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왕건의 훈요십조》Ⅰ. 훈요 8조Ⅱ. 훈요 8조의 논란1) 『차현이남 공주강외』 에 대한 풍수지리적 관점에서의 해석2) 실제로 태조는 이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하였는가?3) 『차현이남 공주강외』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가?Ⅲ. 결론Ⅰ. 훈요 8조8.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Ⅱ. 훈요 8조의 논란1) 『차현이남 공주강외』에 대한 풍수지리적 관점에서의 해석‘차현이남 공주강외’라는 말은 이곳이 과연 배역처인가, 혹은 공주강이 배류수 또는 반궁수에 해당 되는가, 만약 배류수라면 그것이 어느 곳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공주강 이외 또 다른 배류수는 없는가, 공주강 외에도 용진강, 섬진강, 낙동강을 3대 배류수로 꼽고 있다는 등의 논란을 낳았다.지금까지의 연구는 ‘차현이남 공주강외’ 라는 지역이 배역처인가 아닌가 하는 풍수지리적인 해석에만 많이 치중하고 있다. 이런 점은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중환의 『택리지』등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였고, 이병도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해석이 이루어 졌고 최근에도 해석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해석자체가 최근 들어 줄어들고 있고, 풍수론 자체의 시비를 논하는 것은 ‘훈요 8조’의 내용을 해석하는데 있어 더 이상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러한 논리를 내세우게 된 정치적인 의도를 헤아려 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훈요 8조를 통하여 강조하였던 태조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2) 실제로 태조는 이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하였는가?이것은 훈요 8조에 대한 실행여부와 관련된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통일 후 차령이남 공주강 밖 사람들의 등용제한이 실제 실행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금서룡(今西龍) 이후 최근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연구자들이 당시 호남 출신들이 많이 등용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미루어 보았을 때 실제로 그 지역 사람들이 별다른 차별 없이 등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금서룡은 차현이남 인들 중 태조 대에 활약한 인물들이 많다는 점을 들어 8조의 내용 자체가 당시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하여 훈요십조가 후대의 위작이었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 후의 많은 학자들 또한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이를 토대로 본다면 태조가 경계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출신지역을 말한 것이 아니라 후백제 유민들 중 고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는 특정지역 인물들의 활동이 많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나주나 서·남해 일대는 후삼국 정립기부터 대부분 후백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었다. 오히려 일찍부터 궁예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고려 초 태조에게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연고가 있던 지역이었다. 왕건이 여러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나주로 피신하곤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보아 앞서 언급한 해석들은 훈요 8조가 현재의 호남인에 대한 차별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3) 『차현이남 공주강외』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가?지금까지 ‘차현이남 공주강외’라는 곳은 차령산맥과 금강이남 지역, 즉 지금의 충남일대와 전라남?북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이점에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여져왔다. 그러나 최근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차현을 차령산맥이 아닌 차현고개로 해석하여 차현고개 남쪽 공주강 위쪽으로 해석하거나 인접지역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인데, 이 해석들은 모두 지역갈등 또는 특정지역 차별론을 극복하려고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차령 이남에서 금강 사이의 특정 지역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고려 건국 직후 청주?공주?홍성 일대 주민들의 반란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해석 외에도 최근에 많은 해석이 나오고 있으므로 앞으로 두고 봐야할 문제로 볼 수 있다.Ⅲ. 결론훈요8조가 이렇게 많은 논란과 해석이 나오게 된 이유는 지역차별의 역사적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차현이남 공주강외’라는 구절이 그렇다. 충청남도 일부와 호남전체라고 보는 것이 그 동안의 일반적인 학설인데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를 훈요십조가 조작되었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
목차1. 머리말2. 신돈의 개혁정치1) 신돈의 등용2) 전민변정도감의 설치3) 그 외 개혁정치3. 신돈 개혁정치의 한계점1)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 변화2) 신돈 개혁정치의 한계.4. 맺음말1. 머리말신돈의 출생에 관하여는 고려사열전에 『신돈은 영산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 여종이다. 신돈은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 이름은 편조요, 자는 요공이다. 신돈은 그 어미가 천하여 승려들 사이에서도 무리에 끼지 못하고 늘 산방에 거처하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이로보아 신돈의 출생이 천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민출신의 승려가 고려정치의 전반에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원에 대항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를 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돈은 삼중대광영도첨의라는 벼슬을 받고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 당시 권문세족이 득세하던 사회 분위기로 보아 신돈이 펼친 개혁정치와 그 효과는 주목할만 한 것은 틀림없다.고려사 열전에서는 신돈에 대해 부정적 서술이 주를 이룬다. 긍정적 서술로는 전민변정도감의 설치가 유일하며, 한 때 성인이라 칭송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정적 서술로써는 간음을 일삼는 요승으로 보고 있다. 전민변정도감의 설치 또한 완전히 긍정적 서술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서술은 고려사 열전 전반에 걸쳐 엿보인다. 따라서 고려사 열전에서의 신돈에 대한 평가와, 고려사 열전을 통하여 고려 후기 신돈이 펼친 정치개혁과 정치개혁의 한계점을 살펴보고자 한다.2. 신돈의 개혁정치1)신돈의 등용신돈이 집권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돈의 출생은 천민이라 할 수 있다. 신돈이 어떤 경위를 통하여 왕실과 접촉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358년 전에는 노국공주가 죽기 전인데다 집권층의 경계로 정치에 나서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신돈의 등용배경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공민왕이 어느 날 누가 칼로 자기를 찌르는 것을 어떤 승려가 곁에 있다가 구원해 주어 화를 면한 꿈을 꾸었다. 이튿날 태후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리고 왕을 뵈웠는데, 그 모습이 꿈에 본 승려와 흡사했다. 왕은 매우 이상히 여겨 함께 이야기해 본즉 대단히 총명하고 지혜로웠다.』이 글로 보아 신돈의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돈의 등용을 고려사 열전에서는 과거제도나 정치적 입지를 대변할 과정 없이 왕의 꿈과 연결시켜 설명함으로써 신돈이 지닌 정치적 기반의 한계를 보여준다.그렇다면 정치적 지지기반이 뚜렷하지 않은 신돈이 등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공민왕 14년(1365) 신돈에게 정권을 위임한 이유에 대해 공민왕은 세신대족과 초야의 신진 유학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으므로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려고 생각하였다고 말하였다. 공민왕은 14년 동안 반원정책을 피고 내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안팎으로 거센 반발을 받았다. 한 때 정치적 안정을 누리기도 했으나 노국공주가 죽고나자 정치적 공황상태에서 신승처럼 보이는 신돈의 등장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요컨대 신돈의 집권은 기존 정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2) 전민변정도감의 설치고려사 열전에서 신돈의 전민변정도감 설치배경을 살펴보면,『신돈은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각처에 유고문을 붙여 이르기를 근래에 기강이 문란해서 탐오가 떳떳한 관습이 되어 …중략… 전민은 거의 다 부유하고 세력있는 집들이 강탈 점령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신돈의 개혁정치의 목적은 토지 및 노비문제의 부정을 시정하는데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은 신돈의 집권 명분이 되었다는 것이다.신돈의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는 공민왕 15년 5월로 본격적인 개혁조치는 늦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개혁의 목표는 전제개혁이 아닌 토지와 노비 획득을 둘러싼 불법행위의 방지와 소유권 분쟁을 법적으로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었다.고려사 열전을 살펴보면 신돈은 하루건너 도감으로 갔으며 이인임, 이춘부를 위시한 사람들이 호소를 받고 판결을 내렸다고 나타나있다. 정치의 실권자들이 판결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 정책의지를 확인 할 수 있으며 공민왕 집권초기와 달리 매우 강력하고 실질적으로 실시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신돈의 개혁은 그 단호성은 매우 유효했으며 그로 인해 성인이 나왔다고 칭송받을 정도로 민심을 얻었다. 이러한 그의 단호한 정치개혁은 당대 권문세족 집권가들의 이익과는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으므로 신돈이 감수한 정치적 위험성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신돈의 개혁은 고려 말 숱한 개혁정치 중 그 효과를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3) 그 외 신돈의 개혁정치고려사 열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신돈의 그 밖의 개혁정치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신돈은 성균관의 중수와 과거제도의 개혁을 펼쳤다. 이는 임박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공민왕 16년 무너진 성균관이 중수되고 사서재와 오경재로 분리하여 1백명의 학생을 두게 하였다. 또한 수검통고법에 의해 과거제도를 엄격히 관리하였으며 원의 과거제도를 모방하여 향시·회시·전시의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고 사장대신 경의를 시험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말 새로운 정치운동인 성리학이 관학의 위치를 인정받았다. 신돈이 불교 승려로써 성리학의 진흥에 힘썼을까? 이는 기존 세력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신진세력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승려이지만 어린 시절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중들 틈에 끼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내며 기득권 세력과 결합한 불교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 밖에도 내재추의 신설과 순자격제를 들 수 있다. 내재추는 선발된 일부 재신과 추밀이 궁중에서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한 변칙적인 제도였는데,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의 확대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만회할 수 있는 기구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순자격제는 품계 및 연한과 경력에 따라 관직을 승진시키는 인사 법규였다. 홍건적의 침입과 흥왕사의 난 이후 무장세력들이 군공으로 급속히 성장하게 됨에 따라 관료체계 상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정상적인 국왕 중심의 권력질서 확립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순자격제는 개인의 능력차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근무 일수를 진급 기준으로 삼는 군공 중심의 평가를 지양하면서 무장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3. 신돈 개혁정치의 한계점1)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 변화공민왕을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하던 신돈에게 1369(공민왕18)경부터 전개된 국내외 정세의 변화는 그를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사업의 강행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궁핍과 기근의 발생으로 일반민의 곤궁을 초래하였다.고려사 열전에서는 『신돈은 자기가 5도 사심관이 되고 싶어서 삼사를 시켜 그 관제의 회복을 주청케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의 선친 충숙왕이 심한 한재를 당했을 때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고한 다음 각도 도 사심관을 혁파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한다. 내가 어찌 선왕의 뜻을 망각하겠는가!”라고 하고 그 상소문을 불에 태웠다.』고 서술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확립시키려고 시도했던 일로 보인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권력이 한곳에 몰려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 당시 신돈의 권력은 중국에서 ‘임시 왕’이라 불릴 정도였으며 각 도의 사심관이 되려는 신돈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었다. 신돈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여러 대신들의 상소문에 나타나있듯 군신질서의 훼손을 염려했을 수도 있다. 부원세력뿐만 아니라 자기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그 권세가 너무 강해지면 제거해 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이때부터 신돈과 왕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2) 신돈 개혁정치의 한계신돈의 개혁정치는 고려 안에서의 마지막 개혁 시도이자, 공민왕대의 마지막 개혁이었다는 에 그 시대에 극복할 수 없었던 정치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신돈의 초창기 개혁정치의 시작은 대대적인 인원의 숙청이었다. 당시 공민왕은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는 사람을 등용하고 싶어 했으며 이는 신돈의 등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신돈은 초창기 최영을 비롯해 이인복·이구수 등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제거하면서 세력을 쌓았다. 정치적 기반이 강력하지 않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겠지만, 정치적인 경험이 풍부한 인재들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균형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신돈의 정치적 한계점을 보여준다. 또한 성균관 중수와 과거제도 개혁 등 성리학을 중요시하였다고 나타나 있지만 성리학을 일으키며 세력을 키운 신진세력들을 제대로 융합하지 못하였다. 역설적이게도 대표적 개혁집단인 유학자들을 정치적 적으로 간주하였고 그 결과 신돈의 개혁세력은 정치에 부적당한 인물들이었다. 그는 당대 정치적 명망을 인정받고 있던 인물들로부터 어떠한 지지도 얻지 못하였다. 이로보아 신돈의 권력과 지위는 왕권의 의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을 뿐 그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적 제약과 불확실한 수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불교계에도 지지 기반을 가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화사상의 대외 인식과 그 대응개화파의 분화와 변법개화파의 갑신정변동도서기론은 도와 기를 분리하여 활용할 수 있다는 전제에 서 있다. 동도서기파는 위정척사파와 마찬가지로 본(本)인 도가 말(末)인 기에 대하여 근본적 규정력을 가진다는 관념을 고수하였으며, 동도가 서도보다 우월하여 서양문명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위정척사파보다는 덜 경직적이지만 화이관에 입각하여 서양종교를 사악한 것으로 보았다. 도의 근본성과 화이관을 고수하는 한, 서기의 폭넓은 수용은 곤란하였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과학기술의 수용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제도의 도입에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기를 받아들이더라도 그들의 기술과 장기를 배워 그들을 제압하여 동도를 수호하려는 에 나타난 발상과 상통하였다. 위정척사파는 도와 기가 조금도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아 서기가 들어오면 동도를 망친다고 인식하였다.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는 데 그친다면, 동도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삼강오륜의 윤리가 근대 기술의 효율적 활용을 저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추후의 문제이다. 그런데 제도(법)까지 서기에 포함하여 도입하고자 하면, 동양윤리와 충돌할 소지가 큰 것이다. 그리하여 도기론적 구도에 연연하지 않고 정치제도를 포함한 포괄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이들을 급진개화파, 변볍개화파 또는 문명개화파라 부른다. 변법개화 사상은 동도를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유교의 도(윤리도덕)의 근본적 규정성을 의식하지 않은 점에서 동도서기론과 달랐다. 예컨대 유교윤리를 고수한 유길준에게서 오륜인 행실의 개화는 다양한 개화의 한 측면에 불과하고 동도서기론에서처럼 근본적인 의의를 가진 것도 아닌 점에서, 개화에서 유교윤리는 제한되고 일면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위상이 하락하였다. 그래서 변법개화파는 동도서기파와 달리 동도의 수호와 보존을 중심적 과제로 삼지도 않았고 동도로 서양을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도서기파보다 더욱 실용적이고 개년과 1882년의 사이였다. 이중 급진적 인사들이 일본 근대화의 모델을 채택할 수 있게 된 것은 대외 정보가 점차 축적되어 마침내 일정 수준에 도달한 후였겠는데, 1881년 조사시찰단의 견문이 변볍개화파의 출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이 시기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근대화정책은 국왕과 민씨 일파등 근왕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의 기본 목표는 부강한 군주제 국가로서의 발전이었다. 동도서기론자는 동도의 수호 자체를 지상과제로 삼았다면, 고종과 근왕세력에게는 군주권의 유지·강화가 더욱 근원적인 목표였다. 고종과 근왕세력은 군주권에 저촉되지 않는 한, 실용적인 자세로 이념적 동도서기론자보다 적극적으로 근대문명을 수용하려고 했다. 고종과 근왕세력의 한계는 무엇일가.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잠식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 철저한 제도 개혁에는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변법개화사상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이들은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근대문명의 도입 필요성을 인식하였으나, 군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에 보수적이어서 수구파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변법개화파와 근왕세력의 정책 노선의 차이는 갑신정변으로 귀결되었다. 그 정강을 통해 갑신개화파의 구상을 그전 정책과 대비하여 고찰해본다. 갑신개화파는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첫째 정강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를 모델로 채택한 방침과 표리관계에 있다. 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위한 관제개혁을 추구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으나, 정치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에 반해 갑신개화파는 당시 명치정부의 ‘유사전제’와 같은 그들이 주도하는 핵심 권력체를 만들어 정사를 의논하고 나아가 점진적으로 입헌군주제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문벌이 아닌 재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고 관리의 부정을 근절하자는, 관료제의 정비를 위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갑신정변에서 가장 주목되는 경제 정강은 지조법의 개정과 재정기관의 일원화라는, 근대화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급한 재정개고, 서양과 일본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일본의 침략을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비판하게 되었다. 동도서기론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근대화 사상으로서 진보적 의의를 가졌으나, 갑오개혁 이후 그것을 상실하였고 대한제국기에는 중도적 내지 보수적 입장이 되었다.대한제국의 수립은 임오군변 이후 청의 간섭과 갑오개혁기 일본의 간섭에 따른 자주권의 침해로부터 얻은 교훈, 그리고 일본·러시아·영국 등 열강의 세력균형을 배경으로 하여 자주독립의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동기에 입각하였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의 정신 아래 구제도를 기본으로 삼아 가능한 한 모두 복귀하고 이용후생에 관련되는 외국의 것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갑신정변 전에 이미 정부는 산업기술의 도입뿐만 아니라 제도 개혁도 상당한 정도로 추진하였는데, 대한제국기에는 군주제라는 정체에 저촉되지 않는 근대화정책은 폭넓게 수용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황권의 강화와 황실재정의 확대를 추구하고, 이것을 토대로 이전보다 강력한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갑신정변 전후에 변법개화파는 시장을 발전시킴으로써 산업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반면, 동도서기파는 시장의 제도적 기반 조성에 소플하면서도 공업의 육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갑오개혁기와 광무개혁기에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갑오개혁에서 영업자유주의정책은 적극 추진된 반면, 공업육성책은 소흘하게 다루어졌다.대한제국의 산업육성책이 이전보다는 진전하였지만, 한층 격화되는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부터 실효성 있게 산업을 보호, 육성할 수 있는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구본신참의 이념 아래 황권 주도의 개혁은 근대적 정치세력과 관료조직의 성장을 제약하였다. 제도적 변혁을 수반하지 않는 부국강병책은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독립협회는 제도개혁을 우선적으로 요구한 반면 국권주의적 의식이 약하였던 점에서 갑오개화파에 맥락이 닿으며, 대한제국은 제도개혁에 소흘하면서 국내산업의 보호와 부국강병책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동도서기파와 상통한다. 요컨대 서양의 근대문명을 포이다.사상의 철학적 토대19세기에 들어와 성리학 체계로는 서양 근대문명의 강화된 충격에 대응하기 힘들어졌다. 서양문명의 도입을 정당화할 필요성은 도기론을 요청하였다. 도기론은 동아시아의 정신문명과 구미의 물질문명, 또는 유학이라는 구학과 서양의 신학을 절충하는 데에 적합한 사유구조였다. 도는 윤리를 기는 기술과 제도를 의미하므로 이기론보다 구체적인 사유였다. 동도서기론은 유교 윤리의 수호를 지상과제로 삼았지만, 성리철학을 전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서기의 도입 범위가 제도 영역으로 폭넓게 확대되고 윤리도덕인 도의 영역이 축소되면, 도기론적인 인식구도가 불필요해졌으며, 이러한 단계에서 변법개화파가 성립하였다. 이들은 유교를 긍정하더라도 유교 윤리도덕의 근본적 규정성을 의식하지 않은 점에서 동도서기론과 달랐다.개화사상이 심화, 보급되는 가운데 척사사상은 여전히 이기론의 토대 위에서 화이관을 도출하여 근대문명을 제한하거나 부정하는 논리로 삼고, 군주의 내면적인 자세에서 대응의 근본 방도를 찾았다. 그런점에서 성리철학과 그 의리 명분론이 여전히 척사사상의 토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 반면 동도서기론에서 동도란 성리철학과 무관한 선진시대부터의 유교윤리였다. 나아가 변법개화파는 유교근본주의로부터 벗어났다.근대문명에 대한 인식과 그 대응경제적 근대의 중심적 내용은 시장경제와 공업화인데, 그 구성요소로서 사유재산권, 영업 자유와 경쟁원리, 기계화를 포함한 기술 발전, 공장제와 회사제도 등을 들 수 있다. 경제적 근대에 대해 동도서기파와 변법개화파의 견해차가 크지는 않았지만, 양자간에는 인식의 깊이나 우선 순위의 설정에서 차이가 있었다. (동도서기파-시장의 제도적 기반조성에 소흘, 산업육성책 추진. 조선인의 경제활동을 보호하려는 의식은 변법개화파보다 강함 /변법개화파- 시장을 발전시킴으로써 산업의 발전 도모)개화기 근대화정책을 제약한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체제의 개혁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개항전에 ‘민유방본’의 전통적 이념이 강조되었고 민국 이념도 표방되었다. 이러한 전통 인식구도가 불필요해졌으며, 이러한 단계에서 변법개화파가 성립하였다. 개화사상이 심화, 보급되는 가운데 척사사상은 여전히 성리철학과 그 의리명분을 토대로 삼았다.대체로 보아 변법개화파는 영업의 자유, 경쟁의 촉진, 재산권의 보장 등을 통해 시장을 발전시킴으로써 제조업 등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음에 반해, 동도서기파는 시장의 제도적 기반 조성에 소흘하고 영업자유원칙에 손상을 가하기도 하면서도 산업육성책을 추진하였다. 변법개화파는 경쟁을 촉진하는 영업과 무역의 자유를 선호한 반면, 동도서기파는 조선인의 경제활동을 보호하려는 의식이 강하였다.척사파는 문명과 야만을 준별하는 화이관에 입각하여 인륜을 갖춘 문명사회간의 의리에 입각한 평화로운 관계를 지향하였다.(다른 국가와의 교류 거부-경제적 이익 집착하는 것은 유교적 교화 받지 못한 것, 화이관적 시각) 동도서기파는 중화문명이 우월하다는 화이관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탈피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서양을 예를 가지는 실체로 인식하여 서양과의 경제적 교류에 정당성을 부여한 점에서 척사파와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변법개화파는 만국공법질서를 긍정하고 화이관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조공체제를 거부하고 임오군변 이후 중국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저해하는 주요한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만국공법질서를 이용하거나 그에 입각한 중립화정책으로 자주독립을 누리고자 하였다. 1880년경 이후 제국주의적 팽창이 본격화되고 그 물결이 동아시아에도 곧 밀어닥침에 따라, 근대적 변혁을 자극하는 면이 강하던 대외 관계가 그것에 질곡으로 점차 전환하였다. (1902년 경제적 제국주의 개념 정립-약육강식의 현실 인식) 근대세계에서 개화사상에 입각한 인식과 대응 외에 조선의 미래를 위한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런데 개화세력이 약하고 근대화정책이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척사세력의 강한 반발과 동학농민전쟁을 허용하였고, 개화세력은 그것을 수습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여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다.개항전 조선사회는 서양 근대문명을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8
제1절 내셔널리즘의 의미내셔널리즘(Nationalism)민족의 통일과 독립, 발전을 최고의 이념적 가치로 여기고 중요시하는 주의민족주의, 국민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 등의 여러 가지 의미 지님1789년 이후 민족주의는 보다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특성을 띄며,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전체 국민(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옮겨짐 ☞ 반봉건적, 반신분제적 내셔널리즘은 프랑스혁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남일반적 내셔널리즘위에 부가하여 피지배 민족이나, 소수 민족, 후진국 사이에 발생한 내셔널리즘을 의미예) 빈 체제에 저항하고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해방 <중 략>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창건(1867)1859년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패배로오스트리아의 국력 약화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제국 창설 협정에 동의(헝가리의 마자르족에게 자치 허용)☞ 동일한 국왕(프란츠 요제프1세), 국기, 동일한 육군,해군 보유 의회, 수도, 국내 업무 별개로 운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자들은 민족주의 사상의 확산을 묵인하지 않았음. 헝가리인 ☞ ‘마자르화’ 강요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테니아 인) 비마자르인에게 마자르 언어 사용을 강요하고 소수에게만 투표권과 관직을 허용<중 략>8) 발칸과 아프리카에서의 터키의 실지회복 정책9) 미국의 극동(중국) 재분할 정책과 일본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북진 정책10) 삼국동맹과 삼국협상 사이의 양극화 대결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삼국협상에 가담한 국가들이 승리, 미국 지위 강화삼국동맹에 가담한 국가 패배(터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이탈리아 변절 민족자결주의가 평화조약의 가장 중요한 토대 됨새로운 국가들의 탄생 내재된 민족의식은 독립으로 부활되거나 동일한 민족의식을 지닌국가끼리의 재통합 가져옴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oution)목차머리말청교도 혁명의 원인(배경)사회경제적 원인정치종교적 원인청교도 혁명의 전개과정왕당파와 의회파의 내전찰스1세의 처형올리버 크롬웰크롬웰에 대한 평가청교도 혁명의 의의맺음말Ⅰ 머리말청교도 혁명은 1640∼1660년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최초의 시민혁명이다. 17세기 중엽의 청교도혁명은 넓게는 왕권적 전제정치에서 입헌적 의회정치로의 변혁을 보여준 서양시민혁명의 선봉일 뿐 아니라, 좁게는 영국사회의 근대적 기초를 이룩해 준 획기적 사건이었다. 청교도혁명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비로소 서양문명의 선구자적 기선을 잡게 되었는데 그것은 영국이 청교도혁명을 통하여 왕실과 의회, 교회와 정치, 귀족과 중산계층, 구교와 신교, 도시와 지방 등의 과도기적 문제들을 일찍이 여과시킬 수 있었으며, 다시 왕정복고를 거쳐 두 번째로 등장한 명예혁명에 의해 근대적 영국사회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크나 큰 투쟁에서 스튜어트왕조의 전제왕권을 무너뜨리고 종교적 자유를 몰고 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영구의 청교도들(the 청교도s)이었다.청교도란 16~17세기 영국 및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칼뱅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일컫는 말이다. 또 다른 말로는 '퓨리턴'이라고도 한다. ‘청교도’라는 말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 소의 예복논쟁을 일으킨 청교도운동(the 청교도s movement)에서 유래한 명칭이었으며, 그 명칭이 실제로 사용된 것은 16세기 말엽이었다. 청교도의 대부분은 메리여왕의 종교적 박해로 대륙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여왕의 죽음(1558)을 계기로 귀국한 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 국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로마가톨릭적인 제도 ·의식의 일체를 배척하며, 칼뱅주의에 투철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엄격한 도덕과 일요일의 신성화를 엄수하고 향락의 제한을 주창하였으며,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에 비국교도로서 심한 박해를 받시행했으며(선박세는 특히 물의를 일으켰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시도함으로써 의회와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Ⅲ 청교도 혁명의 전개 과정1) 왕당파와 의회의 내전1637년 대주교 로드가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회를 강요하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파들은 완강히 거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반란군은 1639년 영국 북부로 침입하였다. 찰스 1세는 런던 상인들로부터 반란 진압과 전쟁준비에 필요한 재정 충당을 위해 11년만인 1640년 4월에 의회(단기의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의회는 국왕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책 시정을 요구했으므로 국왕은 3주 만에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궁지에 몰린 찰스 1세는 11월에 다시 의회(장기의회: long parliament, 1640-1653)를 소집하였다. 그런데 의회의 다수가 청교도였기 때문에 오히려 왕의 측근을 탄핵, 투옥하고 절대주의 권력 기관을 폐지하도록 왕에게 요구하면서, 1641년에 '대간주서(The Grand Remonstrances)'를 채택했다. 소집된 장기의회는 오히려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는 대규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선박세 등 부당한 과세가 폐지되고 폭정과 탄압을 행하던 왕실 특별 법정인 「성실청」이 폐지되었으며 국왕의 소집없이 매년 개회할 수 있는 「3년 회기법」이 통과되었다. 이 기간에 스트래퍼드의 수탈에 반대하여 시작된 봉기로, 의회는 그 동안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어 1641년 스트래퍼드 백작을 처형하고 로드 대주교를 추방시켰다(로드는 1645년 처형되었다). 또한 국민군 지휘권이 문제가 되어 1642년 8월에 의회가 왕당파에 대항한 8년간의 내란이 발생했다.자세히 살펴보면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반란은 국왕과 의회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의회는 군대의 지휘권을 국왕에게 맡기기를 거부하고 의회가 지휘권을 장악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한편 1641년 11월에 의회의 요구사항을 담은 「대간주」를 통과시켰다. 이를 계기로 국왕수행을 위하여 개방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였다. 또한 크롬웰은 현재의 필요성에 너무 구애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의 일에까지 깊은 계획을 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찰스를 처형한 후에 그는 뚜렷한 정치형태를 구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무정견과 동시에 젠트리층이 항시 추구했던 현상 유지적인 상황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크롬웰은 현상의 정부를 유지하는 것이 국민의 복지와 안전을 위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까지 사용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즉, 크롬웰은 기본적으로 혁명보다 화평을 원했으며,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복지유지를 바랬던 것이다. 굳이 크롬웰에게 정치적인 목표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극히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크롬웰이 생각한 정치의 기본은 의회는 영구적이면 곤란하다는 것, 그리고 신앙의 자유, 그리고 의회 내외의 어느 세력이 그것에 대하여 명령 할 수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전제에 대하여 반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사실 크롬웰이 취한 행동은 정치적 이념이나 목표 없이 수시로 변화됐으며, 상황에 따라 섭리 혹은 필요성을 내세우며 자신의 무원칙적인 정치 행동을 종교적인 용어로 미화시키고 합리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표면적인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크롬웰에게 본능적이라 할 만큼 그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시골 젠트리로써의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크롬웰이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시골 젠트리의 전형적인 사고방식 즉, 현존하는 사회구조의 변동을 바라지 않는 그들의 속성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크롬웰이 전제정치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반대한 전제는 그들의 시골 젠트리층의 생활에 위협을 주는 전제이지 전제적 방법 그 자체는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때는 스튜어트 시대의 전제 그 이상의 사용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크롬웰은 뚜렷한 정치형태에 관한 구상을 가지지 못했으나 그가 추구한 것은 의회와 비슷한 정부가 가장 바람직한 정부라고 생각했다. 그가 잔여의회rliament)를 구성하게 되었다.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의 처형은 군대가 한 일이었다. 크롬웰은 처음에는 찰스에게 악행의 책임을 씌우겠다는 요구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찰스의 처형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군과 국민 사이의 분열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는 왕을 재판하고 처형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크롬웰은 재판의 공정성을 조이기 위해 각 가문에서 대표를 한 사람씩 배석토록 하였으나 불과 반 정도만 참석했다. 찰스는 자기를 재판한 법정의 사법권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사실상 찰스의 전제정치는 청교도의 저항을 초래하게 했지만 마찬가지로 크롬웰과 군대에 의한 자의적이며 불법적인 정치는 영국인들로 하여금 1660년의 왕정 복고시에 스튜어트가를 다시 왕위에 복귀시키게 하였던 것이다.찰스를 처형함으로써 영국은 왕과 귀족원이 없이 국민의 대표에 의해 통치되는 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왕당파와 장로파가 독립파를 축출하기 위하여 단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롬웰과 그의 동료들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성서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 시켰던 것이다.크롬웰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작전의 성공 이후 영국의 통합은 완성되었다. 많은 환영인파가 개선하는 크롬웰을 맞이했지만 그는 “내가 교수대에 오를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공화정 시대의 크롬웰 자신의 심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크롬웰은 공리공담으로 지새는 의회에 염증을 느꼈다. 1953년 4월 크롬웰은 서민원에 들어가 의회의 해산을 명했다. 잔여의회의 해산은 공화정의 실질적인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공화정 시대 영국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자비한 학살로 점철됐던 아일랜드정복은 철저한 착취정책을 폈었다. 또한 교회에서도 변화를 보였는데 영국은 1640년 보다 덜 장로교적 상태가 되었다. 크롬웰 아래에서는 영국국교주의와 로마 카톨릭 주의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조와 교리는 공식적으로 관용되었다.이러한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정복, 스코틀랜드 침략과 네델란드와의국에서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으며 영국인의 장단점을 모두 구비한 진실한 사람으로 보았다. 퍼트는 종교적인 면을 통해 크롬웰의 위치를 부각시켰다. 그는 크롬웰을 청교도의 영웅으로 보고 크롬웰의 행동을 인도한 것은 종교적 이념이었으며, 그의 정치사상은 그의 신앙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 이후 역사가들은 크롬웰의 현실과 이상이라는 양면성에 대해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다. 애버트는 왕당파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크롬웰의 성격을 위대한 악인이라고 보았으며 동시에 자유의 투사로 보았고 또한 그는 군주와 정복자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고 하였다.크롬웰의 변화무쌍한 여러 행동을 하나 하나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상당히 많은 곤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시골 젠트리로 태어난 크롬웰에게 그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 변혁기를 맞아 뚜렷하게 대처할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나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시골 젠트리가 가질 수 있는 온건한 개혁사상 즉, 전제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정치적 소망은 있었을 것이다.17세기 작가들은 크롬웰의 업적은 찬양하였고 18세기의 현실주의자들은 영국의 청교도혁명을 성공적으로 영도한 크롬웰의 용맹성을 높게 평가했으며, 19세기의 작가들은 그의 개혁자적인 정신을 찬양했던 것이다.크롬웰이 남긴 연설문이나 서간문 그리고 그에 대한 평판을 통해 볼 때 그는 개인적인 이기적 욕망을 초월한 청교도신앙의 화신임을 짐작케 한다. 그는 위선자가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청교도주의를 강조하는 철저한 개혁가였다.Ⅴ 청교도 혁명의 의의청교도혁명 이후 크롬웰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정치적인 안정을 최우선으로 취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중산층과 농민층도 안정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책과 맞아서 그 동안 내란으로 혼탁했던 구내가 평화를 되찾게 되었고 이러한 국내의 힘을 빌려서 대외적으로도 자신의 강력한 통치를 펼칠 수 있어서 영국을 유럽에서 주요한 상업국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중상주의와 관련해서 네덜란드와 에스파냐를 대외적으로 다루어 나갔는88.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목차】읽기에 앞서메노키오 이야기긴즈부르그의 치즈(접근방식)맺으며Ⅰ 읽기에 앞서일단 이 책을 보게 된 건 책의 제목이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치즈와 구더기』? 무슨 내용일까? 라는 궁금증이 더 앞섰다. 역사서라고 하기엔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책 제목이었다. 사학과라고 하지만 그렇게 역사에 많은 지식이 있는 편도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그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졌다. 어떨 땐 책 내용보다 많은 각주에 놀라기도 했다.『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이라는 책의 부제와 같이, 이탈리아 어느 작은 마을의 방앗간주인에 관한 이야기다. 책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책은 미시사에 관한 책이었다. 역사의 흐름, 큰 사건들에만 익숙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미시적인 사건으로 거시적인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는 점에서 놀라기도 했다.Ⅱ 메노키오 이야기방앗간 주인인 도메니코 스칸델라는 16세기 이탈리아 사람이다. 메노키오라고도 불리는 이 남자는 당시 민중으로는 드물게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저급한 싸구려 책일지언정 꾸준히 읽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할 정도가 된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까닭에 촌장이라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논쟁하는 것을 워낙 좋아해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생각을 주절주절 떠들고 다녔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당시 기독교 윤리관으로는 매우 불경한 것들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사제들보다 자신이 하느님을 더 잘 안다고 확신하였으며, 권력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의 사악한 행위를 폭로하고 싶어했다. 이에 발전해 교회에게 특권을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메노키오는 화려한 수사를 즐겼으며, 그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메노키오는 583년에 “이단적이고 불경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종교 재판소에 고발되었다. 고발의 내용처럼 그는 정말 마을 사람들에게 그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가지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메노키오의 독특한 우주관(종교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 공기, 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들입니다. 한 지고지선한 존재는 이들이 하느님과 천사이기를 원하였고 수많은 천사들 중에는 같은 시간대에 그 큰 덩어리에서 만 들어진 신도 있었지요.”」이 글은 그가 심문 과정에서 진술한 천지창조설이다. 이 진술은 책의 제목이 됐을 만큼 독창적인 것이었다. 서양에 있어서 기독교는 떼어놓아선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서양사에 있어서 기독교와 그리스문화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당시 성직자들의 눈에는 메노키오가 어떻게 비춰졌을까? 메노키오는 우유에서 치즈가 생기고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이 만물이 이와 같이 자연스러운 섭리라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메노키오가 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독창적인 사고는 그 당시 지배층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또 다른 글에서 볼 수 있다.「“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고, 모든 인간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과 똑같은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예수의 인간성, 만일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죄를 지은 그 자신이 속죄해야 한다) 만약 그가 영원한 하느님이라면 그는 태어나지도, 십자가에 못 박하지도 말았어야만 했을 것이다.”」메노키오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의 자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모 마리아가 임신하고 출산 후에도 처녀로 남아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는『성모의 로사리오』라는 책에서 나온 인용구를 근거로 들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는 딸을 하느님의 신전에 보냈다. 딸은 그곳에서 하느님께 봉사하는 다른 처녀들과 함께 머물렀다.’에서 “다른상이나 신념을 확실시 하는데 이용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인간이라고 믿은 것이었다.「“하느님이 성서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우리를 현혹시키기 위한 하나의 사기극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는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하느님의 육화, 구속 사업을 거부하였다. 그는 구원을 위한 성사의 효능을 부정하였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세상 전체가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었다.“」메노키오의 이런 발언들은 당시 종교에 이단적인 발언이었다. 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신을 포장한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한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성서 또한 부정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주장으로 모든 종교에 대한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직자의 가혹한 착취와 부정한 축재를 비난했다. 심지어 기독교 의식은 인민 대중으로부터 재물을 뜯어내기 위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Ⅲ 긴즈부르그의 치즈(접근방식)6세기에 이탈리아 촌구석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화형사건에서 미심쩍은 점을 발견한다. 저자는 공식 기록에서는 배제된 민중의 문화를 실마리로 사건을 역추적해 간다. 메노키오는 당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런 독특한 생각을 가졌던 것일까? 메노키오는 당시 진보주의자들에게 퍼져있던 루터파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재판과정을 통한 메노키오의 사상을 이해하고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큰 주제이기 때문에 작가는 그런 부분에 많은 신경을 썼다. 재판이 진행 되면서 궁금증을 갖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에서 작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세세히 파고들었다. 남아있는 재판기록과 독서 목록 등 하찮은 문헌과 촌사람들의 증언들이 살을 붙여 갈수록 당시의 사회변동의 실상이 점차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노키오의 독창적 사고는 절대 다수 민중들의 사상을 장악한 구전문화의 전통이다. 그러한 대답에 재판관은 항상 당황하여 끊임없는 질문을 하여 메노키오에 대해 추적하려 한다. 작가는 메노키오와 재판관의 대화의 어긋남에서 많은 것을 설명하려 하였고 결과적으로 독자에게 당시대를 해석을 해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유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16세기 이탈리아의 이데올로기, 심성, 문화, 사회변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Ⅳ 맺으며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솔직히 ‘언제 이걸 다 읽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다. 또 읽으면서도 조금은 지루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를 본 것 같다.책을 읽으면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메노키오와 비슷한 생각을 하거나 메노키오와 다른 이단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들은 메노키오와 같은 고집이 없거나 이단으로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살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로 멜키오레 제르바스라고 하는 문맹의 목수가 메노키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는 사실이다. 여러 증인들은 이들이 함께 “교회를 모독하고 교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라고 증언하였다. 물론 멜키오레 제르바스는 문맹이라고 책을 읽지는 못 했을 것이다. 때문에 메노키오가 말 해주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맹이라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고, 더 이성적으로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당시 그 메노키오의 마을 혹은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이단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점차 확산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한다.나는 그 당시의 민중들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다. 메노키오의 생각과 사상이 민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또다른 성급화된 일반화의 오류는 아닐까?메노키오가 민중들 모두를 대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 당시의 민중들의 모습을 엿 볼 수는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치즈와 구더기』는 신선했다. 당시 한 개인의 일상사를 통해 역사를 되짚어 본다는 발상 자체주변에는 다른 많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의 사상과 힘이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메노키오는 내가 생각했던 그 시대 민중의 지식수준을 뛰어넘었다. 나는 중세의 민중들은 종교라는 그늘아래 그들이 시키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해왔다. 중세는 정말로 교회의 사상만이 으뜸이라고 세뇌당 한 사람들만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치즈와 구더기를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중세의 메노키오 같은 사람들로만 채워졌다면 중세는 교회의 부패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에 메노키오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좀 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종교의 부패에 대항했을 것이다. 이는 루터의 반박문과 같은 글을 쓰게 만들었을 것이고, 어떤 때는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종교의 무서움에 대항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물론 이는 교회를 믿는 아주 많은 사람들 중 일부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부가 모여서 오늘날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당시 민중들의 삶을 재조명한 것은 획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료 자체가 사실에 입각하였겠지만 사료 또한 사람이 쓰는 것이기에 완전히 주관적 관념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즉, 그것을 누가 썼느냐가 큰 문제가 된다. 또한 사료의 대부분인 재판과정의 기록은 교회에서 기록된 것이다. 그 사료 기록관이 과연 평민과 상위층 간에 중용을 유지하며 글을 썼을까도 의심이 되는 부분이다. 또한 내 추측으로는 당시의 평민 하층민들의 글이 기록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책은 평민층을 위한 글이면 글이었지 고위층의 글은 아니다. 하지만 민중들이 글을 기록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에 빠지게 되며 이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작가는 전적으로 사료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였으나 이러한 사.
《이자겸의 실패요인에 대한 분석》0600174 박정아Ⅰ 머리말Ⅱ 이자겸 폐행에 대한 排他心Ⅲ 군사적 세력의 유동성Ⅳ 혈연 ? 혼인관계의 반이자겸 세력Ⅴ 척준경의 변심Ⅵ 맺음말Ⅰ 머리말이자겸은 인주이씨 출신으로 문종에서부터 인종 대 까지 7대에 걸쳐 80년간 자신의 가문에서 10명의 왕비를 배출하고 문벌을 형성한 인물이다. 이자겸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병을 잡아 권세와 위복을 누린 고려 최대의 귀족세력이었으며, 그는 왕권을 거의 능가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이자겸의 세력기반에 대해서는 왕실과의 독점적인 혼인과 토지 등의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이며 이러한 사실들은 이자겸의 권력 장악에 대한 시발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자겸의 난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왕에게 활을 겨누는 등의 고려 후기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난의 성격으로 보아 이자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난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자겸의 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고려 후기 최고의 권세를 누린 이자겸이 몰락하게 된 이유를 비단 이자겸의 난에 대한 결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만 고려사 열전에 나타난 그 밖의 이유들에 대해 이 글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이자겸 폐행에 대한 排他心이자겸의 폐행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고려사 열전을 보면 잘 묘사되어있다. 이자겸이 상복을 벗고 관직에 다시 오를 때 큰 비가 내리며 ?번개와 천둥이 쳐서 큰 거리에 물이 1장이나 찼다.?라는 구절에서도 보이듯이 이자겸의 권세가 번개와 천둥이 칠 정도에 비교 할 만큼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이자겸이 다른 가문에서 왕비가 나와 권세와 총애가 줄어들까 우려한 나머지 자신의 딸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라고 강요하자 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라는 구절을 보면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뽑히었다. 비바람이 불었다. 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이자겸의 폐륜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자겸의 입장에서 보면 왕의 외할아버지보다는 장인이라는 위치가 권세를 휘두를 수 있는 더 이로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자겸의 폐행에 대해서 민심은 반이자겸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음이 확실하다. 이자겸은 자신의 인척과 자제들에게 벼슬을 하사하고 스스로를 지군국사라 칭하였고, 국공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다. 또한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르며 중앙과 지방에서 올리는 축하의 글을 임금과 동등하게 전箋이라 불렀다. 열전을 보면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려고 왕에게 요청해 자신의 집에와서 책봉하게 했으며 시간까지 강제로 정하려고 했던 사실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들로 이자겸에 대한 왕의 배타심은 심해졌으며 이 결과 이자겸의 난의 시발점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민심도 왕의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갔으며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늘 수 만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자기의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팔아 치우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라는 구절로 설명된다. 또한 인종 4년(1126) 5월에 이자겸과 그 일당을 체포 구금하고 왕이 광화문에 나아가 그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니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고 손뼉을 치며 환호했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라 한다. 이것은 이자겸 일당이 그 동안 가혹한 수취정책을 자행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자겸이 유배된 후 인종은 유사에 명하여, 이자겸이 빼앗은 토전과 장획을 모두 본 주인에게 반환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이미 이자겸 때부터 토지겸병의 풍조가 성행하였다는 것, 그리고 군인들의 유망이 속출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 군제의 붕괴 현상이 표면화 된 것을 알 수 있다. 상식에 맞지 않는 두 딸의 혼인, 군주 국가에서 국왕의 질서를 모방한 점, 대저택의 독단적 소유와 뇌물의 공여, 민간의 탈점 등 이자겸의 부도덕적인 행위는 국왕의 존재까지 철저하게 무시한 행위였으며, 민심에 있어서 이자겸은 堊의 전형으로 그와 그의 세력들은 극단적으로 부패하여 사회 전체에서 백성들의 원망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Ⅲ 군사적 세력의 유동성이자겸의 세력기반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중 군사적 세력기반에 대해서 ?이때 의장이 현화사의 승려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 밖에 다다르니, 궁내에 있던 자들이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만 궁시를 지니고 자성문 위에서 나누어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라는 구절을 봤을 때 이자겸의 승병세력을 들 수 있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궁궐을 불태우는 등 난동을 부린 것은 척준경이 거느린 군졸들이었지만, 이들은 불과 수십 명 뿐인 소수였는데 비해서 의장이 거느린 승병은 300여 명의 대부대였을 뿐만 아니라 강병이었다. 요컨대 이자겸은 그의 아들 의장이 거느리고 온 승병에 의해서 자기를 제거하려고 일어난 세력으로부터 보위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도리어 그들을 반격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승병의 본래 성격상 평소에 사원으로 돌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이들은 어떤 이념에 의해 움직였던 것이 아니라 항상 이익을 쫓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대세가 기울어지면 그 반대편에 서서 자신들의 사욕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자겸의 시대를 고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척준경의 배신에서 갑자기 기습을 당했던 것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는 거대한 사병집단을 양성치 않고 주로 승병 및 기타 잡배들에게 무력적 기반을 두었던 것에도 그 요인이 있다.Ⅳ 혈연 ? 혼인관계의 반이자겸 세력이자겸의 권력 독점으로 그 가문의 구성원이나 혼인으로 연결된 가문조차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고 그의 외손인 인종조차 그에게서 멀어지는 중에 이자겸의 난이라는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자겸의 혼인관계를 보면 김인규를 제외하고는 이자겸 집안과 비교할 때 그 성향이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문벌가문이라고 볼 수 없는 집안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높이기 위해 이자겸의 가문을 필요로 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자겸 일당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이들 사이에 분열 양상이 나타난다. 비록 이자겸과 혈연이나 혼인으로 연결되었더라도 이자겸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경원이씨 중에 이공수와 그 아들 이지저가 중심이 된 듯 하다. 고려사 열전에 보면 ?이어 광화문을 닫았으나 이공수가 따라왔으므로 왕이 명령해 한 편문만 열어주어 들어오게 하였다.?라는 구절을 통해 이공수)가 이자겸 제거에 일조하였다는 것, 척준경과 이공수가 의논하여 이자겸과 그 자식들을 팔관보에 가둔 것이 나타나있다. 이공수는 인종 초에 참지정사직)에 있었는데 인종이 이자겸의 일로 의논할 때 ?덩굴이 무성한 풀은 제거하기 어려우니 편리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자겸에 대해 이공수는 그에 대해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는 제거될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자겸의 권력집중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었다고 하겠다. 이지저는 이공수의 아들로, 이자겸의 사환들이 재물을 갈취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금지하여 이자겸으로부터 강직당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이공수와 뜻을 같이 한 인물이라 짐작된다. 이들은 인주이씨 가문이 일원이지만 이자겸의 권력 집중 현상에 반대하는 반이자겸 세력이었다. 또한 김인존의 경우를 볼 때 이자겸의 가문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오히려 척준경과 함께 이자겸을 가두는 일을 하였던 것을 볼 때 이자겸의 편에 서지 않았고 이자겸과 갈등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반이자겸세력으로는 이자겸과 종형제간인 김약온 등의 인물이 있다. 또한 자신의 사위이자 외손자이기도 했던 인종에게 지군국사가 되려고 강압적으로 행동하므로 인종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는 이자겸의 세력기반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Ⅴ 척준경의 변심척준경의 배신은 이자겸 시대를 고하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인종이 조서를 보내어 척준경을 회유한 것이 나타나있다. 척준경은 이자겸이 반란한 병오년 2월에서 불과 2개월만에 변심하게 되는데 난의 분기점에서 직접적으로 인종에게 활을 쏘아 위협하고, 궁궐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장본인이며 궁궐을 점령하여 많은 인명살상을 한 인물인 척준경의 변심은 흥미를 끌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척준경이 변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려사 열전 A-?내 죄가 크니 해당 관청에 나가 스스로 밝히겠소? 와 B-?당시의 난리는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인데 어찌 나의 죄만 죽어 마땅하다고 하느냐? 라고 꾸짖으며 끝내 보지 않았다.?라는 구절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글을 통해 보이는 것은 척준경의 罪에 대한 인식이다. A는 척준경이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에게 ?너희 주인이 왕의 자리를 활로 쏘고, 궁중에 불을 놓았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다?고 한데 대해 격분하여 한 말이다. 척준경은 왕을 능멸하고 궁궐에 불을 놓았다는 것이 죽을죄인 것을 알고 있었으며 유교 이념적 정체성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 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척준경도 이 罪에 대해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며 왕의 회유에 이자겸의 전횡에 함께하다가 고려 왕실을 지킬 수 있는 파수꾼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척준경의 배신은 후에 난의 진압에 주도적인 인물로 참여하므로 원죄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崔承老의 시무책을 통해 본 그의 정치사상》0600174 박정아Ⅰ. 서론Ⅱ. 유교적 정치이념과 인식Ⅲ. 불교적 배경과 인식Ⅳ. 왕권 안정책과 민생 안정책Ⅴ. 최승로의 한계점Ⅵ. 결론Ⅰ 서론.최승로는 982년(성종 1)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으로 재직할 때 성종이 신하들에게 국정 전반에 걸친 의견을 묻자 시무 28조를 건의하여 다음 해 정원 재신직인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그는 신라의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성종의 신임을 받아 유교적 통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 정비에 이바지 했다.고려사 열전에 나타난 그의 상소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역대 왕들의 치적을 평가한 5조정적평과 성종에게 현안을 제시하는 시무책 28조가 그것이다. 5조정적평에서는 태조의 업적을 훈요10조에 예를 들어 다른 왕들에 비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광종의 도리에 맞지 않는 숙청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5조의 집권초기와 후기를 예로 들어 고려의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제시는 시무책 28조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성종은 그의 제안을 대부분 수용하였다. 왕이 조정 중신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왕과 신료들은 오랜 대립과 반목을 접고 공존을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최승로의 시무책은 그런 계기를 가져온 역사적인 명문이다. 그러므로 최승로의 시무책이 제시하고 있는 궁극적인 것은 무엇이며, 시무책에 나타난 최승로의 유불인식과 정치이념, 안정책, 한계점을 살펴보겠다.Ⅱ 유교적 정치이념과 인식.고려사 열전을 보면 최승로가 12세에 고려 태조의 부름을 받고 왕 앞에서 를 읽고 칭찬을 받으며 元鳳省學生으로 속하게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보아 최승로는 어렸을 때부터 유학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성종 즉위 후 호족과 왕권은 화해를 도모해야 할 상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을 합리화해줄 이념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 속 에서 최승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유교적 통치 이념에 입각한 정치의 실현이다. 태조 사후부터 경종 대까지 진행된 권력투쟁은 신료들의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려 했던 되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최승로는 공자가 언급한 ‘군군신신부부자자 君君臣臣父父子子’ 의 유교적 윤리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왕과 신료가 서로 화해하며 공동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여 준 것 이다. 시무28조를 보면 「주역」에 나온 ‘성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천하가 화평해진다’ 고 하였다는 말을 인용한 왕이 신하를 예의로써 부리면 신하는 왕을 충성으로 섬긴다는 구절이 나와 있다. 이것은 군자의 덕과 신하를 대할 때의 예우를 강조한 것으로 유교이념이 잘 타나있는 구절이다. 또한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자신을 닦는 일은 내세를 위한 바탕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라는 내용으로 보아 유교를 현실의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것을 잘 알 수 있다.최승로의 불교에 대한 비판도 실천윤리적인 유교관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그에게 있어 유교는 하나의 종교보다는 하나의 도덕道德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은 내세적인 믿음의 대상이기 보다는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실천의 규범이다. 최승로의 종교관은 도덕주의적 색체를 띠고 있는데, 유교 본래의 속성과 당시의 유교적 경향이 도덕주의적 색체를 띠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최승로에게 있어 유달리 강한 도덕주의는 종교관의 핵심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합리주의자이며 도덕주의자 였으며 시무 28조를 통하여 유교적 통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의 정비에 이바지한 유교사상을 토대로 대성한 유교정치가였다.Ⅲ 불교적 배경과 인식.시무 28조에는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언급한 글이 22개중 1/3에 달하는 9개조이다. 내용은 모두 과다한 불교행사나 지나친 공덕신앙에 대한 비판이다. 그 내용을 를 빻는 것을 비판하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노고 염려 (一) 왕이 길가는 이에게 장과 국 등 시여하는 것을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하는 것만 못하며 임금의 체통에도 어긋나므로 그만둘 것을 권고 (一) 불보의 전곡으로 이식을 놓아 민폐 됨을 비판 (一) 외부의 승려를 궁 안으로 들이는 것 비판 (一) 승려가 군현에 왕래하여 관이나 역에 머무르며 영접 더딘 것을 책망하여 향리와 백성을 매질하는 것 금지 (一) 연등회와 팔관회로 인한 폐단 시정 (백성들의 노역, 무의미한 공비의 지출) (一) 많은 수의 절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 금단 (一) 불상이나 불경 등에 금, 은을 써서하는 사치 금지 (一) 제왕으로서 중용의 도리를 참작하게 하여 이익이 없는 일 하는 것을 금지. 이 조항들은 불교 행사가 백성의 노역과 직접 관계된 것들로 불교행사라고 하더라도 백성을 괴롭히는 지나친 행사가 무슨 공덕이 있으며 비판의 대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조항들은 그가 불교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백성과 국가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시무책 중에 ‘불교를 존숭하고 유학을 중히 하니’라고 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불교의 교리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에 서려고 한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5조정적평에서 최승로는 태조의 훈요10조를 예로 들면서 다른 왕들에 비하여 태조를 유교와 불교를 이용해 적절하게 통치했다고 보며 태조의 업적을 높이 사고 있다. 이는 최승로가 훈요10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고려의 건국이념인 불교자체를 완전히 비판적으로 보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한편, 불교에 비판적으로 알려진 최승로가 관음보살의 덕으로 태어났고 그 가피로써 목숨을 건졌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하며 그의 손자인 최제안이 세상을 떠나자 천룡사를 지키는 신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최승로의 집안이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개인과 그의 아버지로부터 손자에 이르는 불교와의 관련에서 볼 때고 있었던 것 에 대한 개선을 촉구한 것으로 할 수 있으며 잘못 운용되고 있던 불교행사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 본다. 또한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반영하였지만 이에 못지않게 불교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 사실들로 보아 유교가 독자적으로 강조되고 불교가 억압된 것이 아니라 유교적 체제정비의 지향점이 불교와 공존하는 성향을 띠고 있는 유불공존의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Ⅳ왕권 안정책과 민생 안정책.성종이 즉위한 시점에서 우선적인 과제는 왕권의 안정이었지만, 해결책은 전과 다른 방식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제도를 통해서 통치 기반을 확립하고 합법적으로 신료와 호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성종 대부터 본격화 된 관직 중심의 운영은 고려 초 혼란했던 정치를 안정시키는데 효과가 있었다. 성종 대 이전까지 위계질서가 아닌 관직 중심의 운영을 선택했기 때문에 문산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반면에 성종은 관직을 중심으로 제도를 운영하므로 자연스럽게 왕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관직을 임명하고 승진시키는 최종 결정권이 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왕에 대한 충성과 능력의 발휘가 중요한 필요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항구적인 왕권의 안정을 위해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관직 중심의 운영으로 개혁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역대 중국의 제도를 참조하여 고려의 실정에 맞는 운영체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최승로의 시무책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그가 성종 초에 선관어사와 재신직인 문하시랑평장사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점, 태조 때 관사의 품식이나 내외의 규의를 갖추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 주?현에 외관의 파견과 수령 파견 등 지방제도의 개편을 언급한점 등으로 미루어 그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복식제도의 문란을 지적하며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관료들과 서인들의 예복에 규칙을 정하여 입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지위와 신분의 귀천에 따라 가옥의 제도를 적절히 규정할 것을 건의하여 신료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제안들에서도 백성들의 사역을 걱정하고 있으며 공역을 공평하게 하여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최승로의 민생 안정책은 민중을 노예처럼 부리던 고대적 관념을 탈피한 것으로 구체적인 시안을 결부시켜 여러 방면의 민생 안정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사회에서는 일반 민중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새로운 사회책을 낳게 하였는데 일반 민중의 빈곤과 질병을 구제하기 위한 국가기관의 설치는 이러한 사회책의 예로 보아야 할 것이다.Ⅴ최승로의 한계점최승로는 羅末麗初를 살다가 간 대표적 지식인이자 정치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고려 왕조의 성립 이후 새로이 대두된 지배계층에 대해서 그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시무 28조 중 제 19조에서 태조를 따라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공을 세웠으나, 국초의 정치적 변동으로 몰락한 삼한공신의 자손들과 제 4대 광종 때에 숙청당한 훈구세가 의 자손 등의 등용을 건의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최승로는 개방적이지만 그는 무한정 개방적인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 밖의 다른 신분층의 권력의 행사나 신분 상승 기도에 대해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방관의 파견과 가옥제도의 규정 등을 건의한 것은 지방 세력의 독자적인 세력 성장을 원치 않아서였으며, 천인계층의 신분적 동요를 정책적으로 봉쇄하려 했기 때문이다. 시무책에서 최승로는 문란해진 복식제도 등을 비판하면서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해 다시 정비하길 원한다. 이는 사회적인 변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가치관의 영향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최승로는 신라출신으로 신라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기 쉽고 신라와는 달리 새 사회에 맞는 새로운 시책을 단행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새 왕조의 제도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신라의 제도를 적지 않게 반영하였다. 또한 골품제의 영향도 받고 있었다. 물론 그 제도의 운영은 달랐지만, 고려 국초의 관등명은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끌어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최승로가 전래의 가치관에 토대를 두고 제한된 사회개혁을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