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 답사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0.09.23
- 최종 저작일
-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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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융건릉에 대한 연혁 및 관련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였습니다.
관련 사료와 사진 또한 다양하게 첨부되어 있습니다.
해당 교수님께 몇번 검토를 받았던 자료이기 때문에
사료 면이나 사진 구성 등에서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레포트 쓰실 때 많이 이용하세요~
목차
1. 개관
2. 현륭원(顯隆園) 조성과 행차
3. 문화재
참고자료
본문내용
1. 개관
능(陵)은 중국의 한(漢) 때부터 중국 황제의 무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즉 능이라는 말은 무덤의 형식이나 규모가 커다란 언덕처럼 만들어졌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반면 조선의 왕릉은 중국 왕조에 있던 황제의 능과 비교한다면, 우리의 전형적인 봉분(封墳) 형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면서도 조선시대의 능의 명칭이 정해져 있는 양상을 살펴보면, 하나의 구릉 즉 언덕으로 간주되는 전반적인 형태의 무덤양식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 왕실 구성원의 분묘는 능 외에도 원(園) ․ 묘(墓)가 있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국왕의 사친(私親)이나 추존된 국왕의 사친으로서 선왕의 후궁들의 무덤이고 묘는 여러 왕자나 공주, 옹주, 일반 후궁들의 무덤이다. 즉, 조선시대의 능의 정의는 국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조선사회에서는 유교의 여러 윤리 규범에서 효(孝)가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기 때문에 상례와 장례가 중요시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특히 왕실과 왕실 구성원들은 사회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최고의 권위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모든 신료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으며, 이에 따라 상례와 장례의 거행에 큰 공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왕조사회에서 국왕의 정상적인 즉위는 선왕(先王)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왕으로서의 자질 중 상당 부분이 선왕에 대한 상례와 장례를 얼마나 잘 치렀는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하였다.
융 ․ 건륭은 사도세자(장조, 莊祖, 1735 ~ 1762)와 그의 아들 정조(正祖, 1776 ~ 1800)가 잠들고 있는 곳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1735 ~ 1815)가 묻힌 합장릉이다. 한편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1753 ~ 1821)가 묻힌 합장릉으로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사도세자가 안장된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했다.
현륭원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추숭하고자 한 노력의 상징이었다. 길지로 주목받아 온 수원읍성 터에 새로운 묘역을 조성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현륭원이었다.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사도세자에 대한 대우는 거의 국왕의 위상에 해당하는 위격을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자리를 사도세자의 묘혈 왼쪽에 마련해놓았다.
참고 자료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