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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향악, 당악, 아악)레포트
    향악 ? 당악 ? 아악1. 통일신라시대의 향악과 당악통일신라에서의 음악은 당악(唐樂)의 수용을 그 특징으로 한다. 신라에서의 당악 수용은 한국음악사에서 한국음악과 외래음악을 구분하는 향악과 당악의 개념을 정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 향 악신라에서의 향악이란 당의 수용 이후, 즉 통일 신라 후기의 향악을 지칭한다. 향악의 향(鄕)은 당악의 당(唐)에 대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소창진평(小倉進平)은 향악을 “신라 시대의 고유의 노래”, 조윤제(趙潤濟)는 “자국의 노래”, 양주동(梁柱東)은 “광의로 보면 동방 고유의 노래, 협의로는 신라의 가요 즉 자국의 가악을 뜻한다”고 하였다. 향악을 당악보다 천시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소창진평 ? 양주동 ? 조윤제의 설과 같이 향악은 동방 ? 동토의 음악, 즉 우리나라의 음악이다.통일신라 향악곡의 악조악조란 말은 악곡의 구조를 나타내는 음악술어로 여기서의 악조는 선법(mode)과 조(key)의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향악곡의 악조 출현은 통일신라시대와 삼국시대를 나누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국시대의 음악문화는 주로 악기 중심으로 서술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음악문화는 악조에 의해서 악곡의 음악적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서 서술할 수 있다.가야고의 악조 가야고는 6세기 중엽 우륵에 의하여 삼국시대 말기부터 신라에 수용된 향악기이고, 거문고는 삼국통일 직후 만파식적과 함께 신기(神器)로 취급되다가 경덕왕(742~764) 때 사람 옥보고 이후 한 세기 반 가량 지난 9세기말이나 10세기 초부터 신라에 널리 수용된 향악기이다. 가야고 음악에 쓰인 악조는 하림조(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 두 가지로, 이 두 악조에 의하여 창작된 악곡이 185곡이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악지에 전한다.하림조와 눈죽조의 음악적 구조는 『삼국사기』악지에 언급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악학궤범』에 조선 초기 가야고의 하림조 조현방법이 설명되어 있어 하림조의 대략적인 음악적 특징을 추정할근원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요즘 학자들의 주장이다.『고려사』악지에는 삼국의 음악이라 하여 동경(東京)등의 신라악 3곡 외에 정읍 등 백제악 5곡, 명주 등 고구려악 3곡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의 음악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전승되었을 것이므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의 거문고 등의 악기뿐만 아니라, 삼국의 여러 가지 음악이 함께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 당 악좁은 뜻으로 당나라의 음악(통일신라시대 향악의 대칭어)을 넓은 뜻으로 당나라와 송나라의 음악(고려, 조선시대 향악의 대칭어)을 말한다. 여기서의 당악은 좁은 의미의 당악이다.문헌기록에는 신라의 당악수용에 관한 사실이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다음의 몇 가지 방증자료에 의하여 신라에서의 당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첫째, 『삼국사기』악지에 신라의 악기라고 소개되어 있는 향비파는 그 대칭인 당비파의 실재를 암시하여 주는 것이며, 또한 비파라는 이름으로 당비파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둘째, 최치원의 에서와 같이 ‘향악’이라는 명칭은 그 대칭으로서의 ‘당악’을 고려하지 않고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셋째, 신라에 당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고려시대에 송나라의 음악이 당악이라고 지칭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신라의 향악에는 박(拍)과 대고(大鼓)가 사용되었는데, 이 두 가지 악기는 수(隋)나라의 9부기와 당나라의 10부기에도 없는 것으로 그 이후에야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신라에 당악이 수용된 것이 아니라면, 박과 대고가 향악에 함께 편성된 사실이 설명되기 어렵다. 향악에 북과 대고가 채용된 예는 『악학궤범』정전예연악공배립(正殿禮宴樂工排立)에도 보이는데, 이때 북과 대고는 좌우의 당악과 향악 사이에 놓여 좌우의 음악에 겸용하도록 되어 있다. 신라에서도 역시 북과 대고가 향악 ? 당악에 겸용되었기 때문에 향악에 포함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다섯째, 신라의 향악기인 대금 ? 중금 ? 소금에는 중국 악조인 ‘황종조’ ? ‘반섭조’ ? ‘월조’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같은 악조명은 당나라전기의 향악은 거의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고려 향악에 사용된 악기를 보면 신라의 향악과 같이 거문고 ? 가야금 ? 향비파 ? 대금 ? 중금 ? 소금 ? 대고 ? 박의 편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 밖에 당악연주에 사용된 장구가 새로이 곁들어졌다. 장고를 제외한 고려 전기의 향악은 신라의 향악과 같았는데, 장고가 고려에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이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당악과 향악 연주에 다같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전기의 향악은 통일신라로부터 전승된 것과 고려시대 창작의 향악이 포함된다. 주목되는 점은 고려 전기까지 계승된 신라 사뇌의 전통이다. 균여대사(均如大師)의 는 가사의 전구(前句)와 후구(後句) 사이에 ‘야야’라는 차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불교 포교를 위하여 직접 만들어지고 노래로 불린 사뇌가 차사양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려의 민간에서는 10세기 중엽까지도 신라의 차사사뇌 양식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려후기 『고려사』악지에 전하는 고려의 속악(향악)은 곡명만 전하는 것과 그 음악이 조선시대까지 전하여 악보로 전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백제악의 과 연대미상의 곡 , 이제현의 한시 번역을 가진 ? ? 등은 비록 악보로 전하지는 않지만, 그 음악이 조선 태종, 혹은 세종 때까지 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악보로 알 수 있는 고려 후기의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으로 별곡은 8장으로 된 이나 13장으로 된 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 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형식의 장가(長歌)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속요는 ? 등의 곡처럼, ‘아소 님하’라는 짧은 결구를 끝에 단 긴 노래(長歌) 이다. 이 밖에 고려의 속요 중 독특하고도 이색적인 곡은 이다. 『대악후보』의 은 ‘쌍화점’ ? ‘삼장사’ ? ‘드레우물[蛇龍]’의 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과 은 충렬왕 때인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곡임이 『고려사』악지에 밝혀져 있어 고려 후기의 노래임이 분명하다.고려 모두 담은 당악정재도 상당수 있었다. 송사의 형태는 과 같은 사(詞) 음악합주로 춤을 반주하는 것, 춤을 추는 중간에 춤동작을 멈추고 서서 와 같은 사를 관현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 처럼 무반주로 사를 노래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고려에 수용된 당악은 송의 악공과 그 후예들로부터 직접 배운 고려 악공에 의해 후대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고려의 당악은 본토의 모습에서 크게 일탈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고려에 수용된 당악은 연향악 ? 고취악으로 주로 사용되면서 후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대성아악 수용 이전에는 제향악으로도 사용되었고, 공민왕대에도 한 때 제향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려사』악지에는 송나라에서 들어온 사악(詞樂) 43곡의 곡명이 실려 있다. 즉,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등이다.당악기 1076년에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을 두고 여기 매인 악사(樂師)의 식록(食祿)을 정하였는데, 그 직종을 보면 당무(唐舞), 창사(唱詞), 생, 비파, 장구, 당적, 향, 당비파, 방향, 중금(中魁), 가무박(歌舞拍) 등이다. 이로써 보면 향비파와 중금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악에 사용하던 당악기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1114년 송나라 휘종(徽宗)이 보내 온 신악기는 철방향(鐵方響), 석방향(石方響), 비파, 오현(五絃), 쟁, 공후, 피리, 적, 지(聲), 소, 포생(匏笙), 대고, 장구, 박판 등으로, 이 중 지, 소 2종이 아악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악기에 속하고 있다. 『고려사』악지에는 방향, 퉁소, 적, 피리, 비파, 아쟁, 대쟁, 장구, 교방고, 박 등이 당악기로 소개되었으며, 『악학궤범』에도 아부악기(雅部樂器) ? 향부악기(鄕部樂器)와 더불어 당부악기(唐部樂器)가 도설(圖說)로 나와 있는데, 그 중 당부악기는 방향, 박, 교방고, 추는 절차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송나라에서 교방악(敎坊樂)의 전성기는 인종(仁宗) 때라고 할 수 있는데, 인종의 재위기간은 고려 문종 초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1073년 교방여제자 진경 등이 새로 전하였다고 하는 , 같은 해 11월 초영 등이 새로 전한 과 , 1077년 2월에 초영 등이 춘 는 물론이고, 『고려사』 악지에 실려 있는 다섯 가지 당악정재도 고려 현종 이후 문종 사이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짙다.향악 정재(鄕樂呈才)와 당악 정재(唐樂呈才)의 특징 향악정재는 중국에서 들어 온 당악 정재와 같이 딱딱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① 당악 정재는 죽간자(竹竿子) 2사람이 춤추는 사람을 인도하여 무대로 나가는데 비하여 향악 정재는 죽간자가 없고 음악이 울리면 춤추는 사람이 무대로 바로 나간다.② 당악 정재는 순한문으로 된 구호(口號)와 치어(致語)를 먼저 아뢴 다음 춤을 추는 데 비하여 고려시대의 향악 정재에는 그러한 격식이 없다.③ 당악 정재는 춤을 추다가 한문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르나, 향악 정재는 춤 추다가 우리 말로 된 노래를 부른다.④ 당악 정재는 춤이 끝날 무렵에 구호와 치어를 부르고, 죽간자 2사람이 춤추는 사람을 인도하여 퇴장하는데 비하여 향악 정재는 춤이 끝나면 꿇어앉아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서 퇴장하는 자연스러운 격식을 갖는다. 즉, 향악 정재는 무대로 나아가 엎드려 절하고 일어 나서 퇴장한다.3. 조선시대의 향악과 당악(1) 향악조선시대 조선시대의 향악전통은 궁중음악의 세 갈래인 아악?당악?향악의 하나로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의 향악과 당악은 양부악 중 우방악으로 합쳐짐에 따라 상호간에 음악적 영향을 받아 당악은 향악화과정을, 향악은 당악화과정을 보였다.조선 초의 향악은 새로 창업한 조선의 역사적 당위성과 신왕조를 찬양하기 위한 신악(新樂) 제정사업의 일환으로 크게 진작된 바 있었다. 이 때의 음악내용은 대부분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향악에 기초한 것으로, 여기에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얹어 불렀기 때문에 향악 자체의 변화에는
    예체능| 2005.05.16| 13페이지| 2,500원| 조회(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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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의 멋, 풍류] 한국인의 멋, 풍류
    한국인의 멋, 풍류풍류(風流) 혹은 풍류정신이 오랜 시대에 걸쳐서 명멸해 왔다하여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새롭게 일구어지고 있는 미적 품격이 될 수 있을까? 그 시대가 과거의 어느 시간 속이라도 오늘날의 우리 시각을 통한 비판적 계승의 의지가 없다면 그 주제는 너무나도 심오한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그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할 때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풍류이다. 바람?풍(風)?자와 물흐를?류(流)?자가 합쳐져서 된 풍류라는 말은 단순한 바람과 물흐름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하는 자연이기 때문에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어대사전』에서 풍류라는 조항을 찾아보면 뜻이 무려 15가지로 풀이 되어있다. 신라 하대의 정치가였던 최치원의 한 금석문자(金石文字)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일러 풍류라 한다. 유불선을 모두 아우르고 있으니온갖 목숨과 접촉하여 이를 감화한다.최치원은 말년에 산중에 은거하여 삶을 보내다가 결국 행방불명이 된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아마도 최치원의 선구적인 시문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폄하의 대상이 되는 것과 상관없이 그 시대에 있어서 상당한 평가가 될 만한 것이었다. 그러한 선구적인 시인의 최후를 묘연하게 마감한 것 자체가 현묘한 도로서의 풍류를 실현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의 특징을 섭취한 것이 왜 풍류라고 일컫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다만 여기서 유불선을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은 풍류가 유불선에 앞서서 존속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풍류의 본래 면목(面目)을 따져본즉 거기에 원시유교가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인 예(禮)로 돌아가는 것과, 불교에서 일체 아집을 버리고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 노장(老莊)사상이 인간의 거짓된 유위(有爲)의 세계에서 자연의 대법도를 찾아가는 무위자연으로 다가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풍류를 굳이 변별하자면 유불선 이전부터 한반도 및 북방대륙을 망라한 한민족의 상고시대 이래의 고유 신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풍류는 자연귀의(自然歸依)의 높은 단계에서 그 핵심이 있는 것 같다. 풍류라고 하는 의식의 근저에는 문자 그대로?바람의 흐름?이라고 하는 이미지가 있다. 바람의 존재는 물과 불과는 다르다.물과 불은 수평 또는 수직으로 대체로 정해진 방향으로 흐르나 바람은 일정한 방향 없이 전방위로 예측할 수 없이 종횡무진 하는 자유성이다. 또한 바람은 다양한 소리를 내며 온갖 사물을 악기로 삼아 연주한다. 낙엽 지는 소리, 파도소리 등 우주와 함께 끝없는 교향악을 협주한다. 이것이 바람이 지니는 음악성이며 그 바람은 영원히 멈추는 법이 없이 또한 부드럽게 부는 미풍이기도, 폭우를 동반한 폭풍이기도, 눈을 수반하는 눈보라와 같이 계절에 따라 온 ? 냉의 바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풍류에는 온화한 풍아의 세계가 있고 차디찬 풍자의 세계가 있다. 요컨대 풍류란 자신에게도 대상에게도 속박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경계를 왕래하며 주객의 구분 없이 무경계로 서로 융화하며 놀이하는 마음으로 즐기며 항상 여유를 갖고 유연하게 사물과 접촉하며 모든 사물에 심신을 열고 무심이 되어?바람의 마음?에 맡기면서 인생이란 길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샤머니즘 엑스타시를 위한 음주가무와 음악 ? 시 ? 춤 ? 술 ? 친교 등이 풍류정서를 유발하는 매체로 작용하였을 것이다.신라시대 화랑에게 인간형성의 이념이?풍류?였듯, 조선시대의?선비?에게 인간형성의 이념이?멋?이였듯, 한국인은 풍류와 멋이라고 하는 미적 이념을 인간형성의 지표로 삼아 왔던 것이다. 한국인에게?풍류를 안다?라고 하는 말은 최고 찬사의 말로서 멋과 풍류는 미적 생활방식(aesthetic way of life)의 이념 이였다. 신라시대에 정착한 풍류사상은 그 이후 계승 ? 발전되어 한국인의 전통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행했다. 한국에서 풍류란 자연의 경물을 완상하고 생활에 예술을 끌어들여 즐김으로써 인간정신의 토속적이고 우아한 조화적 승화를 추구하였다. 이렇듯 풍류사상의 원융과 조화의 흔적이 현재까지 많은 예술적 유산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음악으로 나타난 풍류 한문단편에 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는데 이 경우는 음악을 뜻한다. 풍류가 음악을 지칭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파생된 뜻이라 생각된다. 풍류의 정신이 음악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른바 풍류라고 일컫는 여러 가지 음악을 통해서이다. 풍류음악으로 분류되는 것에는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도드리, 대풍류의 관악영산회상 ? 길군악 ? 염불타령 ? 굿거리 ? 당악, 성악으로 하는 가곡 ? 가사 ? 시조 등이 있다. 이러한 음악의 쓰임새를 보면 줄풍류나 가곡 ? 가사 ? 시조는 교양음악으로 비전문인이 즐기기 위해 쓰이던 음악이고, 대풍류의 여러 가지는 춤 반주나 행악(行樂)으로 쓰이던 것으로서 전문인이 하던 음악이다. 이 중에서 특히 풍류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음악은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줄풍류 편성의 반주를 함께하는 가곡인데, 이 음악은 주로 여유 있는 양반층에서 교양으로 하던 음악이다. 은 본래 불교적인 가사?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을 노래하던 것인데, 그것이 시대를 거쳐 내려옴에 따라 유교의 음악가치관 영향으로 아악(雅樂)과 같은 성격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본래는 불교적인 것이었지만 유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민속음악과 같은 음계 ? 장단 ? 형식의 양식으로 발달한 음악이 이다. 어쩌면 유(儒)불(佛)선(仙)의 특징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음악이라 할 수 있겠다. 가곡도 마찬가지로 그 성격에 있어서 극히 한국적인 표현양식을 가지지만 그 정서는 유교적이고 그 가사의 내용은 현실을 초월한 무한한 자연에서의 선교적(仙敎的)인 것이 많다.생활에서의 풍류 고대 제천의식이나 팔관회와 같은 공동제의(共同祭儀)로서의 풍류전통은 마을이나 지역단위의 굿이나 제의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강릉단오제나 남해안별신굿 등 크게 알려진 것 외에도 각 마을의 당굿이나 당제 또는 어촌의 풍어제 등이 모두 그러한 풍속의 잔재이다. 이러한 풍속은 그 속에 각종 민속놀이나 민속음악과 민속춤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의 각종 농악 ? 탈춤 ? 민속놀이가 모두 그러한 전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 속에 끈질기게 그 생명력을 지속시켜온 전통치고 풍류와 관련 없는 것이 없다. 그만큼 풍류란 우리 문화의 정체성(正體性)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생활에서 보면 집안에 정원을 가꾸어 자연을 가까이 하는 풍류의 멋을 살리기도 하였고, 벽에 산수화를 걸어두거나 거문고나 비파와 같은 악기를 서재에 걸어두고 글 읽는 시간 외에 어루만지는 것도 멋진 풍류의 한 모습이었다. 사람의 기능이나 능력보다는 인격과 인간미를 중시하는 대인관계에서도 우리는 풍류의 편모를 살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은?쟁이?밖에 안되지만, 인격이 고상하고 품격이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고 존경을 받았다. 그러한 통념을 바탕으로 풍류라는 음악도 발달하게 되었고, 그 예술의 멋이 인격화하여 멋있는 사람을 좋게 보는 관념도 생겨나게 되었다. 정원을 가꾸고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갖추어 놓은 서재에 거문고 하나쯤 걸려 있고, 좋은 벗과 매화주나 국화주를 한잔 마시며 시를 짓고 담소한다면 그것이 풍류스러운 것이다. 우리네의 삶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고 그 가운데 서로의 정을 느끼며 늘 푸근한 마음으로 서로를 헤아리며 살았던 것이다.
    예체능| 2005.05.16| 3페이지| 2,500원| 조회(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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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음악사] 백제시대의 음악
    백제의 시대 음악1. 음악적 배경백제에는 고구려 음악의 와 같은 백제 특유의 악기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추정되는 것은 백제가 마한의 땅에 건국 되었으므로 삼한의 옛 습속이었던 5월 하종(下種)이 끝났을 때와 10월 추수가 끝난 천지에 제사하고 가무를 즐겼는데 오늘날 전라도 지방의 별신굿 등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는 만큼 백제 때에도 삼한의 유풍이 계속되었으리라 짐작되어 진다.2. 일본에 전한 백제악백제악이 일본에 소개된 것은 6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554년에 일본에 파견된 백제 악인이 본국 악인과 교대한 사실이 있다{) 일본서기(권10권)에 그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그 이전부터의 백제가 일본으로의 악사 파견을 짐작케 한다.453년 인쿄(允恭) 천황의 장례식에 신라왕이 악인68명을 파견한 것으로, 554년에 백제악이, 684년에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음악이 연주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미 서기554년 이전부터 횡적 · 군후(거문고) · 막목 · 춤 등을 지도하는 악사를 각각 한사람씩 4인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 음악계를 교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후(거문고)는 일본에서 백제금(구다라 고도)으로 불렸는데, 이는 고구려의 거문고가 백제를 통해서 일본에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기록에서 군후와 중국의 공후가 혼돈되어 있으나, 일본에 전해진 군후는 거문고 또는 거문고의 전신에 해당되는 악기임이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한국음악사』, 대한민국 예술원, 1985.李惠求, 『韓國音樂論叢』, 162쪽이렇듯 일본에 정기적으로 악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 당시에도 신라의 음성서와 같은 국가적 음악기관의 존재하였음을 짐작케 한다.일본에 전래된 백제악은 백제의 풍속무와 민속음악으로, 『고려사』악지에 백제악으로 소개된 · · · · 등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백제의 악가 : 장사(長沙)에 사는 한 여인이 남편이 싸움터에 나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선운산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방향을 바라보면서 못내 그리운 심정을 읊은 것이라 한다. : 무등산은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으로서, 이 산에 성을 쌓으니 백성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어 그 기쁨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 나주(羅州) 속현인 장성(長城)의 방등산(方登山)에 진을 치고 양가의 부녀자를 납치해 갔는데, 그 가운데 장일현의 한 여인이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음을 탄식하여 부른 노래이다. : 백제 때 구례현(求禮縣)의 한 여인이 지리산(智異山) 속에 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아름다웠으며 살림은 가난하나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왕이 이 여인의 자색(姿色)이 뛰어남을 듣고 궁으로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는 죽음을 맹세하여 좇지 않고 자신의 심정을 이 노래로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개루왕(蓋婁王) 때에 도미(都彌)의 아내가 이 노래를 지었다고도 전한다. : 내용은 정읍현(井邑縣)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밤길에 위해(危害)를 입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나타낸 노래이다. 『고려사』권71 악지 삼국속악 중 백제의 것으로 분류되어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 구백제(舊百濟) 지방의 노래로 짐작된다.정읍사(정읍의 노랫말?)가 무고(舞鼓)와 함께 불려졌기 때문에 이 무고(舞鼓)를 만든 이 혼(李混){) 이혼은 13, 4기에 걸친(1252~1312) 고려 충렬왕(1275~1308) 때 사람이라 알려져 있다.이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 고려사를 편찬하던 15세기(1451)에 편찬자들은 옛 노래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외의 곡들이 이조의 궁중음악에 편입되지 못하였기에 『악학궤범』(樂學軌範)이나 『악장가사』(樂章歌詞)에 들지 못하고 따라서 현재에는 실전된 것으로 생각된다.이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형식은 6행 1연이며, 조선시대에 궁중음악으로 쓰였다.{) 허균, 『성소부부고』 권18.『대악후보』에(大樂後譜)에 의 악보가 전해지고 있으나 현행의 정읍곡과 함께 비교, 해독(解毒)되지 못하고 있다. 정읍사를 가사로 하여 노래하던 곡을 조선 중기 이후 가사가 탈락되어 합주곡으로 연주되는 곡을 수제천(壽齊天)이라 한다.『악학궤범』(樂學軌範) 권5에 실려 전하는 가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를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졈그{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4. 백제의 기악무(伎樂舞)7세기 초에 백제의 미마지(未摩之)가 중국 남부의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무를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교훈초(敎訓抄)』,1233년『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기악무는 그 당시 일본의 여러 절에서 연행 하였고 그때 쓰던 가면은 일본 동대사(東大寺)등 여러 절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기악(伎樂)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1953년 이혜구의 산대극과 기악 의 비교 연구에 의하여 기악에 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교혼초』와 내령조(柰良朝) 여러 절의 자재장 등에 전하는 기악의 과정(過程)과 한국의 양주산대도감(楊洲山臺都監)놀이{) 양주산대놀이는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유경성, 신순봉, 고명달, 박교응, 김상용, 이병권, 석거억 등 8명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전수에 힘쓰고 있다.우리나라 중부(서울, 경기)지방에 분포,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를 산대놀이라 하며, 민중놀이인 산대놀이를 관의 필요에 따라 충용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 산대도감놀이다.및 봉산(鳳山)탈춤{) 봉산탈춤은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 되었다.의 과정을 에서 비교하고 있다.{기악(伎樂)양주산대도감놀이봉산탈춤치도(治道)고사-(1) · 상좌춤-(2)四상좌춤(1)오공(吳公)옴과상좌(4) · 연닢과 눈끔제기없음사자무(獅子舞)없음사자춤(5)가루라(迎樓羅)금강(金剛)팔먹중 · 침놀이(완보)(6)팔먹중(2)바라문사당놀이(관쓴 중 · 왜장녀 · 애사당)-(7)사당춤(3)곤륜(崑崙)노장(8)노장춤(4)역사(力士)취발이 · 소무당-(10)취발이춤(4)대고(大孤)미얄할미 · 신할애비 ·말뚝이 · 왜장녀-(12)미얄춤(7)취호(醉胡)양반 · 샌님 · 서방님 · 도령 · 말뚝이-(11)양반춤(5)무덕악(武德樂)무당 넋두리다리굿괄호 안의 숫자는 과장(진행)의 순서기악의 치도는 양주별산대 제1과장의 고사와 2과장의 상좌춤, 그리고 봉산탈춤 제1과장의 사(四)상좌춤과 동일한 내용인 벽사의 의미를 지녔다고 분석한다. 오공은 양주별산대의 제3, 4과장인 옴, 연잎과 눈꿈제기와, 사자무는 봉산탈춤 제5과장의 사자무와 각각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 가루라와 금강은 양주별산대의 제6과장인 팔먹중, 침노리(완보), 봉산탈춤의 팔먹중춤과 같은 과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라문은 양주 별산대의 제7과장인 사당노리(관 쓴 중), 봉산탈춤 제3과장의 사당춤과, 곤륜은 양주 별산대의 제8과장인 노장, 봉산탈춤의 제4과장인 노장춤과, 역사는 양주 별산의 제10과장 취벌이, 봉산탈춤의 제4과장 취발이와 같은 과장이고, 태고는 미얄할미(양주, 12과장)와 미얄춤(봉산, 7과장), 취호는 양반(양주, 11과장), 양반춤(봉산, 5과장)과 각각 같은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구성의 순서만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예체능| 2003.12.07| 4페이지| 2,500원| 조회(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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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터테인먼트, 음반, 영화] Convergence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
    요즘의 사회를 정보화 사회라고들 한다. 정보화 사회란 정보 가 생산 기술의 하부구조라는 의미인데, 정보에 의해서 세상이 지배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의 신속한 습득과 이해 그리고 그 활용이 가장 중요시된다. 이러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미디어를 이용하는데 쉽게는 TV와 RADIO, 잡지, 신문 등의 고전적인 의미의 미디어에서 요즘은 뉴미디어라고 불리는 CATV, DBS, COMPUTER 등의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기기들은 기존의 미디어(OLD MEDIA)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한 것이다. 지금은 그 덕에 많은 종류의 미디어와 채널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정보를 시간이 허락하는 한 거의 무한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만약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전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직접 보거나,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보거나, 아니면 방송국에서 보내주는 방송을 시청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 전문 채널(OCN, HBO 등)이 있어서 전과 같이 번거롭지 않고도 영화를 볼 수 있고, VOD라는 더욱 개선된 형태의 채널이 등장해서 실시간으로 영화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자꾸 새로운 미디어들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미디어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디어들도 일정한 방향으로 분화하고 있으며 반대로 융합(convergence)하고 있다.원래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는 방송과 통신이 가장 대표적인데, 방송은 일방향성, 통신은 양방향성 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방송과 통신이 자꾸 그 영역을 넘어서 하나로 통합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다시 분화를 하고 있다. 요즘의 정보 사회를 이야기 할 때 대술적 특성으로 흔히 컴퓨터와 통신의 융합(convergence)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컴퓨터와 통신의 기술이 결합할 수 있는 이유는 극소 전자 기술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을 들 수 있다.진공관에서털 서비스를 실현한다는 일정을 잡아 놓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방송 서비스를 통일된 디지털 방송 신호체계로 구현하는 종합 디지털 방송을 목표로 하고 있다.통신계 뉴미디어방송계 뉴미디어가 다매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면 통신계 뉴미디어는 좀더 발전해서 융합(convergence)의 길로 가고 있다. 물론 통신계 미디어도 자꾸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다매체로 진전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Network 으로 통합되고 있다. 전에는 전화, FAX, TELEX 등의 통신 수단이 전용선을 통해서 연결이 됐는데 이제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신망인 ISDN(Integrated Service Digital Network)으로 통합이 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 있는 DB(Data Base) 망이 INTERNET으로 통합이 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정보 고속도로가 구축되어 국내의 각종 DB들을 좀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다채널과 다매체 시대의 문제점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미디어를 자유 경쟁의 논리에 맡겨 놓으면 시장의 진입이 자유로워서 많은 미디어와 채널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쟁체제 하에서 미디어는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고 전문화된 CH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 다양성을 이루지는 못한 듯하다. 국내의 경우는 정부에서 미디어를 통제하고 아직은 미디어 재벌이 경제적으로 거대한 자봉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미디어가 외적 다양성을 잃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미국의 경우는 우리와는 좀 다르다. CBS, NBC, ABC의 공중파 방송국은 CATV와 경쟁하기 위해서 거대 자본과 합병, 인수를 하고 있다. ABC는 디즈니가 인수했고, CBS는 웨스팅 하우스가 인수를 했다. NBC는 세계 최대 그룹인 GE가 인수를 했다. 이러한 인수는 단지 공중파 방송의 수익성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은 7개의 전국적 공중파와 다수의 CATV, 지역 방송국, DBS등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70년대 영화사들은 극장PN, Lifetime, Arts & Entertainment, Disney CH등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경향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발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작은 정부를 추진하고 있으며, 통제나 관의 간섭을 최소화 하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미디어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미디어들의 결합이 남의 일만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디어의 외적 획일성이 아니라 내적 획일성이다. 이러한 미디어들은 체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시청률이 좋은 방송을 체인들이 계속적으로 방송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방송 제작비를 최대한 뽑을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도 방송3사에서 만든 방송을 일정부분 CATV에서 재방송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생기게 될 DBS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시청률을 우선시하는 풍조와 CATV와 DBS의 재방송프로의 공급 라인화 될 우려를 가지고 있다. 요즘의 방송 프로그램 제작환경이 오락 프로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방송사들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계속적으로 오락 프로를 증가 시킬 것이고 이외에 시청률과 구매율이 떨어지는 어린이 프로, 교양 프로, 노인층 상대의 프로들은 방송국 프로그램 편성과정에서 아예 제외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다양화되기 위해서는 외적 다양성과 함께 독립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상에서 계속적인 미디어의 합병은 체인화로 미디어의 내적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 CATV와 DBS의 재방송 비율을 낮추고, 미디어의 소유를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며 소규모 채널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제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 자유 경쟁은 미디어의 다양성을 유지 시킬 것 이라는 고전적인 의미의 판단이 틀렸기 때문이며 이를 시정하여 미디어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소유구조의 다원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방송과 통신의 융합INTERCAST 방송인터케스트 방송기술은 인터넷(i고 있고, HTML문서도 통신상에 연결이 이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방송상에서 HTML형식의 문서를 보내기 때문에 받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터케스트 방송은 방송이 주도하는 융합 형식이다. 이에 반해서 인터넷상에서 방송을 받아 볼 수 있는 것이 INTERNET 망을 이용한 통신 주도의 융합 형식이다. 뉴미디어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방송과 통신이 결국에는 하나로 통합될 것이라고 한다.극단적으로 TV가 사라지고, PC가 TV를 대신할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공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주장도 있다. 지금 이시기에 이러한 주장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제 본격적으로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고 있고,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CATV와 DBS의 등장과 경쟁CATV과 등장하고 DBS가 등장하고, 계속 새로운 미디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앞의 두 미디어는 다채널을 장점으로 하고 있으며, 지역화, 개성화, 분중화된 현 사회에 가장 알맞는 미디어라고 인식되어 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두 미디어들이 생기게 된 것은 기존의 미디어 즉, OLD MEDIA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CATV가 등장한 것은 1949년에 미국 Oregon주 Astoria의 지역라디오 방송사 소유주인 Parsons가 125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Seattle의 TV방송을 수신하기 위해 안테나를 설치하고 이를 유tus을 통해 직접 가입자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비해서 위성방송은 1974년 5월에 미국의 ATS-6위성이나 직접위성방송은 1986년 11월 일본의 NHK가 BS위성을 이용해 위성방송을 실시하면서부터 이고 미국은 이보다 늦은 1994년 Direc TV가 방송을 시작했다. 두 미디어는 다채널이라는 점에서 같은 점이 있으나, CATV가 Cable을 이용하고, 위성방송이 전파를 이용한 위성으로 방송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공중파 방송이 광역성을 가진 매체이고, CATV가 협송적 매체로 서로 구별화 되서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할 수 있지만 위성 방움을 격고 있는 이유는 시청자 확보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CATV의 인지도가 아직 낮기 때문에 광고 수주가 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DBS는 시청료를 받을 수 없고 순전히 광고비를 이용해서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데 광고 시장 규모가 공중파를 수용하고, CATV와 DBS까지 수용할 수 있을 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CATV나 DBS가 사회의 필요나 기술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책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도입된 것이라서 정부의 지원에 불구하고 얼마나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라 할 수 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사회가 발전하고 미디어가 분화하면서 계속해서 매체가 늘어나고 CH 이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과 같은 수출 위주의 공업국에서 정보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주력 산업화 되면서 한국의 정보화 수준도 계속 성장해서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이다.일부에서는 미디어의 융합화를 논의 하면서 이제는 우리 사회도 미디어의 융합화 시대 로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주류는 역시 다매체와 다채널 이다. 미디어의 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계영역 서비스 의 증가, ISDN과 정보 고속도로의 예를 들면서 미디어가 융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우리는 CATV, DBS를 중심으로 한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지금의 미디어는 다매체, 다채널과 융합이 함께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미디어를 수용하는 사회의 특성에 의해 어느 곳은 다매체 다채널 이 어느 곳에서는 미디어의 융합 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히를 줄이기 위해서 다 매체 다채널 이 일어나고 다음으로 미디어의 융합이 일어난다. 이것은 미디어의 특성과 사회적으로 정보의 통합과 관리의 특면에서 미래 사회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미래의 TV와 통신미디어의 다양화와 매체의 융합에 대해서 계속 다루었다. 매체는 증가하고, 다시 융합하고 있다. 기술적인 논의를 중심으로 미디어를 논하고 있어서것이다.
    예체능| 2003.10.22| 8페이지| 2,500원| 조회(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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