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그 화합과 기원의 이미지에 대하여중어중문학과 2학년 김지현海上生明月) hai shang sheng ming yue 바다 위로 밝은 달 떠오르니天涯)共此時) tian ya gong ci shi 하늘 끝에서도 이때를 함께 하고 있겠지.情人)怨遙夜) qing ren yuan yao ye 사랑하는 님은 긴 긴 밤을 원망하니竟夕)起相思 jing xi qi xiang si 밤새 잠 못 들고 그리움에 잠긴다네.滅燭憐光滿 mie zhu lian guang man 촛불 끄고 방 안 가득한 달빛을 즐기다가披衣)覺露滋) pi yi jue lu zi 옷 걸쳐 입고 나가니 축축한 이슬 느껴지네.不堪)盈手贈 bu kan ying shou zeng 손에 달빛을 가득 담아 보내 줄 수 없으니還寢夢佳期) huan qin meng jia qi 잠자리로 돌아와 좋았던 시절 꿈이나 꾸어보리.“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 말은 어찌 보면 너무도 현실적인지라 부정하기 어려운 만큼 인정하기도 어려운 이야기이다. 눈에서 잠시 잠깐 멀어지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몸마저 먼 곳에 있는 상태라면 사람의 마음이 떠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 아닐는지.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이라는 것도 다 한 때요, 덧없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문학 작품에서 ‘사랑’이라는 소재를 고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애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안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세상에 하고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하지만 그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 모두가 절절하고 애가 끓는다. 같은 듯 하지만 또 다른, 그래서 더욱 흥미 있는 러브스토리. 과연「望月懷遠」에서의 화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또, 화자의 마음이 변치 않도록 잡아주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이 시는 홀로 남아있는 화자가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떨어져 있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첫 번째 구절에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달’은 님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의 매개체이자, ‘天涯’라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게 해주는 정신적 회합의 매개체로 등장하고 있다. 즉 같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통해 님이 계신 곳과 화자가 있는 곳은 공간적 일치감을 이루게 되며, 이곳에서 작자가 느끼는 감정은 곧 저곳에 있는 님의 감정과도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뒤에 나타나는 그리움은 화자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또한 멀리 있는 님의 상태에 대한 추측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절절한 그리움에 밤새도록 잠 못 이루며 방안과 바깥을 넘나들고 있는 작자의 안타까움은 꿈에서나마 님을 만나겠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겨우 진정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현실에서 님과의 상봉은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자기 위안이자 현실 도피 장치로서 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한 것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달’을 꼽겠다. 상사병에 걸린 남자가 보름달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한 가득 그 안에 그려보는 장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이고, 또한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행위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일이다. 그만큼 ‘달’이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달을 보며 님을 떠올리고 달에 기원을 하는 것일까?그것은 바로 달의 차고 기우는 속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찼다가도 다시 기우는 달의 속성은 분리와 합일, 그리고 충만함과 이지러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달을 바라보며 떨어진 님을 그리고, 또 함께 있고 싶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을 잊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하게 님을 사모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달”이 전해주는 마력, 즉, 앞에서 설명했던 분리와 합일에 대한 열망을 달이 강하게 화자에게로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서 멀어졌지만 님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달” 때문이 아니었겠는가라고 말하면 지나친 상상일까.한 편, 달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속성은 소망과 기원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어둠을 물리치는 빛은 단순히 밝게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부정을 물리치는 광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대 작품 중 달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을 하나 들라면 「정읍사」를 꼽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화자는 남편이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달에 소원을 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望月懷遠」의 화자는 멀리 떨어져서 님이 어떻게 살고 계신지를 확인할 수 없기에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행여 바람이 났다면 그 불순한 마음마저 광명의 빛으로 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슬프게 하는 세 가지0510278 중어중문학과 김지현사람은 누구나 희로애락을 시시각각 느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항상 맑은 날만 있을 수 없듯이 언제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터. 의 작가인 조식 또한 슬픔의 감정을 가지고 시를 창작했던 것 같다. 여기서 ‘칠애(七哀)’라 함은 ‘아파서, 외로워서, 감동하여, 원망스러워서, 귀와 눈으로 듣고 보아, 입으로 탄식하여, 그리고 코가 시큰하여 애달픈’ 일곱 가지의 슬픔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주 커다란 슬픔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를 이렇게 비통하게 만들었던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슬프고 또 슬퍼하며 시를 읊었던 것일까?시의 표면상으로 느껴지는 비애는 집을 떠난 남편을 생각하는 부인의 슬픔이다. 그런데 단순히 슬픈 감정에 대해 서술해 놓은 것이 아니라, 유랑자의 아내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것처럼 구성이 되어 있어서 더욱 애달픈 심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게다가 비(比)와 흥(興)의 수법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한 작가인지라 작품 곳곳에서 풍부한 비유와 상징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특히나 “님은 맑은 길의 먼지라면 저는 흙탕물의 진흙 / 뜨고 가라앉는 형세 각자 다르니 언제 만나 화목하게 될까요”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먼지와 진흙을 본래 같은 성질의 것으로 보면서도 부침(浮沈)이 다르니 운명도 이처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도 예술적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시가 쓰인 시대를 배경으로 놓고 다시 한 번 시를 살펴보면, 친형으로부터 받은 압박에 대한 서러운 심정이 이면적으로 담겨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당시 조식은 형인 조비와 왕위 라이벌 관계에 놓여있었기에 심한 압박을 받고 결국 작위까지 깎이게 되는 등 갖은 수모를 당하였던 것이다. 둘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시를 재해석한 것을 참고해보면, ‘맑은 길의 먼지’는 ‘왕의 지위’이고 ‘흙탕물의 진흙’은 ‘죄인으로 전락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두 형제가 다시 만날 날을 그리워하지만 ‘그대가 품을 열지 않는다면’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조비가 조식을 아직도 동생으로 여기지 않고 라이벌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식의 압박은 제목도 비슷한 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 잠시 소개할까 한다.자두지작갱(煮豆持作羹) 콩을 삶아서 국을 끓이는데녹숙이위즙(?菽以爲汁) 된장을 걸러 국물을 부었네.기재부하연(?在釜下燃) 콩대는 솥 밑에서 타고두재부중읍(豆在不中泣) 콩은 솥 안에서 운다.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본래 같은 뿌리에서 자랐는데상전하태급(相前何太急) 어찌해서 그리 급하게 지지나요.이 시와 는 겉으로 나타난 주제보다도 이면적인 주제 면에서 상당히 닮아있는데, 가 서정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었다면 이 시는 좀 더 우화적인 느낌이 들어 친근하게 느껴진다.조식을 슬프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간의 우애가 좋지 못한 것에서부터 비롯된 원망스러운 감정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입으로 탄식하며 시를 짓게 된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의 작가였다면 어떤 슬픈 것에 대해 심정을 토로했을까?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픈 것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病而哀, 忙而哀, 不孝而哀 이렇게 세 가지를 꼽을 것이다.첫 번째로 꼽은 ‘病而哀’는 내가 아파서라기보다도, 유난히 몸이 약하신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결혼 하셔서 시댁 식구들 뒷바라지 하랴, 자식 교육 시키랴, 참 고생스러운 시간을 많이 보내신 어머니신데 요새는 몸까지 많이 약해지셔서 나와 아버지께서 어머니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에는 소홀했던 내가 원망스러운 기분이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슬픔인 ‘忙而哀’가 생겨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부모님께 효를 행하지 못한 나의 슬픔, 즉, ‘不孝而哀’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라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길러주신 부모님인데 나는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과 은둔의 갈림길에서중어중문학과 2학년 김지현對案)不能食,dui an bu neng shi 밥상을 대해도 밥을 먹지 못하고,拔劍擊柱長嘆息。ba jian ji zhu chang tan xi 칼 뽑아 기둥 치며 길게 탄식한다.丈夫生世會幾時,jiang fu sheng shi hui ji shi 대장부 세상에 나서 얼마나 오래 살겠다고,安能??)垂羽翼?an neng die xie chui yu yi 어찌 날개 늘어뜨리고 조바심하겠는가?棄置罷官去,qi zhi ba guan qu 벼슬자리 그만두고 떠나,還家自休息。huan jia zi xiu xi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리라.朝出與親辭,zhao chu yu qin ce 아침에 나갈 적에는 어버이께 아뢰고,暮還在親側。mu huan zai qin ce 저녁에 돌아와서는 어버이 곁에 지내며,弄兒牀前?,nong er chuang qian xi 침상 앞에 노는 아이들 어르기도 하고,看婦機中織。kan fu ji zhong zhi 베틀에서 베 짜는 아내를 바라보기도 하리라.自古聖賢盡貧賤,zi gu sheng xian jin pin jian 예로부터 성현들은 빈천했거늘,何況我輩)孤且直! he kuang wo bei gu qie zhi 하물며 우리처럼 외롭고도 곧은 사람들이라고!현대인이 겪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스트레스. 지금에 와서야 스트레스의 무서움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라 과거의 사람들은 어땠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포조가 쓴 고시를 살펴보면 그 당시에도 스트레스라는 단어는 없었어도 그 개념만은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밥상을 앞에 두고도 답답한 마음에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포부가 큰지라 화풀이하는 정도도 남다르기 그지없다. 사람이라도 베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기둥을 치면서 길게 신세를 한탄하니 말이다. 이토록 포조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것이 당시의 신분구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어찌 천근만근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랴.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 상관물인 버드나무와 새의 날개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그가 결코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만 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재로도 문학적 재능을 지닌 “인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답답한 마음을 성현들과 비교하며 자기 위안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라고 본다. 포조가 가진 스트레스의 근원이 미해결된 채로 남게 되면 언젠가는 다시 머릿속에 빠끔히 고개를 들고 일어날 것이기에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신분제에 대한 강한 반발과 스트레스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갈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포조를 억눌렀던 사회제도의 억압은 비단 그 당시에만 존재했던 전근대적인 산물은 아닐 것이다. 민주화다, 평등화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은 겉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의 썩은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때면, 과거에 있었던 신분제 사회가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씁쓸한 마음이 들기 일쑤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고 말이다. 만약 내가 심리상담자이고 포조가 나의 의뢰인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처방을 내려주고 싶다.첫 번째 방법은, 울분을 혼자 삭이지 말고 좀 더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부조리한 체제와 맞서 싸우며 원하는 바를 쟁취해가라는 것이다.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 세상에 이름 날리기를 목적으로 삼았다면 어떤 방식이든 할 수 있는 것은 다 취해 보는 편이 후회도 없지 않을까? 시 속에서의 화자는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는 있지만, 결국 반란과 같은 참여적 형태로는 발전시키지 못한 채, 그저 자기위안을 삼는 것으로 끝맺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시인의 슬픔을 아무도 알아주진 않을 것이다. 저마다 바쁜 세상에, 남이 가진 슬픔에까지 귀 기울여 주고자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설령 그가 계획한 반란이 실패로 끝나게 될지라도 한 번의 도전적인 시도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귀감을 살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번엔 더 크게 개혁 운동을 하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가 원했던 사회라는 것도 단시간에 세워질 만한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는 개혁적 시도와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차라리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충실히 하라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개혁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엔 조금은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특히나 포조가 살고 있었던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한다면 실패할 경우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아무리 원하는 바가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까지 걸며 일어서는 것은 도박과도 같기 때문이다. 세상의 부조리가 싫어 자연 속으로 은둔해버린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포조 또한 그러는 편이 오히려 나은 결과를 가지고 왔을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분노를 억누르는 과정이 답답하고 짜증도 나겠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그 시간에 현재 자신이 처한 직책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것이 여생을 좀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행복은 멀리서 찾을 때엔 보이지 않다가도 가까이에 눈을 돌리면 바로 곁에 있던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파랑새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愛春來那些..0510278 중어중문학과 김지현愛春來那些, 봄이 되면 좋아하는 것들은,去花滿街撮, 꽃 가득한 거리에 가서 사진 찍는 것,臥草園讀書, 잔디밭에 누워 독서하는 것,作苾蘿?食。 향긋한 쑥떡을 해 먹는 것이라네.두꺼운 외투로 꽁꽁 몸을 싸매며 추운 기운을 떨쳐내 보려고 했던 것이 언제인지 모르게 어느덧 꽃피는 춘 4월도 중순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봄비도 몇 차례 오락가락하고 나니 거리엔 온통 봄기운이 만연해졌다. 삭막하다고만 생각했던 도로변에까지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나무들을 보면 당장이라도 봄꽃의 향기를 맡으러 윤중로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봄이 되면 처녀의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던 옛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봄은 예로부터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로 생각되어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강물은 녹아서 흐르고, 잠자던 개구리도 봄기운에 넘쳐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땅 위로 힘찬 도약을 하는데, 하물며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도 눈물을 흘리는 여심이야 오죽하랴. 그런 의미에서 봄은 모든 만물에 있어서 축복의 계절이며 포근한 사랑의 기운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계절이다. 추워서, 혹은 너무 더워서 하지 못했던 일을 봄바람마저 살랑살랑 기분 좋게 나를 간질이는 이때에 해 보는 것이 어떨까?바람 알레르기가 있는 나의 경우, 겨울은 활동하기에 좋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다. 아무리 막아도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은 무언가 해 보려는 의욕마저 떨어뜨리기 일쑤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몸부터 웅크리게 되니 일이 잘 될 리 없고, 따뜻한 방 한 구석에서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으니 면역력이 약해지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봄은 어떠한가. 살랑살랑 나를 밖으로, 밖으로 유혹하는 바람이며 꽃향기. 이런 날에 집 안에만 쳐 박혀 있는 것은 피 끓는 젊은 청춘들에게는 커다란 고문이 아닐까.그렇게 봄의 유혹에 못 이겨 외출을 하게 되면 가벼운 옷차림과 함께 꼭 챙겨서 나가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카메라이다. 온 거리를 가득 매우고 서서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반겨주는 벚꽃 거리는 사진을 찍지 않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평소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얼음처럼 표정이 굳어 버리는 나도 이러한 광경 앞에서는 절로 환한 미소가 지어지게 될 것이다. 봄꽃만큼이나 화사한 미소를 필름에 담아두고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까지 봄의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이럴 때면 현대 과학 기술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한참 동안 사진을 찍으면서 봄의 정취를 즐기고 나면 곧 나른한 봄기운에 팔 다리가 늘어져 어딘가에 눕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될 텐데, 이럴 때에는 싱그러운 잔디밭이 제격이다. 따뜻한 햇살을 온 몸으로 느끼고, 대지의 포근한 기운에 감싸여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 것이다. 이런 때에 손에 집어 드는 작은 시집 한 권은 몸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까지도 풍성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시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을 만족시켰다면 마지막으로 만족시켜야 할 감각은 바로 미각이다. 봄에 향긋한 봄나물을 먹지 못한다면, 어느 계절에 이 향취를 즐겨보리오. 얼었던 땅이 녹아 흐물흐물해진 흙 위에, 파릇파릇하게 자라나오는 어린 쑥 잎을 보면 입맛은 한층 더 돋워지게 마련이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매년 봄에 잊지 않고 밭에서 쑥을 캐 오시는데, 그것을 말려 된장찌개에 한 움큼 넣기도 하고 다른 나물들과 함께 살짝 버무려 밥상에 내오시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것은 쑥으로 만든 떡이다. 그냥 먹어도 쫀득쫀득하니 맛있는 떡에 향긋한 쑥내음이 더해지니 금상첨화인 것이다. 갖은 인공색소로 예쁘게 색을 낸 떡에 비하자면 그 빛이 칙칙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한 입 베어 물 때 느껴지는 봄의 향취는 그것들에 비할 것이 아니다.
“나르시시즘”, 매미의 눈에 비친 나를 보다중어중문학과 2학년 김지현西陸)蟬聲唱, xi lu chan sheng chang 가을에 매미 우는 소리에南冠)客思深。nan guan ke si shen 남관 나그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那堪玄?)影, na kan xuan bin ying 사랑 받는 젊은이의 미모를來對白頭吟)。lai dui bai tou yin 어찌 늙은 내가 당해내리.露重飛難進), lu zhong fei nan jin 이슬이 무거우면 날아가기 어렵고風多響易沈)。feng duo xiang yi chen 바람이 많으면 소리가 잠기기 쉬운 것.無人信高潔, wu ren xin gao jie 고결함을 믿어주는 이가 없으니誰爲表予心。shei wei biao yu win 누가 내 마음을 표현해 줄꼬.아무리 좋은 칭찬이라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면 지겨워진다는 옛말이 있다. 그런데 하물며 험담은 오죽하겠는가? 만약에 자기 욕을 하는 데도 계속해서 참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마음씨가 비단결 같아서일까 아니면 바보 같아서일까? 낙빈왕과 측천무후 사이에 벌어진 공방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측천무후 또한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다시 듣게 된 욕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태종에게 몸을 바쳤고, 옷을 갈아입고 여승이 된 적도 있다. 그러나 만년에는 춘궁을 어지럽혔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군자들이 암사슴에게 모해를 당했다”고 공격하는 낙빈왕을 도리어 천재적인 재주를 지녔다며 칭찬한 일도 측천무후의 불같은 성격에 비하면 얼마나 천만다행이었던 일인지 그는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결국 모함에 걸려들어 옥에 갇히게 된 그는 그제야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신세를 한탄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한 번 눈 밖에 난 사람이 다시 눈에 들기란 여간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시의 백미는 아무래도 자신의 시련을 자연물에 빗대어 대구 형식으로 드러낸 5, 6번째 구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시어는 바로 蟬과 高潔일 것이다. 옥에 갇힌 시인이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닿을 수 있는 통로는 바로 창이었고 창살 사이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에 붙은 매미가 그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 것을? 이별한 사람이 슬픈 노래를 들으면 죄다 자기 얘기인 것 같더라는 얘기처럼, 낙빈왕의 억울한 눈에 비친 매미는 고결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더라는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미는 자유롭게 남은 인생을 노래하는데 반해 자신은 답답한 옥중에서 신세를 한탄한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곧 다가올 운명이 죽음이라는 우울한 기운임은 매미고, 낙빈왕이고 떨쳐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랬기에 더욱 화자는 매미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일체화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매미를 바라보며 신세를 한탄하지만, 한탄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매미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매미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매미의 눈을 통해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고 있다는 얘기이다. 마치 나르키소스가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듯이 말이다. 이러한 나의 관점은 그가 했던 말들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관직을 잃게 되자 실의에 빠져 진취심을 잃고 노름꾼들과 어울려 다니게 되는데 벼슬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불우함을 늘 한탄했다고 한다. “족히 쓰여질 것이라 3년 동안 자신하였건만, 10년 동안 불우하길 몇 번째 인가?”라든가, “대신이 알아주지 않는데, 어찌 제후가 만나줄 것인가.”하는 식의 말들은 모두 그의 자부심과 애원, 불우함을 담고 있는 구절들이다. ‘나는 이 정도면 되었다’는 자아도취감이 그가 더 나은 관직 생활을 할 수 없게 방해했던 요소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