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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학] 남북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비교 평가B괜찮아요
    ◈ 남한남한의 입법부로는 국민의 대표 기관이자 입법 기관으로서 국회가 있다. 이는 대의제 실현의 표상으로서 집행부와 사법부를 감시· 비판· 견제하는 국정통제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로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발췌개헌, 유신헌법 제정 등의 여러 개정절차를 거쳐 현재 국가의 통치체제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규정한 기본법으로 공법의 하나인 헌법을 가지고 있다. 그 외의 공법으로 행정법, 형법, 민사 소송법, 민사 소송법 등이 있고, 사법으로 민법, 상법, 사회법으로 노동법, 경제법, 사회보장법 등이 있다.◈북한북한의 입법부로는 최고입법기관으로서?최고 인민회의‘를 설치하였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헌법을 채택하고, 이후 1972년 12월에 헌법을 개정하여?사회주의헌법?을 제도화 시켰다.또한 북한의 법령은 남한과 똑같이 존재하고 있으며, 민법, 교육법, 민사소송법, 세관법, 보험법 등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남한북한입법기관국회최고 인민회의헌법개정절차를 거쳐 존재하고 있음개정절차를 거쳐 존재하고 있음기타 법률공법, 사법, 사회법 등으로 나눌수 있으며 세부적으로 민법, 상법, 형법, 노동법, 사회보장법 등 다양민법, 교육법, 민사소송법, 세광법, 보험법 등 다양◈ 남한남한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서의 행정부는 대통령을 그 수반으로 두고 있으며, 국가 원수로서의 권한(국가 대표권, 헌법 수호권, 국정 조정권, 헌법 기관 구성권)을 가지고 있다. 그 아래 대통령의 권한 대행자로서 대통령의 보좌 기관, 잽행부의 2인자, 국무 회의 부의장의 역할을 하는 국무총리가 있다. 또한 행정부 최고 정책 심의 기관으로 국무 회의를 두고 있다.◈ 북한북한은 최고 권력기관으로서 ‘조선노동당’과 ‘국방위원회’가 존재한다.남한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북한의 조직은 내각으로 불리는 기관으로 ‘국방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의 하부조직이다. 지난 1998년 5월 최고인민회의 새로운 형태의 정부조직으로 내각을 출범시켰고 기존의 중앙인민위원회와 정무원을 폐지하였다.우리나라의 대통령제와는 그 성격은 다르나 주체사상이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립되면서 김일성 유일체제가 성립되었다. 김일성이 수령으로 불리게 되었고 사망 후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불리며 독재체제를 형성하고 있다.북한의 내각은 남한의 행정부와 같은 것으로 외교 및 경제정책을 비롯한 각종 국가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내각은 총리와 부총리로 이루어지며 33개 부서로 이루어진다.(22위원회, 27성, 1원, 1은행, 2국) 그리고 그 밑으로 각 시.도민위원회가 존재한다.남한북한국가 운영행정부내각최고 권력기관대통령조선노동당, 국방위원회구성형태대통령-국무총리-장관-공무원조선노동당, 국방위원회-내각-총리-부총리-각 시,도민위원회◈ 남한우리나라 사법 기관은 법원을, 개인 간의 다툼을 법원에서 대신 재판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원의 조직은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심급제도(3심제도)를 두고 있다.또한 검찰제를 두고 있어 범죄를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여, 법원에 법의 정당한 적용을 하는 국가행정 작용. 현재 한국에서는 국가소추주의와 기소독점주의에 의해서 국가기관인 검사가 이 작용을 담당하고 있다. 즉 일반의 형사소송에 있어서는 검사가 국가기관으로서 검찰권을 행사한다. 검사는 각자가 단독제의 관청으로서 모두 자기의 이름으로 검찰사무를 행할 권한을 가지며, 각자가 국가기관으로서 의사를 결정·표시한다.
    법학| 2004.06.03| 2페이지| 1,000원| 조회(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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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기초] 이라크 전쟁이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 미치는 효과 평가B괜찮아요
    Ⅰ. 序論·이라크 전쟁의 발발 원인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그 원인에 있어서 악의 축이며 악랄한 독재자인 후세인 家로부터 무고한 이라크 주민들의 자유를 찾아주기 위함이고, 이라크가 대량살상, 파괴무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된 원인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부수적인 원인, 아니 어쩌면 원인에 해당하지도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된 원인은 석유 이다. 일찍이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의 회견 기사에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무기 산업과 석유 자본을 즐겁게 하려는 동기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또한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이라크 공격의 비밀스런 동기는 바로 '검은 황금'이라고 지적했고, 만델라와 이코노미스트 모두 '석유 요인'이 이라크 공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임을 지적한 것이다.석유는 신생대 제 3기층 배사구조에 집중적으로 구성 되어있다. 그 지역이 지금의 대부분 중동지역 국가들의 지역이 된다. 즉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란 등의 지역이 해당된다. 그 중에서도 이라크는 석유 대국이다. 확인된 매장량만 1천1백25억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다. 여기에 개발 안된 것(2천2백억 배럴 정도)까지 합하면 사우디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또한 이라크의 석유 매장 형태는 지표에서 아주 가깝게 매장되어 있어서 그 개발에 유리하며, 개발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또 품질이 뛰어나며 채굴 비용이 적게 먹혀 수익성이 높다. 석유 전문가들은 "이라크에 관심을 갖지 않은 석유 회사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도 이라크는 미국의 주요 석유 공급원이다. 하루 약 1백만 배럴을 수입함으로써 전체 수입량의 9%, 수입선 가운데 6위를 차지한다. 이러한 황금의 땅을 미국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다.미국은 세계 제 1의 석유 수입국가이다. 하루 2천만 배럴을 소비하는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가인 것이다'21세기 에너지정책 보고서'는 이라크가 중동 석유의 국제시장 공급에 불안 요인이 되고 있으며, 석유 무기화와 수출 조절을 통한 유가 조작으로 미국이 수용할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있으므로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미국 석유회사들은 그 동안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경제제재로 불이익을 당해왔다. 이라크 석유는 1927년이래 영국과 미국 석유회사들이 장악해 왔으나 72년 이라크의 석유 국유화로 기득권을 상실했다. 특히 91년 걸프전 이후 후세인 정권이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인도 석유회사들에만 특혜를 줌으로써 이대로 가면 이라크 석유로부터 영영 배제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껴왔다.현재 이라크는 비(非)미국, 영국 석유회사들과 30건 이상의 대규모 개발 계약을 해 놓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이미 개발에 들어간 상태다. 이라크 공격에 미국 석유회사들의 입장이 고려됐을 것이라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부시 행정부는 석유 자본과 가깝다. 한때 석유 회사를 소유했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딕 체니 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도널드 에번스 상무장관 등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 41명이 석유회사 출신이거나 대주주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미국이 후세인 정권 타도 후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는 해외 반(反)후세인 세력이 과거 후세인 정권이 맺은 모든 계약은 무효며, 미국 석유회사들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사실이다.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이라크의 석유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확보할 것이다. 이라크 석유에 세계 4위 매장량의 쿠웨이트,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진출한 중앙아시아, 카스피해의 석유까지 합하면 미국은 세계 에너지 수급 체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를 통해 미국의 오랜 숙제인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카르텔을 무력화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라크 공격은 '국제 석유 질서' 재편이라는 대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Ⅱ. 本論·이라크 전쟁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우리는 이쟁으로 인해 유전이나 송유관의 파괴로 인해 석유가 유실되면서 유가가 상승되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석유 수급이 어렵다.전쟁은 경제주체들의 심리변화를 통해 경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유가 상승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소비 심리가 악화되고 기업들의 수익과 투자가 부진해졌다. 이러한 경제주체들의 심리위축은 금융시장에서 주가 하락 등으로 즉각 나타난다. 환율이 하락하고, 금융시장이 불황을 겪게 되면서 금리가 낮아지고, 주가도 또한 날로 떨어지고 있다.심리위축은 금융시장 뿐 아니라 소비와 투자 경로를 통해 경기변동폭을 확대시키는 등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소비 및 투자심리 위축은 실제로 민간소비와 민간투자를 위축시키는데 경기가 상승추세에 있을 때는 산업생산 둔화가 일시적으로 나타난 후 사라진다. 하지만 경기 하강기엔 산업생산이 감소추세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소비와 투자가 과민반응을 보일 경우 경기침체의 폭이 과도하게 커질 수 있다.건강할 때는 가볍게 지나가는 병이 몸이 허약할 때 중병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 전쟁 발발시점이 경기 호황기 또는 회복기일 때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지만 경기가 이미 하강기에 진입했을 때는 전쟁의 부정적인 효과가 확대되었던 것이다경기상황이 좋았던 시기에 시작된 전쟁은 오히려 단기적으로 경기와 고용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1939.9.1∼1945.8.14)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은 대공황의 수렁에서 벗어나 1939년 8.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1940년에도 8.5% 성장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1941.12.7)으로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전쟁중 국방비 지출 증가와 유럽을 대체한 생산기지 특수에 힘입어 1941∼45년 중 평균 11.3%의 높은 경제성장세를 구가하였다. 군대소집으로 노동인력이 노동시장을 빠져나가고 부족한 인력을 실업자들이 채우면서 실업률도 크게 하락했다. 1940년 14.6%에 달하던 실업률은 1944년 1.2%까지 감소하였다. 27차 대전이 끝나자 오히려 성장 3/4분기까지 6.2%의 성장률, 3.3%의 실업률을 기록하는 등 호황을 누리다가 종전 직후 다시 침체기에 들어갔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1961년은 미국이 1964년 8월부터 베트남에서 철수(1973.1.28)할 때까지 한번의 경기순환주기(호황-불황-호황)를 겪으면서 평균 4.4%의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고 참전 1년 전 5.4%까지 내려갔던 실업률도 전쟁기간 중 평균 4.5%로 낮아졌다.그러나 경기 하강기에 시작된 전쟁은 소비 및 투자심리위축, 주가 하락 등의 경로를 통해 경기침체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걸프전(1990.8.2∼1991.2.28)의 경우 1988년 4.2%를 기록한 경제성장률은 1989년엔 3.5%, 1990년 2/4분기에는 0.9%로 급락하는 등 경기가 본격적인 하강기에 들어설 때 발생하여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1990.8.2)한 3/4분기부터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최근의 경제상황은 지난 걸프전 당시보다 더 어렵다. 걸프전 당시에는 유럽, 일본 등 주요국가의 성장엔진이 모두 건재하여 전쟁이라는 외부충격에 대한 완충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미국경제만이 유일한 성장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도 주가하락, IT경기 회복지연, 과잉설비 등으로 둔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고, 이라크 전쟁이 종결되더라도 가계소비 및 기업투자 회복전망도 어두워 향후 세계경제는 걸프전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라크 전쟁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앞서 세계경제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나라의 경제적 악화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1,2차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경제가 매우 어려웠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특히 2차 오일 쇼크의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 당 10달러 대에서 40달러 이상으로 껑충 뛰면서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80년에 경제성장률은 -2.1%로 하락했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격 직전에는 41.7달러까지 치솟았으며,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개시되면서 다시 급락하여 배럴 당 20달러 초반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비교적 단기간에 마무리된 당시의 유가 급등 사태도 1991년 미국경제의 마이너스 성장(-0.5%)으로 귀결된 바 있다. 물론 당시의 경기침체를 전적으로 유가상승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세계경제 성장률은 유가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왔다.우리 나라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맞추어가는 국가이다. 자원도 없고, 기술이 많이 발달되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의 기술은 부족할 따름이라 수입을 주로 하는 나라여서, 특히 미국의 경제 사정에 따라 좋았다가도 또 나빠지기도 하고 그렇다.현재 우리 나라는 IMF 이후 최대 경제 위기에 국면하고 있다. 새로이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고 있고, 실업률 또한 최대이다.우선 대기업들도 채용을 대폭 줄였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기업들의 올해 전체 채용규모는 9933명으로 지난해 채용규모인 1만7224명에 비해 42.3%나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또 대기업 10개 가운데 4개 이상이 하반기에 채용계획이 없거나 소수 인력만 수시 채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노동자들의 월급 또한 오르지 모하고 있는 추세이다. 경기가 불황이 되면서 물가가 오르고, 그런 이유로 한반도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의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고, 지하철은 노숙자들의 주거지가 되고 있다.우리 정부와 기업은 다시 한번 위기 의식을 갖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외부 환경의 악화만으로 경제가 위태로워지는 경우는 드물다. 내부적인 위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위기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선 정부는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유가 상승으로 인플레 압력이 나타나더라도 긴축 정책보다는 경기가 하강하는 것을 막는 데 주력해야 한다. 긴축 정책을 실시할 경우 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되어 연쇄도산과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것이다.그리고 우리가 이라크 전쟁 당시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던 이유도 경제적인 다.
    경영/경제| 2003.11.04| 5페이지| 1,000원| 조회(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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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사회] 군주론을 읽고
    군주론이 쓰여졌을 당시 시대적으로 이탈리아는 혼란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이탈리아 반도는 지속적으로 분열이 심해졌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끊임없는 외부에서의 침입으로 사회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의 혼란, 부패된 이탈리아반도의 통일을 위해 길을 제시하고자 한 저서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이탈리아반도에서 중요한 것은 피폐함과 외세에 의해 궁지에 빠져있던 이탈리아를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탈리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통일과 외세의 추방에 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와 군주가 필요하다. 즉 이러한 사회적인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강력한 군사력과 지도력을 가진 전제 군주다.인류를 지배해온 모든 국가와 병합국가는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다. 군주국은 통치자들이 여러 해 동안 동일한 왕가출신인 세습적 군주국이거나, 신설군주국이다. 여기서 대대로 동일한 왕가에 의해 통치되는 세습국가의 유지가 신생 군주국의 유지보다 훨씬 쉽다. 그것은 선조 전래의 관례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자기 자신을 예측 못하는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영토를 새로 차지하고 그 영토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우선 왕족의 혈통을 근절시키는 일, 원래 존재하고 있던 법률이나 조세를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정책을 펴나간다면 짧은 시일 내에 두 나라는 혼연일체가 되어 한 나라를 만들게 된다.새로 얻은 나라를 보전하는 일이 어려운가를 보고 어떤 사람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은 불과 수년 동안 아시아의 맹주(盟主)가 되었지만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전체 나라는 모반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대왕의 후계자들이 그 영토를 잘 유지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역사에 알려져 있는 왕국은 군주와 그 신하들에 의한 것이 있고, 군주와 제후들에 의한 것 이 두 가지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군주와 신하들에 의한 왕국은 신하들이 군주를 모시고 군주는 신하를 다스리게 된다.이러한 나라의 군주는 권위가 더 높다. 그러나 군주와 제후에 의한 왕국은 제후들이 군주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제후들 각각의 나라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전자의 경우는 점령하기는 곤란하지만 일단 정복하면 보유하기는 쉽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정복하기는 쉬우나 보유하기는 곤란이 따른다.획득한 국가가 자기들의 고유법 아래서 자유로이 살아온 경우에 이러한 국가를 유지함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그러한 도시를 멸망시키는 것, 둘째, 그곳에 군주 자신이 이주하는 것, 셋째, 그들 주민이 종전 그대로의 법률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고 그 영토 내에 군주와 밀접한 우호를 지속하는 과두정치의 정부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정권은 군주의 힘으로 만들어지므로 소수자는 군주의 호의와 영향력을 잃고서는 자기들이 존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충성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해 온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그 시민을 이용하는 것이 보다 쉬운 것이다.새로운 병합 국가에 있어 새로운 군주가 있는 경우 그 국가를 획득한 군주의 역량이 크고 작고에 따라 국가 보전이 쉽다. 한 평민이 군주가 된 경우는 당연히 큰 능력이나 행운을 가지리라고 예상되므로 이러한 것 중 어느 하나가 어느 정도 수많은 곤란을 완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에 의하지 않은 사람은 가장 안전하게 유지된다. 군주가 다른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정복한 영토에서 거주하지 않으면 안될 때는 이 문제를 쉬워진다.그러나 행운 또는 능력에만 전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것으로서 군주로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아직 남아있다. 우선 그것은 악행에 의해 군주가 되었을 때이다. 아가토클레소와 기타의 다른 사람들이 배반과 잔인한 행동을 무수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에서 오랫동안 평안하게 살 수 있었고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으며 동료시민에 의한 모반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 것인가. 다른 많은 지배자들은 그들의 잔인성 때문에 위험한 전시는 말할 나위도 없고 평화시조차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였는데 말이다.두 번째는 일반 시민들의 호의에 의해 군주가 되는 시민적 공국이다. 사람이 군주에 오르는 것은 일반 시민의 호의에 의하거나 귀족의 호의에 의한다. 왜냐하면 어느 도시에서도 이러한 두 가지 대립적 당파가 있으며, 백성은 귀족의 지배와 압박을 바라지 않으며, 귀족은 백성을 지배하고 또 압박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의 대립하는 이해는 도시에서 세 가지의 결과 중의 하나를 발생시킨다. 즉 군주정체, 공화정체, 무정부가 그것이다.군주는 필요한 경우에 있어서 자기의 힘만으로 유지할 수 있거나 언제나 다른 사람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군주는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군주는 조국의 현상을 한 몸에 구현하여 실력으로 조국의 영광을 실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참다운 군주는 조국의 구제 이외에 대해서는 배려해서는 안 된다. 냉정하고도 영리하고, 민첩한 지(知)와 용맹(勇猛), 과감한 용기(勇氣)야말로 군주의 덕(德)이다. 따라서 군주는 국가를 위해서 도덕도 종교도 고려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자기의 기초를 훌륭하게 가지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지 않으면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가의 주요 기초는 훌륭한 법률과 훌륭한 군대에 있다. 그리고 훌륭한 법률이 없는 곳에 훌륭한 군대가 있을 수 없고 훌륭한 군대가 있는 곳에 훌륭한 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자기 영토를 지키는 군대는 자기 자신의 것이거나 원병, 또는 혼합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병이나 원병은 백해무익하다.군주는 신하나 자기 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가? 인간이란 모든 것을 갖출 수 없으므로 군주가 완벽한 기질 전부를 가지고 지켜갈 수 없다. 그러므로 군주는 자기에게서 나라를 상실할 악덕의 추문(醜聞)을 피할 정도로 충분히 신중해야하며, 될 수 있으면 나라를 상실할 걱정과는 관계없이 보이는 추문도 피할 정도로 신중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런 평판에 개의치 말고 되는대로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관대한 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도리어 이것이 적당한 방식으로 이용된다면 악덕이라는 불명예를 얻을 것이다. 오늘날 위업(偉業)을 이룩한 사람은 인색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뿐이며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멸망했다. 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받는 쪽이 훨씬 안전하다.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나 신의를 지키려다보면 군주가 곤란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처신해야 하다. 특히 새로운 운명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서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여우는 이리에게 공격당할 수 있고, 사자는 인간이 만든 올가미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리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사자의 위엄과 올가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여우의 지혜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군주는 미움을 산다거나 경멸 당하는 일을 피해야한다. 이것에 성공한다면 군주는 자기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며, 악행이 있다 하더라도 위험한 경우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군주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군주가 경멸 당하는 것은 군주가 변덕스럽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무기력하며 결단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군주는 이런 것들을 하나의 암초로 생각하여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행동 가운데 위대성, 용맹성 진지성 불굴의 정신이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군주의 신하를 선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 선악은 군주의 심려 여하에 의해 정해진다. 세상 사람이 군주와 그를 보필할 신하에게서 얻어지는 첫인상은 군주에 가까이 있는 신하들을 보는데서 온다. 그 신하들이 유능하고 충실할 때에는 세상 사람은 언제나 군주를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군주는 신하들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었고 신하들의 충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들이 그 반대인 경우에는 사람들은 언제나 군주를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군주가 신하 선택에서 첫 번째의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군주가 신중하지 않거나 선택을 잘못 하면 안 된다. 이것은 아첨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을 때에는 군주의 존엄이 상실된다. 그러므로 신중한 군주는 고문회에 현인들을 선택하고 이들에게만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이들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결의된 문제는 신중히 수행하고 자기의 결단에 있어서 결정해야 한다.이탈리아의 모든 군주가 왜 자기들의 나라를 잃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결함을 가졌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의 군사에 관해 상세히 논한 이유로 인해 공통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 둘째, 그들 군중 중 몇몇 사람은 민중을 적으로 본다는 것, 셋째, 그들 군주들은 민중이 우호적으로 있었을 때 귀족을 잘못 조정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들이 전투에서 이길만한 충분한 군비를 가지고 위와 같은 결함이 없었다면 결코 나라를 잃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운명은 인간사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고 또 운명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운명이 변하고 인간이 자기 행동에 고집할 때 양자가 일치하는 동안은 성공하겠지만 일치하지 않을 때는 실패한다. 주의 깊은 것보다는 맹렬한 것이 좋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운명을 지배하려고 원한다면 그 운명을 실력으로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명은 냉정히 일을 처리해 나가는 사람보다 오히려 대담한 사람에게 잘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운명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젊은 사람들은 주의가 깊지 않고 난폭하고, 그리고 대담하게도 운명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03.11.04| 4페이지| 1,000원| 조회(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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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지리] 동북아 해양 관할권 문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 문제-해양관할권 문제: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과의 해양분쟁 -Ⅰ. 서론21세기는 해양의 시대라고 할만큼 바다에 대한 중요성은 시대가 가면 갈수록 더욱 증대되고 있으며, 해양관할권의 확보를 위해서 세계 각 국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서 20세기 후반에 들어 육지영토에 관한 국제분쟁은 사라져가고 있는 반면, 무인도인 바위섬에 관한 영유권 분쟁을 포함한 바다에 관한 국제분쟁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더욱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그 주변국가들은 서로 인접해 있어서 바다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기 쉽다.특히 배타적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 EEZ)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그 갈등은 커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 국가 간의 해양 경계 획정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경계를 획정하고 분쟁을 막기 위해 각 나라 간에는 협정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과 인접해있는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과의 어업협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Ⅱ. 본론1. 한·일 어업협정1) 1965년 한·일 어업협정(1) 협정 배경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조인된 한일어업협정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 서 일본으로부터 경제개발에 필 요한 자금을 얻어내기 위한 자발적으로 감수한 불평등조약으로 평가된다.박정희 정권은 1960년 4월 혁명의 역사적 정당성을 억압한 5.16 군사 쿠테타에 의해 탄 생된 군사정권이었기에 정권의 안정적 기반을 위해 우호국인 미국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경제개발과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자금의 필요성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절실히 요 구 되었다.이러한 1965년의 한·일 어업협정은 구 한·일 어업협정이라고도 하며, 1965년 6월 22 일 체결되어 같은 해 12월에 발효되기 시작했다.(2) 주 협정내용첫 번째, 한국이 기선으로부터 12해리까지의 연안수역만을 한국어민들의 전관수역으 로 할 수 있도록 일본으로부터 허가를 구 말한다. 이를 일본도 같은 해인 5월에 선포하게 되었다.또한 트롤어선 조업금지 라인을 설정하고 1979년 홋가이도 주변수역에서 조업하는 한국 트롤어선단에 돌과 화염병을 던져 조업을 저지한 이른바 무로랑 사건 을 일으켰 다. 이러한 어업 분쟁을 막기 위해 1978년 10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협의를 거쳐서 한 국이 제시한 을 기초로 1980년 10월에 북해도와 제주도 주변수역에서 양국의 자율적 규제를 내용으로 하는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지만, 1982년 12월 10일 자메이카에서 채택된 에 의한 배타적 경제수역 선언이라는 국제적인 상 황에는 미흡한 합의이었다.그러다가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이 채택되고 1994년 11월부터 공식적으로 효력이 발생 하면서 1965년 당시의 한일어업협정도 새로운 국제어업환경에 맞게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일본이 1996년에 배타적경제수역을 선포하고 1965년 어업협정을 일방적 으로 종료시키면서 새로운 어업협정이 더 절실해졌다. 그리하여 1997년 7차례,1998 차례 공식협상을 거쳐서 1998년 새로운 한·일 어업협정이 체결되었다.(2) 1998년 한·일 어업협정은 일명 신 한·일 어업협정이라고도 한다. 이 협정은 1998 년 10월 9일 가서명 되었고, 1998년 11월 28일 체결되어 1999년 1월 22일 발효되기 시작 하였다. 이 협정의 만료일은 2002년 1월 22일인데 만료일 이후, 일방 당사국이 타 당사 국에 대해 종료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1년씩 연장하게 된다.{ 한·중·일 간 어업협정도(3) 주 협정내용첫 번째, 동해 중간수역의 설정이다. 중간수역이란 한일 양국이 EEZ을 긋게되면 어쩔 수 없이 겹치는 부분이 생기게 되는데, 이 겹치는 부분에 한해서 양국이 공동조업을 할 수 있도록 설정해 좋은 것을 말한다. 이 중간수역에 대해 일본에서는 잠정수역이라고 부르기 도 한다.두 번째 우리 나라는 동해의 울릉도를 중심으로 하여 35해리, 일본은 오키섬을 중심 으로 하여 35해리가 되는 지역에 배타적경제어업협정이후 그 황금어장의 50%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어민들의 어획량은 감소하여 피해를 보게되는 것이다{19971998199920002001강원도어업생산량(M/T)110,03574,31867,79860,68759,158어업가구수(가구)5,5125,5465,7234,8144,510경상북도어업생산량(M/T)154,248142,659160,343143,466133,541어업가구수(가구6,5516,5616,3755,7785,561 동해구 어민의 피해위의 표에서 보면 동해구의 어업 생산량과 어업 가구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볼 수 있다.2 제주도 남부수역을 이용하는 어민들제주도의 남부수역의 경우 어종이 풍부한 대륙붕지역인데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설정이 후 그 대륙붕의 10분의 8을 내어준 셈이 되고 10분의 2정도만 중간수역으로서 공동조업 을 할 수 있게 되어 실제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10분의 1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 다.II. 한·중 어업협정1. 한·중 어업협정 체결 전1) 1970년 이전까지는 중국 수산업계의 낙후된 실정으로 조업수역범위가 연안에 가까운 수역에서 이루어지고, 1980년대 이후에는 중국의 개방정책추진으로 어선의 대형화, 어 장의 확대로 우리나라 어장으로 불법진출 활발하였다. 또한, 1992년 국교 정상화이전 비공식적으로 상호관할구역에 침범하는 어업나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촉이 이루어 졌다. 이렇게 양국 간 어업협정체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중국 측의 미온적 태도로 지 연되어 오다가 한·일, 중·일간 어업협정이 완전히 타결된 이후 맺어졌다.2. 2000년 한·중 어업협정1) 한·중 어업협정은 1998년 11월 11일 가서명하여, 2000년 8월 3일 체결하게 되었고 2001년 6월 30일 발효되기 시작했다. 이 협정의 만료일은 발효일로부터 5년으로, 5년이 지난 이후에는 한·일 어업협정과 마찬가지로 한쪽에서 파기하지 않으면 1년씩 연장하 게 되어있다.2) 주 협정내용첫 번째, 배타적경제수역체제도입이다. 여기에서의 배타적 경제수역은 서해 데 만약 여기서 중국배들 이 자유롭게 조업한다면 국가 안보상의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금지시켰던 것 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중국 측이 주장했던 양자강 하구에서의 조업을 1년에 3개 월 동안은 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하여 가서명을 하게 된 것인데 이후 중국이 양자강 조업 전면 금지를 들고 나왔다.서해5도의 특정해역이나 양자강 하구는 이 두 곳은 각 해당 나라의 연안해역이기 때 문에 정치적이면서도 경제적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다.{19971998199920002001경기도어업생산량(M/T)16,21317,22720,29320,80518,926어업가구수(가구)2,2242,4102,4381,8071,796충청남도어업생산량(M/T)69,237110,76182,30888,64377,290어업가구수(가구)12,18812,14811,9729,4449,130전라북도어업생산량(M/T)65,55272,82777,15265,40662,710어업가구수(가구)4,6864,6864,6654,2754,224 서해구의 어업생산량위의 표를 잘 살펴보면, 서해구의 대부분 지역에서 생산량이 감소하는 추세를 볼 수 있 다.2 중·일 어업협정 때 설정한 잠정조치수역의 문제- 우리나라 제주 남부수역의 일부가 중·일 어업협정의 중간조치수역에 들어가면서 우 리 나라 어획량에 심한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일 어업협정 때 설정해 놓은 제주도 남부수역의 중간수역이 중일 어업협정의 잠정조치수역에 포함됨으로써 전 남의 어획량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곳의 어획량은 전남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 한 수역인데 중국까지 이 수역에서 조업을 할 수 있도록 설정되어버려서 전남의 어획 량에 타격을 입히고 있다.{19971998199920002001전라남도어업생산량(M/T)918,882642,993640,181513,095514,594어업가구수(가구)34,20833,41132,62926,93625,606 전남의 어업생산량※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일 어업협정과 중·일 어업협정으로 인해 우리994. 10. 24 ∼ 1994. 10. 28 (5일간)5차 한·러어업위원회 회의1995. 10. 23 ∼ 1995. 10. 27 (5일간)6차 한·러어업위원회 회의1996. 12. 5 ∼ 1996. 12. 9 (5일간)7차 한·러어업위원회 회의1997. 11. 24 ∼ 1997. 11. 29 (6일간)8차 한·러어업위원회 회의1998. 11. 16 ∼ 1997. 11. 20 (5일간)9차 한·러어업위원회 회의1999. 11. 29 ∼ 1999. 12. 5 (7일간)10차 한·러어업위원회 회의2000. 12. 5 ∼ 2000. 12. 10 (6일간)11차 한·러어업위원회 회의2001. 11. 22 ∼ 2001. 11. 27 (5일간) 한·러 어업위원회 회의2. 주 협정내용1) 첫 번째, 태평양서부수역의 해양생물자원의 보존 및 최적이용에 대해 러시아가 책정 해놓은 정책을 한국이 존중해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태평양 서부수역은 쿠릴열도 주변 바다와 오호츠크 해, 베링 해를 말하는데, 쿠릴 해에서는 대부분 꽁치조업을 하고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에서는 명태조업을 한다.{ 태평양 서부수역 (러시아 해역)두 번째, 어선 수리 및 건조에서의 상호지원이다.세 번째, 양국기업 및 회사에 대한 합작기업 설립 지원이다.3. 문제점매년 한·러어업위원회 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우리나라에 할당된 어획쿼터량의 감소 한 다는 것이다. 다음의 그래프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내어주는 쿼터량위의 그래프에서 보면 2차 어업위원회 때인 1992년에 어획 쿼터량이 급증 한 이유는 1991년 말, 소련 공산권이 붕괴되자 재정난이 극심해지면서 1톤 어획시 얼마를 받게되는 입어료로 재정난을 타파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후 어종의 감소와 러시 아 측에서의 어종 보호 정책으로 우리나라가 받는 쿼터량이 줄어드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원양 어업1957년에 인도양, 1961년에 남태평양의 사모아 제도 근해에서 참치 잡이를 시작한 이래 수출 산업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
    교육학| 2003.11.04| 11페이지| 1,000원| 조회(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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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삼국유사를 읽고
    지난번 三國史記를 읽었던 것에 이어 이번에는 三國遺事를 읽게 되었다. 두 개 다 우리 나라의 歷史 전반을 다룬 역사서이지만 똑같은 사건에 대해 다르게 서술해 놓은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三國史記는 유교적이고,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사관에 의해 서술된 것이라서 귀족적인 느낌이 들면서 어딘가 모르게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三國遺事같은 경우는 불교적이면서 서민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三國遺事가 더 읽기가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항간에는 三國遺事는 野史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三國史記에 비해서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三國史記에서 빠뜨린 중요한 문화적 유산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이 책에서 전해주고 있는 문화적 유산은 三國時代를 비롯하여 그 이전, 高麗時代 당시까지 전승되어 오던 설화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三國史記같은 경우는 유교적 관점에서 편파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 결과로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 등의 빠진 내용을 三國遺事가 대신 가르쳐 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는 생각이 든다.이 책에서는 三國時代의 인물들에 대한 신화가 매우 다양했다. 古朝鮮의 檀君神話에서부터 高句麗의 晝夢의 神話, 新羅의 朴赫居世 神話 등 다양한데 이들 신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건국자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후손임을 강조했고 자신들 국가의 정당성과 신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예시해주는 것 같았다.또한 삼국 유사에 씌어져 있었던 護國과 忠節 정신을 보았다. 百濟의 義慈王 時代의 충신 成忠(淨忠)은 그 忠心이 中國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義慈王 때 佐平을 지내면서 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국운을 염려하여 極諫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외적의 침입을 예언하며 陸路는 炭峴에서, 水路는 伎伐浦에서 적을 막으라는 유서를 의자왕에게 남기고 죽었다. 이렇게 죽기 직전까지도 나라의 몰락을 걱정한 것이었다.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奈勿 麻立干과 金堤上 에서 金堤上의 忠節 또한 더욱 빛나고 있다. 高句麗와 倭國 볼모로 잡혀있는 두 왕자를 떳떳하게 국력으로 데려오지 못할 정도로 新羅의 국력이 쇠약하던 시기였지만, 金堤上은 끝까지 나약한 국가를 저버리지 않고 충절을 지킨 것이다. 이런 충절의 정신은 花郞의 정신으로 인해서 길러진 것으로, 후에 新羅는 비록 唐과의 연합이기는 하지만 三國을 통일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자신들의 나라를 걱정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충절과 충심은 후손인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들이 아닌가 싶다. 요즘은 자기 나라를 걱정하고 앞날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모두들 자기들만 살기 바쁜 세상이다. 나라가 없고서는 자신들도 없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라도 없이 세계 곳곳에서 뿔뿔이 흩어져 사는 유태인들은 지금은 잘 살지만 과거에는 나라 없는 슬픔을 크게 겪어야 했었다. 전례가 있는데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걱정은 아니더라도 고마움 정도는 느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읽었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이 이야기는 新羅의 聖德王 때의 이야기이다. 純貞公이 강릉태수(지금의 명주)로 가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옆에 병풍같은 바위 벽이 있어 바다에 맞닿았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으로 뭇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도 하고, 귀신들조차도 자주 탐을 내서 자주 잡아가기도 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기로 소문이 난 水路가 그것을 보고 옆 사람들에게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자 그 누구뇨?" 하니 모시는 사람들이 모두 "사람이 발 붙일 곳이 못 됩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 곁에 늙은 노인이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주면서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있는 암소 높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라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이것이 삼국사기에는 실려있지 않은 獻花歌이다. 이것은 新羅의 鄕歌로서 獻花歌는 4구체에 해당한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新羅의 鄕歌가 14수나 전해지고 있다.몇 년전, 국어시간에 新羅時代의 鄕歌를 배운 적이 있고, 그 향가는 삼대목과 균여전과 삼국유사에 전해진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것을 까맣게 잊고서는 삼국유사에서 이렇게 유명한 鄕歌인 獻花歌의 배경설화를 읽고 나서 바로 아! 이것이 향가다 라고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배웠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공부를 한다는 것의 중요성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여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는 廣德과 嚴莊 이었다. 이들 둘은 친구사이로서 극락 세계에 갈 때 서로 알리기로 했다. 그리고 廣德이 친구에게 기별하고 극팍으로 갔다. 친구를 장사 지낸 뒤, 嚴莊은 廣德의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하자 廣德의 아내는 허락을 한다. 그러나 嚴莊이 그 아내와 동침하려고 하니 그녀는 정색하고 亡夫와도 10년을 동거하였지만 한번도 동침한 적이 없다며 스님이 정토를 구하는 것은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밤마다 달빛에 정좌하고 아미타불을 외우며 수행한 廣德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후 수치를 느낀 嚴莊은 元曉를 찾아가 感觀法을 배우고 열심히 불도를 닦아 극락에 갔다고 한다.
    독후감/창작| 2003.11.04| 2페이지| 1,000원| 조회(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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