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통사7. 중세 후기 문학 : 제1기 고려 후기(4) 민족사 재인식의 시대사실의 역사가 아닌 해석하는 역사문학은 크게 봐서 에 대한 반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역사문학은 기존의 관념을 극복하며 국풍을 다시 강조하였으며, 음악에서 속악을 재인식한 움직임과도 관련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의 사대부가 비판적인 의식과 문학적인 역량을 갖추고 벼슬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며, 불교계의 새로운 동향 또한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이규보의 은 고대의 영웅서사시를 재현한 작품으로, 중국 중심주의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의식을 떨치고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고장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중세보편주의를 독자적으로 구현하면서도 영웅서사시이자 민족서사시를 내놓은 것이다. 무신란을 겪고 귀족문화의 기반이 무너지자, 의식에서의 질곡을 깨고 민족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자는 결단을 문학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영웅서사는 의 사관과 표현양면에 걸쳐서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작품의 구성이나 규모부터 영웅서사시에 적합하게 되어있다. 시로써 미처 다 나타내지 못한 사실을 밝히고 필요한 자료를 보태는 구실을 하는 주를 시에 단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화엄종의 승려이자 고려 전기 귀족불교의 체질을 이었던 각훈의 은 승려들의 전기집으로, 개인이 중요시되고, 서술방법도 자유로워 상상에 의한 표현을 쉽사리 허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는 불교를 비판할 때나 관심 있게 다루었으며, 열전에 승려의 저기는 하나도 포함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각 인물의 전기 말미에 찬을 붙인 것을 보면 유학의 경전을 바로 인용하거나 유학에 입각한 교훈을 말한 대목도 더러 있으며, 인물을 다룰 때는 서두에 총평을 두어 출신과 활동을 요약하고 훌륭했던 점을 서술하였다. 비록 저자의 견해이지만 표현을 잘해 설득력을 확보하였다. 본문 뒤의 찬은 고정된 격식으로 붙어있고, 찬을 시로 지어서 내용을 더욱 심화하고, 독자가 감명 받을 수 있게 했다.일연의 는 고려 후기 역사문학에서 가장 뚜렷한 위치를 차지일연은 불교를 기층문화의 전반적인 양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다루고자 하였으며, 민중생활과 밀착되어 생동하는 구실을 해온 것을 위해 불교설화의 풍부한 상징성을 적극 활용했다. 또한 중국문화에 비할 바 없이 광대한 영역에 걸쳐 불교가 발달했음을 입증하고 우리나라의 땅이 ‘불국토’라고 주장하였다.는 완성된 체계 같은 것을 거부했다. 고승의 행적을 다룬 끝에는 고승전의 전례에 따라 찬을 붙여놓았다. 그러나 찬이라도 결론 적인 마무리라기보다 다양한 이해의 가능성을 서정시로 덧보탠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민족문화의 내용이 최대한 손상되지 않는 선에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꾸밈이 없으면서도 현실과 근접한 정신세계를 수립하고자하면서 한쪽으로는 우리말에 가까운 한 시문으로 직감적이면서도 절실한 체험을 살리고자 한 것이 각기 신유학과 선종을 지표로 택한 고려 후기 지성이 얻은 문체가 발달되었다.와 그 이후의 작업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역사를 읊은 영사시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사의 연원과 주체성을 찾고자 해서 단군의 사적을 서두에다 내세운 영사시를 지은 것이다. 상권에서는 중국역사를 다루었고 하권에서는 동국 역사를 민족사를 재인식 하자는 의도로 구현하였다. 고려의 건국신화를 서두로 삼아 성스러운 출발을 강조면서 임금이 바뀔 때마다 치적을 정리해서 고려사 개요로 삼았다. 또한 발해사를 다룸으로써 에 비해 진취적이었으나 그 외에는 사실 요약에 그쳤다고 평가받는다.원나라로부터 고려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국사를 정비하였던 이제현은 자기 시대의 문제의식과 깊이 연결되면서 체제와 서술을 제대로 갖춘 고려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그는 백문보, 이달충과 함께 기년전지 편찬 착수하였다.(5) 사람의 일생 서술 방법관심의 내력서사문학(설화·소설)과 교술문학(전·전기)에서 사람의 일생 다루는데, 고대에 설화, 중세에 전, 근대에 소설 득세하였고, 중세 후기는 전이 득세하여 서사문학에 대한 교술문학 승리하였다. 열전은 역사와 문학의 거리를 다시 좁히면서 사람의 일생에 대하지 않았다. 친근하고도 자상하게 늘어놓을 여유를 가지며, 서사적인 표현도 삽입할 수 있다. 문장가라면 묘지를 말아서 쓰는 풍속이 고려 후기에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의 이제현의 묘지가 좋은 예이다. 그렇다고 행장이나 묘지가 바로 ‘전’은 아니다.비·지·전·장의 특성비는 돌을 세워 사람의 생애를 새겨놓는 비문으로 문학작품다운 면모가 가장 적다고 할 수 있다. 이른 시기에 국가의 위상을 드러낼 때는 한문학의 정착과 발달에 큰 기여를 했으나 사실전달에만 충실하게 되면서 작품으로 평가할 의의가 사라졌다.지는 죽은 사람의 내력을 돌에 새겨 무덤에 넣는 글이다. 앞에 산문으로 된 서가 있고 뒤에 율문으로 된 명이 있는 것이 비문과의 공통점이다. 둘을 아울러 묘지명이라고 한다.전과 장은 각각 전기와 행장의 다른 말이다. 인물의 행적을 종이 위에 기록했다는 점은 같으나 전은 작자의 뜻을 내보이는 작품인 반면 행장은 정해진 규칙과 격식에 따라 인물을 소개하는 틀을 따른다는 점이 다르다.전의 작품세계전은 특정 인물의 행적을 글로 적어 알리거나 후세에 전하자는 의도에서 쓴 글이면서 작자 자신이 자기표현을 위한 소재로 그 인물의 행적을 택한 것이기도 하다. 의 에서는 내력을 통해서 서술한 것으로서, 그 집안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리는데 목적을 두었던 서사시적 규모의 가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이숭인의 은 김진양을 다룬 전으로 그가 지닌 내면의 생각에 대해서 작자가 가장 친한 벗으로서 깊이 공감한 바를 정겨운 말로 엮어서 나타냈다. 열전에서는 김진양이 조준과 정도전 일파를 규탄한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었으며, 여자의 행실을 다룬 , 에서는 고려 말 전란의 지속됨 속에서 살아서 쉽게 말할 수 있는 정절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다면 전을 지었다. 은 벼슬을 해서 지방관장을 역임한 인물의 전이다. 등의 이색은 전을 가장 많이 남긴 사람으로 전이 문학작품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탁전은 작자 자신의 전을 가상적인 인물에 의탁해 지었는로를 높이고 찬을 붙여 자신을 높였다. 그는 글을 짓는데 누구보다 열의를 보였으며, 작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기풍을 타파하기도 하였고, 자기의 문학이 세태를 추종해서 영달을 꾀하자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다짐했다. 최해는 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자학에 가까운 말까지 하면서, 출세를 위한 공부를 거부하였다.가전의 위상가전은 사물을 의인화해서 사람인 듯이 다루면서 그 일생을 전으로 서술한 글로,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유래와 쓰임새를 구체적인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고자 했다. 사물을 의인화해서 사람과 전혀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했다.임춘의 과 은 구체적인 사물과의 일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처지를 나타내는 방법을 사용면서 작자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세상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었다. 이규보의 은 동물을 의인화한 것으로 고사 열거는 줄이는 대신에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임춘은 어려운 처지에서 궁벽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갔다면, 이규보는 폭 넓은 문제를 여유 있게 다루면서 자기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혜심의 삶의 의미를 구체적인 데서 찾자는 주장은 지눌이 직지인심을 역설 했던 노선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과 은 각각 대나무와 얼음을 의인화하여 죽존자나 빙도자의 덕을 납득할 수 있게 칭송하고, 고사의 장황한 열거는 피한 것이 특징이며, 두 사람의 덕을 칭송하는 게송을 각기 첨가했다. 은 대나무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열거했다. 이첨의 종이를 소재로 다룬 도 있다. 은 식영암이라는 승려의 작품으로 지팡이를 등장시켰는데, 형식부터 다른 작품들과 다르며, 꿈속에서 있었다는 일이니 몽류록과도 상통한다. 다른 가전에서 볼 수 있는 사신의 평 같은 것과도 아주 다른 격식을 가진다. 가전이 지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선문답 같은 내용을 지니게 되었다.가전은 차차 관습적인 갈래가 되어 주제의식이 첫 번째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가전이 생겨나자 여러 사람이 써보았으며, 의인화의 대상으로 삼은 사물도 점차 늘어났다. 조선시대로 승되는 것만이 아닌 민간에서도 음악, 춤, 놀이, 노래가 그것대로의 생동하는 구실을 하며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기층문화와 상층문화를 별도로 이룩하고 관계를 적절한 이념에 따라 체계화 하고 제도화하고자 했다. 악지에서는 악을 아악, 당악, 속악으로 나누었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것은 당악이고, 국내에서 생긴 것은 속악이다. 아악, 당악, 속악이 병존하는 현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시작되었는데, 고려 전기에는 지배체제를 정비하면서 아악이 강화되었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격식을 아울렀다.당악정재란 임금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춤과 노래로 잔치의 흥을 돋우는 것을 통칭하는데, 고려 속악가사는 궁중의 악곡이고, 잔치를 벌인다든가 하는 기회에 당악정재와 대칭되는 속악정재를 공연하면서 불렀다. 우아한 기풍은 버리다시피 했고, 남녀의 사랑을 숨김없이 다룬 것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속악가사는 하층문화와 관련이 있어 민요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층문화의 속악정재의 공연방식에 따라 개편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다.를 비롯한 굿 노래는 신라에 생겼으며, 춤과 놀이까지 갖춘 복합체인 동시에 굿으로서의 기능을 지닌 굿 노래이다. 신라 헌강왕 당시 처용굿은 처용놀이를 하면서 몽고 침략의 격퇴를 기원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에 수록된 것을 보면, 장 또는 연의 구분이 발견되지 않고 민요에서 기본 형식의 하나일 수 있는 것이 표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처용을 신으로 섬기며 재앙을 물리치는 권능을 회복하도록 기원하는 무가 속에 등장하는 신격과의 대화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런 노래는 원래 민간에서 무당이 부르던 것인데, 궁중에서도 굿을 하며 무당놀이를 즐기게 되면서 속악으로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의 노래와 놀이은 계절의 순환이 정서변화와 밀착되고, 보름을 숭상하는 관습에 따라서 노래 사연을 마련하는 관습은 농경문화의 저층에 근거를 두고 민요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냈다. 자연을 노래하면서 인생살이를 문제로 삼았으며, 특히 속악가사 에는 궁중 정.
한국문학통사6. 중세 전기 문학 : 제2기 고려 전기(5) 설화와 역사의 사이민간전승의 저류고려의 통치체계와 이념이 정립되자 설화는 초경험적인 영역으로 분류되어 이론불교에서 거부당하고 유학에서도 비판받았다. 귀족문화를 확립하면서 하층의 움직임은 관심의 대상 밖이었고, 이에 설화의 민간전승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자료들로 하여금 저류를 짐작할 수 있다. 민간신앙을 살펴서 민심의 동향을 파락하는 것은 중세 통치자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려 전기 의종이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정자나 역사처럼 행인이 많은 곳에 붙어있는 시를 기록해오라는 명을 내려 풍요와 민물이 잘되고 못되는 바를 살피려 했던 기록이 있다. 보고된 시는 한시이지만 백성들의 생각을 전하기 때문에 풍요라고 인정하였다.화풍과 국풍성종이 화풍을 즐겨 따르자 이지백이 나라의 보존은 위해 팔관회를 다시 시행하고 선랑을 두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화풍은 중국 전래의 문화규범이고, 국풍이 민족문화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화풍과 국풍을 함께 발전시키려 했지만 광종 때 개혁을 거치면서 균형이 깨졌다고 본다. 더군다나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외교를 위한 화풍과 진취적인 기상의 국풍 사이에서 접함점을 찾지 못하고 논란은 극에 달아 김부식과 묘청의 대결까지 이어졌다. 이에 문벌 귀족이 승리하게 되고 역사서술을 통해 정통 수립을 하고자 ‘삼국사기’를 저술한다. 상층 세력은 명분과 도리를 갖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였으며, 기존 체제에 문제점을 제기하고 불만을 가지고 있던 상층 세력은 설화를 계씅하며 민족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고려도경’의 사우 대목에서는 숭산묘, 동신사, 합굴룡사, 오룡모의 민간전승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 전기 역사서에 기록된 역사는 대부분 설화와 가깝다. 가락국의 역사를 저술한 ‘가락국기’는 민속이나 설화를 대폭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수이전’은 전승된 설화를 다양하게 엮어놓았으며, ‘편년통록’은 고려 건국의 신화적 내력을 전하고 있다. 또한 구체적인 내용 확인은 어렵지만 ‘고금록’과 ‘해동비록’을 통해 그 당시의 비정통적인 자료나 전승을 수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이단적 역사관을 청산하고자 하여 역사를 확립하고자 ‘삼국사기’를 저술하였으나 고려 후기에 ‘동명왕편’과 ‘삼국유사’가 모습을 드러내 ‘삼국사기’에 대한 반론을 펼쳤다.비범한 인물의 탄생고려는 국가를 통치하는 과정에 신화를 청산해나갔다. 영웅전설이 지닌 설득력에 기대지 않고 중세국가의 통치 이념을 이룩하려 한 것이다. 평범한 인물들이 신화적 요소를 지닌 영웅전설은 민중영웅을 떠올리는 특징이 어떤 인물과 결합하는 것이다. 최응은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과 삼국 통일까지 이룩한 인물로 아기장수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균여는 영웅의 일생 중 서두만을 갖추고 있으며, 신이한 사연이 함께 있어 고전적인 영웅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한 면모가 엿보인다. 강감찬의 자료를 보면 민중영웅을 내세우는 전승과 새롭게 나타난 화풍의 상상이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층에서 계승되던 설화의 맥락이 개입되어 있지만 귀족 문화가 뚜렷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균여전’은 신비한 설화를 근간으로 개인의 전기와 불교, 유학 양쪽의 시각이 합해져 설화, 역사, 문학, 사상이 조화롭게 관계를 이룬 저술이다. ‘균여전’, ‘가락국기’, ‘수이전’ 모두 민간전승이 고려 전기 고급문화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의의가 있다.‘가락국기’문종 때, 김해지방 수령이 지은 ‘가락국기’를 일연이 를 편찬하면서 그 개요를 수록했다. 역사서이지만 문화의 총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가락국기’는 다양한 자료를 모은 책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정한 주제에 따른 통일적 서술을 갖추지는 못했다. 건국서사시라면 갖추어야 할, 규모가 큰 사건이나 웅대한 기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수이전’누가 편찬한 책인지 언제 편찬된 건지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저술했다고 추정되며, 새로운 ‘수이전’은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박인량이 원본을 보완한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수이전’은 김척명이 한차례 개작했을 것으로 ‘수이전’은 여러사람이 오랜 기간 다듬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해동고승전’, ‘대동운부군옥’등 다른 책에서 ‘수이전’을 인용한 것이 고작이며, 최치원에 관한 이야기 한 편만 분량이 있다. 모든 ‘수이전’은 주인공의 성격과 신분이 다양하지만 기이한 행적을 보인다는 것이 공통점이다.‘삼국사기’설화와 역사를 구분하면서 설화를 역사를 위한 자료로 필요 범위 내에서 사용하였다는 것이 타 저술과의 다른점이다. 상하층의 문화관계에 있어 민간전승에 기반을 둔 하층문화의 개입을 줄이고, 상층문화가 국가의 규범으로 확립되어야함을 주장했다. 또한 사실 위주의 역사가 부각되고, 거기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중세 보편주의를 중국과 대등하고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한 것을 통해 신라 정통론을 확립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라에서 기반을 닦은 유학이나 한문학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며, 문벌귀족의 문화수준을 자랑하고자 하였다.문학적인 측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열전이다. 열전은 민간전승까지 끌어들인 설화적 서술이 더욱 많았는데, 다양한 인간상을 등장시켜서 세상살이를 다각도로 흥미롭게 보여주었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김유신으로 역시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로 이루어져있다. 을지문덕과 박제상, 바보온달, 설씨녀, 창조리, 개소문 등 다양한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 도미는 하층민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횡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드러내며 중요 인물로 다루고 있다.‘삼국사기’는 겉과 속이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데 지배질서와 어긋나는 내용을 적지 않게 싣게 되었으며, 설화를 소재로 전기를 지어서 싣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문장도 격식만 차리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미천한 인물의 생활을 박진감있게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된 이유는 현실을 인식한 김부식이 현실을 생동감있게 담아내면서 한편으로는 다면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정치인이나 이념담당자와 작가로서의 자아가 부딪치면서 폭이 넓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6) 고려 전기 귀족문화의 결산예종 시절의 풍류예종은 문학적 역량이 뛰어났었기 떄문에 이규보는 예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작품을 모아 ‘예종창화집’을 편찬하여 예종의 솜씨를 찬양했다. 예종이 시와 풍류에 젖어든 까닭은 문제의 소재를 파악했어도 해결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고민의 발산으로 본다. 또한 예종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는데, 태조를 위해 목숨을 버린 공신을 추모하는 ‘도이장가’를 집필한 것도 그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예종은 스스로 시인 노릇을 하며 처사의 문학을 동경하였고, 노장 사상과 선종에 호감을 가졌다. 예종이 도교 사원을 짓고 도사를 드렸음을 ‘고려도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곽여는 예종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문인으로 처사를 자처하였다. 한번은 예종이 곽여를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자 ‘하처낭만주’를 남기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자현도 곽여와 비슷한 경우이다. 사촌 이자겸은 득세를 하던 당시 은거하며 자취를 감추었고 예종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자현과 곽여도 친분이 있었음을 둘 사이에 오고 간 ‘증청평이거사’를 통해 알 수 있다.동조자와 비판자박호는 예종 때 학사노릇을 했던 문인으로 왕조의 위엄을 빛내고 국왕이 하는 일을 찬양하였다. 국왕이 하는 일이 훌륭하다며 남긴 글 중 하나가 ‘하팔관회표’이다. 박호는 이자현과 깊은 관계였으나 은둔하는 대신 지공거가 되었다. 최약은 예종이 도가적 취향에 빠져 놀이만 일삼자 마땅하지 못하다고 직언했던 인물로 유학에 입각하여 도를 명확하게 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밖으로는 현실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방책을 세우며, 안으로는 올바른 도의를 온전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려 후기에 나타날 도학과 성리학의 성향에 따른 위기를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극영의 비판은 뵈약보다 더욱 절실했다. 정극영은 임금에 대한 정중한 예를 갖추면서도 백성들의 상황을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 품위 있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데만 급급했으며, 결국 여러 난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를 통해 병든 고려의 시대가 가고 새 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격동의 와중에서이자겸의 난이 정리되자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 세력인 개경파와 서경을 기반으로 삼은 신진세력인 서경파의 대립이 생겼다. 김부식 일파는 문벌귀족의 기존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에서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서경파는 하층민과의 유대를 되찾고, 자주적인 노선을 천명할 것을 주장하였다. 서경파는 고구려 정통론을 내세우고 자주적인 기상을 드높히며, 민간신앙가 깊은 관련을 가진 민중불교를 택했다. 하지만 개경파는 신라 정통론을 재확인하고, 사대의 의의를 강조하며, 귀족불교와 제휴한 유학으로 이단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다.이자현의 조카인 이지저는 서경을 찬미하는 방식으로 중국 전래의 춤을 추고 놀이를 할 때 부르는 구호나 치어를 여럿 지었다. 또한 ‘서도구호’에서 서경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찬양하며 서경천도파의 주장에 동조하였다.윤언이는 윤관의 아들로 문벌귀족이었으면서 이자겸이나 김부식과는 다른 입장을 가졌다. 대외 관계에서 자주적인 방침을 주장했으며, 김부식 일파의 횡포를 제어하려 해서 서로 반목하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자신이 지은‘대곽국사’를 김부식이 함부로 고쳐 앙심을 품기도 하였다. 또한 정지상과 함께 인종에게 정치개혁을 진언하면서 서경천도파의 노선에 동조하면서, 문벌귀족의 발호 대문에 병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주노선을 택하고 내부적 혁신도 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저술로는 ‘주역’을 풀이하는 ‘역해’와 인종에게 올린 글인 ‘광주사상표’최자에 의해 ‘보한집’에 소개된 게송이 있다.
한국문학통사5. 중세 전기 문학 : 제1기 삼국·남북국시대(6) 연극의 자취를 찾아서중세의 굿·놀이·연극굿, 놀이, 연극은 원시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대에 이미 뚜렷한 모습을 보였다. 마음에 지닌 사연을 행동으로 나타낸다는 점이 굿, 놀이, 연극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굿은 사람이 아닌 것과 사람의 갈등을 주술로써 해결하자는 목적 달성을 위한 행사로 엄숙해야하며, 즐거운 놀이가 복합되어 있기도 하다. 놀이는 화해와 단합을 꾀하고 정해진 공동의 절차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화랑도와 다른 하층의 놀이패가 따로 있었다. 상층문화가 중세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고 국중대회의 유산은 하층에서 마을굿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민속극이 시작되었다. 민속극은 굿, 놀이, 연극의 복합체로 상층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서 생기를 찾게 되었다. 중세에는 굿의 구실이 축소되고 종교가 더 긴요한 것으로 부각되었으며 불교는 재래의 주술도 이용되었다. 굿, 놀이, 연극의 복합체를 대신해서 종교, 철학, 주술의 복합체가 커다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유교 이념에 따라 예악을 정비하게 되자 굿과 복합적으로 행해지던 놀이는 놀이만으로 그치게 되었다. 함께 어울리던 전통 대신에 관람객의 입장으로 놀이패를 바라보게만 된 것이다. 굿과 연결되는 굿에서 발생된 농악대의 굿에서 탈춤이 생겨나고, 무당의 굿에서 무당굿놀이가 생겨났다.고구려·백제의 놀이와 연극고구려의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가무가 대단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가무는 서역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일본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외래악을 좌방악과 우방악으로 정리했는데 우방악 반수가 가무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악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악 중에서도 꼭두각시놀음은 민간에서 성행했으며, 중국까지 널리 인기를 모은 구경거리였다. 백제는 자료가 많지 않아서 논의를 전개하기 어려우나 ‘농주지희’라는 구슬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기악은 고구려에서 유래했으나 독자적인 공연물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기록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기악을 다르게 말한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기악에 대한 자료는 일본에 많이 남아있는데 일본서기에서 백제사람이 기악을 일본에 전했다고 전해진다. 기악은 부처를 공양하는데 쓰는 가무를 뜻하는데 불교 포교를 위한 탈춤이며 대사가 없는 무언극이다.신라 쪽의 상황과 처용극유리왕 9년에 ‘가무백희’를 두루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한가위를 즐기느라 벌인 갖가지 놀이와 노래, 춤, 연극적 놀이까지 총칭하는 말이다. 중세왕조에는 고대의 국중대회를 대신할 가무백희가 필요하였다.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고 화해와 단합을 꾀하는 관습이 연등회나 산대희로 이어졌다. 왕이 차차웅이라고 불리는 무당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로부인이 굿을 통해 민심을 다스리려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화랑들은 팔관회 등 행사에 공연자로 참가했을 것이다. 탈춤은 삼국유사의 경흥우성 대목에서, 열한가지의 가면을 이용하면서 배우들의 익살과 사설도 곁들여 공연했다고 찾아볼 수 있다.처용무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춤으로 동해용, 남산신 등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사람이 그러한 가면을 쓰고 굿을 했음을 알려준다. 처용이라는 신격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이 역신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을 물리치는 과정으로서 굿을 해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민란으로 어지러워진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헌강왕이 부활시켜 차차웅으로써 직접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고장을 떠나 다른 지방에서는 그 위력을 잃고 굿의 효과보다는 내용에 사람들은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서라벌 궁중의 ‘처용극’은 망해서 힘을 잃게 되자 ‘처용굿’으로 되돌아갔다가 춤을 중시하는 ‘처용무’가 되었다고 본다. 본고장 개운포의 ‘처용극’은 궁중의 ‘처용극’과 달리 ‘처용굿’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 민속 탈춤이 되었다고 본다.다섯 가지 놀이다섯 가지 놀이는 중국을 거쳐 들어오게 된 서역 계통의 놀리라는 주장과 신라에서 생겨났다는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금환’은 금빛 방울을 놀리는 놀이로 일종의 곡예인 셈이다. 직업적인 재인이 숙달된 재주를 자랑하기에 알맞은 것으로 본다. ‘월전’은 그 내용으로 보아 연극임이 분명하다. 서역지방 배우를 묘사한 것이라는 견해와, 꼽추의 모습이라고 하는 견해의 대립하고 있다. ‘대면’은 가면 또는 큰 가면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 쓰이는 가면이나 채찍은 잡귀를 몰아내는데 사용되었으며 굿으로서의 기능보다 놀이로서의 흥미 때문에 공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속독’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이며 서역에서 들어온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산예’는 사자의 거동을 묘사한 사자춤으로 사자, 즉 활동하는 영물을 칭송하는 목적으로 하는 놀이이다. 오늘날 , 에서 볼 수 있다. 사자춤은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을 깨끗이 하자고 추었으며, 인기를 모으는 구경거리이기도 했다.다섯 놀이는 다섯 과장을 이루고, 민간의 놀이이자 민속극이었을 것이다. 최치원의 ‘오기’를 읊은 시를 봤을 때 다섯 놀이를 통틀어 ‘오기’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말기 후삼국 시대가 열렸을 때 신라 조정과 맞서는 신흥세력이 후원자가 되어 주최했을 것이라고 본다. ‘오기’의 기풍은 대체로 구김살이 없고 씩씩하다고 할 수 있다.(7) 남북국시대의 상황과 문학동아시아 문학의 판도589년에는 수나라가 618년에는 당나라가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기 시작했다. 통일 신라는 동아시아 공동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발해는 당나라와의 교류에서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했으며 일본과도 사신을 교환했다.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한 한문과 한문학은 안정과 함께 일체감 조성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당나라의 한문학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빈공과를 설치하여 문화의 교류와 이식을 유용하게 하였으며 시에서는 근체시, 문에서는 고문이라는 높은 수준을 달성하였다. 신라의 향찰, 일본의 가명, 월남의 자남과 같이 한자를 빌려 민족어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은 공동문어로 보편적인 문화를 수립하는 데 참여하면서 민족어에 의한 문학을 개척하려는 것이었다.발해문학의 위치발해는 당나라에 대한 고구려 유민이 항거하여 대조영이 세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문학의 전통이 일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고려의 옛 터전을 회복하고, 부여가 남긴 풍속을 갖추었다”라고 했다. 그 뒤 일본의 답서에서도 ‘고려왕’이라는 말도 자주 보였으며 ‘고구려’와 같은 말인 ‘고려’를 국호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나라는 신라관과 발해관을 설치함으로 외교를 대등한 위치에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으며 한문의 사용도 난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찾을 수 있다. 한자를 빌려 독자적인 자국어를 기록했음을 ‘구당서’를 통해, 한문학에서 구현되는 보편주의를 온정균의 ‘송발해왕자귀국’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발해문학의 작품보통 사신이 오고가며 주고받는 시들은 시로서의 의의가 없어 기록하지 않지만 유독 일본으로 보내진 시들은 환대를 받았던 것으로 보아 당나라와 연대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의 사신을 환대했다고 본다. 문왕 때 귀덕장군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양태사는 ‘야청도의성’과 ‘경국집’을 지었는데, 모두 스물네줄의 칠언고시로서 감동을 자아낼수 있는 사연과 함께 표현력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다. 왕효렴은 화려하고 질탕한 분위기에 취해서 놀았다고 하는 시 두 편과 봄날의 끝을 읊은 시 한 편을 지었다. 일본 궁중에서 잔치가 벌어졌을 때 상빈 대접을 받고 즐거워한 사연을 담은 시를 쓴 인정이라는 승려도 있었다. 특히 ‘정혜공주묘비’는 감각적인 표현이 귀족적인 기풍을 지닌 공주의 일대기 형식이 드러나고, 이는 ‘정효공주묘비’에서도 같은 대목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한문학의 격식을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창의력을 잃은 폐단이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신라문학과 대외관계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발해와 일본의 관계보다 폭이 넓어서 국서를 주고받는 것뿐만 아니라 시문을 지어 공감을 나누기도 했다. 통일전쟁 기간에는 살짝 복잡한 관계가 이어졌지만 전쟁 종료 후에는 다시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했다. 신라가 전성기를 맞이한 후에 성덕왕은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는데 힘을 들여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상문사를 개편하고 통문박사를 두었다. 당시에 ‘사당현종문’과 ‘사사패강이남토지표’는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는 동안 당나라에서는 유학에 대한 열의가 달아올랐고 신라의 육두품 귀족은 과거제를 실시하던 당나라를 동경하였으며 직접 가서 당나라에서 입신양명하기도 하였다. 신라 문인이 당나라에 가서 활동한 자취는 ‘전당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나라에 남은 신라 시인들의 작품은 신라와 당나라에 이중소속 되었으며, 신라와 당나라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마음의 갈등을 깊이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한국문학통사5. 중세 전기 문학 : 제1기 삼국·남북국시대(3) 향가의 작품세계민요 계통의 노래‘서동요’는 원래 민요였던 것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향가에 편입하게 된 경우이다. 여성은 고귀한 계급이고 서동은 미천한 백성이었지만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상하층을 갈라놓는 사회적 장벽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진평왕 때의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마치 역사적인 사건인 듯 이야기를 꾸미는 노래가 향가로 편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풍요’는 일을 하면서 부른 노동요로 양지스님이 불상을 만들 때 일을 맡은 사람들이 불렀다고 전해지며, 후대에는 방아를 찧으면서도 불렀다고 한다. 양지스님은 신분이 불분명하였고, 동냥을 하고 조각하는 장인이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노동요인 ‘풍요’가 불교신앙요로 해석되어 향가에 편입했다고 볼 수 있다. ‘풍요’를 통해 세 토막, 네 토막 형식의 민요가 일찍부터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헌화가’는 향찰로 표기되어 있으며 ‘해가’는 한시로 번역이 되어있다. 수로부인을 무당으로 추측할 때 ‘헌화가’와 ‘해가’는 일종의 굿노래로도 볼 수 있다. 굿을 여러 차례 진행하며 꽃거리 대목에서는 ‘헌화가’를, 용거리 대목에서는 ‘해가’를 불렀다고 보고 있다. ‘헌화가’는 ‘풍요’와 같은 형식으로 민요의 기본형이 일을 할 때 부르거나 굿을 할 때 함께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가’는 ‘구지가’를 연상시킨다. 이는 ‘해가’가 건국서사시의 일부를 이루었으며, 나라굿에서 부르던 노래가 신라 시대에 이르러 민간에까지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정치 상황과 관련된 노래‘혜성가’는 진평왕 당시 융천사가 지은 것으로 사뇌가의 특징과 구실을 알 수 있는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왕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 화랑의 무리가 노래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혜성가’는 다섯줄로 이루어져 있고, 토막이 불규칙하다. 이는 사뇌가가 처음에는 산만한 형식이었음을 보여준다. 노랫말에 주술의 원리와 사고방식이 작용하며 이중의 위기를 물리치기 위한 노래이양산가’라는 곡이 있다.‘원가’는 ‘모죽지랑가’와 상통한다. 하지만 ‘모죽지랑가’에서는 대상에 대한 정서가 추모로 나타나지만, ‘원가’에서는 원망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원가’는 진골 귀족이 지어 부른 유일한 향가이다. 주술이 개인적인 영달의 수단으로 변질됨잉 보이며,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가 나타나지 않지만, 주술에 바탕을 둔 서정을 갖추었다는 점은 사뇌가의 전통에 입각하고 있다.월명사와 충담사월명사는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지었다고 하고, 충담사는 찬기파랑가와 안민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각각 이름은 월명과 충담이었고, 사는 존칭으로 화랑 무리를 지도하는 스승이라서 붙여진 존칭이다.‘도솔가’는 경덕왕 때에 지어졌다. 경덕왕 때에 왕당파와 반왕당파 사이에서 정치싸움이 벌어졌고, 경덕왕은 그 위기를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했다. 그래서 월명사에게 변괴를 퇴치하는 의식을 거행하라고 했던 것이다. 향가 가운데 ‘도솔가’만이 한역시가 함께 전해서 그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줄이고 네 토막이라는 점에서 민요에서 유래한 형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쉽게 지어낼 수 있는 몇 마디 말로 노래를 짓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유리왕 때에 지어 불렀던 ‘도솔가’는 노래갈래 이름이었다고 추정된다. ‘도솔가’에 나오는‘꽃’은 미륵을 모셔올 수 있는 매개자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는 노래를 불러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불교 이전의 사고방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서 제사를 올릴 때 부른 것으로 사뇌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두 줄에서는 누이의 죽음을, 그 다음 두 줄에서는 누이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낙엽의 비유는 사뇌가의 서정적 표현이 세련된 경지에 이르렀음을 밝힌다. ‘제망매가’는 나라의 노래나 화랑의 노래가 아닌 개인의 노래를 지어 내면적인 정서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안민가’도 경덕왕 때에 지어졌다. 경덕왕이 후사가 없어 고승에게 부탁하여 치성을 ‘찬기파랑가’는 ‘안민가’보다 먼저 지어졌는데 죽은 기파랑을 찬양하는 비장하면서도 숭고한, 개인적인 노래이다. ‘찬기파란가’는 삼국유사에 ‘찬기파랑사뇌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뇌가가 갖춰야 할 뜻이랑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첫줄에서 한 토막 모자라는 짜임새이며, 형식상 결말이 줄 가운데 오기도 하는 변형은 시상을 오묘하고 복합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사뇌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불교를 따른 노래향가의 작자는 굳이 화랑의 지도자로 국한되지 않고, 작품의 성향이 숭고한 이상을 품고 있으면 향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랑과 연관되지 않으면서 숭고한 이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불교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왕생가’는 문무왕 시대에 광덕이라는 승려가 지었다. 아내는 분황사의 종이었으나 광덕은 승려였기 때문에 동침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로 인해 광덕의 아내가 관음보살의 현신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은 귀족불교의 한계를 넘어 백성에게도 불교가 수용되고, 현실초극의 사고방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원왕생가’는 사뇌가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사연이 간략하다. ‘도천수대비가’는 눈 먼 아이가 불상 앞에서 노래를 지어 불러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연인데, 승려가 만들어놓은 사뇌가를 어머니에게 알려, 아이가 외도록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왕생가’에서 보이던 사뇌가의 변질이 ‘도천수대비가’에 와서 한층 더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우적가’ 원성왕 시대에 영재스님이 지었다고 유래된다. 영재스님은 화랑도와도 관련 없는 승려이면서, 향가를 짓는 데 힘쓴 시인이었는데, 영재가 지리산에 숨으러 가다 도적을 만나 지은 노래가 바로 ‘우적가’이다. 영재는 도적떼가 자기네와 다름없는 백성이란 것을 인지하고 이 노래를 불러 한패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4) 불교문학에서 문제된 이치와 표현불교사와 문학사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불교 공인은 고대의 자기중심주의에서 중세의 보편주의로 이행하는 데 긴요한 구실을 했였다. 승랑은 삼론을 깊이 연구해 유를 내세우는 입장을 논파하고 아울러 공에 매달리는 태도를 배격하는 방법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고구려보다 못하지 않았겠지만 그 기록은 현저히 적다. 겸익은 계율에 관한 경전을 변역했다. 그 뒤를 이어 담우고, 혜인 등이 율소 36권을 저술하였다. 백제 불교는 계율을 존중하는 사상의 체계를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불교가 늦게 정착하였기 때문에 더욱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왕이 스스로 승려임을 자진하면서 왕이 부처라는 불국토 사상이 퍼져 나갔다. 또한 불교사상을 탐구하는 수많은 저술이 이루어지면서 문학의 폭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통일 전후시기에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인 단합을 꾀하는 데 불교가 적극적인 구실을 하였다.원효원효는 육두품 출신의 승려로 대승불교의 원리를 체득하여, 귀족불교를 확립하던 추세를 거스르고자 했었다. 귀족적인 편견을 깨며, 자유로운 생각과 어떠한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지키면서 살아가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툼을 화해시킨다는 뜻의 화쟁을 주장하고 화합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불교철학이 고려시대에는 유학의 발달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몰락의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이는 기존의 사상체계를 연구하기보다 여러 경전을 두고 연구하는 불교철학의 기풍이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본다. 불교의 발달은 유학의 발달로 이어진다. 유학은 이미 제기된 문제를 철저하게 검토하면서 불교의 해결방법을 넘어 새롭게 해결해야 했다. 불교에서 이룩한 사상수준이 향상되는 것이다. 철학의 사고를 문학 속에서 전개하는 우리나라 특징은 인해 철학사와 문학사가 겹치는 일이 왕왕 생기게 되는 이유이다.의상과 그 전후의 학승원측은 중국에서 활동했던 학승으로 유식학을 꿰뚫고 그 이치를 풀어 밝히는 업적을 이룩했다. 유식학은 불교 사상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나온 사상으로 ‘有’에 집착하는 소승불교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대승불교가 들고 나온 ‘空’이 지나치기 때문에 유도, 공도를 문제로 삼으며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였다면, 의상은 여러 가지가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없다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의상의 학풍이 두드러지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게송과 염불불교는 노래와 인연이 깊은데, 아름다운 말로 부처를 찬미한다는 ‘가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타’는 산스크리트 용어로 이를 번역한 것이 게송이다. 게송은 불경을 풀이하면서 짓는 것이자 깨달음, 서원을 나타내는 노래까지 포괄하며 불교문학이 일어나자 함께 생겨났다. 특이한 점은 불경에 의거하지 않고 자유롭게 지었다는 점이다.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나 ‘대승기신론소’, 산문처럼 보이지만 시인 ‘대승육정참회’이 있다. 원효의 게송이 기본적으로 게송의 본보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의적의 ‘법망경보살계본소’, 태현의 ‘성유식론학기’, ‘보살계본종요’등 다른 학승들이 경전 풀이에 첨부한 게송도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승려들 사이의 게송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원효는 글을 모르는 일반 신도들을 위해 ‘무애’를 부르며 춤을 추고 지방을 돌아다녔는데 이는 염불 공연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염불사는 미타염불을 하며 성 안을 돌아다니고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대중은 게송에 대한 흥미보다 이야기가 갖춰진 공연을 선호했을 것으로 보인다.또한 게송은 불교 조각이나 조성기에도 기록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승려의 전기에도 게송이 수록되기도 한다. 승려 부설의 전기인 ‘부설전’의 게송은 최초의 칠언절구 작품이라고 평가받지만 후대인의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혜초의 기행문중세에 동아시아 사람들은 기껏해야 외교사절단이나 외국을 오갔으며, 국경을 넘어다니는 상인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승려들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먼 인도까지 왕래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혜초는 인도를 여행하고 여행의 내력을 적은‘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왕오천축국국전’은 산문으로만 일관되게 적은 것이 아닌 다섯 편의 시가 실려있다. 첫째 시는 석가가 득도한 곳을 찾아가 지은 것이것이다.
한국문학통사5. 중세 전기 문학 : 제1기 삼국·남북국시대(1) 한문학의 등장과 그 구실한문의 사용과 중세화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에 등장한 나라는 많지만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한문을 사용하여 중세화에 성공한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뿐이다. 이 외에 다른 여러 나라들은 중세로 들어서지 못하고 패망하게 되었다. 중세화는 고대에서 사회변동이 일어나고 이루어진다. 고구려를 보면 대무신왕의 측근이 대무신왕에게 “덕에 의지하는 자는 창성하고, 힘에 의지하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다. 백성을 다스릴 때 적으로 다스려야하는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도 유리왕이 죽어가는 노파를 보고는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을 펼쳤다. 비록 신라가 발전은 늦었지만 백성을 돌봐야한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들어왔던 것이다. 신라 지증왕 시대에 순장을 금한 것도 이러한 생각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사회체제를 새롭게 바꾸는 것은 일종의 혁명이다. 하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과 관련된 수많은 이념과 지표를 새로 설정해야한다. 그래서 불교를 공인하고 한문이 사용되었으며 율령 반포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2년에 불교를 공인하고 그 해에 태학이라는 국립대학이 설치되었으며, 다음해에 율령을 반포했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이르게 고이왕 27년에 율령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침류왕 원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신라의 경우에는 발전이 늦었다. 순장을 금지한 지증왕이 4년에 신라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명칭을 버리고 왕이라는 명칭을 택했다. 이는 이행기의 관습을 버리고 중세화를 단행한 것이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이 7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15년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가야는 신라보다 더 빨리 발전했고 불교도 더욱 빨리 들어왔지만 결국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신라에 지고 만다. 이는 고대에 대한 중세의 승리를 의미하며 가야에서조차 많은 것을 받아들인 신라가 가야보다 앞섰다는 의미이다.불교는 사람이 다 평등하다는 명분론을 말 문학과 한문문학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한문이 공동문어로 사용되면서 상층의 공식적인 문학이 한문문학이 되고, 우리말 문학은 기층문학으로 격하된 시기이기도 하다.한문은 기자 조선 때 한반도에 전래되어 위만 조선 때 확대되었고 이루 고구려가 한자 사용자들을 들여와서 백제와 신라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경우 고조선 유민이 한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건국 초 이미 한문을 사용해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이런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백제도 일찍부터 한문 구사능력을 나누어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다를 접하고 있어 일본의 역사서 편찬에도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한문을 받아들였다. 육두품이 한문구사력을 밑천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고급문학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국사 편찬에 종사하는 사람의 직위가 보장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한문이 실무 기술적인 면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한문을 이용한 차자표기(향찰, 구결, 이두)를 사용했다. 또한 한자의 어순이 우리말과 맞지 않아 한자의 어순을 우리말의 어순으로 사용한 서기체가 발달하였다. 이처럼 한문의 공동문어 사용은 민족어를 형성하고 중세 문학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문은 말이 아니고 글이며 읽는 법은 각 나라마다 달랐기 때문에 다른 공동문어에 비해 이질성이 더욱 컸다. 중국의 문자였지만 독자적인 우리나라의 읽는 법에 따라 우리말처럼 쓰인 것이다. 따라서 한문문학은 당연히 우리의 국문학으로 봐야하며, 더 나아가 정격한문뿐만 아니라 변격한문도 우리의 문학 작품으로 봐야하는 것이다.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금석문중세는 한문을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불교를 공인하는데서 시작하지만 중요한 과업이 하나 더 있었다. 백제는 4세기 후반의 근초고왕 때, 고구려는 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신라는 가장 늦은 6세기 진흥왕 때 전성기를 누리며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은 고대의 비가 세워진 것이다.비를 세우는 것은 고구려가 시작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우리 문학사에서 한문학이 출연하고 중세문학이 시작된 증거를 제공하고 한문학이 공동문어가 된 시기를 명확히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위엄을 평가하고, 영웅적인 승리의 행적을 건국서사시의 기백을 물려받아 서술하였다. 그리고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며, 왕의 공적을 일정한 글자수와 뜻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사실 자체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중원비’는 영토 확장 후에 세워진 것으로 신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서술하였고, 신라를 동이로 생각했음이 드러난다. 이두식 표기를 사용한 변격한문이 쓰여있어 고구려가 신라의 뒤쳐진 수준에 맞추려고 했음이 드러난다. 또한 고구려는 국가의 지방행정을 위한 소규모의 비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신라의 ‘적성비’는 건립연대가 진흥왕 11년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반격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는데 도움을 준 토착세력들의 공을 치하하고 게속 충성할 것을 권유하는 글이다. 또한 한문에 능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구어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두를 사용한 변격한문으로 기록하였다. 진평왕 13년에 세운 ‘남산신성비’도 구어로 적혀 있는데, 이는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한 일꾼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4개의 순수비를 세웠다. ‘창녕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북한산비’는 고유명사만을 이두식으로 표기하였고 나라의 위업을 담아 위엄을 세우려는 사고방식이 드러나며, 왕도사상이 나타난다.백제는 국가의 위업을 자랑하는 비문은 남기지 않았다. 추론하기를 백제의 전성기 시대에는 한문을 사용해 비문을 남기는 일이 일반화되지 않았고, 한문이 발달한 후에는 굳이 패배한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위업을 자랑하는 비문은 없지만 비문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택지적비’는 글자수를 고정하고 두 구절이 대구를 이루는 변려문의 수법을 극도로 사용했다. 형식의 아름다움을 외교문서의 교환도 활발하였다.고구려는 자주적 기풍을 드높였으며 국력의 강건함으로 사대외교를 택할 이유가 없었다. ‘여수장우중문시’를 통해 수나라 장수의 허세를 비웃는 을지문덕의 기상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최초의 한시이며 반어적인 표현으로 허세를 비꼬았다. 또한 정법사의 ‘영고석’은 외로운 바위의 빼어난 모습을 기리며 작자의 기백을 나타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특산물을 소개하기 위한 작자미상의 ‘인삼찬’이라는 시도 찾아볼 수 있다.백제는 근초고왕 때, 칠지도에 명문을 새겨서 보내는 등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자랑했다. 개로왕 18년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백제는 북위의 효문제에게 장문의 국서를 보내게 된다. 개로왕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고 효문제를 황제라고 칭하며 시대외교의 격식을 차렸다. 어려운 수식이 들어간 변려문을 사용하면서 황제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했으나, 청을 거절당하고 관계를 끊었음을 알 수 있다.신라는 중국과 뒤늦게 외교를 시작하였고 중국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그래서인지 신라의 국서인 ‘담설인귀서’나 ‘걸좌표’, ‘태평송’을 보면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문무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걸좌표’의 경우 이미 당나라와 신라가 대등한 관계에서 나당전쟁을 하고 있던 당시였다. 즉, 당나라를 칭송하고 일종의 사대외교문서로써 나라를 지키면서 말과 다르게 행동함으로 국익을 추구하는 면모의 문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외교문서의 작성을 위해서는 글을 잘쓰는 문인이 있어야 했다. 신라에서는 강수라는 그리 높지 않은 신분의 육두품의 관리가 일찍이 문장 수련에 힘을 써서 발탁되었다고 한다. 외교문서뿐만 아니라 내정을 위해서도 한문으로 된 글이 필요했다. 상소문이나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에 민족의 단합을 위해 내린 책문 등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었다.(2) 노래의 새로운 모습고구려의 노래국중대회가 지속되면서 남녀 구별 없이 함께 어울려 노는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고구려에서는 주몽과라 제도화 되어 악(기악 연주, 무용, 성악 가창 등을 아우른 종합적인 공연)과 함께 발달하였다. 악은 밖으로는 나라의 문화 수준을 드러내고 안으로는 백성을 감복시키는 목적이었다. 질서 유지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예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민간굿은 제도화 이전의 전통을 이으면서 생산을 기원하는 굿이었다. 왕산악이 진나라 칠현금을 개조해서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음악뿐만 아니라 서역의 음악까지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 삼국의 속악으로 부르던 ‘내원성’, ‘연양’, ‘명주’ 세 편이 고구려의 것이라고 칭해진다. ‘내원성’과 ‘연양’은 그 지역이 외곽에 위치해 있어서, 고구려 시대에 이미 궁중음악으로 채택되어 신라 때도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명주’는 지금의 강릉 지역이므로 고구려의 궁중음악이었다기보다는 통일 신라 시대의 궁중음악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백제의 노래백제악이 이루어진 모습은 고구려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고구려처럼 고분벽화의 주악도 남기지 않아서 ‘고려사’악지의 삼국속악조항에 소개되어있다. 그러나 노래가 일본에 전해진 경로만큼은 고구려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백제 사람인 미마지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음이 ‘일본서기’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지명이 노래의 제목이 되었다. 산 이름을 딴 것이 4개나 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백제에 땅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산에 들어가 살 수밖에 없었거나 산에서 원통함을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무등산’을 제외한 ‘선운산’, ‘방등산’, ‘지리산’은 여인이기에 가중되는 고난을 애절하게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의 이름이 들어간 만큼 발생지와 관련되어 있고, 향토적 정서를 중시한다. 이 외에도 정절을 기리고자 궁중음악으로 채택된 ‘정읍사’는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백제 노래의 특징은 여성의 오래라는 점이다. ‘무등산’을 제외하고는 여성이 지어 부르고 여성의 아픔을 절실히 표현하고
한국문학통사1. 문학사 이해의 새로운 관점문학의 범위먼저 문학은 구비문학과 기록문화 두 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문학은 형상이라는 점에서 일상 언어와 구분되기 때문에 형상 인식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문학의 범위 기준은 형상 여부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이어서 국문학의 범위를 살펴보면 구비문학과 한문학이 있다. 문학은 언어예술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본 전제를 수정하지 않는 한, 구비문학도 국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한문학이 있다. 한문으로 쓰여졌지만 우리 음으로 읽으면서 구결을 지어냈고 토를 달았기 떄문에 우리말 문어체의 하나라고 봐야한다. 마지막으로 국문문학이 있다. 국문문학은 일제시대의 민족문학으로 국문학을 제대로 연구하는 현대에 와서야 정통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문학의 갈래문학사를 쓰기 위해서는 문학을 다루는 적절한 단위가 필요한데 이것을 갈래라고 부른다. 갈래는 국문학에서는 서정, 서사, 교술, 희곡으로 갈래가 나뉘게 된다. 서정갈래는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이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정의 하고, 교술갈래는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정의하며, 서사갈래는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고 정의하고, 마지막 희곡갈래는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갈래는 갈래체계, 즉 갈래의 역사 속에서 변화를 겪고 없어지기도 한다. 또한 체계 자체가 유동적이어서 느슨해지고 갈래에서 이탈하는 개별갈래가 나타날 수도 있다. 구비문학도 하나의 갈래로서 항상 같은 양상을 지니고 있는 듯하지만, 어느 단계에서 어떤 갈래가 특히 두드러진 의의를 가졌거나 기록문학과 깊은 관련을 맺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다른 갈래와 얽혀있디 때문이다. 한문문학은 희곡갈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국문학에 비해 교술갈래가 다채롭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시대 구분시대구분에 관한 주장은 일원론과 다원론으로 나뉜다. 일원론은 어느 한 가지 기준에 의렇게 교술이 활성화되는 변화가 국문문학과 한문학 양쪽에서 나타나 문학의 판도를 뒤집게 되었다. 이후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소설이 발달하여 서정, 서사, 교술이 맞붙게 되었다. 국문학의 영역은 더욱 확대되고 작품의 수도 늘어나게 되었다. 한문소설이 중세적인 가치관과 근대적인 이해관계의 갈등을 심각하게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3.1운동을 거쳐 근대문학을 이룩하게 되었다. 언문일치문학이나 서정시, 소설, 희곡이 다양하게 발전했으며 현실생활을 충분히 반영하는 작품들이 다수 창작되었다. 문학작품의 상품화가 이루어져 인쇄된 상품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고 여러 운동이나 민중들의 연대가 신문학운동으로 연결되어 근대문학이 생성된 것이다. 이러한 근대문학의 전체를 또는 제 2기(1945년 이후)를 현대문학이라고 편의상 부르기도 한다.생극론의 관점역사 속에서 구비문학만을 가지고 문학을 이룩하다가 한문학을 받아들인 것은 엄청난 일이다. 한문학은 구비문학만을 가지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이질성을 가져다 주었고, 구비문학과 한문학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구비문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한문학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비문학이 재창조를 거듭하면서 한문학과 상극과 상생을 넘나들며 문학사를 전개시킨 것이다. 한문학은 국문문학과도 생극의 관계를 가졌다. 소설로 예를 들자면 남성들의 문학이었던 한문학과 여성들의 문학이었던 국문문학은 서로 다툼의 관계가 더욱 컸다. 그러나 다툼을 통한 극복에서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근대문학에 이르러서야 구비문학, 한문학, 국문문학의 경쟁에서 국문문학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국문문학이 근대적인 성격으로 극복하여 문학사에 커다란 전환을 이룩한 것이다.2. 원시문학구석기 시대의 언어 예술구석기 시대에는 조형예술이 동작예술이나 언어예술과 얽혀 원시종합예술을 이루었다. 춤이나 노래는 짐승의 모습, 움직임, 사냥하는 과정을 재현하는 목적으로 행해졌으며,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 같은 사고가 후대까지 거듭해서 표현되고 일찍부터 나타난다. 한족과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부여와도 건국신화가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우리 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이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을 포함한 더 큰 개념의 민족이 동이족인 것이다. 동이족의 일부가 한반도로 와서 우리 민족의 일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선조는 예맥이라고 지칭한다. 예맥이 분화되어 조선과 한이 나타나고 그 밖에 우리 땅에 살았던 여러 선조들의 나라가 된 것이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작은 집단일 뿐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통합하고 동질적인 문화를 가진 민족공동체를 만든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다. 이러한 고조선이나 부여는 천신족이라고 자부하는 등 자기중심주의를 내세웠다. 중세에는 피치자도 사람이라고 보는 보편주의의 사고가 나타났고 이에 따라 민본의 방침으로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공동문어를 같이 쓰면서 상층끼리의 유대가 민족의 구분을 넘어섰다는데 중세 보편주의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들어서자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민주화운동을 벌였고, 이에 평등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폐쇄적인 외교관계를 고수하였다. 근대 민족은 국가를 되찾는 것을 절대적으로 여겼으며 이러한 경과를 지닌 고찰을 심화했고, 이러한 깊은 고찰은 우리 문학사에 기여했다. 이 당시 다른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말로 우리나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이들은 우리 문학사에 포함되지만, 삶의 터전을 아주 옮긴 이민문학은 제외해야 마땅하다. 근대의 이념은 우리 민족이 단일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질적인 요소들은 배제되었으나 과거를 발판삼아 민족이 복합체임을 깨닫고 귀화인의 기여도 인정해야 한다. 근대는 역사의 종점이 아니고 그 다음 시대가 오듯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하고 그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여 다음시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3. 고대문학건국신화·국중대회·건국서사시건국신화는 잘 알고 있듯이 새 시대는 하나 엄연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고 보통 천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천신을 섬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 생산의 신이 가장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천신을 섬겼다. 둘째, 건국신화에 나타난 새 시대의 사고형태이다.신화와 서사시는 같은 내용이지만 다르게 다룬다. 신화는 누구라도 어느 때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졌지만 서사시는 특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특정한 절차에 맞춰서 부르는 노래이다. 구전되었던 신화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데 서사무가는 큰 도움을 주며 서사시의 내력도 서사무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웅서사시를 창조해낸 고대의 귀족층은 강해야했다. 문보다는 무를 숭상했고 중세의 보편주의와 달리 자기중심적이었다. 서로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문화라고 부를 만큼 공동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각의 민족이 각각의 천신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답합은 있었다. 지배층을 피지배층과 완전히 다른 사람들로 인식하고 대우도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덕치에 대한 이해는 다음 시대인 중세에 가서야 나타날 수 있었다.고조선고조선은 최초의 건국 서사시를 가지고 있다. 환인, 환웅, 단군의 삼대기 이며 환웅은 환인의 서자라고 알려져 있다. 장자는 하늘을 다스리고 서자가 땅으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인간과 자연만 문제가 되던 시기에는 환인만 섬기면 되었지만 나라를 세워야 하자 환웅의 하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하강한 태백산신단수는 일종의 당나무였을 것이다. 임금의 제정일치가 이루어졌던 그 당시에 그 당나무는 임금으로서의 권능과 무당으로서의 주술을 보이는 중요한 무대였을 것이다. 아마 환웅이 그런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해 환웅천왕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하강한 환웅이 웅녀와 결합한 것도 천신족과 지신족이 결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조선은 정복전쟁을 벌일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은 농업을 통해 구축했고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기대로의 건국서사시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러운 출발이라는 견해가 일반화된 것이다.부여·고구려계 전승고조선 다음 순서로 등장한 나라가 부여이다. 기원전 3세기, 중국문헌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그보다 앞서 건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따금씩 왕조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 해부루, 동명, 주몽의 이야기를 보면 천신족으로서의 우월감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해모수 신하에는 정복자로서의 영웅적인 능력에 대한 찬양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성하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또한 해모수는 없는데 유화가 태양빛으로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보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발걸음 단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여의 국중대회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영고라는 이름으로 국중대회를 열었다. 영고는 ‘영’과 ‘고’로 나뉜다. 임금이 무당으로서의 주술을 발휘하며 권능을 행사하였고 이 때 일정한 절차에 따라 부른 노래가 건국서사시이다.다음으로 주몽 신화는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형식을 이룬다. 알로 태어나는 기이한 태생에 버려져도 동물들이 구해주고 결국에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아주 전형적인 형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웅의 일대기적 형식이 고대의 신화로부터 중세 이후의 서사문학까지 계승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부여와 고구려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주몽이 새로 세운 나라를 부여라고도 하고 고구려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온 것이 아닌 부여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건국시조의 이름도 다양하다. 동명은 백제까지 포함해서 부여·고구려계 사람들이 함께 받드는 시조를 부르는 보통명사라고 할 수 있고,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 시조의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주몽하면 동몀을 떠올리는 이유는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의 이야기가 구체화되어 그 갈래 전체를 대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백제는 부여·고구려계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어 세운 나라이다. 그래서 건국신화도 그 맥락을 .
이사야 18장 1절-19장 15절을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구속사, 리딩지저스,원포인트 설교 모음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236502367" 구속사 - 이사야 18장 1절-19장 15절, 조용히 바라보시는 하나님 PAGEREF _Toc236502367 h 1 Hyperlink l "_Toc236502368" 서론 PAGEREF _Toc236502368 h 2 Hyperlink l "_Toc236502369" 본론 PAGEREF _Toc236502369 h 3 Hyperlink l "_Toc236502370" 1. 내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PAGEREF _Toc236502370 h 3 Hyperlink l "_Toc236502371" 2. 무너질 세상의 우상을 버리고 참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PAGEREF _Toc236502371 h 4 Hyperlink l "_Toc236502372" 결론 PAGEREF _Toc236502372 h 5 Hyperlink l "_Toc236502373" 리딩지저스 - 이사야 18장 1절-19장 15절, 흔들리는 세상, 영원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PAGEREF _Toc236502373 h 6 Hyperlink l "_Toc236502374" 도입: 타락한 상황의 초점 PAGEREF _Toc236502374 h 6 Hyperlink l "_Toc236502375" 본문 해석: 하나님의 구원 역사 PAGEREF _Toc236502375 h 7 Hyperlink l "_Toc236502376" 전환: 그리스도 발견하기 PAGEREF _Toc236502376 h 8 Hyperlink l "_Toc236502377" 결론 및 적용: 은혜에 빚진 자의 삶 PAGEREF _Toc236502377 h 9 Hyperlink l "_Toc236502378" 원포인트 - 이사야 18장 1절-19장 15절, 고요히 바라보시는 하나님 PAGER와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 꿇기보다, 세상의 인맥을 찾아 뛰어가지 않습니까? 내 재산을 확인하며, 내가 가진 대책과 경험을 먼저 의지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분주하고 조급한 발걸음을 즉시 멈추고, 역사의 참된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명령하십니다.본론1. 내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첫 번째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내 인간적인 조급함을 내려놓고 역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조용히 기다리라는 것입니다.이사야 18장 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이사야 18: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지금 유다가 속한 세상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뒤집힐 것처럼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빠른 갈대 배를 띄우며 외교관들이 바쁘게 왕래하고, 군대를 끌어모으느라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처소(מָכוֹן, 마콘)에서 '조용히'(שָׁקַט, 쉐켓)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계십니다.하나님이 힘이 없거나 무관심하셔서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한여름 뙤약볕이 곡식을 묵직하게 익어가게 만들고, 가을철 밤이슬이 과일을 단단하게 영글게 하듯,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고 완벽한 때를 차분하게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인간이 아무리 분주하게 움직여도, 하나님의 시계는 오차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최적의 때가 되면, 포도원 농부가 정교한 낫으로 쓸모없는 가지를 단번에 잘라내듯(כָּרַת, 카라트), 하나님의 완벽한 심판과 구원이 단번에 임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모았던 군대와 자만했던 자신들만의 계획들은 순식간에 산새들과 들짐승의 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서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깊은 한숨과 실패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왜 지금 역사하지 않으십니까? 왜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영원한 반석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바라보시길 바랍니다.결론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세상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급하게 달려와 속삭입니다. "눈앞의 현실을 봐라!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사람들과 동맹을 맺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오늘 이 아침, 이사야 선지자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내 처소에서 조용히 일하는 나를 바라보아라. 세상의 헛된 우상을 내려놓고 내 때를 기다려라."이사야 18장 7절은 오늘 우리에게 반전의 소망을 선포합니다. 그토록 두렵고 무서웠던 강대국 구스 백성이, 훗날 회개하고 시온산으로 찾아와 만군의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게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인간이 맺은 정치적 동맹은 허무한 파국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온 열방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영광스러운 승리로 끝이 납니다.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 삶의 불안과 조급함을 십자가 앞에 깨끗이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내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세상의 물질과 지혜라는 우상을 털어냅시다. 우리의 결단과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해 주실 때, 비로소 참된 평안과 인내의 믿음이 솟아납니다.오늘 하루, 주님의 완벽한 타이밍을 기대하며, 영원한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으로 삼고 담대히 승리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리딩지저스 - 이사야 18장 1절-19장 15절, 흔들리는 세상, 영원한 반석이신 그리스도도입: 타락한 상황의 초점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때일 것입니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든든한 동아줄 같았던 인맥이 끊어지며, 내 삶을 지탱해주던 건강이 무너질 때, 우리는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집니다.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남유다 백성들도 이와 같은 극심한 공포 속에 있었습니다. 잔인한 앗수르, 남유다는 눈에 보이는 강력한 군대와 마르지 않는 나일강을 가진 애굽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은 결국 '엘릴림', 즉 아무것도 아닌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참된 구원은 어디에서 옵니까?오늘 본문의 실패한 애굽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애굽의 강물은 말라버려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참된 생명수'가 되십니다(요 4:14). 십자가에서 자신의 물과 피를 온전히 쏟아내심으로, 죄로 인해 바싹 메말라 죽어가던 우리 영혼을 적시는 영원한 나일강이 되어 주셨습니다.애굽의 지혜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한 채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리며 백성을 길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지혜'이십니다(고전 1:24). 세상의 눈에는 십자가가 미련하고 약해 보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가장 완벽한 구원의 지혜를 완성하셨습니다. 애굽의 모퉁잇돌들은 무너졌으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원하고 견고한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벧전 2:6).하나님은 조용히 감찰하시다가 정확한 때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18:4). 예수님의 초림이 그러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서 세상이 요동칠 때, 하나님은 가장 조용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바로 그 십자가가 모든 원수의 권세를 꺾고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결론 및 적용: 은혜에 빚진 자의 삶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혜가 비틀거릴 때, 십자가라는 영원한 진리와 지혜를 반석으로 삼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도자들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립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을 타고 임하시자, 그들이 믿었던 모든 우상과 견고한 시스템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여기서 우리는 18장 4절에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조용히’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샤카트(שָׁקַט)’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평온, 모든 것을 통제하고 다스리시는 절대자의 흔들림 없는 안식을 의미합니다.하나님은 일찍부터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빛처럼, 추수 때의 이슬처럼 잠잠히 지켜 보시다가, 가장 정확한 심판과 구원의 때(추수 때)가 오면 단번에 적들을 베어버리십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해서 당장 눈앞에 앗수르가 쳐들어오면 마음이 무너지고, 급한 마음에 나일강을 가진 애굽이라도 붙잡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 나일강마저 말라버리게 하시는 분, 모든 역사를 ‘샤카트’의 평안 속에서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일상 속의 예화어느 권사님의 지난 삶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수십 년간 일궈온 사업체가 한순간의 부도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 권사님은 이리저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믿었던 지인들마저 등을 돌리고, 모아 두었던 비상금마저 바닥났을 때, 문자 그대로 권사님의 '나일강'이 완벽하게 말라버렸습니다.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던 중, 문득 새벽 제단에 엎드려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제가 세상의 줄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이제 제 손을 놓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환경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밀려왔다고 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은 권사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가장 정확한 때에 돕는 손길을 보내어 주셔서 다시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헛된 세상의 의지를 꺾고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았을 때, 잠잠히 일하시는 하나
근대 사회의 모습1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근대의 개화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이후 현실주의를 강조하면서 등장한 실학자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알게 된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는 가운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던 흥선 대원군도 서양의 무기 제조술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조선은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통하여 개항이 되었는데 개항이 이루어진 이후 개화파 인사들은 부국강병을 통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개화파 인사들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는 가운데 정부도 동도서기론을 내세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동도서기론을 내세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근대 제도와 기술을 도입하고자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일본과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이외에 정부는 외국 기술자도 초빙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에 따라 박문국에서는 신문을 발간하였고, 기기창에서는 서양 무기를 제조하였다. 이외에 전환국에서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였다. 근대적 기구 박문국--- 신문 발간 기기창--- 서양 무기 제조 전환국--- 새로운 화폐 주조 개항 이후 통신, 교통, 전기, 의료, 건축 분야에서 근대 시설이 도입되었는데 전신이 설치되면서 국제 전신망이 연결되었다. 통신, 교통, 전기, 의료, 건축 분야에서 근대 시설이 도입되는 가운데 궁궐과 상류 사회에는 전화도 보급되었다. 문명의 불인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가 되었고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차가 다니게 되었다. 교통의 발달을 하는 가운데 고, 서울 시내 일부에 전기가 들어왔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철도도 개통이 되었는데 철도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된 후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 경의선이 부설되었다. 경인선은 처음에 미국의 모스가 공가를 맡았다가 이후에 일본에서 인수하여 완성 하였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인 경인선은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2일 기공되었고,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 간 최초의 영업을 개시하였다.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2일 기공되었던 경인선은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완공시켜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회사이름을 따서 ‘경인철도’라고 불리다가 일본으로의 국유화가 진행된 1906년 이후부터 ‘경인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2일 기공된 이후 개통된 경인선은 근대적 교통 기관의 도입과 함께 구미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서양 의학돠 보급되었는데 서양 의학이 보급되면서 근대 의료 시설인 광혜원을 비롯하여 많은 병원이 들어섰다. 이외에 서양의 건축술도 전래가 되어 서양식 건축물인 명동 성당과 덕수궁 석조전 등이 세워졌다. 덕수궁 석조전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영국인이 설계를 하였다. 석조'는 '돌[石]로 만들었다[造].'라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통적인 궁궐이 목조에 기초한 것에 대비되는 이름이다. 석조전은 정식으로 부여된 전각의 명칭이 아니다. '경복궁 근정전'과 같이 전각의 이름을 지을 때는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석조전은 정전이나 침전의 일부가 아니며, 그 자체로 하나의 궁이기 때문에 굳이 전각의 이름을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근대화 시기에 있은 서양 문물의 도입은 국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이점도 있었지만, 기술과 관리를 외국인에게 의존했으므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개화파가 부국강병을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인 사회 진화론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계승이 되어 실력 양성론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사상들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조사 시찰단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를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1876년에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를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된 조선 정부는 조약 체결 직후 일본의 요청에 의해 수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했다. 강화도 조약이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 주요 내용은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막고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친중, 연미, 결일의 외교 정책을 취해야 하며 자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준헌의 조선책략 내용이 알려지자 정부 내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재야에서는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책략 내용이 알려지자 정부 내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재야에서는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났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막고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 조선 역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80년에 조선 정부는 먼저 개화 정책을 추진할 기구로 근대적인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근대적인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이후 조선보다 앞서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를 시작했던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시찰단을 파견했다. 조사 시찰단은 1881년 4월 10일 부산을 출발하였는데 약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문교, 내무, 농상, 외무, 재무, 군부, 포병 공창, 세관, 조폐, 도서관, 박물관 등의 정부 기관과 산업 시설을 시찰하였다. 시찰단은 7월 24일 일본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는데, 조사 시찰단원 중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 김양한 등은 일본에 남았다. 시찰단은 시찰한 결과를 문견사건(聞見事件)으로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는데 문견사건은 조선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근대 교육의 보급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통하여 개항이 이루어진 이후 개화파와 정부는 개혁을 추진할 인재를 양성하고자 근대 교육을 보급하려 하였다. 1883년에는 원산에 사립 교육 기관인 원산 학사가 설립되어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다. 원산 학사에서는 산수, 과학, 기계, 농업, 양잠, 채광, 일어, 법률, 세계 역사, 지리를 필수 과목으로 교육하였다. 또, 문예반은 한문, 무예반은 병서와 무예를 전공 과목으로 채택하여 가르쳤다. 이는 원산 학사가 전통 학문을 바탕으로 신식 학문을 접목하여 교육을 실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원산 학사는 갑오개혁 때 원산 소학교가 되어 공립 학교로 전환하였다. 원산에 사립 교육 기관인 원산 학사가 설립되는 가운데 정부도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다.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한 이후 1886년에는 육영 공원을 세워 상류층 자제에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다. 1886년에 설립된 육영 공원에서는 미국인 교사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교육 입국 조서의 정신에 따라 근대 교육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학교와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근대적 교육 제도에 따라 국민 소학 독본, 초등 본국 역사 등 새로운 교과서도 선보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사립 학교를 세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고 애국 계몽 운동가들도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워 근대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구국 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이 활발하였다. ●근대 학교의 설립 근대화가 진행이 되는 가운데 근대 학교의 설립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899년에는 중등 교육 기관인 한성 중학교가 세워지고, 의학교,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근대학교인 동문학은 1883년 4월 설립된 관립 외국어 교육 기관이다. 188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 국가들과의 잇따른 조약 체결로 교류가 증가하면서 근대적 행정기구의 필요성이 증대가 되었다. 동문학 1883년 4월 설립 관립 외국어 교육 기관 이러한 가운데 외교 통상 업무를 담당하고 개화 사업을 추진할 기구로 통리군국사무아문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설치되었다. 외교 통상 업무를 담당하고 개화 사업을 추진할 기구로 통리군국사무아문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설치가 된 후 1883년 봄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내에 동문학이 설치되었다. 근대적인 교육기관인 동문학의 설립 목적은 외국어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외국어를 비롯하여 서구의 근대 지식을 갖춘 실무 관리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동문학을 설립 하였다. 동문학이 설립된 이후에는 크리스트교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근대학교가 활발하게 설립이 되었다. 크리스트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세웠고 스크랜튼은 이화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웠다.
찰스 1세와 크롬웰 찰스 1세는 1625년부터 1649년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으로 통치한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이다. 그의 치세는 의회와의 심각한 갈등, 잉글랜드 내전의 발발, 그리고 결국 군주가 의회의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끝이 났다. 이는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군주가 공개 재판 후 처형된 사례이다. 찰스 1세는 1600년 11월 19일 스코틀랜드 던펌린 궁전에서 태어났다. 찰스는 유년기에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말더듬이와 약한 다리로 고생했다. 1612년 형 헨리 프레더릭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찰스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616년 그는 웨일스 공작과 체스터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제임스 1세는 찰스의 미숙함과 신체적 약점을 우려하여, 그가 의회와 귀족들 앞에서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찰스 1세와 의회파 사이의 잉글랜드 내전은 164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왕당파가 군사적 우위를 점했으며, 1643년의 에지힐 전투는 결정적 승부를 내지 못한 채 끝났다. 청교도 혁명당시에 왕당파는 옥스퍼드를 본거지로 삼고 콘월과 웨일스 등 북서부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의회파는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기병대인 아이언사이드를 중심으로 한 신모범군을 재편성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찰스 1세는 1646년 4월 옥스퍼드를 탈출하여 스코틀랜드로 갔는데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아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지만, 스코틀랜드는 1647년 1월 의회에 그를 인도하는 조건으로 대가를 받았다. 청교도 혁명이 의회파의 승리로 끝난 이후 찰스 1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1649년 1월에 특별법정인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찰스 1세는 재판의 결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찰스1세의 처형은 잉글랜드 연방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 역사상 군주가 법적 재판을 거쳐 공개 처형된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올리버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은 17세기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를 이끈 군사 지도자이자, 잉글랜드 연방의 국가 원수인 호국경으로 통치한 정치가이다. 1599년 헌팅던 크롬웰은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했고, 잉글랜드에 공화정체인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했다. 이후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여 영국의 지배하에 통합했으며, 1653년부터 죽을 때까지 호국경으로서 사실상의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올리버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 잉글랜드 헌팅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비교적 부유한 지주 계층에 속했으며, 외삼촌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을 통해 헨리 8세의 종교 개혁과 연결된 중산층 신흥 귀족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 로버트 크롬웰은 토지 소유자이자 지역 유지였으며,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드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가문 출신이었다. 이러한 가정 배경은 크롬웰에게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제공했다. 크롬웰은 종교적 각성을 경험하며 열성적인 청교도 신자가 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의 가문은 지방의 중산층 젠트리에 속했으며, 토머스 크롬웰의 누이의 후손이라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 로버트 크롬웰은 토지 소유자이자 하급 지방관이었으며,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드는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크롬웰은 일곱 자녀 중 둘째 아들이었고, 그 중 유일하게 성년까지 생존한 남자 형제였다. 크롬웰은 1628년 의회에 처음으로 헌팅던 선거구의 의원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헌팅던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조용한 지방 신사의 삶을 살았다. 그의 초기 생애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중산층의 지위와 청교도적 가풍, 그리고 변호사로서의 경험은 이후 그의 정치적·군사적 경력의 기초를 형성했다. ●크롬웰의 의회 진출 올리버 크롬웰은 1628년 케임브리지 선거구에서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이 초기 의회 경력은 주목받지 못했으나, 1640년 찰스 1세가 소집한 단기의회와 장기의회에 헌팅던 선거구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장기의회에서 왕실의 전제 정치와 국교회의 권위에 강력히 반대하는 의원들 진영에 합류했다.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크롬웰은 즉시 의회파에 가담하여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셔에서 기병대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 공화정 수립 청교도 혁명이 ?난 후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1세는 런던 화이트홀 궁전 앞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1세의 처형은 올리버 크롬웰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크롬웰은 의회파 내 강경파의 핵심 인물로서 국왕과의 협상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처형을 주도했다. 국왕과의 협상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찰스1세를 처형한 크롬웰은 왕을 재판하고 처형하는 것이 신의 뜻과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찰스 1세의 처형 직후에 잉글랜드 의회는 군주제와 의회를 모두 폐지하였다. 군주제와 의회를 모두 폐지한 후에는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했다. 공화정 체제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크롬웰이 이끄는 군대와 그를 지지하는 의원들 손에 있었다. 공화정의 초기 통치는 불안정했는데 왕당파의 저항과 함께, 의회 내부와 군대 내에서도 권력 분배와 통치 방식에 대한 갈등이 존재했다. 군주제와 의회를 모두 폐지하고 공화정 체제인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했던 크롬웰은 이러한 내부적 도전과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에서의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는 데 주력 했다. 공화정 수립 이후 크롬웰의 권력은 더욱 군사 독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호국경에 취임하여 1658년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의 군주로서 잉글랜드 연방을 통치했다. 올리버 크롬웰의 통치는 호국경 정부 또는 보호국 시기로 불린다. 그는 의회와의 협력을 통해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의회의 효율성 부족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1655년과 1658년에 두 차례 의회를 해산하고 군사 정권의 색채가 강한 통치를 펼쳤다. 국내 정책에서는 행정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법률 체계를 개혁하려 했다. 행정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법률 체계를 개혁하려 했던 크롬웰은 대법관 존 램버트와 협력하여 새로운 헌법 초안인 통치 방안을 제정했다. 경제적으로는 네덜란드와의 무역 경쟁을 의식해 1651년 제정된 항해법을 적극 시행하여 영국 해운과 무역을 보호했다.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전국을 11개의 군구로 나누고 각 지역에 소장을 임명하여 치안과 세금 징수를 담당하게 하는 군사적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행정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법률 체계를 개혁하려 했던 크롬웰의 대외 정책은 강력한 해군 건설과 적극적인 군사 원정이 특징이었다. 크롬웰은 영국 해군을 현대화하고 확장하여 영국의 해상 권익을 수호했다. 영국 해군을 현대화하였던 크롬웰의 원정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수장으로서 가톨릭 스페인에 맞서는 십자군적 성격과 함께 영국의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결합된 것이었다. 크롬웰의 강력한 대외 정책은 영국을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크롬웰의 통치 크롬웰의 통치는 호국경이라는 직함 아래 강력한 행정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연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11개의 군사 지구로 나누고 각 지역에 소장을 파견하여 치안과 행정을 감독하게 했다. 크롬웰은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기존 법원을 정비하였다.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기존 법원을 정비하였던 크롬웰은 대법관을 임명하여 사법 개혁을 시도했다. 경제 정책 측면에서는 상업과 제조업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항해법을 강화하여 네덜란드 상선의 경쟁을 제한하고 영국 해운업을 보호했다.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기존 법원을 정비하였던 크롬웰은 유대인들의 영국 재정착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금융 전문성을 경제에 활용하였던 크롬웰의 통치는 상당한 재정적 압박에 시달렸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중한 세금 부과를 하였는데 과중한 세금부과는 국민들의 불만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추구하였던 크롬웰은 소의회를 해산한 후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성문헌법 통치 시행령에 기반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소의회를 해산한 후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성문헌법 통치 시행령에 기반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던 크롬웰은 왕정이나 공화정 대신 '호국경 정치'라는 독특한 체제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러한 크롬웰의 통치는 왕당파는 물론이고 의회 내 급진 공화주의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소의회를 해산한 후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성문헌법 통치 시행령에 기반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던 크롬웰은 여러 번 의회를 소집했지만,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군대에 대한 통제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의회는 쉽게 해산시켰다. ●크롬웰의 대외 정책 청교도 혁명이후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의 대외 정책은 잉글랜드 연방의 권위와 상업적 이익을 확고히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 크롬웰의 통치 기간 동안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프랑스 등 주요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외교적 과제였다. 네덜란드와의 해상 패권 및 무역 경쟁은 청교도 혁명이후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의 대외 정책의 핵심이었다. 청교도 혁명이후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은 1654년부터 1655년까지 서인도 제도를 원정하였다. 1654년부터 1655년까지 서인도 제도를 원정하였던 것은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를 공격하고 잉글랜드의 해외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인도 제도 원정당시 산토도밍고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자메이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654년부터 1655년까지 서인도 제도를 원정하면서 잉글랜드의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크롬웰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쳤다.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쳤던 크롬웰은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이듬해인 1658년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뒨케르크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항구 도시 뒨케르크를 점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2 ●조선 총독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식민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는 36년간 한반도의 정부 노릇을 했다. 36년간 한반도의 정부 노릇을 했던 조선 총독부는 민족 정기를 말살하고 조선인을 탄압하는 정치를 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 최고의 식민통치기구이다. 군대·경찰 등 무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한반도를 통치하면서 민족운동탄압, 경제적 수탈,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다른 식민지와 달리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쳐 총독이 전권을 행사했다. 비대하게 발달한 식민지 관료제가 조선사회에 이식됨으로써 관료 우위의 권위주의 사회가 고착되고 사회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문화가 조성되는 폐단을 낳았다. 이러한 통치기구와 제도·문화는 해방 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됨으로써 탈식민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토지 조사 사업 제가 대한 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에 걸쳐서 전개가 되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에 걸쳐서 전개가 되었던 토지 조사 사업은 한반도의 토지에 대해 조사한 일이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에 걸쳐서 전개가 되었던 토지 조사 사업은 식민 지배에 알맞게 토지 제도를 바꾸고 지세 수입을 늘릴 목적으로 시행했다. ●대한광복군 정부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 정부가 수립 되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1914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 정부이다. 대한광복군정부는 1911년 연해주에서 조직된 권업회를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권업회는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13년 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시베리아와 만주,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결집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대한광복군 정부가 수립 되었던 1914년은 연해주 이민 5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이를 기념하는 행사와 동포들의 군자금 지원을 기대하며 정부 설립이 추진되었다. 대한광복군 정부 1914년에 수립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 정부 권업회를 기반으로 설립 대한광복군 정부의 핵심 인력들은 이후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직후인 3월 17일 연해주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 정부를 수립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고, 이후 9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채 보상 운동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대한제국 국민들이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은 민족 운동이다.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은 민족 운동인 국채 보상 운동은 국가의 주권을 지키려는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국채 보상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일본의 방해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의 방해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던 국채 보상 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주권 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의 내용은 대한매일신보에 소상하게 실려있는데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가 아뢴다. 무릇 신민(臣民)이 된 자가 충성과 의리를 숭상하면 나라가 흥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 반면 불충하고 불의하면 나라는 무너지고 백성은 멸망한다. 비단 고금의 역사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서구 중에서 부강한 나라들과 멸망에 이르게 된 나라들을 보아도 모두 충성과 의리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이는 과거의 옛 나라들이나 먼 서구의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동양의 가까운 경우를 살펴볼 때,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예전에 청국 및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이겼다. 이는 군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유혈이 가득한 전쟁터에 기쁘게 뛰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백성들은 신발을 만들어 팔거나 소지품을 팔고, 아녀자들은 반지를 모아서 군자금에 보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마침내 동서양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전공을 세웠고 그 빛나는 무훈이 세상을 진동시켰으니, 이는 5,000만 민족 각 사람의 뜨거운 피에 기인한 것이며 진실로 충성과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흠모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아, 우리 2,000만 동포가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때를 만나 어느 한 사람 결심하지도 않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단지 우리 황상(皇上)이 지극히 근심하시는 것만 바라보면서 수수방관한 채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면, 이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근래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면, 나라가 무너져서 멸망한 이집트·베트남·폴란드 등의 민족이 모두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자기 몸과 자기 집만 알았을 뿐 군주와 국가를 생각하지 않아 결국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이 바로 정신을 차리고 충성과 의리를 분발할 때가 아닌가?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며,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다. 이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고 만다.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현재 국고로는 보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삼천리 강토는 장차 우리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다. 땅을 한 번 잃으면 돌이킬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과 같은 나라의 민족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3 · 1 운동 3 · 1 운동은 1919년에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의하며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3월 1일에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것을 시작이 되었다.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것을 시작이 되었던 3 · 1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가된 이후 해외에까지 확산되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외부의 간섭을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서 패한 나라들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하는 데 근거가 된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각 민족은 외부의 간섭을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인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우리나라의 3 · 1 운동을 비롯하여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19년 3월 1일, 각 종교계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민족 대표들은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하였고 같은 시각,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은 탑골 공원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독립 선언서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주인임을 선언하노라. 이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이것을 자손만대에 일러 우리 민족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임시 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임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의 대표가 정치를 이끄는 ‘민주 공화제’를 표방했다. 국민의 대표가 정치를 이끄는 ‘민주 공화제’를 표방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5년 11월에 김구 등 주요 인사들이 귀국할 때까지 일제와 맞서 싸우며 우리나라를 대표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가 수석을 맡아 임시정부를 지도했다. ●파리 강화 회의 파리 강화 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뒤처리를 의논한 회의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뒤처리를 의논한 파리 강화 회의는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파리에서 열렸다.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파리에서 열렸던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의 일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 주의’를 주장했다. 민족의 일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 주의는 우리나라의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뒤처리를 의논한 파리 강화 회의를 주도한 인물은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였다. 우리나라의 김탕은 일제강점기 때,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벌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었던 김탕은 일제의 압박과 폭력적인 사건을 계속해서 유럽 언론에 폭로하는 일을 맡았으며, 한일합병이 강제적이며 불법적인 조약임으로 취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국 사정, 임시정부의 활동, 외교사 등의 기사들이 실린 여러 책자를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발간하였다. 김탕이 활동한 주 파리위원부는 최초의 대한민국 해외 대표부로서 유럽 각지에서의 독립활동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파리대표부 김규식 외 김탕 및 여운홍은 파리 제9구 샤또덩가 38번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대표부 청사를 세우고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에서 1919년 3월 28일부터 1920년 4월까지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고 일제의 주권탄압과 폭력적 인권유린을 유럽세계에 알리기 위한 대 열강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의 주권탄압과 폭력적 인권유린을 유럽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그의 첫 번째 목적은 실패하였지만 1921년까지 파리위원부는 자유대한을 한국어·영어·프랑스어로 발행하는 등 프랑스 및 유럽여론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이다.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 왕조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군주이며,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학업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공부벌레로도 유명했다. 하루에 3시간씩 독서를 즐겼으며,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고전을 번역하는 것을 소일로 삼았다.어려서부터 학업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공부벌레로도 유명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한 면모를 보이는 등 언어 쪽의 재능이 출중했다.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말하며 쓰고 원전을 읽고 번역까지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장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 제국 상류층들조차도 그리스어를 배우기 힘들어서 따로 그리스인 가정교사까지 고용해가면서 빡세게 공부했고, 일반적으로 쓰던 라틴어도 후대 사람들이 읽고 쓰기를 익히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그리고 현대처럼 무슨 파파고가 있던 시절도 아니던 시대에 문헌과 스스로의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번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언어뿐 아니라 그 문헌에 대한 배경과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않고서는 힘든 것을 생각하면 일반 지식인들 뺨치는 수준의 교양인이라고 볼수가 있다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부터 1603년까지 44년간 통치했다.엘리자베스 1세때에는 영국 국교회가 확고히 자리잡았다.국교회를 확립하고 절대주의를 완성한 엘리자베스1세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였다.엘리자베스 1세때에는 영국 국교회가 확고히 자리잡는 가운데 영국 르네상스가 꽃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인물이 활약하였다.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에 1559년 통일령을 통해 중도적인 영국 국교회를 재확립했다.종교적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에 1559년 통일령을 통해 중도적인 영국 국교회를 재확립했던 엘리자베스1세는 종교적인 통합을 이룩하는 가운데 내부적 통합을 꾀했다.스페인과의 장기적인 대립을 주도하는 가운데 스페인 무적함대의 격퇴는 영국 해군의 부상과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종교적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에 1559년 통일령을 통해 중도적인 영국 국교회를 재확립했던 엘리자베스1세는 동인도 회사의 설립을 허가하는 등 해외 무역과 탐험을 장려했다.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처녀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에는 튜더 왕조는 단절되었다.엘리자베스 1세튜더 왕조의 마지막 왕결혼하지 않은 독신영국의 황금기를 이룩그리니치 궁전에서 출생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가운데 근대 잉글랜드 국가의 기초를 마련하고 영국의 황금기를 이끈 군주였다.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 궁전에서 출생했다.엘리자베스1세는 왕이 되기 전에 어머니가 참수된 후, 그녀는 서훈이 박탈된 서녀(庶女) 신분으로 전락했다.엘리자베스1세는 왕이 되기 전에 캐서린 파와 캐서린 채프먼 같은 유능한 가정교사들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엘리자베스1세는 왕이 되기 전에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비롯한 고전 언어와 수사학, 신학을 익혔는데 번역과 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이복언니 메리 1세의 통치 기간은 엘리자베스에게 위험한 시기였다. 신교도 귀족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자, 메리 여왕은 이를 위협으로 간주했다. 1554년, 토머스 와이엇이 이끄는 반란이 실패한 후,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 감금되었다.이 사건은 투탑의 여왕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충분한 증거가 부족해 그녀는 처형을 면했지만, 여전히 엄격한 감시 아래에 놓였다.메리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헨리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25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엘리자베스1세의 즉위는 런던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엘리자베스는 즉위 직후 주요 고문으로 윌리엄 세실을 임명하는 가운데 안정적인 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영국 문학의 황금기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영국 문학이 황금기를 이루었다.영국 문학이 황금기를 이루었던 엘리자베스1세 시대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수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활동했다.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영국 문학이 황금기를 이루는 가운데런던의 공공 극장이 성행하고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문학 작품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졌다.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데 엘리자베스1세 시대에 활약을 하였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초기 작품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 밤의 꿈, 헨리 4세 등을 남겼다.이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햄릿과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와 같은 비극들을 발표하였다.엘리자베스1세 시대에 활약을 하였던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인간 심리의 깊이, 언어의 유희, 보편적 주제로 인해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다.엘리자베스1세 시대에는 셰익스피어 외에도 크리스토퍼 말로와 벤 존슨, 에드먼드 스펜서 등의 문학가들이 활약을 하였다.엘리자베스1세 시대의 문학가셰익스피어크리스토퍼 말로벤 존슨크리스토퍼 말로는 포스터스 박사와 몰타의 유대인 등을 통해 강력한 무운시와 비극적 영웅상을 선보였다.이외에 벤 존슨은 풍자 희극으로 명성을 떨쳤다.에드먼드 스펜서의 서사시 요정 여왕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찬미하는 알레고리로, 당시 궁정 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중세의 전통을 벗어나 고전 문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과 현세를 탐구한 것이다.당시에 극장은 이 문화적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제임스 버비지가 지은 '더 시어터'를 시작으로 '더 글로브', '더 로즈'와 같은 공공 극장이 세워져 남녀노소 모든 계층의 관객을 끌어모았다.극작가들은 역사극, 비극, 희극,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빠른 속도로 생산했으며, 이는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이 시대의 문학적 성과는 이후 수세기에 걸쳐 영어와 영국 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몽고의 침입과 원나라의 간섭기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에 있었다.고려는 강동성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와 공동 작전을 취했다.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와 공동 작전을 취했던 일을 빌미로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이러한 가운데 1225년(고종 12) 1월 몽고의 사자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서 공물을 거두어 귀국하던 중 압록강 변에서 도적 떼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몽고의 사자 저고여가 고려에서 공물을 거두어 귀국하던 중 압록강 변에서 도적 떼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고는 이 사건의 책임을 고려에 물으며 국교를 단절하고, 이것을 구실로 1231년(고종 18) 8월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하였다.고려에 대한 몽고의 침입은 1258년 강화를 맺을 때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고려는 몽고와의 장기전을 계획하고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고 여러 지역에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적이 침입하면 섬이나 산성으로 옮기도록 지시하였다.몽고가 고려를 침입할 당시 몽고군을 맞아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운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각 지방의 향리와 농민, 천민 등이었다.●대몽 항쟁과 충주고려에 대한 몽고의 침입당시 충주는 몽고의 침입이 사실상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쟁이 전개되었던 지역이다.이 지역에서 몽고군을 맞아 싸운 주체는 정부군이나 관원들이 아니라 관노, 소민(所民) 등의 주민들이었다.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은 전투 중에 소요되는 식량과 무기를 거의 현지에서 조달하였는데 철은 몽고군이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기류 외에 기병의 소모품인 편자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재료였다.몽고군으로서는 철산지와 관련 기술자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러한 가운데 고려의 중요한 철산지인 다인철소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몽고군이 충주 지역을 침략하자 다인철소민은 철광석과 제련된 철, 여러 가지 제련 도구, 무기나 도구를 만드는 시설 등을 몽고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유학산성에 이전하였다.1254년 차라대가 지휘하는 몽고군이 제철 기술자와 철과 무기류를 확보하기 위해 유학산성을 공격하자 다인철소의 주민들은 일치단결하여 몽고군을 격퇴하였다.●다인철소의 승격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물리친 공으로 다인철소는 1255년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다.다인철소는 1255년 익안현으로 승격된 후 소민들도 양인으로 상승하였다.다인철소민이 몽고군을 격퇴한 전승지로 추정되는 곳은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에 있는 유학산성이다.다인철소민이 몽고군을 격퇴한 전승지로 추정되는 유학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와 금곡리에 걸쳐 있는 유학산 정상 8부 능선에 있다.다인철소민이 몽고군을 맞아 싸워 승리한 다인철소 전투는 민중 항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삼별초의 항쟁몽고의 침입으로 고려와 몽고간의 전쟁이 오래 계속되는 가운데 몽고는 무력으로 고려를 정복하기 어려움을 알고, 육지로 나와 화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몽고와 장기간에 걸친 항전으로 국력의 소모도 매우 컸다.이러한 가운데 몽고와의 항전을 고수해 오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문신들의 주장에 의하여 고려는 몽고와 화의를 맺었다.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된 후에 무신 정권이 몰락하였는데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왕정이 회복되고 뒤이어 개경으로 환도하였다.왕정이 회복되고 뒤이어 개경으로 환도하는 상황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곧 몽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정부의 환도에 반대하고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삼별초는 진도의 용장산성을 중심으로 여원연합군에 대항하였다.진도의 용장산성을 중심으로 여원연합군에 대항하였던 삼별초는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제주도에서 삼별초를 지도한 인물은 김통정이었다.그러나 제주도에서 항전을 펼친 삼별초도 결국 여?몽 연합군에 의해서 평정되고 말았다.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 준 것이었고 우리민족의 자주의식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삼별초가 마지막으로 항전을 하였던 제주도의 애월에는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가 있다.항몽순의비는 삼별초가 몽골에 끝까지 저항하다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이한 넋을 기리는 비석이다.삼별초가 몽골에 끝까지 저항하다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이한 넋을 기리는 비석인 항몽순의비는 김통정 장군을 비롯한 삼별초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김통정 장군을 비롯한 삼별초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비석의 앞면에는 '抗蒙殉義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김통정 장군을 비롯한 삼별초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비석의 뒷면에는 '1978년 5월에 이선근 짓고 김충현 쓰다'라는 기록이 있다.제주도의 애월에 있는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는 삼별초의 항쟁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된 전시관과 함께 관광지로 유지되고 있다●고려와 원고려는 원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원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려를 정복한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함의 건조, 군량의 공급, 군사의 동원을 고려에 강요하였다.이러한 가운데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단행되었다.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모두 실패하였다.고려를 정복한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다.정동행성은 1280년(충렬왕 6)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일본 원정을 위한 군사적 전방 지원 기구로 출발했습니다'정동(征東)'은 로 '동쪽을 정벌한다'는 의미인데 일본을 원정 대상으로 삼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초기에는 충렬왕이 좌승상으로 임명되어 일본 원정 준비를 담당했으나, 일본 원정이 실패하거나 쿠빌라이 칸 사후에는 군사적 성격이 약화되고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연락 및 내정 간섭 기구로 기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