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미술들어가는 말얼마 전 덕수궁미술관에서 ‘이쾌대’의 작품전시가 열렸다.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고, 미술전시도 종종 다니는 탓에 알고 있는 작가도 꽤 많다고 생각했건만, ‘이쾌대’라는 화가는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이쾌대가 월북한 작가라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야 찾아보게 된 그의 그림들은 낯이 익으면서도 이질감 가득한 그 무엇이었다. 그의 그림이 주는 묘한 이질감과 동질감의 공존은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그것을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소화시켜 창작한 그만의 작품세계의 특징일까 아니면 그가 살았던 시대 북한 이데올로기 반영의 결과일까. 본 글은 이 질문을 바탕으로 쓰여졌다.한국의 근∙현대 미술에 있어 북한이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낄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그 존재를 인지를 하고는 있으나 수면위로 떠올리는 것은 터부시되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북한미술에 대한 이런 우리의 인식 정도를 ‘꼬리뼈’에 비유하고 있다. 퇴화되어버린 꼬리뼈처럼 다치기 전까지는 잘 인식하고 있지도 않고 잘 들여다보고도 하지 않으려는 그런 우리 몸의 일부라는 것이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흔히 멀고도 가까운 나라를 일본으로 꼽고 있지만, 실제 그보다 더 멀고도 더 가까운 곳은 북한이다.한 나라 혹은 문화집단의 내부사정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줄 수 있고, 또 구성원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예술이다. 예술의 형태는 문자언어로 그 이해가 보다 쉬운 문학, 그리고 그림, 무용, 음악 등이 있는데, 본고에서는 필자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미술을 통해 북한예술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통일여부를 떠나서 멀고도 가까운, 소위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이산가족상봉시기에만 유난히 ‘동포’임을 강조하고 그 사실을 되새기게 되는 사람들 나라의 속살을 북한미술을 통해 조금이나마 들춰보고자 한다.이하에서는 먼저 북한에서 미(美)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북한의 미술교육과 미술계의 체계에 대해 간략히 및 장식미술, 영화미술, 무대미술 등으로 나누어진다. 회화는 그 재료와 기능에 따라 조선화, 유화, 벽화, 출판화 등으로 나뉘어진다.위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에서의 미술개념은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것보다는 훨씬 범위가 좁고 그 기능이나 목적을 따라 분류한 종류도 제한적이다. 특히 미술이 ‘인민들의 사상 정서 교양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을 명시한 점을 보면, 미술을 북한 체제유지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기능토록 하고 발전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북한의 미술교육 및 미술단체북한에서 전문예술인 교육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평양에 주요 예술대학들이 설립되면서부터다. 이 중 미술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곳은 평양미술대학으로 1947년에 세워진 평양미술전문학교를 전신으로 한다. 주체미술의 발전과 창작을 위해 미술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특히 조선화 연구와 창작 보급에 중점을 두고 있다.평양미술대학의 설립목표와 방향은 1954년 김일성이 미술가들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교시를 통해 결정되었는데, 그것은 ① 주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화를 토대로 하여 미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조선화과를 확장하고 조선화 교육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② 미술에서 민족적 특성을 구현해야 한다. ③ 당과 혁명에 이바지하는 미술 인재들을 키우는 교수사업을 강화하며, 교원들의 정치 실무 수준을 높여야 한다. ④ 대학생들에게 화구, 학용품을 충분히 보장해주고, 대학의 물질적 토대를 꾸려야 한다. ⑤ 미술을 대중화시키는 문제 등으로 북한 미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었다.대표적인 미술단체로는 1953년 창립된 조선미술가동맹이 있으며,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하부조직이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개별적인 존재로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전문인으로서 인민에게 근로 봉사하는 것이 임무이다. 창립 이후 정관철이 1984년까지 30여년 동안 위임장을 맡았다. 북한의 모든 미술가들은 조선미술가동맹의 회원으로 등록되어 매월 봉급을 받고, 대신 일정 수의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북한미술의 1957년 5호에 개재된 카프특집을 보면 카프미술을 북한미술의 기원으로 상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구체적으로, 조선미술가동맹의 위임장을 맡고 있던 정관철의 다음 서술을 보면 카프미술을 통해 북한미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카프는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선진적인 작가, 예술가들의 단체였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사회주의 레알리즘에 의거하면서 창작 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바로 카프에 소속한 조각가 김복진, 그라휘크화가이며 무대미술가인 정하보, 강호, 김일영, 윤상렬, 추민, 리상춘을 비롯한 미술가들이였다. …… 이와 같이 1920년대에 싹튼 조선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은 …(중략)… 민족 미술 유산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하여 쏘련을 위시한 세계 선진적 창작 경험들을 적극 섭취함으로써 가일층 확고하게 되였으며 새로운 발전 단계로 들어섰다.1932, , 이상춘 1938, , 이갑기그러나 강호가 1957년 에서 지적하였듯이 초기의 카프미술창작은 조각 한 부분에 국한되어 있었고, 1930년대 이후 강호를 주축으로 무대미술이 강조되기는 했으나 결국 북한미술의 정통성 논의에 있어 카프의 위상은 1950년대 이후에는 크게 축소되었다. 당시에는 “로동계급의 당의 올바른 지도가 없었고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이 강화된 사정으로 하여 순탄하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같은 시기, 카프미술에서 북한미술의 시원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던 북한은 그와 동시에 평양을 중심으로 소련미술의 미술이론과 개념을 수용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미술건설’이라는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소련의 선례를 철저히 모방하게 된다. 이 때 소련과의 교류를 통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이다. 본래 사회주의의 미학은 순수한 미적 가치에 역점을 두었던 관념적 미학에서 탈피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고, 사회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예술개념을 대중중심의 예술로 변화시키려고 하였던 것인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사냐하면 오직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이 시대의 올바른 예술이기 때문이다.”는 김일성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미술의 원칙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이고, 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이 구현된 장르는 ‘조선화’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따라서 조선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사회주의리얼리즘스탈린의 문화담당 최측근으로서 스탈린 집권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던 즈다노프(Andrei Alexandrovich Zhdanov:)가 그 입안자로 알려져 있는 소련 사회주의리얼리즘의 테제는 “내용에서 사회주의적이고 형식에서 민족적인 것”이다. 북한에서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초기 소련과의 미술교류를 통해 1949년 에 실린 아·롬므의 글 「쏘련의 풍속화」에서 처음으로 본격 소개되었고, 이후 김일성이 1966년 10월에 발표한 교시 에서 북한미술창작의 대원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같은 교시에서 김일성은 미술이 혁명의 무기라는 것을 강조하며 “조선화를 토대로 하여 우리의 미술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자”고 천명했다.이와 더불어 사물을 추상적인 것이 아닌 사실적인 표현기법으로 나타내는 사실주의를 강조하는데, 즉 사실주의야말로 객관적 현실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진실하게 반영하는 창작방법이며, 참다운 조형미와 고상한 미술형식은 오직 시대의 요구와 인민대중의 지향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창한다. 체제선전과 인민선동 메시지를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추상화보다 사물이나 인물을 사실대로 그린 사실주의화법이 보다 효율적일 것임에는 분명할 것인 바, 김정일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 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추상파화가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고도 무엇을 그렸는지 모릅니다. 어떤 추상파화가는 사람들이 자기 그림을 보고 무엇을 그렸는가고 물으면 그림을 그리기 전에 물어보아야지 다 그려놓은 다음에 물어보면 어떻게 아는가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추상파가화가들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도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면 모를수록 그 그림을 성과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자 했다. 예를 들어 조선화에서는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화면에서 중심인물로 강조되어 그려지고 마치 ‘아버지’의 모습처럼 밝고 온화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한편, 여성의 묘사는 보통 어린아이와 함께해 모성애를 강조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조선화는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한미술의 주축으로서, 국가운영의 한 도구로서 운용되는데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조선화의 주제가 상기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표현대상에서 관념, 즉 추상적인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맺음말살펴본 바와 같이 카프미술, 항일혁명미술, 그리고 조선화라는 북한미술의 흐름에 있어서 카프미술과 항일혁명미술, 그리고 항일혁명미술과 조선화는 시기별로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이나 등에 기고된 글들을 보면 북한 나름대로의 북한미술사조를 정립하기 위해 카프미술과 항일혁명미술을 조선화에 앞세워 북한미술사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비록 홍지석의 논문에서 주지하였듯이 1950년대에는 카프미술을 북한미술사의 첫 페이지로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의 정황을 살펴보건대 카프미술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북한미술사조의 흐름은 비록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높은 수준이라 할 수 는 없다 하여도 항일혁명미술을 시초로 하여 ‘조선화’라는 미술로 정착,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아울러 사회주의리얼리즘 속에서 북한미술의 시원을 찾으려고 한 노력 속에서 내용은 사회적이되 형식적으로는 민족적인 것을 지향하는 사회주의리얼리즘과 ‘궁합’이 가장 잘 맞았던 것이 ‘조선화’였던 것도 ‘조선화’가 탄생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한편, 조선화의 주제가 됐던 내용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면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 즉 소련이나 중국의 그것과 크게 구별되는 차이점을 찾아볼 수는 없고, 그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오히려 서구미술의 투시도법이나 명암, 원근표현 등에 있어 사실주의 유화형식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화를 우리고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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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우리나라에서도 특허권을 포함해 소위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중소기업의 신제품에 특허출원번호나 특허등록번호 등의 문구를 크게 새겨 넣어 홍보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특허청의 통계만 보더라도 특허출원 건수는 2010년 170,101건에서 2014년 210,292건으로 4년새 1.2배 이상 증가했다. 물론 일각에서 국내특허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지만, 특허법인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특허출원건수의 증가를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다. 특히 IT분야 해외대기업 들의 특허출원건수는 가히 공격적이다. 대기업들이 이렇게 공격적으로 많은 특허출원을 하는데, 거미줄 같은 특허풀(patent pool)에 여칫 방심하면 중소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는 실정이다.이와 더불어 최근 뉴스나 신문기사를 보게 되면 특허분쟁과 관련해 유난히 ‘특허권남용’ 이나 ‘특허괴물(patent trolls)’ 등과 같은 단어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특허전쟁이라고까지 불리는 두 거대기업 애플과 삼성의 특허분쟁만 하더라도 애플의 주장 가운데는 삼성이 특허권을 남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언론에서는 특허괴물을 상대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특허괴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강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필자는 특허권의 양도등록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실제 특허권들이 해당 발명과는 전혀 무관한 특허괴물이라고 불리는 회사로 양도된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기회가 있었다.이 같은 상황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대기업들 사이의 경쟁은 어떠한 양상을 띄고 있는지, 특허권을 무기로 한 대기업의 ‘갑질’은 어떻게 규제되고 있는지, 혹은 특허괴물에 대한 대응방안은 어떻게 마련되어가고 있는지를 공정거래법 상에서 검토해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한다.이하에서는 공정거래법상의 특허권이라는 주제로 특허권을 둘러싼 불공정거래의 양상을 법리와 관련판례를 들어 같이 살펴보겠다. 먼저 특허권과 반독점법의 관계를 검토한 후, 이후 특허권의 남용법리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한다고 판시하였다.따라서 미 연방의회는 셔먼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특허권자들의 권리남용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새로운 입법적 대안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등장하게 된 것이 1914년 제정된 Clayton법 14조이다. 클레이튼법 14조를 통해 특허품이든 비특허품이든 (“whether patented or unpatented”) 끼워팔기를 위법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특허권의 확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Morton Salt 사건 (1944)특허권남용법리를 이론적으로 확립하게 된 사건으로, 원고인 Morton Salt사는 소금결정제를 축적하는 기계의 특허권자인데 비특허품인 소금결정체를 본인으로부터 구입하는 조건으로 특허장치를 대여하였다. 원고의 경쟁자인 G.S. Suppiger 역시 소금결정체를 축적하는 기계를 생산판매하고 있었는데 이에 원고가 피고를 특허에 대한 직접침해로 제소하였다. 이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특허권남용법리가 공정거래법 위반이 아닌 공공정책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명확히 하였고, 이 사건을 통해 특허권남용은 독점금지법과의 관계에서 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특허권 남용법리가 발전되면서 미 의회는 연방대법원이 이러한 법리를 확장하자 입법적 제동을 걸려는 시도로써 1952년 특허법을 개정하게 된다. 271(d)조의 입법을 통해 전용부품의 경우에는 끼워팔기를 하더라도 특허권남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사실상 특허권자에게 안전지대를 제공하는 의미를 갖는다. 1988년에는 「특허권 남용에 관한 개혁법 (Patent Misuse Reform Act)」을 제정하면서 2개항을 추가하였고, 그 중 제5호는 특허권 남용법리에 있어서 반독점법이 영향을 미치도록 하고 있다.1960년대와 1970년대는 특허권에 대한 반감이 증대되었던 시기로 특허권자의 권리제약에는 독점금지법리가 사용되었고, 독점금지사건으로 특허권남용이 규율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 법무부는 특허권자의 권리행사에 대해 별도의 경쟁할 필요성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이러한 실시료 부과행위는 특허권자의 정당한 권리행사로 본다. 그러나 공정위의 심사지침에서 ① 실시허락의 대가 ② 실시허락의 거절 ③ 실시범위의 제한 ④ 실시허락 시 부당한 조건을 부과하는 경우 관련 시장의 공정한 거래를 저해할 우려가 있어 특허권의 정당한 권리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실시허락의 대가심사지침에 따르면 (1) 부당하게 다른 사업자와 공동으로 실시료를 결정 유지 또는 변경하는 행위 (2) 부당하게 거래상대방 등에 따라 실시료를 차별적으로 부과하는 행위 (3) 부당하게 실시허락된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하여 실시료를 부과하는 행위 (4) 부당하게 특허권 소멸이후의 기간까지 포함하여 실시료를 부과하는 행위 (5) 실시료 산정방식을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고 특허권자가 실시료 산정방식을 일방적으로 결정 또는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 등을 실시허락의 대가에 관한 특허권 남용행위의 예로 들고 있다.실시허락의 거절특허권자가 자신의 권리보장을 위해 합리적인 범위에서 실시허락을 거절하는 행위는 특허권의 정당한 권리행사로 본다. 그러나 (1) 정당한 이유없이 자기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사업자와 공동으로 특정사업자에 대하여 실시허락을 거절하는 행위 (2) 부당하게 특정사업자에 대하여 실시허락을 거절하는 행위 등은 특허권의 정당한 권리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때, 실시허락 거절에는 직접 실시허락을 거절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제3자에게 실시허락을 거절하도록 하는 행위, 명시적인 실시허락의 거절뿐만 아니라 거래가 사실상 또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부당한 가격이나 조건을 제시하여 실시허락 거절과 동일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행위, 공급거절과 구입거절, 거래개시의 거절과 거래계속의 거절이 모두 포함된다.실시범위의 제한특허권자는 특허발명의 이용범위를 한정하여 부분적으로 실시를 허락할 수도 있는데, 따라서 일반적으로 특허권자가 자신의 권리보장을 위해 합리적인 범위에서 실시수량, 지역, 기간 시조건의 사전 협상을 회피할 목적 등으로 부당하게 자신이 출원 또는 등록한 관련 특허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행위 (3) 관련 시장에서의 독점력을 강화하거나 경쟁사업자를 배제하기 위하여 FRAND조건으로의 실시허락을 부당하게 회피 우회하는 행위 (4) 부당하게 표준필수특허의 실시허락을 거절하는 행위 (5) 부당하게 표준필수특허의 실시조건을 차별하거나 비합리적인 수준의 실시료를 부과하는 행위 (6) 표준필수특허의 실시허락을 하면서 실시권자가 보유한 관련 특허권의 행사를 부당하게 제한하는 조건을 부과하거나 부당하게 실시권자가 보유한 비표준필수특허에 대한 상호실시허락의 조건을 부과하는 행위 등을 들고 있다.표준특허 침해주장에 대항하여 계약 위반 등을 내세운 대표적인 분쟁사례가 삼성-애플 사건인데, 애플의 아이폰이 이동통신분야에서 표준기술로 채택된 삼성의 특허권을 침해하였는지가 중요쟁점으로 다루어졌다. 삼성은 애플의 아이폰제품은 삼성의 표준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는데, 삼성전자의 표준특허 침해주장에 대항하여 애플은 삼성이 라이센스를 허여한 인텔에 의하여 생산된 부품을 구입하여 아이폰을 생산 판매 하였으므로 삼성의 특허권은 소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FRAND선언을 한 삼성이 애플에게 FRAND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과도한 실시료를 요구하면서 금지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위의 분쟁에 대하여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표준화기구인 ETSI에 따르면 표준특허에 대한 라이선스계약의 조건은 당사자사이의 협상을 통해 정하도록 하고 있고, 표준특허라고 하더라도 실시권에 대한 허여 요구 없이 이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실시권자에게 침해금지를 구하는 것이 표준특허의 목적이나 기능을 벗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하여, 특허실시자를 상대로 금지청구를 하는 것이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특허괴물Patent Troll이라는 용어는 2001년 Intel의 변호사였던 Peter Detkin이 상대편 업체인 TechSearch를 두고 ‘특허발명을 현재 실시하고 있단(adequate remedy)의 여부 (iii) 고통의 형평(balance of the hardship) (iv) 공공의 이익(the public interest) 등을 고려하여 형평의 관념에 기해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이러한 eBay판결과 미국내 특허괴물에 대한 논의는 금지청구권이 예외적으로 남용되거나 특허권의 행사가 지나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최대규모의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인터넷 기업들 대부분은 사실상 ‘거의 자동적인’ 금지명령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사업운영이 위협을 가해왔으며, 모호한 품질의 특허 소유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사업발전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경고해왔으므로, 그러한 기업들이 이 판결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보유특허를 수입원으로 활용하는 전략은 기존 IP기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한 때 피처폰 시장의 양대 거물이었던 노키아와 에릭슨이 이제 특허괴물로 변신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노키아나 에릭슨이 각각 MS와 소니에 팔리기는 했으나 두 업체 모두 중요 특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업체로 노키아의 경우 최근 로열티수입으로만 약 6700억원을 챙긴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우리나라 공정거래위원회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노키아의 기업결합을 조건부로 최종승인 하였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특허사용료를 올리거나 소송을 걸어 경쟁사업을 방해하는 등 특허남용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그 조건이나, 이 승인이 결국은 특허괴물을 육성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은 아직 남아있다.결론개인발명자와 기업의 기술개발에 대한 보상과 장려를 위해 사용되어 왔던 특허권이 이제는 특허권의 남용으로 상당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기술개발과 경영에 기업역량을 집중하지 못하고 특허소송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게 되어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특허소송에 휘말려 파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특허권 남용의 성립여부는 특허법이 추구하는 기본정책, 즉 인센티브와 정보 및 후속현신을4
중국의 정치체제와 중앙국가기관중국의 정치체제는 중국공산당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중국의 정치체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산당과 이와 더불어 중국 헌법상의 최고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등 관련 국가기관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1. 공산당마오쩌둥, 리다자오, 천두슈 등의 주도아래 1921년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창당되었다. 중국의 공산주의가 탄생하게 된 계기를 보자면, 마르크스주의가 탄생 후 71년이 지나 중국에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었는데 이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노동자계급과 광대한 인민들에게 장악되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었을 당시 중국에 200만 명 정도의 현대산업 노동자가 있어 노동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는데, 즉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노동운동이 서로 결합된 산물임을 보여준다.이렇게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의 이론 등을 활동의 지침으로 삼으며 공산주의 실현을 창당목적으로 함을 총강령에서 밝히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8,70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을 거느린,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공산당 당원이 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등의 장점 때문에 많은 대학생들이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경우가 많다.중국공산당 조직은 문화대혁명기간 동안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시대 이후 재건되었는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상대적으로 자유가 진행되어 경제영역에서 공산당 외부인물과 조직의 공식적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요한 정부기구들은 중국 공산당 위원회의 정치적지침에 따라 운영되고 있어, 경제, 산업, 문화 전반에 걸쳐 공산당의 통제력이 가장 강력하고 노동조합도 공산당에 속해있다.공산당의 주요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총서기와 상무위원회가 정책을 제안하고 이것이 중앙위원회나 전국대표대회에서 비준을 받으면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된다. 일단 이 과정을 거쳐 채택된 정책에 대해서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모든 당원은 일단 지지를 하는 것이 관례이다.(1) 전국대표대회매 5년마다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는데 당의 문제를 토의 및 결정하는 의결기관으로, 전국대표대회는 이론적으로는 중국 공산당 내의 최고 권력기관이나, 실제로 중요한 결정들은 대회 개최 전 이미 만들어진다. 항상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리는 이 당 대회는 지난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중국의 정치적 리덥신 변화에서 상징적 부분으로서 중추적역할을 하였으며, 국제미디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2) 중앙위원회전국대표대회에서 선출되며 전국대표대회와 더불어 당의 최고지도기관이다. 전국대표대회 폐회기간 중 이 대회의 결의를 집행하고 당의 모든 업무를 지도하며 대외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매년 1회 이상 개최한다. 중앙위원회는 총서기, 정치국이나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및 중앙위원회 서기를 선출하는 일, 그리고 당중앙 군사위 구성원도 선출한다. 아울러 정치국이나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내정된 정책이나 중앙기구의 인사 변동사항을 형식적으로 발의 승인 또는 비준하는 업무를 한다. 이런 중앙위원회는 중앙 지방의 당과 국가의 핵심간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 지도층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점차로 평균연령이 낮아지고 있다.(3) 중앙정치국 및 정치국 상무위원회중앙위원회 폐회기간 중 중앙이원회의 권한을 행사하며, 국가와 당에 관계되는 모든 정책을 최종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당, 국가, 군을 움직이는 고위 간부의 인사권을 장악하는 권력의 핵심기구이다.(4) 중앙 서기처정치국과 상무위원회의 지도아래 당 중앙의 일상업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구로서 정책결정기구는 아니다. 중앙 서기처의 구성원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지명을 거쳐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선출된다.(5) 중앙군사위원회중국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원래 중국공산당군으로, 이것이 중국의 국군처럼 된 것인데, 이는 중국공산당의 군사권력 장악이 곧 중국의 군사권력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바로 중국의 군사권을 장악하는 최고의 권력 요직으로, 따라서 중국에서는 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거머쥔 자가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덩샤오핑이 중국의 핵심권력을 후계자인 장쩌민에게 이양할 때, 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큼은 유지하였고, 장쩌민이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이양할 때에도 이 자리만은 가장 나중에 내어주었다.중앙군사위원회는 주석과 부주석을 포함한 상무위원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된다. 인민해방군의 조직과 활동을 통제하고, 인민해방군 총정치부를 통해 군에 있어서의 당의 정치활동을 관리한다.(6)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앙위원회 지도아래 활동하며 임기는 5년이다. 준 독립적인 지방조직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당원의 부패와 비행을 척결하는 등 당 기강과 당풍을 관리하고 당의 노선 방침 정책 및 결의 실행사항을 점검한다.2.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공식적인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으로 사회주의의 조직원칙인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입법 의사 집행 기능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는 의행합일 기관이다. 전인대는 전체 국가기구 체계중 가장 중요하며, 기타 일체의 국가기관 (예컨대 국가의 최고행정기관이나 최고재판기관 및 최고검찰기관 등)은 모두 전인대에서 탄생되고, 이 기관들이 행사하는 부분적인 국가관력 또한 전인대가 부여한 것이다. 전인대는 기타 모든 국가기관에 대해 감독권을 가지고 있음 어떠한 국가기관도 전인대의 권력을 초월할 수 없다.전인대는 간접선거방식을 통해 각 성, 자치구, 직할시의 인민대표대회와 군대의 군인대표대회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매기 전인대의 임기는 5년으로, 일반적으로 임기 5년이 만료된 직후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전인대의 주요기능으로는 헌법의 개정과 헌법실시, 감독 및 기본법률의 제정, 개정이 있고, 국가주석 및 부주석을 선출한다. 이 외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선출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제의에 입각한 그 위원회의 기타구성원을 결정한다. 또한 최고인민법원장과 최고인민검찰원장을 선출하는 인사권도 갖고 있으며, 그 외에도 국가의 존립이 달린 전쟁과 평화에 대한 문제를 결정한다.전인대의 기본적인 업무방식은 회의개최로, 전체회의는 매년 1회 개최되고 전인대의 직권은 주로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실현된다. 전인대는 회의가 정식으로 개막되기 전에 반드시 예비회의를 소집하는데, 예비회의의 임무는 주로 해당 전체회의의 의사결정을 토의하고, 대회의 주석단과 비서장 및 기타 일부 해결해야할 사항에 대한 투표를 실시함으로써 전인대 회의의 순조로운 진행을 보장한다.(1)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전인대가 비록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이기는 하나 이 기구가 연중무휴 업무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 1년에 단 한 차례 개최되고 그 회기 또한 비교적 짧다. 그러므로 대회의 폐회 후에도 처리해야 할 많은 중요한 업무들은 상설기관인 전인대 상무위원회에서 처리하게 되며,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전인대 폐회기간 중 전인대 대부분의 권한을 행사한다. 단, 헌법개정, 국가주석, 총리, 군사위 주석선출 등은 제외된다. 상무위원은 전인대에서 선출되는데 반드시 적정숫자의 소수민족대표가 포함되어야 하며, 상무위원회 외원은 국가행정기관, 사법 또는 검찰기관업무 겸직을 금지한다.
「대륙의 딸들」을 읽고저자는 저자의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저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가족사를 중국의 근 현대사와 접목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책 안에는 흑백사진이나마 저자의 가족사진을 비롯해 당시 중국내 정치상황을 볼 수 있는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속에서 보았던 사진 속 저자의 외할머니는 정말 저자가 언급한 대로 현대 기준으로 보더라도 참 미인이었다. 중국전통의 막바지이지 왕조 몰락의 시기,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기 위해 고통스러운 전족을 당하며 성장한 그녀는 수지행 장군의 첩이 되었다. 첩이 되는 과정만 보더라도 그녀의 아버지 (저자의 외증조부)가 얼마나 철저하고 계획적으로 자기 딸을 장군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는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딸을 이용하는 그 치밀함이 기가 막히다 못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이 전족으로 인해 평생에 걸쳐 얼마나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책 전반에 걸쳐 군데군데 언급되어 있다. 책에 나온 설명에 의하면, 전족을 한 여자들은 발을 묶은 천을 풀면 기형적인 발형태가 되면서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여자로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고통스러운 전족을 어린 나이때부터 강요당하는 그 야만성과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아무리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당성을 부여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종종 ‘전통’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 행해져 왔다는 그 관습성에 의해 그 속에 내재된 잔인함에 당위성이 부여되어 버리고 만다.외할머니와 수지행 장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저자의 어머니이다. 수지행 장군의 병세가 악회되자 수지행 장군의 정실부인은 외할머니를 본가로 불러들이고, 외할머니의 딸은 수지행 장군의 자손이므로 본가에서 키우겠다고 통보한다. 다행히 외할머니는 수지행 장군의 둘째부인의 동정을 얻어 어두운 새벽에 딸을 데리고 본가를 도망친다. 난 이 장면에서도 외할머니가 참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모성애인가 싶다. 외할머니는 이후 수지행장군이 외할머니를 자유롭게 해주라는 수지행장군의 유언에 따라 자유의 몸이 된다. 한 번 그렇게 혼인을 하고 난 여자는 남편이 죽고나서도 결코 남편의 집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대를 생각하면, 천운이라고 할까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후 외할머니는 한의사인 만주족 샤선생을 만나 사랑을 하고 나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샤선생 집안식구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외할머니의 명예를 지켜주고자 했던 샤선생의 배려와 애정은 참 인상 깊었다. 외할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을 차치하고서라도 책 속의 묘사를 보면 샤선생의 인품은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그의 죽음은 조용히 찾아왔는데, 평화롭게 세상을 뜬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살아온 모습대로 죽는다는 말이 정말 맞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저자의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샤선생과 (샤선생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진저우로 이사오면서 진저우에서 자라나게 된다. 저자의 어머니의 학창시절은 중국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한창일 때였는데, 진저우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차지하려고 애썼던 곳이다. 진저우는 특히 국민당에게 지리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듯하다. 책의 표현을 빌자면, 진저우는 국민당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내력에 인접해 있고, 해안에서 가깝기 때문에 해역의 원군을 얻기 쉬울 뿐더러 철로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저우는 결국 공산당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이 군사적 요충지가 생활터전인 곳에서 자란 저자의 어머니 역시 이런 환경적/역사적 배경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만약 저자의 외할머니가 샤선생을 만나 진저우로 이사가지 않았더라면? 그랬어도 저자의 어머니는 공산당원이 되었을까? 책에 보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녀(저자의 어머니)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선택은 공산당이었다. 그녀는 특히 여성의 차별대우를 끝내겠다는 그들의 약속에 마음이 끌렸다.”저자의 어머니는 공산당이 내세운 여러 가지 약속들, 사상들에 크게 매료된 듯 했다. 실제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새삼 놀랐던 점은 공산당이 국민당과 대치할 때 실제로 꽤 괜찮은 정책들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민당이 우세하던 때에 국민당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던 것 같다. 책에 묘사된 대로 ‘부패가 파멸을 불렀다.’ 국민당 군대로 들어간 식량의 대부분이 지역 지휘관들에 의해 다시 암시장으로 흘러나오고, 인플레이션이 1948년 말에 국민당 지역에서 287만 퍼센트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287만 퍼센트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인플레이션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자마자 토지개혁을 실시해 실제경작자에게 땅을 돌려주는 정책을 실시했고, 내전에서 항복한 사람은 처형하지 않고 포로들을 잘 대접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산당은 포로수용소를 운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오쩌둥이 국민을 정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정복하는 것 ?을 고대 중국의 전쟁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마오쩌둥이 배울 점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식으로 국민당에 가담했던 사람들에게 유하게 대해서 공산당 편에 서게 하고서도 나중에는 다시 과거가 불순하다며 다시 내부에서 사람들을 솎아낸 작업을 감행한 부분에 있어서는 다시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연애는 불경한 것으로 여겨졌던 저자의 외할머니의 시대보다는 그 점에 있어서는 조금 더 너그러워진 풍토에서 저자의 어머니는 공산당게릴라로 활동했던 아버지를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결국 당의 허락 하에 결혼을 하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데 당의 허락이 있어야 하다니... 공산당원의 부모는 당원의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공산당 자체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었다.) 저자의 아버지가 젊었을 때의 사진이 책에 인쇄되어 있었는데, 공산당은 물론이거니와 거친 게릴라활동을 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다. 툭 튀어나온 그의 광대뼈 부분을 제외하면 오히려 더 여성스럽다고 해야 어울릴 듯해서, 실제로 저자의 어머니 사진이 아버지이고 아버지사진을 저자의 어머니모습이라고 잠시 착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그러나 내가 사진에서 본 섬세하고 연약해 보이던 저자의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대쪽같은 성격을 가진, 올곧고, 결벽증적일 정도로 청렴한, 공산당의 절대적인 신봉자였다. 공산당의 고위간부로서 여러 혜택을 보장 받았지만 본인이 그 혜택을 충분히 이용하여 안위를 추구하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더러,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가족에게 조그마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그의 성격의 가장 큰 희생자는 저자의 어머니라 할 것이다. 그는 저자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당에 대한 충성과, 당의 이익과 사상이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늘 우선순위였다.이렇게 굳건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두 번 크게 흔들리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일명 1958년과 1961년 사이에 있었던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일어난 문화혁명이다. 농사는 뒷전인 채 중국의 모든 사람이 철생산에 매달려야 했던 대약진운동 때문에, 책에 보면, 학교에서조차 교실에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은 가르치는 일 대신 쇠를 녹이는 일에 열중하고 있어야 했다고 나온다.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수천만명이 굶어죽었고, 사람들이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저자의 아버지를 저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61년 여름, 그는 몇 달 동안 입원했다. 그는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지난날의 신념이 뚜렷한 혁명전사가 아니었다.”대약진운동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굶어죽고 나서야 마오쩌둥은 자신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류 샤오치와 덩 샤오핑에게 좀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물론 아무도 이에 대해서는 진정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마오쩌둥 스스로도 자아비판을 했으나 그는 자신에 대한 동정심이 깔려 있는 자아비판이었고, 무능한 관리들을 대신한다는 식의 목소리였다니 말이다. 이 ‘자아비판’이라는 것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의해 상당히 효과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듯한데, 당원들은 자아비판을 통해 자신의 본위보다 당을 우선시하는 마음을 다잡고 당에 대한 충성과 당위성을 재확인해야 했다. 실제로 당의 감시하에 이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아비판이 진정한 자아비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나, 이러한 자아비판이 공산당의 권력투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 보인다. 저자의 어머니가 가족과 당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아비판을 요구받고, 자아비판을 했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I. 사실관계1. 사건발생의 배경(가) 1955년 2월 19일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행정협정 제2조에 근거하여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일원에 전투기의 해상 목표물에 대한 폭탄 및 기관총 사격훈련장이 설치되었고, 이후 1968년에 매향 1리, 3리, 5리에 걸쳐있는 지상 사격훈련장이 설치되었다 (미군 측 명칭은 쿠니사격장: KOONI FIRE RANGE).(나) 미국 공군의 전투기와 공격용 헬리콥터 등이 이 사격장에서 통상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 한달 평균 20일, 오전 9시에서 밤 10시까지 매일 10회 이상, 매회 20분 이상씩 폭탄투하와 기관총 사격훈련 등을 실시하였다.(다) 매향리사격장은 어촌지역과 충분한 완충지대를 두지 않고 설치되어, 훈련에 따르는 항공기 소음과 폭탄파열음 및 오폭사고 등으로 인접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끊이지 않았았다. 전화통화나 일상대화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일상생활에 커다란 방해를 받았고, 이에1988년 6월에는 지역주민들이 매향리 미공군 국제폭격장 피해주민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같은 해 7월 614명 세대주 연명으로 청와대, 국방부 경기도청에 피해대책 요구서를 제출하였다.(라) 1989년 미국 공군이 육상사격장에서의 폭탄투하훈련을 중단했으나 그 뒤에도 소음발생이 계속되었다.(마) 1994년 12월 14일 매향리사격장에서의 불발탄 폭발사건으로 198채의 가옥이 균열되는 등의 피해를 입자, 주민들이 배상요구 및 대책촉구를 위해 미군기지 앞에서 3개월 동안 천막농성을 했고, 한미 배상심의위원회로부터 3억5천만원을 배상받기도 하였다.2. 소송의 경과(가) 1998년 2월27일 매향리 지역주민대표 전만규 외 13인이 매향리사격장의 폭격소음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2억 7,3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98가단55916).(나) 제1심 법원은 2001년 4월 11일 판결에서 원고 (주민 14인)의 피해를 인정하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다) 2002년 1월 9일 원고에 대한 항소심(2월 12일 판결에서 대법원은 원심을 인정하는 확정판결을 내렸다.II. 사건의 쟁점이 사건의 쟁점은 (1) 국가배상법에서 규정된 ‘영조물(營造物)의 설치 또는 관리의 하자’의 의미 및 수인한도의 판단기준, (2) 소음 등을 포함한 공해 등의 위험지역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는 경우 가해자의 면책여부, (3) 소멸시효 및 (4) 손해배상액 판단 등이다. 위의 쟁점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은 이하에서 논하기로 한다.1. ‘영조물의 설치 또는 관리의 하자’의 의미 및 수인한도의 판단기준제2심 법원이 판시에서도 인정한 바와 같이, 매향리사격장은 우리나라의 분단된 현실에서 국가안보의 목적 상 미군의 주둔과 훈련장소제공을 위한 고도의 공익성을 갖고 있는 토지이다. 국가배상법 제5조1항에서는 영조물을 포함한 공공시설 등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어 타인에게 손해가 발생하였을 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그 손해를 배상하여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본 손해배상 소에서 우선 오폭 또는 폭발소음 등으로 인한 피해를 ‘영조물의 설치 또는 관리의 하자’로 볼 수 있느냐가 쟁점이 된다.피고는 상고이유로 국가배상법 제5조 제1항에 대해 원심의 해석적용에있어 법령위반의 위법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본 사건에서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제5조 제1항에서 정하여진 ‘영조물의 설치 또는 관리의 하자’라 함은 영조물이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말하며, 여기서 말하는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란 그 이용자에게 위해를 끼칠 위험성이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 영조물이 제3자에게 사회통념상 참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히는 경우까지 포함하나고 판시하였다. 즉 대법원에 따르면, 영조물의 안전성이라 함은 제3자를 아우르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통념상 참을 수 없는 정도인지의 여부는 해당 영조물의 공공성, 피해내용과 정도, 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한 정도 등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했다.또한 대법원에서 언급한 사회통념상 참을 수 없는 정도 인지의 기준사항을 매향리 보면, 매향리사격장에서 행해지는 훈련으로 인해 사격장 인근지역에 폭발 등의 소음이 주5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평균 70dB정도로 계속되고, 게다가 매일 10회 이상 매회 20분씩은 평균 90dB, 순간 최대 130dB 정도의 소음이 수십년간 계속되어 왔다고 하는데, 평균 70dB의 소음만하더라도 우리나라 환경정책기본법상 주거지역 환경소음 기준인 50dB 내지 65dB을 넘는 소음에 해당하는 점을 고려하면,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대법원은 또한 피고가 주장한 채증법칙 위배의 위법 항변을 부정하였다. 대법원은 또한 미군이 2008년 8월18일 육상사격장에서 기총사격을 중지하는 등의 훈련방법을 변경하기 전까지 주민들의 피해방지를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거나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그 피해의 정도가 주민들의 수인한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국가가 손해배상을 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하였다.2. 소음 등을 포함한 공해 등의 위험지역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는 경우 가해자의 면책여부피고는 원고 중 4인의 주민은 매향리사격장이 생긴 이후에 사격장 인근 지역으로 전입하였으므로 이는 사격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소음 등을 감수할 의사로 볼 수 있어 이들 4인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은 면제 또는 감액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해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의 면책을 인정할 수 있는 경우로는 (i) 그 피해자 직접 생명이나 신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나 생활방해의 정도에 그치고, (ii) 그 침해행위에 고도의 공공성이 인정되는 때어야 하고, 또 (iii) 위험에 접근한 후 실제로 입은 피해 정도가 위험에 접근할 당시에 인식하고 있었던 위험의 정도를 초과하는 것이거나 위험에 접근한 후에 그 위험이 특별히 증대하였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어야 한다.즉 본 사건의 경우를 위에 적용시켜보면, (i) 원고의 피해는 정신적 고통이나 생활방해 정도에 그친다고 할 수 없고, (ii) 사격장의 사격훈련이 그 자체로 고도의 공공성심법원 또한 판시에서, 4인 중 3인은 가족들과 함께 매향리로 전입당시 가족 내 의사결정권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어린나이 (9세 내지 11세)였고, 나머지 1인은 결혼과 동시에 남편을 따라 남편의 주거지인 사격장부근 마을로 이전한 사실에 비추어, 게다가 매향리사격장의 소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1988년경이었으므로 원고들이 매향리사격장소음의 피해를 용인할 의도로 마을에 전입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인정하였고, 대법원 역시 이러한 원심의 판단에 대해 법리오해의 위법이 없다고 판단하여 피고의 항변을 부정하였다.3. 소멸시효피고는 제2심 항소심에서 민법 제766조 제1항에 근거, 이 사건 소송제기일인 1998년 2월 27일부터 3년을 역산한 1995년 2월 26일 이전에 발생한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그 시효가 소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민법 제766조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손해의 발생과 가해자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가해행위가 수인한도를 넘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수인한도를 넘어 가해자의 행위가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일반인이 쉽게 인지하기가 어려워 시효가 진행된다고 할 수 없다고 제2심법원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다만, 1988년에는 피해대책 위원회를 결성하여 민원을 제기하고 그 이후 꾸준히 대책수립 및 피해보상을 요구한 사실을 근거해볼 때 적어도 이때부터는 피해발생과 가해행위의 위법성 및 가해자를 알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은 민원을 제기한 1988년 7월 이후로 봐야한다고 판시하였다. (대법원에서는 원심의 이 같은 판단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달지 않았다.)4. 손해배상액 판단원심에서는 1995년 2월 26일 (민법 제766조에 근거, 소송제기일로부터 3년을 역산한 날)부터 원고가 손해배상을 구한 2000년 7월 26일까지 65개월 동안 매향리사격장의 설치관리상의 하자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 피고로 하여금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도록 명했다. 이 때, 사격장에 더 근접하여 피해가 큰 매향 1,2,3는 각 975만원을 지급하라고 하였다.위와 같은 원심법원의 결정에 대해 원고들과 피고는 모두 위자료산정에 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자에게 지급되는 위자료의 액수는 사실심법원이 재량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라 판시하며 위의 위자료 산정에 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개정된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에 제3조 제1항의 법정이율에 관한 규정에 따라, 원고들의 손해배상채권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산정하여 원고 6인에게는 원심에서 정한 1,105만원에 더해 지연손해금을, 나머지 원고 4인에게는 975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도록 주문하였다.III. 평석먼저 대법원이 영조물의 안전성을 판단함에 있어 안전성의 범위를 제3자에게까지 확대하여 판시한 것은 매우 타당하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본 사건에서와 같이 언제 어디서 불발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군사훈련장의 경우 그 시설 본래의 목적이 해당지역 주민을 포함한 한 나라의 국민들과 나라를 지키는 일인바, 영조물의 안전성은 당해 영조물의 이용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하더라도 일반에게까지 적용하여 해석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원고들 중 일부가 본 사건에서 문제가 된 매향리사격장 지역으로 전입을 왔다는 사실을 들어 피고가 그 전입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감면받고자 한 것은 어찌보면 억지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데, 초등학생의 나이 정도에 부모님을 따라 전입을 한 원고들을 두고서 해당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알고서 전입했다고 판단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입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전입년도 또한 파악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짐작 해보면 더욱 그렇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하고, 피해자의 피해상황도 국가적으로 이슈가 됐던 사안에서 피고의 항변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다만, 손해배상액의 판단에 있어서 긴 세월동안 미군 사격훈련장의 소음공해 등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세월 대비 개인당 약 천만원 정도의 위자료를 지급하도록 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적은 액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