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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을 보고...
    처음, 중국 근대시기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쓰라고 들었을 때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 시기에 나온 영화 중 제가 아는 영화는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화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영화를 찾는 것은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한 영화를 찾아내었습니다. 바로 장예모 감독의 '인생'이었습니다.그 동안 제가 봤었던 영화들 대부분이 시기가 이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봤을 내용이어서 그냥 흘려 보게 되었지만 막상 제가 저번 발표시간에 준비했던 내용과 그 동안 배웠던 내용이 나오니 정말 재미있었으며, 또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여화가 쓴 소설 '살아간다는 것' 토대로 한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은 잔인한 역사의 갈퀴가 인간의 삶을 수 차례 할퀴고 지나가도 아픈 상처를 스스로 추슬러야만 하는 민초들의 애달픈 이야기를 주인공 쿠푸이의 가족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공산당과 국민당과의 내전에서부터 공산당에 의해 치러진 인민대숙청, 모택동이 추진한 경제성장정책인 대약진운동,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모든 것을 배격하는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쿠푸이의 삶을 통해서 광기와 폭력으로 물들여진 1940∼60년대를 배경으로 중국의 현대사를 관통해나가고 있습니다.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쿠푸이(갈우)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다. 롱에루에게 집문서가 넘어가던 날, 쿠푸이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숨을 거두고 도박을 말리던 아내 지아젠(공리)은 애를 밴 체로 집을 나가 버린다. 비탄에 빠진 쿠푸이는 도박을 끊고, 장사를 하며 홀어머니를 모시며 근근히 살아간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지아젠은 아들 빈퀸을 낳자 딸 팽시아를 데리고 쿠푸이에게 돌아온다. 쿠푸이는 가족을 위해 그림자극을 하기 시작한다.이때,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공동의 적 일본을 앞두고 국공합작으로 맞서다 일본이 패망하자 국공내전이 일어난다.쿠푸이는 그림자극을 하던 도중에 국민당의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추위에 떨던 어느날 같이 붙잡혀 온 춘셍이 시체들 틈에서 가져온 옷과 술을 마시고 잠이 들어 버리고 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으로 뒤덮인 들판 위에는 국민당의 군인들의 시체가 가득하고 공산군의 폭격이 계속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공산군들에게 붙잡힌 쿠푸이와 춘셍은 그림자극을 보여주며 목숨을 겨우 유지한다.모택동은 이른바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기적 같은 전략적 기동을 통해 국민당을 대륙 밖으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국공내전에 패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대만으로 건너가고 대륙은 공산화가 된다. 국공내전 중 그림자 극을 하며 공산군에 가담했던 쿠푸이는 혁명에 참여했다는 증서를 받아들고 가족들에게 돌아온다. 쿠푸이 가족은 혁명가족이 된다. 그리고 전에 도박으로 쿠푸이의 집을 빼앗아 지주가 된 롱에루는 반동으로 몰려 처형이 된다. 이 처형장면을 목격한 쿠푸이는 한때 본인도 지주였던 것을 기억하고 두려움에 떨며 혁명증명서를 액자에 넣어 소중히 보관한다.얼마 후 중국에는 우리 나라의 새마을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전개된다. 집집마다 쇠라는 쇠는 모두 수거하여 한데 모아 쇠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쿠푸이 가족도 주방기물을 모두 차출 당하고 마을 회관에서 공동식사를 한다. 그림자극 도구마저 차출당할 뻔 하지만, 쿠푸이는 그림자극으로 쇠 만드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사기를 높여줄 수 있다는 말로 간신히 차출만은 모면한다.그러던 어느 날 고된 며칠 밤샘 작업으로 지쳐 잠들어 있던 아들 빈퀸은 위원장이 쇠 만드는 작업현장을 보러 학교에 방문한다는 바람에 잠이 덜 깬 체로 학교로 간다. 잠결에 학교에 불려간 아들 빈퀸은 담장에 기대 졸다가 후진하는 위원장의 트럭에 부딪쳐 무너진 담벼락에 깔려 죽고 만다. 그런데 이 트럭을 몰은 사람이 바로 전에 군대에 같이 끌려갔던 춘셍이 위원장이 되어 학교를 방문하다 사고를 낸 것이었다. 쿠푸이와 아내 지아젠(공리)은 춘셍을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다시 세월이 흘러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맞이한다.1966년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직접 지휘하였다. 문화대혁명의 발생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모택동이 끝내 버리지 않고 있었던 '계속혁명론'과 유관하며, 이미 기득권 층이 되어버린 당 내부의 관료들을 제거하는 방법은 혁명적 열정에 가득 차 있는 젊은 청년들을 동원한 아래로부터의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문화대혁명 시기의 주요 구호 중 하나는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자(선파후립)"였다.그러기에 전통문화의 파괴는 곧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가 되었다.가장 많은 피해를 본 문화유산은 무엇보다도 종교문화였으며, 전통은 봉건문화와 같은 것으로 단죄되었다.모든 유물들, 청동기제품, 불상, 불화, 각 종 도자기, 생활 필수품이 아닌 문화유품은 모두가 봉건잔재였고 그런 물건을 소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직도 봉건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기에 개인이 더 이상 소장할 수 없었다.사진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모든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부셔 버리고 또 그 행위에 환호하는 홍위병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사진은 사원 앞에 불상을 내놓고 공개 비판할 때 사용하던 고깔모자를 씌운 뒤 봉건사상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적어놓았다. 불상의 머리와 팔다리는 잘려지고 얼굴에는 모욕적인 선을 그어놓았다.동네 위원장은 쿠푸이에게 그림자극에 사용하던 도구들을 보관하는 것도 위험하다며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한다. 쿠푸이는 아내 지아젠이 아들을 생각하며 보관하던 그림자극 도구들을 딸 팽시아를 시켜 불태우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위원장의 중매로 쿠푸이의 딸 팽시아는 노동자 계급의 절름발이 청년 완에르시아와 결혼을 하게된다. 이 결혼식에 춘셍이 모택동의 사진을 결혼 선물로 가져오며 다시 용서를 빌지만 쿠푸이의 아내 지아젠(공리)은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후 춘셍은 자본주의자로 몰려 붙잡힌다. 자본주의자로 몰린 춘셍은 한밤중에 쿠푸이를 찾아와 곧 자살할 사람처럼 자신이 평생 모은 통장을 건네주며 다시 한번 용서를 빈다. 비로소 쿠푸이의 아내는 춘셍을 용서하며 통장을 받지 않으며 아직 빚이 남아 있으니 꼭 살아서 갚으라고 하며 돌려보낸다. 그리고 얼마 뒤 팽시아는 남편 완에르시아와 함께 방문하여 임신소식을 전한다.대중 집회에서 공개적인 비판을 받는 장면이다. 물론 이 비판운동이 끝난 뒤 당사자는 자살을 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수많은 당 간부들이 비판을 받고 투옥되거나 추방되었고 반우파 투쟁 속에서 우파분자로 처단되었던 많은 지식인들 역시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혼란 속에서 정제되지 않은 개인적 감정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쏟아 부어진다고 해도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드디어 팽시아는 해산날이 되어 병원으로 입원한다. 병원 밖은 모택동을 교조 화하며 젊은 혈기에 날뛰는 홍위병들이 거리를 차지하고 병원내의 의사들마저 이들 홍위병에게 붙잡혀 가 있고 병원은 새파란 학생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홍위병은 혁명당시 모택동을 지지하기 위해 설립된 학생조직이며 자체 무장을 한 준 군사집단이다. 현대에 와서는 홍위병은 어떠한 권력자에 빌붙어서 끄나풀 역할을 하는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젊은 학생들만 있는 것에 불안한 쿠푸이 부부는 사위를 시켜 붙잡혀간 의사들 중 한사람을 모셔오라고 한다. 그런데 홍위병으로부터 잠시 빼온 노 의사는 며칠동안 붙잡힌 채로 3일 동안 아무 것도 안 먹어 기진 맥진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쿠푸이는 찐빵을 사와 노의사한테 먹이는데, 너무 배가 고파 한꺼번에 7개를 먹어버리고는 이 노 의사는 체해 버려 정신을 잃고 만다. 역시나 경험이 없는 학생들뿐인 병원에서 쿠푸이의 딸 팽시아는 아들을 낳지만 과다출혈로 손도 쓰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독후감/창작| 2006.12.29| 3페이지| 1,000원| 조회(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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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 사기 본기 인물들의 업적
    < 사마천 사기 본기 인물들의 업적 >1. 진시황진의 시황제는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다. 시황제는 진나라 소왕 48년 정월에 조도 한단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을 정이라 했고 성은 조씨다.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시황제는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다.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칭호였다.한편 통일 천하를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을 주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했다.2. 항우사마천이 기술한 개인의 전기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공감과 감동, 그리고 인간미를 물씬 풍기는 곳을 고르라고 말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항우본기를 들것이다.항우는 서기전 232년에서 202년까지 살았던 인물로서,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과 천하를 놓고 다툰 무장이다.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이다. 강소성 임회군 하상현(江蘇省 臨淮郡 下相縣)에서 출생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젊은 시절 "문자는 제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이란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 이라 하고, 회계산에 행차하는 시황제의 성대한 행렬을 보고 "저 녀석을 대신해 줄 테다." 라고 호언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서기전 209년 진승·오관의 난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 태수를 참살하고 인수(印綬)를 빼앗은 것을 비롯하여 진군을 도처에서 무찔렀다.진나라가 멸망하자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서기전 206년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항우의 무원칙적인 분봉과 영토배정은 함께 봉기했던 제후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척박한 지역을 분봉 받은 유방의 불만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마침내 유방은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항우에게 도전했다. 이 도전은 구 귀족을 대표하는 항우집단과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유방집단의 싸움으로 발전하여 이른 바 한초쟁패가 펼쳐졌다. 초반에는 군사력에서 앞선 항우가 유리했으나, 유방 측의 반간계로 인해 항우의 유일한 모사였던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나감으로써 패권의 흐름이 유방에게로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당하게 되고, 이때 항우가 사랑했던 애첩 우희도 자결을 하게 된下)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烏江)으로 도망가 정장(亭長)으로부터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하라." 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 강동의 8,000여 자제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 부형을 대할 것인가" 라며 혼자서 적병 수백 명을 죽이고 친구의 칼을 빌어 자결하고는 그 파란 만장한 31년의 생애를 마치면서 우희의 뒤를 따랐다.냉철하고 타산적이며 음흉한 승자(勝者) 유방에 비하여, 정열적이고 직선적이고 그래서 빈 구석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패자(敗者) 항우. 그는 평범함 사람들이 갖기 쉬운 인간적 약점을 유방에 비하여 더 많이 가진 사람이었고, 그 인간적 약점 때문에 패한 사람이었다. 항우가 인간적 약점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유방의 강인(?)하고 끈덕진 성격은 범인(凡人)이 은연중 갖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관심이 될 수 있다. 우리 인간에게 내재한 두 개의 성향이 숨막히는 대결을 벌이는 그 곳. 그 곳이 바로 항우 본기이며, 항우의 불꽃같은 삶이 녹아있는 곳이다. 진시황을 멀리서 바라보고 "저 놈의 천하를 엎어놓고야 말겠다." 고 내뿜는 것도 항우였고, "사내란 저쯤 되어야지" 하고 차갑게 말한 것은 유방이었다는 이야기를 사마천은 본기의 머리 부분에 실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제왕에의 집념과 그 방향의 차이를 몇 자 안 되는 이 말로써 암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일세의 풍운아, 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항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을 만한 항우, 사면초가 속에서 애첩 우미인과 헤어질 때 보여준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항우. 항우를 생각하면 그 못 다한 삶이 아쉬워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는 이도 있지만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은 "강동의 자제는 항우를 위해 권토중래 하지 사마천도 그의 저서 《사기》에서 "항우는 힘을 과신했다." 라고 하였다.3. 고조서위(西魏) ·북주(北周) 시대에 활약한 이호(李虎)의 손자이다.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무장으로, 아버지 병(昞)이 일찍 죽자 7세 때 당국공(唐國公)의 작위를 이었다. 이모가 수(隋)나라 문제의 후비(后妃)여서, 수나라의 귀족으로서 황제의 신변을 지키는 천우비신(千牛備身)이 되었다. 그 뒤 여러 주(州)·군(郡)의 자사(刺史) 및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수나라 말기에 다년간의 노역과징(勞役過徵)과 사치스런 유행 등으로 백성의 생활이 피폐하였으며, 3차례의 고구려 원정에 양제(煬帝)가 대패하자 혼란에 빠졌다. 당시 “양씨를 대신하는 자는 이씨”라는 말이 나돌자, 양제의 경계심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느꼈으며, 또 각지에 군웅이 봉기하여 천하를 노리는 형세를 보고 야심에 불타기도 하였다.617년 북방의 군사적 요충인 태원(太原)에 파견되어 돌궐(突厥)에 대한 방비를 담당하자, 그곳의 관료·호족과 결탁하는 한편 아들 건성(建成)·세민(世民:후일의 太宗)과 함께 군비를 갖추었다. 그해 여름 군사를 일으켜, 7월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태원을 출발하였다.북변(北邊)의 강적인 돌궐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하여 후원을 당부하였으며, 서남으로 진군하여 11월에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였다. 명목상 양제의 손자를 추대하고, 자신은 당왕(唐王)이 되어 관중(關中)에 군림하였다. 이듬해 양쯔강[揚子江] 기슭으로 피한 양제가 살해되자,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당나라를 세웠다.그 뒤 수년간 아들 세민의 활약으로 중원(中原)의 군웅 이밀(李密)·두건덕(竇建德)·왕세충(王世充) 등을 진압하였다. 또한 수나라 초기의 개황(開皇) 제도에 의거하여 나라의 제도를 갖추고, 새 왕조의 기초를 굳혔다. 626년 자식 간의 다툼으로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 일어나 세민의 패권이 확립되자, 양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다.4. 여태후여태후(BC241~BC180)는 이름이 여치(呂雉) , 자는 아후이며, 한(漢)의 황후이다. 그녀는 유방이 죽은 후에 정권을 장악하여 16년간 한제국을 통치했다.고조 12년(BC 195) 4월 유방이 죽고 여치의 아들 유영이 제위를 계승하였으니 그가 한나라의 2대 황제 혜제(惠帝)이다. 이에 황태후가 된 여치는 어린 혜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면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여태후는 유방의 사랑을 받았던 척부인과 태자의 자리를 넘보았던 조왕 유여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먼저 척부인을 영항(永巷: 원래는 궁녀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후에는 죄를 지은 비빈을 감금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음)에 감금한 다음 조왕 유여의를 제거할 틈만 노리고 있었다. 혜제 원년(BC 195) 12월, 혜제가 새벽에 활쏘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여태후는 혼자 남아있던 유여의에게 독주를 먹였다.아침 해뜰 무렵 혜제가 돌아왔을 때 유여의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그후 여태후는 다시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인 다음 '돼지우리'에 가두고 그녀를 '사람돼지'라 불렀다.여태후는 황제의 지위를 대신한 8년 동안 많은 정적들을 무참히 죽이고, 여씨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 어떤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지만, 국정 운영 면에서는 그 어느 왕조의 어느 황제에 못지 않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먼저 고조 유방 이래로 시행해 오던 민생안정 정책을 계승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삼족을 멸하는 연좌제와 요언령(妖言令)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이 기간에는 백성들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혼란했던 사회도 점차 질서를 잡아가고, 피폐했던 경제도 점차 회복되었다.5. 효문중국전한(前漢)의 제 5 대 황제(BC 180∼BC 157). 성명은 유항(劉恒).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아들. 대왕(代王)에 책봉되어 중도(中都)에 도읍했다가 조정을 전단(專斷)하던 여씨(呂氏)의 난이 평정된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치세는 한나라 초창기 말엽이어서 여씨의 난 진압에 공적이 있었던 고조편 가의
    인문/어학| 2006.12.30| 5페이지| 1,000원| 조회(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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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대륙의 딸들을 일고...
    은 20세기 중국에서 할머니, 어머니, 딸의 삼대에 걸쳐 일어난 일가의 이야기이다. 다큐멘타리라고는 하나 유장한 대하소설을 보는 느낌이었다. '딸들'이라는 제호와는 달리 그들과 관련된 가족들의 이야기이고, 읽다 보면 중국의 지난 100여년에 걸친 군벌시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공산당의 지배,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현대사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 민중의 이야기와 역사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소득이었다.일제의 강점과 6·25가 주축이 된 우리의 현대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대륙 역시 부분적인 일제의 강점으로 곤욕을 치렀고 골육상쟁과 이념을 내세운 피의 살육으로 얼룩졌다. 사실 땅이 뒤집어질 만큼 사람들의 신음으로 대륙은 흔들렸던 것이다.물론 우리가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그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만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땅 사람들이 살아갔던 족적을 자세히 느끼다 보면 이제 그들과 우리는 별개가 아닌 하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인식은 또한 새로운 시대의 이정표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고려할 수 있게 해 준다.책의 처음은 가장 나이 많은 주인공인 저자의 할머니로부터 시작한다. 만주의 주도권을 일본이 장악하던 시절인 1909년에 태어났다.저자의 할머니는 남자의 노리개요 재산이었던 전형적인 중국여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오늘의 중국여성들의 삶이나 지위를 생각할 때 중국의 혁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역사학자의 말에 수긍이 갈 만큼 당시 중국여성들의 삶은 열악하였다. 그 역시 하급경찰의 딸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출세의 도구로서의 삶의 가치를 부여받았다. 100년 전만 해도 중국여자들의 삶에서 '전족'은 빼놓을 수가 없다. 출세의 도구로서 딸을 상납하려면 예쁜 것은 기본이고 가장 큰 매력은 작은 발이었다. 전족으로 뒤뚱거리며 걷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두 살 때 발이 묶였다. 6m 정도의 흰 천으선생은 집안의 어른이었으나 이 결혼으로 인해 집안의 배척을 받다가 결국 많던 재산을 자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혈혈단신으로 저자의 할머니와 타지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사별. 나머지 삶은 딸과 사위에게 닥친 불행 속에서 평생을 염려와 병고 속에서 보내야 했는데, 놀라운 것은 가장 험난한 시기를 살다 갔으면서도 그가 실로 지적이었고 아름다움을 유지하였으며 자신의 자유를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한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시대가 주는 어둠 속에서도 한 평범한 아낙이 끌어안은 생은 비록 옅으나 아름다운 빛으로 남은 것을 보여 준다.저자는 할머니에 대하여 회상하기를 '그녀는 활기에 넘치고 재주가 많았으며 무한한 힘을 가진 훌륭한 인물이었고 강한 여자였으나, 가난과 일본의 점령, 내전, 문화혁명 동안의 추악한 적대행위의 소용돌이에 짓눌려 버렸다. 딸(저자의 어머니)에게 일어난 모든 고통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었고 그 모든 격동이 축적되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라고 썼다.할머니가 겪은 일 중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문화혁명은 저자의 가족들이 모두 흩어지게 만들었고 그 와중에서 할머니가 입원했다가 치료가 안된 채로 퇴원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할머니를 부축하고 병원문을 나섰다. 천천히 걷기를 한 시간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돌풍이 불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옷은 몸에 달라붙어서 걸을 수가 없었다. 작고 여윈 할머니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하늘이여, 나를 죽여 주시오!"차라리 죽기를 갈망하는 인생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죽음보다 못한 삶, 죽음보다 더 힘든 삶들... 말 그대로 삶은 그러하였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절규를 집약한 말이기도 하였다.저자는 책의 헌사를 이렇게 썼다."이 책이 나올 때까지 살아 계시지 못한 외할머니와 아버지께 이 책을 바친다. 외할머니는 중국의 가장 불행한 여성이었으나 또한 가장 강인한 분이셨고, 아버지는 중국의 가장 철저하고 강인한 공산당원이었으나 또한 가장 불행한 남성이셨다.이제 '중국의 가장 불행한 남성'으로 저자가 회상하는 리로서 처음 시작한 일들은 죄수를 석방하고, 전당포와 사창가를 폐쇄하며, 극빈자에게 배급을 주고 일본인과 협력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며, 중국인들의 사업과 상업을 보호하는 등의 일이었다.장쇼유를 중국의 후예로서 공산주의자가 된 인물로서의 한 전형이라 할 때 이는 어찌 보면 미묘한 결합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그는 덕과 신망을 받으면서도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로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 충실한 일종의 투철한 인간형이 되었다. 그의 성년 이후의 반평생 이상은 적대계급에 대한 투쟁이라는 공산당의 기본 정신에 합당하리만큼 투철하게 공산당을 위하여 살았으니, 많이 죽이기도 하고, 자신과 남을 앞장 서 비판하는 자리에 서기도 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비판이나 탄핵은 실제로는 통제된 사회의 속성상 진정한 이성과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한관계 같은 것이 교묘히 짜여진 분풀이나 보복 같은 성질로 화하기가 쉬웠다. 장쇼유가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말은 사견을 철저히 배제한, 가장 공산당적인 인물이었다는 말이다.그의 이러한 면모는 54세의 일생 중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이후 그의 나머지 10여년의 생애에서 가장 험난한 경로를 선택하게 한 것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중국의 공산화 이후 여러 차례의 숙청사업과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등은 중국 인민 대다수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사건들이기도 하였다.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중국은 실제로는 마오쩌둥(이하 마오)이 주축이 되어 갖가지 정치적 운동을 통해 적대계급을 숙청하는 작업을 해왔다. 1955년 '반혁명분자', 57년의 '우익', 59년의 '우익 기회주의자' 등등의 숙청사업을 거치는 동안 농업 및 경제의 침체와 악화된 여론을 타개하기 위하여 마오가 벌인 운동이 대약진운동이다. 현실을 무시한 중공업 우선정책,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 재산분배의 평균주의적인 시각으로 농민들의 가치관이 흔들렸고 생산의욕이 감퇴하였다. 각급 기관에 모두 용광로가 설치되어 철생산에 매달렸으며, 농업생산량의 목표치는 두 배 이상이 되었다어머니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출산과 혁명의 과업으로 병고가 끊이지 않으면서도 공산당 여성간부로서, 남편과 함께 자랑스럽게 그 이념에 몰두하였다.이즈음에 저자의 부모는 허위정보 제작의 중심에 있으면서 주변에서 펼쳐지는 민중들의 굶주림에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정권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이제 전 중국은 문화혁명이라는 광란의 도가니로 변한다.문화혁명의 구상은, 마오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대약진운동이 실패하고 소련의 원조 중단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데다, 그가 반대한 '자본주의의 길'이 성공했고, 이것이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권력자로서의 위기의식을 느낀 데서 비롯된 듯하다. 그는 '자본주의 노선을 따라가는' 공산당 관료들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주자파(走資派)로 불리어졌으며 이로써 거대한 문화혁명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문화혁명의 초반은 10대에서 20대 초반의 고관자녀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의 파괴행위로 날뛸 무렵이고, 후반은 오히려 그들의 부모가 주자파로 몰려 공산당 내에서의 파벌싸움으로 전 중국이 치달을 때를 말한다.저자는 회고하기를 '중국 전역의 홍위병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문화파괴와 무지와 광신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순식간에 개인 소장품들이 파괴되었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무참하게 얻어맞고 굴욕을 당하고, 자신의 작품이 불에 타서 재로 변하는 광경을 강제로 목격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썼다.문화혁명의 실체를 장쇼유가 정치관료의 감각으로 깨달은 것은 문화혁명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가 느꼈던 것은 '혁명의 민주화라든가 국민의 발언권을 높이는 것이 아닌 마오의 개인적인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피의 숙청작업'이었다. 한마디로 마오의 신격화였다. 중국의 위기를 느낀 그는 마오에게 문화혁명을 중지시켜 달라는 편지를 썼다. 물론 그것은 전달되지 않았고 그 이전부터 그의 성향을 감지했던 반대파(이하 조반파)들로부터의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마녀사냥으로 주자파 공산당 관료의 파멸을 노린 마오의는 것일지라도 나는 거기에 반대한다!"모두 조용해졌다. '마오 주석에 반대하는 것'은 곧바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다. …그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자 다시 그를 때리기 시작하면서 불경스러운 말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었다. 모든 집과 거리가 국민들 스스로에 의해 감시당했다. 그 광활한 땅 어디에도 숨을 곳이라곤 없었다. ...폭력적인 거리 탄핵대회와 악의에 찬 대자보와 구호뿐이었다. 사람들은 험상궂거나 아니면 억눌린 얼굴로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문화혁명과 같은 대격동을 치르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을 10대의 저자는 통찰하였다. 인간다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자신의 이해에 따라 과거의 상급자였던 아버지에게 대하는 여러 군상들이 그 두 모습으로 확연히 대별되는 것을 그는 느꼈다.중국의 모든 정치투쟁이 그런 것처럼 문화혁명도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함께 얽힌 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 체제 구축을 의도하는 호전적인 지도자의 모습은 은폐된 채, 군중들에게는 '난폭하게 행동하면서 악한 본능을 충족시키도록 허락된' 어둠의 시간들이기도 하였다.그러한 시간을 지나면서 저자의 아버지에게 정신이상이 찾아왔다. 그가 온 몸으로 헌신하였던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와 잦아들지 않는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예리한 지성은 분열되고 말았다.정신이상이 된 아버지는 밤이면 집에서 잠을 자고 낮이면 조반파에 이끌려 탄핵대회에 나갔다. 어느 날 저자는 아버지가 행진하는 트럭 위에 잡혀 있는 것을 보았다. 목을 파고드는 철사줄에 간판을 매달고, 양팔은 등뒤로 고통스럽게 묶인 채로였다. '미친 장씨의 숨겨진 이야기'라는 대자보가 이틀마다 한 번씩 새로 나붙었다. 40여일의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고 정상으로 돌아오자 즉시 반대파인 팅부부라는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그들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은 저자의 아버지를 삭발시킨 후 후려패고 성기를 걷어찼다. 입과 코에 물을 붓고 배를 짓밟았다. 물과 피와 배설물이 밀려나왔다. 병원들은 탄핵대다.
    독후감/창작| 2006.12.29| 5페이지| 1,000원| 조회(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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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신라의 삼국통일 과정과 역사적 의의
    Ⅰ. 서론지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은 한반도와 그 부근,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 분산되어있다. 현실적인 민족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한반도 이남으로 되어 있고, 현재 우리가 있는 이 곳은 중국이다. 현재 이곳이 조선족자치주로 되어있지만,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만은 아직도 남아있다. 지금 이 만주의 땅은 바로 우리 옛 민족이 살던 땅이고, 우리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이곳은 고구려인이 그 넓은 기상을 지니던 땅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구려와, 한반도의 신라, 백제는 어떻게 하여 통일이 되고, 그 통일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1. 백제의 멸망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다. 백제의 멸망원인은 당과 고구려의 쟁패에서 당의 이따른 패배로 인해, 고구려보다는 백제를 먼저 공격해야 된다는 인식과, 당태종의 죽음으로 그의 유언이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는 원조를 해주는 것을 먼저 제거해야한다"라고 하여 강대국인 고구려의 팔과 다리 같은 십자동맹국인 백제를 치게 된 것이고, 또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처음에는 해동증자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신라를 공격하여 지리산 근처의 성을 점령하며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는 고구려에게 원조를 청하지만, 고구려는 자신의 점령당한 영토를 다시 돌려줄 것을 요청하며 거절하고, 김춘추를 토굴에 가두는 등, 신라와 불편해지자, 신라가 당에게 백제 정벌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의자왕은 처음에는 뛰어난 왕 이였지만, 그 후 실정을 하여, 성충, 흥수 등의 충신을 귀양보내고 삼천궁녀를 거느리며, 술과 향락에 빠져 버리게 된 것 또한 백제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현실적으로는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7만의 군사가 군포로 하여 금강을 따라 부여성으로 출진하고,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가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의 군사는 탁현(황산벌)에서 백제의 맹장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군사에게 3번이나 폐하지만, 화랑 관창의 죽음에 사기를 얻어 백제군에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2. 고구려의 멸망당은 방호태로 하여금 663년에 20만의 군사를 데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패하게 된다. 고구려의 멸망은 내부분열에 의해서 몰락하게 된다. 연개소문이 664년에 사망하고 그의 장자 연남생에게 대막리지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연개소문은 세 아들에게 버드나무를 가져 오게 해, 한 개를 꺾으면 부러지지만, 세 개는 부러지지 않는다는 협동의 정신을 가르치지만 연남생이 동생 연남건에게 대막리지 자리를 맡기고 외각을 순찰하던 중, 첩자의 계속되는 모략에 의해, 연남건과 연남산이 정권을 잡고, 연남생은 당으로 투항, 이들이 삼촌인 연정토는 10여개의 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다. 그 후 668년에 당이 쳐들어와 남건이 당에 항복하고 남산이 저항을 하지만 끝내 멸하게 된다.3. 삼국의 통일과 부흥운동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양국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당이 차지하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당은 신라까지 도모하려 하였다. 당은 문무왕을 계림도독부에 임명하는 등 부조리한 행사를 하였고, 신라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선 백제 유민의 포섭에 힘썼다. 백제의 관리들에게 골품제에 입각하여 신라의 관등을 부여한 것은 그 하나였다. 당도 백제의 유민의 민심을 받기 위하여 사로잡아 갔던 백제 태자 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사비와 웅진 등 약간의 지역을 제외한 백제전역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나 당과 신라의 군대가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무왕의 아들인 복신과 승려인 도침은 백제 부흥운동을 도모하였고, 흑지상지는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의자왕의 둘째아들 풍이 복신을 죽이고, 흑지상지는 당에 투항하는 등 백제의 부흥운동은 다시 자체 내의 내분으로 말미암아 와해되기에 이른다.한편, 나라가 망하자 고구려 유민은 일파는 신라지역으로 약 80만명이, 당나라 전지역으로 30만명이 해산되었다. 이렇게 해산된 고구려인은 이정기, 고선지 등 유명한 장수가 되었다. 또한 이들 유민들도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그 전성이 당의 통치 밑에 있었으므로, 그 부흥운동은 당에 투쟁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검모잠은 왕족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성을 근거지로 하여 군사를 모으는 한편 신라에 후원을 요청하였다. 안승은 문무왕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신라는 당을 축출하고자 하였으므로 기꺼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였다. 안승이 추대되고 신라의 후원이 있자 고구려 유민들은 사방에서 호응하여 당군을 몰아내고 자립하였다. 그러나 전역을 가다듬은 당이 재차 침입하자 고구려 성들은 다시 함락 당하였고, 부흥군은 모두 신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안승을 받들고 있던 핵심적 부흥군은 비록 무력해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당은 고구려지역에 대한 직접통치를 포기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무창)으로 옮겨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보장왕은 신성에 도착하자마자 곧 말갈족과 연락하여 당에 투쟁을 시도하였으나 일이 탈로가 나 다시 당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당은 한반도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침내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룩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되는 바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을 식민지화하려다가 우리 민족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을 맛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삼국의 문화가 기본적으로 중국세력과 대항하는 측면에서 민족의 가능성을 시험하면서 성립한 문화였다는 점을 확인하는 역사 경험이다.4.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삼국간의 항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맺어 지면서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민족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록 삼국 중 어느 한나라가 주축이 되어 민족통일로써만이 가능한 새로운 민족사의 전개를 전망하면서 이룩한 바는 아니었을지라도 분명히 우리 민족의 자기 성장과 그 발전 과정의 도모에서 획득된 위업이었다. 이에 이르러 우리 민족은 비로소 민족과 민족문화 형성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가장 후진국 이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은 크게 보아 문화적 후진성을 지닌 우리 민족이 선진세력과 대항하여 정당하게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이 중심이 된 경우보다도 그것이 민족사에 제시하는 의미는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신라사회의 건전성이야말로 백제, 고구려 양국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지닌 후진적인 한계성은 그 삼국통일에도 반영되었다.첫째, 삼국통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어 민족국가의 형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삼국 말기부터 벌어졌던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상대국에 대한 대결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미미하나마 그들 사이에 동일 역사체 의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삼국통일 이전부터 중국이 삼국을 삼한으로 불렀던 것은 이러한 삼국의 동질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삼국 사이의 대결이 약화되면서 반대로 뚜렷이 형성되는 것은 668년 이후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면서부터 이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내적으로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결속하고 나아가 귀족세력을 억압하여 전제 왕권을 정점으로 한 중앙 집권화를 이루어, 삼국의 영역과 주민을 아울러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룩하려 하였던 것이다.둘째, 신라의 통일은 영토상으로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상실케 하여 민족 생활권의 2차적인 축소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 영토상의 손실은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우리민족을 주체로 하여 말갈족이나 거란족을 포섭, 동화하는 시늉까지 상실케 하였다. 실제로 신라는 통일 후 한족과 경쟁하지 못하고 발해와 적대관계에 섬으로서 민족의 역량을 무의미하게 소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민족의 가능성을 모두 실현하지 못하였던 아쉬움을 질책하고 그 원인을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을 뿐 외세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한국 고대 문화가 전면적으로 붕괴 당하게 되었던 위기를 막은 위대한 업적을 부인하거나 감소시키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통일 후 신라는 여, 제의 유민과 지배층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삼국문화의 통합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삼국민이 합심하여 당 세력을 몰아냄으로서 통일작업을 마무리지은 경험에서 보여준 삼국문화의 공동기반은 민족문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인문/어학| 2006.12.29| 3페이지| 1,000원| 조회(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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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이중섭 학습지도안
    < 학습지도안 >>(1) 화가 이중섭{단원명(1) 화가 이중섭차시2/5학습 목표1. 글을 읽어가며, 내용과 관련하여 질문을 만들어 보고 답해 볼 수 있다. 2. 감동적인 부분을 찾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할 수 있다.3. 글을 읽고 얻은 교훈을 정리할 수 있다.학습 흐름교수-학습 내용자료 및 유의점동기 부여문제 선정문제 해결 방법 안내계획 수립문제 해결 및 발표정리▶ 학습 동기 유발 및 학습 목표 확인 1·이중섭의 그림을 찾아 그 느낌을 발표하기▶ 본시 학습 문제 선정 : 학습지 제시▶ 학습 방법 안내·개별 학습 및 소집단 협력 학습·문제 해결 방법 : 질의, 응답 및 발표▶ 모둠 문제 해결 방법 수립▶ 목표 학습·글의 내용과 관련지어 질문을 만들어 보고 답하기 2·이중섭이 마음의 병이 든 이유 추측하기 3▶ 적용 학습·감동적인 부분 찾아보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정리하기 4·글이 주는 교훈 정리해 보기 5·이중섭의 비문 만들어 보기 6▶ 형성 평가 및 과제 제시 7멀티미디어 자료학습지평가지설명하기시범 보이기질문하기활동하기과제 학습개별학습소집단학습협동학습12345671. 도입(5분)1) 전시 학습 확인1 능동적으로 글을 읽는 방법을 말해 보도록 한다.2 글 전체의 줄거리를 발표해 보도록 한다.2) 학습 동기 유발 : 이중섭의 대표적인 그림을 인터넷에서 찾아 소개하고 그 느낌을 말해 보도록 한다. (인터넷 주소 : www.whiteart.com/html-work/main htm)
    교육학| 2006.12.29| 6페이지| 1,000원| 조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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