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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과 국가, 동양 철학을 중심으로
    - 논평:『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흔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를 초월해 빛을 발하는 예술의 공통 소재가 있다고들 말한다. 사랑이 그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남겨놓은 지적 배설물에서 역시 공통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 그리고 사회가 그것이다. 이미 기원전부터 사색하기 즐기던 사람들은 인간 개인과 그리고 그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 고뇌의 흔적을 곳곳에 남겨 놓았다. 그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위대한 철학자들이며, 그들이 남겨놓은 고뇌의 흔적들이 곧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공통의 주제가 특정한 한 사회 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다루어져 왔다는 사실도 물론 인상적인 점이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동서양의 교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이전에 두 세계의 철학자들이 동일한 주제로 고민해왔다는 점이다.하지만 이와 같은 놀라움 이면에는 한편으로 서글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후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살펴보게 될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공자, 묵자, 장자와 같은 인물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와 편견이 그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바로 전에 언급한 여타의 중국 사상가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우는 한편, 그들의 주장, 사상을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이나 교리 정도로 일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공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의예지 정도만을 떠올리는 것인데, 이렇게 보면 공자는 단순한 윤리 선생님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것 같다. 동양의, 중국의 사상가들에 대한 이와 같은 우리의 접근 방식은 대단히 차별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홉스 등과 같은 서양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에게 접근하고, 받아들이는 방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와 같은 우리의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슬픈 단상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번에 우리가 『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를 통해 중국의 철학자들과 서양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비교, 재해석 로 그 내부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었으며, 통치자와 백성들의 관계 역시 매우 사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공자 생전의 시대적 배경이 그의 기본적인 국가관을 형성하는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단위를 가족으로 상정하고, 국가 역시 하나의 대가족으로서 파악한다. 이와 같은 국가관은 서양의 철학자들, 특히 헤겔 이전까지의 철학자들의 국가관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계약’으로서 파악했다. 계약이 비록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 자체로 개인의 필요와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 다분히 인위적인 속성의 것임을 상기할 때, 공자의 국가관은 그에 비해 대단히 자연적인, 어떤 측면에서는 운명적이기까지 한 실체이다.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효(孝)사상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효라는 개념이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공자는 전통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다. 그는 모든 문화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것이며, 이 문화의 전달이 한 민족의 생존과 삶의 유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문화의 전달, 여기에서 전통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파생된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을 이어주는 연장자에 대한 존중, 한 마디로 효(孝)는 공자의 사상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었을 터이다. 한 가정 내에서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복종과 순종이, 그리고 그 영역을 확장하여 한 국가 내에서는 통치자에 대한 백성의 복종과 순종이 요구된다. 이러한 공자의 효사상은 로크가 주장했던 국가 구성원들의 저항권 개념과는 대치되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운명적인 가족 내에서 효는 당연하게 요구되는 것이고, 따라서 백성의 통치자에 대한 복종과 순종 역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경우, 통치자의 권력과 자유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로크의 표현대로 통치자 한 사람만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다.물론 공자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둔다. 군자가 곧 그것이다. 군자는 도덕과 문이 조화롭게 결합된 자족적인 사람으로, 그에게는 통치자가 부도덕한 행동을 할 경우에는 서슴지 않고 간언할 수 있는 단호함과 용기라는 덕목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공자의 이상적 인간상으로서 군자는 그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위험 요소를 어느 정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주장이 당위론에 근거한 이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만다는 인상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오로지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만이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지배방법이라 여기고 법을 천시하며 문(文)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 공자임을 감안하면, 그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겠지만 말이다.하지만 이처럼 그가 통치자의 존엄함을 주장했다고 해서 그의 국가를 서양의 절대 왕정과 같은 모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두 국가는 기본적으로 그 본질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절대 왕정의 경우에는 그 국가의 본질을 강제력에 두었지만, 공자의 국가에 있어서는 모범과 교화가 중요했다. 이렇다보니 현상적으로 국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 소재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절대 왕정에서는 국가에 문제가 생기면 그 것은 복종하지 않은 개인 탓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공자의 국가에서는 충분히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을 교화시키지 못한 통치자의 잘못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백성들을 사랑으로 대해야하는 통치자의 아버지로서의 지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보면 한 조 이후에 이르러 국교로 채택된 유가가 본래의 성질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법가의 전통을 흡수해, 통치자의 절대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근거로 작동하게 된 것은 무척 반어적인 일이다.이어서 등장하는 철학자는 기원전 5세기의 인물로 추정되는 묵자이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네 명의 철학자 중 그가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음은 고백할 필요가 있기 전의 상황을 무질서의 상태로 규정하는 데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통치자의 부재로 인한 무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백성들이 천자를 뽑아야 한다고 보고, 나아가 천자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삼공(三公)의 필요성까지 역설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어떤 측면에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것이다. 이전의 공자에게 있어서 천자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로, 감히 백성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공자와 시기적으로 큰 차이를 두지 않는 묵자가 이처럼 백성에 의한 천자의 선택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그 현실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그는 무질서를 극복하고, 나아가 최종적으로 최대 다수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겸애’이다. 이는 나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고, 이는 결국 또 나를 이롭게 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묵자의 겸애는 공자의 인(仁)과는 큰 차이가 있다. 묵자는 애초 무질서의 상태가 분별에서 온다고 생각하고, 이 분별을 없애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즉, 묵자의 겸애는 상대적으로 귀족적이었던 공자의 인(仁)과는 달리 무차별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그의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묵자는 이 겸애를 실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공자와 그 입장을 달리한다. 그는 공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교육이나 설득만으로는 부족하며 오로지 상벌을 통한 강요에 의해서만 겸애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상벌을 책임지는 것이 결국 묵자의 국가가 행해야 하는 중요한 기능이다.그에게 국가는 하나의 기구로서, 이 국가는 기술적이며 효율적인 통치를 해야 한다. 특별히 겸애의 실현을 위해서 엄격한 상벌과 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묵자는 엄격한 법과 제도를 통한 효율적인 통치로 국가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이익은 곧 개인의 이익과도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그의 국가에 대한 주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국가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앙, 이론가이기 보다는 실제적인 활동가로서 그는 하나의 체계를 세움으로써 진나라의 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기원전 4세기의 인물이다. 이 체계의 기반이 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법가이며, 그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 상앙이다.묵자가 그러했듯이 상앙 역시 세상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로 바라본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상황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국가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데, 따라서 그의 국가는 강력하고 효율적 강한 군대를 소유하는 한편, 강한 정치적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보상과 형벌, 곧 법으로서 통치를 무장시킬 것을 요구한다. 전통적 문화의 존경, 도덕적 규범에의 충실과 같은 공자의 사상과 무척 대조적인 이와 같은 상앙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그 인간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상앙에게 있어서 인간은 오로지 권력을 향한 의지만을 가진, 이외의 모든 인간적인 자질을 상실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앙의 인간관은 인간을 상벌의 체제를 통한 회유와 위협으로 충분히 조종될 수 있는 동물로 보았던 묵자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한데, 실제로 그는 백성들이란 오로지 자신들의 이득을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그 사람의 인격적 자질보다는 그 사람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다.이 가운데 상앙의 가장 주요한 특성이 드러난다. 그는 법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 법령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널리 선포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그 법령에 대한 논의는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절대 왕정 체제에서 군주에 대한 어떠한 반항이나 비판은 있을 수 없다는 홉스의 주장을 떠오르게 하는 대단히 강경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국가관에서 비롯할 것이다. 그는 국가 기구가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국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통치자일 뿐 백성이 아니었다. 따라서 통치자는 무엇
    사회과학| 2007.06.12| 6페이지| 1,500원| 조회(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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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역사, 그리고 여행
    배제된 사람들의 여행-『에도의 여행자들』을 읽고신문을 보는데 익숙한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시마네 현. 독도의 날 조례를 가결시킴으로써 최근 독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영토 분쟁에 가장 큰 계기를 제공한 곳이다. 이전부터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는 그 곳이 독도 문제에 특히 예민하게 반응해 온 것이 이미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다가, 최근 분쟁까지 심화되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시마네 현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문 기사를 통해 익숙한 지명을 확인하고 불쑥 내게 찾아온 반가움이 당황스러웠던 것은 별로 이상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그 반가움은 사실 몇 년 전 나의 첫 일본 여행에서 기인한다.‘여행’은 이미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오늘 날,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여행을 다녀와야 하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있으며, 또 많은 대학생들이 여행을 떠난다. 이는 대학생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대개의 사람들이 모두들 한번쯤은 여행을 꿈꾸며, 시간과 자원이 허락하는 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는 경험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듯 여행은 어느덧 우리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며, 여행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여행이 우리의 삶에 친숙하게 자리 잡은 것과는 별개로 그 여행의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통념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여행’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근대 이후로 보는 듯 하다. 실제로 근대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여행’이라는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다. 구조적으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 계층이었던 당시 서양에서는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들은 그 직업의 성격상 장기간 근거지를 떠나있을 수 없기도 했지만, 근대 이전의 봉건 사회에서 농민은 영주로부터 이동권의 제한을 받았고, 이러한 신분적 한계가 큰 이유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대에 여행이 가능했던 사람은 충분한 자본과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고 있던 일부 유한 계급과 직업상 이동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일부 상인 계층에 불과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유념할 사실은 당시의 여행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여행은 대개 종교, 정치, 상업 등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이동일 경우가 많았고, 이동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오늘날 여행으로서의 의미는 대단히 희박했다. 때문에 근대 이전의 서양에서는 여행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되어있지도 않았고, 대중적이지도 않았으며,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여행조차 그 의미가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서양에서 여행이 근대 이후에 출현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서구적 관점의 사관이 우리 동양에서도 똑같이 무비판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은 한번쯤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런 가운데 다카하시 치하야가 저술한 『에도의 여행자들』은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간의 통념에 균열을 가하는 역사적인 고증을 이 책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에도의 여행자들』은 에도 시대에 이루어졌던 일본인들의 여행을 미시사적인 관점으로 주목, 당시에 이루어졌던 여행들을 역사적 사료를 근간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에도 시대는 가마쿠라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봉건 사회 체제가 마지막 마무리를 거쳐 확립된 시기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 다이쇼군에 임명되어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 시대를 말한다. 근세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이미 다섯 가도를 비롯한 가도의 정비와 더불어 숙박시설의 확충, 지도, 여행책자들의 발간과 ‘고(講)’의 발달에 힘입어 사원 참배나 성지 순례를 명목으로 한 유람 여행이 다양하게 등장하게 되었고, 일반 서민들까지도 오락으로서의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카하시 치하야는 당시의 여행을 크게 일곱 가지 주제로 분류해 책을 서술하고 있는데, 특히 나는 제 5장에 해당하는 ‘여인의 여행’에 주목했다.일단 제 5장, 여인의 여행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실은 오늘날에도 남성들에 비해서는 쉽지 않은 여성의 여행이 이미 300년 전에, 그것도 상당히 자유롭게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물론 통행증 발급과 검문소 통과라는 난관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웠을 봉건 시대에 여성에 의해 씌여진 여행일기가 130편에 이를 만큼 상당한 수의 여성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여행에 임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이코쿠 순례 여행을 떠난 다섯 마을 처녀들의 이야기였다. 비록 에도 시대가 이전 시대에 비해 여성들의 여행에 다소 용이한 환경이었다고 하더라도, 여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무산계급의 여성들이 별 무리없이 여행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서양의 경우, 근대 이전까지 특정 유한계급과 상인의 일부만이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일본 에도 시대에 보이는 여행의 대중성은 상당히 가치 있고 놀라운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여행’이 일부 계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질 수 있었을 법한 시대 상황에서 보이는 여행의 대중성이 어쩌면 현재 일본의 발전 동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여행은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의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보다 객관적이고 평화적이며, 수평적으로 나를, 타자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기회는 실제로 타자화를 통해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자아를 형성하고, 개인이 변화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한 새로운 지역에 대한 발견과 경험은 우리의 삶에 무시할 수 없는 자극이 되어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삶의 전환기를 맞게 하는 놀라운 위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역사에 남은 많은 혁명가 및 사상가들이 여행을 통해 자아를 고양시키고 자신의 길을 찾은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 영화로도 개봉 되어 잘 알려진 체게바라 역시 이와 다름 아니다. 책에서도 이처럼 여행을 통해 삶의 전환기를 맞거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한 여성을 소개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쓰오 다세코’이다. 평생을 어느 마을 농가의 현모양처로 살았을지도 모를 그녀가 우연한 계기로 여행을 하고, 그 안에서 존황양이 운동에 매진하는 활동가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여러 가지 구조적인 제약을 많이 받게 되는 여성일수록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필연적으로 경험의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험의 부재는 곧 그녀들의 삶을 조금은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몰아갔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관 자체가 남성적인 성향이 짙은 까닭에 발굴된 여성 위인이 적은 것도 오늘날 여성으로서 역사적으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이유일 수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앞서 말한 사회 체제 자체의 구조적인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이유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현실에서 일본의 경우는 대중화된 여행을 통해서 여성들에게도 그 기회를 얼마간 열어주었고, 비록 남성에 비해서는 적은 수지만 많은 여성들이 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일본 에도 시대에 여행이 여성들에게도 상당히 넓은 폭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들의 여행이 대단히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의 내용 사이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일부 여성들에게 여행이라는 엄청난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이해나 가족의 동의가 필수적으로 전제된 다음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환경이 일반적인 여성들보다 다소 자유로운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책에서 언급된 여성 중에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여행을 떠나게 된 경우도 있었는데, 자발적이지 않은 선택에서 비롯된 여행이란 사실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에도 시대에 많은 여성들에게 여행의 기회가 돌아간 한편으로 여전히 여성들의 여행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측면이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문/어학| 2007.05.03| 4페이지| 1,500원| 조회(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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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운동사에서 68혁명이 가지는 의의
    1. 문제제기얼마 전 은 세계인권의 날을 맞이해서 올해의 10대 인권 소식을 선정했다. 그 중 6위에 선정된 것이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헌법 불합치 결정이었다.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이라는 성명과 함께 발표된 헌재의 불합치 결정은 그간 호주제 폐지를 위해 발 벗고 뛰던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과 그에 마음으로 성원을 보내던 이 사회 많은 시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여성문제에 대해서 극히 보수적이었던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이 사회에 성 평등을 위해 애쓴 실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에 더없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 결정 만에 머물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성 평등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이 여전히 미해결의 상태로 우리 앞 놓여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여성 억압의 역사가 인류 전체의 역사와 큰 시간의 차이를 두지 못한 채 내내 함께 해 왔음을 생각하면, 이 사회에 성 평등 문화가 그리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그 노력이 많은 부분에서 점진적인 소득을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성매매 노동자 문제, 황우석 박사의 줄기 세포 연구와 관련한 난자 의혹 문제, 성폭행 문제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가 하면 이미 헌재에서 불합치 선고를 받은 호주제의 부활을 주장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현재의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된다.대체 언제부터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위치 지어졌는가. 이에 대해서 엥겔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사유재산 제도, 가부장제의 출현 등과 관련한 여러 논의들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시각으로 다른 해답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학기동안 살펴보았던 서양의 역사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다. 고대 국가로부터 시작된 노예제도, 할례, 동성애 문화나 중세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한 종교 교리의 설파, 마녀 사냥과 같은 일련의 사건, 그리고 절대주의 국가의 식민지 정책과 포르노그래피의 등장 등은 이를 밝혀낼 수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다. 여성은 계몽주의가 등장하고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해오는 과정에서조차 억압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과학과 이성의 힘을 등에 업는 남성 지배의 거대한 음모에 더욱 예속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여성 억압이 엥겔스가 언급했던 고대 바로 그 지점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왔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소소하게 이어져 내려오던 페미니즘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충분히 논의된 바 있는 성차별의 역사를 다시 언급하기 보다는 그에 대항하는 흐름으로서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몇 가지 분석 틀에 의해서 다양하게 기점이 나뉘어 지게 되지만, 18세기 프랑스 대혁명과 이후 20세기 68혁명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공통적이다. 페미니즘의 역사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이전부터 조금씩 생성되고 있던 여성주의의 열망이 혁명 시기 참정권의 문제와 함께 처음으로 크게 부각되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그 해, 프랑스 국민의회에는 정치상 남녀의 동권을 인정하는 건의가 상정되었고 T.메르쿠르, O.구즈와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논의가 보다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페미니즘 운동은 다분히 엘리트주의적이고, 또한 여성의 권리가 지나치게 참정권만을 중심으로 주장되었으며 동시에 그러한 주장들이 실질적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는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혁명 시기의 선진적인 활동가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이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우리는 특별히 현대의 페미니즘의 직접적 원류로 보는 68혁명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 볼 것이다.2. 68혁명과 여성운동사① 68혁명의 역사적 배경1968년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18세기 이후의 혁명적 상황과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어 내면서 충분히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으리라 여겨지는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 사회의 모습이 1950년대까지도 전근대와의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한 남녀가 첫날밤을 보내면 다음날 아침 신부의 피 묻은 속옷을 대문 앞에 걸어 두어야 하는 풍습이나 빵을 훔친 흑인 남성을 그의 성기를 거세하여 손에 들린 채 나무에 매달아 사형시키는 관습 등 너무나 전근대적인 사회의 단면들이 1950년대 후반까지도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일상적으로 드러난 것이 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후의 국제 정세는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양극화 체제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 미국의 베트남 침공과 소련의 체코 침공은 가뜩이나 전쟁의 모순성과 종전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파시즘의 흔적에 대해 극도의 회의에 빠져있던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과 대중들을 크게 자극하게 되고, 미소 양 체제 모두에 실망한 대중들은 새로운 대안의 길을 모색한다. 마치 민주화 항쟁 당시 한국의 대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은 좌파 사상가들에 심취하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마오쩌둥, 트로츠키, 체 게바라와 같이 기존의 양 극 체제가 아닌 새로운 제 3의 노선을 선택했던 이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진다.68혁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또 하나 반드시 주목해야하는 사실은 당시의 경제 상황이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자본주의 노선을 택했던 많은 국가들이 현대 자본주의의 최대 경제 호황기를 누린다. 경제가 호황일 때 출생률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출산율이 상대 양상을 야기하게 된다. 앞서 세계정세에 대한, 사회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와 부정, 이에 더하여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의 누적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서 터져 나온다. 1968년 5월, 소르본 대학에서 예기치 않게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게 되는데, 여기에 프랑스 노동자들이 합세해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들의 격렬한 투쟁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의 좌파당과 드골 정권의 정치적 전술로 인해 이 상황은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오래지 않아 사그라진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독일과 이탈리아, 뉴욕과 동경 및 멕시코시티까지 곧 세계 전역에까지 영향을 미쳐, 범세계적인 반문화, 반체제, 반전, 민권 운동을 불러오는데, 우리는 비록 완전하게 엄밀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적인 사회 변혁의 움직임 모두를 68혁명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② 68혁명과 사상적 배경앞서 살펴본 68혁명의 개괄적인 역사적 흐름에 있어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 비판은 실질적으로 이끌어낸 업적이 없다는 점이다. 반전, 반체제, 반문화 운동 등 여러 갈래로 한꺼번에 터져 나온 사회 변혁의 열망은 기존의 사회에 상당히 위협적으로 도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비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68혁명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적인 의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68혁명의 사상적 배경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논쟁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짧게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장 기본적인 그의 논지만을 이야기한다면,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서 도출된 합으로서의 계몽은 변증법의 기본 원리에 따라 내부에 모순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냥 내버려 둘 경우 자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지속적인 계몽, 발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합의 부정을 시도해야 하며, 이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세 사람을 사상적 배경으로 해서 기존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기존의 폭력과 무능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하는 급진적 행동 양식을 보이며 혁명 전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68혁명이 페미니즘 역사에 있어 왜 중요한 기점이 되는지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68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호들에서 보듯이 68혁명의 기본적인 사상은 기존의 당연한 것들에 대한 부정과 반대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부정을 위한 부정을 외쳤던 이들의 구호가 가시적인 성과로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바로 이들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서 기존의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힘차게 나타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68혁명 시기에는 다양한 가치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수면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소수민족, 인종 등 바로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권 문제로 다루어지는 문제의식이 이 시기에 총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될 페미니즘 운동의 출현과 활동 역시도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이제 우리는 가시적인 성과, 실질적인 대안의 구상이 부족했다는 많은 지적들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착취와 억압 구조 하에 놓여있었던 수많은 소수자들이 드디어 각자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68혁명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이다.③ 68혁명과 페미니즘 운동앞서 살펴본 68혁명의 역사적, 사상적 배경 속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본격적으로 구체화 된다. 68혁명 내부에서도 페미니즘 운동은 일개 분파가 아닌, 각기 조금씩 다른 성격을 가지고 여러 갈래로 뻗어져 나왔으나, 여기에서는 당시 페미니즘의 주류였던 급진적 페미다.
    사회과학| 2006.11.23| 7페이지| 1,500원| 조회(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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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주의와 여성주의는 공존할 수 있는가
    2년 전 여름 두 명의 중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무참히 숨을 거두었다. 자칫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버릴 뻔도 했던 그 사건은 일부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고, 이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문제화되었다. 그리고 반년 뒤, 결국 미국 법정이 사고 당시 운전병이었던 미군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 종결되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었고, 그 판결을 내리기까지 미국의 태도 역시 불공정했다. 이는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 사람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사람들은 촛불 시위를 비롯해 여러 가지 공식적인,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했다.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은 당시를 회상해보면, 분노를 표출하던 우리의 모습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다. 이미 여러 여성단체들이 지적한 바, 그들 두 학생은 죽어서까지 ‘민족’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무참히 찢겨진 우리 민족의 딸들”이 되어버렸다. 또, 두 남자 중학생이 죽었다 했을 때 그들을 ‘남중생’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학생을 굳이 ‘여중생’이라 부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죽은 자는 사실 공개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그 보기만 해도 끔찍한 사진을 길거리 곳곳에 공개해야만 했을까. 애초에 90년대 초반 윤금이 씨가 살해되었을 때에, 좀더 크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윤금이 씨의 처참한 사진을 사람들의 분노를 다시 한 번 일으키기 위해 새삼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소위 “여중생 살해사건”은 반미감정을 일으키는 데에 철저하게 이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는 무시되었고,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은 민족적 분노를 고양시키기 위해 대단히 선정적으로 쓰였다. 이는 분명 미국과 한국의 대립과 그에 대한 투쟁이 순수하게 진행되지 않고 그 내부에서 여성으로 대변되는 소수자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또는 이용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는 “우리 안의 파시즘”(임지현)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 갈등이 민족적인 분노로서 촉발되었고, 또 이러한 분노를 표출할 때에 흔히 ‘민족주의자’들의 방법들로 연결된다는 점이 더 구체적인 분석일 듯 하다. 민족주의 내부의 억압적인 구조, 그리고 민족과 민족주의를 성역으로 간주하는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결국 이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풀어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위험한 여성』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여러 가지 예를 통해 비판하고, 그리하여 여성주의와 민족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임지현 씨가 이미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으로 한국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나아갈 길을 고민함으로서 비슷한 논의의 물꼬를 틀었으나, 정작 그것이 실제로 그에 의해 억압당해왔던 여성, 혹은 소수자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히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임지현 씨의 책은 민족주의 그 자체에 대한 책이었지, 여성주의적인 입장에서 민족주의를 바라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시각이 『위험한 여성』의 그것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결국 『위험한 여성』이 갖는 가치는 분명하다. 민족주의의 신화에 대한 비판에 당사자,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당사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좀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이 책이 결국 미국에서의 발간과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뒤늦게 발간되었다는 등의 사실은 결국 한국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두 번째, 세 번째에야 울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민족주의가 가지는 문제란 어떤 것인가? 그 문제의 골자는 민족주의와 여성주의가 애초 그 방향성이 다름으로 인해 끊임없이 상황의 모순을 낳는다는 것이다.기본적으로 민족주의를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다. 19세기 근대 국가의 성립을 돕기 위해 기획된 유럽의 민족주의와 이후 그의 제국적 성격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일단 그 태생부터 다르고, 민족주의가 이후 역사적으로 수많은 가치와 맞물려 성격의 변화를 여러 번 겪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가 하나로 민족주의를 설명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곳의 민족주의이건 공통점은 있다. 그 근본 성향이 배타적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유독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저항적 민족주의에서 보다 그 경계가 모호한, 혈통주의, 순혈주의, 민족 자주, 외세 배격 등의 성격이 혼재하는 강한 배타적 성격으로 변모했다.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역사 왜곡으로 우리 한민족을 미화하고 우월함을 강조하는 가운데 공고해지는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가 다른 민족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데 은근히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 민족주의는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은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하여 민족 내부에서도 수많은 소수자들을 낳는다. 흔히 우리 민족의 탄생 신화로 잘 알려져 있는 앞서 언급한 단군 신화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이미 그 안에서 여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달리 곰이 변한, 인간보다 못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며, 역할 또한 아들을 낳아주는 자궁의 그것만으로 국한된다.) 즉, 우리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은 물론이고, 같은 민족인 여성조차도 배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위험한 여성』에서는 특히 민족주의에 의해 배제된 여성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 민족주의가 여성만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지난 월드컵과 88 올림픽을 상기해보면 이는 쉽게 드러나는데,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이 두 국제적 행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적 과업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성공적 개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의 성공을 위한 일환으로 멋진 경기장을 건설하고 아름다운 도시미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시빈민은 소외되어 있었다. 실제로 많은 도시빈민들이 거리로 쫓겨났다.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한 작업이 정작 하나의 민족도 채 다 포함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결론적으로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족을 이야기하지만 그 민족의 경계란 대단히 모호하다. 그 모호한 경계를 잣대로 한 민족주의로 우리는 타민족을 소외시키고, 여성을 소외시키고, 도시빈민을 소외시킨다. 그리고 그 소외를 다시금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킨다.그에 반해 여성주의는 포용을 기본 전제로 한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여성주의는 다분히 휴머니즘적인 성격을 지지는데, 이는 여성주의가 비단 여성이라는 이름의 소수자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빈민, 동성애자, 장애인 등 많은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을 말한다. 특정한 성으로 이름이 붙여지기는 했으나 여성주의는 기본적으로 남성에게 배타적인, 여성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주의가 아니다. 여성주의는 이 사회에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가부장제의 틀로부터 남성과 여성 모두를 해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여성주의 역시 이와 맥락을 크게 달리 하지 않는다.이처럼 민족주의와 여성주의는 기본적으로 그 방향이 다르다. 오히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한 울타리 안에 묶으려하는 민족주의는 일차적으로 여성에 대한 내부의 불평등과 차별을 야기하는 구조에 대해 외면하는 가부장적인 측면이 강하고 이는 가부장적 구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주의의 문제와 배치되기 십상이며 『위험한 여성』에서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도 그것이다.IMF 당시 많은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직업 노동이 필수적이라며 많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 위기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자 여성 노동자들부터 인원 감축에 들어갔다. 민족의 위기에서 벗어난 뒤에도 여성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여성들에게 요구되어 지는 것은 같은 민족 남성을 돕는 보조적 위치와 민족의 재생산뿐이다. 또 그러한 갈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문제가 바로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사실 이 둘은 얼핏 다른 문제 같지만 사실 그 뿌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철저하게 형성된 계급 질서와 여성을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천민으로 간주하는 유교 도덕 규범, 여성과 소외 계층의 목소리와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 정치 체제와 문화가 이 두 문제의 뿌리이며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문제 모두 민족주의에 의해 문제의 본질이 가려져 있다. ) 앞서 이야기했던 미선이와 효순이 사건도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여성주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는 대단히 많은 모순과 갈등을 안고 있다.
    사회과학| 2006.11.23| 5페이지| 1,500원| 조회(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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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에 대한 고찰
    사랑, 근대 최고의 발명품?!-「연애의 시대」날씨가 따뜻해지고 곳곳에 꽃들이 만개하면서 교정을 가득 채우는 것은 짝을 맞춰 팔랑팔랑 옮겨 다니는 커플들이다. 곳곳에서 활짝 웃으며 달콤한 연애를 즐기는 커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를 비롯한 이 화창한 봄날의 싱글들은 잠시나마 허전함에 씁쓸해지곤 한다. 언제부터인가 4월 어느 아름다운 봄날의 교정이 보여주는 백양로 가득한 커플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오늘날 대학 문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연애’는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연애’는 비단 대학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연애 중심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연애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연애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짝이 없음을 곧 결핍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서 나아가 타자를 바라보는 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연애중심사회, 우리는 이 사회 안에서 연애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강요받고 있으며, 이 연애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맞물려 그 횡포가 더더욱 심해져가고 있다.권 보드래씨는 그의 저서 『연애의 시대』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가깝게 느껴지는 ‘연애’의 기원을 좇아 올라간다. 그는 우리나라에 ‘연애’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 1920년 즈음이라 보고 당시 문학, 신문 등을 통해 연애의 기원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연애’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1920년대의 일이다. 3.1 운동 직후 일본의 문화통치가 시작된 무렵 우리나라에는 전에 없던 개조, 개량 열풍이 불어왔다. 1920년대부터 본격화된 이 개조, 개량의 외침은 개인부터 가정, 사회, 국가까지 전 영역에 걸쳐 낡은 생각과 관습, 제도를 뜯어고치자는 주장이었는데, 이 때 기존의 가치관에 반하여 새롭게 급부상한 가치 중 하나가 전통에 맞서는 자유 연애, 자유 결혼 사상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조금은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한국의 연애열은 생각보다 뜨겁게 한반도를 달궜고, 이 연애는 점차로 유입되던 자본주의와 맞물려 새로운 상품으로서, 대중적 현상으로서 그 열기를 더해갔다. 우리말에 없었던 ‘연애’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각종 문학작품과 신문 기사가 연애와 관련하여 도배되었다. 책 제목처럼 그야말로 바야흐로 ‘연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뜨겁게 한반도에 불어 닥쳤던 연애열은 그리 오래 기간을 끌지는 않는다. 1923년, 사회주의 사상이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되면서 한반도를 달구었던 연애열풍은 잠정적으로 그 끝을 고하게 된다.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연애열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이후 기존의 연애관은 점차로 사그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애의 주체가 되었던 대중이 여전히 존재했으므로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연애의 소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강명화 사건 이후 연애 사건이 사회 전체에 화두가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사회의 삶, 감정, 사상이 달라졌는데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초반을 지배했던 ‘연애’를 대치할만한 사랑의 담론은 여전히 등장하지 않았다. 실제로 여전히 오늘날 연애의 모습은 1920년대의 그것과 놀랄만큼 닮아있다. 당시에 연애를 보여주는 많은 문화들이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조금은 유치하기도 하지만, 사실 많은 것들이 현대에 맞는 문화로 대체되었을 뿐이지 실제 그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 차이는 곧 순수함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과거에는 대부분의 연애가 사랑이 전제가 되고, 결혼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연애가 사회 중심적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점은 1920년대나 2000년대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때에 비해 ‘연애’가 훨씬 가볍고 쉬워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권보드래 씨에 따르면 적어도 1920년대 당시 사람들은 연애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번뇌를 하였고, 연애는 성스러운 것이므로 육욕은 절대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등의 금욕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연애정사가 유행했다고도 하니 당시 연애란 얼마나 비장한, 무거운 것이었는가. 오늘날 연애가 극단적으로는 단기적인 짝짓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현실을 목도하면 그 무게에 있어 과거와 현재 연애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실제로 최근까지 방송 3사의 주말 황금시간대를 차지하고 인기를 누렸던 프로그램은 MBC의 , KBS의 를 비롯한 각종 짝짓기 프로그램들이었다. 2년 전 사랑의 스튜디오에서보다 훨씬 즉흥적이고 가벼워진 남녀간의 사랑, 연애. 이들 프로그램이 오늘날 연애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는 나아가 오늘날의 가벼운 연애열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오늘날 우리의 연애가 가지는 또 하나의 큰 특징은 반드시 연애가 언제나 결혼을 궁극의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대학에 입학한 많은 친구들이 젊음의 낭만으로 연애를 즐기지만, 막상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에는 소위 결혼 매니지먼트사에 등록을 해 자신과 현실적인 수준이 맞는 짝을 찾고자 한다.
    사회과학| 2006.11.22| 2페이지| 1,000원| 조회(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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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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