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 최초 등록일
- 2011.12.26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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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말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목차
❍ 조선말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 다산의 저술 활동
본문내용
❍ 조선말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1762년(영조 38년)6월 16일, 경기도 광주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정제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귀농이었으며, 호는 다산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바뀌어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마현리 이다) 마현리를 `마재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1770년 9세때 어머니가 돌아가심.
1776년 15세때 정조가 왕이 되자 아버지가 호조 좌랑에 올랐으며,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다. 매형 이승훈의 영향으로 실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으며, 천주교를 믿었다.
1783년 22세에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함.
1789년 28세,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다.
1790년 29세에 예문관 검열에 올랐으나, 천주교를 믿은 죄로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으나, 정조임금의 어명으로 열흘만에 풀려남.
1792년 31세에 영의정 체제공의 천거로 수원성 쌓는 일을 맡아 1792년에 시작하여, 1794년에 완성하였다. 우리 나라 처음으로 `유형거와 `거중기를 사용하여, 훌륭하고 튼튼한 성을 완성하였으며, 그전 방법 보다 돈도 적게 들고, 인원도 적게 동원되고, 기간도 단축되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 오리인 연천 현감 서용보를 파면시켰으며, 황해도 곡산 부사로 부임하여, 그후 병조 참지가 되어 한양으로 왔다.
1801년 40세에 신유박해 때 경상도 장기로 귀양간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가 그때부터 18년동안 귀양살이를 하며 많은 책을 저술한다.
1817년 56세에, 40권이나 되는 <경세유표>를 비롯하여 <대학회의>, <민보의>, <맹자요의>등을 쓴다.
1818년 57세에 목민심서 48권을 쓴다. 18년간의 귀양에서 풀렸으며, 다음해 <흠흠심서> 30권을 완성하였다.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자세히 써 놓은 책이며, 자기가 목민관으로서 보고 느낀 것을 백성의 입장에서 정확히 기록한 책이며, 오늘날의 공무원 지침서와 같은 귀중한 내용이다.
1836년 2월 22일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일생 동안 쓴 책이 500여 권이며, 시 2,460여 편을 남겼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