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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남아시아 해외 문화 탐방 계획서 평가A좋아요
    해외탐방활동 계획서■ 테마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구를 통한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해양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팀명팀장팀원■ 목 차 ■Ⅰ. 탐방테마 및 지역 선정 이유Ⅱ. 해상 실크로드의 발전과 쇠퇴1. 동서문화 교류의 새로운 패러다임, 해상 실크로드.2. 해상 실크로드의 발전, 전성기 그리고 쇠퇴.Ⅲ. 해상 실크로드와 동남 아시아 네트워크1. 동남아시아 무역항의 발전2. 동남아시아의 특징Ⅳ.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무역항 분석1. 해양실크로드의 무역거점, 아유타야2. 해양실크로드의 살아있는 화석, 싱가포르3. 무역중심지였던 말라카4. 베트남의 주요항구, 호이안Ⅴ. 탐방 목적 및 계획Ⅵ. 탐방 일정 및 예산1.탐방기간 및 내용2.여행 경비 및 내용Ⅰ. 탐방테마 및 지역 선정 이유국내체류 외국인 현황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아시아의 역사는 동북아시아의 역사였다. 동남아시아는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동북아 중심의 역사관에 밀려 아시아에서 늘 변방이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은 작게는 동북아시아와 인도의 사이의 해상무역이 활발한 곳이었고 크게는 해상 실크로드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동서 교류의 고속도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규모는 2007년 현재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하고 그 중 동남아시아인이 두 번째로 많은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동남아시아는 어떤 의미인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동남아시아, 동남아인이란 이른바 ‘불법 체류자’와 ‘베트남아가씨’등으로 인식되어지고 있으며 이는 또한 경멸적인 시선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잘못된 시선 때문에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동화하지 못하고 무시당해왔고 또한 그러한 시선은 아직까지도 바뀌지 않는다. 외국인들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서양인 특히 백인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당한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단순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라서 이러한 인식이아만이나 홍해에 이르는 길이다. 이 해상 실크로드에 의하여 비단·도자기 등의 중국 물자가 서남아시아로, 유리·향신료 등의 서남아시아 물자가 중국으로 운반되었다. 동진(東晉)의 법현(法顯)과 당(唐)나라의 의정(義淨) 등은 인도에서 돌아올 때 이 바닷길을 오가는 남해선(南海船)에 편승하였다.해상의 실크로드는 어느 한 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교역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교역을 담당한 교역로이다. 이 해상의 실크로드가 동아시아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었던 문화적?지리적 이유와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내용까지 살펴보고자 한다.동아시아는 그 내재적인 다양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지역적 정체성이 형성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역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지역 국가들의 공통의 정체성을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지리적?역사적?문화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단순히 특정 국가나 민족 또는 대륙적 관점에서 찾기보다는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를 연결하는 해양 중심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또 다른 동아시아의 역사적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먼저 동아시아의 해양지리 적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해안을 따라 여러 해양들은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S자 곡선을 형성하고 있는데, 각종 해양들에 의해 형성된 사슬 형태의 반도와 부속 도서들은 동아시아의 지리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공간을 제공한다. 해양지역이란 대양보다는 작으며 내륙보다는 만이나 내해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해양의 교차’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무역 연계망도 S자 곡선에 따라 한반도의 부산, 일본 열도의 나가사키, 중국의 상해 및 홍콩, 말라카 반도의 싱가포르 등과 같은 무역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연계하는 중국의 동부해안은 동남아 지역의 말라카 해협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인도양으로 통하는 출입로가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형성된 해안 영역, 해안 주변 그리고 이와 연계된 바다7척의 범선과 28,00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무적함대의 면모를 갖춘 정화 함대는 베트남의 해안을 통과하여 자바?수마트라?스리랑카를 거쳐 인도 서남부의 캘리컷에 이르렀다. 4차 원정 때에는 함대의 일부가 호르무즈 해협까지 갔으며, 5차 원정 이후로는 홍해 입구의 아덴과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의 소말리아와 케냐 해안까지 진출했다.마르코폴로와 정화의 원정로그러나 정화의 함대는 전투?탐험?통상 등의 모적을 추구한 함대로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중국 역대 왕조가 항상 그랬듯이 여러 나라들에 은혜를 베풀고 그들이 중화 중심 질서에 동참하도록 강요하는 사신들의 행차에 지나지 않았다. 함대의 중심을 이루는 거함인 ‘보선’은 각지의 지배자에게 사여할 ‘황제의 하사품’과 각지의 물품들을 황제에게 헌상하는 ‘보물을 싣는 배’였다. 요컨대 정화의 원정은 중국 황제의 도량을 베푸는 데 주목적이 있었던 것이다.정화의 원정 이후 중국이 해외진출을 중단하고 내부로 돌아섰을 때에도 포르투갈의 해양탐험은 계속되었다. 엔리케에 이어 실제로 포르투갈의 대탐험 시대를 연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마침내 1488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에 이르렀다. 디아스의 뒤를 이어 포르투갈의 위대한 군주 동 마누엘의 명을 받아 1497년 리스본을 떠난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이 12,000마일의 항해 끝에 인도의 캘리컷 인근에 도착한 것이 1498년 5월이었다.바스코 다 가마가 1497~1499년까지 그리고 1502~150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성공적인 인도 항로를 개척한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고아와 코친에 총독을 두어 전력 거점을 설치했다. 이들은 나아가서 인도와 동남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이르는 이른바 해상 실크로드의 요충지마다 전략적인 해안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륙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요새와 항구를 통해 현지 국가들을 통제하면서 동방무역을 주도한다는 전략이었다.인도에 전진기지를 확보한 포르투갈은 1511년 . 당시 인도는 로마에서 금화를 수입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69-79)에 금 수출이 중단 되면서 인도 상인들은 새로운 금 공급처를 찾아야 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 해상 실크로드가 육상 실크로드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해상왕국으로서 스리위자야의 출현은 중국과 인도, 말레이 지역과 중국 사이에 있건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이루어진 무역과 동남아시아 내에서의 무역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리위자야가 동남아시아 해상 무역을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스리위자야 통치자의 혜안이었다. 그들은 수마트라 내륙의 자신의 영토를 공고하게 했고 경쟁관계에 있던 항구와 영토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이로 인해 말레이 지역의 농업, 삼림, 대양의 생산품은 스리위자야의 항구에 집중되었고, 스리위자야는 또한 무역 자원을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교적 전략적이지 못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선단은 결국 스리위자야가 말레이 지역의 서쪽의 무역을 장악할 수 있게 해주었고 해적과 다른 나라의 공격으로부터 근해를 보호했다. 또한 중국을 보호자로 인정하고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침으로서 스리위자야의 배들은 중국의 항구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해상왕국으로서 스리위자야는 생존을 위한 전략을 취했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스리위자야는 살아남기 위해 잠재적인 위협이었던 두 개의 초강대국과 외교관례를 맺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레이 지역 내에서 세력을 강화하고 확장하였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차 주변의 무역 중심지와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292년 이후 마자파히트 왕조에 의해 스리위자야는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해상 무역로를 잃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4세기 말이 되면서 마자파히트 왕국은 독립하고자 했건 봉신들로 인해 내부 분쟁이 일어났다. 마자파히트 왕조로부터 잘려 나왔던 그 중 하나는 말레이 무역체제의 중심, 즉 말라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신화이다. 푸난이 쇠퇴하고 첸라(Chenla)라고 하는 크메르 왕국이 현 캄보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앙코르 제국으로 발전했다. 앙코르 제국의 건축물을 보면 힌두교와 불교가 절묘하게 조합되어있다. 7세기경부터 수마트라에서 크게 번성하던 해양 국가 스리비자야(Srivijiaya)에서는 대승 불교가 발전했고, 8세기경부터 자와 지역에서 흥기한 사일렌드라(Sailendras)가 남긴 보로부드르(Borobbudur)사원은 불교 세계와 관련된 부조로 유명한 불교 사원이다. 그러다가 13세기부터 크게 발전한 마자파히트(Majapahit) 제국에서 마지막 불교-힌두교의 전통이 보이고, 이후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을 이슬람화되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베트남만 제외하고 소승 불교화되었다. 베트남은 인도의 영향에서 예외이다. 현 베트남 북부 지역에 이미 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영향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다가 10세기경 독립한 이후에는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곧이어 남쪽으로 영토를 팽창하여 중국적 요소를 현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 지역까지 전파했다. 베트남이 한자와 대승 불교, 젓가락 등 북동 아시아적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동남아시아로 분류되는 요인 중의 하나는 베트남이 인도 문명권으로 진입하고, 또 일정부분 그 문화를 흡수했다는 것이다. 영토를 확장하고 사람들을 베트남화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부의 참파나 남부의 크메르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 사이공의 중심지에서 힌두교 사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메콩 유역에는 크메르 사원들이 많이 남아있다. 중부에서는 참파 고탑(古塔)과 사원들이 그대로 남아 베트남 문화유산이 되어있다.● 공통점동고동남아시아 문화권의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보면√첫 번째로 공동의 문명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다. 동고(銅鼓 bronze drum)이라는 것이 있는데, 절구를 뒤집어 놓은 듯 하게 생긴 이 유물은 표면에 공통적으로 태양 문양이 있다. 동고는 베트남의 이다.
    인문/어학| 2009.06.04| 25페이지| 5,000원| 조회(1,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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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통의 리더쉽 평가A+최고예요
    소통의 리더쉽목 차Ⅰ. 소통의 리더쉽이란 무엇인가?1. 소통의 리더쉽의 등장 배경2. 소통의 리더쉽 정의Ⅱ. 리더를 통해 본 소통의 리더쉽1.솔직하고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화신 프랭클린 루즈벨트2.뉴딜정책3.제2차 세계대전4.루즈벨트 리더쉽의 평가Ⅲ. 맺음말Ⅰ. 소통의 리더쉽이란 무엇인가?1. 소통의 리더십의 등장 배경과거부터 인류의 역사는 리더를 중요하게 여겼고 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중심의 역사는 그 리더를 뒷받침 해 온 대다수의 대중들의 역할을 매우 소극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 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요인으로는 프랑스혁명 이후 출현하게 된 근대국민국가의 성립을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은 대중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피지배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그들이 국가의 주체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국가의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역할에 의해 국가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절대 왕정기 전제왕권의 힘의 강제로 이루어지던 국가는 이제 대중들의 다수와 회의로 변하게 되었고 지도자들도 이제는 특별한 계급에 위치해 있던 왕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나온 인물들로 변하게 된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근대국민국가들은 초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파시즘 정권의 등장은 이러한 대중과 지도자와의 관계가 얼마만큼 타락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일으킨 유래없는 대전쟁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제도까지 오게 되는 과정 속에서 대중들의 역량은 과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지게 되었고 지도자들이 과거와 같은 ‘나를 따르라’ 식의 전통적인 리더쉽이 더 이상 대중들에게 수용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권력적이고 일방적인 리더십이 점차 퇴색하고 통합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겪는다. 소통의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인터넷 세계에서조차 말은 일방적이고 억지여서 소통과 거리가 먼 상황을 본다. 이러한 것은 단지 일상에서 뿐 만 아니라 조직체, 즉 기업이나 국가에 있어서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된다. 특히 한 국가를 구성하는 수많은 공동체의 다른 이념이나 인식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며 모든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사람 혹은 집단들을 이끌어가야 하는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며 공동의 이익 추구라는 대 전제하에 다른 의견에 대해서 충분히 수용하고 설득하며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소통을 위해선 겸허한 자세와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소통에서 필요한 것은 달변이 아니라 경청이라는 점도 명심할일이다. 우선 앞으로 살펴볼 소통의 리더십이란 간단하게 정의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더라도 설득과 소통을 통해 공동이익이나 공동의견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통의 리더십은 협력적 리더십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데 협력적 리더십에서 진정한 리더십은 상호간의 환경 내에서 일어나며, 공통의 가치와 비전에 기초하여 조정된 행동이다. 소통의 리더십의 요소에는 상호존중의 태도, 공개적이고 투명한 태도, 동반적 리더십, 결단보다 타협 중시, 대등한 인간관계 존중, 자발적 동의 중시, 토론 과정 중시 등이 있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서 권위주의형 리더십과의 차이점도 파악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소통의 리더십에서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토론과 토의를 거쳐 결정에 도달하는 의사소통 과정이 핵심으로 간주된다.Ⅱ. 리더를 통해 본 소통의 리더쉽최근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광우병소 수입조항에 대해 준비성 없는 조약, 졸속 조약이라는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익과 경제발전에 이바지함이 쇠고기 협상의 목적일지라면 국민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여론은 그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에 대한 그의 전망은 사후에 국제 연합 결성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에 네 번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했던 장기 집권자이기도 하다. 그가 대통령직임 중에는 여러 차례의 위기가 있었기에 우리는 루즈벨트의 정책을 살펴보고 그 정책에서 의사소통의 리더십을 살펴보도록 하겠다.2. 뉴딜 정책올해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발표, 시행한 지 75주년이 된다.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는 가운데 미국인들은 경제적 수렁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21세기의 루스벨트’를 고대하고 있다. 루스벨트가 제3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1933년 3월 미국의 경제상황은 최악이었다. 1929년 10월24·29일 뉴욕증시의 폭락은 대공황의 신호탄이었다.1929∼1933년 사이 실업률은 4%에서 25%로 급등했다. 산업생산은 35% 줄었다. 농산물가격도 60%나 급락, 농업의 근간이 흔들렸다. 200만 명이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았다.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로 문을 닫는 은행들이 속출했다. 그는 이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가 취임한 1933년 처음으로 당시에 이미 널리 보급된 라디오를 통하여 국민에게 소신을 피력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졌다. 솔직하게 국가의 상황을 설명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국민의 변화를 유도했기 때문에 반대세력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으나 1934년 중간선거에서 미국 유권자는 1860년 양당체제 이후 처음으로 여당의 의석을 늘려 주었다. 그의 정책에 대한 신뢰와 그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됐다.뉴딜 정책은 1차 뉴딜(1933∼1934)과 2차 뉴딜(1935∼1936)로 나눌 수 있다. 뉴딜 정책에서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한 예는 은행의 구제에 있다. 우선 은행들에 ‘휴업(bank holiday)’명령을 내렸다. 은행들을 재무부의 감독 아래 두고, 필요할 경우 연방은행에서 자금을 지원토록 한 긴급은행법이 통과됐다일부 경제학자들은 뉴딜정책으로 경제공황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연방정부의 개입과 각종 규제정책의 도입으로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다른 경제학자들은 뉴딜정책 때문에 경제회복이 오히려 더뎌졌다고 비판한다. 뉴딜 정책을 성공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뉴딜 정책의 성공의 원동력이 루스벨트 개인의 능력도 출중했지만 주위에 강력한 지지자들과 뛰어난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다고 보았다. 루스벨트는 서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하도록 만드는 데 달인이었다.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결론을 도출해 내라고 다그쳤고, 결국 이들은 타협을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았다. 루스벨트는 상당히 인간적인 면이 강했던 대통령이다. 특히 의사소통 능력이 탁월했다. 매주 일요일 대국민라디오 담화, 이른바 ‘노변정담’이 대표적이다. 국민들은 경제건 전쟁이건 루스벨트만 믿고 따르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또한 뉴딜 정책이 실패라고 보는 사람들도 루즈벨트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는데 이 이유로는 변화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이를 솔직하게 알리고 대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민 혹은 주위의 인재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했기 때문에 신뢰를 얻게 되었다.3. 제2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은 뉴딜 정책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뉴딜 정책은 반쪽의 성공에서 완전한 성공으로 이루게 한 것에 2차 세계대전이 큰 원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루즈벨트의 소통의 리더십은 발휘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럽전선에 아이젠하워장군을 파견하여 영국군, 프랑스레지스탕스들을 비롯한 연합군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고 태평양전선에서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군을 요격하기 위해서 맥아더장군을 태평양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연합군을 간접적으로 지휘하였다. 그 결과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얄타체제라 불리는 흑해연안의 휴양도시인 얄타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수상, 소련 스탈린이 모여서 회담을 벌여 추축국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공감을 이끌어 냈던 것이 그것이다.4. 리더십 평가루즈벨트의 핵심역량은 탁월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는 여러 채널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명한 노변담화(fireside chat)였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새로운 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직접적인 연설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좋은 효과가 있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루즈벨트는 진실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실체가 없는 환상에 빠지지는 않았다. 환상에 빠질 경우, 정부와 그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이 깨지고, 무엇보다 국민이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은행권 위기에 관한 노변담화에서 그는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긍정적인 내용이 부정적인 내용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국민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가 만들어낼 수 없는 기적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려 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재임기간 중에 세계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를 겪었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33년 3월 4일 첫 취임식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에 휩싸여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막연하고 이유도 없고 정당하지도 않는 두려움입니다.”라고 말하며 현실적인 확신과 낙관주의를 발산하며 취임했다. 막연하게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움의 실체를 알고 하나하나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아 1500만 여명이 실업상태에 빠졌고,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연쇄도산으로 광범위한 공포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경제 프로그램보다 자신감 회복이 경제 불황 극복에 급선무임을 루즈벨트는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져오는 끝없는 불안과 패배주의가 바로외쳤다.
    사회과학| 2008.07.13| 7페이지| 2,000원| 조회(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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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인과 된장
    현대인과 된장Ⅰ. 머리말Ⅱ. 된장의 영양성분과 신체 내 효과 분석1. 콩의 영양성분2. 된장의 성분과 체내기능3. 된장의 항암효과Ⅲ. 맺음말현대인과 된장 1.hwpⅠ.머리말예로부터 된장은 우리밥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된장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원전 3세기에 쓰인 중국의 ‘주례’라는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장에는 ‘해’와 ‘혜’로 나눌 수 있다. ‘해’는 짐승고기나 물고기를 가리지 않고, 이것을 햇빛에 말려서 고운 가루로 하여 술을 담그고 여기에 조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잘 섞어 항아리에 넣고 밀폐하여 100일간 어두운 곳에서 숙성시켜 얻은 것이며, ‘혜’는 재료가 ‘해’와 같으나 청매즙을 넣어서 신맛이 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처음 발효시킨 장은 고기로 담근 중국의 장이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콩을 재료로 하여 만든 우리의 장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히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살펴 보면 ‘고구려인은 장 담그는 솜씨가 훌륭하다’, ‘발해의 명물은 책성에서 생산되는 된장’ 이라는 기록이 나와 그 솜씨가 중국에까지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 중에서 된장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인데 그 내용을 살펴 보면 신라 신문왕 3년(683년)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면서 폐백품목이 15수레 쌀, 술, 기름, 꿀, 포, 식혜를 비롯하여 간장, 된장 등이 135수레···라고 적혀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신라시대 초기에 이미 간장, 된장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현종 10년에는 거란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된장을 나눠줬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문종 6년(1052년)에 개경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매주를 나눠 줬다는 기록으로 보아 장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식품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장을 담그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황보유방’을 살펴보면, “콩 1말을 무르게 삶아 밀 5되를 볶아 함문조사에서 된장찌개는 인기메뉴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을 만큼(1위 김치찌개 14.2%, 2위 비빔밥 13.2%, 3위 된장찌개 7.4%, 직장인 1066명 대상, 2007.10.31, 조사기관 취업포탈 커리어) 지금도 한국인이 많이 섭취하는 것은 바로 된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된장은 과연 어떠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우리 몸에 들어와서 어떤 효과를 내는 것일까? 또한 된장은 알려진 것처럼 완벽한 식품이며 단점은 없는 것인가?본 보고서에서는 한국인들이 많이 섭취하는 이 된장의 영양과 효능에 대해 살펴보고 과연 된장을 제대로 섭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된장의 영양성분과 신체 내 효과 분석1. 콩의 영양성분된장의 주재료인 콩은 그 구성성분 중 약 40%가 단백질이다. 콩의 단백질은 그 질이 매우 뛰어나 일명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 부른다. 우리 몸의 성장과 건강유지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생체물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콩성분의 25%를 차지하는 탄수화물은 불용성 탄수화물로서 섬유소와 반섬유소, 펙틴을 지니고 있다. 콩껍질 속의 대부분에는 섬유소가 들어 있으며 반섬유소와 펙틴은 세포벽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물질들은 식이섬유라 불리면서 최근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콩기름에는 다량의 불포화 지방산이 함유되어 있다. 특히 콩속에 들어있는 인지질의 일종인 레시틴은 몸 안의 중요한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막의 주성분으로 최근 크게 각광받고 있는 물질이다. 콩은 다른 곡물에 비해 비타민B1과 비타민E를 많이 함유하고 있다. 또한 수용성 비타민과 지용성 비타민이 골고루 들어 있어 영양학적인 면에서도 바람직한 식품이다. 콩나물은 콩에 있는 올리고당이 비타민C로 환원되면서 좋은 비타민C의 공급원이 된다. 또 지용성 비타민인 비타민A는 베타 카로틴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정제 과정 중에 대부분이 파괴된다. 비타민E, 즉 토코페롤은 노화를 막는 항산화제의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성분이다. 콩의 무기질에는 포타슘되면서 생기는 성분이다. 올리고당은 인체 내의 소화효소에 의해 분해되지 않아서, 장까지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올리고당은 인체에 유익한 유산균 비피더스균의 좋은 먹이가 되므로 비피더스균의 증식을 돕고 장을 깨끗하게 해주며, 변을 보다 쉽게 볼 수 있는 효과를 준다. 따라서 꾸준히 섭취했을 경우 신진대사가 원활히 되며 결장이 좋아져 변비와 치질 예방에도 큰 도움을 준다.단백질 같은 경우에는 된장의 단백질은 콩보다 약 30% 이상 몸에 흡수가 더 잘된다. 단백질은 우리 몸의 근육과 뼈를 구성하여 성장과 체격을 유지하게 한다. 된장은 콩에 적당한 농도의 소금을 가해서 미생물의 작용으로 분해한 발효식품이기 때문에 콩의 성분들을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콩은 100g당 단백질의 양이 38g으로 쇠고기의 2배가 넘을 정도로 단백질의 함유량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된장의 단백질 양은 콩보다는 적지만, 콩은 몸에 흡수되는 단백질의 비율이 낮은 편이다. 하지만 된장은 콩이 발효되면서 큰 분자의 영양소를 잘라 사람들이 소화하기 쉬운 영양소가 되기 때문에 콩을 그냥 먹는 것보다 된장을 먹는 것이 30%이상 몸에 흡수가 더 잘된다.지방은 주로 에너지원으로 이용되면서 중요한 인체의 장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된장에는 콩의 지방 성분이 발효되어 나온 리놀레산이라는 성분이 있다. 리놀레산은 우리 몸속의 나쁜 콜레스테롤(LDL)을 줄여 혈관을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항암효과를 높이는 기능도 있다. 콩으로 만든 식품을 지속적으로 먹으면 혈중 콜레스트롤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람도 수치가 낮아진다.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1972년부터 콩의 효능을 검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통상 혈청 콜레스테롤치가 3백이 넘는, 즉 유전적으로 콜레스테롤치가 높은 사람들에 대해 고기 및 유제품 대신 콩을 먹게 했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 혈중 콜레스테롤치는 물론, 인체에 해로운 LDL 콜레스테롤이 15~200% 정도까지 낮아졌다. 콩을 먹으면 인체에 유익한 HDL 콜레스테롤이 늘어나 관상동맥성 심장이소플라본이 존재하고 있다. 이소플라본의 유도체는 일명 식물성 에스트로겐으로 뼈의 재흡수를 막고 뼈를 형성하여 여성의 골다공증도 예방할 수 있다. 버섯 중에는 Vitamin-D가 풍부해 칼슘의 흡수를 돕고 뼈와 이를 튼튼하게 하는 작용이 있어 골다공증 예방에 매우 유용하다. 장기간의 인공 에스트로겐 요법(HRT)이 유방암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르자, 미 국립보건원(NIH)에서는 섬유질, 단백질이 풍부한 콩으로 된 음식을 자주 섭취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미국이 콩의 위력을 발견해낸 것은 날씬하고 성인병이 적은 동양 사람들의 식생활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부터였고 , 콩을 먹지 않던 미국에서의 유방암 발생률이 한국의 10배 정도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였다.동물실험에서 이소플라본을 포함하고 있는 콩단백은 유방암의 형성을 억제하였다. 폐경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이소플라본을 포함하고 있는 콩단백은 유방암과 같은 호르몬 의존성의 질병을 예방하는 대안으로 이용 될 수 있으며 폐경후 여성에서 인공 에스트로겐 대체요법을 위한 사용 가능성이 연구되고 있다. 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보맨그레이 의대 연구진은 미국 심장협의회에 제출한 임시 보고서에서 호르몬 대체요법에 발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인공 에스트로겐의 대체가능 물질로서 콩에서 추출한 호르몬을 시험한 결과 콩이 중.노년기 여성들의 폐경 증상 및 골다공증치료에 기존의 호르몬 요법보다 훨씬 효과적인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콩에 풍부한 이소플라본은 폐경기 증세(건망증, 불안, 발한, 안면홍조, 골다공증, 심장질환 등)와 암의 예방을 위해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의 하나인 간은 섭취한 영양소를 여러 곳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간의 기능이 나빠지게 되면 영양소의 축적이 일어나서 비대해질 뿐만 아니라 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져서 간염이 되기 쉽고 각종 간질환의 원인이 된다. 재래된장의 간 기능 촉진효과는 최근에 밝혀졌으며 간 혈전을 녹여 혈전에 혈액이 흐르는 것을 원활하게 도와주어 성인들의 건강에도 좋다.우리 된장에서 나오는 특수 단백질이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혈전을 녹여주는 효과가 있으며 이 효과가 일본의 낫토보다 3~4배, 심지어 인체에서 생성되는 혈전분해 단백질인 플라스민보다도 4~5배 뛰어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된장은 식욕을 돋구는 음식인 동시에 소화력이 뛰어난 식품으로서 음식을 먹을 때 된장과 함께 먹으면 체할 염려가 없다. 민간요법에서는 체했을 때 된장을 묽게 풀어 끓인 국을 한 사발 먹으면 체한 기가 풀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된장은 비만에도 탁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된장, 비만억제에 효과 탁월”부산대 박건영 교수팀, 쥐 실험결과 된장 >쌈장 >고추장順으로 효과 높아된장이 비만억제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특히 된장은 비만 억제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진 고추장보다 효과가 훨씬 뛰어나고, 고추장과 된장을 섞어 만든 쌈장의 효과도 고추장보다 높다는 것이다.23일 부산대 식품영양학과 박건영 교수팀에 따르면 143g짜리 실험용 쥐에 30일간 돼지기름 등 고지방 음식을 하루에 19g씩 먹인 결과 체중이 287.4g으로 늘어났으나, 된장 1.9g을 섞은 고지방 음식 19g을 먹인 쥐의 체중은 246.6g에 불과했다.또 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쌈장을 1.9g 넣은 고지방 음식을 먹인 쥐는 258g이었으며, 고추장1.9g을 함께 먹인 경우는 263.1g으로 측정됐다. 이들의 체중은 모두 고지방 음식이 아닌 일반음식을 먹인 쥐(269.2g)보다도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실험용 쥐의 간 무게도 고지방 음식만 먹인 쥐는 11g이었으나, 고지방 음식에 된장을 먹인 쥐는 8.7g이었고, 쌈장과 고추장을 추가한 경우도 각각 9.4g과 9.6g으로 나타나 된장이 항비만 효과는 물론 내장의 지방축적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또 간의 콜레스테롤 함량도 고지방 음식만 먹인 쥐는 가정 체중 100g당 66.3g이었으나 된장을 추가하면 48.4g으로 줄어들었고, 한다.
    생활/환경| 2008.07.13| 9페이지| 2,000원| 조회(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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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문화 탐방 보고서-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방을 통한 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
    The Silk Voyager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방을 통한 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 해양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테 마 : 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 탐방을 통한 동남아시아 이미지 제고- 해양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팀구성 : The Silk Voyager방문국 : 태국(방콕, 아유타야), 캄보디아(시엠립),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 멜라카)제9기 해외 봉사 ? 문화 탐방목차머리말Ⅰ. 태국Ⅱ. 캄보디아Ⅲ. 말레이시아맺음말머리말동남아시아는 동서 교류의 중심지로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만나는 교차로였다. 양대 문화는 해양 도시로부터 강줄기를 타고 동남아시아 전체로 뻗어나갔다. 이런 지리적 배경 때문에 동남아시아세계의 특징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이번 탐방을 통해 알게 된 우리가 새로운 사실은 동남아시아 세계도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국,캄보디아,베트남,라오스,미얀마로(동남아시아 5개국) 이루어진 국가들과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말라카해협에 접한 국가들이 바로 그것이다. 크게 동남아시아 5개국은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건축양식이나 종교 등에서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된 특징이 있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앞에 국가들과는 차별되게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 그리고 중국문화가 융합되는 특성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이번 동남아시아 탐방을 통해 방문한 국가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해양실크로드 상에 있는 국가들이 다양한 여러 문명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옛 수도인 아유타야는 항구도시로서 해양실크로드에서 받아들인 여러 문화를 짜오프라야강을 통해 동남아시아 내륙으로 확산시켰다. 또한 이렇게 확산된 문화는 동남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메콩강의 강줄기를 타고 동남아시아 내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메콩강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톤레삽호 근처에서 성장한 제국인 앙코르제국은 바로 이러한 동서교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앙코르의 유적들은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문명의 정수를 이루는 것으로 베에서’는 태국인들이 국보 1호로 꼽는 높이 66cm, 폭 48.3cm 크기의 신비스러운 에메랄드 불상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15세기 에 조각되어 라오스 비엔티안에 있던 것을 라마 1세가 들여 와 18세기 말에 안치시킨 것이라고 한다. 녹색의 玉을 깎아 만든 이 불상은, 1434년에 태국 북부 치앙라이에 있는 한 사 원의 무너진 탑속에서 발견되었다고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발견 당시만 해도 이 불상은 흰 석고로 둘러 싸여져 있어서 그저 평범한 불상으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다가 탑에 벼락이 떨어져 석고가 벗겨지면서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자 비로소 불상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에메랄드 불상은 오랜 세월을 걸쳐 세 차례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이 불상은 일 년 중 세 번(하기, 우기, 건기) 계절에 맞는 승복을 입고 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태국 국왕이 직접 불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예식을 거행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건기였기 때문에 조금은 두터운 승복을 입고 있는 듯 했다. 또 이 불상은 “붓싸복” 이라는 태국 전통양식의 목각 옥좌에 가부좌를 한 상태로 법당 안 중앙에 아주 높이 안치되어 있어서 육안으로는 불상의 진정한 모습을 확실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에메랄드 불상은 태국 국민들에게 본존불로서 숭배되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카메라로는 촬영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법당 내 촬영 자체가 금지되어 있어 제대로 살펴보며 느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나가면서 본 태국인 왕궁 가이드는 코팅한 에메랄드 불상 사진을 아주 소중히 하는 듯 자랑하며 내보여 주기까지 했다. 태국인들이 불상을 얼마나 숭경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이 불상을 소유한 왕조에는 행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태국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덕분인지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반면 태국은 외세의 지배 없이 독립을 유지하며 순조롭게 발전해온 것 같다.에메랄드 사원과 태국의 왕궁은 연결되어 있어서 왕궁 입장으로 함께 관람이 가능했다. 사원과 연결돼 간 흉한 모습을 한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사원 중앙에 높이 솟은 프랑과 사방에 8개의 작은 프랑이 세워져있으며 작은 프랑 내부에는 벽화가 남아있는데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프랑 사이에는 12개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사원은 1767년 버마에 의해 파괴되면서 군대 주둔지로 사용되고 했으며 1987년 보수공사를 시작해 1992년에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쑤리요타이 쩨디 The Chedi of Queen Suriyothai아유타야 짜끄라빳 왕의 왕비였던 쑤리요타이는 태국에서 여자영웅으로 칭송 받는 여왕이다. 이는 1548년 버마의 침략에 대항에 왕을 보좌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해 왕을 구하고 목숨을 버리면서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다. 왕비의 죽음 이후 왕비를 위한 쩨디를 만들고 그녀의 유골을 안치했다고 한다. 최근에 태국에서 영화화돼 최고 흥행을 올리기도 했던 영화 '쑤리요타이'로 더욱 유명해졌다.짜오 쌈 프라야 국립박물관 Chao Sam Phraya National Museum로짜나 거리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으로 태국관광청 맞은편에 위치한다. 두 개의 전시관과 전통 태국 가옥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에는 아유타야 양식을 포함한 롭부리, 우텅, 쑤코타이, 드바라와티 양식의 불상과 목조 조각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왓 마하탓과 왓 프라람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사학도인 우리 팀에게 매우 흥미로운 전시물들 이었고 그 곳 역사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아유타야 탐방 후기우리들의 숙소가 있었던 방콕 카오산로드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아유타야는 사원을 제외하면 여전히 낙후된 지방 도시였다.아유타야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비교할 수 있는 도시이다. 우리는 아유타야를 두발로 직접 걸어 다니며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역시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도시 곳곳에 역사적인 유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유물과 유적들은 너무도 초라하고 더럽게 그대로 방치되어 안타깝기도 했었다. 그들의 불심은 우리들 스스로 불상위치한 쩨디는 코끼리가 탑을 받치고 있는 황금색 쩨디인 창롬 체디를 볼 수 있다. 왓 치앙 만에서 랏차파키날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위치한 작은 사원인 왓 람창에도 코끼리 상이 탑의 사방을 받치고 있는 쩨디가 있는 작고 이쁜 사원으로 코끼리 상이 사원의 상징처럼 사원 내부에 들어서 있기도 하다.왓 람창에서 나와 빠뚜 창 푸악과 인접한 프라뽁까옥 거리의 타이항공 사무실 건너편에 왓 후아 쾅이 있다. 왓 후아 쾅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원 아니지만 황금색의 쩨디가 아닌 전탑양식의 쩨디를 볼 수 있다. 사원은 신축중인 현대적인 건물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지만, 왼편은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된 우보쏫과 사원 뒤뜰의 가네쉬(코끼리 모양의 힌두신)가 쩨디와 함께 사원 내부를 구성하고 있다.사원을 나와 프라뽁까오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공원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다. 작은 공원에 위치한 건물은 구 시청으로 건물 바로 앞의 동상은 태국 북부의 주요한 세 명의 왕으로 파야오의 응앙무앙 왕, 란나의 멩라이 왕, 쑤코타이의 람캉행 왕 동상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워져 있다. 1296년 치앙마이를 건설한 멩라이 왕의 동상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멩라이 왕은 주변 국가와 더불어 태국 초기 왕조인 란나 왕조를 유지한 왕이기도 하다. 동상이 위치한 공원에서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랏차담넌 거리와 교차하는 곳에 있는 멩라이 사당이 시내 중심가로 새로이 옮겨진 것으로 벽면에는 왕의 생애를 묘사한 타일이 붙여져 있다. 멩라이 사당이 위치한 랏차담넌 거리와 교차하는 프라뽁까오왓 쩨디 루앙(Wat Chedi Luang)거리에 위치한 카페 칙을 지나면 나무로 만들어진 불당이 있는 왓 빤 따오는 공작새 조각이 인상적인 사원이었다.왓 프라 씽 (Wat Phra Singh)왓 빤 따오와 인접한 왓 쩨디 루앙은 60미터 높이의 쩨디로 유명한 사원이다. 쩨디는 1401년에 90미터 높이로 세워졌으나 1545년 지진에 의해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60미터 높이로 잘 보존 되어있다. 입구 왼쪽에의 특징은 넓은 이마. 내려감은 눈, 넓은 콧등, 끝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미소짓는 두꺼운 입술 등이다. 이 미소 때문에 ‘바이욘의 미소’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압쌀라바이욘은 3개의 층을 이루고 있는 구조이다. 첫 층과 2층은 그 벽에 부조가 조각된 회랑이 있는 사각형 구조이고, 3층 중앙 사원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비록 3층 구조이지만, 그속은 회랑이 미로처럼 되어 있고, 통로들이 실제로 구별이 힘든 층들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매우 복잡하게 되어 빛의 조절과 좁은 미로와 낮은 천정 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바이욘의 동쪽 입구에 들어서면 첮번째로 눈에 띄는 것이 바이욘 사원의 1층 외벽의 회랑이다. 이 회랑은 8개의 고푸라에 세워졌는데. 각 모퉁이와 각 변 중앙에 하나씩 있다. 이 고푸라는 모두 십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회랑들은 원래 목조 지붕으로 덮여 있었던 것 같다. 동쪽 고푸라의 앞에 있는 기둥에 조각된 압쌀라들은 바이욘 특유의 스타일로서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압쌀라의 춤 모양이 되풀이된 것이지만, 그 처리 방법이 모두 다르다. 전총적인 기법과 구성은 3명의 압쌀라들이 연꽃 밭 위에서 춤추는 모습이다. 주로 삼각형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의 압쌀라 무리가 양쪽보다 조금 크게 조각되어 있다. 배경은 무희들과 꽃들과 잎사귀 무의에 패턴이 융단처럼 가볍게 에칭괸 조각들로 섞여져 잘 어울리고 있다. 또 3명의 무희들이 통상 한 군을 이루지만 한 명이나 두명의 압쌀라만 이는 경우도 있다.코끼리 테라스코끼리 테라스앙코르 톰의 왕궁 정월을 마주보고 있으며 이곳은 왕궁 처였지만 실제로 왕궁은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코끼리 테라스에는 왕궁을 증축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왕궁의 중 개축은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코끼리 테라스는 그 길이가 300m가 넘는데, 바푸욘 사원에서 문둥이 왕 테라스까지 나위어져 있어 아주 깊게 부조되어 있다. 남쪽의 계단에있다.
    인문/어학| 2008.07.13| 24페이지| 4,000원| 조회(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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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잔티움 세계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의의 평가B괜찮아요
    비잔티움 세계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의의1.예루살렘의 문화유산 겟세마네 교회(사진출처:http://blog.naver.com/bss2079/60013519721)겟세마네는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감람산의 기슭에 위치한 동산으로 성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처형당하기 전날 예수가 이곳에서 최후의 기도를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로 인해 겟세마네 동산은 크리스트교도들에겐 성소로 인식되었으므로 크리스트교를 내세웠던 비잔티움은 이곳에 379년에 예배당을 지었다.예루살렘 지역이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었고 유대국가가 항상 외침에 시달려 왔었기 때문에 이 교회역시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어졌었다. 그 후 12세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십자군 원정군들에 의해 재건될 수 있었으나 십자군이 패배하고 예루살렘에서 물러나자 다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 이 교회는 1919~24년에 다시 완성되었고 16개 국가의 헌금을 모아 지어졌기 때문에 만국교회라고 불린다. 교회의 천정에는 그 국가들의 표지가 새겨져 있으며 교회 내부에는 예수가 그 자리에서 고뇌했었다는 바위가 놓여져 있으며,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예루살렘이라는 곳은 유대인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성지중의 한곳이고 예수가 활동하고 죽은 곳이라는 이유로 크리스트교도에게 또한 매우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무하마드 역시 이곳에서 승천, 일곱하늘을 돌아보고 왔다는 이유로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서도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성지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성지에 각 종교의 상징물인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럼으로 이곳 예루살렘은 각 시대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 의해 기독교적 문화가 생기기도 하고 이슬람의 문화가 번성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국가였던 비잔티움 또한 예루살렘을 간과하지 않았었다. 즉 성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자기 국가가 내세우고 있는 종교의 위대함을 부각시킬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국의 우월성을 내보일 수 있는 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2.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사진출처:http://cafefiles.naver.net/data4/2004)로마의 문명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퍼져나가 비잔티움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의 시작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서부터 시작된다. 위 사진의 개선문은 315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서로마, 동로마 통일을 기념하여 로마 원로회가 세운 건축물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 즉 비잔티움 오늘날의 이스탄불로 옮기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수도 이전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상업과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있다.콘스탄티누스는 312년부터 324년 까지 서로마에서만 통치했다. 그러나 324년 이후 그가 죽던 해인 337년까지, 그는 권력의 공유를 중단하고 제국을 재통합시켜 제국 전부를 지배했다. 기독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모든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거의 같은 노선을 따라 통치했다. 관료 제도가 강화되었고, 국가가 도시 거주자 및 농업 노동자의 이직을 물샐틈없이 막아냈기 때문에 사회는 카스트 제도로 경직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는 명색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한 순간도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궁정 의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고, 대게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이 행동했다. 그가 330년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도시 이름을 정한 것도 이런 그의 태도와 같은 맥락이다. (중략) 그리고 그 이동은 로마 문명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동방 지향적인 통신, 무역, 방어의 요충지로서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가 육지는 성벽으로 보호된 이 도시는 거의 난공불락이었으며,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한 로마 정부의 핵심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서양 문명의 역사1 번즈, 러너, 미첨 지음, 박상익 역, p.250)이렇듯 콘스탄티누스는 개인적인 이유와 당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정점에 올라 이제 쇠퇴의 길만 남은 듯한 제국의 모습에 개혁을 가하고자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동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 이유 또한 여러 설들이 존재한다.단순하게는 한 전쟁을 앞두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로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라는 꿈을 꾼 것에서 크리스트교의 국교화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당시 크리스트교도들의 전도들로 인해 로마제국엔 이미 많은 수의 크리스트교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크리스트교가 용인되자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는 것이 국가의 통일이나 정체성 등에 있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당시 유럽 어쩌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로마제국의 이와 같은 변화는 서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현재까지 서구 사회를 강력하게 이끌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유럽의 판도가 서쪽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까지 이동하면서 새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이슬람 세력과 끊임없이 부딪히면서도 이슬람의 발전된 과학, 지식 등을 유럽이 습득하여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러시아를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키면서 러시아 또한 비잔티움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국가로 남겨지게 된다.3.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사진출처: http://kr.img.blog.yahoo.com/ybi/1/dc/67/funnyblog/folder/1610411)위 사진은 건축 및 예술 분야에서 비잔틴의 가장 훌륭한 업적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 비잔티움, 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의 모습이다. 가장자리에 있는 4개의 뾰족탑은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인 투르크 인에게 함락된 뒤 추가된 것이다.(서양 문명의 역사2. 번즈, 러너, 미첨 지음. 박상익 옮김. p.304)이 건축물은 소아시아 출신의 두 건축가, 남부 리디아의 트랄레스 출신 안테미우스와 카리안 해안의 밀레투 출신의 이시도루스가 총책임을 맡았다. 기술자인 동시에 유능한 수학자였던 안테미우스는 세계 건축사에서 대담하고 독창적인 건축물 중 하나를 만드는 데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휘했다. 이 거대한 건물 안으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체인으로 지탱되는 것 처럼 보이는’ 돔을 둘러싼 창문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으며, 그 내부에는 여러 색채가 화려하게 섞여 있었다. 제국 각 지역에서 구해온 다채색 대리석이 벽을 덮었으며, 로마의 태양 신전에서 온 반암 기둥과 에페소스의 장관들이 선물한 초록색 대리석 기둥이 8개 있었다. (중략) 이 모자이크는 지금 모두 사라졌으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자이크는 성상 파괴운동(8~9세기)이 끝난 843년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도시로 읽는 세계사. 크리스토퍼 히버트 지음. 한은경 옮김. p.90~91)앞에서 보듯 성 소피아 성당은 비록 비잔티움이 투르크 족에게 함락당하면서 투르크족의 모스크로 이용되긴 하였으나 비잔티움 문화 더 나아가서는 크리스트교 전체의 가장 아름다운 문화 유산중에 하나이다.왜 많은 물질적 정신적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이런 성당을 건축하였을까. 이는 성당, 교회 등의 성전은 크리스트교를 보여주고 상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에 의해 사실상 멸망하면서 새로 유입된 종족들에게 로마 제국의 종교인 크리스트교를 알리기 위해 분명 성경에서는 우상을 만들거나 경배하는 것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상이나 성화 등을 만들어 그들에게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상징물들은 그 어떠한 설교보다도 설득력 있게 이민족들에게 다가갔고 서유럽에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민족들에게 크리스트교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크리스트교를 모르는 세계에 그들의 종교를 전도함으로써 타 민족 또한 로마의 시민, 비잔티움의 시민으로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 또한 이러한 목적에 부합해서 그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되어졌을 것이다.
    인문/어학| 2007.11.26| 5페이지| 1,000원| 조회(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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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귄터그라스 양철북
    양철북(Die Blechtrommel)독일인들에게 나치즘의 기억, 2차 대전의 기억은 어떤 것일까? 전 유럽,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놓은 책임은 독일인들에게는 돌이켜보기 조차 싫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파시즘은 ‘소수의 나쁜 그들과 다수의 결백한 우리’로 나누어지는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평가되어왔다. 즉 소수의 권력집단이 폭력과 강제를 행사해 다수의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했다는 논리이다. 이는 또한 전범재판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독일인들의 특히 일반 민중들의 전쟁에 대한 죄의식과 책임감을 어느 정도 약화 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히틀러나 괴링 등의 일부 권력자들에게만 전가 시킬 수 있을까? 히틀러와 나치당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으며 ‘제국수정의 밤’이나 타인종의 대량학살의 선두에 선 것은 나치당의 강제가 아닌 독일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 졌다. 물론 파시즘 정권의 교묘한 선동 술책들이 있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일반 독일 민중들이 단순히 ‘선량한 우리는 나쁜 그들에게 속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귄터그라스의 양철북은 바로 이 부분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귄터그라스는 작품에서 오스카의 시선을 통해 독일인들의 심리를 꼬집는다.작품의 시작은 단찌히라는 도시에서부터 시작된다. 단찌히는 실제로 귄터 그라스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오스카의 외할머니는 이곳에서 태어난 캬슈비안으로 도망자인 콜야이 체크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오스카의 어머니인 아그네스를 만나게 되고 아그네스는 폴란드인인 얀과(사촌오빠) 독일인인 알프레드 사이에서 오스카를 낳게 된다. 또한 오스카는 정신이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설정은 오스카가 주위 상황과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지성이 있는 수준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만든다. 또한 오스카는 세 살이 되는 해에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성장을 멈춘 행동은 어머니와 얀과의 계속되는 부정한 행동과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 성적인 욕망에 대한 역겨움에서 비롯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을 멈춘 오스카는 이제 아이의 몸과 어른의 지성을 가지게 되었다. 어찌보면 오스카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타자화 된 서술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는 그가 역겹게 느끼는 그 사람들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나치에 이용 당한다. 이러한 오스카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주변인물 들은 한심하게 표현된다. 그 들의 저녁만찬에서 나오는 대화나 쉽게 나치에 선동되서 열광하는 장면들은 아무런 의식없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오스카는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독일 민중들에게 경종을 울리듯이 양철북을 두드린다. 즉 오스카가 양철북을 치는 행위는 파시즘 정권에 선동되어가는 아무 의식없는 독일 민중들에 대한 비난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른들은 오스카의 양철북을 뺐으려고 한다. 하지만 오스카는 괴성을 질러 유리로 된것들을 깨뜨리며 양철북을 지켜낸다. 그렇다면 오스카에게 괴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어린 소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오스카에겐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런 그가 어른들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비난하거나 반항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양철북이다. 이 유일한 수단을 빼앗으려 할 때 오스카는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저항하는 것이다. 즉 괴성을 지르는 행위는 파시즘에 대해 비판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을 때 유리를 깨뜨리는 것처럼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고 정당해 보이는 파시즘을 부셔버리고 파괴시키는 의미라고 해석할수 있을 것이다.오스카가 전선을 떠돌다가 집으로 왔을 때 독일의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열광적인 나치당원이었던 알프레드는 자신이 나치였던 증거들을 불태우고 집에 걸어놓았던 히틀러의 사진은 다시 베토벤으로 바꿔놓는다. 알프레드의 죽음은 매우 비참하다. 나치당 배지를 러시아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삼켰다가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 하며 러시아군의 총에 죽게된다. 알프레드가 무덤에 묻힐 때 오스카는 다시 성장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양철북을 알프레드의 관위로 던져 버리고 자신도 뛰어들어 성장이 시작된다. 오스카는 왜 다시 성장을 시작한 것일까? 파시즘 정권은 끝이 났고 주변의 어른들은 죽었으며 남은건 새어머니(혹은 아내)와 동생(혹은 자식)뿐이다. 오스카가 이 들을 부양하기 위해 성장을 다시 시작한 것 일 수도 있겠지만 그 동안 그가 아이였던 이유로 인해 피해갈수 있었던 책임들을 이제부터 지고 가겠다는 것으로 해석 된다. 결국 전후 독일에 있어서 독일인들에게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겠다.양철북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할 것은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분법적인 시각, 즉 권력을 잡고 있던 소수의 악인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권력을 쥐고 있던 자들을 전범재판을 해서 처벌한다고 해서 끝이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파시즘이 대중을 기반으로 한 정권이었던 것처럼 책임은 소수권력층이 아닌 모든 독일인들에게 있고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방법은 단순히 처벌이 아닌 그들 스스로의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더 발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혹시 미래에 또 다시 출현할지도 모르는 파시즘의 광기를 막는데 더 큰 힘을 미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결국 귄터그라스는 양철북을 통해 모든 독일인들에게 그들 스스로 반성을 하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인문/어학| 2007.11.01| 3페이지| 1,000원| 조회(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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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프카 `심판`
    Franz Kafka『Der Prozeβ』David Hugh Jones 'The Trial'프란츠 카프카 『심판』목 차Ⅰ. 『심판』을 이해하기에 앞서1. 카프카의 삶과 문학세계2. 시대적 배경3. 심판에 대하여Ⅱ. 카프카 『심판』1. 등장인물2. 줄거리3. ‘심판 (Der Prozeβ)’ 과 ‘The Trial ’4. 작품연구Ⅲ. 『심판』이 주는 메세지1.카프카와 실존주의2.근대성의 몰락3.벗어날 수 없는 굴레Ⅰ. 『심판』을 이해하기에 앞서심판이라는 작품뿐 만아니라 카프카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카프카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언급할 필요성이 있다. 카프카의 모든 작품 안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부조리’는 그의 삶과 당시 유럽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장에서는 카프카의「심판」을 이해하기 위해 작품 외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1. 프란츠 카프카의 삶과 문학세계.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독일계 유대인을 아버지로 중산층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카프카의 남동생 둘은 어려서 죽고 세 명의 누이동생들과 함께 성장했다. 출생지 프라하와 독일계 유대인 중산층이라는 환경 요인은 카프카에게 특별한 영향을 주었다.40여 년의 짧은 생애는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굴곡이 없는 한결같은 소시민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프라하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여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 문학이나 사상에 대한 정열이 대단했으며, 이라는 장편도 그때에 씌어졌던 것이다. 또한 그때 만난 막스 브로트와의 친교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고 우울했던 카프카를 문단에 끌어들였고 카프카 사후에 유고를 발굴하고 지켜 전집을 출판하게 된다. 카프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형사 재판소나 민사 재판소에서 일하지만, 내성적인 그로서는 죄인에게 형량을 주는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 25세 때 평생의 직장이 된 노동자 재해보험협회로 일자리를 옮긴다. 그는 이곳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 자본주의의 그늘 아래서 발견한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군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저지르지도 않은 죄목에 대해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다. 정보국에서는 그의 유죄를 확신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자료뿐만 아니라 완전히 날조된 자료까지 동원하였고,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자료는 반드시 피고인에게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형법상의 규정마저도 무시해 버렸다. 그러다가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가 날조되었음이 밝혀졌고, 이 문서를 날조한 혐의로 체포된 장교가 형무소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사 재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제야 좌파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재심 요구파에 합세하였다.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고등법원에 제출되어 심의를 받는 동안, 프랑스의 모든 국민들은 재심 찬성 혹은 반대로 갈라져서 격렬하게 대립하였고, 재심을 추진하는 정부에 대한 재심 반대파들의 불만과 폭동은 거의 쿠데타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들어 드레퓌스를 군사 재판에서 재심할 것을 명령하였고, 드레퓌스는 4년 반의 유배 생활 끝에 마침내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드레퓌스는 다시금 군 형무소로 돌아와서 재심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눈물로 호소했고, 그의 변호인들은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았던 장군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인 채 끝도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재판의 분위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갔다. 결국 드레퓌스는 대역죄를 범했다는 혐의가 그대로 인정되었고, 다만 ‘정상 참작’이라는 이유로 종신형 대신 금고 10년형이 부과되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얼마 뒤에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이러한 비상식적인 판결에 대해 재심 요구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심문을 받게 된다.요제프 K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결국무죄판결을 받지 못한 채 죽어 간다. 카프카 소설에서 한 문장 한 문장은 지극히 구체적이다. 묘사의 대상을 관념적으로 추상화시키거나 작가의 정서에 물들이거나 감성적으로 흐르는 일은 결코 없다. 언제나 대상은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건조하다. 일상적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요제프 K의 소송사건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심판은 하마터먼 잊혀질 뻔했던 미완성 장편소설이었으나 카프카의 유고를 친구인 브로트가 정리하여 1925년에 발표 하였다. 특히 이 작품은 카프카 문학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끊임없이 구속과 억압을 당하는 인간 상황에 대한 절규라고 볼 수 있다. 불가해한 상황에 처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부조리에 대항하는 외로운 투쟁, 최후의 발판조차 빼앗겨 설 자리와 자신의 지향점을 상실한 고독한 존재인 인간의 절규를 그렸으며 카프카 자신의 자전적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심판은, 현대인의 불안과 방황을 예견한 천재적인 작가의 세기말에 대한 투시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Ⅱ. 카프카 『심판』앞에서는 작품 외적인 부분으로 카프카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접근해 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심판의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David Hugh Jones 감독의 영화 'The Trial'과 함께 접근해서 작품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1. 등장인물주인공요제프 K작품도입부에서부터 일상세계의 틀속에서 독자에게 소개되는 주인공 성명에 관한정보는 요제프란 이름만 제공될뿐 성은 K라는 머리글자로 축소되어있다. 그 외에 주인공의 외적 삶에 대한 정보는 지방 출신이고 몇 년전부터 은행직원의 경력을 쌓아왔고 지금은 어떤 하숙집에 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서른번째 생일 전날까지의 삶은 정상적이고 평균적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서른번째 생일날 아침 갑자기 그의 일상적인 흐름은 완전히 뒤죽박죽 되어버린다. 결국 그는 작품의 첫 장에서 이미 그에게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K는 결국 법원이 원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난데없이 죄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K는 일단 기소당하고 나면 피고의 죄를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이법원에서 그러한 결정이 반복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K가 뒤늦게야 비로소 인식하게 된 법원의 현실은 작품의 초반부터 시간의 상징으로 통해 암시된다.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된 후 K는 처음엔 자기 나름대로 독자적인 행동으로 사건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전화로 K에게 걸려온 첫 번째 소환통보는 그가 법원에 출두해야 한날이 다음 일요일이라고만 지정하고 있을 뿐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시 전화로 문의할 의사가 없는 K 는 모든 법원이 평일 오전9시에 재판을 시작하기 때문에 자신도 지정된 일요일 9시에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 법원에 도착한 K 는 법원으로부터 1시간 5분전에 왔어야 한다는 질책을 듣게 된다, K 는 법원을 매수하기 쉬운 감시인과 멍청한 감시주임 소신대로 재판을 진행하지 못하는 예심판사 그리고 직급이 다른 여러 재판관으로 구성되어있는 하나의 방대한 조직체로 규정한다. 그들 외에도 법원 조직 속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수의 정리와 서기, 심지어 사형집행인들까지 고용되어있기 때문에 법으로 규정된 정의와 원칙이 지켜질수 없으며 따라서 죄도 없이 체포된 사람에 대한 모든 변호는 무의미하고 소용없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종합적으로 볼 때 작품에서 법원은 양면적인 모습을 갖는다. 법원은 한편으로는 일반인의 사적인 접근이 허용할 수 없을 만큼 높고 구속력 있는 법의 심급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본질이 본능적 충동성과 저급한 육체적 감각성에 의해 채워져 있는 현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2. 줄거리K는 생일날 아침 갑자기 죄목도 모른 채 체포된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생각했지만 차츰 피고의 심리에 사로잡힌다. K를 체포한 재판 조직은 보통의 재판조직과는 달라서 K에게 도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K의 행동방식 속에 반영되어있다. 이러한 무능력은 그의 작품에서 언급되는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요제프 K가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그의 눈에는 창녀 같은 인물로 보인다. 뷔르스트너양 같은 경우 이러한 인물의 성격에서 벗어나는 몇 안되는 여성중 하나이지만 K 는 그녀와도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보여주지 못한다.이 작품에서 카프카의 공간적인 삶의 상황은 대단히 비중 있는 역할을 차지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삶의 거의 대부분을 고향 프라하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의 도시의 인상도 이작품속에 반영되어있다. 지형적으로 굴곡이 심한 프라하는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 성과 성당으로부터 저지대의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공간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성당은 만남의 중심장소로 K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당은 결국 K 가 삶의 의미를 헛되이 추구하는 무대가 되고 만다. 프라하의 높고 낮은 지형적 대조 상황은 당시의 사회계층들과 권력상태에서도 반영된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법원건물을 찾아가기 위해 교외의 낮선 지역에 도착한다. 도시빈민노동자들의 주거지인 이 지역은 그곳의 비참한 일상적 현실과 더불어 K가 속해있는 시민적이며 안정된 삶의 세계와 뚜렸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노동자 재해보험공사로부터 인정받은 탁월한 업무능력 덕분에 군대 면제를 받은 것에 대한 카프카의 죄의식은 그해 1914년 8월에 집필하기 시작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의식 속으로 자연스럽게 전입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작품속에 담겨진 체포, 채찍을 휘두르는 정체불명의 남자들, 반항할 수없는 당국의 명령, 잔인한 살인 등의 모티브는 훗날 나치의 테러를 의미하기도 한다. 카프카의 개인적 경험에서 농축된 문제의식이 사건이면에 짙게 깔려있는 이작품은 1914년부터 1915년 사이에 씌여졌지만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한 문제와 맞닿아 있는 작품의 주제성과 그 해석의 다양성 때문에 오늘날의 독자에
    인문/어학| 2007.11.01| 18페이지| 2,000원| 조회(1,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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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몽주의 사조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
    계몽주의 사조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Ⅰ. 서론 - 서양 근대사상의 핵심 계몽주의Ⅱ. 본론 - 계몽주의 사조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1. 새로운 종교관2. 계몽사상이 신학에 미친 영향Ⅲ. 결론Ⅰ. 서론 - 서양 근대사상의 핵심 계몽주의알베르 소불(Albert Sobol)은 “프랑스 혁명은 역시 계몽주의의 딸이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위상이 어떠한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로 계몽주의에서 프랑스 혁명에 이르는 시기는 서양 근대사의 가장 큰 분수령을 이루는 시대)이며 그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서양 근대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었던 주역은 프랑스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계몽주의가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문화의 꽃은 프랑스였으며 또한 근대 시민혁명의 상징이 바로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근대사뿐만 아니라 그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계몽주의를 연구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시대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정신과 함께 17세기 과학적 발전을 통합하면서 소위 근대적 세계를 낳았다. 이러한 약 150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인간의 세계관은 가장 광범위하게, 또 가장 깊이 있는 변화를 겪게 된다. 계몽사상은 1713년 유트레히트(Utrecht)조약으로 스페인 계승전쟁이 종결된 때부터 1789년 프랑스혁명까지 전개된 서유럽의 포괄적인 정신 및 사회운동이었다. 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로크와 흄에서 시작된다. 18세기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은 17세기 이래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에 수립된 경험론과 합리주의를 받아 들여 근대 서구 사상의 개화기라 할 수 있는 소위 ‘이성의 세기’를 마련하였다. 1734년에 출판된 볼테르의 『철학서간』에서부터 시작되어진 계몽사상은 이어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1748)』을 지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히고, 절대왕정에 쐐기를 박았다. 또 디드로세기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이 제시한 종교 사상에 대해 칼 베커(Carl L. Becker)는 말하기를“(1) 인간은 날 때부터 타락한 것이 아니다. (2) 인생의 목적은 삶 그 자체, 즉 사후의 행복한 생활 대신 현세에서의 훌륭한 삶이다. (3) 이성과 경험의 빛에만 따를 경우 인간 은 지상에서 훌륭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4) 세상에서의 복된 생활을 위한 제1의 기 본적인 조건은 무지와 미신의 속박으로부터 인간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이고 기존의 사회 적 권위들로부터 오는 인위적 억압에서 인간의 육체를 해방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여 중세의 신의 관념과는 완전히 다른 18세기의 계몽 사상가들의 종교관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계몽 사상가들이 원죄설을 부인한 것과 천국의 생활보다 지상에서의 행복을 강조하였던 것을 보면 이들의 사고 속에 엄청난 인본주의와 현실주의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골드만은 “계몽 사상가들의 종교적 관념은 그들 자신의 종교적 범주에서 나왔다.”고 말하면서 이 시대의 종교론에 대하여 유력한 백과전서파의 무신론, 볼테르의 이신론, 루소의 마불리의 유신론(theism)의 세 종류로 종교의 형태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계몽주의 시대의 이신론자나 유신론자의 신은 단순히 전통에 대한 양보나 무지한 대 중에게 두려움을 주는 도깨비가 아니라 어떤 합리주의자 또는 ‘준 합리주의자(semi-rationalist)세계관의 내적 이론 구조의 본질이다...(중략)...계몽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무신론자, 이신론자, 유신론자 중 그 어느 것으로 부르건 간에 그들은 어떤 실증종교가 진정한 신앙으로 인정되거나 다른 종교에 대하여 우월한 어떤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이성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사실 계몽 사상가들이 종교에 대하여 나름대로 주장을 하였지만 당시 교회나 그리스도교에 대하여는 대체로 통일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자유, 평등, 정의, 관용이라는 근본적인 가치들과 개인의 이성에 입각하여 행동하면서 당시동질적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신에 대하여 이신론자들은 단순히 자연 종교로 돌아갈 것을 설교하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연 종교는 절대적이고 계시적인 세상의 온갖 종교보다 기원이 오래 되었고 또한 우수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이 원 종교는 심지어 기독교인과 유대인들로 포함한 지구상의 민족들을 편애하지 않는 보편적인 신에 관한 믿음을 주입시켰다. 그 신은 기적에 의하여 자연법칙을 뒤엎지 않고 질서에 따라 통치하며 스스로 합리적이고 선하기 때문에 도덕법을 반포하지만 신의 특별한 간섭 없이 그것을 준 행 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부여하였다. 이신론자들은 명백하게 신학보다는 도덕에 더 관ㅅ미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견해로는 계시로 나타나는 신들에 의해서 생겨난 광신, 미움, 그리고 부도덕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신적인 속성의 목록을 축소시키는 최소한의 신학을 유지하였다. 볼테르는 이신론자들의 신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그(이신론자)는 이런 원칙(즉, 신의 섭리) 안에서 나머지 우주와 연합하지만 서로에 대하여 반대 주장을 펴는 분파적인 요소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종교는 아주 오래 되었고 아주 널리 퍼져있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단순한 공경심은 세상의 모든 체제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민족이 이해하는 언어를 말하고 있다...(중략)...북경으로부터 카이언에 이르기까지 그의 형제들이 있으며 형제들 가운데에는 온갖 현인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종교란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에 관한 견해라거나 공허한 허세가 아니라 정의를 숭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그의 숭배의식이고, 신에게 복종하는 것, 그것이 교리이다.” )볼테르가 이런 말을 할 무렵에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의 섭리에 대해 심각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고 신이 세상을 창조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는지 질문하게 되었다. 볼테르는 『철학사전』에서 수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만물을 다스리는 법을 반포하였던 일반적인 대해 계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둘째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유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 이것들은 사회 윤리 및 영적 가치를 결정하는 지금까지의 삶의 양태와 가치 기준을 변화시켰으며 성서적인 세계관과 과학적인 세계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성서의 기록과 현대 과학이 충돌할 때 성서보다 과학을 선호했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과학의 탐구 결과를 수용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탐구 방법을 신뢰하여 성서와 종교 연구에 사용했다. 셋째로 비평주의는 모든 사실과 자료들의 확실성을 의심해 보거나 분석 또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성경 역시 재검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등비평이란 이름 아래 성경 비평이 시작되었다. 성경 비평은 기독교가 계몽시대의 새로운 학문과 학문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 넷째로 합리주의는 이성의 완전한 능력을 강조하여 이성을 최종적인 권위와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 역시 이성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태도이다. 이 결과로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기적 등에 대한 교리들이 문제시 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 파울루스(Paulus)는 기적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을 저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예수가 물 위로 걸어가신 것은 제자들이 잘못 본 것으로 부활은 예수가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 소생한 것으로 승천 기사는 예수가 정말 죽기 전에 한 고별 인사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합리주의를 신학에 도입하여 합리주의적 종교를 만든 것이 자연신론자들이다. 18세기의 자연신론과 자연종교는 종교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합리주의와 기독교 신앙 사이의 타협을 모색했다. 다섯째 관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계속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인간과 자연세계 자연적인 것과 초자 근거로 나란히 위치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성이 성경의 증거 앞에서 굴복해야 한다는 요구는 계시와 이성적 원칙들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관계에 있다는 확고한 신념과 계시를 이성의 참여 가운데 정당화시키고자 했던 소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2) 신학에서 자기 자신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추세와 함께 병행되었던 경향은 그것을 교훈적으로 생각하려는 것이었다. 근대적이고 이성적인 인생관에서 도덕은 종교보다도 더욱 직접적인 당면의 관심하였다. 훌륭한 도덕의 향상은 기독교의 주된 목표인 동시에 윤리적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순수한 본질로 간주되었다. (3) 신앙이 그 뿌리를 특히 인간의 이성에 새겨져 있는 제 원칙들 가운데 두고 있다는 생각은 개인주의적인 관념을 부추겨 놓았다. 즉 종교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문제가 되었고 그것의 확실성은 개인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4) 계몽주의 신학의 기본적 특징은 기독교 교리를 ”인간화(hummanize)하고 그것을 인간론 중심적인 구조에 적응시키고자 한 경향이었다. 신학에게는 인간의 복리를 증진 시킬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신학적 진리에 대해서는 그것이 공통적으로 인정된 이성적인 원칙들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가 각 모아졌다. 이렇게 세상 적인 목적들이 지배적인 것으로 인식됨에 따라 인간이 종교로부터 기대 할 수 있는 주된 유익(benrfit)이란 지상에서의 행복과 합리적인 도덕이었다.”)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계몽주의의 영향은 지대하였는데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의 권위와 기적의 가능성 문제 그리고 자연종교의 발전이 그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 과학의 발전 및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최고의 권위로 믿는 정통주의적 성경관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경의 권위가 문제시되자 그 변호자들은 진리의 보증으로 기적에 호소했던 반면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일상 사건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는 기적의 가능성을 자연질서의 규칙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에 근거하여
    인문/어학| 2007.04.28| 7페이지| 2,000원| 조회(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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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의 근대화 논쟁
    한국에서의 근대화 논쟁목 차1. 머리말2. 식민지 수탈론3. 식민지 근대화론4.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의 문제점5. 맺음말1. 머리말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45년까지 36년간 우리나라는 일제의 지배 하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로 1997년 이전까지 고도의 경제성장을 지속해 왔고 이는 놀랄만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급속한 경제성장의 동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러한 논쟁이 최근 몇 년 동안 식민지시기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우리나라 학계에서 한국근대사를 인식하는 주요 방법론은 ‘식민지 수탈론’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논의가 생겼다.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룬 일본을 비롯한 일본 식민지를 경험한 동아시아의 나라들(한국, 대만 등)이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이를 식민지 시기의 역사와 연결시키려는 주장이다. 이것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 한다.본 발표문에서는 한국의 근대사를 인식하는 방법론 중에서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론의 문제점과 반성할 점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2. 식민지 수탈론지금까지 역사학계에 있어서의 식민지시기에 대한 역사상은 ‘식민지 수탈론’으로 일제시기의 개발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수탈을 위한 개발이었으며 결국 이러한 수탈체계는 한국의 발전을 저해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그 연구시각도 대체로 ‘근대주의론’, ‘내재적 발전론’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일부에서 ‘근대극복론’도 제기되고 있다. 이중에서 근대주의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이 두 경향을 일반적으로 식민지 수탈론이라 한다. 물론 이 두 경향사이에는 근대변혁과저오가 민족해방운동 주체의 설정을 둘러싸고 뚜렷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근대주의론은 국민국가의 성립, 산업자본주의 공업화, 근대 시민사회 성립이라는 서구의 역사경험으로부 따라 갈리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 발전의 기본 동인을 안에서부터의 계기에서 구하고, 그 전개를 민족해방운동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이러한 연구경향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 지향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이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토대로 식민사관의 정체성과 타율성론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민족운동을 자주적 근대화의 기본 동력으로 주목하였으며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하였다.식민지 수탈론 에서의 역사인식을 대체로 요약하면, 먼저 개항이전의 조선후기사회가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맹아가 발생하는 등 역동적인 사회였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외압이 없었다면 순조롭게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좌절되었고 일제에 의한 민족차별과 수탈로 인해 생산력의 발전은 제약되고 그나마 성장의 과실까지도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이식자본주의 경제는 발전한 한편 민족경제권은 왜곡?축소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대다수의 민중은 정치적 종속과 경제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식민지 지배체제를 타도하지 않고는 근대화는커녕 민족의 생존조차 확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민족운동은 역사적 발전의 동인으로 평가?부각되는 것이다. 한편 식민지 지배의 유산은 오늘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민족의 분단, 억압적 국가권력의 형성, 정치적 파행, 친일파의 득세, 경제의 종속, 그리고 사대주의적 문화 등의 이면에는 모두 식민지 지배의 부정적 유산들이라는 것이다.이와 같은 근대사상은 한국사회의 민족자존의식과 반일정서에 맞물려 지금까지 역사학계의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였으며, 제국주의론?종속이론에 의해 이론적으로는 보다 정밀화되었다. 해방 후 식민사관의 극복을 최대과제로 삼아온 역사학계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한국근대사를 설명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의 자리를 구축해 왔다.3. 식민지 근대화론최넘어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패러다임임을 주장하고 있다.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의 ‘내적조건’을 살펴보면, 필연적으로 식민지시대의 경험과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식민지시대에 대한 재해석은 일본제국주의의 전체적 성격에 대한 재평가와 관련되어 있어 일제 통치의 특징을 원시적이고 폭압적인 수탈체제라기보다 전근대사회를 강력하게 해체시키고 근대적인 제도이식과 공업화를 통해 식민지 자본주의를 성립시킨 독특한 성격의 제국주의였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식민지시대를 해방이후 한국사와의 연속성에서 파악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80년대부터 미국의 한국연구자들 사이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국내에까지 확산되어 그 세력을 더해 가고 있다. 식민지 수탈론은 이들 연구자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식민지 수탈론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적인 연구들도 다소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사회에 대한 자생적인 자본주의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한국근대는 서구근대의 수용 내지 이식을 통하여 비로소 그 발전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식민지 개발자로서의 일제에 주목하고, 그 지배기간동안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근대적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식민지를 개발하였고, 그 가운데 한국인들은 일제의 개발에 자극을 받아 자기성장을 도모했다. 일제의 식민지 개발과 한국인의 자기개발로 식민지 한국사회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고도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상태에서도 주체적인 경제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민족해방 없이는 민족 경제의 예속과 왜곡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식민지 수탈론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이러한 식민지 시기의 개발경험과 성과는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즉 자본주의 성장의 뿌리를 일제시대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공업화정책 등이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단초라고 보고 각종 경제지표에서 잘제적 종속과 저개발의 역사적 원인이 되었다는 식민지 수탈론의 역사상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식민지 근대화론은 역사발전의 지표를 단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서만 찾는다. 그리고 근대로의 이행 발전의 기본 동력을 한국사회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고, 그 외부는 바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미국의 경제원조를 든다.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1980년대 동아시아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이 새로운 역사상의 변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로써, 중진 자본주의론이 제기되었다. 신흥공업국들의 출현으로 이제는 제3세계가 세계자본주의 경제와의 관계를 깊게 하면 할수록 종속과 저개발의 심화현상이 나타난다는 기존의 제국주의론이나 종속이론에도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이제 제3세계도 세계자본주의와 ‘대절과 단절’이 아니라 ‘협력과 참여’에 의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시도로써 동아시아사회 내부에서 발전의 동인을 찾으려는 시각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는 역사적 전통을 공유한 고유의 특수성이 ‘후발성 이익’을 흡수하여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특수성은 동아시아가 공히 소농사회라는 공통의 생산력적?문화적 기반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사회가 비록 자생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한편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학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이 국가주도의 성장전략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발전국가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는 비교사적 관점에서 동아시아 발전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 것으로 동아시아사회에서만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거쳤고 일제 식민정책의 특수성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제는 정치?문화적인 면에서는 억압하였지만,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전통국가를 해체하여 식민지 발전국가를 수립하여 국가주도의 발전지향적인 식민정책을 추대화론 논쟁의 문제점1987년 한?일경제사학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공동연구의 결과를 한국과 일본으로 동시에 발표하였다. 한국 민족주의는 반일 민족주의라고도 할 만큼 일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국민의 정서와 학계의 풍토를 고려할 때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1980년대 후반에 국내에 식민지 근대화론이 소개될 때만 해도 국내 역사학회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실증적인 연구를 토대로 목소리를 점차 높여오자 대응에 나섰다. 그 대응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일부 문제제기를 수용하여 역사학계의 방법론적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시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신식민지사관’이나 ‘식민지 지배 미화론’, ‘제국주의 옹호론’이라는 식의 전면적 비판을 가하고 식민지 수탈론의 기존 방침을 고수하는 시각이다.이에 대한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반박으로는 기존 역사학계의 근현대사가 ‘민족정기’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과정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내부에서도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발전론(중진자본주의론)이 여전히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면, 다른 한 분류는 식민지 자본주의 근대화의 전개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근대자본주의 또한 착취와 억압을 내포하는 생산체계라는 점에서 비판을 가하는 근대극복론적 접근이다.이러한 논쟁은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사이에서 벌어졌지만 논쟁이 상대주장 비판과 자기주장 정당화로 흘러간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논쟁을 통해 드러난 각각의 이론적 실증적인 문제점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 중 먼저 식민지 근대화론의 단선적?기원론적 접근법은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조선후기 - 식민지시기 - 해방 후 분단시기로 구분할 때 각 시기마다의 역사적 조건과 그 발전계기의 단계적 차
    인문/어학| 2006.12.03| 6페이지| 2,000원| 조회(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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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고대 문화와 야마토 국가의 성격
    일본 고대 문화와 야마토 국가의 성격1. 선사시대 문화(1) 조몬시대(繩文時代)조몬 시대는 약 1만년 전부터 B.C 3세기 까지에 이르는 시기로서 일본문화의 제 1시기이며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 단계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 이르러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변화는 토기의 사용이라 할 수 있다.조몬 토기는 새끼줄을 둘러서 무늬를 만든 일본만의 독특한 토기로서 다양한 형태와 정교한 모습을 갖고 있다. 토기의 제작 문양이 독특하고 다양하며 주술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데, 발견되는 지역도 훗카이도에서 오끼나와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다. 나가사키현 후쿠이(福井) 동굴과 애히메현 상흑암(上黑岩)에서 발견된 토기는 1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 최고의 토기이다.토기들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모양이 다양해지고 새끼줄의 모양도 복잡해지는데 마지막 시기에 이르면 가메가오까식 토기라 하여 조몬 토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큐슈 지역에서 발견된 토기는 한륙도 신석기 시대의 융기문토기나 빗살무늬토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후기의 양식인 소바타식(會畑式)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당시 대한해협을 가운데 두고 부분적인 상호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초보적인 형태의 군거생활을 하던 조몬인들은 나름대로의 종교형태가 있었는데 초기부터 발달한 정령 숭배(Animism)현상은 형태의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종교적 토기는 토우로서 주로 여성상을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다. 이 토우는 다산을 상징하며, 식물의 번식을 기원하는 제사도구로서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이빨을 뽑아내는 발치의 풍습과 이빨을 갈아 특수한 신분을 표시하는 풍습도 있었는데『삼국지 동이전』,『후한서 동이전』에는 왜인들의 발치(拔齒)풍습을 기술하고 있다.(2) 야요이(彌生)시대조몬 시대가 끝나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야요이 시대가 출현한다. 야요이 문화는 B.C 3C ~ A.D 3C에 이르는 기간에이 있다. 야유이식 토기는 큐슈 북쪽에서 시작해서 일본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② 금속기의 사용야요이 문화에서는 무덤에서 청동기 제품 등 다수의 부장품이 출토된다. 청동의 무기(武具)와 함께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유리제 곡옥(曲玉), 관옥(管玉)이 세트로 부장되어 야요이 문화의 특색을 보여주는데 이것들은 당시 왕이나 무녀들의 신성한 제사 주로 쓰인 도구였다. 청동제품 등은 주로 큐슈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발견되는데 점차 후기로 가면서 날이 평평해지고 대형화 된다. 평형동검(平形銅劍), 동과(銅戈), 동모(銅矛)등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으며, 그 외의 부장품으로는 동탁(銅鐸)도 있었다. 동탁의 용도에 대해서는 제기설, 악기설, 보기설 등이 있는데 동탁은 초기에는 소형이었으나 점차 대형화되고 철을 얻기 위한 제사의식에 사용됐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야요이 시대에는 철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나라현의 가라코(唐古) 유적에서는 철로 가공된 농기구가 발견되었고 사이도야마(齊?山) 유적지에서는 철도끼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철은 전적으로 한반도에서 수입된 것으로 판단된다.외부로부터 들어온 금속기의 사용과 제작은 사회의 질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금속기의 사용은 농업 생산의 양과 질을 발달시켜 생산력을 급증시켰고 국가를 형성시켜 나갈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했다. 또, 무기의 발달을 촉진시켜 지배계급들은 발달된 무기들을 가지고 외부적으로는 더 많은 생산물을 얻기 위해서, 내부적으로는 강화된 왕권의 유지를 위해서 피지배 계급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본열도 내에서는 큐슈지방을 중심으로 소국가들이 형성되게 되었다.③ 소국가의 형성이 소국들은 크고 강력한 규모의 국가 단위가 아니라 겨우 부족의 단계를 벗어나 극히 좁은 영토를 차지한 기본적인 정치단위였다. 5세기 전반에 범엽이 쓴 『후한서』를 보면‘--倭佐韓東南大海中 依山鳥爲居凡百餘國 自武帝朝鮮 使譯通於漢者三十許國 國皆稱王 世世傳統 期大倭王居邪馬?國--’ 이 기록을 보면 일본열도에는 B.C 2세기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전방후원분은 제일 규모가 크며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양식으로서 현재 약 2600여기가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일본열도의 독특한 양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 한반도 남부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고 있어 그 원류가 북방에 있음을 알 수 있다.전방후원분은 그 엄청난 크기나 모양의 특이성 등으로 인하여 관심을 끌고 있으며 대체로 천황릉으로 불리워진다. 직경이 300m 이상 되는 전방후원분이 적지 않은데 고분이 큰 이유는 내부적으로 인민을 통제하고 외부적으로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뒤쪽의 원형부분에는 시신을 안치했고, 앞쪽의 평평한 부분은 제사지낼 때 제단으로 이용된 듯하다. 원분 꼭대기나 방분 꼭대기의 중심부에는 집 모양의 하니와)를 세워놓고, 그 주변에는 사람이나 말, 또는 원통이나 항아리형의 하니와를 세워 놓았다. 하니와(墳輪)는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으로서 무덤의 주위에서 피장자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데 때로는 장송의식을 재현하고, 매장 당시의 모습 등을 그대로 남겨 일상생활, 매장방식, 문화형태 그리고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인물, 기마상 등의 하니와를 통해서는 당시 무사들이 사용한 무구와 의복 내지 전투력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집모양을 통해서는 당시의 주거형태를, 배 모양을 통해서는 선박의 발달을, 악기모양을 통해서는 당시의 음악문화를 알 수 있다.고분문화는 불교의 도입을 계기로 질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기는데 불교의 수용연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6세기 중엽으로 인정된다. 불교의 수용 이전과 이후의 일본열도는 신앙형태와 논리구조는 물론 외적으로 드러나는 문화형태까지도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고분문화의 담당자나 축조한 사람들의 정치·문화적 성격도 다르므로 시기 구분 역시 불교의 도입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눈다. 그러나 특징을 좀더 세분화시켜 구분할 경우에는 3시기로 나눈다. 시기적으로나 문화의 양 및 질로 볼 때 흔히 이해하는 고분문화는 전기 혹은의 형태를 벗어나 긴 함형의 석관을 사용하기 시작한다.고분문화의 성격변화는 특히 부장품의 내용에서 확연히 달라지는데 전기의 부장품들은 주술적이고 사제적인 성격인데 반하여, 이 시기의 것들은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동경, 옥제품 외에도 관, 무기, 갑주 등의 문구가 출토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피장자의 성격이 바뀌었거나 말과 관련된 신문화가 수입되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부장품의 내용이 한반도의 것과 유사한 것은 수입된 신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덤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지고, 무덤의 주위에는 인물이나 동물, 혹은 집 모양의 ‘하나와’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 위엄과 권위를 더해준다. 닌도꾸 천황릉으로 알려진 다이세이 고분, 미야자키에 있는 사이도바로 고분군, 아까야마의 스꾸리야마 고분 등은 이 시대의 산문이다. 이 고분들은 모두 대형 고분들로서 특히 다이세이 천황릉은 전장의 길이가 486m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고분이다.또한 중기에 거대한 고분이 대략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시기에 야마토 조정의 통일왕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기 고분은 방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왕권이 성립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5세기를 통하여 고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야마토 조정의 지배가 확대되면서 각지의 호족들이 지방관으로서 그 지배하에 편입되어 갔음을 반영해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ⅲ) 후기 : 6~7세기이 시기에는 백제계 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그 문화 및 불교를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대중국 교섭 등을 활발히 하면서 고대국가를 확립해가는 시기이다.이때가 되면 이미 고분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진다. 고분의 전국적인 분포는 고분문화의 전반적인 보급과 함께 고분축조 능력을 가진 정치집단의 성장이 전국적으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즉 일본열도의 개척이 서부 일본이라는 한정된 지역을 벗어나 광범위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열기 말에서 6세기에 걸쳐서 키나이(畿內)지역에서 야마토 정권이 형성되고 성장하면서 일본 열도를 통일해간다. 또, 대외적으로는 한반도의 문화수입을 통해 정치질서를 개편하고, 국제질서로의 편입을 위해 독자적인 대중국 교섭을 시작한다.야마토 조정의 통일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씨성제도의 실시씨성제도는 야마토 조정의 대표적인 정치?사회조직으로서 그 이후 일본 사회조직의 근간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원시사회에서 보여지던 혈연공동체적 사회의식이 붕괴되고 활동공간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조상을 가진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에서 집단을 이루고 제사를 중심으로 동족단을 구성했다. 이 동족단(同族團)을 우지(氏)라 부른다. 우지는 일종의 동족집단으로서 혈연적 유대를 갖고 있는데 이 집단의 장을 우지노가미(氏上)라고 하고, 구성원을 우지비도(氏人)이라 한다. 우지들은 모두 기바네(姓)와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도 갖고 있었는데 거주지명에 따라 이시가와우지(石川氏), 가쓰라기우지(葛城氏), 혹은 조상의 이름을 따라 구메우지(久米氏), 세습하는 직업명을 따라 나가도미우지(中臣氏), 인베우지(忌部氏), 모노노베우지(物部氏)등으로 했다.야마토에는 대화천을 가운데 두고 자리를 잡은 이들 가쓰라기(葛), 헤구리(平群), 와니(和珥) 등의 우지들이 혈연이나 지연을 통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이들 대단위의 우지들은 점차 소규모의 유지들을 병합시키고, 먼 곳에 있는 우지들은 무력 또는 회유의 방법을 사용하였다.이 같은 과정을 거쳐서 야마토 조정은 크고 작은 우지가 모여서 형성된 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우지가 천손족(天孫族)이다. 그러므로 이 우지의 가장인 우지가미는 모든 우지의 가장으로서 정치적인 수장의 자격을 갖는다. 이를 오오키미(大王)라 한다.② 경제? 정치조직의 정비오오키미(大王)를 정점으로 한 정치조직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뉘어진다. 중앙에는 오오키미 밑에 오오무라지(大連)와 오오오미(大臣)를 두었는데, 이들은 중앙의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가
    인문/어학| 2006.12.03| 8페이지| 2,000원| 조회(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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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3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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