졌고, 수변시설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생산시설 주변에는 화목류와 유실수가 심어졌다.)(2) 건축적 특징1) 기본구조화성이 갖는 도시적 성격의 구조는 북문과 남문인 팔달문을 연결하는 남북의 주축의지한 시설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치성을 많이 돌출시켰는데 치성의 위치와 지세와의 관계 역시 적합하며, 치성의 활용에 있어서도 치성으로 그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치성 위에 망루를 세운 포루, 그리고 치성 아래 부분에 대포를 장치하고 위에는 망루겸 포루를 세운 포루가 있어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3) 시설 및 구조물)1) 팔달문(八達門)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4대문 중 남문으로 보물 제 402호이다. 성문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지붕은 우진각) 형식을 취해 웅장하고 중후한 멋을 내고 있다. 이 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위에 문루를 세웠으며 주위 4면에는 담장을 둘러쌓고 전면에는 반월형으로 옹성을 축조하였는데, 우리나라 성문 건축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을 모두 갖추었다.2) 장안문(長安門]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으로 1974년(정조 18) 건축되었다. 팔달문과 함께 화성의 가장 대표적 건조물로 서울서 내려오는 수원시의 관문이 되었다. 문의 구조는 높이 3.8m, 넓이 3.6m, 두께 7.9m에 달하는 홍예문 위에 2층으로 누각이 설치된 전형적인 성문 구조로서 문루 높이는 상하를 합하여 13.5m이고, 좌우 넓이 18m에 옆넓이가 9m이며 외성으로 북옹성이 붙어있다.3) 화서문(華西門)화서문은 팔작지붕의 아담한 모양으로 보물 403호이다. 화성의 서문으로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무지개문 위에 단층으로 문루를 세웠으며, 전면에는 반월형의 석축으로 두른 옹성이 있다. 문루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바닥에는 중앙 칸에만 마루를 깔았으나 이것은 아래서 보면 석축 무지개문의 천장구실을 한다.4) 창룡문(蒼龍門]창룡문은 화성의 동문으로 1794년(정조 18)에 건립되었다. 이 문의 규모 및 구조는 화서문과 거의 같다. 구조는 홍예가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내외 이중 홍예문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 특색인데 내홍예는 높이 4.8m, 넓이 4.2m이고, 외홍예는 높이 4.5m, 넓이 3.6m이며 내외 홍예의 두께는 시설물로서는 가장 중무장한 요새이다.11) 노대(弩臺)노대란 누각 없이 전돌을 쌓아 네모꼴의 대를 만든 시설물로 모서리를 깎아서 모를 없앤 높은 대이다. 적의 내습을 항상 감시해서 대와 성 전채에 오방색으로 신호하며, 적이 접근했을시 쇠뇌를 쏠 수 있게 만든 곳으로 서장대의 서북측에 동향으로 자리잡은 서노대와 창룡문과 동북 공심돈의 중간에 동북향으로 자리잡은 동북노대가 있다.12) 공심돈(空心墩)공심돈은 전시에 사용되는 장거리 관측소로써 위아래에 구멍을 많이 뚫어 바깥 동정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총포를 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성벽상부에 3층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몸을 가리게 되어 있다. 동북 공심돈과 서북 공심돈 두 곳이 있는데 구조와 기능이 비슷하여 모두 백자총과 불랑기 등을 발사할 수 있도록 충포구멍을 내었고, 외부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상층과 중층 사이에는 사다리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들었고 내면에는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동북공심돈은 특징적으로 타원형으로 축조되어 달팽이 모양의 내부구조를 갖고 있다.13) 봉돈(烽墩)봉돈은 파수를 설치하여 정찰과 정보전달의 임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육지로는 용인의 석성산 육봉과 연락하고 바다로는 흥천대의 해봉과 연락하였다. 화성의 봉돈은 그 규모와 외관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축조되었으며 5개의 화두가 있다.4. 화성행궁(華城行宮)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로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다.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4) 봉수당(奉壽堂)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5) 미로한정(未老閑亭)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 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停)'이라고도 한다.이곳에서는 수원 추팔경의 하나인 한정품국(閒亭品菊 : 국화꽃 벌여놓고 황상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하였다.6) 남군영(南軍營)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하였다.
용주사(龍珠寺)1. 개관용주사는 본래 이름이 갈양사(葛陽寺)로 854년(문성왕 16)에 창건되었다. 970년(고려 광종 21)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는 등 이름 높은 도량에 속했으니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후 폐사된 체 방치되었다. 그러다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지금의 융릉에 옮기면서 다시 일으켜 세운 사찰이다. 비명에 숨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능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불교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시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용주사라는 이름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다.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었으며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전국 5규정소(糾正所)) 중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했다. 또한 이 절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고 이 절의 재건의 총 책임자였던 보경당(寶鏡堂)이라는 승려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 되기까지는 보경당의 노력이 컸다. 보경당은 융릉의 이장할 장소를 찾아다니는 정조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대황리에 머물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을 설했다. 본래 불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정조였으나 이 경을 듣고는 크게 감화하게 되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과 가까운 곳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위와 관련된 사료는 다음과 같다.세상에 전하기를, 정조대왕은 초기에는 불교를 쓸어버리려 하였는데, 장흥 보림사의 스님 보경이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진헌하자 그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보경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용주사를 창건하도록 하고, 팔로도승통과 용주사도총섭을 겸하게 하고, 또한 은중경 판본을 새겨서 이 절에 두게 하였다.『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용주사조(龍珠삼문과 천보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5층 석탑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400cm로,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 · 복발 · 양화 · 보주를 모두 갖추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다.용주사의 천보루는 누각의 이름만 보더라도 왕궁에서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그 이유는 이 누각의 이름이 천보루 말고도 홍제루(弘濟樓)라고도 되어 있다. 홍제루라는 현판은 누각의 안쪽에 있으며, 후대에 별호로 추가된 것이다. 결국 위 두 이름을 종합하여 그 뜻을 풀이해보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弘濟)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면서 용주사에 자주 행차하였는데, 천보루는 이러한 때를 대비해 행궁(行宮) 규모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적인 사찰 건축물에 쓰이는 목조기둥이 아닌 석조 기둥을 쓰는 궁궐건축 양식을 빌렸음을 알 수 있는 건축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전면에는 1칸 정도 돌출시키고 나머지 2칸을 만수리실과 나유타료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또한 대웅보전 쪽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는 단층건물처럼 보이도록 구성하였다.천보루를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는 건물인 나유타료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진 객실인 만수리실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만수리실은 선당(禪堂))이라 하여 선방으로 사용되었으며 나유타로는 창건 당시에는 승당이라고 불렸다. 위 두 건물은 천보전을 중심으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위 두 건물은 전체적으로 ‘口’자형의 건축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서로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는 궁궐건축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각각 39칸으로 되어있으며,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바깥뜰에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바깥뜰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설법하는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특히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구제와 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불은 염불만으로도 서방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하여 크게 신앙대상이 되었다.② 후불탱화(後佛幀畵)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로,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이다. 이 불화는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화면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한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頭光) · 신광(身光))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두광과 신광을 주형(舟形)으로 처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그렸다.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서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자리 잡고 있다.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좌우에는 화불(化佛)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상이 위치하여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이 불화의 전체적인 특징으로는 먼저 색조에 있어서 일반적인 불화의 주조색인 적색 · 녹색 위주에서 벗어나 옅은 청색과 갈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과장 없는 인체비례와 사실적인 얼굴표현, 설채법(設彩法)), 음영법을 쓴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음영법은 일반적인 불화에서는 쓰이지 않는 기법이다.제작자에 대해 미술사가 최완수(崔完秀)를 비롯하여 초기에는 김홍도 제작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음영법과 같은 서양식 기법 때문에 민관(旻寬) · 상겸(尙謙) · 성윤(性允) 등 25인 제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사료 면에서도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실제 제작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즉, 이 명문은 범종이 만들어진 이후 후대에 추각(追刻)되었다고 본다.6)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七星) ? 산신(山神) ? 독성(獨聖)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세 신앙은 한국적 불교신앙에만 가지는 독특한 특징으로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과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음을 의미한다.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이 없어도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시방(十方)이란 동 · 서 · 남 · 북, 동북 · 동남 · 서남 · 서북, 그리고 상 · 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칠성을 의미하는데, 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으로 절의 창건 당시에는 칠성각이라 불리었다.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면적 18평의 아담한 규모이며 문은 띠살문이다. 건물외부 측면에는 산신과 독성을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내부에는 정면에 칠성탱화, 그 왼쪽에 산신탱화, 오른쪽에 독성탱화)가 있고 소규모의 석조 석가상이 안치되어 있다.7) 천불전(千佛殿)천불전은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한 곳으로, 본래 천불에는 과거천불 · 현재천불 · 미래천불이 있다. 이를 각각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이라 하며 천불전에는 이 중 대개 현겁(賢劫))천불을 모신다.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인데, 이 자리에 93년 3월에 새로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이라 하였다.건물은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 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다.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다. ) 효성전(孝誠殿)효성전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건립한 건축물이다. 효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시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이후 효성전에는 정조,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를 차례로 모시게 된다. 이 호성전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부모은중경탑은 효성전 외부에 있는 탑으로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의 옥개석은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적은 비석으로 하였으며 1981년에 세웠다. 한편 본래 정조가 출간한 불설부모은중경 판본은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보관 · 전시되고 있다.(2)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1) 어제 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호어제 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는 1796년 5월 정조가 용주사 부처님을 받들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직접 쓴 게송이다. 총 두 권으로 가로 4.5㎝, 세로 68㎝로 재질은 닥종이로 되어 있다. 글씨는 해서이고 가장자리를 청동으로 제본하고 5개의 연꽃무늬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책은 전체 4부분으로, 첫머리에 정조의 서문이 실려 있고, 초서 · 정종 · 결게 세부분에 불교 가사가 서술되어 있다. 각 조는 오언사구(五言四句)의 각 구절에 작은 글씨로 해석한 글이 붙어 있다.내부는 붉은 선으로 경계선을 그리고 그 안에도 붉은 색의 가는 선으로 칸을 나눠 글을 썼다. 글은 일종의 불교식 가사체로 먼저 절의 내력을 간략히 언급하고 초서분(初序分), 정종분(正宗分), 결게분(結偈分))으로 나누었다.2) 화산용주사상량문(花山龍珠寺上樑文)용주사의 창건 무렵인 1790년에 채제공이 쓴 절의 상량문으로, 중국의 소주(蘇州)에서 직조한 주황색의 비단이 주 재질이다. 가로 약 15㎝, 세로 94㎝의 크기로 되어 있으며 용주사 창건의 내용과 국왕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한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조선후기에
세계사 본시 학습 지도안지도교사부 장교 감일 시2010년 5월 일 화요일지도교사장 소2학년 반 교실차 시본시학습주제크리스트교의 성장과정이 중세 서유럽문화에 미친 영향을 파악한다.학습 모형강의식학습 자료교재학습목표? 중세 크리스트교의 성장과정을 파악하고 전개과정을 말할 수 있다.? 중세 서유럽문화의 특징을 크리스트교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지도단계지도내용교수-학습 활동시간 (분)자료/지도상 유의점교 사학 생도입인사 및 교재 확인° 학생들과 인사° 출결상태 점검, 수업준비 확인° 인사° 책을 편다5- 기자재 확인전시학습 확인° 전시학습 실시, 학습여부 확인° 교사의 질문에 적절한 답문 제시- 구두 설명학습목표소개° 학습목표 소개° 학습목표 낭독- 학습목표판 서전개중세 크리스트교의 성장° 로마 교회의 성립- 교황의 성립, 크리스트 교구의 축소, 교황과 베드로°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20- 판서- PPT 2° 동, 서 교회의 분열- 원인, 결과(가톨릭, 그리스 정교로 분화)°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 판서- PPT 3° 수도원 운동- 배경, 전개, 발전°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 판서° 교황권과 왕권의 대립- 교황권과 왕권의 관계, 서임권 투쟁 과정°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 판서중세 서유럽의 문화° 중세 유럽 문화의 발전- 시기별 변천, 특징°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20- 판서° 학문의 발달- 배경, 철학의 발달 과정, 스콜라철학의 전개°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 판서- PPT 4° 중세의 대학- 성립, 특징°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 판서° 건축의 발달- 바실리카, 로마네스크, 고딕양식의 변화 과정°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교재에 필기- PPT 5정리학습내용정리° 중세 크리스트교의 성장, 중세 서유럽 문화 발전 과정 정리° 학습목표를 고려하여 설명 경청하기5- 기존 판서를 사용차시 예고 및 인사° 차시 예고° 차후 과제 제시° 인사° 차시에 대한 숙지° 차후 과제 숙지° 인사☞ 판서계획☞ 크리스트교의 성장(1) 로마 교회의 성립① 교황 : 5C경, 로마 주교, 교구의 대표② 크리스트 교구의 축소☞ 5대 교구 → 2대 교구(로마, 콘스탄티노플)++++ PPT 2 : ‘베드로’ 사진과 ‘성 베드로 성당’ 사진++++ [설명 : 교황과 베드로 -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이자 후계자로 인식됨, 베드로가 순교한 곳이 로마이고 로마는 성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2) 동, 서 교회의 분열① 원인 : 동, 서로마 분열, 성상 숭배 금지령, 정치적 대립☞ 동로마 - 그리스적, 서로마 - 라틴적++++ [PPT 3 : 동, 서로마의 분열과 교회의 분열 - 반달족, 롬바르드족 등 여러 이민족의 침략에 동로마의 소극적 대응 → 교황은 프랑크족과 연계, 동로마의 지속적인 개입에 대한 불만, 시칠리아에 있는 노르만족을 처리하기 위해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3세와 교황이 손을 잡다가 실패하자 동로마 황제가 반발하면서 1054년 분열]② 결과 : 카톨릭(프랑크 왕국 - 서부 유럽), 그리스정교(비잔틴 제국 - 동부 유럽)(3) 수도원 운동① 배경 : 교회권의 강화(정신적 지배자로서 권위), 교회의 세속화++++ [설명 : PPT, 수도원 운동 크리스트교의 종교적 확립과 교회의 세속화 - 이민족의 침탈의 심화로 종족 전쟁 활발 → 프랑크왕국처럼 기독교를 믿는 종족 증가(전쟁 수호신 개념), 교회도 이민족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세속 영주의 봉신이 되는 경우 증가, 세속 영주는 교회에 영토를 기증]② 전개 : 몬테카시노 수도원, 클뤼니 수도원 - 노동, 기도, 필사③ 발전 : 서임권 투쟁으로 확대(그레고리 7세)++++ [설명 : 수도원 운동 - 수도원은 원래 동방교회의 산물이나 6C 베네틱트가 최초로 서방에 수도원 문화 도입, 그러나 이민족의 활성화로 경건한 수도원 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0C 클뤼니 수도원으로 다시 확립, 세속 재산 거부와 성직 매매, 결혼 금지 주창 → 레오 9세는 교황의 추기경 임명 확립, 그레고리 7세는 주교의 임명권까지 주장](4) 교황권과 아비뇽 유수 이후는 교황 약세]서임권 투쟁☞ 교황 그레고리 7세 vs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 카노사의 굴욕☞ 서임권 타협 : 보름스 협약(1122)++++ [설명 : PPT, 교황권의 전성 - 우르반 2세,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재 p. 95쪽을 읽어보도록 할 것. 교사의 보충설명으로 교재내용 보완2. 중세 서유럽의 문화(1) 중세 유럽 문화의 발전① 시기별 변천☞ 이민족 침탈 시기 -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일시적 회복☞ 11C 대외 팽창 시기 - 생산력 ↑, 재정복(ex 십자군 전쟁)☞ 12~13C - 동, 서 교통로 ↑ → 상공업 발달 → 도시 발달② 특징 : 크리스트교 보편 문화(신 중심)[강조할 것!, 대학에서 라틴어로 가르치는 이유도 이러한 특징 때문임을 밝힐 것], 자연과학 ↓(2) 학문의 발달① 배경 : 로마 문화의 유산 + 수도원의 문화 보호 노력 + 11C 이후 경제력 회복, 비잔틴 문화 ? 이슬람 문화 유입② 철학의 발달 과정☞ 교부철학 :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스콜라철학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에서 역수입 /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 시도++++ [설명 : 스콜라철학의 전개 - p.96쪽을 읽게 한 뒤 교사의 보충 설명/ 안셀무스의 설명에서 교회대신 신앙으로 고치는 것이 더 적절하다. /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 어떻게 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중세 성직자들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지. 그래서 철학적 방법, 즉 이성을 이용했지. 그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이야. 신의 존재를 적절한 논리적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했는데 사상적 흐름을 선생님이 이제부터 짚고 넘어갈 것이야. 자 다음 PPT를 볼까? [PPT 4](3) 중세의 대학① 성립 : 스콜라, 수도원의 고전 연구 → 이슬람 과학과 그리스 철학 전래, 도시 발달 → 자치권(특허장)을 보장② 특징 : 7자유과 ? 4개의 전문 학부, 조합(길드) 형식의 대학고등학교 2학년 ( )반 번호( ) 이름( )▶ 니벨룽겐의 노래 줄거리부르군트족의 왕 군터의 누이동했을 때 보물을 얻었는데, 그 때 당시 보물을 지키던 용을 물리치고 그 과정에서 용의 피를 뒤집어써 불사의 몸이 된다. 하지만 피와 접촉하지 않은 등의 한쪽 어깨부분은 유일한 그의 약점이 된다.지크프리트는 그 곳에 머물다가 약 1년 뒤에 겨우 크림힐트를 만날 수 있게 된다. 한편 보름의 성주인 군터는 아이슬란드 여왕인 브룬힐트에게 구혼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무예로써 겨루어 자기를 이기는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하겠다고 했다. 싸움에 자신이 없던 군터는 지크프리트에게 자신의 누이 동생인 크림힐트와 결혼하는 것을 대가로 도움을 청하게 된다. 지크프리트는 니벨룽의 보물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군터를 도와 브룬힐트를 이기게 함으로써 군터의 청혼은 성공하게 되었으며 지크프리트도 목적을 달성한다.그러나 10년 뒤 이 두 부부가 만났을 때 크림힐트와 브룬힐트는 제각기 자기 남편을 자랑하다가 말다툼을 하게 된다. 이 결과로 결혼과정의 비밀이 폭로되고, 지크프리트는 브룬힐트의 원한을 사게 된다. 브룬힐트는 복수를 하기 위해 지크프리트를 시기한 부르군트 왕국의 장군 하겐을 시켜 사냥터에서 창으로 그의 어깨를 찔러 죽인다.남편을 잃은 크림힐트는 복수를 맹세하여 막강한 권력을 가진 훈족의 왕 에체르와 결혼하여 그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에체르와 크림힐트는 오빠인 군터와 그의 아내 브룬힐트 등을 초청한 뒤 모두 살해한다. 그러나 크림힐트도 부르군트의 신하들에게 배신자로 죽임을 당한다. 그렇게 잔치장은 불타오르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채 왕국은 멸망한다.▶ 롤랑의 노래 줄거리카롤루스와 그의 군대는 에스파냐에서 사라센(이슬람)군과 싸우고 있었는데 패색이 짙어진 사라센 왕 마르실이 카롤루스와의 교섭을 위해 사절을 파견합니다. 한편 마르실의 항복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카롤루스 군대 내부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카롤루스의 조카 롤랑은 과거의 경험(이전에 프랑크 왕국이 보낸 두 명의 사자가 살해당한 일)에 따라 적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고 평소에도 롤랑을 미워했던 가넬롱은 좋은 조건이므로 이를 받아들이자고 가넬롱은 죽을지도 모르는 사자로 자신을 추천한 것에 화가 났고, 롤랑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합니다.가넬롱은 사라센의 장수 블랑캉드렝과 함께 마르실 왕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도중에 그와 의기투합하여 롤랑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윽고 마르실 왕으로부터 많은 공물과 인질을 받은 가넬롱이 다시 돌아오자 카롤루스는 후군의 지휘를 누구에게 맡길지 물었습니다. 가넬롱은 롤랑을 추천했고 롤랑은 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카롤루스의 병력은 철수하고 카롤루스의 12기사와 롤랑 등 2만명의 후군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사라센의 대군이 공격해오고, 롤랑과 12기사는 용감히 맞섰으나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롤랑이 뿔나팔을 불자 카롤루스는 그 소리를 듣고 이들을 돕기 위해 향했지만 이미 롤랑은 전사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성 가브리엘에 의해 천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단테의 [신곡] 줄거리신곡에서 표현한 지옥35세가 되던 해 단테는 어두운 숲 속을 헤매다가 짐승들에게 앞을 가로막혀 절망에 빠져 있던 중,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로부터 지옥, 연옥, 천국을 보여주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아홉 개의 권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옥(地獄)'에서 그들은 신앙을 갖지 못한 자, 애욕에 사로잡힌 자, 욕심쟁이, 구두쇠와 낭비벽의 죄인, 분노죄를 범한 죄인, 이단자들, 자살자, 사기범, 반역자들이 고초를 받는 참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일곱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는 '연옥(煉獄)'에서는 거만한 자들, 질투죄를 범한 자들, 분노죄를 범한 자들, 태만한 자들, 탐욕죄를 범한 자들, 음식과 육욕을 탐욕한 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연옥을 통과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헤어져 '천국(天國)'으로 향한다.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초원에는 꽃이 만발하고 레테의 강이 흐른다. 황금의 촛대를 선두로 신비로운 행렬이 다가오는데, 천사가 꽃을 뿌리는 꽃구름 속에 베아트리체가 나타난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10개의 하늘을 차례차례 둘러 본다. 베아트리체는 이제 자기 자리로 가고, 성 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