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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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통사_9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 (13) 5p
    한국문학통사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9.13. 소설의 성장과 변모가공적 영웅의 투지(1) 영웅소설의 두 계열1) , , ⇒ 역사군담소설, 민중적 영웅소설- 국내를 배경으로 함.-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음. (→ 역사군담소설)- 주인공이 민중적 영웅임. (→ 민중적 영웅소설)- 특히, 은 역사와 큰 차이가 없는데, 다른 군담소설과의 차이점임.2) , , ⇒ 창작군담소설, 귀족적 영웅소설- 중국을 배경으로 함.- 가공적인 창작임. (→ 창작군담소설)- 주인공이 귀족적 영웅임. (→ 귀족적 영웅소설)(2) 영웅소설의 특징과 평가- 영웅소설의 시발점은 임.- 과 은 인기가 많아 이본이 아주 많았음.- 은 귀족적 영웅소설의 전형적인 본보기임.- 도 귀족적 영웅소설의 하나임.- 남녀 취향을 함께 살려 영웅소설이 애정소설이기도 하게 하면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음.여성 주인공의 영웅소설(1) 주인공이 여성인 영웅소설1) (또는 )2) - 숙향은 난리를 만나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헤매는 신세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나 에서는 보이지 않던 고독감을 크게 부각시켰음.3) (또는 )4) - 여주인공이 전개하는 영웅다운 삶을 크게 부각시키고, 남주인공은 평범한 인물로 설정함.-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이 억압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를 관철시켰음.- 여장군전(또는 여걸소설)의 유형임.5) - 여성영웅소설이기도 하고 애정소설이기도 한 이중의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줌.6) - 표제를 보면 가문소설 같지만, 여성영웅소설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음. · 계 소설의 변모(1) 소설의 구분- 소설의 권 수에 따라 단권인 ‘전책’과 두 권 이상인 ‘녹책’으로 구분할 수 있음. 단권 소설은 ‘~전’, 여러 권 소설은 ‘~록’이라고 구분할 수 있음.(2) 전책- 단권 소설- 과 류의 영웅소설이 대표적인 예임.(3) 녹책- 두 권 이상의 소설- 과 가 대표적인 예임.- 은 이후의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구운몽 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구운몽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킨 작품들도 대거 등장하였음.cf) , , , 등(4) - 에서 까지 이어진 유형 구조를 받아들여 뒤집어놓은 작품임.- 이상적인 규범을 따르는 쪽이 패배하고, 욕망의 실현을 추구하는 무리가 세상을 뒤흔드는 것을 보여주어, 근대로 들어서는 시대 변화를 선명하게 나타냈다고 할 수 있음.- 심리 묘사나 장면 설정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였음. 개념적 사고의 틀을 깨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데 힘쓰며, 뜻하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때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렸음.대장편으로 나아가는 길- 대표적인 세책가소설 ⇒ , , , 등-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꾸며 분량을 늘리며 수익이 증대되어, 가문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생겨났음. 삼대기에 걸친 가문소설. 연작소설.- (또는 : 선악의 양극단에 속하지 않은 개성적 인물 등장함. 계모는 악하다는 공식을 넘어섬. 직접적 당사자는 아니면서 사건 진행에 깊이 개입하는 막후 인물이 상당한 구실을 하도록 하는 등의 여러 방법으로 흥미를 자아냄.- 100책, 105책, 180책: 중국을 무대로 함, 상층의 이상적 인물이 주인공임, 보수적 가치관, 초경험적 세계를 끌어들이는 인습을 확대함. 중세로 역행시키려는 상층의식 표현을 드러냄. But, 명분론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인생만사를 말해준 것도 사실임. 많은 인물과 복잡한 사건을 유기적 구성으로 전개한 수법은 높이 평가할 만함. 유사한 규모의 거작소설은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었고 유럽에서도 20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나타남.애정소설의 새로운 양상(1) 새로운 애정소설1) 등장과 특징- 부부가 되기 어려운 남녀가 이해타산을 떠난 애정 때문에 시련을 겪는 것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 한편에서 대거 나타났음. 단권 짜리 전책에 애정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국내를 무대로 해서 사회적인 얽힘을 문제 삼고, 기존의 관습을 뒤집어엎는 방향으로 나아간 작품군이 판소리계 소설과 함께 소설사의 저층을 새롭게 하는 구실을 맡았음.- 새로운 형태의 애정소설은 대장편 독자에서 제외된 하층시민이 일반 민중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더욱 개방된 소설이었음.2) 작품가. - 주인공과 기생인 유록과의 사랑 이야기- 국내를 무대로 함.- 주인공이 애정 성취를 가장 큰 보람으로 삼았다고 거듭 강조해서 말함.나. - 최랑의 이별 이야기- 신분이 서로 다른 남녀가 사랑으로 결합했어도 세상살이의 험한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비극을 보여주었음.다. - 국문소설이 애정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 좋은 본보기임.- 이본이 많고, 방각본으로 거듭 출간되고, 판소리로도 불렸다고 함.- 선계에서 하강한 남녀 주인공이 예정된 인연에 따라 만나고,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여주인공이 다시 살아나 사랑을 이루다가 마침내 둘 다 선계로 돌아감. ⇒ 초경험적 요소- 남주인공 백선군은 경상도 안동의 시골 선비의 아들이고, 여주인공 숙영은 부유한 시민의 딸로 보임. ⇒ 양면이 공존하는 이원론적 구조- 부자 사이의 도리가 헛된 명분이고, 부부 사이의 애정이 진실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함.라. - 기생 옥단춘을 통해 신의와 애정 문제를 다룬 이야기- 사대부들 사이의 신의는 허망하고, 천한 기생의 헌신적 사랑은 대견하다는 것을 서로 대조해서 나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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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5페이지 | 3,000원 | 조회(10)
  • 한국문학통사_10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 (12)-(14) 6p
    한국문학통사1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12) 신체시의 불안한 위치최남선의 의욕과 파탄1908년 2월에 나온〈대한학회월보〉제 1호에 대몽최라는 필명을 사용한 최남선의〈모르네 나는〉이라는 국문시가가 실려 있는데,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형식이다. 자유가 소중하다고 한 것은 자유를 잃고 있는 상황을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이다.최남선 작품에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7?5조의 장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전통적인 형식이나 소재를 잇는 데도 계속 관심을 보였다. 최남선이 신체시(新體詩)를 만들어냈다고 하며,〈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첫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최남선 자신은 오늘날 말하는 신체시보다 넓은 범위에서 「신시(新詩)」와「신체시가(新體詩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최남선은 전통적인 율격 및 그 변형 원리를 이중으로 파괴하고, 일본 모형의 정형시와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서양시 모형의 자유시를 이식해서 그 중간물인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내기도 한, 여러 가지로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이광수가 택한 길이광수가 새로운 시를 이룩하기 위해서 택한 길은 최남선의 경우와 대체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전통적인 율격의 자연스러운 변형에 유의한 점이 다르다. 이광수의 시는 형식 시험에 몰두한 것이 얼마 되지 않고, 자기 시대의 모습을 작품의 내적 상황으로 전환시켜 나타내는 방식을 개척하는 것을 긴요한 과제로 삼았는데, 그런 작품의 율격은 가사와 연결되어 있다. 웅대한 구상을 갖춘 서사시적인 설정을 하고서 울분을 토로하고자 한 장시가 여러 편 있어 더욱 주목된다.〈여자계(女子界)〉1918년 9월호에 발표한〈어머니 무릎〉에서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따사로운 위안을 찾는다고 하면서 말의 낭비를 줄였으며, 웅변이 아닌 서정의 본궤도를 찾았다. 그렇지만 아주 나약해진 자세를 나타내기만 하고, 시상의 단조로움을 극복하지도 못했다. 절제된 표현에 다채로운 뜻이 깃들도록 하지 못하는 신체시의 공통적인 결함이 거듭 확인되었다.현상윤, 최승구,〈학지광〉의 시인들현상윤 또한 신체시를 이룩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문학 창작에 힘쓰고〈학지광〉편집에 관여하다가, 최남선이나 이광수에 못지않은 비중을 가지고 시?소설?논설?수필 등에 걸친 문학 활동을 통해 더욱 평가할 만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작품 창작의 중단으로 오랫동안 잊혀졌다.최승구는 호를 소월이라고 했다. 유고로 남아 있는 시에는 고독과 번민에서 우러나는 감상과 영탄,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유미주의적인 찬미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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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6페이지 | 3,000원 | 조회(8)
  • 한국문학통사_10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 (10)-(11) 5p
    한국문학통사1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10) 소설의 판도와 신소설의 위치방각본 ? 필사본소설의 변모소설은 필사본 ? 목판본 ? 활자본의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유통되어 왔다.필사본은 글을 전달하는 기본 형태였으므로 소설도 활자본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모든 작품이 필사본으로 유통되고 그 일부만 인쇄 되었다. 문집에 실린 한문소설은 일찍부터 인쇄될 수 있었지만, 국문소설은 그렇지 않아서 민간 출판업자가 판매 목적으로 책을 출판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인쇄본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방각본이라고 일컬어지는 판매 목적의 목판본이 17세기에 나타나 처음에는 서당 교과서류를 주 대상으로 하다가 차차 소설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게 되었다. 세책가(貰冊家)에서 돈을 받고 빌려주는 필사본은 방각본과 상통하는 영리적인 상품이었는데, 장편 가문소설일수록 이문이 커질 수 있는 점이 아주 달랐다.필사본으로만 은밀하게 유포된 항일가사가 국권 상실 이후에 계속해서 이루어졌듯이 소설의 경우에도 인쇄되어 발표되지 않은 작품 가운데 항일의 의지를 고취한 지하문학이 있었으리라고 보아도 좋다.활자본 신작구소설신식 활자에 의한 활자본 인쇄는 신문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잡지로 이어지다가 단행본 출판에 이용 되었다. 1907년부터 소설을 활자본 단행본으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구소설과 신소설은 같은 출판사에서 함께 내기가 일쑤였고, 수법이나 체제도 서로 닮은 것이 적지 않아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었다. 구소설 창작을 끝으로 신소설이 시작되었던 것이 아닌, 신소설의 등장 후에도 구소설의 개작뿐만 아니라 창작도 계속 되었다. 신?구소설이 동시대의 문학으로 구소설의 의 고성이 신소설의 당대성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독자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고소설 활자본이 계속 긴요한 구실을 했기에 그 기반 위에서 더욱 발전된 소설이 생겨나고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한문소설의 마지막 모습1860년 이후 몇 십 년 동안 한문소설이나 한문야담은 정리기에 들어서는 한편 내용이 공허해졌다. 과거제가 폐지되고 한문학이 설자리를 잃게 되는 시기에 이르자, 한문학 중에서도 방계에 지나지 않은 한문소설이 더욱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러기에 앞서 그 자체로서의 침체가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신문 ? 잡지에 실리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된 한문소설을 현토본으로 만들어 한문에 능통하지 않은 독자라도 읽을 수 있게 했던 것은 한문소설이 시대적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신문 ? 잡지 국문소설의 등장〈대한일보〉에서는 신문에다 소설을 연재하였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나 친일논조를 펴는 신문에 맞서서 민족의 각성과 항쟁을 고취한〈대한매일신보〉는 여러 형태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주장하는 바를 다채롭게 나타냈지만, 소설은 쉽사리 마련하지 못했다.잡지소설은 이와 다른 성격을 지니고 등장 했다. 잡지는 영리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소수의 독자를 상대로 해서 간행되었으며, 지면이 한정되어 소설을 싣되 흥미로운 사건보다는 주제의식이 두드러진 단편을 택했다. 잡지에서 요구하는 단편소설은 개념이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고, 마땅한 작가가 없어서 구하기 어려웠다.이인직과 이해조의 신소설이인직(1862~1916)은 신문에 연재한 소설을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한 신소설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1907년에 광학서포에서 간행한 첫 장편〈혈의루〉는 제목에서부터 일본식 어법을 택하고, 신문에 연재할 때 한자어의 음이나 뜻을 병기하는 일본식 표기법을 사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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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5페이지 | 3,000원 | 조회(11)
  • 한국문학통사_10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 (8)-(9) 5p
    한국문학통사1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8) 국문시가의 새로운 양상1890년대의 독립 ? 애국가악장은 건국의 자랑스러운 내력을 칭송하는 서사시적인 내용을 갖추고, 천지인(天地人)의 질서를 바로잡은 공적을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면 건국을 칭송하는 노래인 악장을 예전부터 지어 불렀다.그런데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데는 그런 내력이 없고, 천지인의 질서를 새롭게 한 의미가 뚜렷하지 않았다. 일본을 위시한 여러 침략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의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와 독립을 선포했다.한시는 버리고 우리말 노래로만 지은 대한제국의 악장은 주권을 지키고 근대적인 개혁을 정착시키려는 민간 선각자들의 의지 표출이라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독립가 ? 애국가 등의 노래를「창가(唱歌)」라는 용어로 오늘날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창가가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창가는 대한제국 시대에 독립?애국?개화의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서 지은 단형의 국문시가이고, 이미 제기되어 있는 주장을 요약한 교술시라고 규정할 수 있다.1900년대 이후의 창가창가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게 하는 데 학교 창가가 커다란 구실을 했으므로, 학교 창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885년에 배재학당과 1886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설립된 것을 비롯해서 많은 학교가 생겨나자 교가가 필요했고, 창가 시간을 두어 창가를 가르치게 되었었다. 부산에서도 발견된 노래는 창가라기보다는 가사라고 해야 할 형식에 다가 황실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자는 의지를 고취하고, 신문명을 배워 발전을 도모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당시에 발간되던 여러 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경향신문〉들에 실린 창가도 적지 않은데,〈대한매일신보〉의 경우를 특히 주목할 만하다.항일창가가 계속 늘어나고 학교 창가로도 불리어지자, 일제에게 조종되던 매국정부는 이에 대해서 금압 조처를 하는 한편 순종하는 마음을 기르는 얌전한 창가를 학교 교육을 통해서 보급시키고자 했다.일제의 탄압 때문에 국내에서는 항일창가가 계속 창작되고 보급되기 어려웠다. 그 뒤에는 해외에서 투쟁하는 독립군의 독립군가로 항일 창가의 맥락이 이어졌다. 창가는「창가」라는 말이 신식 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어 그 성격이 모호해졌으며, 유행가와 뒤섞이기도 했다. 가사〈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904년 7월 18일부터 1910년 8월 28일까지 발행된 적극적인 항일노선의 신문이었다. 가사는 여러 갈래의 문학 작품을 다양하게 게재한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내용에서나 표현에서나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가사는 실제로 있는 일을 다루면서 주장하는 바를 곁들이기에 알맞은 갈래로써 기사나 논설 못지않은 구실을 할 수 있었고, 독자층이 널리 확보되어 공감을 얻어내기 쉬운 이점도 있었다.〈대한매일신보〉의 가사는 기존의 작품을 게재한 것, 신문사에서 창작한 그 가운데 전형적인 형태, 그리고 사회등가사의 세 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내용에서는 같은 경지에 이른 것들이 더러 있지만, 형식에서 나타난 창의력까지 고려해 본다면 다른 어떤 작품군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대한매일신보〉의 가사는 우리 사회의 비리와 일제침략 때문에 빚어지는 갖가지 병폐를 드러내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어서 항일의 투지를 가다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효과적인 풍자의 수법을 사용한 점 등이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신문 ? 잡지 가사의 다양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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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5페이지 | 3,000원 | 조회(8)
  • 한국문학통사_10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 (5)-(7) 6p
    한국문학통사1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5) 의병투쟁의 체험과 문학투지를 선포한 격문항일의병이 일어나자 문학의 양상도 사뭇 달라졌다. 전문적인 문인이 아닌 의병들은 투지를 선포하고, 전투의 경과를 기록하고, 벅찬 감격과 쓰라린 고난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갈래의 시문을 활용했다. 그래서 한문학에 생기를 불어 넣고. 국문문학도 긴장되게 했으며, 한문학과 국문문학이 서로 얽히는 영역을 마련하게 되었다.투쟁의 경과 기록의병 투쟁의 경과를 스스로 기록해 간직하는 글이 필요해 일기를 쓰게 되었다. 싸움을 하면서 김하락과 전수용은 각기 와 을 남겼다. 시성지가 중심이 되어 같은 해인 1896년에 청송에서 일으킨 의병 활동 참가자 몇이서 기록한 것이 이다. 이 외에도 전수용의 일기가 있다.의병투쟁을 알려주는 다른 자료는 의병부대 안에서 문서와 기록을 담당한 사람이 작성한 것이 있다. 이정규는 유인석 부대의 기록 담당자로서 일을 하면서 의병 투쟁사의 자료를 모으고 순국 의병장들의 전기를 썼다. 박정수는 안승우의 경력을 정리하고 이강년 부대의 투쟁기록을 남겼다.기백과 울분의 한시의병문학에서 한시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의병장은 거의 다 평소에 한시 짓는 수련을 쌓았으므로 싸움터에 나서는 기백을 나타내고 시련을 견디어내는 각오나 패배했을 때의 울분을 쏟아놓기 위해서 한시를 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널리 알려야 할 사실은 산문으로 정리하고, 하층민까지 독자에 포함되면 가사를 택하는 한편, 용건 전달이 아닌 자기 심정 표현이 필요할 때마다 한시를 지었다. 일기에서도 고조되는 감회는 한시로 응결시켜 표현했고, 힘들게 기록된 다른 자료에 전하는 한시는 더 많아, 글하는 선비가 전투를 지휘해야만 했던 고충을 새삼 절감하게 하였다.의병장의 한시의 의의는 한문학이 고식적인 표현의 인습을 벗어버리고 역사 창조의 충만한 경험과 만날 수 있게 하였다.투쟁을 위한 가사1895년 10월에 강릉에서 기병한 의병장 민용호가 강원도?함경도 방면에서 전투하여은 격문을 읽을 수 없고 한시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없어 국문가사로 의병 투쟁의 취지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특히 왜적이 들어와서 전답을 빼앗아 생계를 위협한다고 통분한 대목은 환영하는 군중과의 유대를 두텁게 하는 데 아주 긴요 했다.국문가사라고 해서 몇 마디 말로 사리를 설명하고 소박한 감회를 전하는데 그칠 수는 없었다. 대의명분을 분명하게 하면서, 어리석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무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필요한 순서를 밟아야만 했다.많은 의병가사가 있었지만, 한시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 자료가 수집되지 않았고, 의병이 패배하자 구전되던 가사마저 사라졌다. 또 일본군이 빼앗아가 일본어로 번역해 자기네 자료로 삼은 것도 있어서 의병가사의 수난사를 엿볼 수 있다.의병전쟁은 영웅?열사의 의기만으로 할 수 없고,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를 필요로 했으며, 후원 세력이 구축되어야 지속될 수 있었다. 의병장, 그 수하의 군사들, 그리고 집에 있으면서 후원하는 사람들을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단합시킬 수 있게 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는 가사만한 것이 없었다.투쟁의 경과를 되새긴 가사신태식의〈신의관창의가(申議官倡義歌)〉는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이 끝난 다음에 그 경과를 정리한 가사다.「어와 셰상 사람들아 검셰 형편 드러 보소」라는 말을 앞세우고 조선왕조 건국 이래의 역사를 회고하는 것으로 서두를 삼았다.1910년 이후에는 국내에서 의병투쟁을 더 계속할 수 없어서 뜻 있는 사람들은 만주로 망명해 재기를 다짐했으며, 그때 느낀 바를 술회한 가사와 한시가 적지 않았다.(6) 신구 문학관의 대립과 교체한문학 세대의 주장한문학을 지키고자 하는 문인은 누구나 문학이 관도(貫道) 또는 재도(載道)의 그릇이라는 유가적인 문학관의 기본 전제가 시대가 달라져도 바뀔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새삼스럽지 않은 말을 거듭 강조한 의도는 단순하지 않다. 위기에 몰리기 시작한 한문학을 오랜 권위에 힘입어 옹호할 필요가 있었고, 한문학이 아니고서는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마땅한 도리를 찾을 수 논의가 모두 과거 응시를 준비하면서도 과거에서 요구하는 시문의 격식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대부 문인에게 나날이 소용되는 지침이었으니 쓰임새가 대단했다.신분제에 대한 반발과 함께 한문에 대한 비판이 계속 누적된 끝에 마침내 1894년에 갑오경장을 하면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한문을 대신해서 국문이 공식적인 글로 등장했으며, 천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어진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한문학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국문문학으로의 전환 이론반생을 한문학을 익히느라고 전력하고 한문을 통해 얻은 지식을 사리판단의 척도로 삼는 전통적인 문인이 자기 기반을 스스로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진통을 겪고 용단을 내린 사람이 적지 않았다.장지연은 그 동안 문을 너무 숭상해서 망국 멸종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극언하고, 문이 성하면 예가 번거로워지고, 예가 번거로워지면 거짓이 흥하고 풍속이 타락하고 백성이 나약해진다는 인과론을 폈다. 그래서 그 모든 책임을 문에 돌려야 한다고 했는데, 비판의 표적이 된 문은 한문학의 거의 전 폭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문학을 되풀이해서는 거기 대처할 수 없다고 했다.한문학이 아닌 국문문학을 통해 새로운 지혜를 길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국문시가만 진정한 시라 하고 한시는 배격했다. 하지만 그는 시가 세상 밖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사람이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고 읊조리는 수작이어서는 안되고, 풍속을 교화하고 정치의 가르침을 펴는 데 긴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문학론에서 강조된 것으로 한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국문시가가 풍류스러운 노래로 이어져 왔고 사람들이 함께 일하며 놀이할 때 긴요한 구실을 해왔다는 사실에는 미처 주목하지 않았다.소설에 대한 관심과 논의박은식은 1907년에〈서사건국지〉를 내놓으면서 그 서문 첫머리에서 소설이 무엇인지 말했다. 한문학과 대치될 수 있는 새 시대의 국문문학으로서 소설이 가장 긴요한 구실을 한다는 견해를 적절하게 요약했다.소설이란 하찮은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어원마음속에 들어오는 정도가 가장 깊다고 했다. 소설은 또한「계급풍속」?「교화정도」?「인심풍속」?「정치사상」등의 용어로 거듭 일컬은 사회적 의의가 대단하다고 했다. 소설이 선악을 가려준다는 윤리적 효용론이 계승되었다 하겠으나, 유교의 덕목이 아닌 근대적인 사회의식으로 효용의 척도를 삼고자 한 점이 크게 달라졌다. 우리 소설이 저급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글을 읽고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이 소설 창작의 긴요한 과업은 내버려두고, 성리학의 시비를 가리고, 한문학의 시문이나 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설이 나타내는 사조가 기이하고 필력이 웅건한 작품이면 도덕적인 감화를 자연스럽게 이룰 뿐만 아니라 독자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감동력을 줄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국문소설은 허황된 내용이라 인심과 풍속을 어지럽히기만 한다고 했다.일본 유학 세대의 견해신구 문학관의 교체에 따르는 많은 문제가 제기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본에 유학해 신학문을 공부하던 세대는 서양의 문학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일본 유학 세대는 자체의 역량을 인정하지 않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서양의 문학관에 경도되었기에 비슷한 말을 하는 경우에도 뜻하는 바가 아주 달랐다.문학을 혁신하는 주체로서의 고민을 심각하게 겪지 않은 채 유학을 가서는 알게 된 서양의 문학관을 비판적인 검토의 여지도 없이 바로 받아들이고자 했으므로 새로운 주장을 편다는 논설이 감정에 들떠 있고, 내용도 빈약했다.최두선은 1914년 12월〈학지광〉제 3호에 실린〈문학의 의의에 관하야〉에서 조리를 좀 더 갖춘 논설을 폈다. 문학을 시가나 소설로만 한정할 수는 없으니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이광수가 1916년 11월 10일자에서 23일자까지〈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한〈문학이란 하(何)오〉는 이렇게 해서 달라진 문학관을 좀 더 자세하게 논의하고 체계화한 논설이며, 문학관의 전환을 가늠하는 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문학사의 출현문학의 방향에 대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지자 우 염원하고 전통의 폭을 협소하게 함으로써 문학사적 성찰을 하지 못했으며,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문학사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 채 결론을 앞세웠다. 일본 유학 세대는 지난 시기 문학을 부당하게 폄하하는 것으로 자기네 입론의 근거를 삼았을 따름이다. 은 최초의 문학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고, 문학사 이해의 관점을 일정하게 드러냈다. 또한 문학사의 전개를 일관되게 제시하였으며, 그릇된 방향성을 비판하였다.(7) 국문운동과 문체 혁신전환기의 상황한문이 공식적인 글로 군림해 온 천여 년 동안 말과 글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수 없어 큰 불편을 겪었다. 한자를 이용한 차자 표기법을 고안하여 말과 글을 일치시키면서 상하층 문화의 간격을 좁히고자 하는 움직임이 계속되었고, 다시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의 국문을 창제했으나, 사회 구조의 전반적인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한문과 국문의 관계가 역전될 수 없었다.〈한성주보〉는 정부에서 설치한 박문국(駁文局)이 발행한 정부 기관지이므로 이러한 변화가 더욱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가졌다. 한문을 공식적인 글로 사용하면서도 세 단계에 걸쳐 한문을 국문의 문체로 바꾼 것은 개혁의 요구를 신중하게 받아들인 처사라 할 수 있다.국문 사용의 확대와 공식화“右와 여히 檄文를 西方에 飛傳?니 勿論이 鼎沸?얏다 每日亂亡? 謳歌?던 民衆드른 處處에 모여서 말?되「낫네 낫네 亂離 ㄱ낫서」「에이참?되얏지 그양이이로 지니서야 百姓이 ?사?이 ?어디 ?머있게 ?” 이것은 1893년 11월에 전봉준이 주동이 되어 동학혁명을 모의할 때 사방에 돌린 격문의 서두를 원래의 표기법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보다시피 국문을 택하고서, 한자어에는 한자를 첨가하는 이중의 표기를 한 점이 주목된다. 국문만 알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한자에 익숙한 사람들의 취향도 아울러 반영했다.이와 같은 이중 표기는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민중」이라는 말이 문면에 바로 나와 있으며, 민중들이 곳곳에 모여서 하는 말을 적은 부분에서는 실제로 사용하는 일상생활의 구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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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통사_10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 (3)-(4) 5p
    한국문학통사1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3) 구시대 국문문학의 지속과 변모노래로 부르는 시조시조는 원래 시(時)가 아니고 가(歌)였다. 음악으로서의 시조에서는 오직 고시조의 지속이 있었지만, 문학으로서의 시조에서는 신구의 교체를 보게 되었다. 고시조 창작의 마지막 대가로는 이세보?박효관?안민영을 꼽을 수 있다. 이세보: 시조를 풍류로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사대부의 시조가 관념적인 수사를 벗어나 현실인식의 참신한 표현을 대폭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효관: 작품 창작보다는 창을 주업으로 삼는 가객이었으며, 가단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제자인 안민영과 함께〈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해 내놓았다.〈가곡원류〉는〈청구영언(靑丘永言)〉과〈해동가요(海東歌謠)〉의 뒤를 이은 세 번째의 획기적인 시조집인데, 가곡창의 올바른 유래와 규범을 명확하게 하는 교본일 수 있게 편찬했으며, 음악적인 고저?장단을 표시하고자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 세태 변화를 되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안민영은 스승과는 달리 작품 창작에도 정성을 쏟았다.가사에서 전개된 종교 사상 논쟁시조와 가사는 국문시가의 두 가지 기본 갈래로서 오랫동안 서로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노래여야 하는 시조에서는 창작이 고갈되고 있을 때, 그런 한계가 없는 가사는 작품 수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둘의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가사로써 이념이나 교리를 표현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는데, 최제우가〈용담유사〉를 내놓자 새로운 긴장이 감돌게 되었고, 대종교의〈중광가〉또한 가사의 사상적인 무게를 시대적인 자가에 맞게 가중시키는 구실을 했다.경험 확대를 보인 가사외교사절로 중국이나 일본을 다녀와서 가사를 짓는 풍속은 한동안 지난 시기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었지만 그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국내 여행의 견문을 다룬 기행가사는 전과 다름없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창작되었으나 대부분 명산이나 명승지를 찾아 놀면서 소회를 풀었다는 내용이고 새로운 경험을 반영한 것은 흔하지 않다. 다소 색다른 작품을 찾는다면 조희백의〈도해가〉가 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작품은 울릉도 개척을 다룬 정래기의〈정처사술회가〉와 박시옹의〈울도선경가〉있다.역사의식을 고취한 가사외세의 침략이 닥쳐오자 거기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사를 바로 알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애국계몽 사상가들이 논설? 역사서? 전기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출판물을 이용하지 않은 가사 또한 시대적인 사명의 구현체 노릇을 했다.역사관에서는 가사가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필사본이 부녀자들 사이에서 유통되어 일제의 출판 검열이 미치지 못한다는 조건 덕분에 가사가 지속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다.규방가사의 변모와 각성규방가사는 부녀자들이 애독하는 가사의 총칭이다. 남성의 작품 가운데 교양이 아닌 흥미를 위해서 읽을 만한 것도 규방가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작자층이 독자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녀자들이 작자가 되어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고, 심정을 술회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작품이 규방가사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규방가사는 구시대 문학의 잔존형태임에 틀림없고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만 그 나름대로의 구실을 했지만,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생긴 제약을 덜 받았으므로 상대적인 의의가 확대되었다.산문 기록의 양상소설이 아닌 산문을 국문으로 짓고 필사본으로 돌려 읽는 풍속도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작품 가운데 특이할 만한 것은 찾기 어렵다.조사가 미진해서 자세하게 알기 어려우나,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계속 짓고 읽은 편지나 제문은 이미 확립된 격식을 따르기만 했고, 기행문ㆍ수기 같은 것들도 대부분 시대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 내용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활자본 잡가집구시대 국문문학 작품은 유포와 창작이 필사본으로 이루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인쇄되어 출판된 것도 적지 않았다.인쇄를 해서 책을 펴낸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방각본이라는 이름의 민간출판이 시작되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크게 발전했다.서당 교과서류와 함께 소설을 다수 출판해 널리 보급했고, 시가 작품도 한두 권 포함되어 있었다.그런데 방각본은 목판 인쇄였으므로 판각의 어려움이 있고, 대량 인쇄를 신속하게 할 수 없었다.(4) 한문학에 부과된 사명문학과 사상에서 정통 재확인누대에 걸쳐 국권을 장악해 온 노론 벌열층은 안으로 민란이 거듭되고 밖으로 는 외세의 침략이 목전에 닥친 시기에도 한문학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개화ㆍ계몽으로의 길오경석등의 중인 지식인, 박영효ㆍ김옥균 등의 양반청년층에 깊은 영향을 미쳐 개화사상이 일어나는 길을 열었다.위기를 견디어내면서 왕조를 수호하자면 실학을 실행해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밖으로는 서양문명을 수용해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는데, 문학적인 저술에서도 그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문장가의 사명한문학사의 주류는 이항로나 박규수를 거쳐 위정척사파나 애국계몽 운동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항로ㆍ박규수가 주목하지 않았던 동시대의 후배 강위(姜瑋,1820~1884)야말로 전통 속에서 혁신을 찾아 한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강위는 중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위항시 운동의 연장선상에 자기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도학과 경세 그 어느 쪽에도 쓰일 수 없는 능력을 작품 창작을 통해서 발휘하고자 했다.한문학의 저변 확대한문을 배워 한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중인들이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한문학 창작에 참여해 위항 문학을 이룩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지방까지 파급되었다. 19세기 중엽, 경상도 통영에서 삼소계 또는 삼익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한시를 창작했다고 한다. 멀리 제주도에서도 한문학의 창작이 이루어진 것 또한 새로운 동향의 하나이다.19세기 말에 상당한 분량의 시집을 남긴 문인들이 나타났다. 1876년에 김협은 제주도로 이주해 약국을 열어 생업으로 삼고 향교의 교수 노릇을 하면서 지은 시를 제자들이 모아 을 편찬했다. 김협이 한문학의 선두에 서서 제주도의 한문학을 본궤도에 올리는 역할을 했다. 제주도 태생인 신홍석은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을 엮는 일을 제자들이 했으며, 신홍석은 망국의 시련을 노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우국 문학의 진통황현은 한문학의 격조를 지켜야 한다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자기 시대의 수난과 적극적으로 대결한 시인. 정도와 정론을 명확하게 하며 구국의 자세를 찾고자 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글을 짓는다면서 나라가 그릇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파헤치는 시국관을 보여주었다. 에서 1864년부터 1893년까지의 역사를 개관, 1894년 이후 일어난 사태를 기록하며 준열한 비판을 하였고, 침략세력과 민족 반역자를 철저하게 규탄. 애국계몽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촌생활을 다룬 시다. 역사를 회고하며 애국의 의지를 고취하는 시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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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5페이지 | 3,000원 | 조회(13)
  • 한국문학통사_10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 (1)-(2) 7p
    한국문학통사1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 제2기 1860~1918년(1) 민중종교운동과 문학민중종교운동의 경과민중종교 또는 신흥종교는 1860년(철종11년)에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 을 창건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생겨난 수많은 종교를 말한다.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으로부터 붕괴될 수밖에 없는 시기와 맞물려 자본주의 열강의 세계병탄으로 닥친 거대한 시련의 이중적 위기가 조성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척사위정운동·애국계몽운동?항일의병운동과 함께, 민중종교운동이 한 시대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민중종교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역사적 존환이 요망되는 위기에 중세의 지배질서를 재정비하면서 수습하기 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동학 창건 이후에는 사정이 아주 다라졌다. 민중종교운동의 여러 교단은 각기 자기네 교조의 개인적인 수련과 득도에 의해 엄청난 변혁이 시작되었다하고 서로 배타적인 절대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영향이나 차용의 결과이기 이전에, 그 시대 민중이 바라던 소망을 집약한 데 근거를 둔다는 공통점이 있다.한 인물이 어느 날 득도를 통해 인간만사에서 천지운행까지 꿰뚫어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는 소망을 비약적으로 구현한 상징이었다. 민중종교운동의 교리는 어느 것이든지 낡은 관습을 가능한 대로 혁신해 상징적의미의 차원을 높이면서도 또한 민중에 맞게 낮추어 사용해야만 되었기 때문에 교조들이 사용 할 수 있는 언어 표현이 한문경전?국문경전. 국문가사가 대종을 이르는 노래, 말로 퍼져 나가는 이야기 형식일 수밖에 없어 교리를 펴는 방법을 두고 고심을 해야만 했다. 한문경전이 오래 써먹은 낡은 틀이라고 하겠지만, 어디서 가져오지 않고 당대에 새롭게 창작하는 것은 최초의 시도였다. 전설을 모아서 국문경전을 편찬한 것은 문학의 양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변혁이었다. 이렇게 민중종교운동은 문학사 자체에 깊숙이 들어와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민중종교운동은 1860년에서 1919년 이전까지의 기간만 활발하게 일어나고, 평새 시대를 연다고 하자, 수백년 고대하던 진인이 이제 나타났는가 하여 주위에 모여들었고 경상도 땅을 넘어서까지 확대된 동학의 세력은 조정에서도 크게 우려할 지경에 이르렀다.최제우가 득도해 포교한 기간은 만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듭되는 탄압을 견디며, 한 시대 역사를 움직이는 저류로서 큰 구실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스스로 득도해 새로운 종교를 창건한 것은 최제우가 처음이며 전례가 없다. 내세울 만한 기존의 경전이 없었기 때문에 득도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으며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 전혀 새로운 경전을 마련해야 하였다 . 지체나 학식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가사를 여러 편 지어 외고 익히기 좋도록 국문을 사용했다. 득도한 해의 작품인 ??에서 교리의 체계화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최제우의 개인적인 술회가 잘 나타나 있다. 최제우는 생존시부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노래가 스스로 선택하고 창조한 문학이라면, 이야기는 자기가 바라지 않더라도 주위에서 만들어내는 문학이라 하겠는데 그 둘이 서로 보완하는 작용을 했다.동학혁명의 문학전봉준(1854~1895)이 주동이 되어 전라도 고부에서 일으켜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사상 초유의 대규모 민란을 오랫동안 동학란이라고 한다. 동학군의 격문이 한문인 것과 국문인 것도 있다. 격문처럼 엄숙한 글을 국문으로 쓴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며, 어문 생활사에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오지영의 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활용해 전봉준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려고 한 대목이 이따금씩 보이지만 내용이 풍부하지 않다. 전봉준이세상을 떠나자 전국의 마을과 거리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때에 맞지 않게 나왔다가 실패한 전봉준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파랑새가 과연 전봉준을 뜻하는지 확실하지 않고, 파랑새가 전봉준을 뜻한다 하더라도 노래의 내용이 너무 단순하다. 전봉준의 거사는 설화나 참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면이 있다. 그래서 표현방법의 쇄신이 요망되었다.유교와 불교에 , 종교로서의 요건이 부족했으며, 민중운동과 연결되지도 않았다. 김항은 전통 유학을 거부하고 세상을 혁신하는 논리를 다지느라고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저술을 해야만 했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을 미친 듯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극복하려고 하였다. 김항의 제자들은 두 가지로 학풍이 나뉘었다. 한쪽은 을 연구하는데에만 치중하게 되었고, 다른 한쪽은 노래와 춤을 종교의식으로 승화하여 영가무도교 등의 교단을 열게 되었다.박중빈(1891~1943)이 1916년에 새로운 종교인 원불교를 창건했고, 자신의 교리를 불교와 연결시켰다. 기본 자료인 는 나중에 편찬되어 너무 다듬어져 있지만, 민중종교운동을 위한 각성의 과정을 그 나름대로 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증산교의 득도 기록이름 없는 민초였던 강일순(1871~1909)은 1901년에 증산교를 창건했다. 강일순은 동학에서 큰 자극을 받았으며 최제우의 가사를 자주 인용했다. 강일순이 생각한 최상의 과업은 다가오는 시대인 후천에는 천대받고 억눌린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기를 펴고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상호라는 사람이 강일순의 언동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 를 발간했으며, 이후 내용을 덧대어 초판을 출간했다. 증산교에는 라고 하는 가사집에 여섯 편의 노래가 실려 있으며, 민요와 가사의 형식을 빌려 신비로운 내용을 전한다.대종교의 주장대종교에서 홍암종대사라고 불리는 나철은 백두산에서 왔다는 노인에게 대종교의 기본 경전인 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종교의 경전은 주체적 도가사상의 비기(秘記)류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전문이 한자로 되어있으면서, 단군건국의 판도를 재현하고, 본문은 환웅의 가르침으로 되었다. 또한 만주가 단순한 망명지가 아닌 민족사의 본거지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대종교가 1910년대 항일투쟁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앙화 된 역사서는 역사서라고 평가하고 민족의 역사를 되찾게 하는 원전이라고 하여 1915년에 대종교를 불법화로 탄압했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이 있어 수많은 분파가 생겨났다. 김주희는 1922년에 경천교의 맥락을 이어 동학교를 창건했으며 1919년부터 10여 년 동안 방대한 분량의 가사를 지었다. 최제우의〈용담유사〉와 상통하는 가사를 지어 그 보완 작업을 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동학의 맥락을 함께 이은 김중건은 김주희 다르게 천도교가 조선 혁명의 본질이 되어 세계개조까지 맡아야 한다고 역설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새로운 도리를 선포했다. 김중건은 난잡한 경전으로 만족할 수 없어 국문으로 노래를 짓는 데 더욱 열을 올렸다. 김중건은 노래를 통해 억압과 살육의 시대를 만나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야한다는 점에서 김주희와 상통하는 생각을 보이기도 했다.농업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생명을 유린한다는 이유에서 어업마저 금해야 한다고 했으며, 자연?여성?어머니를 존중해야 모든 갈등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원리와 합치된다고 한 점에서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회고의 몽상에 사로잡혀 퇴영적인 자세를 가지지 않고, 모든 갈등과 고통을 가져오는 적과 투쟁해야만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원한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강일순 식의 사고방식을 청산하고,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리를 마련했다.(2) 구비문학의 활기와 긴장대원군 집권기의 전환문학사는 오랫동안 구비문학?한문학?국문문학이 서로 보완하고 경쟁하는 관계의역사였다. 어느 시기에든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구실을 해왔던 구비문학은 1860년대에 이르러서 전에 볼 수 없던 활기를 띠고, 한문학과 국문문학에 의해서 구축된 표층의 문학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가장 극적인 사건은 경복궁 중건은 실책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계속 자자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탄 왕궁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고서는 나라의 위엄을 자랑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이었다.〈경복궁가(景福宮歌)〉 또는〈경복궁창건가〉등의 이름을 가진 서로 비슷비슷한 가사가 여러 편 남아있어 그때의 광경을 전.판소리의 상승과 변모민속예술 또는 구비문학의 여러 종목 가운데서도 음악적인 세련미나 문학적인 수식을 다른 어떤 것보다 잘 갖추고 있던 판소리가 출세를 할 수 있었다.판소리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었는데, 하층민의 인기를 모으는 민중예술이면서 동시에 상층의 애호도 받는 이중적인 장점에다가 대원군이 판소리를 무척 즐기고 판소리 광대를 고무하는 상황과 맞물려 상승의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판소리는 충효?우애 등의 표면적 주제를 갖추고 있었던 점과 비교적 장편이기 때문에 양반 취향의 격조 높은 문구를 삽입하기 쉬웠던 점이 판소리의 상승에 유리한 작용을 했다.판소리에서 먼저 이룩된 그 성과를 주목하자면, 근대적인 민족문학의 기본 요건 가운데 하나인 신분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선 공동의 문학이 현실에 대한 서로 상반된 견해를 다양하게 반영한 것이다. 판소리는 여러 계급이나 계층의 사람들이 관여했으며, 상하의 관심을 아우르도록 하는 작용을 아전이나 시민이 적극 수행했다. 그러나 판소리 사설의 문학적 창작은 공연을 다채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안에서 소극적으로 시도되었다. 또한, 현실비판의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이미 얻은 인기에 안주하게 되어 새 시대의 문학으로 커다란 구실을 할 수 있는 발전적인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명창이 스스로 지니지 못했고, 그 일을 맡아 나서는 작가도 없었다.민요에 나타난 항거와 비판시대 변화에 대처하는 변모를 보인 것은 판소리와 민요였는데, 그 양상은 서로 대조적이다. 광대의 노래인 판소리는 광대의 출세에 따라 상승을 했지만, 민중의 노래이고 특히 일꾼의 노래인 민요는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고 각 지방을 연결시키는 교통망이 발달하는 것을 계기로 해서 민요의 교류와 변모가 촉진되어, 시대적인 각성을 함께 나타내는 공동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민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각 지방에서 언제나 같은 기능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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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7페이지 | 3,000원 | 조회(14)
  • 한국문학통사_9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 (14)-(15) 6p
    한국문학통사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9.14.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계 소설까지서사무가의 전승과 변모(1) 서사무가1) 전승과 변모- 무당이 굿을 하면서 부르고, 무속에서 섬기는 신의 내력을 풀이함.- 건국서사시에서 시작된 영웅서사시의 전통이 서사무가로 이어짐.- 무가는 대부분 교술무가임.- 제대로 된 큰굿을 할 때 특정 거리에서 신의 내력을 풀이하고 기리는 서사무가를 부름.-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끌어들여 신성서사시 속에 세속서사시가 판도를 넓혀감.2) 작품가. 전국에 널리 분포된 서사무가① - 불교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신이함을 유지하는 한편, 아비 없이 자식을 출산한 처녀의 수난을 심각하게 그려 하층의 공감을 확보함.② (또는 )- 버림받은 딸이 가련한 처지에서도 효성을 다하느라고 겪는 수난과 희생이 강조됨.- 여성 수난사를 절실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게 개작해 여성 신도들을 사로잡았음.- 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소설에서 되풀이되는 사건 형태를 제공함.나. 제주도의 서사무가- 제주도에서는 신의 근본을 풀이한다는 뜻에서 서사무가를 본풀이라고 함.① - 강임이라는 인물이 저승의 염라대왕을 불러와 이승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내용- 이승 사람과 저승 지배자 사이의 우열관계를 역전시킴.② -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 저승의 꽃을 관장하는 한락궁이의 내력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수난의 내용을 그림.- 하층민이 겪는 갖가지 어려움을 실감나게 그림.- 『석보상절』의 한 대목인 과 흡사하고, 소설 과도 관련됨.③ - 농사의 신인 ‘세경’의 내력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지체 낮은 처녀가 지체 높은 총각을 유혹해서 사랑을 이루었다는 내용- 지체의 차이를 넘어선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판소리 와 상통함.서사민요의 모습(1) 서사민요의 두 계열1) 비극적 서사민요- 하층민의 삶의 고난을 해결하는 시도가 정상적인 경우- 노래하는 사람이 주인공과 밀착되어 전개됨.- 비극적인 성향을 지님.- 시집살이의 고난, 첩 문제, 남녀관계를 소재로 다룸.2) 희극적 서사민요- 하층민의 삶의 고난을 해결하는 시도가 엉뚱한 경우- 노래하는 사람이 주인공에게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함.- 희극적인 전개를 보여줌.- 내심의 욕구를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일로 전가시켜 웃음거리를 만듦.- 남자들이 즐겨 부름.판소리의 형성과 발전- 판소리는 전라도에서 생겨남. 전라도에는 탈춤이 없어 판소리가 탈춤의 구실을 했음.- 판소리는 서사무가에서 유래했음. 판소리는 서사민요와도 상통함. 판소리는 서사무가뿐만 아니라 서사민요까지 받아들였음.- 광대가 어느 대목을 자기 나름대로 특별하게 개작해 자기 장기로 삼는 것을 ‘더늠’이라고 함.판소리 열두 마당(1)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판소리 다섯 마당⇒ , , , , - 열두 마당 중 전승되는 것은 ‘가’라는 말이 작품명 말미에 붙었음.- ‘가’는 타령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표현의 격조가 높음.(2) 현재에 이어지고 있지 않은 판소리 일곱 마당⇒ , , , , , , (또는 )- 열두 마당 중 없어진 것은 ‘타령’이라는 말이 작품명 말미에 붙었음.판소리계 소설의 작품세계(1) 판소리계 소설인 ···- 기존의 소설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던 초경험적이고 관념적인 설정을 판소리가 지닌 특징에 힘입어 대폭 축소시키고 현실 경험을 생동하게 나타내는 방향으로 나아감.- 특히 널리 알려지고 높이 평가되는 고전소설임.- 판소리계 소설은 결말보다는 과정을, 승패보다는 대결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으로 소설사의 새로운 지평을 엶.9.15. 민속극의 저력과 변용민속극의 특징과 종류- 민중의식의 각성과 함께 예술의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밑으로부터의 창조가 다채롭게 이루어질 때, 상층문화의 전례에 구애되지 않고 민중의 독자적인 창조력을 가장 뚜렷하게 구현함.- 비속한 언사를 그대로 사용해 하층민이 절감하는 갈등을 표출하고, 판소리의 이면적 주제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 없이 내세움.- 연극이라고 할 만한 것은 모두 민속극이고, 작가가 창작한 희곡을 공연하는 작품이 다른 동아시아 나라에는 모두 있었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없었음.- 무당굿놀이·꼭두각시놀음·탈춤이 출발 단계의 연극의 모습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에, 고대나 중세에 마련된 상층 연극의 규범을 거부하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새롭게 일어나는 민중연극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음.무당굿놀이(1) 무당굿놀이- 무당이 하는 굿에 포함되어 있는 연극- 무당이 굿을 청한 사람을 상대로 공수를 주고 수작을 거는 것은 어떤 인물로의 가장에 의한 대화라는 점에서 연극 성립에 필요한 요건을 일부 갖추었음.- 무속 특유의 기원이나 주술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않은 문제를 제기하고 현실감각을 갖춘 갈등을 나타내는 대목이라야 연극일 수 있는 충분조건을 인정받아 무당굿놀이 또는 무극이라고 따로 일컬어짐.- 굿을 맡은 주무(主巫)가 스스로 해설을 하면서 극중인물 노릇도 하니, 서사적인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음.- 주무(主巫) 자기가 묻고 대답하는 일인다역을 많이 하고, 반주를 하는 조무(助巫)를 상대역으로 삼아 말을 주고받기도 하며, 관중을 즉석에서 끌어내어 상대역 노릇을 하게 하기도 함.- 무당 몇이서 배역을 나누어 극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음.(2) 무당굿의 한 대목이 놀이 형태를 갖추었던 사례1) 제주도의 ··- 배역이 분화되고, 탈을 쓰기도 해서 연극의 요건을 잘 갖추었음. 그러나, 생산을 풍요롭게 하고 병을 낫게 한다는 굿의 기능이 아직 거의 그대로 남아 있음.2) 경기도 양주의 - 제석거리에 부수되는 행사임.- 무당이 아닌 사람들이 마부들로 분장하고 나서고, 몇이 멍석을 뒤집어쓰고 소 노릇을 하면서 여러 가지 놀이를 벌임.꼭두각시놀음과 발탈(1) 꼭두각시놀음- 남사당패는 ‘덜미’라고 하고, 구경꾼들은 이나 , 또는 등으로 부름.- 꼭두각시는 인형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면서 또한 극중에서 영감을 잃고 찾아다니는 할미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임. 박첨지는 꼭두각시의 남편인데, 바가지로 만들었으므로 성이 박가라고 함. 홍동지는 박첨지의 조카라고 하는 천하장사인데, 벌거벗고 다니므로 홍(紅)과 같은 음인 홍(洪)을 성으로 삼음.- 인형 몸속에 손을 넣어서 움직이는 방식임.- 반주를 하는 악사는 무당굿놀이나 탈춤에서와 같이 관중의 자격으로 등장인물과 문답하는 상대역 노릇을 하고, 인형들의 놀이에 사람이 개입해 무대 공간을 확대하고, 극중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과 직결된다고 느끼도록 하는 구실까지 맡음.- 박첨지는 맨 처음부터 등장하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얼굴을 내밀고 악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해설자 노릇도 함. 여덟 거리라고 하는 장면이 모두 독립된 내용인데 박첨지가 하나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함.(2) 발탈- 놀이하는 사람이 발에 탈을 씌워 인형처럼 움직이게 하는 놀이- 발탈은 다른 나라에 없음.- 남사당패의 놀이 종목에 포함되어 공연되다가 별도로 전승되어 남아 있음.- 공연 방식은 간단하지만, 등장인물이 셋이나 되고, 주고받는 대사에 깊이 생각해야 할 의미가 있음.- 인물의 성격을 보아 ‘떠돌이’라고 할 수 있는 탈 쓴 인형이 ‘주인’이라는 사람과 말을 주고받고, ‘여자’가 하나 더 등장함.도시탈춤의 구조와 주제(1) 들놀음과 오광대- 경남지방의 탈춤은 낙동강을 경계로 해서, 동쪽은 들놀음이고 서쪽은 오광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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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6페이지 | 3,000원 | 조회(10)
  • 한국문학통사_9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 (12) 5p
    한국문학통사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9.12. 설화 · 야담 · 한문단편구전설화의 변모(1) 시대에 따른 설화- 고대에는 설화가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음.- 중세 전기에는 한문학과 맞서서 독자적인 전통의 다양한 변모를 보여주는 설화가 사상 전달과 역사 이해까지 관장하는 긴요한 구실을 함.- 중세 후기에는 정통 한문학의 판도가 크게 넓어져 설화는 저류에 머무르고, 그 일부만 상층의 관심에 따라 선택되어 잡록이나 골계전에 수록됨.-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설화가 재흥하여, 민중의식의 성장이 설화에서 다채롭게 표출되고 야담이나 소설에서 적극 수용되었음.(2) 설화의 예1) 아기장수 이야기- 아기장수가 태어나자 역적이 될까 염려한 부모나 이웃 사람들이 날개를 떼어내고 죽였다는 전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라 민중적 영웅은 패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극도에 이른 반감을 보여줌. 인재가 나면 역적으로 몰고, 항거에 대해서 무서운 보복을 일삼는 통치방식에 대한 분노를 나타냄.2) 진인 출현설- 민중운동이 고조될 때에는 아기장수 이야기에서 인정한 패배를 부정하는 진인 출현설이 등장함.3) 상하·귀천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이야기-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이야기이고, 하인이 상전을, 상좌가 노장을 속여서 골탕 먹이는 것을 조선 전기의 잡록이나 골계전에서 흔히 볼 수 있음.4) 건달 사기꾼 이야기- 건달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한 연쇄적인 일화는 특히 인기가 있었음.- 건달 사기꾼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백문선, 정수동(위항시인 정지윤), 평양의 김선달, 경주의 정만서, 영덕의 방학중, 남원의 태학중 등5) 화이론(華夷論)을 뒤집은 이야기- 중국 사신이 오는데 무식한 떡보가 마중 나가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 중국 천자가 낸 고약한 문제로 조선 조정이 쩔쩔매고 있는데 그 문제의 정답을 모를 것 같은 사람이나 어린아이가 쉽사리 해답을 찾아 중국 천자를 당황하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음.(3)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설화- 위와 같은 양상으로 변모되고 재창조된 설화는 서사문학이 활기를 띠고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저변에서의 동력 노릇을 하면서, 야담·판소리·소설 등의 성장을 부추기고 소재를 제공함.- 국문서사문학보다 한문서사문학에서 설화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 야담이나 한문단편을 만들어냄.야담 집성의 양상(1) 야담1) 개념과 특징- 역사라고 표방하지 않고 흥미로워서 하는 이야기. 인물과 사건이 가공적일 수 있음.cf) 야사(야승): 정사로 인정되지 않는 역사(→ 야승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전래된 동아시아 공통의 용어임.)- 야담은 구전설화를 야사나 야승처럼 기록해 이루어진 문헌설화임.- 처음에는 알려진 인물에 관한 일화가 적지 않았으나, 나중에 하층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길고 복잡한 사건을 전개하는 작품군이 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임.- 은 도가적 취향의 방외인들의 행적을 모음.2) 작품가. 유몽인(1559~1623)의 - 최초의 야담집- 관심의 방향을 돌린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짐.나. 홍만종(1643~1725)의 - 우스운 이야기를 모은 야담집으로, 성격이 특이해 야담의 방계라고 할 수 있음.- 골계전 계통의 야담집다. 신돈복의 - 야담집의 본류에 해당하는 작품- 하층민의 생활이 충실하게 나타난 사건을 적절한 짜임새를 갖추어 전개한 것들이 있음.- 야담이 소설로 발전하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간 성과를 보여주었음.라. 안석경(1718~1774)의 - 야담집의 본류에 해당하는 작품- 상인의 성장이나 하층민의 항거로 특징지어지는 세태를 생동하게 그린 작품이 수록되어 있음.(2) 야담집의 정리- 야담집이 계속 늘어나고 수록 내용이 많이 혼란되어 정리할 필요가 생겼음.- 이희평의 , 작자 미상의 야담의 변모 과정- 돈의 힘. 신분의 차별에 따른 인습을 타파하고 누구나 화폐경제시대의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할 것을 역설함. 시민의 경제활동을 정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당대문학의 다른 어떤 영역보다 앞섰음. 놀부 심술을 나무라면서 탐욕을 경계하는 것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음. 예) 선천 김진사 이야기 등⇒ 야담을 애호하고 발전시킨 주역이 시민임을 입증하는 증거임.- 애정의 긍정. 개가(改嫁).- 일체 행운은 배제되어 있고, 세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억척스럽게 노력해 바람직한 결과를 얻은 이야기 예) 무관인 우하형과 수급비 출신의 여자 이야기- 국문소설과 한문소설 모두 설화와 깊은 관련을 가졌음. 국문소설이 중국을 무대로 설정해서 상층 가문에서 벌어지는 일을 길게 늘어놓는 관습을 마련할 때, 한문소설은 국내에서 실제로 있음직한 사건을 집약해서 다루는 작업을 더욱 수준 높게 발전시켰음.박지원의 작품(1) 박지원의 연암소설- 해당 작품 9편 중 7편은 『연암집』의 에 모아놓은 전(傳)이고, 2편은 『열하일기』에 넣었음.1) 작품가. - 불우한 인물에 대한 전(傳)임.나. - 실존인물의 행적을 예사롭지 않은 방식으로 다룸.- 민옹이 풍자와 골계에 가탁해서 세상을 불공스럽게 희롱하는 이야기가 사회의 병폐를 고치는 데서 과거의 다른 어떤 문학보다 뛰어난 효과를 가진다고 말하고자 함.다. - 마장이란 말거간꾼을 가리키지만, 말거간꾼의 전(傳)은 아님.라. - 거지 출신인 광문이라는 사람의 전(傳)임.마. - 똥을 퍼다가 농사에 쓰이도록 나르는 엄행수라는 사람의 전(傳)임.바. - 양반은 아무런 생업도 없어 무능하기만 하면서 헛된 체면이나 차리고, 권력을 잡으면 무슨 짓이든지 해서 횡포를 자행한다고 함.- 소설다운 짜임새를 선명하게 갖추고 있음.사. - 허생은 박지원이 생각한 실학하는 선비임. 선비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지만 결국 이룬 것이 없었음.- 세상을 구할 방책을 내놓을 수 없었고,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쳤음.아. - 도학자로 유명한 북곽선생이 호랑이를 만나 질책을 듣는 내용의 이야기- 에서 말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물성의 동이(同異)를 둘러싼 논쟁의 추이를 알 필요가 있음. 사람과 동물이 타고난 본성이 하나이기만 한 이(理)로 말미암아 같다는 인리동론과, 여럿으로 나누어져 있는 기(氣) 때문에 다르다고 한 인기이론(因氣異論)이 팽팽하게 대립되어 논쟁을 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이기이원론의 파산을 보였음. 그러자 임성주에 이어 홍대용이 사람과 동물은 기로 이루어져 있는 점이 서로 같다는 인기동론(因氣同論)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기일원론을 새롭게 정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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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통사_9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 (10)-(11) 5p
    한국문학통사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9.10. 불교 · 도교 · 천주교문학천주교문학의 출현(1) 천주교의 등장- 서학 또는 천학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주교는 임진왜란 이후 중국을 왕래하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먼저 알려짐.- 이익은 천주교 서적을 자세하게 읽고 비판하는 글 을 썼음. 이익의 학통을 이은 남인 실학자들 사이에서 천주교에 관한 찬반양론이 치열하게 벌어짐.- 신후담·안정복은 배격론을 폈고, 권철신·이가환·이벽은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접근함.- 천주교 배격은 정조 이후의 정시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 정조가 이가환을 위시한 남인 소장학자들을 가까이하자 반대파에서는 천주교를 공격하면서 반격을 했음. 정조는 소극적인 탄압을 하는 데 그쳤으며, 천주교가 성행하는 까닭을 오로지 유학이 허해졌기 때문이라고 함.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쪽에서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를 공격하여 천주교 신도들을 대거 처형함. 그러나 천주교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음.(2) 천주교에 대한 가사1) 벽위가사- 천주교를 반대하는 가사- 작품: 이가환의 (이가환은 천주교 신도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지만, 비판자였던 시기에 를 지었음), 이기경의 2) 천주가사(또는 천주교가사)- 천주교를 전도하는 가사- 작품: 이벽의 , 정약전의 , 최양업의 (3) 천주교문학의 특징- 천주교문학의 본령은 천주교가사임.1) 최양업-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이 천주교가사를 짓는 일을 맡아 총 22편을 지었음. 국내 신도를 상대로 교리를 풀이하고, 믿음을 정비하는 방책으로는 가사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가사가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교리를 담은 표준교본이게 했음.- 를 불교가사인 과 비슷하게 서두를 꺼내놓음. 교리를 설명하는 용어는 달라도 즐거움과 괴로움을 감각적으로 구체화하는 방식은 불교가사와 크게 다르지 않음.- 천주교가 현실적인 문제와 얽혀 있는 양상을 다루거나 박해받은 체험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고 교리 해설에 충실함. ⇒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현명했다 할지 모르나 천주교문학이 가질 수 있는 의의는 스스로 한정하고 말았음. 천주교문학은 천주교가 일으킨 파문에 비해 아주 좁은 영역에 머물렀고, 잠시 동안 가사를 이용하다가 포교의 자유를 완전히 얻은 후에는 가사 이용을 버렸음.9.11. 한문과 국문, 기록과 표현대외 관계의 경험 보고(1) 조천록과 연행록, 그리고 일본 기행문1) 조천록- 명나라 기행문- 140여 종이 전함.가. 작품ㄱ. 김육의 - 명나라에 마지막으로 파견된 사신의 기록임.- 명나라에 가서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함.2) 연행록- 청나라 기행문- 290여 종이 전함.가. 작품ㄱ. 김창업의 -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차지하고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1712년(숙종 38)의 기록임.- 기강이 없고 모든 일을 뇌물로 해결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으며, 새로운 활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음.ㄴ. 홍대용의 - 청나라에 갔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사항별로 구분해서 작성한 사실 보고서임.- 사실 보고에 치중해 여행기다운 흥미를 갖추지 못했음.ㄷ. 홍대용의 - 청나라에 갔던 여행기로, 국문으로 쓰고, 일기체를 택했음.- 신변에서 일어난 일이나 개인적인 감회를 정감 어린 필치로 나타내, 국문을 즐겨 읽는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했음.ㄹ. 박지원의 - 기발한 표현을 개척해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경색된 사고방식의 허점을 풍자함.- 견문한 바를 적은 일기라고 하면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문장을 쓰고, 사실과 허구를 섞어놓고, 문학갈래 구분의 상식을 넘어서서 전에 볼 수 없던 기이한 작품을 만들어냈음.- 이나 같은 독립된 작품을 삽입하기도 함.- 문장 작법의 규범을 흔들어놓은 것이 문제가 되어,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키도록 함.3) 일본 기행문가. 작품ㄱ. 남용익의 - 일본에서 자신의 시를 얻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를 상대한 전말을 서술하고, 일본인들의 성품에 대해 평가함.ㄴ. 신유한의 - 시를 지어서 일본 문인들을 압도한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깊이 있게 관찰하고 서술하고자 했음.ㄷ. 조엄의 - 정사를 맡아 일본에 갔던 내력을 보고한 공식적인 기록임.- 김인겸의 가사인 와 좋은 대조를 이룸.⇒ 조엄은 김인겸이 자세하고 흥미롭게 묘사한 광경은 간략하게 처리하고, 외교의 절차에 대해서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 일본에서 주는 국서의 한문 문장이 잘못되었다고 시비한 대목이 큰 비중을 차지함.- 일본은 군신의 분별이 부절하고 풍속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함.(2) 중국과 일본 이외의 나라에 대한 기록1) 러시아가. 신유의 - 러시아인이 동쪽으로 진출해 만주로 넘어오는 것을 청나라 군사와 함께 물리치는 사건이1658년(효종 9)에 있었는데 그 경과를 보고한 기록2) 북해도 (→ 일본 홋카이도)가. 이지항의 - 1756년(영조 32)에 부산에서 영해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북해도까지 밀려갔는데 거기에서 아이누인의 구조를 받는 놀라운 경험을 한 후에 일본 여러 곳을 거쳐 다음 해에 돌아온 경위를 쓴 기록3) 유구가. 장한철의 - 1770년(영조 46)에 과거 길에 올랐다가 배가 남쪽으로 표류해서 유구까지 갔는데 그 내력을 다룬 모험담임.- 제주도 남쪽의 대해가 국제간의 교역과 쟁패가 벌어지는 안마당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충격을 전했음.국내 문제의 증언 술회(1)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 당시의 생각으로는 역사를 서술한 사서도 문학의 범위 안에 들었으므로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음.- 조선 후기에는 나 같은 공식적인 사서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다시 편찬하는 일이 없었음. 그 대신 이념이 흔들리고 시대가 달라지는 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안고 역사서술을 새롭게 하려고 고민하는 개인 저술은 많이 나타남.(2) 조선 후기의 역사 기록1) 위기가 닥칠수록 성리학의 지배이념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구현한 역사서- 노론 쪽 유계의 , 소론 임상덕의 , 남인 홍여하의 와 2) 우리 역사의 판도와 맥락을 새롭게 규명하고자 하는 역사서- 유득공의 , 정약용의 - 그러나, 실학의 역사학은 문제 중심의 고찰에 그치고 통사를 구성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음.3) 야사·잡록·야담- 역사의 개략뿐만 아니라 내막에 관한 궁금증이 커졌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다각도로 이해하고자 하는 요구도 확대되어 역사를 사사로이 서술하는 야사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개인의 기록인 잡록이 인기를 모으고, 이야기를 만들어 하는 야담이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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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통사_9_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 (9) 7p
    한국문학통사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 : 제1기 조선후기9.9. 가사의 다양한 모습사대부가사의 재정착(1) 사대부가사의 재정착- 전란이 거듭 닥쳐와 태평성대의 환상이 흔들리는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사대부는 문학의 기존 갈래 중 가사를 적극 활용하고자 했음.- 한시나 시조로 집약하기보다는 실제로 겪은 대로 말해야 했고, 산문으로 적고 말 수 없는 사연을 탄식을 곁들인 노래로 자세하게 나타내야 했는데 그러한 요건을 가사가 두루 갖추었음. 가사는 공식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 사태는 심각한데 생각이 따르지 못하는 것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음.(2) 사대부가사의 작가와 작품1) 와 - 전후의 복구를 힘써 하자고 다짐하는 가사로서, 먼저 주인의 노래인 에, 머슴이 주인에게 대답하는 노래인 가 뒤를 이었음.- 에서 나라를 위해 분발해야 일꾼은 조정 신하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다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머슴노래를 지었음.- 는 재상 이원익이 머슴을 대표해서 지었다고 함.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하자고 하면서, 서로 책임을 미루고 다투고 하는 풍토를 개탄함.2) 박인로- 당위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두고 깊이 고심해 전에 볼 수 없던 작품세계를 이룩함.- 와 : 전쟁가사. 나라를 근심하고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자 하는 마음을 뜨겁게 나타냄.- : 곤궁함을 노래함.3) 정훈- 전라도 남원 선비로서 많은 가사를 지음.- : 곤궁함을 노래함.(3) 가사의 보수적 풍조의 재등장- 전원에 은거하면서도 성현의 도리를 돈독하게 따라야 한다는 풍조가 시조에서처럼 가사에서도 다시 등장함.- 은일가사가 사대부가사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구실을 함.- 차천로의 , 김득연의 , 조우인의 ··(← 정철의 ··을 각기 재현한 작품)유배와 여행의 체험(1) 유배가사1) 특징- 유배가 부당하다고 항의하고 복귀를 염원하는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 기본 내용임.- 갑작스럽게 뒤바뀐 상황을 설명하고, 죄인의 초라한 행색을 하고 낯선 고장을 여행한 경험을 실감나게 전하는 것을 긴요한 과제로 삼았음.- 사대부가사의 고정된 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법을 개척하는 작업을 은일가사에서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했음.2) 작품- 송주석의 , 김춘택의 , 이진유의 , 안조환의 , 김진형의 (2) 기행가사1) 특징- 농업사회에서 여행을 하는 기회가 흔하지 않았기에 모처럼 여행을 해서 견문을 넓히면 대단한 일이라고 여겨 시문을 남기는 것이 관례였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회의 동요와 함께 여행의 기회가 확대되어 견문가사 또는 기행가사라고 할 것들이 많아지고 내용도 다양해졌음.- 기행가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이름난 산수를 찾아 지은 작품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금강산 기행가사였음.2) 작품가. 금강산 기행가사- 박순우의 , 박희현의 , 이상수의 - 작자 미상의 ···(는 유람을 한 행로, 일정, 경치 등에 관해서 자세하게 보고하고, 도중에 만난 하층민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음. 정철의 을 인용하고 있으면서 관점이 달라진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음.)나. 제주도 기행가사- 정언유의 다. 표류의 경험을 담은 가사- 이방익의 라. 사행가사(使行歌辭)- 유명천의 , 박권의 , 김지수의 , 김인겸의 9.9.5. 교훈가사의 모습(1) 교훈가사- 사람이 지켜야 할 행실을 가르치는 가사- 이황·조식·이이가 지었다고 하는 작품이 많지만, 출처가 불분명하고 격이 많이 떨어져 의심스러움.- 교훈가사의 독자는 한문은 모르고 국문을 읽을 수 있는 하층민임.- 교훈가사는 권통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음.1) 작품가. - 15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처지와 사고방식이 다른 여러 사람의 다양한 삶의 특색을 각기 서론 다른 문체로 그려냄.달라지는 사회상(1) 풍속가사(또는 세태가사)의 등장과 특징- 그림에서 풍속화가 등장하는 시기에 풍속가사 또는 세태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남.- 상층에서 하층으로 전해지는 교훈가사에 맞서서 하층의 반격을 보여준 가사가 세태가사임.(2) 세태가사의 작품1) - 한산거사라고 하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작자가 1844년(헌종 10)에 지음.- 조선왕조의 왕도가 장사꾼의 도시로 바뀌어 전에 없던 활기를 띠게 된 변화를 선명하게 나타낸 내용임.2) - 백성들의 고초를 낱낱이 들고 신랄하게 비판한 사대부의 작품임.3) - 1837년(헌종 3)부터 5년 동안 거창부사였던 실존인물 이재가의 학정을 비판한 가사임.- 수령의 횡포 때문에 수난을 당한 사대부의 작품임.규방가사의 전형과 변형(1) 규방가사(또는 내방가사)1) 개념- 부녀자들의 가사2) 등장- 사대부 부녀자들이 가사를 짓고 베끼고 읽고 하는 데 열의를 가지는 풍조가 18세기 이후에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3) 작자- 작자가 반드시 여자인 것은 아니고, 남자가 지은 작품도 작자가 잊혀진 채 규방가사로 편입될 수 있어, 규방가사는 수용자를 기준으로 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함.4) 역할- 부녀자들이 국문을 익히고 교양을 쌓고 심정을 토로할 수 있게 하는 구실을 맡았으며, 소설보다 격이 높다고 인정되어 보수적인 지역에서 더욱 인기가 있었음. 한편으로는 욕구와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해서 성격이 단순하지 않음.5) 특징- 시조가 풍류라면, 가사는 교양임.6) 종류가. 계녀가- 시집가서 해야 할 행실을 가르치는 규방가사나. 경축가-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짓는 규방가사다. 풍류가- 놀이를 즐기는 감회를 나타낸 규방가사라. 자탄가- 신세타령을 늘어놓은 규방가사7) 작품가. 허초희의 와 - 규방가사의 선구적인 작품임.나. 와 - 화전놀이에 대한 규방가사- 화전놀이를 하고 가사를 짓는 풍속이 정착함.다. -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온갖 노력을 해 가문을 일으킨 사연을 딸에게 들려주고 교훈을 삼도록 한 내용- 계녀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으면서 중간 대목은 자탄가라고 할 수 있음.- 고난을 이겨내고 극복한 훌륭한 행실을, 함부로 굴다가 부잣집을 떨어 먹는 괴똥어미의 몰락상과 대조시켜 서술해 더욱 흥미로움.라. - 무식한 말투로 하층민의 처절한 수난을 그림.- 사대부 부녀자들의 규방가사를 본떠서 변형시키는 수법을 써서 하층민의 반발을 나타냄.- 화전가를 짓는다 하고서 모두들 즐기는 광경을 서술하다가, 거기 모인 사람들은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내놓았음.- 반역의 작품이 나타나 규방가사의 의의가 더욱 확대되었음.애정가사의 양상(1) - 애정가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줌.- 사랑하는 님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말함. 작품 외적 세계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하지 않고 작품 내적 자아를 확대해 서정적 성향이 두드러진 가사가 되어, 가사를 해체하는 길로 나아갔다고 할 수도 있음.- 도시경제의 발달과 함께 이해관계에 따라 재구성되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통적 유대관계에서 단절된 개인이 출현해 새 시대의 목소리를 들려줌. 지금까지 통제되던 정서를 마구 분출하는 낭만적 감상주의의 청 징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도 있음. → 그 전통이 1920년대까지 이어져 시민문학의 한 주류를 이루었음.(2) , , - 여승이나 기혼자 같이 정상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상대를 설정하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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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 | 2026.08.01 | 7페이지 | 3,000원 | 조회(11)
  • 한국문학통사_8_중세 후기 문학 - 제2기 조선 전기 (9)-(11) 6p
    한국문학통사8. 중세 후기 문학 : 제 2기 조선 전기(9) 산문의 영역 확대역사 서술의 양상에는 조선 전기까지 이룩한 한문학 작품을 종류에 따라 나누었는데, 서두에 사, 부, 그다음 시를 형식에 따라 분류하고 그다음으로 문을 실었다. 중세의 문학관은 시를 특히나 존중하였다.산문에 포함되는 종류의 글에 규칙을 맞추지 않은 사는 오랜 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 체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사서는 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다시 정리해야 하는 논란과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정도전의 에서 세종이 방향을 지시한 로 다시 김종서의 까지, 새 시대 정치이념에 대한 견해가 엇갈려 앞 시대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이 복잡해진 것이다. 열전은 왕권강화기의 사고방식을 나타내고 있으나 하층민은 효자나 열녀로 평가될 수 있는 경우에만 등장시켰기에 내용이 풍부할 수 없었다. 에서는 윤관이 여진을 정벌한 사건 하나를 자세하게 다루었다. 에서도 묘청의 난을 평정한 사건을 자세하게 취급했으며, 에서는 특이하게도 김방경을 신이한 영웅으로 받드는 구비전승을 적극 수용했다. 평양조에서는 단군부터 고구려 건국까지 신비한 역사를 한 맥락으로 연결했던 를 인용하였고, 권람은 에서 상고사를 되찾고자 하였다. 역사편찬에서는 고대에서 고려까지의 통사를 정리한 성과가 으로 집약되었다.사서는 당대의 여사를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아무도 볼 수 없게 하여 자료의 객관성을 입증하고 후대의 준엄한 평가를 의식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동아시아 공동의 관습을 조선 왕조가 가장 철저히 지켰다고 평가받는다.잡기의 모습잡기는 에서 까지 소급될 수 있다. 서거정은 를 서술해 시화와 잡기가 분리됨을 보여줬다. 는 역대의 한시에 대한 비평적인 논의와 일화를 만들었고, 는 역사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례를 찾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탰다. 성임은 국내외의 기이한 이야기로 를 편찬하였고, 그의 아우 성현은 많지 않은 분량으로 잡기의 영역을 확대할 만큼 다양한 내용의 를 지었다. 잡기는 태평성대에 흥미를 다루는 것을 관례로 삼고, 저자의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불만을 토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이미 집권한 훈구파에 시비를 걸기 위한 편법으로 잡기를 택하였다. 대표적으로 남효온은 주위의 인물이 부당한 평가를 받는다고 항변하기 위해 와 을 지었다. 김정국의 과 이중열의 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희생자들의 변호를 위한 작품이다.일기는 잡기의 이웃 영역이다. 이자는 에서 당대의 사건을 날마다 기록하였으며, 본격적인 일기는 이문건의 라고 할 수 있다. 유희춘의 는 조정의 일과 민간의 풍속, 사생활도 함께 다루었고, 이이는 에서 조정의 일을 기록하면서 도리로만 잣대를 세우는 날카로운 비평을 하였다.기행문은 잡기나 일기보다 성장이 더디게 이루어졌다. 김정의 은 기행문학의 성향을 크게 바꾸어놓기도 하였다. 외국여행의 기회가 고려시대보다 줄어들어 여행기도 흔하지 않은 편이었다. 신숙주의 , 최부의 이 대표적이다. 잡기류 가운데서 조신이 지은 은 일본과 유구의 지리와 풍속에 대해 서술을 다시 했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견문기행문을 T는 관습도 나타났는데, 대표적으로 정사 격인 소세양의 조카인 소순의 가 있다.가전체와 몽유록조선시대에는 작자가 지지하는 쪽에 섰다가 희생된 인물을 변호하기 위해 전을 쓰는 것도 새로운 풍조로 떠올랐으며, 김시습의 에서처럼 중국의 역사상 인물의 생애를 들어 당대의 시비거리에 관한 주장을 펴는 방식도 유행했다. 사물을 의인화해서 전기를 서술하면서 뜻하는 바를 이면적 주제로 제시하는 전례를 계승하는 데는 어떤 제약이 따르지 않았으나, 탁전이나 가전은 다채롭게 창작되지 못했다.이첨은 종이를 의인화한 을 지어 그릇된 정치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정수강은 에서 지조를 지키는 선비의 자세를 그려 위안을 삼고자했으며, 송세림의 은 남성 성기를 얼굴 붉고 성질 사나운 장군이라 설정한 가전이다. 그 뒤, 심성을 의인화한 작품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대부의 사고방식이 내면적인 원리를 존중하는 단계로 넘어간 전환과 상응한다. 그 예로 김우옹의 과 임제의 가 있다.몽유록은 꿈에서 겪었다는 일을 적은 기록으로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 일정한 구조를 갖춘 문학 갈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남효은의 가 대표적이며, 심의의 는 몽유록이 정착되도록 하는 데 긴요한 구실을 하였다. 에서는 방외인과 상통하는 취향을 나타내었다. 신광한의 과 도 삼자를 몽유자로 내세워 허구적은 설정을 덧보탰다. 최현의 은 역사상의 인물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는 심의나 임제의 전례를 따랐으나 영남 사림파의 전통을 옹호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았다.골계전서거정의 에서 시작되는 골계전류는 대체로 보아 전설이 아닌 민담을 모으고 그 가운데서도 음담패설에 특히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수록하지 않아 품위를 유지하였다. 강희맹은 에다 음담패설을 서슴지 않고 넣었다. 에서는 민요를 채록하고 민담까지 찾아 하층의 전승을 받아들였다. 송세림은 을 지었는데, 유학이 교하에 대해서 거칠게 반발했다고 할 만큼 원색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성현의 는 인물전설이나 음담패설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설화가 적지 않게 들어있다. 자기의 지체에 구애되지 않고 종과의 사랑을 이루려는 인생의 의지와 종은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습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부딪쳤다. 세력다툼에서 안생이 패배하고 말았지만, 사랑은 신분의 차별을 넘어선다는 주장이 패배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긍정되었다.국문을 사용한 편지와 제문조선전기에는 의 체계로 문학의 규범을 확대하려 했지만 문학의 영역을 확대하고 표현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요구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동향이 있었다. 국문은 부녀자들의 편지글이나 제문에서는 널리 이용되었고, 국문이 필요 없었던 남성들과 달리 국문은 여성들에게 꼭 필요했으며, 여성을 위한 글이 되었다.1433년 묘단이라는 궁녀가 쓴 언문편지가 기록에 최초로 올랐다고 본다. 또한 왕족 집안 부녀자들도 언문편지를 쓴 일이 실록에 올랐는데, 제안대군의 아내가 시비와 동성연애를 하고 언문편지를 써준 일이 있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의견을 언문편지로 써서 전했다고 한다. 인종비 인성왕후도 왕이 세상을 뜨며 남긴 유서를 언행에 관한 기록과 함께 조정에 전했다고 한다.그러다가 최근에 국문으로 쓴 편지와 제문이 이장하는 무덤에서 발견되는 일이 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언어의 사용 양상을 다각도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10) 소설의 출현소설의 개념과 특성소설의 시작은 김시습의 이라고 하는데 진정 그러한지, 알기 위해서는 소설의 개념을 알아야 하고, 그 오랜 용어를 알아보아야 하는데, 대단치 않은 잡스런 글을 지칭한다. 소설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부터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흔히 전기라고 불렀지만 현대에는 전기 소설로 일컫는 것을 보아, 소설은 작품이 될 만하게 기록한 서사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 소설사는 한층 앞당겨질 수 있지만 전기소설과 이후 소설을 구별해야하고, 근대소설은 유럽에서 받아들인 것이 된다. 따라서 세계소설사 일반론을 새롭게 마련하는 작업을 선도하면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소설은 설화와 구별되면서 자아와 세계의 상화 우위에 입각한 대결을 소설의 기본 특징이라고 보아, 가 최초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중세 후기에 머물렀던 우리나라에서 불행하고 고독한 생애를 보내며 비판의식이 투철했던 김시습은 사상의 각성을 통해 근대로의 이행기에 요구되는 자아와 세계의 분열과 대결을 절감한 것이다.김시습의 과 은 지어 원귀가 된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간절한 소망을 꿈속에서 이루는 설정이다. 에서는 , , , , 로 설화에서 소설로 넘어가며 주목할 변화가 일어났다.나 에서는 사랑의 절실한 요구를 강조하고 사랑을 성취할 수 없다는 비극을 나타내고, 전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증거는 되도록 배제했다. 에서는 주인공의 포부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가상적 설정을 하였다. 은 이별, 죽음, 난리 때문에 겪은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명혼소설의 구조를 적절히 이용했다. 는 꿈의 시작과 끝을 불분명하게 해서 미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에서는 현실에서는 패배자가 되더라도 자기대로의 의지를 굳히고 세상의 횡포를 거부하겠다는 자세를 나타내었다.그 뒤의 소설를 지은 김시습의 다음으로 소설사의 발전을 이룩한 사람은 17세기 초 허균이다. 또한 성현의 는 비록 그가 들은 것을 집필한 것이지만 그 형식이나 소재가 소설과 유사하며, 주인공의 이름을 따 제목을 지은 것에서 소설로 논의될 수 있다. 채수가 16세기에 지은 도 소설의 명맥을 이었다고 보며, 근래에 국문본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아 원래 국문본을 베꼈다고 추정되며, 구개음화가 일부만 일어난 것을 보아 임진왜란 전후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광한의 에도 소설이라 할 것이 들었는데, 이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1553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지금까지 온전하게 전해진다. 와 이후의 소설에 관해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으나 금오신화보다 나아갔다고는 할 수 없다. 이후 김황과 고상안이 최치원의 전설을 작품화 한 과 를 국문으로 옮긴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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