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중턱에 널찍이 자리 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고려 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경허와 만공 같은 큰 스님이 있었다.수덕사를 답사하기 위해 참고했던 책 중 하나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다.「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이 있던 곳으로 유명해졌다. 또 여승들의 큰 선방이 여기에 있어 청도 운문사와 같은 청순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같은 유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수덕사는 더 이상 그런 수덕사가 아니다. 그 옛날의 수덕사는 완벽하게 망가져버렸다. 최근 몇 년간에 걸친 엄청난, 아니 어마어마한 중창불사로 으리으리한 사찰이 되었다. 일주문을 지나면 둥근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던 그 넓고 한적한 길은 없어지고, 마치 중국 무술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을 듯한 다듬어진 돌길에다 돌계단으로 화려의 극을 달린다. 무지막지하게 값비싼 돌로 치장하여 돈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돌난간에는 별의별 촌스러운 발상이 난무한다.이 부분을 읽고 직접 수덕사 매표소에 도착하니, 과연 일주문, 금강문 그리고 사천왕문까지 보이는 직선으로 난 길이 돌계단 길임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었다. 그러한 네모반듯한 돌길과 황하정루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사찰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대웅전을 볼 수 있었다. 1308년에 지어져서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수덕사 대웅전은 700여년이나 된 목조 건축물인 셈이다. 오늘날의 기술로도 100년 이상 가는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튼튼하기까지 한 수덕사 대웅전은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역사라는 것은 어떠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현장성’이 있기에 그 공간이 옛 상황을 그대로 보존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은 답사하는 입장으로서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역사적 현장성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즉 보존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가늠해보면서 답사를 하는 것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는 』의 원효 중창설 역시 이런 의도를 억지로 꿰어 맞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또 운허가 편찬한 『불교사전』에는 구체적인 근거 자료 없이 백제 의자왕 7년(647)에 숭제 법사가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론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진표(眞表) 율사에 관한 전기가 두 종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의해」편 ‘진표전간(眞表傳簡)’조이다. 여기서 숭제법사는 금산사 스님으로 신라 경덕왕과 혜공왕 때 활동한 고승 진표의 스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조에 나오는 기록이다. 여기에는 숭제법사가 순제(順濟)법사로 표기되어 있다. 두 기록의 앞뒤 맥락을 미루어 보면 순제 법사는 숭제법사의 잘못된 표기로 추정된다.그러나 ‘진표전간’에 따르면 진표가 출가한 12세 때가 성덕왕 28년(729)이 되고, ‘발연수석기’에서는 경덕왕 4년(745)으로 되어 있어, 『불교사전』에서 말한 의자왕 7년과는 무려 82년에서 98년이나 차이가 나므로 같은 숭제법사라 할 수 없다. 『불교사전』을 보더라도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설법한 이는 오히려 혜현법사가 되어야 적절하다. 그러나 의자왕 7년이면 혜현법사 역시 입적한 지 20년 뒤가 되므로 맞지 않다. 그러므로 숭제법사의 『법화경』강경설은 수용하기 어려우며 이 설 역시 원효대사 중창설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과도한 염원이 빚어낸 설화를 후대에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 여겨진다.3. 중창의 역사수덕사가 삼국통일 뒤 어떠한 사격(寺格)을 지니고 이어져 왔는지에 관한 사료나 유물은 거의 없다. 다만 1937년에서 1940년 사이의 대웅전(大雄殿) 해체?수리 때 대들보에서 발견된 ‘지대 원년(至大元年)’이라는 묵서명(墨書銘), 즉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대웅전의 대들보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조금이나마 중창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뿐이다.1) 고려 말 조선 초의 수덕사고려 충렬왕 때는 원(元)의 침략으로 나라가 쇠약해져 있었다. 흔히 원 간섭기라고 명명하는 이 시기에 수덕사의이들을 맞이한다.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과 사천왕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문에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 또는 2칸의 규모로 내부 공간이 있다. 금강문은 좌우칸 내부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안치한 문이며, 사천왕문은 내부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안치하여 놓는다.이와 같은 관문들은 주불전(主佛殿)인 대웅전에 이르는 도정(道程)에서 인간의 모든 번뇌와 욕심,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정화시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2) 전개부일주문에서 시작된 흐름을 연결시켜 주는 전개부는 황하정루에서 조인정사(祖印精舍)의 영역을 말한다.일반적으로 산지 가람에서는 일주문부터 몇 개의 문을 지나 황하정루 앞에 이르기까지 선형의 직선축을 이루게 되고 이를 지나면 넓게 트인 주불전의 앞마당이 나타나게 된다. 이곳 수덕사의 가람 배치는 80년대 이후 여러번의 개축과 이건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이 바뀌어져 아쉬움을 남게 한다.앞뜰을 중심으로 주불전을 마주하고 있는 황하정루는 경내에서 행하는 제반 의식의 집전 장소로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1988년에 증축되고 1996년에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던 원래의 위치에서 한 단 아래 영역으로 이건, 개축되었다. 현재 이 누각의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고 지상 1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그 밖에 전개부에는 법고각(法鼓閣)과 범종각(梵鐘閣)이 있다. 불교에서는 사물(四物)이라 칭하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그리고 운판(雲版)이 있는데, 이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법과와 목어는 법고각에, 그리고 범종은 범종각에 봉안한다. 이러한 법고각과 범종각은 삼국시대 황룡사터 유적에도 나타나 있어 그 시원(始原)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물 가운데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물속의 생명에게. 그리고 범종은 일체 중생에게 소리를 보낸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소리를 통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일체 중생에게 전파하고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정면이 더 크게 나타나 전체적으로 정면과 측면의 전체 길이의 비가 약 1.3대 1인 장방형의 평면 구성을 이루고 있다.정면의 3칸 가운데 중앙칸을 어간(御間), 그리고 중앙칸 좌우의 칸을 협간(夾間)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중앙칸이 협간의 길이와 같거나 큰 것이 보통이지만, 수덕사 대웅전의 중앙칸은 그 기둥 간격이 오히려 협간보다 6cm 정도 작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내부에는 정면 중앙칸과 측면 전후칸의 기둥 열에 맞추어 내진고주(內陣高柱)가 앞뒤 양쪽으로 각각 두 구씩 놓여 있다. 따라서 대웅전은 동서남북으로 모두 대칭이 되는 구심형의 평면으로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불단은 내진(內陣) 뒤쪽의 양쪽 기둥을 배경으로 하여 중앙에서 뒤쪽으로 물러나게 놓여져 예불 의식을 위한 불단 배치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 불단이 대웅전의 건립 당시에 놓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의 불단은 실측도면)을 보면 좌대 받침석 없이 마루 위에 얹혀 있어 이 마루가 후대에 짜여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2) 대웅전 건축 구조 및 의장기단앞면에는 석축(石築) 겸 기단(基壇)을 장대석(長臺石)으로 7단을 쌓은 다음 그 위로 갑석(甲石) 한 단을 약간 내밀어 쌓아 전체 높이가 약 3m 정도 되도록 높직하게 구축하였으며, 뒷면은 2단 쌓기로 하고 계단은 석축의 양단부 모두 난간석이나 계단 소맷돌이 없이 10단의 디딤돌만을 놓아 가파른 경사가 되도록 설치하였다.기단석은 평균 길이가 약 1.2m~2.4m에 이르는 장대석으로, 곱게 다듬어 깐 다듬돌 바른층 쌓기를 하였다. 기단석은 모두 같은 크기이며, 다듬지 않은 것은 벽돌 쌓기와 같은 획일적인 기하학 형태는 피하되 정돈된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옛 장인들의 생각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초석초석(礎石)은 대부분 자연석 주초(柱礎)를 사용하였으나 대웅전 정면 열에 초석들은 기둥이 놓이는 자리에 주좌(柱座)를 돋음하여 정교하게 가공하였다. 형태는 정방형, 장방형, 그리고 가공머리에서 도리 아래까지 여러 형태의 부재들의 조합 부분을 공포(?包)라고 한다.공포는 처마를 길게 내밀게 하기 위한 역학적 장치의 하나로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적절하게 전달해 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며, 또한 역학적 원리에 의해 중첩되는 부재들의 의장적인 효과를 가장 잘 나타내는 부분이 된다. 공포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나 『삼국사기(三國史記)』「옥사(屋舍)」조에 나오는 공아(工牙)와 화두아(花頭牙)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삼국시대에 상류 주택이나 궁궐, 또는 사찰 등 격식을 높이고 권이를 나타내고자 했던 건축물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기둥과 기둥 사이는 기둥머리를 파내고 그 자리에 길다란 장방형의 가로 부재를 놓아 서로를 연결시키는데 이 부재를 창방(昌妨)이라고 한다. 그 위 기둥의 윗면에는 마치 대접처럼 생긴 부재가 놓이는데 이를 주두라 한다. 또 주두는 운두와 굽, 그리고 굽받침으로 나누어지는데, 운두는 주도 상단을 두 방향으로 직교하여 파낸 부분이고 굽은 밑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지는 부분, 굽받침은 굽을 받치는 접시 모양의 부분을 말한다.주두는 시대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주두는 대부분 굽이 안쪽으로 휘어진 곡선을 그리며 굽받침이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건축물은 봉정사 극락전을 제외하면 수덕사 대웅전과 같이 주두의 형태가 안쪽으로 곡선을 그리는 굽과 굽받침이 없어지며 또한 굽도 직선으로 경사지게 잘리지는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주심포(柱心包))계열 건축과 다포(多包))계열 건축의 구조적이고 의장적인 차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목조 건축에 있어서 처마는 벽체나 창호가 빗물이나 직사광선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것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처마를 얼마나 길게 내미는가 하는 것은 건물의 수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처마를 일정한 길이 이상 내밀게 되면 그 무게 중심이 서까래 끝부분에 집중되어 서까래가 처지거나 부러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회과 교생 ○○○입니다. 먼저 4주간의 기간 동안 교생들을 지도해주시고,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여러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불암산 자락 밑에 아담하게 자리한 전통 깊은 상계 제일 중학교, 이 곳에서 일생에 한번 뿐인 교육실습을 하게 되어 참 행복했고, 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작년 가을, 처음 교무실에 와서 조영혜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뵈고, 교육실습 승인서를 받았을 때는 ‘과연 2007년 4월이 오긴 오는 걸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 후,‘더 많이 준비하고 공부해서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교생선생님이 되어야지’ 각오를 다지며, 2학기를 보내고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드디어 꽃 피는 봄, 4월이 되어 첫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결코 편하지 않은 정장을 입고,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을 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결코 길지 않은 4주 동안 실습 기간이지만, 이 기간을 저의 인생에서 가장 알차고 가슴 벅차는 순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다지고, 긴장되고 설레는 맘으로 상계 제일 중학교 교문을 들어섰습니다.교육실습 첫째 주! 좋으신 선생님들을 뵈고,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학교의 행정이나, 지금의 현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좋으신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짬짬히 교과 선생님들의 허락을 얻어 수업 참관을 하게 되었습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보면, 어쩌면 저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활발한 아이들이 과연 수업 시간에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점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마냥 떠들 것만 같은 아이들도 수업 시작 종이 치고,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시면 신기하게 조용히 집중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본인이 흥미 있어 하는 이야기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하면 목청을 높이기도 하고, 수업 중간 중간에 딴 짓을 하기도 하고, 간혹 수다를 떠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부족한 내가 과연 수업 시간에 얼마나 집중을 유도하여 반 아이들의 공부 분위기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습니다.이 밖에도 첫째 주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1학년 8반 아이들과의 만남입니다.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때 신기했던 점은, 대단히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선생님께 이야기 하고, 때로는 고자질도 하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아이들의 모습 중, 한 단면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저는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 이러한 분위기가 바로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중학생의 모습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이해해주고, 하나 하나 일러주려면 교사 또한 순수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신선하고 기분 좋은 첫 인상과, 그들이 알려준 가르침을 마음 속에 새기면서, 나도 그들의 순수함에 동화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교육실습 첫 주에 제가 받은 가르침이며, 이는 4주 간을 버티게 해 준 힘이 된 것 같습니다.교육실습 둘째 주는 실제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기간이었습니다. 교율실습에 있어서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부를 수 있는 주였던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실습에 임하게 된 기간인데, 첫 주처럼 참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수업도 해보고 조회와 종례도 이끌어 보며 학급 운영에도 참여해 보았던 것이 아주 뜻 깊은 기간이었습니다.저는 1학년 사회의 ‘관동 지방’ 단원을 맡아 1학년 7반부터 10반까지의 수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특히 첫 수업은 1학년 7반 수업이었습니다. 수업 지도안을 짜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준비하여 파워포인트 내용을 구성하고, 아이들이 질문할 수 있는 것들을 대비해 목록을 작성해가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첫 수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면서 준비한 내용을 가르치고, 시간 체크를 분 단위로 하면서 어렵게 첫 수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았는데도, 잘 경청해주고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 아이들에게 고맙고, 첫 수업인데도 떨지 않고 잘 했다며 칭찬해주신 담임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첫 테이프를 이렇게 끊고, 3주 째까지 총 12번의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 시간마다 조금씩 변화하는 저의 모습과, 그런 제 모습에 적응하며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간혹 수업이 끝나면 조용히 제게로 와서, 이번 시간에 배운 내용이 정말 이해가 잘 됐고, 재미있었다며 얘기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 동안의 피로가 싹 가셨습니다.
Ⅰ. 머리말국제관계에서 세력관계의 변동이 일어나는 시기의 일국의 정치는 단순히 국내정치력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세계의 영향과 이에 대한 해당국의 대응능력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일종의 국가행정이 국제질서 상의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며, 그에 따른 대외정책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의 외교적 문제는 그 나라의 운명까지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이러한 외교능력이 가장 요구되었던 시기 중의 하나가 바로 고종(高宗) 시대일 것이다.19세기 후반 조선은 밖으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을 받고 있었고, 안으로는 봉건왕조에 반대하는 민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었다. 중국 역시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1860년 영불(英佛)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었고, 일본도 1854년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에 의해 서방국가들에게 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국제질서를 인식하는 데에는 새로운 시각과 대외관의 확립이 요구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린 나이로 혈통상 왕위승계의 명분이 약한 상태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강학(講學)을 통해 인격과 지식연마에 힘써 군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그는 학문을 닦는 데에 열의를 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기강확립, 관료들에 대한 지도력 및 국정수행을 위한 능력을 갖추는데 주력하였다. 고종 초기 10년, 즉 1864년부터 1873년까지의, 소위 대원군 집정기의 시기는 제국주의적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전근대자본주의국가에로 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그들은 무력까지 동원하여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조선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대외관계의 정책은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그 인식논리는 화이관에 입각한 척사론 중심이었다.한편, 조선사회는 위기의식이 점차 고조되어 가면서 각 계층은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개화론(開化論)으로 대응하는 등 서로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고종은 친정( 자리에서 국왕은 일반적으로 청의 정세, 서양의 동태 등 국외의 일에 대하여 묻고 사행단들은 이를 보고하는 것이 의무였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행단 중에서 서장관(書狀官)과 수역관(首譯官)은 ‘소견(召見)’을 전후로 하여 견청견문록(遣淸見聞錄)을 작성?보고하였다. 따라서 국왕의 대외상황에 대한 주 정보루트는 3)의 견청사절의 ‘소견’과 ‘문견별단(聞見別單)’이었으며, 국왕의 국외상황에 대한 인식수준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겠다.그런데 여기서 ‘소견’과 ‘별단’은 구분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별단’은 공식적으로 국왕에게 보고하는 보고서였는데, 이를 국왕이 항상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견별단을 검토하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인사일 뿐, 국왕이 이를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이 ‘소견’하는 태도에서 역력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소견’은 사신과 국왕이 직접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왕과 사신의 인식 수준을 동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즉, ‘소견’이 국왕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반면, ‘별단’은 당시 관리층 내지는 지배층의 대외인식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국왕의 인식을 검토하는 이 글에서는 우선 그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당시의 ‘소견’ 내용을 토대로 분석하기로 한다.(2) 견청사절의 인적구성과 역할강학기에 고종은 내적으로는 왕도사상(王道死傷)을 체득하면서 대외인식면에 있어서는 쇄국을 주장했던 대원군의 위정척사적 논리와 같은 맥락의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종이 독자적인 대외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종이 새로운 인식을 어떻게 하게 되었으며, 인식의 정도는 어느 수준이었을까?일반적으로 조선과 청 사이의 사행 종류와 명칭은 동지행(冬至行)?사은행(謝恩行)?주청행(奏請行)·진하행(進賀行)?진위행(陳慰行)?진향행(進香行)?고부행(告訃行)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체로 겸하여 수행되었다.) 이 들 사행단은 정사(正使)?부사(副使)?서관(書官)?상사이다.“북경의 사세와 적비(賊匪)와 농사형편이 어떠한가?”“중원은 별일 없는가?”“남비(南匪)는 이미 다 토평(討平)되었는가?”“농사 형편은 어떠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10년 내내 제기되는 관심사이다. 그러나 아직 중국의 내정이나 돌아가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검토?분석하는 계기가 되지는 못하고 상투적인 문제인식에 그치고 있다.3) 양이(洋夷)들의 근황에 대한 관심 표명양이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1860년 12월 9일 조선에서는 영(英)?불(佛) 연합군에 의해 북경함락 소식을 접한 후 정부 관리나 일반 백성들이 놀라서 낙향하거나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다.) 또 고종 즉위 초에 노서아인(露西亞人) 5명이 두만강 변에 와서 통상할 것을 청하는 등 양이의 출몰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었는데도 조대비와 고종은 연행사와의 ‘소견’에서 다음과 같이 극히 의례적이도 상투적인 질문으로 일관하였다.“양이가 또다니 근심을 끼치던가?”“양이는 근래에 어떠하던가?”)이와 같이 서구 세력에 대한 정보가 지극히 미숙하였고 대응방안 역시 소극적이었다. 이는 고종을 비롯한 관료 집단 대부분의 대외인식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으면 양이의 침략은 실패할 것이라는 안이한 사고의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때까지 유교를 바탕으로 한 통치 질서가 확립되기만 하면 부국강병이 안 되었어도 안보에 염려가 없다고 하는 위정척사적 사상이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4) 주변 번국들의 對 중국 하례(賀禮) 정도에 대한 관심 표명서역(西域)의 칙수(勅需) 정도나 유구국(琉球國) 사신들의 모양 등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중국을 여전치 천자국으로 인식하고 나머지 번국들의 대청예우(對淸禮遇)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2) 전통적 대외관계 고수 ② (1866년~1871년)한편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형식적이나마 친정(親政)을 하게 된 고종의 대외인식은 제 2기적 양상을 띤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청 황제에 대 강화시키게 함과 동시에, 일본과 함께 대응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청에 들어가 있던 일본인들의 복색?제도가 서양인을 닮아감에 따라 점차 진강하게 되었다. 사행부사였던 한경원은 일본이 양선(洋船)을 타고 있고, 서양의 성격을 따르고 있다면서 당시의 왜는 예전의 왜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에 독자적 대외인식의 폭을 넓히고 있던 고종은 부사의 말에 수긍하여 서서히 왜양일체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3) 청에 대한 인식 변화이상에서 살펴본 서양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일본과 청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제 1기의 황제 개인 신상 위주의 안부 및 보고와, 제 2기의 청의 정세와 농경 위주의 질문 및 보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즉, 청의 권력을 둘러싼 현 정세?군비실태?민란 안정 능력 등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청의 황제가 공친왕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친정하게 된 부분에 대한 관심은 특히 이 시기 고종이 관심을 기울이는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즉 고종 9년(1872) 4월 4일 ‘소견’에서 민치상으로부터 황제가 직접 친총만기(親總萬機)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이래, 고종은 이후 사신들을 소견할 때마다 이에 대한 관심 표명을 빠뜨린 적이 없으며, 사신들 또한 청 황제의 친정 체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곧이어 고종의 갑작스러운 실질적인 친정 체제로의 전환과 이에 따라 부득이하게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종이 청 황제의 친정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의 청 황제의 친정에 대한 관심은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숙부인 공친왕의 전횡과 그 영향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하면서 이 후의 ‘소견’에서 황제 주변의 친정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권력 관계 모색으로 질문을 발전시켰다.다음으로 10년 내내 관심을 표했던 청 내부의 소요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는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라 청 내부의 소요 집단이 어떤 집단최응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과의 국교회복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 우려하던 사건이 생겼는데, 운양호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2)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한 고종의 대외인식 전환일본은 운양호 피격을 구실로 1875년 12월 군사를 이끌고 조선과의 새로운 조약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진입하였다. 조정에서 신현을 접견대관으로 파견하긴 했지만, 일본이 수호를 구실로 군사를 동원한 것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고종도 역시 300년 동안 수호하던 일본이 서계의 일로 여러 날 동안 버티는 것은 불측한 일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당시 박규수도 일본이 수호한다고 말하나 병선(兵船)을 거느렸고, 수호를 위한 사자(使者)로 왔다 하였으니 먼저 공격할 수는 없지만 뜻밖의 일이 생기면 군사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비쳤다. 박규수는 일본이 수호의 가면 속에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당시 고종은 일본사신의 내조(來朝)가 서양과 연계된 것으로 보지 않고,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왜와 양을 분리해서 보았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가급적 교린의 외교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본과의 교섭에 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왜양분리적(倭洋分離的) 시각으로 일본을 보게 된 데에는 일본이 서구화된 것은 틀림없으나 평화적 교류차원에서 왜와 양을 다르게 규정짓자는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대부분의 위정척사론자들은 일본을 동양의 유교문화권 내에 포함시켰던 종래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같은 서양제국주의 침략자로 간주해 왜양일체적 시각으로 그들을 보았다. 반면 초기 개화사상가들은 왜양분리의 시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고종은 아직도 서양에 대해서 문을 굳게 닫고 이적시하였지만, 일본의 경우는 서양과 분리시켜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무력에 의해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인식상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왜양분리적 시각 속에서 서양을 이적되었다.
새로운 한 ? 일관계의 모색, 조선통신사Ⅰ. 머리말한국과 일본은 흔히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로 표현되는데, 이는 두 나라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뜻이다. 지리적으로 서로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양국 간의 긴밀한 교류가 있었음을 뜻한다. 사실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도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우 빈번한 교류를 가져왔다. 침략과 대립의 역사가 있기도 했으나, 양국의 교류는 서로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그러나 한?일 양국은 근대에 들어와서 불행한 역사를 체험했다.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해 국권을 상실했음은 분명 한국사에서 일대 비극적 사건이었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 양국은 이 비극적 체험과 불행을 극복해 나가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현재는 과거와 무관할 수 없다. 과거의 정리 없이 현재에 대한 이해나 바람직한 미래의 기대는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은 한?일 양국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또한 일본의 연구자 및 국민들과 정부 당국자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인식을 같이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역사의 진실 앞에 서서 지나간 과거를 되짚어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보고자 시도해야 한다.이러한 의미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경색되었던 일본과의 평등한 선린우호관계(善隣友好關係)를 극복하면서 양국의 공식적인 문화교류 창구로서의 역할을 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바람직한 한?일 관계의 모델로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우리나라에서 조선통신사에 관한 연구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80년대에 이르러 그 관심이 높아졌다. 김의환(金義桓)의 『조선통신사의 발자취』, 김용선(金龍善)이 번역한 『조선통신사』가 출간되어 통신사의 전체 모습이 조명되었다. 90년대에 이르러서는 통신사 자체의 연구보다는 통신사를 통한 문화교류나 상호인식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문화교류 분야에는 이원식(李元植), 하우봉(河宇鳳), 김태준가 있기 때문에 배에서 직접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모양은 1764년 통신사 입항을 그린 병풍 그림에서 상세히 볼 수 있다.3. 오사카에서 에도까지세토나이카이를 동진하여 조선통신사 선단은 긴 항해의 종착점인 오사카(大阪)에 도착하였다. 대형선인 조선의 배는 내륙하천을 항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일본배인 누선(樓船)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누선으로 바꿔 탄 사행은 요도가와(淀川)를 따라 올라가 객관이 있는 니시혼간지(西本願寺)로 들어갔다.요도가와로 가는 것도 하나의 대단한 행사였다. 선두에 대마번주가 탄 선단이 가고 다음에 국서를 실은 선단, 정사선, 부사선, 종사관선으로 이어지고, 그 뒤를 서일본 번주들이 준비한 배들이 따랐다. 가나자와 가네미츠(金澤兼光)의 『와칸센요수(和漢船用集)』에는 “모두 금은과 주옥을 여기저기 박고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 구조와 모양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라고 누선의 화려함을 적고 있다. 요도가와의 양쪽 언덕에는 구경하러 온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오사카의 객관에서 오랜 해상여행의 피로를 푼 일행은 다시 누선을 타고 요도가와를 거슬러 올라 비로소 육지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 근교 농촌과 대도시의 군중을 보고 사행원들은 그 발전상에 큰 놀라움을 표했다. 신유한은 『해유록』에 그 감회를 “동사(東寺)를 지나 층루(層樓)와 보각(寶閣)이 금은색으로 번쩍이는 것은 일일이 기록해도 끝이 없다. 정신이 피로하고 눈에 열이 나서 몇 개 마을을 통과했는지 모르겠다.”라고 적고 있다.교토(京都)에서는 겐나(元和) 때부터 쇼토쿠 때까지 7회중 1회를 제외하고는 호코지(方廣寺)의 다이부츠덴(大佛殿) 앞에서 귀로의 연회가 열리는 것이 관례였다. 교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본거지였던 곳으로, 다이부츠덴 앞에는 임진왜란 희생자의 코무덤이 있다. 1719년 통신사는 다이부츠덴 앞 연회를 통보받았을 때, “호코지의 다이부츠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발원으로 지어졌으며 히데요시는 백세(百世)의 원수로서 같은 하늘 아래 함께 포로를 송환하여 강화 교섭에 성의를 보였다. 조선은 대마도의 행동에 완강한 태도를 취했으나, 귀국한 포로로부터 일본의 국내 정세를 들을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태도는 점차 완화되었다. 또한 귀국한 포로로부터 일본의 재침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게 됨으로써 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서서히 완화되었다.조선은 1601년 7월부터 본격적인 대일정책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04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義僧兵)을 이끌고 활동한 걸승(傑僧)인 사명당을 대표로 하는 탐적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사명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견에서 일본 정권의 담당자가 조선과의 통교 재개를 바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이란 존재는 엄청난 적대감의 존재였기 때문에 강화를 위해서는 명분이 있어야만 했다. 조선은 이러한 명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임진왜란 중 왕릉을 도굴한 범인 압송이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식적인 전쟁에 대한 사죄와 왕릉도굴의 범인으로 하여금 나라를 분탕질한 책임을 묻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빠르게 충족시킨 일본에 대한 조선의 의심은 계속되었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정세상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았다.드디어 조선은 일본의 강화 요청에 1607년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당시의 사행의 이름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에 ‘회답(回答)’하고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민간인 포로의 ‘송환(送還)’이라는 사행파견의 목적을 잘 나타낸 이름이라 하겠다. 회답겸쇄환사는 1617년, 1624년에도 파견되어 총 3번 파견되었다.1607년 사행길을 떠난 회답겸쇄환사의 첫 번째 목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에 회답국서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로의 귀국을 실현함으로써 교린관계의 내실을 기하고, 나아가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는 일이었다.포로 송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 측의 전면적인 협조가 필면 중지와 예조참판과 로주간의 서계, 예?패물의 교환 중지, 범휘(犯諱))문자의 삭제 등이었다. 또한 ‘다이쿤’ 호칭을 ‘일본 국왕’ 호칭으로 고쳤다. 에도 입경 시의 연회는 아카마가세키?오사카?교토?나고야?슨푸에서, 귀환 시에는 아카마가세키 대신 우시마도에서 연회를 여는 소위 5소노연(所路宴)이 행해졌다.객관에서 상사가 사절을 위문할 때에는 세 사신이 계단 밑으로 내려가 맞이하고 앉는 자리를 바꾸었다. 그리고 에도조의 빙례에서 국왕의 국서는 장군이 직접 받아 하야시 다이가쿠노카미(林大學頭)가 소리 내어 읽고, 장군은 조선 국왕의 안부를 로주를 통해 묻는 것이 새로운 의례로 집행되었다. 도중에서 접대하는 다이묘로 하여금 의관을 착용하게 하는 한편 입공(入貢)을 의미하는 ‘내조(來朝)’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내빙(來聘)’이라는 용어로 고쳐 사절의 접대를 더 정중하게 표현하였다.국서 전달 이후의 연회는 날짜가 바뀌었으며, 종래에 연주했던 노가쿠(能樂)와 교겐(狂言)이 폐지되고, 교토로부터 연주자를 불러와 12종의 엔가쿠(燕樂)가 공연되었다. 이 중 5종은 고대 조선의 고무악(古舞樂)로 본국에서 이미 사라진 국악을 타국에서 듣는 통신사 일행은 크게 감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통신사들에게 알리려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치밀한 의도였다.이렇게 변화된 빙례는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통신사 영접의 비용을 절약하고 간소화 시키려 했다는 점에서는 실효성이 높았다. 그러나 국가 간의 교류에서 사전 절충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은 서로 간의 신뢰를 손상시켰으며, 이것은 각 빙례 절차마다 발생했던 사소한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빙례 변경은 일본 내 비판의 여론이 높아져 그 실효성을 잃어감에 따라 종래의 빙례로 되돌아가게 되었다.1719년의 통신사행은 막부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관백세습축하’의 명목으로 파견하였다. 이 시기에는 1711년 빙례 변경으로 인한 외교적 문제가 해결되어 비교적 안정된 형태의 교류가 진행하였다.174문사에 의해 주자학이 도입된 에도시대부터 유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조선과의 교류, 즉 통신사를 통해 학술문화와 사상의 발전을 도모한 에도시대는 일본 한문학의 전성기로서 문사가 유학자인 시대였다. 각 번과 막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은 유교를 중시하는 통신사 사행원과의 필담을 통해 학술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하야시 라잔, 아라이 하쿠세키 등이 있다.)에도시대 처음으로 일본 주자학을 창시한 사람은 후지와라 세이카이다. 그는 교토 5산 제일의 선승임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1590년, 30살이었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대덕사에서 통신사 김성일(金誠一)과 허성(許筬)을 만나 유학에 대한 감화를 얻었으며, 그 감화는『정관정요(貞觀政要)』?『대학(大學)』?『사서집주(四書集註)』등의 강의로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끌려온 강항(姜沆)을 만나 과거 시험?공자 제사?국왕에 대한 유교 강의 등을 듣고 유교의 정치적 역할과 주자학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나아가 강항을 통해 전해진 조선 성리학은 후지와라 세이카에 의해 개화되면서 새롭게 시작되는 근세 일본을 주도하는 사상 체계로 자리 잡았다.)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였던 하야시 라잔도 본래는 선승이었지만 유학에 관심을 보인 주자학자이다. 자신의 집에 공자 사당을 짓고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교육 시킬 정도로 유학에 높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23세(1605)에 처음으로 조선 사절이었던 사명당을 만났고, 그 후 5차례의 걸쳐 사신들과 필담창화를 나누었다. 그 중 1636년 사행에서는 김세렴과의 필담창화를 통해 유학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이를 통해 양국의 유학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세렴은 일본의 유학 수준을 조선보다 낮다고 평가했지만 하야시 라잔은 유학자로서의 면모와 역량을 갖춘 인물로 보았다.일본의 유학 수준을 바라보는 태도는 비단 김세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조선통신사행원에게도 공통적으로 해.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색, 조선통신사一. 머리말조선통신사 연구 의의 임진왜란 이후 경색된 한일관계 극복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모델로서 재조명 될 필요성 (선린우호관계, 문화교류 창구로서의 역할) 조선통신사 연구 한 국 - 1970년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 - 1980년대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함 - 1990년대 문화교류, 상호인식 등에 관한 연구 일 본 - 한국보다 보다 많은 연구 진척. - 1970년대 이후 선린우호의 상징으로 재평가一. 머리말전개방향 한양에서 에도까지의 여정 양국간의 정치적 상황 통신사 왕래의 양상 문화교류의 형성 및 특징 문학·학술·예능·생활문화·기술분야.통신사의 파견과정 통신사일행의 구성 대략 500~600명 정사(正使)-정3품 당상관(堂上官) 부사(副使)-당하관(堂下官) 종사관(從事官)-5,6품 왜학관(倭學官) 제술관(製述官) 사자관(寫字官), 의원, 서기, 화원 자제군관(子弟軍官), 마상재(馬上才), 전악(典樂), 뱃사공, 포수, 소동(小童) 등二. 통신사의 여정二. 통신사의 여정1. 한성에서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까지부산(釜山)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지냄 순풍을 기다려 대마도로 향함 통신사선(정사선, 부사선, 종사관선) 화물선二. 통신사의 여정1. 한성에서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까지二. 통신사의 여정1. 한성에서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까지대마도(對馬島)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鰐浦)에 입항 짧게는 열흘에서 3주 동안 머무르며 배를 보수하거나 식량을 조달 대마번주의 초청연회, 일본학자들과의 필담 숙사는 류호인(流芳院), 고쿠분지(國分寺) 등 1811년 마지막 사행시 대마도에서 국서를 전달하는 '역지빙례(易地聘禮)'가 행해짐아이노시마(藍島) 둘레가 6km인 작은 섬 여러 다이묘(大名) 가운데 첫 번째 접대를 받던 곳 신유한(申維翰)『해유록(海遊錄)』“내가 항해한 이래 처음 보는 신선경이다.”二. 통신사의 여정1. 한성에서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까지二. 통신사의 여정2. 아카마가세키에서 오사카까지아카마가세키(赤間島) 혼슈(本州뉴(馬入) 등의 강에는 특별주교설치 나고야를 지나 오카자키(岡崎)에 이르면 장군 측근의 무사가 통신사 일행을 위문하기 위해 출영 하마나코(濱名湖)의 이마가레(今切河) : 통신사 일행은 '금절하(金絶河)'라 부름 도카이도를 따라 슨푸(駿府), 하코네에 이르면 일대 구경거리인 후지산의 경관을 보게 됨 하코네 고개를 내려와 오다와라(小田原)를 거쳐 통신사는 시나가와(品川)의 도카이지(東海寺)에서 마지막 숙박을 하고 에도로 향함二. 통신사의 여정3. 오사카에서 에도까지빙례의식 조·일 외교관계의 중요한 역할 국서전달 의식과 여러 차례의 연희 정해진 연회 절차는 없었지만 점차 정례화 대마도에서의 빙례의식 하선향 : 대마도에 도착했을 시 행해지는 연회 상선향 : 에도에서 대마도로 돌아왔을 시 행해지는 연회 빙례 장소 : 대마도주의 집 대마도에서의 연회 절차 ① 사신 이하 사람들은 공복으로 갈아입음 ② 사신은 동쪽에, 주인은 서쪽에 서서 연회 시작 ③ 연회상 위로 술을 9작 돌리고, 밥을 받침 ④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음식을 먹고, 음악을 감상二. 통신사의 여정4. 빙 례 의 식에도조에서의 빙례의식 통신사행원들이 에도에 머무는 기간은 한 달 빙례 순서는 정례화 되어 있지 않았음 에도에서의 환영연 셋다이부교(관반)의 주체로 개최 객관인 히가시 혼가지에서 열림二. 통신사의 여정4. 빙 례 의 식국서전달의식 순서 * 국서: 나라의 대표가 보내는 문서, 조·일 교류의 완성 1. 국서전달의식 전 날 : 의주의 전달 (의주: 빙례 절차) 2. 국서전달 당일 날 : 세 사신, 수행원 등 관복 착용, 에도조로 향함 3. 히가시혼가지→센소지 니텐몬(二天門)→아사쿠사바시고몬(淺草橋御門)→요코야 마초(橫山町)→조반하시(常盤橋) 성문 오테몬(大手門)→나카고몬(中御門) 4. 나카고몬에서 셋다이부교들의 마중을 하고, 국서는 당상역관이 받들고 들어감 5. 현관에서 로주. 막부의 주요인사들이 사신을 맞이함 6. 대마도주의 안내로 마츠노마(松の間)에서 야나기노마(柳の間)로 들어감二. 통신사의 여정4. 의심케 함 국서개작사건의 전말 국서개작사건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1633년 대마도주 소씨 가(家)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가 막부에게 대마도의 국서개작과 갖가지 비행을 폭로한데서 비롯 ⇒ 이 사건에 대해 막부는 예상을 뒤엎고, 대마도주 소씨에게는 관대한 형벌을 내렸으며, 막부에 폭로한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는 주종관계의 질서문란을 이유로 문책하게 하였음三. 통신사행의 추이2. 국서개작사건과 통신사의 파견국서개작사건의 전말 (계속) 국서에 쓰일 호칭의 문제 -『주역(周易)』의 다이쿤(大君)을 일본 왕권을 대표하는 것으로 하여 조선 국왕이 부르게 함 - 조선 예조참의의 존칭을 재상(宰相)으로 하지 않고 공(公)으로 하여, 대마번주의 공(公)과 대등한 것으로 함 - 연호(年號)는 당해 연호를 의미하는 용집(龍集) 밑에 간지(干支)를 쓰는 것으로 하여 일본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함 ⇒ 조선은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일본의 간곡한 요청을 수용하였음 당시 동아시아 정세 -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 재편 (명↓, 청↑) - 더 이상 전후 처리를 위한 사신파견이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조선은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음三. 통신사행의 추이2. 국서개작사건과 통신사의 파견④ 1636년 통신사행 이 사행부터 문장을 담당하는 이문학관(吏文學官)을 동행 :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널리 알림으로써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함 국서개작사건 이외에 양국 간에는 비교적 심각한 문제가 없었기에 사행원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사행 길에 오를 수 있었음 이후 통신사의 파견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음 ⑤ 1643년 통신사행 일본장군의 후사 탄생 축하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 - 조선 :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항복한 후 일본과의 새로운 관계 개선이 필요하였음 - 일본 : 불안한 막부와 장군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음三. 통신사행의 추이2. 국서개작사건과 통신사의 파견⑥ 1655년의 통신사행 조선은 막부 4대 장군의 세습 축하사절 요청13일 치큐젠슈의 서승 가이바라 에키겐은 학자이다. 그는 시를 지어 세 사신에게 바쳤다. 우리 일행 문인들이 칭찬하여 마지않았다.”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2. 학술문화와 유학조선 : 성리학을 중심으로 유교 문화 전래 일본 조선의 유학사상의 영향 에도 시대부터 주자학 도입 에도 시대 : 일본 한문학의 전성기, 문사가 유학자인 시대 대표 유학자 : 후지와라 세이카, 하야시 라잔, 아라이 하쿠세키 등 학술문화와 유교사상 조 · 일 양국의 이해관계를 지양 상호우호적인 교류 형성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2. 학술문화와 유학후지와라 세이카 에도 시대 처음으로 일본 주자학 창시 김성일, 허성과의 만남 → 유학에 대한 감화 얻음 정관정요, 대학, 사서집주 등 강의 강항과의 만남 → 과거시험, 공자제사, 국왕에 대한 강의 들음 강항을 통해 전해진 성리학은 후이와라 세이카에 의해 개화되었음 하야시 라잔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 23세 때, 조선사절 사명당을 만남. 1636년 사행 때, 김세렴과의 필담창화를 통해 유학에 대해 논의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2. 학술문화와 유학일본 유학에 대한 조선의 태도 부정적 인식 - 일본 유학과 문장력 수준이 낮다고 평가 - 조선의 학술문화와 유학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파악 긍정적 인식 - 학술문화와 유교의 발전 가능성 - 1636년 김세렴 : 하야시 라잔의 문장력 칭찬 - 1719년 신유한 : 독서량 많고, 행동거지 바른 아이들을 보고 미래 전망 - 출판문화의 발달로 인한 지식의 보급 촉진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3. 예 능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 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 ·별파진(別破陣) ·마상재(馬上才) ·전악(典樂) ·이마(理馬)의 통신사 사행참여 이유 : “기예(技藝)가 이웃나라에 지지 않으려는 뜻에서”라고 밝힘 사행에서는 시문창화와 필담 외에 서화(書畵)․음악(音樂)․연희(演戱)․마상재(馬上才) 등 예능을 통한 문화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 칸의 땅에 활터와 마장(馬場)을 마련, 1711년 사행에서 마상재 공연을 위해 관아에 설치한 신마장이 이후 '조선마장'으로 불렸음 오규 소라이(荻生徂來)의 여노지희마의가(麗奴之戱馬歌) 의 한시,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淸信)의 마상재도(馬上才圖) , 한인희마도(韓人戱馬圖) 등의 그림 소재가 됨 1811년 역지빙례를 계기로 사행 절차에서 빠지게 되었음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3. 예 능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3. 예 능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4. 생 활 문 화1) 의복·음식 의복 일본의 의복제도 : 남녀의 구별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통신사로부터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음 통신사의 의복제도 : 일본의 접대관이나 문사들에게 남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킴 (예) - 1711년 사행에서 일본 문사는 통신사행원의 갓 앞뒤에 각각 '정의관(正衣冠)'·'존첨시(尊瞻視)'라 쓴 것을 두고 “과연 유복(儒服)답다.”라고 감탄 - 관백은 화사(畵師)를 보내어 조복(朝服)과 양관(梁冠)을 그려가기도 했음 - 아라이 하쿠세키는 사행원에게 조선과 청나라의 갓의 제도를 비교하면서 조선의 관복제도가 훌륭하다는 관백의 평가를 전해주었음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4. 생 활 문 화1) 의복·음식 (계속) 음식 음식을 통한 교류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 - 숙공(熟供) : 객관에서 조리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 일본 요리사들이 담당 - 하정(下程) : 통신사가 직접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도록 식품재료를 공급하는것, 조선 요리사들이 담당. ⇒ 숙공과 하정을 통해 양국 요리사들의 교류가 이루어짐 통신사가 통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각 숙박지에서는 연회가 개최되어 화려한 연회상이 펼쳐짐 통신사에게 제공되는 일상음식 - 조석반(朝夕飯) 7.5.3선(膳) - 주반(晝飯) 5.5.3선 - 3즙(汁) 17채(寀) ⇒ 황제의 사신을 접대하듯 대우하였음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4. 생 활 문 화四. 통신사를 통한 학술 · 문화 교류4. 생 활 문 화四. 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