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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수만주변마을 토속신앙에 나타나는 상생윤리
    淺水灣 周邊마을의 土俗信仰에 나타난 相生倫理 硏究-瑞山市 浮石面 松枾里/가마시(邊洞)를 中心으로-우완룡(연세대학교)Ⅰ. 서 론 (序 論)1.연구목적(硏究目的)이 연구는 태안반도로 통칭되는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천수만【淺水灣】주변의 군락성씨(姓氏)나 인명(人名) 지명(地名) 언어(言語) 직업(職業) 작농(作農) 그리고 도로(道路) 사적(史蹟) 등에 관련된 전설이나 화용(話用)에서 드러나는 공동체 상생 방식을 살펴서 촌락공동체 형성과정에서 작용한 토속신앙을 염탐해 보고, 바다건너 중국의 당(唐), 송(宋)의 정세변화 및 특히 삼국 간 정세변화에 이 지역 민초들의 반응은 무엇을 남겨주었나를 살피고자 한다.2.연구지역 선정이유(硏究地域選定理由)연구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태안반도 남단에서 홍성으로 이어지는 천수만【淺水灣】이 해당되고 천수만에서도【부석(浮石)-검은여】가 연구의 중심이 될 것이다.이 지역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1980년대 이후 현대건설이라는 자본의 힘에 의하여 대규모의 천수만【淺水灣】간척 사업이 이루어지는 등 근래의 여타 지역보다 다르게 산업화의 경험 폭이 상당하게 크다는 점과, 역사 지리적으로 백제시대 중국과 해상교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과, 고려시대에는 왕실이 일본과의 교역과정에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외지에 속하여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여 향토 사료의 근거가 아직도 빈약한 점을 착안하였다.3.연구방법(硏究方法)연구 방법으로는 우선 문헌자료와 천수만【淺水灣】주변의 군락 하는 성씨(姓氏)나 인명(人名) 지명(地名) 언어(言語), 직업(職業) 작농(作農), 그리고 해상(海上)이나 육지(陸地)의 교통로(交通路), 사적(史蹟) 등에 관련된 전설이나 화용(話用)을 통해서 나타나는 특유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하기, 유물에 대한 고증, 현지주민의 증언, 그리고 연구자의 경험 등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미시적 연구를 위해서 고잔 이라는 마을과 가마시를 살피기로 한다.가설로서‘당시 토착민선시대는 물론 구한말 일제강점기 등에도 일관되게 통용된 마을 이름이다. 1759년(영조35)에 발간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나타나는 부석면 전체 106가구에 306명이 사는 규모에 견주어볼 때에도 갈마리의 인구수는 큰 마을에 속했다.갈마리는 면명(面名)이 된 검은여(부석-浮石)가 있는 마을로 면 소재지가 되지 않은 아이러니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면 그 중요성이 면내 다른 어느 곳 보다 높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전통지명으로는 돌모루(石隅), 사정터(射亭址), 땡겻, 모심이(苧植), 산짓물들(뜰) 영암(靈岩)이, 삼복치(三復峙), 진재(長峴), 토끼재(兎峴), 개야지들(小犬野), 부들배미(蒲畓), 고잔마을(古棧高岑), 안고잔(內古棧), 불당골(佛堂谷), 황섬(黃島), 검은여(검연여黑嶼-浮石)시오리, 매흙구덩이, 등의 자연마을과 지명이 있다.④강당리(江堂里) : 강당리(江堂里))의 원래 이름은 소내(牛川) 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화변면(禾邊面)10개리중 우천리(牛川里)로 분리된 마을로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가구 131호에 232명의 인구가 사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이것이 구한말인 1895년에 강촌(江村) 시동(詩洞) 서당동(書堂洞)등 3개 마을로 세분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강촌(江村)마을과 서당동(書堂洞) 일부와 시동(詩洞)일부가 합해져 한마을이 되었는데 이때 강촌(江村)에서 강(江)자를 따고 서당동(書堂洞)에 당(堂)자를 따서 강당리(江堂里)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옛날 우천리(牛川里)에 속해 있었던 시동(詩洞)의 많은 부분이 지산리(芝山里)로 편입되고 서당동(書堂洞)의 일부는 칠전리(七田里)와 마룡리로 편입되어 나가므로써 옛날에 이세(里勢)가 컸던 옛 우천리(牛川里)인 강당리(江堂里)는 이웃과 경계한 옛 산저리(山底里 -지산리芝山里)) 보다도 작은 마을이 되었다.) 강당리는 일제의 폐를 많이 받은 미시사료(微示史料)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강당리(江堂里)의 전통 지명에는 서당동(書堂洞되고) 할미와 손녀만 몇 년간 같이 살다가 결국 도피 하다시피 가마시를 떠나고 지금은 아무도 그를 기억하거나 그의 흔적을 알지도 못한다.생각해 보면 서해안 오지 가마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이유야 어찌 됬든 국가 경계를 넘어 월북을 시도 하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로도 1980년대 문기현 신부나 문익환목사 보다도 앞선 것이라서 하마터면 (시기만 잘 타고나고 목적과 방법이 좋았다면)분명 용이나 봉황이 될 뻔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미완으로 끝나고 불운으로 이어지는 것은 혹시 검은여와 부석사가 가마시에 내리는 저주 영향 때문은 아닐까?결국 이런 식의 역사적 추론을 하다 보면 지극히 종교적 색채가 드러나기도 하는 한편, 가마시라는 지명이 가지는 전설중의 하나와 봉락리 노라실과의 지역 특유의 상생관계에서 대외세력을 견제하려는 공동대응의 결과로서 나온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노라실과 칠천으로가는 삼거리에 국기대가 있는데, 사신들이 이를 지나며 제사를 드렸다는 설이나, 가마시 앞 바다에 큰 배가 있었다는 등의 전설은 가마시와 봉락리 -특히 노라실이- 당(唐) 외세로 대표되는 당시의 사찰건립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한 지역일 것이라는 추론이 되기도 한다.) 단지 역사 기록에서 배제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의 저항표현의 일부로서 가마시 명당설)이 나왔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검은여가 육지가 되고 부석사의 지역통치력이 쇠약해진 -특히 봉락리 군락성씨 중 단양 우씨가 부석사 아래 도비산자락에 종종묘지를 가진 상황에서- 현재로서는 화를 가져온다는 전설이나 복을 가져온다는 전설의 추이를 관심가지고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아무튼 이러한 가운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격일까? 아니면 지나고 보니 검은여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어떤 면으로든지 이권과 관련되어서 검은여와 연계시키려는 상업주의 발상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 모든 것에 +a를 더한 발상일까? 누구 말대로 ‘면민의 화합 Q. 그럼 농업으로 전환하시면서 피해가 많으세요?A. 그려.. 농업으로 바뀌면서 보통 피해가 아니지. 돌을 놓으면 석화 굴이 막 붙어. 그게 어리굴젓이 되고... 그런 굴이야. 그땐 농사는 땅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Q. 지금도 형편이 어려우세요?A. 지금은.. 나 먹을 건 농사지었지.. 양식할 땐 놀리던 땅.썩히고 있다가.논9마지기로 농사하고.자식들 쌀 주고 지금은 빚2000만원 있지.그 빚은.농기구 때문에 생긴거여.새끼 먹여 살리고.갚고 갚고..Q. 농사하는 땅은 몇 평이나 되요?A. 논9마지기,밭2천 평 정도 돼.Q. 농사는 어떤 거 하세요?A.마늘농사를 주로하지.예전엔 생강을 했었는데,연작장애도 있고,잘 죽어서 못혀.▶인터뷰 B*날짜 : 11월 15일 금요일* 우백용 씨 (인터뷰 당시 65세) 부석면 송시리 1구 가마시 거주Q. 서산 주산업은 뭐예요?A. 생강, 마늘, 쪽파 등이지.Q. 간척 사업 이후 보상을 받았다고 들었는데요, 얼마나 받았나요?A. 바닷가 근처 사는 사람들은 다 받았고.. 보상액은 급마다 다르지. A급은 300만원 정도, B급은 150~200만원 정도, C급은 80만원 정도야. 그런데 C급은 받지 못해서 데모를 했어.Q. 바다가 막혔는데, 서운하지는 않으세요?A. 경제적으로 수입 준 게 아쉽더라도 현대는 좋지.Q. 현대 때문에 잃은 게 많아도 좋으세요?A. 지방 사업을 많이 해주거든. 학교 관공서 등등 지원이 많지. 95년 간척 사업 끝나고도 공공사업 많이 도와줘서 지역주민과 유대관계가 높지. 그래서 싫어하지 않아. 바다 있을 때 둑 터지고, 해일 걱정하고 그러던 것 이제 안 해도 되니까... 큰바람 불면 과거엔 무척 불안했으니까. 지금은 간척사업이후 안심이야.) 1963년 해일, 이때 부자 된 사람 많아.▶인터뷰 C최동춘 1959년도 출생 (4남 1녀 중 셋째 - 다른 형제들은 서울에서)1980년도 (간척지 완공)군대(파주) 제대 - 박선구 씨와 함께 입대, 제대 이후에 서울에서 6개월 간 생활1981년(23살)결혼, 부인머동네 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절이 있었다 함.큰개 [대포] 【개】강촌 남쪽에 있는 큰 개. 여러 골짜기 냇물이 합쳐서 이곳에 모여 나감.한터 [대기] 【마을】강촌 복판에 있는 마을.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묘】동산정에 있는 이조 태조의 제 4남 회안대군 방간(芳幹)의 묘.강수리(江秀里) 【리】본래 서산군 마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강경리와 수현리를 일부를 병합하여 강수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갓굴밭 【마을】아랫강수 서쪽에 있는 마을.강경(江境) 【마을】아랫강수 서북쪽에 있는 마을.강경벌 【들】강경 앞에 있는 들. 가사리와 통하였음.강경저수지(江境貯水池) [강수저수지] 【저수지】강경 남쪽에 있는 저수지. 넓이 4정보, 몽리 면적 41정보. 1943년에 만듦.강수리공동묘지(江秀里共同墓地) 【묘】갓굴밭 서쪽에 있는 공동묘지.강수저수지(江水貯水池) 【저수지】→강경저수지.기촌(機村) 【마을】→배짤말.능허대(凌虛臺) 【대】돌뿌리 남쪽에 있는 대.돌뿌리 【부리】아랫강수 서남쪽에 있는 부리. 돌이 많음.돌뿌리 제방 【뚝】돌뿌리 동쪽에 있는 뚝. 길이 1km, 폭 3m. 1957년도에 만듦.말똥산 【산】능허대 남쪽에 있는 산.밤굴 [율곡] 【마을】아랫강수 동쪽에 있는 마을.배짤말 [기촌] 【마을】아랫강수 북쪽에 있는 마을.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이라 함.버드렁치 【마을】웃강수 동북쪽에 있는 마을.빼재¹ [수현] 【마을】빼재고개 밑에 있는 마을.빼재² [수현] 【산】웃강수 동북쪽에 있는 산. 산이 높게 빼어났음.빼재고개 【고개】빼재 산 남쪽에 있는 고개.상강수(上江秀) 【마을】→웃강수서낭당이 【고개】배짤말에서 취평리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음.솔섬말 【마을】아랫강수 남쪽에 있는 마을. 솔밭이 많음.수현(秀峴) 【마을】→빼재¹수현(秀峴) 【산】→빼재²아랫강수 [하강수] 【마을】강수리를 위아래로 나누어서 아래쪽이 되는 마을.안골 【마을】용수동 안쪽에 있는 마을.요곡(堯谷) 【마을】→요꼴.요꼴 [요곡] 【마을】웃강수 북쪽에 있는 마을.용난터 【터】갓굴한다 .
    사회과학| 2009.12.10| 46페이지| 5,000원| 조회(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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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泰安半島 傳統地域의 村落形成과 風水地理 條件에서의 相生關係
    泰安半島 傳統地域의 村落形成과 風水地理 條件에서의 相生關係-瑞山市 浮石面 松枾里/가마시(邊洞)를 中心으로-우완룡(충북대학교)Ⅰ. 서 론 (序 論)1.연구목적(硏究目的)이 연구는 태안반도로 통칭되는 충청남도 서산시 천수만【淺水灣】주변의 전통촌락공동사회 형성과정에서 드러나는 군락성씨(姓氏)나 인명(人名) 지명(地名) 언어(言語) 직업(職業) 작농(作農) 그리고 도로(道路) 사적(史蹟) 등에 관련된 전설이나 화용(話用)에서 그들 군락공동체의 상생 방식이 어떠하였음을 찾아내며, 특히 삼국시대 주변국 신라나 바다건너 중국의 당(唐), 송(宋)의 정세변화에 반응하는 민초들의 태도를 살펴서 이들이 가졌던 국가관이나 종교관등, 정체성은 무엇이었나를 살피고자 한다. 이는 ‘당시 이들의 상생을 위한 윤리적 결단이 오늘의 문화유산으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가설 하에서 위에 언급한 사료나 기존 인터뷰를 분석하되 필요할 경우 계속 새롭게 인터뷰를 하여 채록되는 자료로 당대의 세계관을 고증(考證)하고, 나아가 그의 가치를 강조 하며, 미래세계속에서 이 지역사회에 주어지는 새로운 역할로서의 상생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대안을 제시 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목표가 성공 하려면 미시적 탐구가 필요하고 집중연구지역 선정이 필요할 것이다.2.연구지역 선정이유(硏究地域選定理由)연구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태안반도 남단에서 홍성으로 이어지는 천수만【淺水灣】이 해당되고 천수만에서도【부석(浮石)-검은여】가 될 것이다.이 지역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1980년대 이후 현대건설이라는 자본의 힘에 의하여 대규모의 천수만【淺水灣】간척 사업이 이루어지는 등 근래의 여타 지역보다 다르게 산업화의 경험 폭이 상당하게 크다는 점과, 역사 지리적으로 백제시대 중국과 해상교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과, 고려시대에는 왕실이 일본과의 교역과정에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외지에 속하여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여 향토 사료의 근거가 아직도 통개(桶浦) 금곡(金谷) 해빈여(海濱嶼) 지지골 서근들뿌리, 사기점(沙器店) 국사봉(國師峯) 왜봉산(倭峯山) 서당동(書堂洞)등의 자연마을이 있다.⑧월계리(月溪里) : 행정적 측면으로 살펴보는 월계리는 조선조 때 불모동리(不毛洞里)라고 불려졌다. 쉽게 말하자면 불모동리(不毛洞里)는 현 월계리와 송시리가 합쳐졌던 마을이다. 이 불모동리(不毛洞里)가 1895년의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 때에 월계리(月溪里)와 내송리(內松里)로 구분되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월계리(月溪里)와 내송리(內松里) 일부, 그리고 취포리(翠浦里)일부, 수현리(秀峴里) 일부가 합쳐져서 월계리(月溪里)가 되었다.지형으로 살펴보는 월계리는, 서남(西南)으로 펼쳐진 분지형 마을이다. 서산-창리간, 부석-태안간 주요 지방도와 근접해있고 시(市)와 면(面)소재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직접 그런 주요도로와 접해 있지 않은 관계로 실제는 오지(奧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유한 전통이나 환경이 타 지역에 비하여 덜 소멸되고 훼손됐다고 볼 수 있다.월계리(月溪里)는 북(北)에는 청금산(靑衿山), 동(東)에는 두화산(杜花山:해발 101m)등 문래산(文來山)으로부터 남주(南走)하는 해발 100m 내외의 산맥(山脈)이 병풍처럼 동편에 쳐져 있고 주민들은 생업을 자연 여건에 따라 강수리(江秀里)와 같이 마늘과 생강을 주업으로 하는 농업마을이다.월계리에는 달래(月溪), 도곡(都谷), 송내(松內), 흥천(興川), 바래미(風山), 환두골(環都谷), 황새골, 두구미(圓山), 황곡(黃谷)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청금산(靑衿山), 두화산(杜花山) 장검천(長劍川) 등의 지명이 있다.문학적 정서적으로 살피는 월계리(月溪里)라는 이름은,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냇물이 맑디맑아서 달빛이 비쳐지면 하늘에 있는 달이 냇물 속에도 있기 때문에 ‘달내(月溪)’라 부르게 되었고 이에서 마을 이름도 시적(詩的) 마을 이름이 되었다.)⑨지산리(芝山里) : 행정적으로 보는 지산리(芝山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적 편입을 시키려고 생긴 주민 운동이 있었다.’) 일련의 이런 일이 있고난 후로부터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渴馬里의 馬와 松枾里의 枾를 한 글자씩 따서 馬枾라고 즐겨 불렀다. 아마 이렇게 불려지기 전부터 이곳이 아름답다(佳)해서 佳 字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송시리 속의 갈마리라는 뜻으로 佳馬枾 가마시 라고 불렀을 것) 이라고 한다.2가설은 지형적 영향을 받았는데, 즉 내륙에서 볼 때는 가마시가 변두리에 있거나 천수만 바다의 가에 있다 하여 세워진 가설이다. 그런데 1가설은 이 지역은 토산품이나 경관과 관련 되었다.이 마을의 모양을 보면 주변이 온통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싸여 있어서 경관이 아름답고 또 동네가 영어 알파벳의 C 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서 서편으로 한곳만 터졌는데 터진 그 곳으로 보이는 약 500M 바로 앞이 천수만 이다. 그러니까 마을 중심부에서 천수만 까지는 거리가 1 km 도 못되고 마을 안쪽까지 논이 있는데 그 논이 예로부터 가굴 논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가’라는 것이 아름다운 가굴佳窟인지 변두리(邊(洞)의 ‘가’인지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가굴이라고 하는 어원을 채택하려는 주민들의 입장의 대표적 인물은 임영재씨를 꼽을 수 있다.가마시 마을 중앙에는 논이 있는데 논 위쪽 ,즉 동네 중심부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 나왔다. 이 마을 생성 이래로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한 곳이다, 우물 바로 뒤로는 권영대씨의 上代 영감이 심었다는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대추나무 밑은 터밭이었고 터밭을 30보쯤 걸어 들어가면 권영대씨 집이다. 집 뒤에는 대밭이 있었고 그리고 대나무 밭 바로 뒤에는 이 마을 최초의 정주자로 주장되는 최씨 조상의 고묘가 있다. 서형원씨의 증언에 의하면 ‘봉황이 날아오른 곳이 여기’라고 한다.이 마을 우편에는 임영재씨가 살고 있는 집(팽나무 집)이 있고 좌편에는 이연복씨의 집(살구나무와 오동나무집)등이 있어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가를 생각하면 佳(아름다운) 窟거는 수없이 나와. 그런데 여기 막힘으로서 이 한가지 밖에 못 벌잖아. 집에서 봄, 여름, 가을 농사지으면서 잡아다 먹을 수도 있고 바다에 가서 할 수도 있고.. 겨울에 여기 나가서 벌어먹을 수도 있잖아.Q. 주로 뭐를..여기 안 막혔을 때 어떤 것을..A. 안 막혔을 적에는 여기가 산란지였어..Q. 대통령 선거에는 누구 찍으실 건지..A. 난 아무도 안 찍었으면 좋겄네.. 그게 뭔 얘기인가 하면.. 아무리 잘 난사람 찍어줘도 그 사람이 못 나더라구.. 밑에서 모셔주는 사람들이 시원찮은지 아니면은 찍어주면 내가 잘났다고 그러는지 몰라도 사람하나 찍어주고 싶은 사람이 없어. 국회의원도 그렇고..Q. 이번 선거때..A. 찍어야지.. 찍긴 찍어. 누구라고 그건.. 못 하것고.. 내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인터뷰 E*날짜 : 11월 16일 토요일*송영철 씨 (인터뷰당시 51세)Q. 논 농사 하세요?A. 논농사도 하고, 밭농사도 하고 하우스도 하지. 비중은 비슷하고 꽃꽂이를 위해 화훼를 하지. 지금 마늘 농사는 끝났고. 하우스는 최근 들어 하고 있지.Q. 어업도 하신 적 있으세요?A. 부업으로 했었지 B지구가 황금 어장이었거든 당시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거의 그랬는데, 어업권은 없었지만 그냥 근처 어장에서 고기잡이하고 그랬어 꽃게, 장어 등등 말이야.Q. 간척 사업 시에 보상은 받으셨어요?A. 그때 A 급으로 받았지. 500~600만원 정도인데..Q. 우와~제일 많이 받으셨네요?A. 그런데 뭐...그 액수가 어디 어장 수입만 하겠어?Q. 지금 하시는 일은 잘 되가세요?A. 화훼는 괜찮고..하루에 한 50만원은 벌어 빚이 있긴 하지만 별로 부담이 되지는 않고..그런데 빚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 참 많아)4. 간척 사업이후의 천수만【淺水灣】과 부석【浮石】1)사람들의 생활상 변화①인터뷰를 통해 알아본 간척사업에서의 보상금의 차별 : 간척사업에서의 보상금 배분 기준은 500만원(A), 300 만원(B)이었다, 거주지역이 바닷가에서 가까운 순으로 A, B, C로 나누냈다 함.낙은동(樂隱洞)【마을】→날근터.난곡농장(蘭谷農場)【농장】심포 남쪽에 있는 농장.날근터 [낙은동] 【마을】고잠 남쪽에 있는 마을.도라시 【마을】고잠 동남쪽에 있는 마을.마룡(馬龍) 【마을】→마룡리.심포(深浦) 【마을】→짚은개.심포저수지 【저수지】→짚은개저수지.여후고개 【고개】짚은개에서 강당리 서당동으로 가는 고개. 전에 여우가 있었음.용못터 【터】짚은개 서쪽에 있는 못터.장군개 [장군포] 【개】마룡리 남쪽 끝에 있는 개.장군포(將軍浦) 【마을】→장군개.장안 【마을】마룡리에 있는 마을.짚은개 [심포] 【마을】고잠 서쪽에 있는 마을. 앞에 깊은개가 있음.짚은개저수지 [심포저수지] 【저수지】짚은개 북쪽에 있는 저수지. 1929년에 만듦.창포샘 【우물】고잠 남쪽에 있는 우물. 창포가 많음.봉락리(鳳洛里) 【리】본래 서산군 화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동, 낙양동 일부를 병합하여 봉락리라 해서 부석면에 편입됨.감나뭇골 【골】흑석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감나무가 있었음.검은돌 [흑석] 【마을】봉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검은 돌이 많음.궁논 [죽논] 【논】비단배미 남쪽에 있는 논. 흉년이 들어 죽 세 그릇과 바꾸었다 함.낙양동(洛陽洞)【마을】봉동 북쪽에 있었던 마을. 현재 검은돌과 탕점으로 나누어져 있음.노라실 [노라포] 【마을】봉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노라포(老羅浦) 【마을】→노라실.당뿌리 [당재] 【산】아래노라실 끝에 있는 작은 산. 전에 당이 있었음.당재 【산】→당뿌리.봉동(鳳洞) 【마을】봉락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 있는 서씨(徐氏) 묘를 옮길 때 봉이 나와서 뒷산에 떨어졌다 함.봉동산(鳳洞山) 【산】봉동 뒤에 있는 잔은 산.봉동저수지 【저수지】봉동에 있는 저수지. 넓이 10정보. 1928년에 만듦.봉락석화양식장(鳳洛石花養殖場) 【양식장】노라실 서북쪽에 있는 굴 양식장.봉락저수지(鳳洛貯水池)【저수지】→흑석저수지.봉락제방(鳳洛堤防) (봉정제방) 【뚝】봉락리에서 칠전리에 걸쳐 있는 뚝.봉전제방(鳳田堤防) 【뚝】→봉락제방.비단배미골짜기.
    학위논문| 2009.11.08| 46페이지| 3,000원| 조회(4,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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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