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20×10흙으로 돌아가라!-기적의 자연재배를 읽고.아이를 재우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귀여운 애교에 이제 막 시작한 걸음마, 이제 막 입을 뗀 엄마, 아빠 소리까지. 아이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귀한 존재가 견딜 수 없이 짜증나고 답답한 순간이 잠을 자기 직전이었다. 아이는 무릎 뒤나 팔꿈치 앞 같이 살이 접히는 부분을 많이 간지러워 했다. 힘 조절이 되지 않는 아이의 손에 여지없이 생채기가 났다. 종일 아이를 본 아내를 대신해 아이의 몸을 긁어주는 건 내 몫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재우다 보면 내가 잠이 오기 일쑤. 아빠가 조금이라도 잠에 빠져 긁는 게 느슨해졌다 싶으면 간지럽다고 난리~난리~. 아이의 아토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그러던 중, 아무래도 아토피가 있는 아이에 맞춰 식습관이나 기타 생활습관을 건강한 환경으로 조성하려고 이것저것 공부하던 차에 자연재배를 접하게 되었다. 단순히 몸에 좋은 유기농 식자재로만 먹어야지,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농법이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가장 원점에서 지적해 내고 있었다. 송광일 박사의 ‘기적의 자연재배’를 찾아 읽으면서 자연재배의 개념에 대해서도, 그 오랜 기다림이 주는 무한한 고에너지의 신비에 대해서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이의 아토피 또한 단순히 아이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크게 키우고, 빨리 자라게 하는 비료와 그에 못지않은 원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흔히 유기농이라고 열광하는) 퇴비 속에서 자란 농산물들은 저전압, 즉 낮은 에너지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것을 먹은 사람의 몸에도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이 아이의 몸이었을 경우에는 그 파급력이 더 큰 것이다. 아이들은 그 옛날 골목을 누비던 꾸러기들과 달리 팔과 다리가 알차지 못하다. 키만 쑥쑥 커서는 팔다리 근육이 없다시피 아주 말랑말랑하다. 주위 아파트 촌 사이사이 숨어 있는 놀이터에는 온통 안전을 위해서라며 우레탄이 깔려 있고, 산책로라고 조성해 놓은 공원은 얼추 조악하게 자연을 흉내내고만 있다. 아이들이 놀 ‘터’가, 자랄 수 있는 ‘터’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이는 농산물도 마찬가지이다. 농산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터’가 없다. 땅을 갈아엎어 깊게 파서는 매년 더 많은 비료와 퇴비,농약을 준다. 땅이 몸살이 날 지경이다. 요리를 할 때 조미료만 안 넣는다고 건강한 음식이 아니다. 이미 우리 손에 원재료가 들어올 때부터 각종 성장촉진제와 제초제 등으로 약에 취한 것을 받게 된다. 땅이 몸살이 나면 그 땅을 딛고 사는 우리도 몸살이 난다. 그 몸살은 우리 아이처럼 아토피로도 나타나고, 만성피로로도 나타나며, 비만, 골다공증, 각종 성인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자연재배란 농산물이 자라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것을 그대로 보존해가면서 작물이 고전압의 에너지 상태가 되도록 비와 같은 환경적 요소를 조절해가며 ‘재배’하는 방식이다. 농부의 정성은 더 들어가면서도 농약을 뿌리거나 잡초를 제거하는 인력은 덜 드는 효율적인 방식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그 땅이 힘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한번 얻은 그 힘은 인력 소모를 줄이면서 자연을 상하게 하는 폐해도 없으니 장기적으로 미래 식량 산업의 근간이 될 만하다.환경오염이 인간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인간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중장기적으로 우리가 흥청망청 쓰던 에너지 및 수자원 등의 고갈이 문제시되니 다들 무언가 아끼는 데에 요즘 혈안이 되어 있다. 나는 그 절약의 제일 첫 번째가 우리의 땅을 아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흙에서 모든 미생물의 생명이 움트고 그 미생물이 농작물, 식물과 함께 건강한 터를 일궈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연재배 작물은 건강한 식품이 되어 사람들의 아토피, 만성 두통 등과 같은 병을 치유하면서 그들의 삶을 한층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나는 저자의 자연재배 농법에 감명 받아 넓은 땅은 아니지만 시골 어머니 댁 텃밭에 과일이니 쌈채소니 하는 것들을 키우고 있다. 아직은 우리 식구 푸지게 먹을 만큼도 생산이 되지 않는다. 자연에서 그대로 크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농부의 정성어린 재배의 관리와 조절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녹록치는 않다. 하지만 비록 소량이나 알이 단단한 토마토를 한입 베어 물면 온 자연의 에너지가 내 몸속에 가득 차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그 사소하고도 작은 기적이 아이의 밤잠을 설치게 하던 아토피까지 잠재우는 것을 보며 주말도 게을리 있을 수 없다. 근처 매장에서 유기농 작물을 사먹으면 되지 굳이 뭐하러 농사까지 짓냐고 타박이던 아내 또한 요새는 송광일 박사의 책을 열심히 탐독하며 이따끔 주말 에 아이를 데리고 함께 텃밭에 나가주기도 한다. 아이가 높이 올린 고랑 사이를 걷는 걸 보노라면 자연과 아이가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잃어버린 말을 찾는 여행-구효서의 ‘동주’를 읽고.하루 종일 말을 하다 집에 온다. 말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친다. 어떤 날은 재미있고, 어떤 날은 피곤하기만 하고, 어떤 날은 말을 하기 싫다. 그러다 어떤 날은 내가 말을 하는 건지, 말이 그냥 내 입을 빌려서 나오는지 모르게 술술 나올 때가 있다. 머릿속에서 생각해서, 한번 걸러 나온 말이 아니라 그냥 허공에 말을 쏟아내는 기분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모를 때도 가끔 있다. 자의식의 과잉이다. 내가 너희보단 잘났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쉽게 해도 될 말을 어려운 단어만 쏙쏙 선택해서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라 단어들의 나열만 한다. 그리곤 곧 허망해진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 우습다. 그렇게 이 땅에서 내 나라 말, 내 나라 언어를 쓰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이 말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다만 영어권 화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소심한 안도는 몇 번 한 적 있다. 이따금 관광으로 일본을 가면서 그 매력적인 톤에 끌려 일본어를 배우겠다고 설칠 때에도 이 주 정도면 히라가나, 가나카타를 외우다 널브러진다. 아, 어려워.‘동주’라는 책을 처음 집었을 때에는 그냥, 아, 윤동주에 대한 소설이구나. 독립투사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했다. 조금 달라봤댔자 윤동주의 시에 대한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뒷이야기겠거니, 하기도 했다. 우리는 참 역사를 많이도 윤색해 보지 않은가.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우리는 애국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역사 속 뒷이야기를 접한다. 요즘은 판타지 요소를 많이 넣는다. 그래선지 어린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동주’는 그런 점에서 그저 그런 호기심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의 부끄러운 서정시를 기대하면서.하지만 ‘동주’는 그저 그런 서정시를 쓰는 부끄러움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우리 땅에서 우리말로 쓴 시를 쓰고, 시를 쓰는 행위를 사랑하고, 그것을 아름답다 여기는 마음이 고운 남자였다. 더듬는 말, 참람한 말, 사이의 말, 숨은 말 등..... 구효서가 말하는 ‘동주’는 말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윤동주가 감옥에 갇혀 그가 쓴 아름다운 시들을 항일 저항의 뿌리라 여겨 억지로 일본어로 번역하기를 강요당했을 때 그는 이미 시인으로서 죽은 것이라, 작가는 말한다. 그가 가진 말의 중요성을 이중화자인 요코를 통해 거듭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일본인 요코, 아니 정확히는 아이누족인 이타츠 푸리 카와 일본인 겐타로, 아니 정확히는 한국인 김경식. 요코로 살아오면서 말을 배우고 글을 쓰던 이가 아이누족인 자신의 혈통과 정체성을 찾아 아이누어를 배우고 그 방면에서 문화관을 건립할 만큼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모든 원동력이 ‘말’이었다. 아이누어를 하면서 그녀는 요코에서 이타츠 푸리 카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겐타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으로 살아오면서 어머니가 ‘넌 조선인이야’라고 한 말조차 일본어로 들었다는 그의 고백은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이 전혀 없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하지만 친구인 시게하루의 갑작스런 실종(?)에 그에 대한 추적을 시작하면서 요코의 기록을, 역사 속에서 밟혀진 윤동주의 시를, 그의 말을 알게 된다. 그에 대한 과정을 전하기 위해 그는 한국어를 배운다. 오로지 한국어가 아니면 왜곡될 수 있는, 한국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요코가 온전한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이누어를 배웠듯이.조선인과 일본인을 갈라 쉽게 공분하던 그 시대의 미친 소용돌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맑으면서도 결연한 빛을 띠고 있던 동주를 가까이 지켜보던 요코의 고백은 어릴 적 조금씩 배워 서툴게 쓰던 일본말로 쓰여져 있다. 후에 그녀가 그 모든 상황을 되짚으며 폭풍 같은 마음을 정리해 쓸 수 있을 때쯤의 기록은 다시 아이누어이다. 온전한 그 마음은, 온전히 그 언어로 생각해야 가능하므로. 거기서부터 모든 이들의 동주의 유고집을 추적하는 기본적인 출발이 이루어진다. 진정한 유고는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아름답게 다듬은 우리말로 된 시이고, 산문이기 때문이다. 고문실 불빛 아래 일본어로 옮겨진 마지막 그의 글은 진정한 그의 유고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요코, 아니 이타츠 푸리 카는 그것을 이해한 것이다.이타츠 푸리 카도 겐타로(김경식)도 결국 동주의 유고집은 찾지 못한다. 은밀한 세력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기록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두 사람이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타츠 푸리 카의 발자취를 밟은 김경식의 새로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가. 겐타로는 김경식으로써의 정체성을 찾아 동주를 따라가며 기어이 온전한 한국어로 그 여정을 남긴다. 말의 신비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 삶의 방식인 말을 빼놓을 수 없다. 말이 곧 그 사람이며, 그 사람이 곧 그 말 자체다. 이타츠 푸리 카도 김경식도 평생에 걸쳐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작가는 차례에서 그 수많은 말들을 목차로 나열해 놓으며, 결국 ‘피 같은 말’, ‘본래의 말’ 등을 거쳐 마지막 ‘꽃의 말’에 이르게 한다. 내 나라의 내 말의 참뜻을 깨닫는 과정, 그것이 바로 ‘동주’였다.
제 목너에게, 반짝반짝, 샹들리에.-김려령의 샹들리에를 읽고.김려령 작가는 완득이 때부터 팬이었다. 거침없으면서도 솔직하고 유행을 타는 여느 소설과 달리 시종 즐겁고 유쾌해서 내가 정말 완득이 친구쯤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이후 유아인이 주인공으로 확정되어 영화화되었을 때에도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어렵고 힘든 가정에서 외롭게 자란 소년 하나를 가볍고도 진지하게 풀어냈다. 나는 김려령의 그런 경쾌함이 좋았다. 그녀의 신작으로 ‘샹들리에’를 만났을 때에도 완득이 친구로 빙의되어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설렘이 있었다. 평범한 집안의 형광등과는 다른 평수 넓은 집에 커다란 거실 한가운데 박혀 있는 샹들리에. 미국의 대저택까지 가지 않더라도 좀 꾸며놓고 사는 집에 예쁘장하면서도 화려한 샹들리에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크고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 촉 하나 하나가 꺼져가는 느낌으로 글을 읽어 내려가야 했다.그것은 슬프고도 괴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작가의 대표작을 오랫동안 품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크게 한 방 날린 셈이다. 이따금 완득이 친구같은 얘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순간 순간 일뿐이었다. 나는 가슴 보다는 심장이 아프다는 느낌으로 이야기들을 끌어 모았다. 끌어 모으지 않고서는 눈물을 타고 흘러 이야기들이 멀리 흘러가버릴 것만 같았다.그렇게 힘들게 읽어 놓고는 결국 다 읽고 나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 권했다. 나만 당할 수 없다! ‘완득이’를 쓴 김려령 작가의 작품이란 것을 강조했다. 영화 ‘완득이’ 봤지?로 시작해 ‘샹들리에’를 꼭 읽어봐라로 끝났다. 두어 명은 따로 메모도 해갔다. 이제 그들도 느끼고 있으리라. 심장 한가운데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그 고통을. ‘샹들리에’ 속 단편 이야기에서 청소년들은 우울증을 앓는 엄마에게 버림받기도 하고, 부주의로 한순간에 엄마를 잃기도 하고, 그냥 아는 사람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받기도 한다.나 또한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인천 아동 살해 사건부터 우울증에 걸려 어린 남매를 죽인 엄마의 이야기까지.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대체 저긴 어떤 세상인가? 싶다. 내가 사는 세상도 저런 세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도무지 딸아이를 동네 놀이터에도 혼자 못 보내겠다. 오후에 다니는 피아노, 태권도를 학원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내가 직접 하고 있다. 각박한 게 문제가 아니라 무서운 게 문제인 세상이 되어 버렸다.단편 ‘아는 사람’을 읽고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학원은 크게 도움이 안 되고, 그렇다고 개인 과외를 받자니 집안 형편 때문에 하지 못하던 그때, 그룹 과외 모집 글을 보게 된 소녀는 남자 선생님의 오피스텔에서 여학생 넷, 남학생 하나를 그룹으로 해서 과외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곧 흐지부지, 학생이 하나둘 그만두고 어느새 소녀와 소년만 남았다. 휴가를 떠나기 전 특강을 해주겠다는 연락에 선뜻 왔지만, 그 자리는 과외 자리가 아니었다. 초가 셋 꽂힌 케익 하나에 샴페인. 아는 사람의 호의를 그냥 박차긴 뭐해서 방에 들어와 샴페인 한 잔 쭉 마시고 나간다는 게 그만 발목이 잡혔다. 샴페인에 수면제를 탔던 것이다! 아, 어느 국회의원도 젊은 대학생 시절 술에 그런 종류의 약을 타 여학생과 마셨다고 모험담처럼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무리 소설이 ‘있을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 쓴’ 거라고 하지만 정말 내가 사는 동네 어느 원룸 촌에서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식은땀이 났다. 그래서였나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은. 혹시나 우리가 사는 동안에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잘날 것도 없이 살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서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해야 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아직은 어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우리지만 이 아이들이 자라서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밤 열시에 홀로 귀가하기도 하고, 남학생과 섞여 그룹과외를 하게 될 수도 있으며, 과외 선생님과 단 둘이 늦게까지 수업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원하지 않은 불행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어 우리를 후려치고 짓밟는 상상을 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그 고통스러운 현장이 ‘아는 사람’에 녹아나 있다. 죽을힘을 다해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소녀의 귀에 현관 비밀번호 푸는 소리가 들린다. 구세주일까? 아니! 그것은 또다른 악마였다. 소녀를 흠모한 소년의 단독 범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더 처참했다. 과외 교사가 공모자로 발을 디디는 순간, 정말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었다. 무섭다.그나마 한 자락 희망이 있다면 마지막을 장식한 소녀의 신고 전화이다.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신고를 하고, 이를 악문다. ‘너는 끝났지? 나는 시작이다.’ 소녀의 마지막 말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지금 상처는 상처도 아니야. 앞으로 더 큰 고통과 상처를 마주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녀야, 너는 할 수 있다. 그럼, 그렇게 살아야하고말고. 어른도 감히 가지지 못할 큰마음을 소녀는 가지고 있었다.그런 마음은 단편 ‘이어폰’의 중일이도 가지고 있다. 게임을 할 때도, 스포츠를 볼 때도 귀청이 떨어져나가라는 듯 크게 소리를 높여 이어폰을 끼고 있는 중일이는 의자를 딛고 물건을 꺼내던 엄마가 낙상하여 돌아가시는 그 몇 분의 시간동안에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에 몸을 맡기도 춤을 추었다. 부엌 한쪽에서 엄마가 중일이를 불렀을 것이다. 부모가 사준 비싼 이어폰을 끼고 신나게 춤을 추는 아들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얼마나 깊은 탄식을 쏟아냈을까. 그리고 그 탄식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어우러져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그 상황을 누구하고도 말을 나눌 수 없다. 전혀 괜찮지 않은 중일이가 괜찮은 척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사고란 건 저 혼자 동떨어져 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듯이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연결고리가 인과 관계가 되어 마치 지구 반대편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한 번 하면 이쪽에선 태풍이 불어온다는 것처럼 이어폰으로 파생된 부모 자식간의 갈등과 세대차이가 커지고 커져, 중일은 집 안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저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어머니는 평소 아프던 허리가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고 고꾸라져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다, 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다만 어찌되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순간에 바로 그 옆에 중일이 있었다. 중일이는 전,혀 괜찮지 않다. 누가 괜찮을 수 있을까. 하지만 중일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도 그리움도 솔직하게 드러내려 한다. 한 번 있었던 사람이 어찌 영원히 없는 사람인양 취급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 죽은 이에 대한 추모와 추억을 산 사람들과 함께 하며 말이다.
김산하의 야생학교를 읽고.방과 후에 큰 아이를 학원으로 데려다 주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놀이터 근처에서 7살 쯤 되어 보이는 조무래기들이 모여 웅성웅성 난리가 났다. 그러다 갑자기 한 아이가 질겁을 하더니 뒤로 물러난다. 뭘 하는가 싶어 지나가는 길에 그쪽으로 바짝 붙어 서보니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장수풍뎅이가 아이들의 철모르는 유희에 힘겨워 하고 있었다.“애들아, 풀숲에 놓아주어야지~ 너희가 이렇게 둘러싸고 있으면 집으로 못 돌아가잖니~”“그냥 보는 거예요~”요즘 아이들 말대답에는 구십 퍼센트 이상이 ‘그냥요’,‘아무것도 아니예요’다. 그날도 그랬다. 아이들은 뭘 묻든, 뭘 훈시하든 마냥 ‘그냥요~’라고 답했다.어떻게 생명 하나를 놓고 아이들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괴롭히면서 ‘그냥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산하의 ‘야생학교’를 읽는 내내 그날의 아이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을까. 아이들이 자신과 똑같은 생명을 지닌 곤충에게 좀 더 존중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도록 어떤 멋진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야생학교’를 읽는 동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사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같은 상황에서 멋들어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을 모아 놓고 장수풍뎅이가 살만한 곳으로 같이 놓아주자고 말할 순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은 얼핏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철없고 생각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오히려 어른들보다 쉽게 바른 말에 수긍하기 때문이다. ‘야생학교’에서 배운 가르침을 내 주변 친구, 이웃, 딸 아이의 친구들에게까지 조금씩 말해주고 싶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이토록 크고 위대함을, 그 위대한 자연과 동물의 세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매너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이다.동물을 올바르게 대하는 법나는 집에 있는 옷 중에 가죽 옷이나 모피 옷 등이 없다. 즉 동물을 살처분해서 만든 옷이 없다. 대체로 면이나 폴리 종류이다. 한때 밍크 코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흠집 없이 고운 털을 얻기 위해 살아 있는 채로 털이 벗겨지는 영상을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다른 생명의 고통을 등에 업고 어떻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까. 기술이 워낙 좋아져서 인조털이나 합성 섬유도 너무 좋은 요즘이다. 굳이 생명 경시까지 떠들어대지 않아도 사람이 사람이길 포기한 잔인함을 보이면서까지 그런 옷을 업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김산하 작가는 동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말한다. 사람이 위, 동물이 아래와 같은 이분법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원래 숲에서 바다에서 강에서 터전을 일구고 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 그들의 터전과 생존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야생 학교 입문의 첫 번째 관문이다. 횟감으로 물고기를 보는 물에 사는 ‘고기’라는 명명 대신 물에 사는 생명이라는 뜻으로 ‘물살이’라고 불러달라는 그의 제안은 야생학교 학생다운 참신하고도 동물들과 ‘같이’살고자 하는 동료애가 깃들어 있다. 인간을 ‘위해서’존재 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 아무것도 없다. 인간과 ‘함께, 같이’살아가는 동물들과 식물, 대자연이 존재할 뿐이다.도시인의 자연 감상법우리는 이따금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놔두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듯하다. 습지를 개발하고, 소위 ‘노는 땅’을 두고 볼 수 없어서 하다못해 놀이터라도 만들어 내야 성미가 풀린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노는 땅’이 오히려 그럴듯한 구조물과 놀이시설보다 더 아이들의 진짜 놀이터가 되어 준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그런 공터를 아지트 삼아 놀았었다. 나무 둥치를 중심으로 주변 나뭇가지를 주워와 집을 만들고 소꿉놀이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이따금 개미들이 먹이를 옮기는 대장정을 관찰할 수도 있었고,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찾아 헤매기도 했었다. 나비가 되어 날아간 빈 번데기를 모아다 그날의 요리 재료로 쓰곤 했다. 요즘처럼 거창하게 숲 체험이니, 숲 유치원이니 해서 먼 곳으로 차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요즘은 ‘노는 땅’자체가 자꾸 없어진다. 사람 입장에서야 아무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니 ‘노는 땅’이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더 좋을 대도심 속 동물과 식물의 작은 안식처이지 않을까. 작가는 모든 공간을 인간 중심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경계하고 있다. 도시는 사람들로만 만들어진 첨단의 공간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자연 위에 세워진 곳이다. 아침에 일어나 작은 새소리라도 한 소절 듣고 싶다면, 이제 그만, ‘노는 땅’이든 ‘지나가는 새’든 내버려둬야 할 때이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 감수성내가 살고 있는 지역엔 요새 한창 코스모스 축제가 한창이다. 아름다운 코스모스 길에서 한참 사진을 찍고 축제에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먹자 골목에 들어서게 된다. 전세계 먹거리와 지역 특산품이 뒤섞여 코스모스 길보다 더 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불 위에 돌돌돌 돌아가는 모습은 여타 축제 현장에서 매번 보는 거지만 기이한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해당 지역 축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지만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섞여 닭고기, 돼지고기, 생선 할 것 없이 먹고 마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자연을 즐기러 축제에 오는 것인데 결국은 근교 자연을 파괴하고 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를 작가는 식욕과 성욕, 그리고 소비욕의 코드를 꽂을 콘센트만이 즐비하다고 표현해 놓고 있다. 임시 천막을 치기 위해 풀숲을 다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던 생명체들을 강제 이주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진행하는 당시에는 물이니 전기니 끌어다 쓰고, 축제가 끝나면 쓰던 기자재를 철거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올까. 도심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생태적 감수성은 우리끼리 모여 만든 인위적인 축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이다. 우리만의 아름다운 문화 국가의 모습은 지역 축제를 빌미로 장사를 하는 모습이 아닌 그 속에 본연의 모습을 찾고 즐길 줄 아는 진정한 문화, 자연을 즐기는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조두진의 결혼면허를 읽고.이따금 뉴스를 보다보면,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너무 화가 날 때가 많다. 3살 아이가 운다고 아빠가 때려 죽음에 이르렀다던가, 모텔에서 혼자 아기를 낳고 도망친 10대 소녀 이야기라든가. 아, 나열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그때마다 부모가 되려면 부모 면허를 땄으면 좋다라고 생각했다. 나도 딸을 키워보니 분노 조절이 안 될 때가 있고, 짜증이 나서 진짜 어디에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은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그 작은 아이를 때리거나 굶기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요즘은 죄다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부모가 넙죽넙죽 되는지 영유아 상해 폭행 치사 사건들이 너무나 많다. 최고의 환경을 갖추고 있진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부모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던 와중에, 조두진의 '결혼면허'를 만났다.결혼 면허가 있는 자만이 결혼을 할 수 있다.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이 소설의 테마다. 아마 방금 내가 개탄한 그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실현가능한 이야기일 것 같다. 부모가 되기 이전에 부부가 되는 것에서부터 면허가 발급되면 자격없는 부모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가 줄어들까.인선이 들어간 ML결혼생활학교는 기존 학교들보다 인지도나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면허 시험만 치른다고 합격, 불합격이 아니라 이 결혼생활학교의 커리큘럼을 수강하여 이수를 하여야 시험 자격이 주어진다. 특히 인선이 이 학교를 선택한 것은 여느 학교와 달리 교장이 경찰인 시절 의사 남편이 30년을 같이 산 아내를 죽인 사건을 맡고 이후 느낀 바가 있어 설립했다는 전적때문이다. 대충 수강증을 남발하는 곳보다 훨씬 공을 들인 학교다. 더군다나 교장 자신도 이혼을 했다. 결혼이라는 긴 터널을 모두 통과해 본 사람의 진심어린 충고가 매 수업 시간 이어진다. 인선이 이 학교에 등록을 했을 때엔 그 목적이 뚜렸했다. 이수 후 면허 합격, 그리고는 결혼을 준비하는 것이다.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여 과정을 이수하고, 합격 그리고는 차를 몰고 도로로 나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차를 함께 타고자 하는 윤철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인선 혼자만 면허를 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연인 윤철이 함께 따야 의미가 있는데 이 남자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인선의 일련의 행동을 무의미하게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가 결혼할 생각은 있는지!나도 결혼 전에는 인선과 같은 여자들이 한심해보였다. 결혼에만 매달려서, 그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인 것 마냥 소위 '남자 사냥', '어장관리'에 들어가는 여자들이 얼마나 얄밉게 보이던지. 인선은 스스로에게 시시때때로 명문대, 좋은 집안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 자신만으로는 뭔가 내세울만한 게 없다. 특히 그녀가 형부가 들고 온 취직 자리를 무시하며 울 때는 한 대 콱 쥐어박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1년의 결혼생활학교 과정을 이수하면서 그녀는 조금씩 달라져간다. 교육 과정의 중심에 서 있던 의사 부부의 불행한 살인 사건의 내막을 한꺼풀씩 벗겨내가면서 인선은 결혼이라는 낭만과 환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생활의 실제와 고통을 체득해간다. 의사 남편은 살해 동기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부부의 불행을 끝내야 했다." 그의 그 나즈막한 절규는 영원히 소통할 수 없는 평행선을 가던 부부의 깊은 불행을 짐작케 한다. 일정한 거리가 필요했던 남자와 관계가 필요했던 여자는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줬으면 하기만 했던 것이다. 남편의 행위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의 이해를 구할 수 없었다는 남편의 한탄 속에는 그 또한 아내를 이해하려는 손길을 내밀지 않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열렬한 감정만으로 결혼이 지속될 순 없다. 운전을 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8차선 도로에 나설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사회인으로서 나는 내 면허에 합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