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동사찬요』에 나타난 역사지리 및 문화 의식
A)「지리지」에 나타난 역사지리 인식
B) 열전에 나타난 문화의식
5. 죽유 오운의 사학사(史學史)적 의미
6. 맺음말
본문내용
1. 머 릿 말
죽유 오운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학자와 문인으로 학자와 문인이면서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훈공을 세웠다. 또 서예가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의령으로 이거하였고, 만년에는 경북 영주로 이주하여 살았다. 19세 때 남명 조식을 찾아 뵙고 그 제자가 되었다. 그 뒤 25세 때 도산서당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는데, 퇴계에게 인재로 인정받았다.
이런 그의 특성이 저술물인 『동사찬요』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며, 『동사찬요』에 대해 봉진봉, 8권본, 11권본, 12권본, 16권본으로 나누어서 정리해 볼 것이다. 또한 『동사찬요』에 나타나 있는 역사지리적인식과 문화의식이 어떻게 투영되어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자간 죽유 오운의 생애와 사상, 『동사찬요』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2. 오운의 가계와 생애
오운은 오수정의 세 아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고, 6세부터 조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9세 때에는 함안의 도학자로 이름 높던 조직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25세 때에는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는데, 이는 증조 및 조부의 이황과의 교유가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이황의 숙부이자 오운의 외증조부인 이우도 명망있는 학자로서, 그는 이황에게도 학문적 영향을 주었지만, 오운도 그를 존경하여 그의 시집을 간행해 주기도 하였다.
오운은 22세(명종 16, 156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7세(명종21, 1566)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할 때까지 10여 년간 계속 성균관에 봉직하였으며, 38세(선조 10, 1577)에 호조우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이배되었다고, 곧 명천현감으로 출보되었다. 다음해 봄에 그는 호조우랑 때의 일로 파직되어 의령에 우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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