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사람이 살아오면서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대학의 전공을 결정한다던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즉 목표와 꿈을 정한다던지 하는 일을 들 수 있다. 삶에 있어 큰 방향을 결정하는 이러한 선택의 저변에는 고등학교 때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했던 과목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학입시를 예로 들자면, 나의 경우에도 사학과를 지원했을 당시 면접에서 왜 이 과를 지원하였나? 라고 물으시던 교수님께 고등학교 때 인상 깊게 가르쳐주셨던 고등학교 국사선생님과 나의 흥미가 국사에 있었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이 책에서는 초등, 중등, 고등, 대학에서의 역사교육에 대해 설명하고 지금 역사교육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그 해결을 위한 과제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중 전체적인 인격형성과 더불어서 전공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고등학교에서의 역사교육에 관해 좀 더 유의 깊게 읽게 되었다.앞으로 고등학교 역사교육에 대해 서술한 『고등학교 역사교육의 과제와 전망』에 관해 나의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본론『고등학교 역사교육의 과제』에서 역사교육의 목적은 국가, 민족,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깊게 하고 그런 다음에 그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 내용면과 방법 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내용면에서는 국사와 세계사의 연계보다는 국사가 독립적, 독자적인 교과가 되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으며 사회사, 생활사, 문화사 중심으로 역사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역사교육은 선택이 아닌 필수여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방법 면에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대표적이고 중점적인 내용이 구술사라든가 시청각 자료 따위를 좀 적극적으로 이용하거나 원 사료를 많이 제시하고 일화라 던지 재미있는 이야기 따위를 소개하거나 해서 역사이해를 보다 생동감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이 책에서는 고등학교 학생들의 성장기 특성을 고려하면서 이들이 국제화시대에 바람직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데 역사교육은 매우 큰 영행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역사교육은 이 시대와 세계를 바르게 인식하게 하고 합리적인 사고력과 폭 넓은 지적 능력,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역사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며, 민족의 통일을 슬기롭게 감당하고, 민족의 이질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역량을 배양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교육이지만, 2002년부터 실시 된 제 7차 교육과정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바람직한 역사 교육의 전개방안과 함께 단계별 내용구성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이 책의 내용 중 가장 비중이 큰 부분이 제 7차 교육과정 개혁안에 대한 문제점 제시이다. 자세하게 알아보면, 첫째, 국사교과가 통합 사회교과의 일부 내용으로 다루어지게 된다는 것은, 종래의 역사교육의 본질을 약화시키고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국민공통 기본 교육과정에서 국사는, 그저 과거의 사실을 기본적 교양으로 배우는 여러 과목 중 하나에 불과한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로, 국사과목을 선택과목 화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국사과목의 독립성을 상실케 하는 문제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셋째, 세계사 교육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제 7차 교육과정은 세계화라는 기치 아래 ‘사회과 통합’이라는 문제를 추진하면서, “국사를 사회교과의 한 과목으로 세계사와 연관시켜 지도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국사 교육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세계사의 고유 영역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한편, 이 책에서는 고등학교 역사교육의 교수-학습 방법이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 속의 인간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면서 당대의 사료나 재구성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활용하며 문화유적지 답사, 시청각 기재를 이용하여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감동을 가습에 안겨주는 역사 교육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나는 이 책의 첫 번째 의견에 동감한다. “국사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의 실체를 밝혀 주는 과목으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함양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활동상을 민족사적 차원에서 상호관련 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교육부 지침서에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8학년과 9학년에서 배우는 국사를 다시 10하견에서 배운다면 비록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이루어진 분류사의 형태라 하더라도 지적 호기심의 감소로 이어 질 수도 있으며, 또한 4단위라는 극히 적은 시간에 교사와 학생이 상호작용하는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사회 경제사와 문화사의 영역은 학생들의 보다 높은 역사 인식 수준을 요구하므로 인성발달간계에 비추어 보아도 적절치 못하다고 봅니다. 국사를 통합 사회교과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국사 교육의 본질을 축소하고 실용성에 의거하여 국사 교육을 재편성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공감한다.둘째로, 국사과목을 선택과목화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크게 공감한다. 역사 교육의 올바른 방향성을 정립하기 위한 이 시대의 과제는 학생들에게 민족적 자아를 확립하게 함으로써 현재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 상황을 구체적으로 청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이나 독일, 영국, 일본 등의 나라도 자국의 역사교육에 더욱 치중하는 추세인데 국사를 다른 일반과목과 함께 동일한 위치에 놓고 선택하게 하는 일은 잘못 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셋째로, 이 글의 저자가 주장하는 역사 교육의 목적인 민족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다. 최근 학계에서 주장되고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민족주의 사관에 대한 것이다. 민족주의가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데 이 책이 출판될 당시인 1999년도에는 민족주의 사관에 관한 비판이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나 역시도 역사를 왜 배워야 하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흔히 할 수 있는 말인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우리 민족을 알아야 세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이렇듯 역사교육에서는 민족이 중요할 수밖에 없지만 과거 우리 역사 교과서는 무척 민족주의 사관에 의거하여 지어져 있다. 애국심 고취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키울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와 융화되기 힘들 수 있는 일종의 독불 장군을 만들 수도 있는 예민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엔 중용론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으로 민족의 애국심 고취와 세계와 화합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찾아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중용에 찬성하고 있다.마지막으로 이 글의 저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쳐 본 적 없는 분으로 이론과 주장은 아주 명확하나 과연 교사들에게 이것이 실현 가능한 부분인지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장교사들은 매시간 땀흘려가며 교육을 하고 있으며 정규 수업이 모자라 방편을 찾고 있는 이 와중에 즐겁게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모자라는 수업일수에 다양한 읽을거리, 영상자료의 활용, 현장 답사, 탐구 학습 등 학생 주도의 수업 등으로 즐거운 역사 교육을 펼치기에는 교사의 등 위에 지워진 대학입학제도라는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이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역사 교육을 사회사. 생활사. 문화사로 나누어 가르칠 수 있는 제도가 완비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계신데, 과연 고등학교 과정에서 역사를 이렇게 나누어 가르칠 수 있는 여건이 가능한지도 물어보고 싶다. 물론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기에는 너무 부정적인 것도 사실이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간도 부족하고, 대학입시에 쫓겨 암기과목으로 추락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제 7차 교육과정 개정안에 따르면 역사 교과를 선택과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교육 정책이 뒷받침 되고 사회적으로 역사교과에 대해 관심이 증폭되고 지지가 있지 않은 이상 저렇게 세분화하여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는 힘들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나 역시도 고등학교에서 저렇게 배운 경험은 없었으며 교과서 위주로 교과서를 끝내는 것에 의의를 둔 수업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다. 대학에 와서도 저렇게 분류사적으로 배운 기억은 아주 드문 것 같다. 하나의 알찬 수업을 위해 이 모든 준비와 시간을 모두 교사에게 지워지는 짐인 이상 저자가 원하는 수업은 단지 이론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제목처럼 역사교육,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라는 제목에 비해 제시하는 제안은 너무도 이루어지기 힘든 내용이라서 읽으면서도 좀 갑갑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하였다.
목 차Ⅰ. 서론 -1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Ⅱ. 르네상스 -21. 르네상스2. 르네상스 미술의 발달Ⅲ.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그의 작품 -51. 레오나르도 다 빈치(1) 생애2. 작품(1) 최후의 만찬(2) 모나리자Ⅳ. 결론 -11Ⅴ. 참고문헌 -12Ⅰ. 서론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학생들은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지역적, 영역 면에서 인류생활의 모든 면을 살펴보게 된다. 이와 같이 세계사는 지구상의 인류가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그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는지를 다루는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목을 통해 학생들은 현대 세계의 형성과정과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면, 자신의 현재 위치와 나아갈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더불어 세계사를 학습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국제 이해와 국제적 감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이러한 세계사 교과를 배우는 과정 속에서 역사 속 큰 변화를 이해하는 방법 중에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행위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인물학습은 인간의 과거 행위와 실천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역사학습의 중요한 한 가지 방법이다. 역사는 대부분 다수 인간의 행동을 다루지만 역사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개별인물이나 소수집단에 대한 학습도 중요한 역사이해 방식이다. 인물학습은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제도와 구조라는 무형의 추상적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만들어낸 개인이나 집단의 생각과 행동을 접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체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특정한 인물을 선정하고 그의 활동과 신인간의 역동적인 삶의 여정으로 여기게 한다. 또한 추체험과 감정이입을 통해 자신이 직접 과거의 인물이 되어, 그의 생각과 의도를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고양시키게 된다. 더 나아가서 현재의 삶을 살고 있는 학생 자신의 존재의의를 역사적 맥락 속에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다.16세기에 미술사가 열전을 저술한 '바사리'는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중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 후 거친 고트인에 의하여 독일양식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잔틴 양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화가 치마부에, 지오토 및 조각가 피사노 등이 나와 토스카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부터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완성된 고전고대 미술의 부활을 ‘레나시타’라는 말로써 파악 하였다.르네상스를 단순히 고대미술의 부활만이 아니라 고대문화 전체의 부활과 그것을 발판으로 한 새로운 근대문화의 창조라고 파악하고, 이를 하나의 시대개념으로 제시간 것은 19세기의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였다. 그러나 미슐레는 르네상스를 프랑스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고, 그나마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이 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학자의 주목을 받아 르네상스라고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개념에 명확한 윤곽을 주고 오늘과 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4세기경부터 고전고대문화의 부활을 발판으로 한 근대 문화 창조의 움직임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학자는 스위스의 미술사가 '브르크하르트'이다. 그는 그의 저서 '치체로네'에서 이탈리아인들이 말한 14세기를 르네상스에서 빼고 15-16세기를 초기 르네상스, 16세기를 성기 르네상스라 불렀다. 고딕 말기 지오토에 의해 열려진 사실주의 회화에서 르네상스에로의 길은 15세기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플랑드르, 프랑스, 독일 등지로 퍼져 나갔으며, 인간성의 회복, 자연의 재발견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2. 르네상스 미술의 발달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의 미술과 문학이 재음미되었고 인체와 생태계에 대하 과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졌으며, 자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팽배하였다. 해부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움으로 화가들은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종교내용을 주제로 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예술가의 지위도 상승 물러선 듯한 시각적 효과를 주는 방법이다. 화가들은 또한 사물이 뒤로 갈수록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사물의 크기를 줄여나가거나 색조를 흐리게 하고 세부를 간략하게 묘사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이탈리아 어로 명암이라는 뜻의 ‘키아로스쿠로’는 평면으로부터 도드라져 보이는 느낌을 주기 위해 그림 속에 어두운 부분으로부터 밝은 부분이 떠오르듯 형체를 묘사해 나가는 회화 기술을 말한다.딱딱한 측면 초상이나 그림의 앞부분에 격자 모양의 수평선에 맞춰 인물들을 배치하는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보다 3차원적인 피라미드 구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좌우로 균형잡힌 구도는 중심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레오나르도의 같은 그림에서는 중심점이 인물의 머리 부분에 있다.)Ⅲ.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그의 작품1. 레오나르도 다 빈치(1) 생애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 토스카니 지방 피렌체 자유도시 외곽에 있는 서남부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르 다 빈치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농사꾼의 딸인 카테리나였다.) 레오나르도는 세르의 서자였다.1466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화가 겸 조각가로 활동을 하고 있던 베로키오에게로 가서 도제(徒弟)로 입문을 하였다. 1472년 도제 기간을 마친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조합에 가입하자마자, 스승인 베로키오의 작품 가운데 왼쪽 끝부분에 천사와 풍경을 그려넣는 일을 맡게 된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같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화가 보티첼리가 이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그리고 1478년경, 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를 제작한다. 1481년에는 산 도나토 아 스코페토 수도원으로부터 제단을 장식할 를 위촉받았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1481년에서 1493년까지 약 3년여 시간 동안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생활을 정리하고 밀라노로 향한다. 그곳에는 폭군 가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암살을 당하고 그 아들인 장 가레아초의 연약한 틈을 타, 숙부 로도비코 스포르차(일면 일 모로)가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였다. 그리고 13년, 교황 레오 10세의 아우인 줄리아노 드 메디치의 초청으로 로마로 옮겼는데, 16년에 줄리아노 공이 세상을 뜨자, 레오나르도는 제자인 프란체스코 메르치와 심복 바티스타 드 비라니스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들어갔다.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17년에는 앙부아즈왕성 근교 크루성관(城館)에 입주한 뒤, 갖가지 연구를 했는데, 그는 여기서 67세로 죽을 때까지 평생을 보냈다.레오나르도의 풍부한 상상력은 그의 노트에 있는 수천 점의 스케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관심사는 해부학, 건축 공학, 천문학, 수학, 자연사, 음악, 조각, 건축, 회화 등 여러 방면에 이르고 있어 그는 역사상 가장 다방면에 걸친 천재로 일컬어진다. 비록 이 노트가 후대의 과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사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지만 레오나르도는 다음 세기의 수많은 발명과 발견들을 앞질러 이룩해내었다. 그는 운하를 설계했고 중앙 난방시설을 고안했으며 늪의 물을 빼내는 방법과 혈액 순환에 대해 연구했고 인쇄기와 망원경, 휴대용 폭탄을 발명하기도 했다. 혈관에 대한 그의 연구를 보면 그는 하비(Harvey))보다도 백 년 전에 혈액 순환의 법칙을 발견해 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최초로 비행기계를 고안했고 인체의 내부구조를 처음으로 그림을 통해 설명하였다. 자궁 속에 있는 태아를 그린 스케치는 너무나 정확하여 오늘날 의과 대학 학생들의 발생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2. 작품(1).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1493-1497년 제작. 벽화 템페라. 460 x 880cm.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진 벽화로서1999년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신약성서 요한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에 이르는 내용을 조형화한 것이다.가장 훌륭하고 잘 알려진 걸작 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미술작품만이 일반대중의 의식 속에 들어가서 어떤 의미에선 전 세계의 정신적 유산이 된다. 레오나르도의 은 이 고고한 소수의 대은 비교적 한정된 공간에 마련되었다. 투시도)의 구성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세팅은 정확하다. 수도원 구내식당의 모조된 확장은 형태학적으로 그 방에 맞는 선명하고 모호하지 않는 건축이 요구 되었다. 네모진 방의 마루, 격자로 된 천장, 벽에 건 타피스트리, 창문살, 그리고 식탁이 아주 단순하지만 실은 효과를 내기 위해서 채용한 대단히 주의 깊게 생각해낸 수단들이다. 이곳에는 인문들의 그룹과 주위 공간 간의 관계를 원근법의 구성 법칙을 해치치 않고 완전히 변화시키는 예술적 계책이 사용되었다. 이 만찬의 장면을 둘러싸고 있는 그린 가장자리 선이 천청과 옆벽을 너무 많이 잘라서 식탁과 인물들이 이 세팅 전면에 튀어나온 것 같이 그려서 식당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같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그는 회화의 가상공간을 식당의 실제 공간으로 연장하려고 하였다. 연극의 한 장면에서 깊이 감을 증대하기 위해 눈을 속이는 건축물 하나를 세우는 것처럼 원근법의 모든 수단을 다 이용하면서), 그는 미술사에서 가장 능숙하고 확실히 가장 성공적인 구도를 공들여 제작하게 된다.)또한 기하학적 원근법의 법칙들에 대한 사려 깊은 적용은 레오나르도가 그의 『회화론』에서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에 결코 물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원근법과 색채에 의해서 보완하고 향상시켰다.(2). 모나리자↑ 모나리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1503~06년 제작 나무판 위에 유채 77×53cm.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항상 한 가지 역설에 부딪히게 된다. 그 역설이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 작품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사람들 사이에 ‘모나리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패널에 유화로 그려졌다. 패널은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이 선호했던 백색 포플러 나무로 제작된 것인데, 실제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은 크기가 생각보다 작아서 놀라기도 한다.)초상화에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에는 전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레오나르도의
서론 - 1본론 - 2Ⅰ. 인간본성Ⅱ. 교육의 새 정향Ⅲ. 현대의 교육 목표결론 - 4서론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교사는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 우리는 신문을 통해 사회를 보면서 양극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교사를 볼 수 있다. 최고의 직업, 배우자가 가졌으면 하는 직업 1위 등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혜택에 초점을 맞춘 평가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이 선생님을 때린 사건, 교사가 학부모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건 등으로 인해 교사의 권위가 실추되고 있다는 권위에 초점을 맞춘 평가가 있다.교사는 혜택이나 권위가 아닌 교육자로서의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가들 속에서 우리의 교육 역시 극단적인 평가를 피해가기 어렵다. 어떠한 가치에 중점을 두고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리의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떤 것인지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사회에 대한 정의와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올바른 교육에 대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이 볼프강 브레징카 교수의 『가치 불확실 사회의 교육』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 교육의 일반 목표와 나아가 교육의 중심 주제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본론Ⅰ. 인간 본성교육에 대해 정의하기에 앞서 우리 인간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전제로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자의 좋은 정신적 상태이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함축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본성 내지 특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셀 수 없을 정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교육과 관련된 인간의 특성을 알려주고 있다.인간의 특징으로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모방을 한다는 점이다. 어린이들은 무엇보다 그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보고 배운다. 그 때문에 어린이들은 그들의 생활공간 내에서 인식과 능력, 태도와 미덕에 있어서 습득해야 할 바를 위해 좋은 본보기를 필요로 한다. 또한 그들은 학습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고 칭찬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어린이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를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른들이 일치된 모습을 보일 때, 그리고 같은 요구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만 그렇다.)또한 교육하는 사람의 특징으로는 ‘충실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교육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교육의 목표를 필요로 하고, 이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의 목표 또는 목적은 교육하는 사람이 교육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촉진하려고 하는 인격적 특성들이다.이러한 특징을 보았을 때 좋은 교육을 위해 전제되는 것들 중에 하나인 인간 본성은 짧게 모방능력과 적응력 그리고 ‘충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Ⅱ. 교육의 새 정향(定向)교육은 결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관계 법령에서는 긍적적으로 평가된 인격적 특성들을 묶어서 그 전체를 ‘충실성’ 이라고 명명 하고 있다. 결단은 이 충실성을 목표로 교육하고 타락에 맞서 보호하여 주는 일을 뜻한다. 또한 교육은 교육자의 좋은 성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좋은 태도는 외부로부터 지지 받아야 유지되는 것이다.하지만 요즘 이러한 연관성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성주의(理性主義)(주지주의)), 개인주의(個人主義)), 쾌락주의(快樂主義))가 정신적 위기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주의, 개인주의, 쾌락주의가 지배하는 가운데 공동의 인격적 이성들은 수십 년 동안 거의 물음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인격적 이상들은 자유는 한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만 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들에게 인격적으로 요구되는 바가 별로 없는 사회적 이상들만 일방적으로 선전되어 왔다.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① 우리는 공동의 인격 이상들에게 유리할 뿐 아니라 후진의 교육에 대한 모든 시민의 공동 책임을 긍정하는 사회적인 가치 분위기를 필요로 한다.② 건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후진을 도와주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좋은 가정을 장려하는 것이다.③ 교육적인 가정의 장려를 옹호한다고 해서 이것이 수많은 가정 내에 존재하는 결함들을 경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안정된 부모나 가정이 없는 아동들은 공공 시살의 도움을 받아야 함은 물론이다.④ 직접적인 교육보다는 간접적인 교육이 훨씬 더 중요하다.⑤ 모든 가치 태도는 심정(心情) 속에, 인격의 정서적 영역 속에 뿌리를 둔다.⑥ 가정 다음으로 학교가 가치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Ⅲ. 현대의 교육 목표1922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청소년 보조법 속에 받아들여진 이 법 규범은 “모든 독일의 아동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충실성을 지닌 인간이 되도록 교육받을 권리를 갖는다.”으로 교육의 가장 일반적인 목표가 규정되어 있으니 충실성이 그것이다. 이 교육 목표는 아주 일반적이어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하지만 ‘충실성’이란 막연한 교육 목표는 더 상세하게 규정하기 시작하면 곧 논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논쟁 속에 안중에 두어야 할 4가지 규칙이 필요하다.① 모든 인간은 그의 생애에 있어 많은 다양한 과업을 이행해야 한다.② 인생에서 실현되어야 할 많은 과업과 이를 위해 필요로 하는 많은 능력은 서로 하나의 대극적 긴장 관계 속에 서 있다. 대립적이지만 각자로서 불가결한 인격적 특성들 간의 그러한 양극성은 교육 목표를 설정함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한다.③ 모든 교육 목표가 인간의 모든 연령 단계에 유효한 것은 아니다.④ 하나의 교육 목표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의 실현이 의존하는 그 조건도 얻으려 해야 한다. 그것은 교육 목표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 있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척도이다.
서론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듯하다. 지난 한달 여 동안 전국 곳곳에서는 규탄집회가 계속되었다.지난 2001년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파동이 있은 지 꼭 4년 만에 다시 같은 교과서의 문제가 한? 일 양국의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충분히 예견되어 왔던 것이며, 지난 2001년의 사태를 경허삼아 우리도 충분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 우익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주도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문제는 4년 전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일본 정부의 교과서 채택 방식이 바뀌어 일선학교와 교사들의 의견을 반영할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로 볼 수 있다.이런 상황에서 역사교과서 왜곡의 한 부분인 ‘임나일본부설’을 깊게 알아보고자 하며,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있어 대처방안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본론1)임나일본부설과 설에 대한 반박그 동안 한중고대사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되어온 것이 기자조선과 한사군문제였다면 한일고대사문제의 핵심쟁점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통치기구, 즉 일시대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재여부였다. 여기서 도출된 문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서 제기되어 왔기 때문에 한일고대사 논쟁의 시발이자 양국관계의 걸림돌이 되어왔다. 이에 대해 한일 양국 모두 자국의 역사를 희생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치하는 상황이다. 일제 식민사관에 오염돼있던 우리나라 학자들은 임나문제 만큼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지 삼한분국설로 맞불을 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이든 임나든 모두 조선족 이주민이 건설한 분국이며 야마토(大和)정권 역시 백제의 위성국가라는 것인데 그 근거로 일본 천황릉과 일본 전역에 산재한 고분들의 부장품들이 삼국의 요소가 뚜렷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임나일본부에 대한 최초의 연구위치는 바로 지금의 대마도인 것이다.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주장처럼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가야지방이 결코 아니다. 임나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에서도 "임나는 쯔꾸시국(筑紫國, 지금의 규슈 후꾸오까현)으로부터 2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경주)의 서남방에 있다(任那者, 去紫國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고 하였듯이 지금의 대마도임이 틀림없다. 이 {일본서기} 숭신(崇神) 천황 65년 조의 기록은 임나에 관한 원전(原典)인 것이다. 여기서 대마도로부터 쯔꾸시국까지의 거리를 2천 리라고 한 것은 한·중·일 고대 사서들에 의하면 고대사 지리상의 상식이다.그런데 일찍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가 한반도 남단에 위치했다고 억지 생떼를 쓰고, 고대에 일본이 이 임나=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신라를 속국으로 지배했다고 하는 허구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날조하여 일본의 한반도 강점(强占)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합리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한국 고대사는 크게 두 시대로 구분되는데 전기(前期)는 한나라의 식민지시대였고 후기(後期)는 야마토정권의 한반도진출의 거점인 임나일본부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① 광개토대왕비문 ② 칠지도(七支刀)의 명문(名文) ③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고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임나일본부설의 기본 골격이 되고 있다.첫째로,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가 신공(神功) 시대에 개척되어 6세기까지 존속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임나일본부의 기점을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에 두고 있는데, 신공의 연대를 전체로 2주갑(二周甲) 즉 120년을 끌어내려 신공은 원래 3세기가 아닌 4세기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 입증의 전제로 삼고 있는 2주갑(120년) 인상설은 터무니없는 억지주장이다. 신공왕후 곧였다고 하는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근거의 하나로 삼아왔었다. 그러나 신공왕후의 저 유명한 '삼한정벌'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삼국)을 정벌한 것이 결코 아니며, 바로 '대마도 정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2∼3세기경의 인물인 신공왕후(=卑彌呼=細烏女)가 정벌한 삼한은 당시에 삼국이 각기 나누어 다스리던 대마도(임나)의 3가라 즉 "좌호가라(신라), 인위가라(고구려), 계지가라(백제)"를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편찬한 {일본서기}에서도 "이것이 소위 삼한이다(是所謂之三韓也)" 하여 한반도의 삼한과 쓰시마(대마도) 내의 삼한(곧 3가라)을 명백히 구별하여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은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을 마치 삼국을 정벌한 것 인양 과대망상적으로 엉뚱하게 확대 해석하였으며, 그 뒤로 계속 200여 년 간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펴왔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때 다시 한반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신공왕후에 의해 정복된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일 뿐이라고 함으로써 침략사관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둘째로, 임나일본부에 의한 남한경영설(南韓經營說)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자료로서 가장 절대적인 비중을 두었던 내용이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永樂) 6년(396)조에 있는 다음의 기사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즉 신묘(辛卯, 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정벌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해석대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가정하자. 고구려는 응당 자국중심의 조공체제를 깨뜨린 왜를 응징해야 한다. 그러나 백제만을 공격했다. 백제와 함께 왜의 신민이 되었다는 신라는 공격하지도 않았다. 비문에서 도리어 신라는 고구려의 구원 대상으로 나타난다. 신라가 신묘년에 왜의 신민이 되었다면 영락 9년에 신라중위에 의해 변조됐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진 바 있다. 사꼬오 중위는 1884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였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일제가 사꼬오가 위조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을 파괴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가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 來渡海破 '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은 그 근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아울러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왜의 그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왜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세력들의 부수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비문에 나오는 많은 간지(干支)에는 '신묘년'과 같이 년(年)자가 붙어 있는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신묘년 기사와 앞뒤 문장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모순되고 있어 변조가 가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세 째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19세기 말에 관정우(菅政友)가 발견한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를 {일본서기} 신공(神功)(侯王)의 하나인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었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의 종주국이었고 왜는 백제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신공 49년조에서 신공이 황전별(荒田別), 녹아별(鹿我別) 등을 보내 백제 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비자벌(比自 )·남가라(南加羅)·녹국( 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등 7국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돌아 고계진(古奚津)·침미다례( 彌多禮) 등을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고 한 기록을 해석하면 그 정복활동의 실질적인 주체가 왜가 아니라 백제였고 왜는 백제의 정복활동에 동원된 속국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일제가 날조한 허구의 임나설에 대한 반증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 말(670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삼국사기}·{구당서}). 따라서 일본이라는 말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니, 임나일본부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임나일본부라는 이름은 {일본서기}에만 있고, 그 원전이 되는 {고사기}에는 전연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극히 최근에 밝혀진 사실로는 1669년에 필사된 가장 오래된 {일본서기}에는 일본부(日本府)에 대한 주석이 붙어있는데 그것은 어사지(御事持), 또는 미코토모치, 즉 사신(使臣)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해 스즈끼 교수는 일본부라는 말은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에 붙여진 말이며 이전에는 '어사지', '미코토모치', 즉 임나와 안라에 보낸 사신인데 후대에 일본부라고 기록한 것이라며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시인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일본부 사신이 가야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흠명천황(欽明天皇)조에는 일본부가 야마토정권의 뜻과는 상관없이 신라 고구려와 내통하고 가야의 국익만을 위해 활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기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가야연맹의 외교 부서였으며 오히려 안라국의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