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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安半島 傳統地域의 村落形成과 風水地理 條件에서의 相生關係

*완*
최초 등록일
2009.11.08
최종 저작일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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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泰安半島 傳統地域의 村落形成과 風水地理 條件에서의 相生關係

-瑞山市 浮石面 松枾里/가마시(邊洞)를 中心으로-



Ⅰ. 서 론 (序 論)


1.연구목적(硏究目的)

이 연구는 태안반도로 통칭되는 충청남도 서산시 천수만【淺水灣】주변의 전통촌락공동사회 형성과정에서 드러나는 군락성씨(姓氏)나 인명(人名) 지명(地名) 언어(言語) 직업(職業) 작농(作農) 그리고 도로(道路) 사적(史蹟) 등에 관련된 전설이나 화용(話用)에서 그들 군락공동체의 상생 방식이 어떠하였음을 찾아내며, 특히 삼국시대 주변국 신라나 바다건너 중국의 당(唐), 송(宋)의 정세변화에 반응하는 민초들의 태도를 살펴서 이들이 가졌던 국가관이나 종교관등, 정체성은 무엇이었나를 살피고자 한다. 이는 ‘당시 이들의 상생을 위한 윤리적 결단이 오늘의 문화유산으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가설 하에서 위에 언급한 사료나 기존 인터뷰를 분석하되 필요할 경우 계속 새롭게 인터뷰를 하여 채록되는 자료로 당대의 세계관을 고증(考證)하고, 나아가 그의 가치를 강조 하며, 미래세계속에서 이 지역사회에 주어지는 새로운 역할로서의 상생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대안을 제시 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목표가 성공 하려면 미시적 탐구가 필요하고 집중연구지역 선정이 필요할 것이다.

목차

Ⅰ. 서 론 (序 論)
1.연구목적(硏究目的)
Ⅱ. 본 론(本 論)
1. 地域의 槪觀.

본문내용

2.연구지역 선정이유(硏究地域選定理由)

연구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태안반도 남단에서 홍성으로 이어지는 천수만【淺水灣】이 해당되고 천수만에서도【부석(浮石)-검은여】가 될 것이다.

이 지역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1980년대 이후 현대건설이라는 자본의 힘에 의하여 대규모의 천수만【淺水灣】간척 사업이 이루어지는 등 근래의 여타 지역보다 다르게 산업화의 경험 폭이 상당하게 크다는 점과, 역사 지리적으로 백제시대 중국과 해상교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과, 고려시대에는 왕실이 일본과의 교역과정에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외지에 속하여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여 향토 사료의 근거가 아직도 빈약한 점을 착안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연구자가 이곳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는바 연구자 자신에게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러 부분의 연구 소재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다.

3.연구방법(硏究方法)

연구 방법으로는 우선 문헌자료와 천수만【淺水灣】주변의 군락 하는 성씨(姓氏)나 인명(人名) 지명(地名) 언어(言語), 직업(職業) 작농(作農), 그리고 해상(海上)이나 육지(陸地)의 교통로(交通路), 사적(史蹟) 등에 관련된 전설이나 화용(話用)을 통해서 나타나는 특유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하기, 유물에 대한 고증, 현지주민의 증언, 그리고 연구자의 경험 등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미시적 연구를 위해서 고잔 이라는 마을과 가마시를 살피기로 한다.


Ⅱ. 본 론(本 論)


1. 地域의 槪觀.

연구의 중심이 되는 천수만【淺水灣】은 태안반도 남단에서 남쪽으로 뻗은 태안군의 안면읍과 홍성군·보령시·서산시 사이에 있다. 생성역사를 문헌으로 찾아보면, 천수만은 신생대 제3기말에서 제4기초에 구릉성 산지가 바다에 잠겨 생긴 익곡만(溺谷灣)으로서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으며, 만(灣)입구는 남쪽으로 열려 있다. 만 입구너비 2㎞, 만입길이 40㎞이며, 해안선은 드나듦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서 해안선 길이가 284.5㎞에 이른다. 조석 간만의 차가 6m이며, 수심이 10m 내외로 얕고 작은 섬들1)때문에 대형선박의 출입이 어렵다. 이곳은 본래 수초가 무성하고 영양염류가 풍부해서 농어·도미·민어·숭어 등 고급어종의 산란장이었고, 다양한 어류의 서식지였다. 또한 광천젓갈로 유명한 젓 새우와 광천 김의 주산지였으며, 김과 굴의 양식2)이 활발했다. 그러나 1980년부터 농경지와 담수호 조성을 위한 대규모 간척사업과 방조제 건설사업인 서산지구농업종합개발사업이 실시되어 태안군 남면 당암리에서 서산시 부석면 창리를 지나 홍성군 서부면 궁리를 잇는 천수만의 북부를 길이 7,704m의 방조제로 막아 155.94㎢의 간석지를 매립했다. 1987년 공사가 완공되어 2009년 현재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다. 한때는 사질(沙質)이었던 천수만이 방조제 공사로 사니질(沙泥質)로 변하여 일시적으로 값이 비싼 새조개가 번성했으나, 최근에는 오염이 심해 새조개도 사라졌다. 방조제 완공 후에는 인공담수호의 소금물이 제염갑문을 통해 정기적으로 방류되어 천수만의 바닷물이 붉은색·검붉은 색 등으로 변했다.

참고 자료

위에서도 언급 하였듯 이 지역은 1980년대 현대건설에 의하여 천수만【淺水灣】간척사업(干拓事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 하던 곳이다. 오랜 전설(傳說)3)이 있는【검은여】4)의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둔 사람이 없는5) 것으로 보아서도 이 지역에 대한 무관심 정도를 익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간척 사업이 있고 난 후 향토사료 정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문화 보존 움직임도 있어 다행스러움이 있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검증되지 않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사실과 상관없는 자의적 해석 -그것도 식민사관이나 외세의 자본 상업주의에 편승한 해석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기간 검증이 필요한ㅡ 내용이 여과 없이 성급하게 활자화되어 전파되는 등 미래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교육적 책임을 느끼게 하는 바가 없지 않다.’6)고 서형원씨는 증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간척사업이후 중, 소규모의 자본들이 유입되어서 이권을 목적으로, 순수하던 전통문화 유산과 상업주의를 연계하는 각종 위락 시설과 숙박시설을 설치하여, 선대(先代)의 대대(代代) 상생(相生)의 유산으로 남겨준 고귀(高貴)한 자연경관을 쉽게 훼손하거나 상생윤리(相生倫理)의 누적(累積)이랄 수 있는 지역인심(地域人心)을 피폐시키고 있다.

2. 正史로서의 巨視史

1), 서산, 태안의 행정적 변천

태안반도 특히 서산의 행정변천사의 주요사항들을 고대로부터 시대와 연대별로 살펴보면B.C 755경, 돌도끼, 돌화살촉 발견(두지두, 계도, 장고도)되던 신석기 시대 이후에는 마한이 치리구국(지곡면), 신소도국(태안읍)을 세웠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성대혜현(태안), 지륙현(지곡면), 여촌현(해미읍), 기군(서산읍) 설치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14년에는 기군을 부성군으로, 지륙현은 지육현으로 성대혜현은 소태현으로 개칭하였고 여촌현은 혜성군(당진)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1018 현종 9년에 지육현은 지곡현으로 개칭하고 부성군의 속현이 되었고 여읍현은 홍주의속현으로, 소태는 운주의 속현으로 하였다. 1181 명종 11년에는 부성군을 폐하고 운주에 소속시켰으며, 1284 충렬왕 10년에는 부성군을 지금의 명칭인 서산군으로 소태를 태안으로 고치고 지군사 설치를 하였다. 1308 충렬왕 34년에는 서산군을 서주목으로 승격 하였고, 1310충선왕 2년에는 서주목을 서령부로 강등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1407 태종 7년에는 정해현과 여의현을 통폐합하여 해미현으로 개편
하였고 1314 태종 13년에는 다시 서산군으로 승격 하면서 1491 성종 22년의 해미성 축조 전후 약 381년 동안은 변동 없다가 1695 숙종 21년에 다시 서산군을 현으로 강등하였고 17년 뒤인 1713 숙종 39년에는 또 다시 서산현을 군으로 승격하였다. 영조집권 9년인 1733에는 서산군을 다시 현으로 강등 하였고, 영조집권 18년인 1742년에는 서산현을 다시 군으로 승격 시켰으나 정조가 집권한 1년인 1777년에는 곧바로 다시 현으로 강등 하였으나 1785년 정조 9년에 다시 서산현을 군으로 승격 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 32년 1895년에 해미가 군으로 승격 하였고, 1914년에 태안과 해미가 서산에 통합하여 30개 면을 가지는 거대 행정단위가 탠생 하였다.
서산 군민 만세 시위가 있은 1919 3월 16일-4월 10일 이후 근 현대에 와서는 1942년에 서산면이 읍으로 승격 하였고 1957년에는 정미면 대호지면이 당진읍에 편입된다. 그리고 1973 7월에는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 하였고 1980 12월에는 안면면이 안면읍으로 승격하였고 1989년에는 서산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서산군이 태안군과 분류되어, 1995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될 선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후 태안반도 지역의 행정 구도는 서산시와 태안군으로 나뉘었고 안면읍과 해미읍이 신생하게 된 것이다.

2), 부석면 전통 마을의 역사와 전설

①간월도리(看月島里) : 간월도(看月島)는 원통대(圓通臺) 간월암(看月庵) 벌말(筏村), 새말(新村)등의 지명(地名)들이 있다. 이러한 지명은 간월도의 대외 정치관계나 직업, 그리고 종교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간월도(看月島)는 서산지방의 대표적 역사인물을 배출한 곳일뿐더러 서산을 대표하는 특산품인 ‘어리굴젓’7)으로도 유명하다.

간월도란 이름8)은 서산(瑞山)군호(郡號)보다 오래되었다고 한다.9) 서령정씨(瑞山鄭氏)의 시조(始祖) 원외랑(員外郞 -정신보 鄭臣保)가 자기의 조국이었던 송(宋)나라가 원(元)에 망하자 이곳 간월도(看月島)에 와서 정착했다는 기록10)으로 보면 서주(瑞州-서산(瑞山)이란 군호(郡號)는 간월도리(看月島里)에서 출생한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 되는 양열공(襄烈公-정인경鄭仁卿)11)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공로로 고려 명종12년(1182)에12) 처음으로 서주(瑞州)라는 군호(郡号)를 얻었으므로 서산(瑞山)이란 군호보다도 앞이고 흔히 서산지방에서 회자되는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출생보다도 훨씬 년대가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13)

간월도에서는 양열공 정인경(鄭仁卿)에 대한 위업이 강조되고 성역화 운동에 열심한다.14) 이러한 움직임을 적어보면, 간월도에는 정인경(鄭仁卿)이 지은 초당이 있었는데, 거사몽련(居士蒙年)이라는 자가 그 초당에 기와를 덮어 개조 한 것이 간월 암이 되었다15)고 한다.

거사몽련(居士蒙年)이 간월도를 찾은 것은 ‘연못이 바다가운데 무인절경(無人絶境)속에 있다’16)는 소문을 듣고 모정(茅亭)을 짓고 살 생각을 가지고 찾아17) 갔다가 그곳에서 정인경(鄭仁卿)이 지은 초당의 옛 모습과 그 흔적을 보여주는 기와도 발견한 것18)것 이라고 후대는 전한다.19)

간월도(看月島)가 이처럼 출중한 인물을 배출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와 중국(宋나라)과의 사신(使臣)들이 왕래하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다. 중국의 사신들이 송(宋)나라 수도였던 난징(南京)에서 고려 땅으로 오려면 해로를 이용하여야 했기 때문에 통로가 천수만의 끝 지점인 현 해미면 양림리(良林里)에 있었던 양능포항(良陵浦港)에 배를 대고 내리어 산수리(産水里)에 있었던 안흥정(安興亭)20)에서 쉬어서 오갔던 것이다.21) 지금도 해미면 산수리에는 안흥정지(安興亭址)라는 표석(標石)이 있고 주변의 300여 평의 객관(客官)자리에는 무수한 와편(瓦片)들이 쌓여 있어 옛날 사신들이 오고가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22)

이렇다보니 대 내외적 정치문제와 종교문제도 맞물려서 여러 현상을 빚어냈을 것이고 간월도 뿐만 아니라 부석사나 검은여 같은 설화도 이런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상생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조안방(趙安邦)이라는 서산출신이 판관(判官)이 됐을 때의 이야기에서는 이런 면을 극명하게 노정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안방(趙安邦)이 간월도에 가서 원통대(圓通臺)를 찾았더니 도리위에 현판이 걸렸는데 ‘낙가산 원통사(落加山 圓通寺)’라는 여섯 자(字) 가 있는데, 자획이 맑고 힘이 있어서 가히 명가로 자칭하는 자라도 능히 만분의 1을 비슷할 바가 아니었고, 현판 쪽은 아주 고고하고 판자의 사방으로 그린 줄은 모두 좀이 먹어 훼손상태였는데, 10년 후에 또 다시 가서 보았을 때 현판 쪽은 없어지고 어느 스님이 있다가 다가와서 말하기를 ‘가야산(伽倻山)에 기맥과 정신이 모두 이 섬에 모였기 때문에 이 섬에서 세성인(聖人)이 나온다.’ 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스님을 일컬어 ‘가야산을 떨치는 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간다. 황당 괴이한 중의 말이다.’23)”

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가야산과 간월암의 교단이 분열이탈 하는 모습을 노정하는 표가 아닌가로 보는 이도 있다.24)

②갈마리(渴馬里) : 갈마리(渴馬里)란 마을의 지형 생김이 풍수상(風水上) 말(馬)이 목이 말라 물을 먹는 형국(形局)에서 유래되어 전해진다고 한다. 갈마리의 어느 곳에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 있는지 또 있다면 음택(陰宅)인지 양택(陽宅)인지 알려진 것도 없다.

갈마리(渴馬里)란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는 물론 구한말 일제강점기 등에도 일관되게 통용된 마을 이름이다. 1759년(영조35)에 발간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나타나는 부석면 전체 106가구에 306명이 사는 규모에 견주어볼 때에도 갈마리의 인구수는 큰 마을에 속했다.

갈마리는 면명(面名)이 된 검은여(부석-浮石)이 있는 마을로 면 소재지가 되지 않은 것이 아이러니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25) 여러 정황으로 살펴보면 그 중요성이 면내 다른 어느 곳 보다 높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형적으로 높은 산이 없고 해발 4~50m의 저산성(低山性) 구릉지대로 서산지방의 전형적인 지세(地勢)다. 논밭이 비옥하여 사람살기에 좋고 주생산은 마늘 생강으로 소득을 높이는 곳이다. 80년대 초에 완공된 B지구 대단위 간척지가 매립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부근의 천해간사지에서 반지락 굴 등이 많이 생산되어 어업소득도 높았던 곳이다.

갈마리에는 전통지명으로 돌모루(石隅), 사정터(射亭址), 땡겻, 모심이(苧植), 산짓물들(뜰) 영암(靈岩)이, 삼복치(三復峙), 진재(長峴), 토끼재(兎峴), 개야지들(小犬野), 부들배미(蒲畓), 고잔마을(古棧高岑), 안고잔(內古棧), 불당골(佛堂谷), 황섬(黃島), 검은여(검연여黑嶼-浮石)시오리, 매흙구덩이, 등의 자연마을과 지명이 있다.

③강당리(江堂里) : 강당리(江堂里)26)의 원래 이름은 소내(牛川) 였다.27)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화변면(禾邊面)10개리중 우천리(牛川里)로 분리된 마을로서 ‘여지도서(與地圖書)’28)에 의하면 가구 131호에 232명의 인구가 사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이것이 구한말인 1895년에 강촌(江村) 시동(詩洞) 서당동(書堂洞)등 3개 마을로 세분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강촌(江村)마을과 서당동(書堂洞) 일부와 시동(詩洞)일부가 합해져 한마을이 되었는데 이때 강촌(江村)에서 강(江)자를 따고 서당동(書堂洞)에 당(堂)자를 따서 강당리(江堂里)가29)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옛날 우천리(牛川里)에 속해 있었던 시동(詩洞)의 많은 부분이 지산리(芝山里)로 편입되고 서당동(書堂洞)의 일부는 칠전리(七田里)와 마룡리로 편입되어 나가므로써 옛날에 이세(里勢)가 컸던 옛 우천리(牛川里)인 강당리(江堂里)는 이웃과 경계한 옛 산저리(山底里 -지산리芝山里)30) 보다도 작은 마을이 되었다.31) 강당리는 일제의 폐를 많이 받은 미시 사료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강당리(江堂里)의 전통 지명에는 서당동(書堂洞) 신당(新塘) 시어지(詩洞) 새터(新基) 강촌(江村)32) 한터(大基) 배양골, 불너머리 각후동(角后洞) 육간월(陸看月) 절굴(寺谷)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어치기 저수지(貯水池), 소내(牛川) 소내다리(牛川橋) 큰개(大浦) 동미(東山) 동산정(東山亭) 두멍배미논 둥구재 말배미(斗畓) 망등산(望登山) 문필봉(文筆峯) 배알산(拜謁山) 봉우재 불당골(佛堂谷)사장터(射亭址)등의 지명과 숭덕사(崇德祠)가있다.

강당리(江堂里)에서 현재 살고있는 사람들을 족보로 살펴보면, 단연 전주이씨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후손이 80%이상이고, 600여년 가깝게 세를 이루며 살아오고 있는 서령유씨(瑞寧柳氏)문숙공 위촌유백순(韋村柳伯淳)후손들의 토착(土着 集姓村)마을이다.

④대두리(大頭里) : 대두리(大頭里)33)라는 이름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화변면(禾邊面)대두리(大頭里)로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일관되게 쓰여오다가 1895(고종32)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마산면 대두리 낙양리(馬山面 大頭里 洛陽里)와 화변면 대두리 낙양리(禾邊面 大頭里 洛陽里)등 4개마을로 분할 운영된 일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2개의 대두리(大頭里)와 낙양동(洛陽洞)일부가 합쳐져 부석면 대두리(浮石面 大頭里)가 되었다. 서두에서 언급되었듯, 조선시대에는 마산면(馬山面)과 화변면(禾邊面)의 경계 지점이었고 1895년에는 4개의 마을로 구분되었던 경계 구분이 복잡한 지역이다. 현재에도 부석면 소재지인 취평리의 남쪽에 위치 경계해 있는 마을로 외부인들에게는 경계 구분이 어려운 마을이다.

이제까지 읍면동의 행정구역을 살펴본바로는 아래 하부조직인 동리(洞里)에서만은 분할내지 변동이 있어 왔는데 이 대두리(大頭里)에서만 화변면(禾邊面)관할에서 마산면 (馬山面)으로 일시 일부가 분할 편입 되었던 일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34)

대두리에는 고래들, 고래모퉁이 고리짝베미논, 구억말, 내건너, 느리재, 다락골, 당재(堂峙), 당재골(堂峙谷), 대두저수지(大頭貯水池), 동산, 뒷굴(後谷), 들마당(野場),띠밭모랭이, 마룻들, 말무덤, 말무덤재, 매봉재, 모얀, 부엉굴, 부엉배, 사양골(斜陽洞), 서낭당(城隍堂), 수랑배미(水畓) 아래말(下村), 양지편(陽地便), 오릿굴(五里谷?鴨谷) 웃말(上村) 장자마당터, 점산(点山), 중탱이, 차돌배(石英岩)등의 자연마을 지명과 이정복씨35) 염전(鹽田)이 있다.

⑤마룡리(馬龍里) : 마룡리(馬龍里)는 조선시대에 대잠리(大岑里)와 마룡교리(馬龍橋里)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대잠리(大岑里) 마룡교리(馬龍橋里) 서당동(書堂洞)일부가 합쳐져 마룡교리(馬龍橋里)에서 다리교(橋)자를 빼고 마룡리(馬龍里)라 하였다.36) 마을 이름이 된 마룡(馬龍)은 이 지역에서 구전하는 전설과 관련이 있다.37)

마룡리(馬龍里)38)에는 고잠(高岑) 날근터(樂隱洞) 마룡(馬龍) 도라시 짚은개(深浦) 장안(市內)등의 자연 마을이 있고 국사봉(國師峯) 난곡농장(難谷農場)과 심포저수시(深浦貯水池) 여우고개 용못터(龍淵池) 장군개(將軍浦) 창포샘(菖蒲井) 국샘(國井) 갯들겡이 등처럼 마룡리(馬龍)는 지금도 환경이 오염되지 않고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39)

현재의 마룡리는 서산최초의 민속생강 한과를 개발하여 고잠 주민을 중심으로 상생의 산업으로 발전시켜오고 있다.40)

⑥봉락리(鳳洛里) : 현 봉락리 대부분은 화변면(禾邊面) 칠전리(漆田里)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봉락리(鳳洛里)라는 독립된 마을이 없었다. 구한말인 1895년 행정구역 때에 칠전리(漆田里)41)가 칠전리(七田里)42), 낙양리(洛陽里),노라포리(老羅浦里),마을로 분리 되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에 낙양리(洛陽里)의 일부와 봉동(鳳洞),노라포리 그리고 칠전 일부가 합쳐져서 봉락리(鳳洛里)가 되었다.

봉락리(鳳洛里)에는 검은돌(黑石) 탕정(湯井) 수캐골, 사고개(祠峴)산골(山谷) 서낭댕이(城隍堂) 낙양동(洛陽洞) 봉동(鳳洞) 노라실(老羅室) 노라포(老羅浦) 봉락저수지(鳳洛貯水池) 감나무골(?木谷)등의 자연마을과 국기대가 있다.

⑦칠전리(七田里) : 칠전리(七田里)는 봉락리(鳳洛里)편에서 밝혔듯이 조선시대까지는 옻밭(漆田)마을인 칠전(七田里)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옻밭(漆田)마을이라는 칠전리(七田里)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일부는 봉동(鳳洞)과 낙양리(洛陽里)로 되고 일부는 금굴리(金堀里) 사점리(沙店里)로 분리되고 일부는 서당동(書堂洞)으로 분리 편입 되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금굴리(金掘里) 사점리(沙店里)가 합쳐지고 서당동(書堂洞) 일부가 분활 되어 칠전리(七田里)라는 마을이 되었다. 지금도 회관이 있는 마을 중심을 옷밭골(漆田谷)이라 부르는데 이 근방에는 옻나무들이 약간 남아 있어 옛 잔영(殘影)을 엿 볼 수 있다고 한다.

최근 학계나 행정 연구기관에서 생활문화의 옛 유적지나 유물에 대한 조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이곳이 옻 밭(漆田)마을이었다면 그들이 만들어 냈던 물건은 무엇이며 그 질이나 용처는 어디였을까?

오늘날 세계 일류국가 미국이나,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주의 하나는 기술자를 최 우대하는 정책에 기인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화변소(禾邊所)43) 칠전(七田)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나 내력에 대한 연구가 거듭되어 그러한 것들에 대한 흔적이라도 찾아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옻나무(漆田)에 대한 보호대책도 있어야 할 것이다.44)

칠전리(七田里)는 동서간(東西間) 폭이 1km 미만으로 좁고, 북쪽 봉락리(鳳洛里)경계 지점에서 남쪽 마룡리(馬龍里) 경계지점 까지 남북(南北)은 4km가 넘는 긴 마을이다. 그럼에도 이장(里長) 한 사람이 관할하는 단리(單里)마을이기 때문에 북쪽마을 주민과 남쪽마을 주민 간에는 접촉 기회가 적은 단점을 가지기도 하는 마을이다.

칠전리(七田里)에는 성적골(聖積谷) 옷밭골(漆田谷) 손부락재, 통개(桶浦) 금곡(金谷) 해빈여(海濱嶼) 지지골 서근들뿌리, 사기점(沙器店) 국사봉(國師峯) 왜봉산(倭峯山) 서당동(書堂洞)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⑧월계리(月溪里) : 행정적 측면으로 살펴보는 월계리는 조선조 때 불모동리(不毛洞里)라고 불려졌다. 쉽게 말하자면 불모동리(不毛洞里)는 현 월계리와 송시리가 합쳐졌던 마을이다. 이 불모동리(不毛洞里)가 1895년의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 때에 월계리(月溪里)와 내송리(內松里)로 구분되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월계리(月溪里)와 내송리(內松里) 일부, 그리고 취포리(翠浦里)일부, 수현리(秀峴里) 일부가 합쳐져서 월계리(月溪里)가 되었다.

지형으로 살펴보는 월계리는, 서남(西南)으로 펼쳐진 분지형 마을이다. 서산-창리간, 부석-태안간 주요 지방도와 근접해있고 시(市)와 면(面)소재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직접 그런 주요도로와 접해 있지 않은 관계로 실제는 오지(奧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유한 전통이나 환경이 타 지역에 비하여 덜 소멸되고 훼손됐다고 볼 수 있다.

월계리(月溪里)는 북(北)에는 청금산(靑衿山), 동(東)에는 두화산(杜花山:해발 101m)등 문래산(文來山)으로부터 남주(南走)하는 해발 100m 내외의 산맥(山脈)이 병풍처럼 동편에 쳐져 있고 주민들은 생업을 자연 여건에 따라 강수리(江秀里)와 같이 마늘과 생강을 주업으로 하는 농업마을이다.

월계리에는 달래(月溪), 도곡(都谷), 송내(松內), 흥천(興川), 바래미(風山), 환두골(環都谷), 황새골, 두구미(圓山), 황곡(黃谷)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청금산(靑衿山), 두화산(杜花山) 장검천(長劍川) 등의 지명이 있다.

문학적 정서적으로 살피는 월계리(月溪里)라는 이름은,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냇물이 맑디맑아서 달빛이 비쳐지면 하늘에 있는 달이 냇물 속에도 있기 때문에 ‘달내(月溪)’라 부르게 되었고 이에서 마을 이름도 시적(詩的) 마을 이름이 되었다.45)

⑨지산리(芝山里) : 행정적으로 보는 지산리(芝山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던 곳인데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저리(山底里) 달천리(達川里) 시동(詩洞)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天里)등 5개 마을로 분리 되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산저리(山底里) 달천리(達川里)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川里)와 시동(詩洞)의 일부를 합하여 지파동(芝杷洞)에서 지(芝)자를 따고 산저리(山底里)에서 산(山)자를 따서 지산리(芝山里)가 되었다. 지산리(芝山里)는 해발 351m 도비산(都飛山)정상봉(頂上峯)의 남사면(南斜面)을 포함한 남동향(南東向)개활지(開豁地)로 아늑하게 펼쳐진 마을이다.

풍수적으로 보는 지산리는, 마을 전체의 형상(形象)은 풍수상(風水上)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뚜렷하게 잘 이루어 졌고 높이 솟은 도비산(都飛山)이 서북풍(西北風)을 막아주고 남동(南東)으로 확트인 천수만(淺水灣) 바다와 접해 있어서 어염시수(漁鹽柴水)를 잘 갖춘 곳으로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는 사람살기에 어느 곳보다도 유리했던 곳이다.

지리적 자연 여건이 좋아서일까? 지산리(芝山里)에는 도요동, 달천(達川) 지파동(芝杷洞) 구억말(九億村) 남아시들 벌어지 문뱅이 산재(山底) 방아다리, 벌떡운지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관청 모랭이 등우골 물바위 무릅절터 말등산 대숲모랭이와 같은 지명이 있으며 동사(東寺)와 수백 년 전으로 올라가서 찾게 되는 효자 국현남(鞫賢男)과 유동원(柳東源), 그리고 그의 부인이며 효부인 밀양손씨(密陽孫氏)등 2개소의 효자정려(旌閭)가 있다.46) 이런 점만 보아도 이 마을 인심이나 향풍(鄕風)이 어떠했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7)

⑩창리(倉里) : 창리(倉里)48)는 부석반도의 남쪽 끝머리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왜현리(倭縣里)이었는데 구한말인1895년 행정구역개편 때에는 항촌(項村)과 창촌(倉村)으로 분할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창리(倉里)가 되었다. 창리(倉里)는 조선시대 이곳에 주사창(舟師倉)이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49)

동군지(同郡誌)에는 주사창(舟師倉)15칸(間)이 화변면 왜현리(금부석면 창리)에 있는데 그후에 군기창고가 되더니 1896(건양원년)에 없어졌고 그 부지는 231평 2홉 7작이라 기록되어 있어 현 마을 이름도 이에 유래된 것을 알 수 있다.(舟師倉十五間在禾邊面內 倭縣里今浮石面倭縣里)(今倉里是藏軍器之朝鮮朝建陽元年申頹壞口遺擊地二百三十一坪二合七勺).50)

주사창(舟師倉)에는 수군선박(水軍船舶)을 매어 두는 곳으로 거북선 1척 방선 1척 동후선(척후선으로 추정됨)3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1)

창리(倉里)에는 항촌(項村:목말)창촌(倉村)등의 두 개의 자연마을로 구분되고 구창터(舊倉址) 닭섬(鷄島) 쏘아섬, 대섬(竹島) 상고개(上峴) 시루섬(증) 검조도-檢鳥島) 아니배 조도(鳥島) 창말나루터(倉津) 등이 있다.

3. 천수만【淺水灣】과 부석【浮石】의 전설(傳說)

1)검은여의 전설

검은여는 지금의 부석면 갈마리와 송시리 앞바다의 적돌강(積乭江) 가운데에 위치한 돌섬이었다. 그러나 문헌에서 검은여를 다룰 때 갈마리보다 송시리를 더 강조 하는 것은 검은여의 뿌리(돌뿌리)가 지금의 송시리2구에 있고, 그 근거로서 검은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잘한 쑥 바위나 농바위(어떤 이들은 용龍바위라고 부르기도 함)등이 검은여에서 송시리 2구 해안에 이르는 동안 끌려오면서 흘리기라도 한 듯이 이어진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이 시작 하는 해안의 지명이 돌부리(검은여의 뿌리)라는데서 시작 한다. 그런가 하면 거기에 더하여 돌부리 에서는 검은여의 눈물이 굳어서 생겼다고 전해지는 매흙52)이 나와 점 말53)이 됬다고 전해온다.54)

검은여는 토착민들에게 예전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어, 검은여에 대한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공통점은 검은여에 얽힌 설화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국제적이며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안목으로 살펴보면 국제적 관계와 전통지역 토착민들 간의 긴장과 이완의 관계를 정제하여 상생의 윤리로 뿌리내리는 단초를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55) 그러한 예(例)의 하나를 우선 의상대사와 당녀(唐女)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고승(高僧) 의상대사가 문무왕 11년에 중국 당(唐)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귀국할 때 대사를 사모(思慕)하던 당나라의 여인이 결혼을 애원하였으나 거절하고 배에 오르자 당녀(唐女)는 바닷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신라에 돌아온 대사(大師)는 당녀의 혼(魂)을 위로하기 위해 문무왕 17년(677)에 당나라와 가장 가까운 현재 부석면 도비산(島飛山)에 절(지금의 부석사浮石寺)을 창건하던 중 마을 주민의 극심한 반대56)로 절 짓는 일이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일고 검은 거암(巨岩)이 공중에 둥둥 떠돌며 -너희들이- ‘절 짓는 일을 방해하면 큰 재앙을 내리겠다.’57)는 호통이 들리자 그 후 방해하지 아니하여 부석사가 창건하게 되었고 이 때 공중에 떠 있던 거암이 부석사(浮石寺)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이곳 적돌강에 떨어져 검은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당 외세와 불심영합에 대한 지역민의 저항과 관련이 있음을 보이는 대목이다.

이후 검은여는 적돌강의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들의 눈(目)에 항상 떠 있는 돌과 같이 보여서 부석(浮石)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고 그 것이 지명으로 안착하여 행정구역 단위도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친 후 결국 부석면이 되었다. 그러나 간척공사로 인하여 정확히 1982년부터는 결국 검은여 주변은 육지(陸地)로 변하였고 2009년 현재는 농지(農地)로 변하여 작농(作農)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민간 간척사업과 관련하여 전해지고 있는 검은여 이야기들은 복을 가져온다는 전설과 화를 불러온다는 전설로 크게 나뉘고 있다.

복을 가져온다는 전설중의 하나는 1986년 12월 채록할 당시 서산군 태안읍에 사는 71세의 한 남자노인의 구술이라고 하는데, ‘그 뜬 돌(부석 석) 밑에, 우리나라 인구가 3개월 먹을 양식이 잠겨있다.’는 전설이다. 이 이야기를 구술할 당시에는 현대가 간척공사를 통해 농지를 한창 조성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간척공사를 전설의 현실로 여기는 주민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현지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온 것이다. 오히려 당시의 그러한 전설은 미미한 수준의 지역주민들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에 불과 하였고 해외 농작물 수입개방으로 우리 농작물 값이 하락하고 쌀이 남아돌아 천수만 간척지를 오히려 위락도시화 하려는 오늘의 현실에서 전혀 예견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전설이다.

복을 가져온다는 두 번째 전설은 검은여와 매흙구덩이와의 관계이다. 주석(註釋)에 밝힌바 검은여(당여)의 눈물이 이겨져서 생긴 흙으로 이해되어 전하는 매흙은 아무 곳에서나 쏟아져 나오지를 않고 송시리의 돌부리와 갈마리의 시오리 아래에서 살고있는 서무원씨 집 뒤에서만 출토(出土)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곳의 매흙 출토지(出土地)와 검은여를 다이아몬드 식으로 도식하여 만나는 지점에 묘를 쓰면 가문이 번창(繁昌) 한다는 전설이다. 그리고 전설의 지점은 다름아닌 지금의 송시리 1구 가마시라고 명명되는 곳이다. 말하자면 가마시에는 명당이 있다는 말이 된다.(가마시와 관련한 전설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다음으로는 그렇다면 화를 불러온다는 전설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이 전설은 앞에서 복을 가져온다는 첫 번 전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채록되었는데 내용인즉, ‘부석사와 검은여는 지령(地靈)이 상통하여 검은여에 묘를 써서 부석사의 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에 따르면, 인지면 산동리 동막에 사는 임씨라는 어느 분이 검은여에 묘를 쓴 후 부석사 불당 앞 용천식수가 불시에 말라 식수난이었는데 겁을 먹고 즉시 이장(移葬)하자 그 식수가 회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두고 어느 불자는 ‘미신같은 전설이지만 지역민들은 현대건설의 간척사업으로 예기치 않는 피해가 발생할까 공포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전설의 이면을 깊이 살다보면 불심의 작용이 있으며 사찰이 지역을 통제하려는 헤게모니를 노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화를 불러 온다는 다음의 전설은 명당터가 있는 가마시와 돌부리에서 검은여 중간에 널려 있는 농(용)바위와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송시리(가마시)와 봉락리와의 관계이다.

2)【가마시】의 전설(傳說)

①【가마시】와 검은여의 저주 : 전언58)에 의하면 가마시의 명당터에는 아래로 맑은 못이 있고 뒤로 숲이 있는데 못에서는 용(龍) 한 마리가 살았으며 숲에서는 봉(鳳)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검은여가 생겨나자 용과 봉은 이를 명당 터 빼앗으려고 나타난 세력으로 여기고 멸절코자 하여 용은 북쪽방향의 고래논(지금의 점말 앞)의 물줄기를 따라서 이동하여 검은여를 공격 하고, 봉황은 동남쪽 방향 돌무지 끝 갈마지와 취계뻘을 경계하는 장금천을 타고 검은여를 공격 하려고 날다가 잘못하여 지나쳐 떨어진 곳이 지금의 봉락리 성황당 주변이고, 용은 검은여 에 근접하게 이동은 하였으나 앞에서는 쑥 바위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돌부리가 암습 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봉락리와 송시리(특히 가마시)는 식생 조건이 비슷하여 졌고 이 두 곳에서는 큰 인물이 되려고 해도 부석사와 검은여의 기운이 가로막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출신 재목은 일찍 죽거나 망한다고 한다.59)

이 전설은 보편적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지는 않지만 가마시에서 토착 거주하던 사람들의 입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렸으며 실제로도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사례들이 있기도 하다. 가깝게는 신묘생 임도순은 가마시 출신 영재로서 어릴 때부터 줄곳 일등만 하여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는 가족사에 얽힌 비운적 섭리에 걸려 더 넘어서지 못하고 어렵게 공부하여 지금은 어느학교 교장으로 봉직 중인 것으로 확인 되고 있다.

또 하나는 김 화자(김성곤의 누나)라는 봉락리 출신 여성역시 대단한 인물로서 어릴 때 줄 곳 전교 회장을 빼앗기지 않고 맡아 하던 그런 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보아서 초야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가마시에 범띠 김천순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음악의 귀재라고 할 수 있는 인사다. 성대가 좋고 발성력이 뛰어나서 당대의 국민가수 남진을 능가한다 하여 친구들이 그를 김남진으로 별명까지 붙여 주었으나 이분 역시 가족사의 비운을 극복하지 못하고 갈마리의 가성현씨의 가계에 편입함으로서 용이 되지 못한 실정이다.(이전 대代 인물에 관하여는 후에 거론키로 한다.)

다른 한편 가마시에는 대두리에서 살다가 이주하여 온 서정재라는 분이 있었다. 이 분은 1918년(무오년)일제 자본에 의한 서해안 간척사업이 있고난 후부터 1980년 현대건설 간척 사업이 있기 전까지의 중간 시기인 1963년대에 최초로 천수만 주변 간척 사업을 시도 하신 개인사업자분이다. 그가 간척 사업을 한 곳은 지금의 갈마리와 가마시의 맞닿는 곳 시오리(서무원씨가 살고 있는 바로 맞은 편)의 약 1500-600평 정도인데 주변 인부를 동원하여 제방을 성공시켰으나 이상하게 해일이 생겨서 둑이 무너지기를 거듭 하던 중 1965년에는 서해안에 대 해일이 생겨서 곳곳에 제방이 무너졌기 때문에 정부가 피해지역을 지원하여 전면 원둑 공사를 할 때 집행진의 배려로 개인 사업자 서정재씨의 제방뚝도 다시 부토하는 큰 혜택을 주었지만 서정재씨의 사업장 거기만 또 무너지는 비운을 만나게 된다. 다른 제방은 아직도 탈이 없는데 왜 서씨의 제방만 무너진 것일까를 두고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차차 멀어져 가고 있다. 만약 이 사업이 성공 하였더라면 서씨는 분명 용이나 봉황이 되어 훨훨 날고 있을 것이 분명 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다.60) 이후 서정재씨는 동원한 인력에게 대가도 지불치 못하고 전전 긍긍하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장남 서장석씨가 큰 이유 없이 요절하는 일이 생긴다.61)

또 한 사례는 1918년 이후 가마시 앞에는 염전이 있었고 경영자는 강굴에 살고 있는 강종성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인물이 쾌활하고 언술이 뛰어나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대두리의 이정복씨가 경영하는 염전보다 수년 일찍 폐업을 하였고 베뚝재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것은 대두리 염전 경영자 이정복씨가 지역에서 누리던 삶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비춰지고 있는 대목이다. 가마시에 대한 검은여와 부석사의 저주 때문일까?

가마시에 최초로 정착한 자는 최씨(崔氏)62)와 가씨(價氏)63)와 권씨(權氏)64)가 서로 자신의 조상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의 고증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가마시에서 60-70년대까지 잠시 거주한바있는 최순철(崔淳喆)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더듬을 필요가 있다.

최씨는 가마시에서 명자(明子) 아버지로 통하였다. 노모와 폐병 든 아내, 그리고 어린 딸을 가족으로 거느리고 있었는데 딸의 이름이 명자였다. 가장인 최씨는 어쩐 일인지 집에 거의 없었고 시어미와 며느리와 손녀만 셋이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부기관에서 마을로 조사가 내려왔다. 최씨가 민통선을 넘어서 월북하려다가 체포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반공이념은 국시로 정해져서 엄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던 때였다. 울부짖는 여인네들의 애처러움을 본 주민들이 상생의 일환으로 구명활동을 하였다. ‘최씨의 사상이 친북이거나 좌빨이 아니라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무식자라서 알지 못하고 통제선을 넘은 것’65)이라는 논리로 정부에 탄원을 하였다. 결국 6개월 후 그는 수용생활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가마시로 돌아 왔지만 그 후 그는 다시 마을에서 사라지고 폐병이 있던 부인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 방바닥에서 헌 이불을 둘러쓰고 죽어 장사되고66) 할미와 손녀만 몇 년간 같이 살다가 결국 도피 하다시피 가마시를 떠나고 지금은 아무도 그를 기억하거나 그의 흔적을 알지도 못한다.

생각해 보면 서해안 오지 가마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이유야 어찌 됬든 국가 경계를 넘어 월북을 시도 하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로도 1980년대 문기현 신부나 문익환목사 보다도 앞선 것이라서 하마터면 (시기만 잘 타고나고 목적과 방법이 좋았다면)분명 용이나 봉황이 될 뻔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미완으로 끝나고 불운으로 이어지는 것은 혹시 검은여와 부석사가 가마시에 내리는 저주 영향 때문은 아닐까?

결국 이런 식의 역사적 추론을 하다 보면 지극히 종교적 색채가 드러나기도 하는 한편, 가마시라는 지명이 가지는 전설중의 하나와 봉락리의 노라실과의 대외세력을 견제하려는 지역 특유의 상생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도 가마시와 봉락리 -특히 노라실이- 당(唐) 외세로 대표되는 당시의 사찰건립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한 지역일 것이라는 추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67) 그래서 이의 저항표현의 일부로서 가마시 명당설68)이 나왔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검은여가 육지가 되고 부석사의 지역통치력이 쇠약해진 -특히 봉락리 군락성씨 중 단양 우씨가 부석사 아래 도비산자락에 종종묘지를 가진 상황에서- 현재로서는 화를 가져온다는 전설이나 복을 가져온다는 전설의 추이를 관심가지고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격일까? 아니면 지나고 보니 검은여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어떤 면으로든지 이권과 관련되어서 검은여와 연계시키려는 상업주의 발상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 모든 것에 +a를 더한 발상일까? 누구 말대로 ‘면민의 화합의 장을 마련하겠다.’69)는 순수한 친목정신과 상생의 발로일까? 토착민들도 그 취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도 검은여 보존위원회에서는 검은여제(祭)를 지내고 있다. 검은여제는 1989년 검은여 유래비 제막식의 형태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1991년부터 매년 한 차례씩 제를 지내고 있다.

②【가마시】의 지명(地名)과 풍수지리(風水地理) : ‘가마시’는 충남 서산시 부석면 송시리1구 의 서쪽 방향과, 갈마리2구 의 북쪽 방향으로 만나는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생강 마늘 등 특작 농사를 많이 하는 15호 정도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이 가마시 이다. 그런데 가마시 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지도상에 드러나기 시작 한 것은 1990년대 쯤 부터이다. 간척 사업 이전에는 지명이나 전설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가 근자에 와서 급작스럽게 문헌에 오르내리고 있음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가마시는 그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료 발굴과 정리가 활발한 지금 ‘가마시가 검은여 설화와 연결되어 구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평가 절하하여 기록에서 배제하려거나 강조를 애써 외면하려는 의도성이 작용하여, 가마시 설화를 사실과 다르게 왜곡시키거나 탈색하여 구전 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70)는 의견들이다.

권영대씨는 ‘가마시설화가 검은여 설화와 같이 보편화 되지 못한 채로 오랜 세월을 파편화된 채로 토착민들의 기억 속에서 웅크려 지나다보니 외지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분명 미시적 소재임은 틀림없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미시사를 바르게 발굴하여 노정하는 작업은 학문적으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연고자들에게는 고향의 자긍심을 심어 주는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겨 주었다.

2002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연구팀이 한때 이곳을 사회조사 하던 중에 가마시의 고전명이 무엇이었을까를 찾아내기 위하여 연구의 가설로 가마시의 원 이름은 ‘가굴(佳窟), 혹은 가굴(변동邊洞)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3 가설로는 갈마리와 송시리의 가운데 글자인 ‘마’와 ‘시’를 각각 한 글자씩을 차용하여 가칭으로 사용 하다가 자연스럽게 생긴 이름이다, 라고도 하였다.

3가설이 생기게 된 것은 가마시가 행정적으로는 송시리에 속하면서도 지형적으로나 인맥적으로 갈마리와 밀접하여 갈마리와 상생을 하였기 때문이다.71)

‘당시의 이 마을의 지리적 여건이 행정적 여건과 모순되어서 가마시가 행정적으로는 송시리 지만 실제로는 갈마리와 왕래가 더 빈번하였다. 사실적으로 여러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80년대 初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 사람들이 외지에 나가서나 군대에 갔을 때 집으로 보내는 편지 주소를 쓸 때도 반드시 갈마리 2구(가마시)라고 썼다. 그렇게 해야만 편지가 잘 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72)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가마시 사람이 송시리 사람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어서 서로 누가 누군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실제로 ‘1950-60년대에 가마시를 갈마리로 행정적 편입을 시키려고 생긴 주민 운동이 있었다.’73) 일련의 이런 일이 있고난 후로부터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渴馬里의 馬와 松枾里의 枾를 한 글자씩 따서 馬枾라고 즐겨 불렀다. 아마 이렇게 불려지기 전부터 이곳이 아름답다(佳)해서 佳 字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송시리 속의 갈마리라는 뜻으로 佳馬枾 가마시 라고 불렀을 것74) 이라고 한다.

2가설은 지형적 영향을 받았는데, 즉 내륙에서 볼 때는 가마시가 변두리에 있거나 천수만 바다의 가에 있다 하여 세워진 가설이다. 그런데 1가설은 이 지역은 토산품이나 경관과 관련 되었다.

이 마을의 모양을 보면 주변이 온통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싸여 있어서 경관이 아름답고 또 동네가 영어 알파벳의 C 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서 서편으로 한곳만 터졌는데 터진 그 곳으로 보이는 약 500M 바로 앞이 천수만 이다. 그러니까 마을 중심부에서 천수만 까지는 거리가 1 km 도 못되고 마을 안쪽까지 논이 있는데 그 논이 예로부터 가굴 논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가’라는 것이 아름다운 가굴佳窟인지 변두리(邊(洞)의 ‘가’인지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가굴이라고 하는 어원을 채택하려는 주민들의 입장의 대표적 인물은 임영재씨를 꼽을 수 있다.

가마시 마을 중앙에는 논이 있는데 논 위쪽 ,즉 동네 중심부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 나왔다. 이 마을 생성 이래로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한 곳이다, 우물 바로 뒤로는 권영대씨의 上代 영감이 심었다는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대추나무 밑은 터밭이었고 터밭을 30보쯤 걸어 들어가면 권영대씨 집이다. 집 뒤에는 대밭이 있었고 그리고 대나무 밭 바로 뒤에는 이 마을 최초의 정주자로 주장되는 최씨 조상의 고묘가 있다. 서형원씨의 증언에 의하면 ‘봉황이 날아오른 곳이 여기’라고 한다.

이 마을 우편에는 임영재씨가 살고 있는 집(팽나무 집)이 있고 좌편에는 이연복씨의 집(살구나무와 오동나무집)등이 있어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가를 생각하면 佳(아름다운) 窟이란 이름이 걸 맞는듯하기도 하다. 더구나 이 마을에 사람들이 정착하고 난 후부터는 ‘삼(麻)과 모시농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정경이 아름다워서 가마시라고 했다.’는 임영재씨의 증언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명명을 증명하기 위해서 문헌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문헌은 거의 전무하였다. 다만 부석면의 노인 회장을 지내고 과거에는 대두리에서 염전을 하시던 李晶馥이라는 분이 쓰신[우리고장 부석]이라는 面 향토지에서 가마시를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여 ‘갈마리가 말(馬)이니까 말의 옆에 붙은 날개 형국이므로 馬翅’ 라는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날개라는 것이 전통적으로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날개는 양쪽이 모두 있어야하는 것인데 한 쪽만 있는 날개는 병들었거나 불구자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풍수 지리적 해석으로는 피해야만 하는 해석일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을 한쪽 날개가 꺾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창복 옹이 가마시에는 부석사와 검은여의 미움이 도사리고 있는 점을 알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더라도 이 해석은 주민들 간에 거의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일제사관을 가지고 가마시를 해석하였다.’75)고 분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더구나 이정복 옹이 여기서 사용한 가 字는 오늘날에 거의 사용되어지지 않는 글자이며, 더구나 이 글자는 원래 날개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 ‘당’字로 곧잘 사용되어 왔고, 수량을 헤아릴 때 個字의 同形으로서 一 個 二 個 할 때 사용되어졌던 글자이다. 그렇다면 가마시가 ‘날개의 형국이라’는 해석은 역사적 뒷받침도 빈약하고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므로 그 신빙성이 빈약한 해석이다. ‘오히려 명당이 있어서 가마시가 되었다,’ 라고 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복 옹이 이를 완고하게 고집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서 경제권을 가진 유지였다 라는 점과 현직 노인 회장이라는 헤게모니, 또 한편으로는 과거에 한문학을 익혔다는 것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역사가의 생각이 개입하는 여유를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으로 그렇게 만들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연구팀은 이 옹을 인터뷰하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인터뷰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주변 탐문 결과 이 옹의 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76)

③【가마시】의 인구이동의 역사와 해안개척 : 이제 연구자가 탐구해야만 할 문제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변두리 주변 마을로 와서 살게 된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이를 밝히는 작업으로는 사회 이동의 요인을 탐구하는 것이다. 거시적으로는 서두에서 언급한 임야개척(林野開拓)과 해안개척(海岸開拓), 그리고 운하건설(運河建設)등을 살펴야 한다. 사회이동 원인과 관련이 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안반도에서는 역사적으로 두 곳의 운하건설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현재의 남면과 안면도를 연결한 연육교 자리가 원래는 연결되어 있었으나 운하 건설을 위해 절단 하였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굴포운하 건설의 이야기다.

`굴포운하(掘浦運河)` 건설은 지금으로부터 약548년 전인 고려 인종 12년(1134년)부터 조선 세조 7년(1461년)까지 약327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다 중단된 국내 최초의 운하로서, 태안군 태안읍 인평.도내리(천수만)와 서산시 팔봉면 진장.어송리(가로림만)를 잇는 총연장 6.8㎞의 내륙 뱃길(폭 14m)로서 중간 2.8㎞가 미개통 상태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까지 호남지역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대규모 물자는 대부분 선박(조운선.漕運船)을 이용해 운송됐는데, 충남 태안의 안흥 앞바다는 풍랑이 거센 대표적인 험로여서 고려 인종 때부터 굴포운하 굴착공사가 진행돼 한 때 운하가 부분 개통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심이 얕고 운하 예정지에 암초가 많아 마지막 구간(2.8㎞)을 마무리를 하지 못한 채 공사가 중단됐다. 굴포운하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운하`(1869년 개통)와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1914년 개통)에 비해 400년가량 앞서고 있다.77)

‘대외 정세의 변화와 국내의 이러한 대역사는 사람들의 이주를 가능하도록 하였다.’78) 가마시 최초 거주자들 역시 역사변동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살피기 위하여, 먼저 氏族集團을 살펴보았다. 탐색한 결과 이 마을 최초 이주자는 崔氏79)라는 것과 비등한 시대에 權氏가 이주 해 와서 살았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최씨의 조상 11대조(최종필80) 기준)가 이 갈마리에 있고 8대조의 묘소가 가마시 에 있음을 인터뷰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최씨는 현재 조상의 묘만 가마시에 있고 너머 마을 갈마리의 돌무르 라는 곳에 한 집 살고 있었으며 권씨 역시 자손들이 모두 이농하고 권영수씨 한분만 마을에서 1Km거리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권씨81)의 조상(권영수 기준) 묘도 가마시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들 조상의 정확한 사회 이동 이유를 찾기란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더 필요하리라고 보여 진다. 단지 가설 적으로 고려 시대의 최씨 무신정권 의 퇴락 후와 조선의 안동 권씨 가손 등이 어떤 연유에 의해서 이곳으로 이주해왔을 것82)이란 추측을 갖게 한다.

이 마을에는 현재 강은환,83) 김정배84), 김형옥(일명 조선흥엑이85) 라고 함)김무진씨 박상운,씨 서동0씨 이대교씨 이연복씨 우백룡86)씨 임영재씨 유기창씨 홍승수씨 등이 살고 있다.

④【가마시】의 산업과 생활 : 가마시의 산업과 생활을 말하게 될 때, 우선 간척 사업 이전에는 굴 양식업과 어업활동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50년대 이후에는 홍기표씨를 제외한 아무도 어업을 하지 않았으나 부업으로 굴이나 조개, 또는 낙지를 잡아서 팔기도 하였으니 일종의 어업과 무관치는 않았던 것이다.

여러 어업 활동 중에서 굴 채취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굴은 石花굴로서 돌에 붙은 것을 채취하였다. 해안 돌 뿌리 등에서 돌을 캐다가 바다에 질서 있게 줄을 맞춰 넣어두면 그곳에 굴이 달라붙어 석화굴이 되는 것이다. 그밖에 갯벌에서는 낙지나, 바지락, 소라, 게, 새조개, 까막 조개, 맛 등도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고기나 낙지를 잡고87) 여자는 주로 굴과 조개를 채취 하였다.

서산 간척 사업이전 천수만 갯벌에는 굴, 바지락, 조개 등 다양한 어패류가 존재했다. 이곳 주민들 대 다수가 어업을 본업으로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나 주민의 경제 활동은 주로 어업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해변 마을을 중심으로 어업을 본업 혹은 부업으로 하는 경우까지를 따져 본다면 비율이 70%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업이 전업은 아니었다.

어업 활동은 계절별로 특정한 시기에 몰려 있고, 또한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하면 되는 특성을 갖고 잇기 때문에 토지가 있는 사람도 농업 외의 부업으로 어업을 병행 할 수 있었다. 농사철에는 썰물 때만 잠시 바다에 가기 때문에 농사를 지으면서 수산물을 채취 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주산업이 어업이라는 말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89)

B지구에서 漁船을 소유한 경우는 부석면 창리 일부와 태안의 남면 홍성의 광천이나 길상면 등 일부 사람과 송시리의 홍기표씨90)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 이들은 주로 3월부터 12월까지 먼 바다에 나가서 숭어, 망둥이, 꽃게, 장어, 농어 등을 잡았다.

굴을 채취하는 시기는 추석이 지나고 나서 10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였다. 그 후는 굴의 산란기여서 채취하지 않았다. 바지락은 봄부터 여름까지가 제철이었다. 여름에는 굴이 별로 없어서 낙지를 잡거나 그물을 이용해서 망둥어나 숭어, 농어 등 큰 물고기를 잡았다. 가을이 되면 굴, 숭어, 바지락, 낙지 등의 생산량이 훨씬 많아 졌다. 낙지는 정월 대보름과 봄 사이에도 잡긴 했지만, 주로 여름부터 가을까지 흔했다. 굴은 식구가 많거나 솜씨가 좋은 사람은 몇십kg 씩 채취하는 경우도 있었다.91)

이곳의 굴은 자라는 과정이 다른 지방의 굴과 전혀 다르다. 어릴 때는 돌과 바위에 붙어 석화로 자라다가 완전히 자란 뒤에는 돌과 바위에서 떨어져 갯벌에서 사는 토굴이 되는 것. 토굴이 되면 여자들은 조새(굴 채취용 기구)로 채취해 그 유명한 어리굴젓92)을 담그는데 그 맛이 다른 굴젓과 달리 맵고 알싸한 맛을 내는 등 특별한 맛을 가지고 있다.

농사는 농한기가 있지만 바다는 원하기만 하면 일년 내내 일을 할 수 있다. 또 농사일은 각종 연장이나 비료, 농약등 비용이 많이 들지만 바닷일은 간단한 도구만 있으면 소득을 쉽게 올릴 수 있었다. 호미, 조새, 장화, 종태기, 지게, 찍새, 장갑, 바가지 등이 굴을 캐는데 필요한 도구이다. 모두 오래 쓰는 물건들이고 값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특히 작살은 고기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서 살93)매는 사람들의 필수품이었다.

농업도 현재(1990년 이후)는 주로 벼농사 외에 생강, 마늘, 쪽파 등 특작 농사가 대부분 이지만 간척사업 이전의 농사일은 주로 벼농사와 부업으로 바다에서 나오는 수입이 있었다. 농사일은 금방 돈이 들어오지 않아서 즉각적 경제 유통은 바다에서 주로 벌어서 썼다. 주민들은 몸만 건강하다면 별다른 밑천이 없어도 바다에서 생계를 해결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농토가 없는 사람도 충분히 살 수 있었으며, 바다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일부의 사람들은 토지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농사일에 전념하였다. 그 이유는 바다 수입이 어디까지나 부수입으로서의 개념이지 주 수입의 개념이 아니었다.94) 간척 사업 이전의 어업이 본업이 아니라 부업이었음을 증명하는 현상은, 휴일 날이면 사람들이 부석면 월계리나 서산(邑內) 등 먼 곳 타지에서 망둥어 낚시나 설게(혹은 설귀 :가재 모양의 어류)를 잡기 위해서 갈마리 앞 바다로 줄을 서서 몰려 왔는데 막지도 않았다.

현재는 농사를 전업하는 서기원 씨(64세)의 경우는 예전에는 검은여를 중심으로 3000평정도의 규모로 굴 양식업을 하였는데, 농사일보다 바닷일이 월등하게 수입이 높아 농사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섬 끝에 살고 있던 서정갑씨95)도 방아기계96)를 가지고 있으면서 굴 양식업을 하였다.

농업의 비중이 비교적 낮고 토지나 자본이 없어도 노동력만 있으면 생계를 유지 할 수 있는 수산물 채취 때문에 이 지역의 계층 분화는 상대적으로 지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굴 양식업을 크게 하거나, 배를 소유하고 있던 일부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 집을 짓고 땅을 사는 등 계층 상승이동이 부분적으로 가능했다. 또 한편 토지가 상당히 많아서 바닷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은 부를 꾸준히 축적해서 예전부터 마을의 유지로 남아 있다. 바닷 일은 성별 분업이 잘 이루어져서 여성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은 낙지나 고기를 주로 잡고, 여자들은 굴, 바지락, 조개 등을 채취했다. 남자들은 운이 좋으면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 해산물을 잡을 수 있지만 항상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여자들의 어업 활동은 노동력이 많이 드는 대신에 일한 만큼 소득이 생기고 수확량아 일정해서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힘을 쓰는 일에 종사하는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의 경제적 비중이 더 컸다. 또한 여자들의 경제 활동은 자본이 거의 들지 않고 순수한 노동력만 이용하기 때문에 계층 분화를 약화시키는 기능도 했다.

다음으로는 간척 이후의 삶의 변화 모습을 살펴보자. 간척 사업이후에 생활에 많은 변화를 겪은 사람들은 주로 바다가 막히기 전에 주로 양식업이나 어업에 종사하였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정의 주 수입원이 사라졌기 때문에 서산 밖 외지로 나가서 살거나 서산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이러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생 모습을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다. 굴 양식업 및 보상에 관련한 인터뷰 내용이다.

▶ 인터뷰 A

*날짜 : 11월 16일 토요일
*서기원씨(인터뷰당시 64세) 부석면 갈마리 거주
*굴 양식업 하다가 간척사업 이후 농사로 전업 *041)662-4370

Q. 언제부터 굴 양식업을 하셨어요?

A. 아버지 때부터 굴 산업을 했지. 나는 군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서 자연스레 일을 배워 하게 된 게제.

Q. 굴 양식업은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요?

A.삼십정보 쯤 되제. 일정보가 3000평 정도되구.. 검은여(돌섬 이름) 중심으로 했제..

Q. 언제부터 농업으로 전환하신 거예요?

A. 79년쯤부터제 아마? 박 대통령 때부터 였을거여 아마.. 허가를 안 줘서 말이여.

Q. 허가를 안 주다니요?

A. 어업권을 받아서 굴 양식업하고 있던것인디.. 3년마다 갱신해야 혀. 그런데 어업권 허가를 안 주는거여. 계속 허가를 연기하고.. 그래서 보상도 하나 못 받았제. 생각해봐, 정부 입장에서도 저 많은 굴 양식업 하는 데를 다 보상해주려니 엄청났던 게지. 그리고 현대가 허가 취소시키려고 그랬다는건 다 알잖아. 그래서 허가 취소되고 농업으로 전환하게 된거여. 그 이후 농사지었고, 원래 있던 땅에 시작한 거지.. 어업시 돈을 많이 벌었지. 지금은 보다시피 집도 그때랑 그대로고.. 잠시 셋째아들 자식 키우고 있지. 연탄 집이고.. 두 식구만 사니까 괜찮아. 불편하지도 않고..

Q. 보상은 받으셨어요? 

A.아니.못받았어.각 부락마다 바지락 등등을 공동사업으로 해왔었는데,그거는 부락마다 보상이 되었는데,나처럼 개인적으로 하는 사람은 보상을 못 받았어.모르겠어.간월도에 가면 개인이 보상 받은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야. 

Q. 개인적으로 보상을 못 받으신 분이 또 계세요?

A.어.나까지 2명인데,서정갑이라고 하시는 분이여.그런데 나이가 80을 넘으셔서 말이지.. 

Q. 굴 양식업 하실 때는 농사 안 하신 거예요?

A. 그렇지. 어업만 했지. 농업은 그땐 하지도 않았지. 낙지낚시, 굴 낚시.. 굉장히 많잖아. Q. 그럼 농업으로 전환하시면서 피해가 많으세요?

A. 그려.. 농업으로 바뀌면서 보통 피해가 아니지. 돌을 놓으면 석화 굴이 막 붙어. 그게 어리굴젓이 되고... 그런 굴이야. 그땐 농사는 땅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Q. 지금도 형편이 어려우세요?

A. 지금은.. 나 먹을 건 농사지었지.. 양식할 땐 놀리던 땅.썩히고 있다가.논9마지기로 농사하고.자식들 쌀 주고 지금은 빚2000만원 있지.그 빚은.농기구 때문에 생긴거여.새끼 먹여 살리고.갚고 갚고.. 

Q. 농사하는 땅은 몇 평이나 되요? 

A. 논9마지기,밭2천 평 정도 돼. 

Q. 농사는 어떤 거 하세요? 

A.마늘 농사를 주로하지.예전엔 생강을 했었는데,갈마을에서는 연작장애도 있고,잘 죽어서 못혀. 

▶인터뷰 B
*날짜 : 11월 15일 금요일
* 우백용 씨 (인터뷰 당시 65세) 부석면 송시리 1구 가마시 거주
*인터뷰 장소 : 자택

Q. 서산 주산업은 뭐예요?

A. 생강, 마늘, 쪽파 등이지.

Q. 간척 사업 이후 보상을 받았다고 들었는데요, 얼마나 받았나요?

A. 바닷가 근처 사는 사람들은 다 받았고.. 보상액은 급마다 다르지. A급은 300만원 정도, B급은 150~200만원 정도, C급은 80만원 정도야. 그런데 C급은 받지 못해서 데모를 했어.

Q. 바다가 막혔는데, 서운하지는 않으세요?

A. 경제적으로 수입 준 게 아쉽더라도 현대는 좋지.

Q. 현대 때문에 잃은 게 많아도 좋으세요?

A. 지방 사업을 많이 해주거든. 학교 관공서 등등 지원이 많지. 95년 간척 사업 끝나고도 공공사업 많이 도와줘서 지역주민과 유대관계가 높지. 그래서 싫어하지 않아. 바다 있을 때 둑 터지고, 해일 걱정하고 그러던 것 이제 안 해도 되니까... 큰바람 불면 과거엔 무척 불안했으니까. 지금은 간척사업이후 안심이야.97) 1963년 해일, 이때 부자 된 사람 많아.


▶인터뷰 C

최동춘 1959년도 출생 (4남 1녀 중 셋째 - 다른 형제들은 서울에서)

1980년도 (간척지 완공)

군대(파주) 제대 - 박선구 씨와 함께 입대, 제대 이후에 서울에서 6개월 간 생활

1981년(23살)결혼,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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