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경남의 학문과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0.09.18
- 최종 저작일
- 20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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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남명학파의 연원
Ⅲ. 남명학파의 학통과 사상의 발전
1.남명학의 성격과 내용
2.남명학파의 성립
3.남명학파의 전개와 사상의 발전
Ⅳ. 남명학파의 문인
1.남명 조식
2.래암 정인홍
3.동강 김우홍
4.한강 정구
Ⅴ.남명학파의 이론의 특징
Ⅵ.남명학파의 쇠퇴
Ⅶ.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예로부터 영남지방은 인재의 보고요 국난극복의 보루이며, 유교문화의 중심지로서 한국정신문화의 근간이 되어 왔다. 그러한 영남 지방의 정신적‧학문적 줄기를 형성하는데는 영남학파의 영향이 컸다. 영남학파(嶺南學派)는 우리나라 윤리문화의 발전과 우리 국민의 실천이성의 밝음을 길러주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공(孔)‧맹(孟)‧정(程)‧주(朱)의 철리(哲理)를 구명하여 이를 우리 민족의 풍습과 도의에 맞도록 바로잡아 도덕을 실천하며 의리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남명학파(南冥學派)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영남유학(嶺南儒學)을 양분하여 형성한 것으로 여러 문인(門人)들을 배출하였다. 남명학파는 하학(下學)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實踐)에 바탕을 둔 출처관, 경(敬)과 의(義)사상, 성리학적 학문, 실학, 예학, 교육사상 등을 바탕으로 보다 진보적인 사림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조선 중기의 주요한 학통을 이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학파의 연원, 학풍과 그 문인들, 그리고 이론의 특징과 한계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남명학파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남명학파의 연원
고려말에 불교 대신 성리학을 국가의 기본사상으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는 목은 이색의 문인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정도전, 하륜, 권근 등은 새로운 왕조의 건설에 참여하여 나중에 훈구파 세조의 찬위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귀족적 관료학자들. 이들은 세조의 공신‧총신 혹은 어용학자들로서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수차에 걸친 공신전(功臣田)을 받아 막대한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勳舊派)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반대하였던 정몽주는 살해되고 길재는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이들 계열의 문인들은 대체로 사림파가 되었다. 성종대에 이르러 필재 김종직(1431-1492)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대거 정계에 진출하였고 이를 계기로 훈구파와의 갈등 끝에 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많은 사림이 피해를 보았지만 선조대에 이르면 훈구파 계열은 자취를 감추고 사림들의 정치시대가 열리면서 이들 내의 갈등이 생겨난다. 필재의 문인들은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정여창(1450-1504), 김굉필(1454-1504), 김일손(1464-1498), 남효온(1454-1492)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뒤를 이어서 정암 조광조(1482-1519), 화담 서경덕(1489-1546), 회재 이언적(1491-1553) 등이 등장한다. 김종직에서 조광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사화 이조 전기에 조신 및 학계의 반목‧세력 다툼 등으로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으로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를 말한다.
가 일어나 사림이 대대적인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로써 많은 성리학자들이 출사하지 않고 고향을 지키고 후학을 기르는 은일(隱逸)의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학문적 성숙과 인재의 양성을 가져온다
참고 자료
동방학회 편, 《嶺南學派 硏究》, 경상북도, 1998.
이수건 저,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일조각, 1995.
최완기 저, 《韓國 性理學의 脈》, 느티나무, 1989.
권인호 저, 《朝鮮中期 士林派의 社會政治思想》, 한길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