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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불문학]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의 색의 상징적 의미를 통한 욕망의 변화에 관한 연구.
    Ⅰ. 머 리 말Marguerite Duras는 1943년 Les Impudents을 발표한 이래 현재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지대를 탐구하고 있는 작가로서 그녀만의 독특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로 평가 받기도하지만, 독립성과 자유로운 창작정신이 넘치는 그녀는 어떤 문학그룹에 묶이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계속 독자적인 문학의 길을 모색하였다.그녀의 글쓰기 주제는 삶, 자연, 사랑, 기쁨, 일상생활의 고통과 단조로움,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세속적 사건들, 인간의 고독, 운명 등이다.그녀의 글쓰기 주인공은 대부분이 여성이며, 그들의 욕망과 사랑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은 발화점을 찾아 현실을 방황하며 때로는 광기와 죽음의 위기 국면까지 치닫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영상은 한결같이 특이하며 모호하다.주인공들에게 투사되는 이미지는, 인간이기에 앞서 여성임을 인식하는 작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각기 다른 작품들 속에서 서로 연계되고 겹쳐지는 그들 여주인공의 공통된 영상은 그들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금기와 위반의 순환과정을 겪으며 완결될 수 없는 열정의 종말-죽음에 이르는 삶의 고통의 영상으로 살아남게 된다.『Moderato Cantabile』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소리, 색깔, 냄새, 느낌 등으로 나타내어진 물체들이 근본적으로 인물의 심리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다양한 양상을 지니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소설적 공간을 메우고 있으며, 구체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주인공들의 내적 욕망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게 된다.그녀의 초기 작품은 글쓰기의 면에서는 누보로망 작가들과 공통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지를 글쓰기에 적용하여, 단지 하나의 예술이 다른 예술에 영향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경계를 허물고 혼융되는 차원에 위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20세기에 들어서는 장르가 모호해졌고 이런 장르의 구분은 문학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분야에 있어서도깃들인 정서와 속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의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밝혀진 것과 부합하기 때문이다.『Moderato Cantabile』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색채에 대한 묘사가 많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의 색채는 사물들을 통해 부각시키면서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대변해주고 있다.그래서 작품에 드러나 있는 주된 색,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라는 파란색과 욕망의 색인 빨간색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흰색이 작품에는 어떠한 의미로 나타나 있는지 세밀하게 보고자 한다.Ⅱ-1. 파란색색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복잡한 문화구조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일찍이 서양에서는 색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 사회 문화적인 요인과 경제적인 활성화로 인한 색의 중심의 변동추이를 살펴보면, 유럽의 고대와 중세초기까지의 흰색, 검은색, 빨간색을 중심으로 하는 삼색체계에서 18세기이후 낭만주의 영향과 염색술의 발달로 인해 노랑, 빨강, 파랑으로 변화되었다.)과거 이집트에서 파란색은 번영을 가져다주며 또한 장례식에서도 많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파란색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번영과 희망의 의미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파란색의 의미와 일맥상통하지만 장례식에서 많이 등장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파란색은 하늘과 영혼을 상징하는 색으로 염색술이 발달하기 전 파란색이 검은색과 가까운 색으로 나타났다.그리고 유럽에서 파란색은 고대와 중세초기까지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에 파란색은 귀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만 널리 사용되었다. 그 이후 12세기 기독교의 융성으로 인해 성모 마리아의 색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가장 많이 선호되는 색으로 알고 있다.중세 사회에서는 청색바탕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등장할 때까지 청색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으며 파란색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성모 마리아이다. 청색은 성모 마리아의 겉옷에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그 색의 의미는 죽은 그리스도를 보며 슬흐름, 심리, 상징적 의미, 윤리성까지 연결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지배적인 색깔은 단연코 붉은색이다. 빨간색은 은빛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상징적 가치를 나타낸다. 또한 이 작품에서 붉은 색이 내포하는 의미는 여주인공 Anne의 욕망을 말한다. 이것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지닌, 젊고 부유한 부인이 가정이나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으로 갈 때에 매개체가 되는 사물이 붉은 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에서 붉은 색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붉은 색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그녀의 욕망이 전개되는 과정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먼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의 석양의 붉은 이미지의 변화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L’enfant, tourne vers sa partition, remua a pein . seule sa mere le sut- alors que la vedette lui passait dans le sang.악보를 향하고 있던 아이의 몸이 - 아이 엄마만이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 겨우 움직였다. 그때에 모터보트가 아이의 혈관을 타고 지나갔던 것이다.)Le rose de la journee finissante colora le ciel tout entier.낮의 장미빛이 하늘을 온통 물들였다.)Les couleurs du couchant devinrent tout a coup si glorieuses que la blondeur de cet enfant s’en trouva modifiee.석양빛이 아이의 금발이 빛을 잃을 정도로 눈부시게 찬란해졌다.)Le bruit de la mer dans le silence de son obstination se fit entendre de nouveau. Dans un dernier sursaut, le rose du ciel augmenta.아이의 고집스런 침묵 속에서 파도소리가 다시금 밀려왔다. 지평선너머로 막 넘어가려는 해가 하늘을 더욱 붉게 물들었기의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직 젊은 여자였다. 입에서 나온 피가 가느다란 선을 그리면서 여러 가닥 흘러내렸고, 여자를 애무했던 남자의 얼굴에도 피가 묻어있었다.)바로 이 광경에서 Anne을 일상성의 창백한 안정의 세계에서 포도주와 황혼의 붉은 기운, 그리고 사랑의 모험을 대행해 줄 Chauvin이 있는 정열과 욕구의 세계로 내던져지게 된다. 이 살인사건 현장에서 목격한 피에는 죽음과 사랑이 엉겨있다. 핏빛은 작품전체에 걸쳐 Anne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Anne에게 간접적으로 욕망의 파동을 경험케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피의 붉은 색은 Anne의 의식 저변에 잠재된 내적 욕망을 전개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석양과 피의 붉은 색은 결국 카페를 다니도록 작용하게 된 색채로서 그녀의 평온한 마음에 충동과 정신적인 혼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붉은 색의 여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곳은 카페이다. 두 남녀 주인공은 카페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포도주의 색깔은 ‘길에서 만난 어떤 남자의 낯선 입술의 아연케하는 맛’을 지닌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또한 죽음과도 연결되어있으며 열정과 비밀스러운 욕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 죽음은 부르주아에 대한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기존의 도덕과 윤리를 벗어나기 위한 욕망의 색을 의미하기도 한다.포도주는 기독교적 사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죽음과 연결된 것이며, 희생제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삶을 마시는 것이며 삶과 그리고 불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의 상징이자 입문제의의 상징이다.문학작품 중에서 포도주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보들레르는 특히 시집 중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악의 꽃』)에는 포도주에 대한 예찬의 시가 많이 수록하였다. 보들레르는 그의 시 『취하시오 Enivrez-vous』에서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취함으로써 삶을 도 모습을 계속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빨간색의 이미지는 사물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시간과 연결되어지기도 한 항상 노을 지는 모습은 점점 더 석양이 진해지면서 붉은색의 농도는 더 강해진다.Le mur du fond de la salle s’illumina du soleil couchant.홀 안쪽 벽이 석양빛을 받아 환해졌다.)Anne과 Chauvin이 만나는 카페에서는 또 다른 붉은 색을 찾을 수 있다. 카페 여주인이 들고 있는 붉은색의 뜨개질감은 카페 내부의 색을 말한다. 사실 어느 장소보다도 주인공의 욕망이 분출되는 장소는 카페이다. 왜냐하면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도, Chauvin을 만나는 곳도, 붉은 색 포도주를 취하도록 마시는 곳도 카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망의 물결이 넘실대는 카페 안에서의 여주인은 바로 이 두 남녀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이다. Anne과 Chauvin의 만남은 카페 안이라는 공간적인 제한, 곧 밤이 되면 집으로 가야한다는 시간적인 제한, 그리고 사이렌이 울리면 손님들이 몰려온다는 외부 시선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주인이 뜨개질을 하거나, 뜨개질 감을 치우는 행위를 통해 두 남녀의 상서롭지 못한 만남을 감추는 것 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뜨개질 감의 붉은 색은 두 남녀의 만남을 통제해줌으로써 석양빛과 포도주 등으로 점점 더 크기를 더했던 안의 욕망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예시를 미리 해주고 있다.La patronne reprit son tricot rouge, elle jugea inutile de repondre.카페 여주인은 빨간 뜨개질감을 다시 집어 들었고 그녀는 대답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Ⅱ-3. 흰색색채의 역사에서 보면 12세기에 흰색은 결백, 순수, 세례, 전도, 기쁨, 부활, 영생의 색으로 비쳐졌다. 중세의 상징과 감성의 체계에서 부정적인 색으로는 검은색, 일반적으로 선한 의미의 색으로 흰색이 사용되고 있다. )중세의 백기사는 주인공의 친구나 보조적인 역할을다.
    학위논문| 2008.12.23| 27페이지| 3,500원| 조회(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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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고기획- 배스킨라빈스
    머리말1. 기획의 목적더 이상 10대 위주의 아이스크림 강화 전략으로는 생산성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이스크림 시장을 선도하고 프리미엄 아이스크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배스킨라빈스는 이제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과 기회를 모색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시장은 더 이상 배스킨라빈스의 골라먹는 즐거움이 있는 아이스크림으로 선도하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그 당시 시장을 선도했던 소비자 층과 지금의 선도 소비자 층의 차이는 현격하다. 특히 디저트 시장의 확대로 아이스크림 역시 디저트 카테고리의 하나로 속하게 되며, 더 이상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의 1인자로 군림하기에는 시장은 변화하였다. 특히 아이스베리, 레드망고 등과 같이 아이스크림에서 파생된 제품군과 아이스크림과 전혀 상관없는 커피를 판매하는 스타벅스와 커피빈의 기록적인 성장들을 본다면 골라먹는 아이스크림 류와 같이 제품 중심적 메시지로 브랜드를 구성하기에는 디저트 시장의 확장은 확대되었으며 소비자의 기대는 상당히 높아졌다. 소비자들이 배스킨라빈스를 가볍고, 불친절한 종업원과 서비스, 너무 많은 노출 빈도에 따른 싸구려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번 기획서를 작성하게 된 큰 동기가 되었다.광고 상황 분석1. 시장분석1) 배스킨 라빈스 연혁한국 Baskin-robbins는 1985년 샤니와 미국 Baskin-robbins사의 합작투자로 고급 아이스크림 시장을 개척하고, 1986년 제 1호점인 명동점을 개설했다. 1993년 다시 미국 DunkinDonuts Intl사와 합작투자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국내에 점포를 확산해, 현재 국내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업계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600여개의 직영 및 가맹점을 개설, 운영하고 있다. 1985년에 한국에 들어온 베스킨라빈스는 1988년부터 전국에 체인점이 전개되어 베스킨라빈스의 기본 정신인 "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파는 것이다."라는 정신 아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BR의 목표는 소비자들에게 소비자 최초 상기도는 86% 보조 상기도는 약 99%로 브랜드 NO.1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브랜드 선호도와 주 이용률을 보면 85%와 92%로 누구나 알고, 먹어보고, 가본적이 있는 브랜드로 평가되고 있다. 배스킨라빈스가 이러한 시장 우위를 보이는 이유는 다양하고 신선한 아이스크림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브랜드 넘버1을 고수하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스킨라빈스는 연중 발렌타인 데이행사, 어린이날 행사, 크리스마스 행사 등 상시적 행사와 아이스크림의 매출증진을 위한 계절행사 등 다양한 판촉행사를 실시 하고 있으며, 아이스크림 케이크의 개발, 여름철 음료시장을 겨냥한 아이스쿨러의 출시, 신제품 아이스크림 개발 등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피포인트 카드라는 적립카드를 이용한 회원관리 또한 눈여겨 볼 점이다.점포 위생관리에 있어서도 본사에서 모든 점포를 순회 방문하여 검사를 실시하고, 검사 결과에 따라 철저한 위생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점포에서도 매시간 마다, 스쿱 등 기구소독을 하고 있고, 미국 본사에서도 위생전담 팀을 파견하여 2중 3중으로 위생문제에 관해 만반의 조치를 다하고 있다. 또한 직원 서비스 교육을 연중 실시함으로써 고객 서비스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이 외에도 프리스쿱데이(Free Scoop Day)행사 등을 통해 백혈병 소아암 어린이 돕기나 결식아동을 돕는 등 사회 공익 활동을 통해 사회 환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배스킨 라빈스는 윤리경영의 이미지를 보이며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 등의 이미지를 부각 시키며 긍정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2. 경쟁사 분석* 레드망고 ?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의 선두자2003년 3월 1일 오픈서울지역에만 73개에 이르는 매장.주력 상품인 저지방 과일 요구르트- 유지방 함량이 보통 아이스크림의 약 1/10이며 칼로 리는 100그램당 110칼로리이다. 저지방 요구르트에 과일/시리얼/너트 등을 토핑으로 추인 지지를 받고 있다.④다양한 허브티 제공얼그레이, 포모사 우롱, 트로피칼패션, 차이, 모로칸 민트등의 다양한 차 종류를 손쉽게 즐길 수 있다.4) 커피빈의 차별화된 서비스와프로모션- PPL 을 경품행사로 연결.커피빈은 최초 매장이 오픈되기 전인 2001 년에?영화속커피빈을 찾아라? 행사를 벌였던 적이 있다. 커피빈 음료나 매장이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찾아 커피빈 홈페이지를 통해 응모하면 정답자에게 상품을 보내주는 방식이다.* 스타벅스- 국내 커피&카페 시장의 No.11999년 서울 신촌 이화여대에 1호점을 오픈, 현재 전국에 100개 이상의 매장 운영 중1971년 시애틀에서 탄생했으며 현재 CEO인 하워드슐츠(Howard Schultz)회장이 1987년 스타벅스를 설립, 오늘날 전세계 조직과 마케팅에 참여하기 시작해 현재 미국, 캐나다, 일본,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영국, 대만, 중국, 뉴질랜드, 쿠웨이트와 전세계 공항, 서점, 캠퍼스, 병원 등에 라이센스 전문점 및 30 여개국 총 7,000여개의 점포를 운영중.제품이 아니라 커피를 통한 체험과 고객과의 관계를 만들어 감으로써, 20년만에 세계 최고의 종합 커피브랜드로 성장 할 수 있었음.1)메뉴-각종 커피, 스콘(빵),머핀,샌드위치,세이보리(조리빵),페스츄리,케이크 등.2)가격대- 커피 3.500원 이상. ‘오늘의 커피’는 2.000원3)인기비결- 한잔의 커피 그 이상의 것! 스타벅스.①커피제국의 탄생단순한 소비재로서의 커피가 아니라 특별한 질과 서비스와 만남의 공간을 제공하는 브랜드화 된 커피 서비스를 제공, 오늘날 스타벅스는 과거 Coke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인에게 커피 이상의 정서적 일체감을 주는 문화적 상징이다.②스타벅스식 브랜드 마케팅스타벅스는 대중 매체를 통한 광고의 지원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 만의 특별한 브랜드 관리 원칙을 적용해 5년 만에 전국적인 브랜드가 된다.③정신적 가치(Emotional Value)스타벅스는 단순한 한 잔의 커피 그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적어 소비자의 접근이 불리하고 상가, 시내 등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집과의 거리가 멀어 이용에 장애가 있다. 학생이나 직장인들이 자주 접근하지 않는 백화점 내부에 주로 입점해 있는 것도 이용빈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5)Promotion판촉물을 제작, 지원하고 TV광고나 잡지, 극장, 기타 시식행사 등의 광고를 하고 있으나 광고효과가 부족한 상태. 전문점을 더 많이 오픈해서 시각적인 이미지 홍보를 통해 인지도를 강화시킬 필요 있음. 경쟁사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낮은 편이고, 연령별로는 대학생, 직장인 층에 가장 많이 알려진 편.* 하겐다즈 - 슈퍼 프리미엄 아이스크림하겐다즈는 55여개국 이상에서 판매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수퍼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한국에는 1991년에 진출, 현재 16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음.일반 아이스크림의 타겟인 어린이가 아닌 프리미엄 계층의 성인소비자를 타겟으로 함.미국 본사로 부터 최고의 품질로 만들어진 완제품을 수입해서 판매.오바론 공법을 사용, 아아스크림에 공기 함유율을 20%로 줄임. 최고의 맛 제공.베스킨라빈스의 지난해 매출액 350억원에 비하면 하겐다즈의 100억원은 매우 작지만 자신들의 품질위주의 경영방식에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1)메뉴-바, 컵, 아이스크림 퐁듀, 아이스크림 튀김(in 하겐다즈 카페)2)가격대-3.000원 이상~3)Promotion of Haagen Dazs하겐다즈는 일반 아이스크림의 타겟인 어린이가 아닌 프리미엄 계층의 성인소비자를 타겟으로 감각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즐거운 삶을 소구하였다. 이러한 메시지는 기존에 널리 활용되던 대중매체가 아닌 독특한 채널을 통하여 전달되었다.① 非대중매체의 활용- 고급스러운 연상이 브랜드에 전이되도록 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유동인구가 많으며, 고급스럽고, 지명도 높은 지역에 '하겐다즈'는 독특하게 디자인된 까페 분위기의 직영매장을 오픈하였다. 이는 기존의 전통적이고, 평범한 미국식 아이스크림 매장과 차별화하기 위함이었다.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에 현전략이나영이라는깨끗한 이미지의 모델을 기용, 대표상품인녹차아이스크림을 광고.이미지에 기대는 감성소구 광고.?아이스크림광고임에도 불구,아이스크림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전체적인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살짝 아이스크림을 삽입시키는 정도.감성소구 광고.?PPL등을 통한 장소 중심의 마케팅?내부에 색깔마케팅을 통한호감도 증가를꾀하도록 하고 있음? TV나 대중매체 광고보다는 쿠폰 위주의 홍보 중심임.매체TV/ 인쇄/ 잡지?잡지, 뉴스릴리즈와 이벤트 이루어지고있음.?코코펀북(쿠폰잡지)뉴스릴리즈(각종잡지3. 배스킨라빈스 31 자사분석SW?제품 선택의 폭이 넓음?소비 상황에 따라 판매되는 아이스 크림 종류가 매달 교체됨.?넓게 분포된 프렌차이즈점?이벤트 행사 등을 통한 가격할인 및 증정품 증여?아이스크림 마다의 독특한 이름이 있음?해피포인트카드 - 파리바게트, 던킨 도너츠, 베스킨라빈스, 르노뜨르 포 인트 적립 카드?좁은 매장으로 Take-out 형태가 많 음?높은 가격 측정?대표적인 상품의 부재?외국 기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주요 고객층이 10대에 집중됨(50%)- 10대의 특성상 쉽게 질리고 새로 운 것을 탐색하기를 좋아함OT?고급 프리미엄 아이스크림의 대중 화?충북 음성에서 아이스크림을 직접 제작 - 신선한 제품 유지?레드망고, 아이스베리 등 새로운 시 장 진입자의 위협?저관여 제품이기 때문에 소비자들 이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로서 경쟁 제품을 구매할 확률이 높음?베스킨라빈스 - 빙그레 아이스크림상표 분쟁?경기침체로 인한 소비위축4. 소비자분석배스킨라빈스의 주요 소비자는 10대 후반부터~20대 초반으로서(출처: 배스킨라빈스) 소비자 층의 성비는 여성 76 대 남성 24이며, 여성 소비자가 남성 소비자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주요 소비자가 여성 층이기에, 지금까지의 광고 방향과 크리에이티브 전략 역시 여성에 중점적으로 소구하였다고 현재 배스킨라빈스 광고를 제작하는 대행사 LG AD 관계자는 밝혔다.소비자의 80%가량이 학교 근처나 시내 중심가의 배스킨라빈스를 즐겨 이다.
    경영/경제| 2007.12.13| 18페이지| 2,500원| 조회(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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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앙드레 지드( Andre Gide )의 좁은문( La Porte etroite)을 읽고
    「La Porte etroite」Andre Gide좁은문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더 많은 호기심과 읽고 싶은 욕구를 전해주었었지만 작품을 읽는 동안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지는 듯 했다 처음에 작품을 접할 때는 “이게 뭐야, 그냥 사랑얘기처럼 애정소설 같은데” 하고 단정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본 나의 심정을 180°완전히 다른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신앙 또한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작품을 읽으므로서 느낄 수 있는 일면 ‘간접체험’ 이런 것을 이번에야 말로 뼈저리게 느낀 것 같다. 또한 작품을 다 읽고서 평을 읽을 때야 비로소 지드가 지향했던 것이 배덕주의 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혼의 고통을 뒤로하고 좀 더 좋은 어떤 것을 위한 희생( 아니, 그런 것이 있으리라는 신념, 그것은 곧 신의 뜻에 따른 신념이기도 하다. )으로 점철된 이 이야기가 그가 지향했던 배덕주의에 반대되기 때문에 오히려 비판보다는 아름다운 ‘가슴아픔’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작품은 제롬과 알리사 , 줄리에트의 사이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축소하자면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일 것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가슴속에 묻고 지내오긴 하지만 현실적인 지상에서의 여러 가지 상황이 그들의 사랑을 따라 주지 못한다.연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로 알리사의 편지의 방법이 나타나 있을 정도로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알리사가 그에게 편지를 쓰면서 좋아하면서도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을 얼마나 억제하면서, 힘들어하면서 썼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편지를 써서 보낸 뒤 제롬이 이걸 보고 힘들어할까 혼자 걱정하고, 눈물 고이는 그녀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모든 것이 좁은 문의 구성 요소로 각각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내가 특히 감동을 받고 정말 좋아하는 대목은 바로 보티에 목사의 기도문 중의 이야기였다. “좁은 문으로 가기를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쉽게 쉽게 갈 수 있는 문은 누구든지 가려고 하는 자가 많은 반면 통과하기 어렵고 힘든 노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사람이 기피하는 게 당연하다. 똑같은 길을 가더라도 큰문과 작은 문이 있다면 누구든지 큰문을 택할 것이다. 누가 오히려 힘든 그 문을 통과하려 하는가. 알리사는 편지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우리 둘이 가기에는 문이 너무 좁아” 나는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전율이 몸 속에 퍼졌다. 정말 이 작품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감동이 맴돌았다. 이렇게 알리사가 멋있을 줄 몰랐고 그제야 알리사가 제롬에 대한 사랑을 문이 너무 좁아서 둘이 함께 들어 갈 수 없어 자신이 피해줄테니 제롬이 들어가서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길 바란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가 이 작품제목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알리사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 것이다. 결국 알리사는 요양원에서 남몰래 죽어가면서 결국 비련으로 끝나는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알리사의 모델인 사촌누나 마들렌(뒷날의 앙드레 지드의 부인)의 실제 경험이기도 하다. 즉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이 작품에서 비인간적인 자기희생의 허무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유연성 없는 종교관에 휩싸여, 그로인한 그릇된 인식으로 그리고 완벽함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욕구마저도 저버린 한 여성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완벽함에 대한 갈망이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을 포기한다는 이야기 자체가 현대에 시각으로는, 또 그 당시의 시각에서도 비현실적인 것이 되겠지만, 자기 자신을 파괴해가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가슴이 뜯겨져나가는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자신의 방식의 사랑을 해 나갔기에 이 사랑이 숭고하게 여겨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을 신의 직·간접 경험이 아니고선 표현해 낼 수 없는 경험적인 한 인간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좁은문은 가변적이지만 비교적 솔직한 내면의 고백이라서 읽기에는 수월했다. 또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결말을 기다리는 속물적인 근성과 남의 사랑을 몰래 훔쳐보는 것에서 오는 지속적인 즐거움이 두루 섞인 채 좁은문을 마무리지었다. 어쩌면 작가들만의 야비한 글쓰기 수단이었을지언정 독자로 하여금 편안함과 그럴듯함을 두루 갖추었다는 것은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외사촌과의 사랑, 게다가 연상이라는 지극히 서양적인 정서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좁은문`으로 대표되는 숭고한 사랑에 대한 열망 앞에서는 불륜조차도 아름답다고 하는 애틋한 고백록을 읽는 것처럼 압도적인 정서적 추월을 허용해 버렸다.순수한 두 남녀, 순수한 사랑이 아름답게 결실맺기를 기도하며 왠지모를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을 꼬박 지새울 것만 같다. 봄날에는 무수히 흩날리는 벚꽃향을 맡으며 순수한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여름밤엔 한없이 들려오는 밤의 세계에 귀 기울이며, 가을날엔 우연히도 누군가를 만나고 겨울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누군가와 흉내를 내고 싶어진다. 지금 현재 가식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면, 참된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작품을 권해주고 싶다.이 작품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작가의 경험과 사상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또한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앙드레 지드의 생애와 전체적인 문학사상을 알아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앙드레 지드는(Andre' Gide)는 1869년 11월 22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파리 대학 법학부 교수로서 남프랑스 출신의 신교도였다. 이에 반하여 그의 어머니는 북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구교도인 카톨릭 신자로, 부모의 성격 역시 반대였다. 아버지는 시인 기질이 풍부한 몽상가인 데 반해 어머니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였다. 자녀교육의 문제에서도 두 사람의 의견은 상반되어, 어머니는 아이를 무조건 복종하도록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아버 이와 같은 부모의 상반되는 두 요소는 지드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이러한 요소를 배척하고 융합시키면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냈다. 지드의 자서전인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에게 상반되는 영향을 준 이 두 집안과 두 지방처럼 서로 상이한 것은 없다. 나는 작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작품을 통해서만 내 속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요소의 조화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받은 교육의 영향으로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모럴을 내재화시킨 그는 육욕과의 갈등 때문에 번민이 많았다. 26살 되던 해에 오랫동안 청순한 애정을 바치고 있던 사촌누이 마들렌 롱도와 결혼했으나 그의 번뇌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신앙적이라고 할 정도의 정신적 사랑만 품었고 이미 결혼 전에 알제리에서 소년의 육체를 경험해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자각하고 있었다.그리스도교의 모럴과 육욕, 아내에 대한 사랑과 동성애 욕구 등에서 복잡한 심적 갈등 및 대립을 느꼈으며 이는 지드의 작품 곳곳에 드러나 있다. 지드의 생애를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구속된 유년기:1869년에 태어나면서부터 (1891)년 까지. 엄격한 가정 교육의 구속 밑에서, 알 수 없는 내면적 불안과 막연한 갈망을 체험했다. 자신이 성실한 신교도이기를 바라면서도 모든 기성 교육과 도덕관에 대하여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상징주의자들, 특히 말라르메와 사귀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금욕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탈출했다. 억제 할 수 없는 청년기:1893년에 친구 폴 로랑스와 북아메리카로 여행을 떠나 생명의 해방을 노래하는 를 발표한 1902년까지. 모든 구속에서 탈출하여 완전한 자유를 찾아 헤맨다. 자아의 해방을 가져다준 아프리카 여행의 송가 을 발표. 불안한 장년기:(1909). 인간에게 순수한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자아 의식이 단절되는 순간에 비롯되는 무동기의 행위라는 (1914), (1919), (1926). 모험과 절제, 쾌락과 희생의 두 극단 사이를 이에 카트린이라는 딸이 생기자 아내와의 불화가 폭발한다. 에서는 자신의 성생활 방식과 취미가 자연스러운 것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정된 노년기:1939년 이후 모든 창작 활동을 끝맺는다. , , 3부작을 발표한다. 1951년에 임종하여, 퀴베르빌의 묘지에 아내와 나란히 묻힌다. 지드의 문학 작품에 반영된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드와 기독교: 지드는 에서 소티의 형식을 빌어 카톨릭 신자들의 맹목적인 신앙과 교화 자체가 보여주는 당파적 정책의 추한 모습과 그 기만성을 노출시켜 묘사했다. 과감하게 카톨리시즘에 반항하여 신의 존재와 성직자의 위치가 무관함을 증명하여 신에 대한 관념을 인간의 마음 속에 환기시키고자 했다. 지드는 “나는 카톨릭교도도 아니거니와 신교도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그리스도교도이다.” 라고 말하고, 교회의 교의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그리스도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사회 문제에 눈뜬 지드: 그는 에서 마르크 알레그레와 콩고 여행 중 가혹한 프랑스 식민 정책에 희생되고 있는 불쌍한 토착민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이를 고발했다. 이후부터 그는 허위, 부정에 대한 증오, 피압자에 대한 사랑, 진실 추구의 욕구 등의 정서적 태도를 간직했다. 이로써 지드는 “현대의 양심” 이라고 불렸다. 공산주의와 지드:1932년에는 공산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개인주의 모랄의 필연적인 진전으로, “참으로 이해된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봉사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사회적 개인이 자유로이 살 수 있는 세계를 공산주의에서 찾았다. 현재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하여, 공산주의는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반으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기독교가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철저하게 살렸더라면 공산주의의 존재 이유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에서 소련의 현실 정치와 날카롭게 대립하여 소련을 강하게 자극했다. 앙드레 지드의 작품을 분류 해보면 좁은 문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의 형식도 이해할 수 있다. 모랄리스트로서: 인간의 발견. 즉 인간의 본성과 능력과,
    독후감/창작| 2008.06.25| 4페이지| 1,500원| 조회(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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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문학]프랑스의 중세문학
    Ⅰ. 프랑스 문학프랑스어의 전신인 로망어로 쓰여 전해지는 문학작품다운 첫 문헌 《알렉시스 성자전(聖者傳)》 등이 11세기의 것인 만큼 이 무렵을 프랑스문학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라틴어로 쓰인 문헌들이 그 이전부터 있었고, 그것이 방대한 문학의 보고임은 사실이나 교회학자들의 세계 속에 갇혀 있어 민중과는 담을 쌓아왔다는 특이성 때문에 한 국민의 문학에서는 제외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문학은 프랑스의 국토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에 국한되는 것도 하나의 상식이다.프랑스문학의 특징은 그들의 국민성에서 비롯된다. 투철한 대화 정신이 우선 어느 국민보다도 돋보인다. 이치를 따지기 좋아해 담론 ·비판을 즐기는 기질, 앙드레 지드가 지적했듯이 논리를 진리보다도 사랑하는 성향은 데카르트적인 사고의 합리성과 문체의 명석함을 낳아 형식의 조화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고전주의 문학을 싹트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기에 걸쳐 고루 활발한 문학이론 논쟁을 통해 다양한 비평문학을 꽃피게 함으로써 언제나 프랑스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내는 기수 노릇을 도맡아왔다. 대화의 정신은 한편으로 서로 어긋나는 요소들을 절충 ·조절하는 구실도 한다. 수다스러워 경박으로 흐르기 쉽고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가 지나쳐 우스꽝스러운 유행에 들뜨거나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으로 치닫는가 하면, 거의 모든 국민이 가톨릭 신자로 어느 나라보다 보수적인 면도 있어 그 문학은 매우 복잡다양하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나 독일의 괴테 같은 특출한 대표자가 없는 대신, 전체의 수준이 골고루 높아 작품들의 질과 양이 어느 세기에나 고르며, 지배나 통제에 의한 획일이 아니라 절제와 조화에 의한 개성의 다양성을 견지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를테면 모순이나 갈등의 해결에 있어 대화를 통한 절도와 균형을 존중하는 가장 현실주의적인 문학이다. 현실주의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조건에 충실하다는 뜻에서 인간적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인간성에 대한 굳건한 신뢰는 르네상스 이후의 문학에서 두드러진 바 있지만, 있는 그ingiens)열었다. 그 후 8세기말에서 9세기초에 걸쳐 서유럽에는 카롤르 大帝(샤를르마뉴)에 의해 대제국이 수립되어 유럽에 통일된 국가의 기틀이 잡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 대제국은 계속 유지되지 못하고 대제의 손자들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그전과 다름없는 정치적 혼란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왕조는 이어졌지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뿐 왕권은 극히 미약하였고, 각 지역마다 제후를 중심으로 소왕국과 같은 것이 난립함으로써 이른바 군웅할거의 봉건제도가 굳어져 갔다.중세의 정치적 사회적 성격을 특징짓는 이 제도는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전란 속에서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제도이다. 대다수의 무력한 백성들은 그들을 보호해 줄 강력한 인물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보호를 받는 대신 몸과 재산을 바쳐 영주에게 절대적 복종을 맹세함으로써 이 양자 사이에 宗主(諸侯)와 家臣의 강한 유대가 생겨났다. 군웅할거의 긴장된 상황하에서 세력다툼과 영토분쟁에 의한 전란은 끊일 사이가 없었으나 한편 이 봉건제도는 가신간의 신의와 충성의 관계에 바탕을 둔, 명예라는 도덕적 가치를 고양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중세문학에 있어 하나의 영속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봉건제도하에서 중세의 사회신분은 둘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군왕과 영주를 중심으로 한 귀족(여기서는 무사 또는 기사와 더불어 성직자가 포함된다)과, 또 하나는 성밖에 거주하는 서민층이다. 우리는 중세문학 가운데 비교적 명확하게 이와 같은 신분구성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중세의 사회적 구조가 봉건제도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중세를 지탱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정신적 원리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기독교 신앙이다. 갈리아를 침입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래 기독교 정신 및 교회의 권위는 중세인의 사고와 생활을 지배하여 그들의 거칠고 난폭한 성향을 누그러뜨렸으며 명예의 개념에 종교적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독특한 중세적 모랄을 키워나갔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봉건독교 사회는 11세기에 이르러 사회의 안정된 제도로 정착되었고 때를 같이하여 종교적 정렬이 고취되어 십자군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1세기말에는(1096-1099) 제 1 회 십자군 원정이 감행되었다. 사회의 이와 같은 전반적 기운이 문학활동을 자극한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 문학의 최초의 걸작품 『聖 알렉시스傳』(1040년경)과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 1100년경)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 때의 일이다. 『聖 알렉시스傳』은 10세기경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성자전의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대부분 라틴어에서 속어로 번안한 것에 불과했던 무미하고 단조로운 종래의 성자전에 비해, 이 작품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할 만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한편, 『롤랑의 노래』는 앞으로 피어날 서사시, 이른바 무훈시(Chanson de geste)를 예고하는 작품인 동시에, 놀랍게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무훈시의 전형이기도 하다.무훈시가 노래로 불리워지고 글로 쓰여진 것은 11세기말에서 12세기에 걸쳐서이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그보다 3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 즉 카롤링거 왕조의 용맹스럽고 충성스런 무사들의 추억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의 무사들의 추억이 십자군 원정을 전후한 당대의 종교적 열정으로 짙게 물들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프랑스의 중세 서사시는 단순한 전쟁과 패배와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도의 싸움, 다시 말해서 聖戰의 노래가 된다. 십자군을 가리켜 “프랑스인의 손을 통해 수행되는 신의 거룩한 싸움”이라 부른 것과 동일한 정신이 무훈시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무훈시는 ‘성자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롤랑의 노래』의 배경에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다. 778년, 젊은 왕 샤를르가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올 때 피레네 산중의 롱스보 계곡에서 바스크족의 기습을 받아 후위부대가 전멸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공작을 하는 첫 대목과 롤랑이 전사하는 중심대목과 샤를마뉴가 보복하는 끝 대목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명쾌하고 상호관계도 긴밀하다-작자는 분명하지 않으며, 성립 연대는 1098년부터 110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어(中世語) 10음절 시구 4,002행으로 되었다. 12세기 후반의 옥스퍼드 고사본(古寫本)에 실제 노래로 불리던 이 시의 순수한 모습이 전한다. 그 내용은 778년 8월 15일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 대제(大帝)의 후위부대가 피레네 산속 롱스포에서 바스크인(人)의 기습으로 전멸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치밀한 구성과 기품 있고 힘찬 문체로 황제와 신에게 봉사하는 봉건 프랑스의 무사도(武士道)를 찬양하고, 대장 롤랑의 용감함, 막료(幕僚) 올리비에의 슬기, 간신(奸臣) 가늘롱의 원한을 대립시키면서 사라센 대군을 적군으로 설정, 회교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승리를 노래하였다. 한편 작자 ·연대 ·성립과정 ·구성요소 등에 관해서는 각국의 연구자들 사이에 아직도 이설이 많다2. 기사도 로망-보다 신기한 것을 듣고자 하는 대중들의 요구는 무훈시의 변형과 타락을 가져오는 한편, 12세기 중엽 이후로는 다양한 허구적 작품의 제작을 유발시켰다. '기사도 로망'으로 총칭되는 이러한 작품군은, 무훈을 추구하는 기사 귀족의 이상을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변함이 없으나, 그 목적을 바뀌었는데, 신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 목적이었던 무훈시에서 그 대상이 사랑하는 여성으로 바뀌게 되었다.이러한 이념의 전환은 봉건제도 확립에 따른 세련미와 우아와 여성숭배의 풍조 등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12세기 프랑스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관념적인 여성 신성화와 연애 정식화는 유럽적인 심성의 한 기틀을 이루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2. 1) 궁정풍이야기-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 기사들이 여성에게 멋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멋있는 기사도를 보여줌. (과거에는 왕의 충성의 맹세였던 기사도)-중세 초기에 문학은 입으로 전해지고 불리워진 口碑文學일 )을 포함한 일련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들 가운데 기사적 사랑의 이상을 그린 그는, 그러나 그의 최후의 작품 『페르스발』(Perceval)에 이르러서는 여성숭배를 뛰어넘어 기독교적 신비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聖杯’(Graal)를 궁극적인 추구의 대상으로 제시함으로써 중세의 영원한 종교적 정열로 복귀하고 있다.궁정풍 로망은 이전의 그리고 동시대의 장르들로부터 주제와 기술을 차용하여 이들을 완성시키고 새로운 요구에 따라 변형시킨다. 로망은 무훈시가 찬양한 무용에, 거부하지는 안았지만 그 무용을 서정시에 의해 노래된 사랑, 관대함, 예절, 풍습의 우아함 등의 자질을 부여하여 그 거친 성격을 억제하였다. 몽상을 조장하는 요정담의 세계에서 소설은 귀족들의 삶의 배경과 형태를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그래서 독자들은 즐겁게 현실의 세계를 빠져 나와 이상적 엘리트에 속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충족됨을 느꼈다.로망의 형태 또한 궁정풍 로망을 이러한 엘리트를 위한 장르로 만들었다. 무훈시가 대중에게 낭송되는 것이었다면 로망은 독서용이었다. 무훈시가 풍요하면서도 단순한 힘찬 기운을 선호하였다면 로망은 미묘한 뉘앙스를 중시하였다. 이라는 명칭은 이 새로운 문학의 기원과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으로 인하여 그 발생에서(12세기 중반) 완성까지(13세기 중반) 로망을 형성하였던 영향력들과 의도, 극도로 다양한 주제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궁정 사회 속에서 발생한 소설은 여가를 선용하면서 을 조성하는 데 노력하였던 세련된 귀족계급의 동경에 부응한다.2. 2) 모험로망-가공적인 상상이 판치는 이들 로망보다는 현실생활에 집착함으로써 13세기의 소박한 인간 미와 세태를 섬세하게 그려낸 《오카생과 니콜레트》 등 100편 가량의 모험로망도 기사도 로망에 속한다.-기사도 로망의 한 변종으로서, 12~13세기에 걸쳐 브르타뉴 계통의 로망과 병행하여 발달한 쟝르이다. 현실 생화에 집착한 소박한 인간미를 보여준다. 13세기의 풍속을 알고자 하는 데에는 다시없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다.
    인문/어학| 2008.06.25| 10페이지| 2,000원| 조회(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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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실크로드를 따라서(신라와의 교역)
    실크로드를 따라서우리나라에 KTX가 개통 된지 많은 시간이 지났다. 2004년 4월에 개통을 시작했으니 1년도 더 지난샘이다. 이렇게 빠르고 신속함을 자랑하는 철도가 있는 지금은 먼 곳을 간다는 것은 잠시의 여유와 여가를 즐기는 생활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 그 옛날은 어땠을까? 그때도 지금 처럼 차를 한잔 마시며, 여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생활이였을까?실크로드를 우리말대로 옮긴 ‘비단길’이란 단어 때문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다. 처음은 말 그대로 비단이 깔려있다는 상상, 하지만 길에 비단을 까는 건 무리일거 같다는 생각에 그럼 오늘날처럼 잘 가꾸어진 길인가? 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수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끊이지 않고 살아 있는 길 ‘실크로드’,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이 길 위에서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어느 시대나 영웅이 탄생되는 시기를 바라보면 영웅이 탄생되는 조건이 갖춰지기 마련이다. 국가 간의 힘겨루기에서 영웅장군이 탄생되고, 한 계층의 다른 계층으로부터의 압박에서 개혁영웅이 탄생되며, 무제와 같이 국가가 번영하길 바라는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영웅군주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영웅의 탄생은 한 개인의 자질보다는 시대의 힘이 크게 반영되는 것이 아닐까한다.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후대에 진정 영웅으로 평가되는 몇 몇 이들은 시대의 도움을 받아 더 빛나는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에 비해 티무르제국의 ‘티무르’라는 이름은 썩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티무르가 정복을 위해 보낸 시간과 다녔던 지역을 보면 칭기즈칸의 패업(覇業)은 오히려 빛을 잃을 정도이다. 사실 칭기즈칸은 생애의 대부분을 몽골 초원의 통일로 보냈고, 그가 참가했던 대외원정은 세 군데, 즉 서하·금나라·호레즘뿐이었다. 그러나 1336년에 출생한 티무르는 1369년 중앙아시아의 유목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뒤, 1405년에 중국을 치러 가다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40년을 유라시아 사방 각지를 원정고 티무르는 건설했다"는 말처럼 티무르는 사마르칸드를 사랑하여 이 도시를 세계제국의 수도로 만들려고 하였다. 화려한 왕궁과 모스크, 마드레세 이슬람 신학교 및 관개망과 바자르를 정비하였다. 티무르는 또 사마르칸트 주위에 바그다드, 다마스커스, 카이로, 쉬라즈, 술타니아 등 이슬람권의 주요 도시이름을 딴 취락을 건설하여 수도의 지위를 한층 더 높이려고 하였다. 특히 티무르는 원정 때마다 각지의 일류 건축기사들을 포로로 잡아와 건축물들을 짓게 하였다. 악사라이궁과 비비하눔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은 문화사업의 결과로 사마르칸트 뿐만 아니라, 트랜스옥시아나 전체가 몽골침입이후 폐허화된 데서 재건되어 사산조 이래의 빛나는 영화를 자랑하게 되었다. 이란, 시리아, 동튀르키스탄, 중국 등에서 온 기술자들이 유리기기, 도자기, 융단, 자수, 제지 무기 등 각종 방면에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도로, 시장, 대상숙박소 등을 정비하여 사마르칸트는 모든 내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중추가 되었다. 티무르 사후 그의 아들인 샤루흐와 울루그 벡이 혼란을 정리하고 정치적 수완과 문화에 대한 원조로 인해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오스만 튀르크와의 친선관계와 실크로드를 둘러싼 동서교역이 더욱 번창하게 하였다. 특히 울루그 벡은 사마르칸트 왕정에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모아서 레시스탄의 메드레세를 포함한 화려한 건물들을 세우고 사마르칸트 북쪽에 천문대를 세웠고 스스로 천문학적 관측과 천문학, 역사, 문학 등의 분야에 각종 저술을 남겼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옥좌에 있는 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라고 비유하였고, 이런 정세하에서 당시의 실크로드는 크게 번영하였다. 이 내륙아시아가 티무르제국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던 15세기에는 바로 13세기 몽골제국의 전성기와 같은 맥락으로 동서교통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동서를 잇는 대상의 중심은 사르트인들이었고 이들은 중국에게 회회(回回)로 불려져 15세기초에는 천산산맥동부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입지를 다지고 있었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가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쇠퇴의 근본적인 이유는 동서튀르키스탄에 있었던 유목민족들의 혼란과 분열이었다. 만약에 이러한 상황이 안정되었었다면 실크로드의 영화는 부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6, 17세기 이후 실크로드가 완전히 쓸모없이 되어버렸다는 견해는 틀린 것으로, 그 규모나 범위에서 보아도 18, 19세기의 실크로드는 질과 양 측면에서 과거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유럽인들의 동쪽진출이 너무나 강력했고 이에 따른 무역도 성대했기 때문에 내륙아시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이 보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규모와 내용에서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은 이제 근대세계에서 역사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칭기즈칸이 이룩한 몽골 대제국은 1백 몇 십 년밖에 지속되지 못하였으나 이 시기의 중국교역은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이 전성기의 말미를 장식할 정화의 대 원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유라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한 몽골 제국은 14세기 후반부터 해체와 재편이 시작되었다. 이때 투르키스탄을 중심으로 건국된 티무르 제국과 중국의 강남을 중심으로 건국된 명 제국이 유라시아 교역 망 재편의 중심이 되었다. 티무르 제국이 몽골 제국 재흥의 깃발을 내걸고 초원 제국의 부흥을 지향한 데 반해, 명 제국은 전통적인 중화 제국을 재건하고, 동아시아 세계를 유라시아의 대 교역 망에서 분리하려고 했다. 이러한 명 제국의 정치적 결단으로 바다의 교역 망도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민간 상인의 해외 무역은 금지되고 정크 교역은 밀무역으로만 존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화 함대의 남해 원정은 명 제국의 해금 정책으로 잃어버린 정크 교역권을 명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인 조공 무역 체제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명 제국은 주원장에 의해 성립되었고 그는 전통적 중화 제국의 재건을 꾀하며 농업체제를 정비하고 민간의 대외무역을 금지시켰다. 2대 건문제 이후 황제가 된 3대 영락제는 환 국가들이 넓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반 국민들도 인식하게 되고 세계관의 변화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개방하게 되는 것과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서양의 것처럼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아다. 명은 한족 중심의 중화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 속에서 다른 것들을 신기하게 여길 뿐 남해원정을 통해서 중화의식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남해원정은 정화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대규모 사절을 보내는 것에 대한 비용의 부담이 있었다. 또 당시에 권력을 가진 유교적 훈련을 받은 문관들이 대외 팽창을 거부한 것과 문관들의 환관에 대한 질투가 원인이 된다. 다음으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원정단을 꾸리기에 재정이 부목하게 된 것도 있다. 이후, 명의 선박건조는 소형선박 중심으로 바뀌고 해군력도 쇠퇴하게 된다. 지배층은 안으로 안으로 지키기에 급급하고, 대외팽창의 의지가 사라지게 된다. 정화의 남해원정을 흔히들 콜럼버스나 바스코다가마 등 서양의 신대륙 발견의 경우와 비교하는데 이것을 통해 정화의 원정이 가지는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정화는 새로운 항로의 발견을 한 것이 아니다. 이미 명나라 때 까지 알려진 경로로 외교사절의 역할을 한 것이다. 탐험이나 개척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고 외교를 위해 돌아보는 순행 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공무역의 형태였지만 이것은 우리역사 가운데 삼국시대 백제의 해상무역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물론 백제는 여러 지역을 항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다양한 국가와의 교역로를 확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외 무역을 통해서 문물을 교류하는 해양으로 넓은 개방적인 의식은 명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실크로드의 동쪽 종점인 한국도 고대부터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으로 문화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교역을 하면 물자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이민도 생기고 학문과 종교도 전파된다.6세기를 기해 일단 로마 문화의 영향이 시들해지자, 대신 서역문화가 한반도에 파도처향 같은 향료를 일본에 재수출하는 지혜도 발휘했다. 금령에는 진골녀의 빗과 관을, 육두품녀의 빗을 슬슬(瑟瑟)로 꾸미는 것을 금한다고 했다. 슬슬은 투명하고 푸른색의 귀중한 보석인데, 8세기 중엽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이 7만 당군을 이끌고 그 유명한 탈라스 전쟁을 치르면서 원산지인 석국(현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서 10여 석을 노획한 것이 동아시아에 전해진 첫 슬슬이다. 이래저래 슬슬은 우리의 민족사와 연을 맺고 있는 진귀한 보석이다. 이러한 보석으로 빗을 장식하는 것을 금했다고 하니, 당시 이 보석에 대한 신라인들의 소유욕과 애착심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말해준다.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서역문물들도 적지 않다. 육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서역산 고급모직 옷감인 ‘계’는 여인들의 바지나 버선, 신, 목수건, 옷고름에 장식하는 것을 금하였다. 목수건이나 버선 같이 수요가 적은 부분에까지 계의 사용을 금지시킨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히 귀중한 물품이었음에 틀림없다.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에서 나는 공작새 꼬리와 진랍국(현 캄보디아) 특산인 비취새 털을 목수건 같은 장신구에 수놓을 수 없게 하였으니, 신라인들의 사치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수용성이 더욱 돋보인다. 이렇게 신라인들이 폭넓게 서역문물을 받아들인 세태는 기록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로도 남아 있어 그 실상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약 70년 전 경주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른바 ‘입수쌍조문석조유물’이 바로 그 일례다. 나무를 한가운데 두고 두 마리 새가 마주하고 있는 석조유물이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이 유물과 더불어 비슷한 무늬를 가진 직경 2.5cm의 ‘화수대금문금구’(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날짐승이 마주보고 있는 무늬의 금제 기구)도 1966년 경주 황용사 목탑지사리구멍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 유물의 공통적인 무늬는 평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키며, 원 밖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대표적인 사산(이
    인문/어학| 2008.06.25| 9페이지| 2,000원| 조회(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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