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寒暄堂 金宏弼의 도학과 그 영향과 목 :교 수 :학 과 :학 번 :이 름:목 차Ⅰ. 머리말2Ⅱ. 한훤당의 생애3Ⅲ. 한훤당의 도학53.1. 『소학』을 중시한 도학53.2. 에 나타난 도학6Ⅳ. 한훤당이 후학에 미친 영향과 그 계승84.1. 조광조의 도학84.2. 이황의 심학94.3. 서원의 건립과 문묘 배향10Ⅴ. 맺음말13참고문헌14표 목 차표 1. 한빙계 18조7표 2. 남한 지역 미복원 서원12표 3. 북한지역 한훤당 배향 서원12그 림 목 차그림 1. 도동서원 중정당10그림 2. 남한 내 미복원 서원과 북한 지역 배향 서원11그림 3. 성균관의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 선생 위패13Ⅰ. 머리말본 논문은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의 생애와 도학 사상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사상이 후학에 미친 영향과 계승되는 모습을 파악해 보고자한 것이다. 필자의 개인 사정으로 감히 ‘한훤당’, 혹은 ‘김굉필’이라고 기술하지 못하고 이하는 ‘한훤당 선생’, ‘김굉필 선생’, ‘선생’이라고 호칭을 붙여서 기술하였다.한훤당 선생은 우리나라 도학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광조라는 걸출한 유학자를 배출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초·중·고등학교의 ‘한국사’ 교과서나 ‘윤리와 사상’, ‘도덕’ 등의 교과서에서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한훤당 선생의 도학이 어떤 것이었으며, 왜 『소학』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 『소학』에는 어떤 내용일 담겨 있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사상이 조광조와 이황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한훤당 선생의 사상과 가르침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훤당 선생 배향 서원과 문묘 등을 조사하였다.많은 선행 연구들을 참고하여 본 논문이 작성되었다. 우선 서흥김씨대종회에서 발간한 『서흥군과 한훤당』을 주 텍스트로 하였으며, 한훤당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國譯 景賢錄全』를 부분적으로 참고 하였다. 하지만 위의 두 단행본은 서흥김가에서 발인으로 표준을 삼았다. 이처럼 한훤당 선생은 30세까지 『소학』을 탐독하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었다. 1480년(성종11) 한훤당 선생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임금(성종)에게 올린 상소문이 『성화경자상소』다. 1494년(성종25)에 선생은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에 의하여 행의(行義)로 추천되어 남부참봉, 전생서차봉, 군자감주부, 감찰 등을 거쳐 1497년(연산군3) 형조좌랑이 되었다. 평소 6경 연구에 전심을 다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특히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 되었다.1498년 한훤당 선생은 무오사화로 김종직 일파로 몰려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유학의 정맥을 잇게 하였다. 선생은 다시 순천으로 이배되었고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참형을 받아,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한훤당 선생의 집은 적몰을 당하고, 여러 아들들은 나뉘어 귀양 갔다.사후 중종반정이 일어났으며, 중종이 명을 내려서 선생의 죄를 신설하고, 통정대부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상서원증을 증직하였다. 이후 대신들이 공론으로 헌의하기를 예에 따른 증직만으로는 특이한 표창이 되기에 부족하니 높음 품질로 추가하여 증직하고 그 아내에게 해마다 미곡을 주고 자손을 녹용하자고 청하여 다시 중종12년(1517)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로 선조8년(1575) 문경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광해군2년(1610)에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으로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과 더불어 문묘에 종사되어 현재까지 성균관 대성전에 봉안되어 있다.문하에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김식, 유계린, 최산두, 신종호, 이현손, 성세창, 정붕 등 30여명의 당대 유명한 학자가 한훤당 선생으로부터 배출되었으며, 특히 유계린, 최산두, 최충성 등 호남의 사림학맥이 한훤당으로부터당선생 신도비명’에는 그의 후학 양성에 관한 글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관직의 사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강론하고 가르치는 것을 중지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곧 현달하여서도 도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정일두 여창과는 뜻이 같고 도가 합일하여, 언제나 서로 보면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을 토론하여 밤을 새기도 하였다. 희천에 있을 때에는 조정암 광조를 얻어서, 마침내 그에게 원대히 성취할 기틀을 전하여 주었다.무릇 그가 머물러 있는 곳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마을로 모여 들어서 인가에 가득히 찼으며, 경서를 가지고 당에 올라 와서 앉을 자리가 없었다.선생은 가르치며 지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친절히 강론하여 주었다. “이런 일 때문에 말썽이 된다.”고 그만두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는 사리를 지적하여 깨우쳐 주면서 굴하지 않고 중지하지 않았으며, 재주에 따라 성취시켜 뒤에 이름난 인물이 많았으니 이것은 스승의 도로써 스스로 책임을 지고 교육으로 낙을 삼은 것이다.한훤당 선생은 뜻이 맞았던 정여창과 함께 도학에 대해 토론하고, 제자 양성에 큰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광조에게 친히 가르침을 주었으며, 조광조의 도학 사상에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성리학자들이 가르침을 얻고자 찾아왔으며, 그들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Ⅲ. 한훤당의 도학3.1. 『소학』을 중시한 도학이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문장은 융성했지만 도학은 들어본 적이 없으며 한훤당 선생이 바로 그 도학을 처음으로 연 인물이라고 했다. 김종직은 한훤당 선생의 스승으로, 문장에 조예가 깊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도학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실천적 도학을 강조했다. 한훤당 선생은 김종직의 문하에 나아가 『소학』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여기에 몰두하게 된다. 그것은 남효온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김굉필은 『소학』으로서 몸을 다스려 상고의 성인을 준칙으로 삼았다. ……(중략)…… 평소에 반드시 의관을 하고 본부인 외에는 여 충성을 다할 것이며, 나머지도 모두 이에 따라서 행하여 간다면, 모든 사물이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이치가 아님이 없을 뿐이다.그리고 몸을 다스리며 사물에 응접하는 방법 18조를 손수 써주었는데, 이것이 이며 18조는 다음과 같다.[표 1. 한빙계 18조]조 목내 용1조動靜有常활동과 안정이 떳떳함이 있음2조正心率性마음을 바르게 하여 性을 따르라3조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똑바로 앉으라4조深斥仙佛仙과 佛을 깊이 배척하라5조痛絶舊習옛 버릇을 철저히 끊어 없애라6조窒慾懲忿욕심을 막고 분함을 참아라7조知命敦仁천명을 알고 인을 두텁게 하라8조安貧守分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분수를 지켜라9조去奢從儉사치를 버리고 검소하게 하라10조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도록 공부하라11조讀書窮理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라12조不妄言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13조主一不二마음을 한결 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말라14조克念克勤잘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라15조知言말을 알라16조知機일의 징조를 알라17조愼終如始마지막을 신중히 하기를 시작할 때처럼 하라18조持敬存誠공경함을 가지며 성실함을 지니라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소학』으로 시작하는 한훤당 선생의 교육도 결국은 지경존성(18조)에 이르기 위한 것이고, 도학의 극치도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경함과 정성스러움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요긴한 도리임을 강조하고,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8조목은 도덕 교육과 도덕 생활의 지침이며, 규범 윤리학의 덕목들이고, 성리학적 근거에 철저한 도덕규범이다. 그리고 이론적인 면보다는 도덕적 실천 덕목에 가까운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Ⅳ. 한훤당의 후학에 미친 영향과 그 계승‘국역 한훤당선생 신도비명’에는 그의 사상이 후학에 어떻게 계승되었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같은 시대에 인을 돕는 이는 일두공이 있고, 직접 학문의 방법을 받은 이는 정암공이 있으며, 그 뒤에 전통을 계승하여 일어난 이로서 평이하고 순실하기로는 이회재가 있고, 정하고 순수하기로는 이퇴계가 있으니, 모쪽에 경현당을 신축하였는데, 경현이란 한훤당 선생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정은 한훤당 선생의 가계와 행장 등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는데, 내용이 소략하고 의심되는 바가 많아 이를 자신의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에 퇴계는 한훤당 선생의 손자인 김립과 외증손인 정곤수 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정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퇴계는 한훤당 선생을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 극찬하였고, 경현당의 액자도 친필로 써 주었다고 한다.이런 한훤당 선생의 학문에 대해 이황은 위기지학이라 하여 이전 도학과는 다른 도학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도학의 내용 또한 당연히 율신수기에서 찾았으며 여기에는 정좌를 통한 마음공부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황은 자신의 학문인 심학을 정립하는 데에 한훤당 선생의 학문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는 조광조와 기묘 사림의 실패를 통해 수기의 철저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즉 성인이 되는 문제는 결국 인간이 가진 본래적 순선성을 잘 간직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황은 이를 보존하고 또한 막힘없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늘 마음의 수양을 통한 평정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소학』을 통한 순선한 마음의 수양과 그 실천성은 그런 점에서 한훤당 선생의 학문을 규정하는 것이자 이황이 자신의 학문을 정립하는 데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다만 유의할 것은 여기에는 이황의 강한 도통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며 한훤당 선생을 근세도학지종이라고 한 것 또한 그러한 도통의 연원을 삼고자 한 이유일 것이다. 이황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독서궁리의 도문학 공부를 수렴함으로써 보다 온전한 마음공부를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4.3. 서원의 건립과 문묘 배향‘문경공 한훤당 김굉필선생 오백주기 추모비문’에는 한훤당 선생을 추모한 서원의 건립에 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물환성이(物換星移) 반천년 동안 선생을 추모배향한 서원이 14처요, 사우정군2)
羅末麗初의 대외교역 양상 한국대외관계사연구자료명 :『 한국 고대 대외교역의 형성과 전개 』 저자명 : 김창석 출판사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발행년도 : 2013 년 수록면 : 230~380 쪽 제 5 장 羅末麗初 의 대외교역 양상제 1 절 이슬람 諸種族의 來往와 교역 활동 1.1 이슬람인의 내왕 기록 1.2 페르시아인 · 소그드인의 진출 1.3 아라비아인의 到來와 處容說話 가 . 도래의 배경 나 . 處容說話의 성립 기반 제 2 절 신라의 對日 交通路와 菁州의 사회 변동 2.1 對日 交易路의 변경 2.2 菁州의 사회 변동 가 . 학생녹읍과 왕실 나 . 향도와 촌주 목차| 1.1 이슬람인의 내왕 기록 |이슬람인 아라비아인 , 소그드인 , 페르시아인 등 우리 역사 속에는 “ 고려사 ” 와 “ 고려사절요 ” 에 ‘ 대식국 ’ 사절단이 왔다는 기록이 있음 . 이븐 쿠르다드비의 “ 제도로 및 제왕국 안내서 ” - 신라를 언급한 이슬람 문헌 중 가장 이른 것으로 , 신라는 금이 풍부하며 , 여러 가지 이점 때문에 눌러 살게 되었다고 되어 있음 . 하지만 오류가 섞여있어 , 다 믿을 수는 없음 . 9 세기 중엽 이전에는 비아라비아계 무슬림들이 신라에 왕래하는 상황이었으며 아라비아인들은 아직 신라에 가지 못하고 신라에 대한 간접 정보만 갖고 있었음 .7 세기 이후 , 이슬람 세력의 확장| 1.2 페르시아인 , 소그드인의 진출 |6 세기 ~ 8 세기 전반 , 통일신라에 유입된 이역산물 공작 , 앵무 , 구관조 , 물소 , 낙타 침수향 등의 향로 슬슬 ( 에메랄드 , 타슈켄트산 ), 비취모 ( 캄보디아산 ), 대모 , 자단 , 침향 ( 인도네시아 , 필리핀산 ) = 중국에서 받은 회사품 , 왕실에 주도하는 국가교역 , 청해진 등을 통해 유입됨통일신라의 대외 교역 상황원성왕 대 이후 , 소그드인의 신라 진출 “ 삼국유사 ” 에 하서국인이 신라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음 . 하서국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 , ‘ 소그디아나 ’ 임 . 하서회랑은 그 중심에서 치렌산맥 북쪽을 따라 이어 지는 교통로이고 , 서역으로 갈 수 있는 동서교통의 요지임 . 소그디아나 지역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 안국 ), 타슈켄트가 중심지이며 , 옛날부터 초원지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 . 괘릉 ( 원성왕릉으로 추정 ) 과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은 소그드인으로 보임 .소그디니아의 중심지 , 사마르칸트 ( 고대의 국제 교역망 )삼국시대 , 소그드인과의 교류 *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 우즈베키스칸 사마르칸트 )괘릉의 무인석 ( 소그드인으로 추정 )흥덕왕릉의 무인석페르시아인의 신라 진출 8 세기 중반까지 대중국 해상 교역 주도 , 일본과도 교역 신라 유물 중 페르시아 계통의 유물 - 황남대총 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리잔 , 계 림로 14 호분에서 출토된 금장단검 , 여러 유물에 나타난 쌍금문 등이슬람 상인의 주요 교역로황남대총 유물 - 감옥금팔찌 ( 터키석 장식 )계림로 14 호분 - 금장보검페르시아 키질 벽화의 금장보검 ( 계림로 14 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함 )| 1.3 아라비아의 도래와 처용설화 |가 . 도래의 배경 8 세기 후반 , 당과 신라 사이에 민간 상인이 주관하는 교역이 시작됨 . 당 내부의 정세 변화 ① 안사의 난 때 , 양주의 페르시아인 수천 명이 살해 됨 ② 회창폐불 때 , 경교 , 조로아스터교 , 마니교 등 외래 종교 탄압으로 수많은 이교도들이 처형당함 ③ 황소의 난 때 , 교역항이던 광주가 공격 당하면서 많은 이슬람 상인들이 죽음 당에서 활동한 신라 교민들과 이슬람인들의 교류 ( 양주 , 소주 , 항주 , 명주 , 태주 지역 ) – 신라 교민들이 이슬람 상인들이 가져온 각지의 교역품을 중계하여 신라에 공급함 . = 장보고 피살 후 , 청해진이 폐지되면서 아라비아 상인들이 직접 신라 진출나 . 처용 설화의 성립 기반 이슬람 상인들이 가져온 교역품은 향료와 약재가 주종이었음 9 세기 , 통일신라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 약재가 역병 구제에 기여하여 처용 설화가 탄생됨 . 이후 , 고려사의 기록 전까지는 이슬람 상인의 왕래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치적 혼란기 를 맞아 이슬람인들의 왕래가 쇠퇴한 것으로 보임 . ( 당 멸망 후 5 대 10 국의 혼란 , 후삼국 시대의 분열 등 ) 그러나 이 시기에도 무슬림 상인들은 중국 동남해의 제국들과 교류했으며 , 이 당시 견훤이 오월에 사절을 파견하고 왕건에게 남방 산물인 공작선을 보냈음 .三國遺事 의 처용 설화 헌강왕 , 용의 아들인 처용을 얻다 이때에 대왕이 개운포 ( 지금의 울주 ) 에 나가 놀다가 바야흐로 돌아가려 했다 .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었다 . 왕은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 ( 日官 ) 이 아뢰기를 , “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시어 이를 풀어야 될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 이에 유사 ( 有司 ) 에게 칙명을 내려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했다 . 왕령이 내려지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 이로 말미암아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이에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하였다 .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왔는데 이름은 처용 ( 處容 ) 이라 했다 . - 三國遺事 卷二 紀異二 處容郞 望海寺공작선| 2.1 대일 교역로의 변경 |신라 하대의 대일 외교 일본 사절 기삼진이 거짓으로 조빙과 지신 지참을 칭함 . - 신라의 집사성이 주관하여 방환 조치를 내리고 , 일본의 태정관에게 첩을 보냈으며 , 청주에도 첩을 보냄 . - 당시 청주는 기삼진 일행에게 숙식 제공 , 일본 귀환 조치를 관장함 . 당시 일본 사절의 입국과 귀국이 청주에서 이뤄졌음 . 신라 중대 이전은 왕경 - 관문성 - 울산 ( 굴헐역 - 율포 ) 루트였음 .신라의 대일 수출품 ( 일본 쇼쇼인 소장 )| 2.2 청주의 사회 변동 |가 . 학생 녹읍과 왕실 청주 ( 菁州 ) 는 685 년에 설치됨 . 지금의 경남 서부와 경북 남부의 일부 지역 , 8 세기에 들어 왕실이 이 지역 특히 진주 , 사천 , 거제도 등 남해안 지역에 관심을 보임 . 청주에 도당 유학생 , 내성의 소내학생을 위해 마련된 녹읍이 설정 . 도당 유학생은 돌아오면 국왕 측근의 문한 기구에 소속되어 정책 자문 및 외교 문서 작성 , 왕권 중심의 관료체제 운영에 기여 , 소내학생도 왕실 측근 기구인 상문사의 학사직 관료임 . 청주 거로현은 왕실과 정치 ,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 왕실 소속지였을 가능성이 큼 .청주 ( 강주 ) 의 위치나 . 향도와 촌주 선진리성 신라 비편의 내용 중에 신술시주총관 , 국왕 , 상대등 등이 언급됨 . - 기록 형식이 유사한 다른 비문과 비교해 보면 , 의례적인 관용구라기 보다는 이들이 비문을 제작한 주체와 모종의 직접적인 관련이 있은 것으로 보임 . = 8 세기 중반에 청주 , 특히 사천 지역은 중앙 권력의 관심의 대상이었음 .신라비편 탁본 2004 년 , 경남 사천시 선진성공원 주차장 부지에서 발견됨나 . 향도와 촌주 왕실은 청주에서 직속지와 해산물 채취권 , 대외교역의 기반등을 확보함 . 8 세기 , 신라 - 일본 사이에 국가 차원의 국가 교역 시작 , 신라는 왕실에서 이를 주도함 - 왕실 업무 관장 기구인 ‘ 왜전 ’ 을 대일 외교기구로 삼음 - 관문성 축조와 연이어 종래 울산을 통한 대일 교역로를 막고 , 청주 사천 방면으로 교역로를 변경 .나 . 향도와 촌주 향도 - 경덕왕 대에 지방으로서는 선구적으로 청주에서 아미타 신앙 유행 , 결계 이뤄짐 . 8 세기 중반 , 현 단위에서 촌주의 분화가 일어남 - 촌주가 간여하는 향도 결성 , 이들이 주도한 불사에서 청주총관 , 사수현령 , 국왕과 상대등이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 .신라 하대의 상황 10 세기 , 후삼국의 혼란 지방 세력이 청주 장악 - 왕실과의 관계 단절 왕봉규 - 신라 말 청주 최대 호족 , 후당과 독자적인 외교 활동 928 년 견훤 군사의 공격으로 후백제의 영역이 됨감사합니다 .{nameOfApplication=Show}
Report제목: 학교의 발생과 미래의 학교과 목:교 수:학 과:학 번:이 름:date :1. 서언2013년 교육부와 여성가족부 후원으로 열린 '학업중단 예방 및 학교 밖 청소년 지원방안 토론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년도 초 · 중 · 고 학생 학업 중단 현황을 조사한 결과 학업을 중단한 학생은 6만8188명”이었다. 이는 하루에 187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발표에서 학업을 가장 많이 중단한 학생들은 3만4934명의 고등학생들로 학업중단 학생의 51%를 차지했으며, 초등학생 1만6828명, 중학생 1만6426명이 그 뒤를 이었다. 주요 학업중단 사유로 고등학생들은 96.05%(3만3553명)이 자퇴였으며, 초등학생은 해외출국으로 인한 면제 45.38%(7636명), 중학생은 미인정 휴학 31.69%(5206명)이었다. 학교 부적응, 학업 스트레스, 가사, 질병 등 자퇴를 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들은 왜 학교를 떠나야겠다는 선택을 한 것일까? 본고에서는 학교가 과연 필요한지, 그 존재의 근거를 살펴보고, 현제 학교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미래의 학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를 살펴보자.2. 학교의 발생 배경우리 나라에 언제부터 학교가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문헌 사료를 종합해 보면, 그 역사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후기와 관련된 기록에서 준왕이 위만에게 박사 직위를 수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교육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이나 부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고대의 제정일치적이었던 여러 나라들은 교육 활동이 종교적 활동과 함께 일어났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중국 문헌에 부여와 진한에서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와 진한의 문화적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었으며, 문자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을 할 만큼의 상당한 수준의 문화와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삼국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경쟁을 했던 시기로서, 청소년을 길러내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구려 소수림왕은 태학을 설립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교육을 실시했으며, 신라의 화랑도 또한 문무를 겸비한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예를 익히고 풍류를 즐기며 인성도야와 체력단련을 함께 했던 것이다. 또한 화랑들을 귀족 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시 신라 , 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만큼 뛰어난 인재들이었다.고대의 교육 제도는 관리 선발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만큼 교육 기관은 인재 양성의 기능이 중시되었으며,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엘리트 교육이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였으며, 국가는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가 필요한 만큼 그에 걸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동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교육은 처음부터 국가를 위해 지어졌다. 그러므로 국립이며 관학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학을 설립하여 초등 수준의 교육(서당)이나 고등 수준의 교육(서원)을 실시하였다. 반면에 서양의 교육은 그리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사립의 성격을 띠며 개인의 자율성이 크게 작용했다. 유럽에서 국민 교육의 시작은 나폴레옹 때부터였고, 그 이전에는 기사도 교육 등 일부 계층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중세의 ‘대학’은 귀족 계급이나 지배층 위주의 학교였으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획일적인 교육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이렇듯 동양과 서양의 학교 형성 배경을 보면 국가 차원에서 관리 및 인재 양성으로서, 자발적인 학문 교류의 장으로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3. 학교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학교의 문제점을 학교의 형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관학이 강조될수록 교육에서 획일적인 모습을 갖게 되고, 다양한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단점이 있다. 이것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 주도의 교육이 강조되면 될수록 다양한 사상과 학문의 발전은 저해된다. 국가가 교육을 통제하여야만 소위 공정성이 확보되는 대학 입시 시험을 실시하기에 보다 적합하다는 의견 때문에, 우리나라는 이때까지 교육을 국가가 많이 주도해왔다. 그 결과, 대학의 서열화, 입시 구조의 경직화, 과도한 경쟁과 대입 위주의 교육이 일어난다. 학교에서도 시험을 위한 수업을 하다 보니 감성과 인성 교육은 부족하게 되고 5지 선다형으로 측정 가능한 지식 위주의 단편적인 교육으로 흘러가버린다. 교육이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개입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 속에서 정서적인 교류와 인격적 감화, 지적인 희열이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교육은 그렇지 않다. 중학교 교육은 고등학교를 잘 가기 위한 교육,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교를 잘 가기 위한 교육으로만 치부된다면, 진정한 교육이 되기 힘들다.교육이 공교육에서 사교육으로 넘어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도 않다. 사적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교육은 시장논리가 개입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고비용의 사교육이 기승을 부린다. 학생의 진정한 꿈과 자발적인 학습 의욕, 자신의 가능성을 고민해 보는 시간은 줄어들고, 입시를 뚫을 수 있는 시험 능력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사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면, 학교에서 학생들이 비행과 안 좋은 습관들을 또래집단으로부터 많이 모방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사고는 혼자서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학생들이 함께 일으키기도 한다. 학교가 그런 일탈의 장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참 많다. 그리고 가정의 경제적 배경이 학생들의 학교 생활에 영향을 미치거나 위화감을 조성하여 좋지 않은 분위기를 조장할 때에도 있다. 단체 생활을 하다보니, 비합리적인 규칙이나 규율도 무조건 순종을 강요할 때에도 있고, 개인 사정보다는 학교의 입장을 내세우다 보니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게다가 학교 폭력이 일어나는 학교, 급식으로 인한 식중독이 일어나는 학교라면 그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학교 교육의 이런 문제점들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런 문제점을 두고 학교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대안학교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학교 교육은 학교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학교 밖의 가정과 사회 구조, 정부의 정책, 대학의 입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며 풀어나가야 한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실타래와 같은 문제가 바로 이 학교 문제이지만, 그래도 학교 내부나 학교 관계자들이 고민해야지만 풀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경쟁 위주의 교육의 폐단을 없애려면 우선 대학의 서열화와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을 바꾸어야 하며, 과도한 경쟁을 유발하는 상대평가 및 성취등급제도를 폐지하고 절대평가와 성취 수준을 기록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을 도달하는 것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게 되므로, 학생들 사이의 경쟁도 줄어들고, 입시 과목 외의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개발하는 데 시간을 들이며, 창의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했을 때, 사회적으로 많은 반발이 예상된다. 보다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려는 대학, 특히 상위권 대학에서는 크게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인재강국을 꿈꾸는 정부 입장에서는 평균적인 학업 성취도가 내려갈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가 국민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회인지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학교의 존재론적 문제와 결부하여 깊이 고민해야할 사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7학년도 수능을 치르는 현재 고등학교 1학년 학생부터 한국사 시험이 절대 평가로, 학교 내신이 성취수준제로 바뀌는 것은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다.학생들의 자율성을 키워주고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평가는 꼭 필요하지만, 형식적인 평가로 흘러가지 않도록 교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업무가 과중한 교사들에게 수행평가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탐구하며 사고력을 키우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학교 폭력과 비행 및 사건 사고의 온상이기도 한 학교는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당시부터 강조한 4대악 중에 하나이기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학교 폭력은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움터지킴이, 전문 상담 교사의 확충, 교내 CCTV 설치 등 다양한 정책으로 학교 폭력을 예방하고자 하지만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캠페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실있는 방안을 강구하여 학교 폭력 대책을 국가와 사회가 함께 마련해야 한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받은 폭력의 경험과 충격은 성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 이는 가해 학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죄책감에 괴로워할 수도 있고, 혹은 나쁜 행동을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한다면 자칫 성인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학생들의 인성 교육과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육부에서는 학교 폭력 예방 대책을 위한 어느 정도의 예산이 더욱 확충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만 모든 것을 맡겨두지 말고 가정에서의 세심한 협조도 필요하다. 학생들이 비행과 일탈을 일삼는 이유는 가정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의 폭력 경험과 무관심 등은 즐거운 학교 생활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Report플라톤과의 대화- 『국가』의 제6권과 제7권을 중심으로과 목:교 수:학 과:학 번:이 름:date :1. 머리말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하다. 그는 ‘아카데미아’라는 학문의 전당을 세웠으며 평생 35권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정치와 경제에 관한 것이다. 그 중 『국가』는 아카데미아 활동의 초창기 무렵이자 플라톤의 작가 경력 상 중반 무렵(기원전 375년)에 저술되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이 책은 서양의 고대와 중세는 물론 현재까지 정치철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미학, 예술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비판적 사고의 최대 걸작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유토피아, 즉 이상 사회를 묘사하면서 자신의 관념들을 설명하는데, 무엇이 정의이며 정의가 어떻게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에서 실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성적 지식의 본성을 설명하며, 이데아라는 관념을 도입하고 고등교육의 수업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본고에서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특히 제6권과 제7권의 내용을 중심으로 플라톤 철학의 긍정적인 의미와 한계점을 짚어보며, 교육적으로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2. 플라톤이 제시한 ‘고등 교육’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향에 처해지는 것을 목도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 죄목은 아테네의 정치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치에 참여하면서 고결함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플라톤이 정치적 역할에 관해 완전히 관심을 끈 것은 아니었으며 그는 오히려 저술과 사색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결국 나는 현존하는 국가들의 조건이 잘못됐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내가 참된 철학을 칭송하는 까닭에 철학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국가들에 관한 또는 개인들에 관한 올바른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점과, 인류의 문제들은 참는 것이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이데아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진행과정을 아주 유명한 두 가지 비유들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제6권 통치자의 자질과 이데아에서 나오는 분할된 선분의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제7권 철인통치자의 완성에서 나오는 동굴의 비유이다.분할된 선분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하나의 선분을 그리고 그것을 길이가 약간 다르게 두 부분으로 분할하라고 요구한다. 그 다음 이 두 부분은 각각 동일한 비율에 따라 다시 두 부분들로 세분된다. 이 네 개의 분할된 구역들은 지성의 네 가지 상태들 또는 인식의 네 가지 양상들에 일대일 대응을 하며 위로 올라갈수록 좀 더 명확해지고 좀 더 확실한 상태를 보여준다. 인식의 첫 단계이자 가장 낮은 단계는 ‘환상과 상상’의 단계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모두 사물들이 나타내는 현상들을 지각하면서 영상들을 통해서 세계를 해석한다. 이 단계는 또한 동굴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최초 상태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앉은자리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고 오직 그림자들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이다. 교육의 제1단계는 지성의 이 단계에 맞춰진다. 교육은 이야기들과 영상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인식의 다음 단계는 ‘신념’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지만 단지 그것들의 형상들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물리적 대상들에 대한 의견을 내포한다. 이 의견은 아직 형상들에 관한 ‘지식’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이 상태를 ‘이해를 결여한 참된 의견’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바른 길을 가는 장님’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이때의 교육은 올바른 신념들을 피교육자에게 주입함으로써 형성된다.그 다음 ‘수학적 추론’의 단계는 감각적인 현상들의 영역으로부터 지성을 분리시키고 형상들의 예지계로 올라가게 된다. 이 단계에서의 특징은 첫 번째로 수학은 형상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것들의 감각적인 영상들과 표상들을 사용하게 된다. 기하학 증명에서 지시는 반드시 그림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그러나 증명의 네 번째 단계이자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극복된다. 이것은 감각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하게 이성적인 종류의 지식이다. 이 단계에서 눈에 보이는 그림들 또는 도해들의 도움은 쓸모 없게 되고 지성은 오직 예지적 형상들 자체만을 다루게 된다. 게다가 이 단계의 지식은 더 이상 가설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체로서 실재, 즉 궁극적으로 하나인 최상의 무조건적인 원리인, 아마도 선의 이데아의 아래 통일된 실재의 모든 요소들을 파악하는 ‘공관적’ 통찰에 도달한 것이다.동굴의 비유에서는 무지로부터 지식에 이르는 지성의 발달과정을 보여준다. 플라톤은 교육의 과정을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상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자들과 환영들의 지각으로부터 대상들의 직접적인 대면과 궁극적으로는 태양 빛 자체의 원천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여정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를 어릴 때부터 어두운 동굴에 감금된 죄수들의 상태로 묘사한다. 그 죄수들은 팔다리가 모두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은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벽에만 고정되어 있다. 그들 뒤에는 비록 그들은 볼 수는 없지만 타오르는 모닥불이 놓여 있고 그 앞에 어떤 사람들이 인형들과 다른 모형들을 조종하고 있다. 그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들 앞에 세워진 벽에 비춰진 그 인형들의 그림자들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죄수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보고 있는 깜박거리는 그림자들이 실재라고 생각한다. 글라우콘이 이 비유를 ‘이상한 묘사’라고 반대하자 플라톤은 그 죄수들이 ‘우리들의 처지와 아주 흡사하다’라고 대답한다. 어떤 죄수들이 이제 그 동굴에서 풀려나게 된다.그 과정은 분명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는 심하게 저항할 것이고 그가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그의 눈들은 빛의 광채에 너무 눈이 부셔 이제 실재라고 그에게 말해진 사물들 중에 어느 하나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그러나 한번 그의 눈들이 태양 빛에 익숙해지고 그의 팔다리가 자유롭게 되면, 그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을 지각하기 시작할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하고 있다. 이 주장으로부터 이 두 비유는 계몽의 전개 과정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굴 밖으로 나간 죄수들의 여정의 단계들은 선분의 구분들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환영의 단계는 죄수들이 인형들의 그림자를 보며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상태, 신념의 단계는 죄수들이 동굴 안에서 자유롭게 되어 인형들과 모닥불을 볼 수 있는 상태, 수학적 추론의 단계는 동굴 밖에서 대상들의 그림자와 반사된 영상들을 보는 상태, 지성의 단계는 동글 밖에서 대상들을 직접 대면하는 상태이다.3. 비판적 읽기동굴로부터 햇빛으로 나가는 탈출은 참으로 강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식과 교육이 가져다주는 해방과 조명의 힘에 관하여 아름다운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역시 제안하듯이 교육(특별히 철학과 간이 고되고 수준 높은,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는)은 누구에게나 쉽거나 또한 바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경험이 아니다. 최소한 처음에 새로운 지식은 흔히 혼란스럽고 불안감을 조성한다. 따라서 ‘구속’이 필요하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지식의 가장 높은 대상에 오르도록 강요될 필요가 있다”구속이나 강요에 대한 부분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동굴 밖으로 탈출해서 태양 빛을 맛본 사람들은 이제 반드시 되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사회를 통치하는 일에 자신들의 지식을 적용해야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여기에 또다시 강제적인 구속이 적용된다. 그들은 어쩌면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일수도 있다. 태양빛 아래 머물면서 순수하게 지성적인 탐색과 사색을 통해 지적인 희열을 느끼는 일이 그들에게는 좀 더 행복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아 있던 죄수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플라톤은 만약 철학자들이 훌륭한 통치자들이 되려면 그들은 반드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며 사람들의 삶을 공유해야 한다고 한다.과연 철학자들은 이 강요에 행복해 할 것인가. 플라톤릴 수도 있다. 실재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불완전하다. 플라톤은 지나치게 이상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본성이나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에는 너무 무관심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플라톤이 제시한 고등교육 프로그램에서는 수학과 그 연관된 과목들의 학습이 시작된다. 산수와 평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을 배우게 된다. 교육의 목적은 지성을 감각들의 세계로부터 이데아들의 예지계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은, 실용적인 부분이 너무나 도외시 되었다는 점이다. 실재적이고 실용적인 면은 물론이고, 교육의 결과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 점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것이 조금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수학을 배우는 과정은 20세에서 30세까지 10년간 지속되고 그 다음에 철인통치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은 이제 철학과 지식의 최종 단계인 변증술을 배우게 된다. 플라톤이 지칭하는 변증술은 그가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는데 사용하고 있는 질문과 대답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주고받은 의견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비판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철학이 젊은이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철학을 너무 일찍 소개하는 위험에 대해서 장황하게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의 보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상 젊은이들은 적당한 연령에 다다르면 스스로 기성세대들이 중시한 관념과 관습 등에 대해 필연적으로 또한 자연스럽게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철학은 젊은 시기에 가장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린이 철학 교육이 큰 의의를 지닌다는 연구 결과가 있듯이 철학 교육을 늦추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적 통치는 최선자의 통치형태를 의미하며 민주정의 거부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오직 소수의 엘리트만이 철학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참된 지식을 절대 획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본다.
進上本 北學議 후반부* 『진상본 북학의』 후반부고구마 심기, 말단의 이익, 유생의 도태, 둔전에 드는 비용, 하천의 준설, 창고 쌓기, 배(부록 노하운선기), ‘오행을 잃고 버렸다’는 데 대한 생각, 번지와 허행, 장생불사의 방법, 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 재부론, 강남 절강 상선과의 통상론, 존주론(밑줄 : 북학의 내·외편에 수록된 부분)1. 들어가는 말박제가는 1778년 7월 1일 연경에서 돌아온 뒤 평소의 구상과 연행에서 보고들은 견문을 정리하여 3개월 만에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이후 1798년 연말에 정조가 농업을 권장하여 농서를 구하는 윤음을 반포했을 때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농업을 다룬 내용을 추리고 새로운 내용을 보강하여 상소문과 함께 『진상본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그러니 『북학의』와 『진상본 북학의』는 약 2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29살 청년기의 박제가가 쓴 『북학의』와 49살 중년의 박제가가 쓴 『진상본 북학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박제가의 개혁적 사고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퇴색하거나 보수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을까?진상본의 상소문인 에 따르면, 박제가는 일찍이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고 부강하게(利用厚生) 할 계획을 짰는데, 이를 요약하면 선박을 개선하여 조운을 강화하는 것, 수레를 통행시켜 육로의 수송을 강화하는 것, 통상이라고 나와 있다. 이 중에 필자는 진상본의 후반부에 있는 선박과 통상, 둔전을 중심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사회 제도의 개혁 중에서 「유생의 도태」 에 대한 박제가의 사상이 어떻게 심화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진상본 북학의』와 연결되는 내·외편의 내용을 함께 제시하여 파악하고자 한다. 끝으로 내·외편에 없지만 『진상본 북학의』에 추가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2. 이용후생을 위한 방안(1) 선박과 통상박제가는 우리나라가 수레를 이용하는 이익도 완전히 포기했고 배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배를 만드는 기술이 엉성하여 배에 물이 항상 새어 들고, 곡식 또한 물에 젖어 썩거나 젖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나 물건을 뱃전에만 실으니 한 배에 실을 수 있는 용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배를 정박할 때는 사람들이 물에 들어가 등에 져 내려야 하며, 말은 펄쩍 뛰어 뱃전에 들어가야 하는 문제점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박제가가 제안하는 것은 중국에서처럼 널판을 사용하여 배에 장착하고, 배를 정박하는 강가에는 가교를 놓자는 것이다. 그리고 배의 갑판 하부는 창고로 쓰고 상부는 사람이 활용하는 공간으로 쓰면 효율적으로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배를 잘만 이용한다면, 배는 조운과 통상에 큰 이익이 된다. “수레 100대에 싣는 물건이 배 한 척에 싣는 물건을 당해 내지 못하고, 육로로 1천리를 가는 것이 해로로 1만 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않기”때문이다.이 통상의 이익에는 비단 물건의 왕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서양 사람들과의 통상으로 인한 기하학, 건축, 천문, 조선 등 후생에 필요한 도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제가는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박제가는 당시 조선의 가난과 낙후된 기술을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청과 통상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두루 수용하여 생산 효율성을 높여야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고 두터워진다고 주장하였다.(2) 둔전에 드는 비용박제가는 『북학의』 외편 「병론兵論」에서 국방력을 키우기 위한 실천적인 방안을 매우 상세하게 논의하였다. 『진상본 북학의』에서는 「병론」은 없지만, 대신 군비와 관련된 ‘둔전’을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둔전에는 10경을 기준으로 소 20마리, 수레 10채, 인부 20명을 써야 한다. 개간하고 파종하는 일부터 .....따위의 농기구를 장만해야 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이 수만 냥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노는 땅에 함경도 지방의 수레를 이용하고 녹봉을 받는 군병을 동원한다면 비용을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둔전은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정한 토지이다. 그러므로 병력을 강화시키는 것만큼이나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며 둘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박제가는 이에 둔전을 설정하자는 구호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까지 계산하여 국방력을 강화시키려는 자신의 제안에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였다.3. 사회 제도의 개혁 - 「유생의 도태汰儒」박제가는 『북학의』 외편 「과거론1,2」에서 과거제의 개혁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였으며, 진상본의 상소문에서 농업에 해가 되는 것으로 선비를 들며, 이 선비를 도태시켜야만 농업을 장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가 이렇게 선비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는 자라면 다들 과거 시험에 매달리다보니 선비의 무리가 나라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업에 종사하지 않을 뿐더러 농민들을 머슴으로 부리거나 아녀자에게 농사의 책임을 떠넘기게 되니, 선비는 농사를 망치는 가장 심각한 존재라는 뜻이다.그렇다면 도태된 유생들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북학의』 내편 「장사商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놀고먹을지언정 장사를 부끄러워하는 사대부를 비판하면서, “중국은 가난하면 장사를 하는데, 사람만 현명하면 원래 그가 가진 명망은 그대로 유지된다... 세력가에게 청탁하는 유생들은 중국처럼 떳떳하게 장사하는 행위보다 못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유생들의 상인화를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북학의』 외편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사대부에 대해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라고 비판하면서, 수륙의 교통 요지에서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을 사대부에게 허락하고, 밑천을 마련하여 빌려주기도 하고 장사하게 하고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상업을 권장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전 인구의 반이 넘는 비생산적인 양반을 생산층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으로서, 매우 혁신적이고 근대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유생 중에서 누가 계속 공부를 하며, 누가 상업을 할 것인지를 나눠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한 해답이 『진상본 북학의』 「汰儒」에 나오는데, 바로 “속수무책으로 물러날 유생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가정해서 그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유생이 소속된 사문의 장으로 하여금 그의 문장과 행실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지 추천장을 써서 보증하게 한다. 다음에 그가 거주하는 지방의 관장으로 하여금 추천받은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게 한다. 또 엄격하게 사실 여부를 대조한다. 이 과정을 마치면 경서를 강하여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면 다시 고시관 앞에서 시험을 본다. 이렇게 네 단계를 거친다면 무턱대고 시험을 보려고 덤비는 자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네 단계를 거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선비의 길을 가기보다는 상업에 종사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박제가의 사회 개혁 방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고 구체적인 부분까지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근대적인 모습까지 엿보인다.4. 『진상본 북학의』에 추가된 내용 발췌(1) 고구마 심기고구마는 구황 식물로 제일가는 곡물이다. 둔전관을 시켜, 특별히 심게 해야 하며, 고구마 종자를 줄 때는 습기와 어는 것을 피해야 한다. 겨울철에 가옥 내부의 동이에 흙을 담아 두고서 며칠 동안 묻었다가 뽑아서 며칠 동안 놓아두기도 하는데 그러면 고구마가 썩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주어서는 안 된다.(2) 말단의 이익오늘날 사람들은 농사를 권장해야 옳다고 주장하지만, 상인은 사민의 하나다. 그 하나가 나머지 세 부류를 소통시키는 구실을 하므로 10에서 3의 비중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바닷가 백성은 물고기를 잡아야 하고 산골짜기 백석은 나무하는 것을 농사 대신으로 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이 농사를 짓게 한다면 백성들이 생업을 잃을 뿐만 아니라 농사도 날마다 더욱 황폐해질 것이다.(3) 하천의 준설경성 동쪽 10리 되는 곳에 불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있는데, 여름만 되면 폭우가 지나가고, 모래가 아래로 떠 밀려와 점차 퇴적되고, 물이 옛길을 잃고 범람하여 사방으로 넘쳐흘러 황야로 변해 버렸다. 이제 하천을 준설하는 중국의 방법에 따라 지맥을 뚫고 물이 모여드는 입구를 통하게 한다. 단지 물이 평지 아래로 흐르도록 뚫기만 해도 제방을 쌓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다음에 옛날의 밭두둑을 복구하고 밭이랑을 새로 만든다면 전답은 예전 상태를 회복하여 한 해에 수천 섬의 벼를 수확한다. 물길이 막힌 곳 10리를 조사해 보면, 10리 전체가 막힌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지체되고 막힌 데가 있어서 범람하는 것이므로 물길의 높낮이와 길목을 살펴서 물이 빠르게 흐르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곳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한강과 금강은 곳곳을 준설해야 알맞다.(4) 창고 쌓기(내편의 「벽돌」과 유사함)창고는 반드시 벽돌로 쌓는다. 혹은 석란으로 바닥을 다져 화재를 막고 쥐의 출입을 방지하여 습기를 막기도 한다. 창고만이 아니라 가옥의 벽과 구들도 다 벽돌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민가 중에 잘 기울거나 네모반듯하지 않은 것은 벽돌을 사용하지 않은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