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 학교에서의 체벌-서론-골 때리는 교육부, 웃기고 자빠진 학교, 몰상식한 선생, 구역질 나는 학부모, 그리고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학교를 둘러싼 부정부패 / 비리, 체벌, 촌지, 19세기에나 어울릴 제도나 규칙 등 모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민주적인 권위를 폭로하는 곳입니다. 이 글은 학교는 죽었다 { http://myhome.hanafos.com/~phoenix77라는 사이트의 대문에 첫머리 글귀다. 어느새 저러한 형용사로 우리의 교육 현실이 참담하게 대변되고 있는 것이다.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만 2년이 갓 넘었으니, 청소년 시기인 중,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체벌과 관련된 일을 많이 겪었다. 체벌하는 도구는 대표적으로 출석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마포걸레, 실내화, 칠판지우개, 심지어는 각목 까지 동원됐었다. 과거 내가 보낸 청소년기의 체벌에도 나나 주변 학생들의 불만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학교는 질서와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체벌이 행해져온 것이 관행이었다. 부득이하게 전체적으로 연가책임을 지게 되어 맞는다던가 해당 선생님의 과목의 시험이 형편없이 성적으로 인해 체벌을 당했으며 친구와의 싸움, 기물파손, 결석, 지각, 혹은 사소한 일들까지도 체벌의 대상이 되어 당해왔었다.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숙제를 안해가면 벌로 건강에 좋다고 청소용 빗자루로 발바닥을 맞던 일도 있었고, 귀밑 3cm에서 겨우 10cm로 규정이 완화되어 반드시 묶어야 했던 머리를 풀고 다닌다고 출석부로 머리를 맞고 학생부로 끌려 다니기도 하고, 반분위기가 나쁘다고 반 학생 전체가 의자를 2시간 이상씩 들고있고, 엉덩이가 불나도록 맞았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한 말썽꾸러기였을 것 같지만, 나는 고등학교때 까지 학급임원도 맡고, 상위권의 성실하기도 한 학생이었다. 아마 학생시절을 지나온 사람치고는 단체기합을 포함하여 체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주 아주 드물 것이다. 그 당시에도 체벌을 당하면서 정말 억울하거나 이런 작은 일로도 맞아야 하는가에 대는 듯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체벌장면이 최신 휴대폰의 카메라 동영상 기능으로 찍혀서 뉴스에 보도되는가 하면, 거기다 며칠 전에는 체벌로 조사를 받던 여교사가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이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당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얼마나 놀라운가. 이 말을 요즘 시대 우리들의 모습에 비춰본다면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물론 시대가 그만큼 변했다고 하지만 변해야할 정신이 있고 없어져서는 안될 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변해도 너무 변한 것 같다. 지금 청소년들에게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마라'라고 했다가는 대번에 무시당할 게 뻔하다. 그만큼 교사들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아이들은 교사를 그저 '직업적으로 안전하고 해고당할 염려 없고 지식을 전달하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러지않고서야 체벌한다고 경찰에 신고하는 그런 현상이 생길 수가 없다.지금과 과거의 이런 차이는 아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선생님과 학생간의 의식차이이며 깊게 본다면 사회상의 변화, 그리고 가정교육의 변화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의 체벌과 관련된 문제는 학생과 선생님간의 이해관계에 약간의 상반된 의견을 계속해서 보이고 있는데 그것을 고려하여 체벌찬성론 과 체벌반대론 의 입장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정리해보고, 올바른 대안을 생각해보는 동안 나의 입장을 정리해보자.-본론-체벌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벌의 목적으로 몽둥이 회초리 자 등의 물리적 도구나, 신체 일부분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신체에 고통을 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교사가 직접적으로 한 학생의 신체를 접촉하여 고통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학생의 무릎을 꿇린다거나 오래 서있게 하는 등 신체에 간접적 고통을 주는 것도 벌의 목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것인 이상, 개념적으로 체벌 이라고 할 수 있다.체벌에 대한 관점은 변해왔다. 근대 이전에는 체벌의 당위성이 인정되고 긍정적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아직 미완의 인격을 가진 학생들을 다듬고 쓰다듬어서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것이 교육을 하여야 하는 이유로, 미완의 인격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욕을 먹더라도 바른 길로 이끄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가 귀하고, 귀엽다고 선생님들의 지도를 위한 체벌과 꾸지람까지 문제 삼아서 청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학생들이 체벌을 받고서는 이런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우선 자기에게 벌을 주고 체벌을 한 것만 못마땅하게 여겨서 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정신 나간 학생이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잠시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폭력성 체벌을 하였다면 선생님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항을 하거나 심지어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가르침(지시)를 거부하고 비난까지 하고 덤빈다면, 이에 대한 합당한 어떤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이를 위해 체벌조항을 만들어서 체벌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은 바로 아직 미완의 인격체인 학생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바르게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지, 결코 폭력을 합법화하자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어느 선생님도 폭력을 휘둘러서 폭력적인 방법으로만 학생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무조건 체벌만 금지하라는 국가 시책은 어쩜 분명히 갈 수밖에 없는 길을 만들어 놓고, 그 길을 가면 범죄자라고 체포하는 함정과 같을 것이다.둘째, 현행 교육여건 하에서 체벌은 불가피하다. 교사당 학생수, 학급당 학생수가 아직도 너무 많기 때문에 강력한 방법인 체벌로 통제하지 않으면, 열심히 듣는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는 것이다. 떠들거나 조는 등의 잘못을 지적했더니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학생, 뒤에 나가 있으라 했더니 나가면서 욕을 하는 학생,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갖고 놀길래 가지고 나오랬더니 인상만 쓰고 앉아 있는 학생,이상의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각 가정의 주인공이자 귀여운 아이들을 한데 모아 가르쳐야 하고, 이 아이들에게 모두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 안에서 공부하게 해주어야할 입장이라는 것을 한 번쯤 생각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체벌반대론 적 입장첫째, 체벌 과정상 감정 개입의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객관성, 공정성 및 교육적 효과가 떨어진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본 체벌은 최근 체벌의 강도의 강해짐과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받는 심리적, 육체적 충격의 심각성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는데, 분명 학생의 잘못에 의한 체벌에도 강약의 조절이 선생님들의 그날 기분이나 약간의 개인감정, 성격에 따른 차이가 나타나는 것에 학생들은 민감해 하며, 잘못한 경우로 인한 체벌이 아닐 경우에는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여기서 선생님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매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하지만 이런 체벌은 학생들에게 근본적 영향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외형적 모습으로 나타날 뿐으로 오히려 반감을 갖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체벌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체벌 자체가 학생들에게 사랑과 애정을 주기 위한 사랑의 매가 아니라 체벌의 목적을 상실해 폭력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고 현재의 대다수 학생들이 이야기한다.둘째, 체벌 자체에 내재된 폭력성 때문에 교육적 의미가 떨어진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현재의 체벌은 효과가 없고 오히려 부정적인 역효과만을 나타나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체벌보다는 반감을 사지 않고 효과적인 지도 방법을 선생님들이 채택하여야 한다고 대다수 생각을 하고 있으며 체벌과 관련된 법조항의 시설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는 듯 하다.셋째, 체벌은 학생에게 정신적 고통과 상처를 주고, 오히려 반항의식이나 수치심을 조장할 수 있다.넷째, 체벌은 학생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다.다섯째, 체벌은 시대에 역행하는 행위로서 학생의 자율과 창의성 발휘를 억제한다.여섯째, 학교체벌은 단점으로 다음과 같이 회피행동을 유발하고 은폐의 무분별한 폭력성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요즘 교실폭력 사례들을 보자면 합당한 체벌이 아닌 교사의 감정적인 체벌이 주를 이룬다. 화난다고 학생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그 학생의 약점을 이야기하며 인격적 모독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대들기라도 하면 교권의 붕괴라 하며 체벌의 정당성을 요구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랑의 매이고, 어디까지가 폭력인가? 아무리 가벼운 체벌이라도 교사의 인격적 가르침이 결여된 채 행해진다면 그것은 심각한 인격모독이고 무거운 체벌이라도 그 학생의 잘못된 점을 정확히 지적해주고 인격적인 모독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폭력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매, 사랑의 체벌이 될 수 있을것이다.교사는 학생의 잘못된 점을 보고 즉시 반응하지 말고 최대한의 생각과, 잘못된 학생의 행동에대한 원인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만약, 한 학생이 준비물을 안가지고 왔다. 거의 모든 교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준비물 안가져온 사람 나와, 손대!" 라고..그렇지만 그 학생이 왜 준비물을 못 가져왔을까에 대한 것은 궁금해 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나 역시 고등학교 졸업까지 하면서 그런거 물어보는 교사들은 한번도 못봤다. 못가져갔으면 무조건 맞아야 했다. 그런 경우, 집안이 어려워 정말 준비물을 못 사간 학생들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게 되면, 그 학생은 그런 자신의 환경을 비관하게 될 것이고, 학교에 가기 싫어질 만큼 고민에 빠질 수 있다. 교사들이 제발 학생의 입장에 한번이라도 서서 권위적인 통제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할 수 있다면, 아직 우리의 교단에는 교사들이 설자리가 많다고 본다.벌의 방법의 개선의 측면으로 다가가보자.잘못한 학생에게 고통을 주어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희망이 없는 관점이기에, 교육적이지 않다. 진정한 꾸중 이란 학생이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고, 그래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벌 을 말한다. 벌을 안 주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는 있다.
산도, 이 산도 잠시 쉬어나 가고(영주 浮石寺 를 다녀와서)♣ 목 차 ♣1. 문화유산답사지로 부석사 를 정한 이유2. 부석사 에 대한 사전 조사3. 답사기행 및 느낌4. 참고문헌1. 문화유산답사지로 부석사 를 정한 이유라는 첫 수업을 들으면서 중, 고등학교 수업시간 때 배운 삼국유사 책을 꼭 한번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삼국유사(청목출판사) 책을 샀다. 원래 국사과목을 좋아하던 터라 지루하지 않았다. 답사기행문을 써야한다는 과제를 받았을 때 어느 곳을 가야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 친가가 경주여서 경주는 이곳, 저곳 많이 다녀봤기 때문에 새로운 곳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전에 읽었던 유홍준 저 책도 뒤적여 보고 인터넷으로도 찾아보았다. 유홍준님께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집이라고 말한 부석사"가 내 눈에 띄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이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4권 의해(義解) 편 중 화엄종을 전래한 의상 목록에서 보면의봉 원년에 의상은 태백산으로 돌아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교를 폈더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라고 쓰여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된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의 선묘설화 등 여러 설화도 얽혀있다고 했다. 1300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부석사, 과연 어떤 곳일까?2. 부석사 에 대한 사전 조사1) 위치 : 경북 영주시 부석면2) 관리 : -부석사 :054)633-3464-사찰 :054)633-3258-주차 :054)631-47623) 교통편 : -기차편: 청량리에서 안동선을 타고 풍기역에서 하차한 후 부석사행 시내버 스를 탄다.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 등 모든 열차 편이 있음.-자동차편: 중앙고속도로 서제천IC 풍기IC-버스편: 서울 원주 제천 단양 풍기 영주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놓은 격이 되는 것이다.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 왕 7년(1358년)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2년(1377) 조사당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다.. 무량수전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 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번째로 오래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最古)의 유구이지만 건물 규모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 라는 측면에서는 이 집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 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 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墨書)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1376)에 원응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갈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외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와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內陣) 사방에 한 칸의 외진(外陣)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담녀에 위치한 도당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선묘각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 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연정이 걸려 있다.3. 답사기행 및 느낌2003년 5월 2일.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 유진이와 오전 9시발 풍기행 새마을호 열차를 타기로 했다. 들뜬 기분으로 새벽까지 인터넷으로 부석사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다 늦잠을 자고 말았다. 늦었지만 역사 앞 패스트푸드점에 들려서 햄버거를 사들고 뛰기 시작했다. 개표승무원이 천천히가세요. 라는 한마디가 참 정겨웠다. 평소에 잘 타지않던 새마을호는 참 편안하고 깨끗했다. 며칠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오월 햇살이 화창했다. 아무리 휴일이 있어도 친구들과 영화를 보거나 식사를 하거나 그랬었는데 오랜만에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한쪽 팔을 창틀에 대고 창밖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양평을 지나가는데 호반주위에 안개가 쭉 낀 모습을 보니 류시화의 물안개 시가 생각났다.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물안개처럼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아주 쉽게 부서지더라.고3때 문학 선생님께서 짧고 좋은 시 한편 외워두라고 하셨는데 때마침 이 시가 생각나서 뿌 버스요금을 내고 부 석사행 버스에 올랐다. 곧 부석사까지 18.5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인삼밭과 사과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많았다. 소백산 국립 공원으로 갈라지는 길을 지나자 울창한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소 수서원 이란 곳이 보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이라고 하던데 둘러보지 못하고 온 것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몇 번이나 하천들이 나왔는데 정말로 깨끗했다.한 30여분이 지나자 드디어 부석사에 도착했다. 여러 가지 특산 품을 팔는 좌판과 분수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부석사 매표소를 찾아 길을 따라 가는데 수학여행을 왔는지 초,중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무리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역시 경상도 지방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의 말소리 중에 사투리가 구수하게 섞여 들리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친구와 나는 따라하며 내내 웃었다.유명한 사찰이라고 들었는데 매표소는 생각보다 엄청 작고 직원도 할아버지 한분 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부석사의 위치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 중턱이므로 주소는 경북 영주시 소재지만 태백산 줄기라고 설명해주는 표시판이 있었다. 왠지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오지에 위치해 있을 것 같아 등산 할 일이 두렵게 느껴졌다.그런데 표를 끊고 절을 향하는 길은 그리 길지도 않았고 급한 경사가 아니어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길 옆엔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으며, 저 멀리 새하얀 사과 꽃들이 너무도 아름답게 빽빽이 펼쳐져있었다. 사과 꽃을 이렇게 가까이 본적도 처음이었으며, 이렇게 새하얗고 예쁜지 몰랐다. 그리고 큰 나무에 사과가 매달릴 줄 알았는데 꽤 줄기도 짧고 자그마한 나무였다. 예쁜 꽃과 짧은 줄기에 비해 가지는 두 팔 벌려 하늘을 향해 울퉁불퉁 솟아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남는다. 부석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 계절마다 찾아오고 싶다고 하였는데 5월이 이리 아름다우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 일주문과 당간지주저 멀리 일주문이 보였다. 잠시 서서 한숨을 돌렸다. 고 단단한 멋이 보였다. 보물 제255호인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정말 그 자리에 이렇게 긴장한 모습으로 남아주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곳에서 멀리 몇 개단 위에 천왕문이 보였다.2)천왕문과 그 주변천왕문 안에 양쪽으로는 사천왕이 버티고 있었는데, 뽀얀 먼지들이 그 무서운 표정의 위엄이 약간은 코믹하게도 느껴졌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쌍둥이 삼층석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석가탑을 본받았지만 쌍탑을 이루고 있는 점이나 아담한 크기에 지붕들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진 점이 조금은 다른 것 같았다. 탑 옆에 약수물을 먹다가 탑 뒤로 요사( 舍)와 종각(鐘閣)의 녹음과 어우러져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카메라로 한번 찰칵!!그리고 동쪽 편으로 보호각에는 원래 조사당 벽화 원본이 있다는데 안타깝게도 요즘은 보호 차원에서 잠시 문을 닫아서 볼 수가 없었다. 그 앞에 너저분하게 기왓장들이 쌓여있는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3)범종각과 그 주변천왕문에서 세 계단을 오른 넓은 마당을 지나면 범종각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이런 누각 아래로 길이 이어지는 곳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누각 밑으로 빠져나와 범종각을 보면 법고와 목어, 운판이 있다. 실제 범종은 아까 멀리서 본 종각에 있다고 했다. 법고와 목어의 색채는 참으로 화려했다. 부석사의 표 그림에 담길만한 매력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왼쪽으로 조사당 옆에서 옮겨온 취현암 이라고 하는 집이 보였다. 그런데 무슨 공사를 하는지 취현암을 다 둘러싸고 공사가 한창 중이였다. 본래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라서 그런지 보수공사를 하나보다.4)안양루정면을 바라보면 또 가파른 大돌계단이 눈앞을 막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길이 계속 쭉 일직선이 아니라 살짝 서쪽을 틀어져있었다. 알고보니 모든 축이 남서향이었는데 그 계단의 끝에 있는 안양루는 정남쪽을 향해 축이 세워졌다는 것이였다. 안양루와 범종각은 모두 2층 누각으로, 경사가 급한 자리에 누각과 문의 기능을 겸하여 지은 절묘한 건축물인걸 알 수 있다.했다.
정치개혁이야말로 21세기 우리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이다. 정치권은 국회정치개혁특위 등을 통해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는 수백, 수천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인의 충원관문인 당 공천제도가 그 제일 원인이라는 데는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1. 공천이란?: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일을 말한다.대의정치(代議政治)가 정당정치(정당정치는 의회정치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정치형태로, 정당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는 정치이다. 그것은 복수정당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 보통이며, 일당독재의 정치형태도 형식적으로는 정당정치임에는 틀림없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러한 경우를 정당정치라고는 하지 않는다.)로 전개되는 오늘날의 정치상황에서 정당의 뒷받침 없는 정치활동이란 사실상 무의미하며, 정당의 공천없이 의회에 진출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정당의 공천을 입후보의 법적 요건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제3공화국 헌법하에서 정당정치의 육성, 특히 양당제의 확립을 위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원 입후보의 요건으로 정당의 공천을 규정하였다.현행 에 의하면 지역구 후보등록을 하고자 하는 자가 정당의 공천을 받은 지역구 후보자인 때는 그 소속정당의 대표자가 서명, 날인한 추천서와 본인승락서를, 무소속후보자인 때는 그 관할지역구 선과관리위원회가 검인하여 교부한 추천장을 사용하여 선거권자 300인 이상 500인 이하가 기명, 날인한 추천장을 등록신청서에 첨부하여야 한다.2. 기존 공천의 문제점#1. 특별당비 명목 현금요구 관행화: 총선 때만 되면 정당 주변엔 으레 공천과 관련한 돈 문제로 시끄럽다.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는 물론이고 지역구 의원에 이르기까지 공천과정에서 돈이 오갔다는 의혹이 무성하게 제기된다.공천 헌금 의혹은 여당보다 야당 주변에서 주로 나돈다. 만성적 돈 가뭄에 시달리는 야당으로서는 전국구 공천 헌금이야말로 합법적(?)이고 안정적-보편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천 헌금은 특별당비 명목으로 당에 입금되거나 보스의 손에 들어간다. 헌금액은 전국구 순위 배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구(全國區)는 전국구(錢國區)'라는 말이 나도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야당 전국구 의원 모두가 공천헌금을 내고 금배지를 달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실정상 상당수가 공천헌금과 연관돼 있음을 부인하기 힘든 것도 현실이다.#2. 후보추천절차의 불투명성, 무원칙성, 불공정성.: 16대 총선 공천경쟁에서 탈락한 뒤 무소속 출마를 결행,가까스로 의원배지를 달게 된 A당선자는 "공천 심사 초기 민주당은 당선가능성과 의정활동 개혁성 전문성을 기준으로 내세우더니 뒤늦게 당 기여도를 추가해 시민단체 낙천대상에 포함된 인사를 공천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헌법은 정당의 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정당법은 이같은 헌법 규정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정당의 공직선거후보자의 추천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야의 16대 총선 공천과정에서 이같은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비난의 과녁에 집중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은 불공정성이다. 여야 모두 공천심사위를 가동하며 절차적 공정성을 누누이 강조했으나 당 실세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민주당은 당무위 공천권을 관행상 공천심사특위에 위임하고 있으나 심사위원을 총재가 임명하고 심사위 결정 역시 총재가 결재, 심사위의 객관성과 자율성을 떨어뜨렸다. 한나라당과 자민련 역시 총재가 전권을 행사했다. 한나라당 부산 서구 공천자가 총재의 말 한마디로 뒤집어진 것이나 민주당 호남 지역의 B전의원이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하고도 당 실세의 눈 밖에 나 낙천된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풍토 탓에 공천 희망자의 '공천 실세' 줄대기가 선거철마다 되풀이되고 있다.여야는 지난해 말부터 공천심사위를 가동하며 투명 공천을 약속하고 총선시민연대의 진행과정 공개요청을 수용했지만 결과발표 이상의 공개는 없었다. 밀실공천 관행 탓이다. 정당마다 비공식 채널로 공천신청을 대거 받아들인 점도 절차의 투명성을 떨어뜨린 요인으로 지적된다.공천 절차도 하자 투성이다. 민주당은 당헌이 규정한 공직자 후보추천 절차를 무시하다 낙천자가 제기한 공천무효 가처분 신청에서 패소하는 망신을 당했다. 정당의 공직선거후보자 추천은 민주적이어야 하고 지구당 대의기관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는 정당법 조항은 사문화 상태에 놓여 있다.#3. '보스'의 자기사람심기 여전: 자기 사람 심기. 역대 공천의 특징이자 고질적 병폐로 지목된다. 여야를 떠나 공천무대는 실세의 세력확대 경연장이었던 것이다. 16대 총선의 공천무대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잡음이 요란했다고 할 수 있다.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난해 말 "더 이상 총재가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도 연초 기자회견에서 공천혁명을 호언했다. 뚜껑을 연 결과는 민국당 창당 파문과 호남지역 무소속 출마 러시로 나타났다. 떠들썩했던 낙천-낙선운동도 계보원 봐주기라는 음성적 공천 관행은 깨지 못했다.보스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원칙을 깨더라도 자기 사람을 심고 봐야 한다. 당의 간판만으로 사실상 당락이 결정되는 지역대립구도도 이런 현실을 부추기고 있다. 공천경쟁에서 탈락한 한 여당위원장은 "호남의 민주당 공천과 영남의 한나라당 공천이 곧 당선을 의미하는 현실부터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극한적 지역대립 구도가 무너지고 정당공천이 당락의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공천에 목을 매거나 무리해서 자기 사람을 심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천은 결국 지역대립 구도와 이에 기반한 1인보스 지배라는 현실정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셈이다.#4. 유권자도 절반의 책임: 당원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 관리가 미흡한 점이나, 당원이 정당활동에 대한 인식이 낮은 점, 당의 분열과 비용 문제등은 상향식 공천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시민단체 낙천-낙선운동이 위력을 발휘한 16대 총선에서도 영-호남과 충청권 공천은 이들 지역을 텃밭으로 장악하고 있는 정당 보스나 실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지역주의 투표행태가 밀실-낙하산 공천의 토양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시민의 정치 무관심과 방관자 심리도 비민주적 공천관행 타파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시민의 정당가입 기피현상도 지적된다. 지금처럼 입당원서만 내면 당원이 되고 당원이 선거운동의 동원대상 수준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공천개혁은 기대하기 힘들다.3. 또다른 공천제도와 그에 따른 문제점#1. 지역구 국회의원 상향식 공천: 공천권을 당원과 대의원들에게 돌려주고, 중앙당은 공천과정 전후에 최소한의 검증 기능만 갖는다는 것이다.그러나 구체적인 시행과정에서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예상된다. 예컨대 당원과 대의원들을 확정하는 당사자가 바로 현역 지구당위원장이어서, 정치 신인은 사실상 경쟁의 기회를 박탈당하기 십상이다.#2. 비례대표 상향식 공천: 비례대표 후보의 명단을 결정하는 선정위원회에 외부 인사를 50% 참여시키고, 여기에서 3배수 정도의 명단을 확정하면 500명~1000명의 선거인단에서 투표를 통해 순위를 확정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는 명단 확정과 순위 작성이 모두 총재의 전권이었다. 이렇게 되면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싼 `돈공천' 시비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당 밖의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공천의 객관적인 평가자료로 활용하도록 의무화 하는 방안도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당 공천심사위원회가 회의기록을 남기도록 의무화하고, 문제가 제기될 경우 이를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도 논의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