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교수님께서 에릭 프롬, 칼 포퍼, 파울로 프레이리 세 인물 중에 하나를 골라 조사하라는 과제를 내셨을 때 사실 무척이나 난감했다. 세 인물에 대해 너무나 낯설었고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내용에 대해 이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말 고사 대용이라 레포트는 해야 했고 나는 잠시 생각 후 과감히 파울로 프레이리를 선택했다. 얼마 전 교수님께서 직접 출석을 부르셨을 때 내 이름을 명하시고는 "엄아은이는 중간고사 치기 전까지는 수업에 열중하더니 그 후로는 아니네.."이렇게 말씀하셨었다. 그렇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솔직히 시험에도 반영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 흥미를 잃어갔다. 사상들이 너무 난해한 탓도 있었다. 첨엔 노력했지만 교수님의 말씀이 쉽지 않아 그만 수업에 맛을 잃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딱 한 인물에 대해서만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인물이 바로 파울로 프레이리다. 왜 그 인물에 대해서만 집중을 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에 대해 교수님께서 은행 저금식 교육과 문제 제기식 교육에 대해 열심히 논하셨던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있고 인상깊었다. 그래서 난 주저없이 이 과제의 대상을 파울로 프레이리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비로소 교수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좀더 나이가 들고 교육학에 관심이 많아지면 교수님의 수업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청취하고 싶다는 생각도 더불어 말씀드리고 싶다.프레이리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무척이나 끙끙거렸다. 처음에는 도서관에 가서 그가 쓴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교사론과 실천교육학 이란 책을 두 권 빌렸다. 그런데 역시나 사상은 어려운 것이란 걸 확인했다. 말들도 너무 딱딱했고 재미가 없어서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한달 뒤 , 실천교육학은 도저히 힘들어서 교사론을 차분히 읽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남들이 듣기에는 무슨 책 한 권 읽는데 마음까지 다잡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보름 정도에 걸쳐서 다 읽은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헤매었다. 발전의 기회를 삼는 것도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프레이리' 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된 이번 기회는 내 인생에 있어서 훌륭한 교사로 거듭나기 위한 또 한번의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조사해 보지 못한 칼 포퍼나 에릭 프롬에 대해서도 애정을 쏟을 생각이다.책을 읽는 동안은 교수님을 많이 원망했지만, 이제는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드린다.◆파울로 프레이리는 어떤 사람인가?파울로 프레이리는 1920년 브라질 레시페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인간해방으로 보고 이를 실천한 20세기의 대표적 교육 사상가이다.그는 저개발국가인 브라질에서 성장하면서 굶주림과 투쟁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문맹 퇴치 교육을 통해 전 세계의 피억압 민중 스스로가 사회적·정치적 자각을 얻을 수 있도록 힘썼다. 프레이리는 종래의 교육을 은행에 비유해, 교사는 '그릇된 정보'를 적립하고 학생은 그런 교육체제에서 그저 정보를 주워담는 수동적 위치에 머물러 잇을 따름이라고 보았다. 그는 대안으로 교사와 학생간에 대화를 유발하는 '해방의 교육'을 주장했으며, 학생들이 질문을 던지고 기존의 상황에 도전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1950년대에는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용어와 생각을 이용해 교육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나름의 방법을 개발하였다. 당시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부분 30시간의 교육만 받고서도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1963년에는 브라질 국립문맹퇴치 프로그램의 책임자를 지냈다. 그러나 1964년 군사 코데타가 발생하면서 체제전복 혐의로 투옥되었고, 석방된 뒤에는 망명객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문맹퇴치 프로그램의 입안을 돕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2979년 그는 브라질로 돌아와서 좌익 노동자당에 참여했다. 1988년 상파울루 시 교육비서관을 지냈지만 몇 해 뒤 사임하고 교육분야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페다고지, 교육의 의식화, 프레이리의 교사론 등 20여 편의 책을 썼다.◆프레이리의성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인정하여 그들이 모두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편, 그의 인간관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개개인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만 계급적 격차의 심화로 그 상상력이 꺾이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치는 민중 계급이 많다고 보았다. 따라서 교사는 진보적인 교육 실천으로 분명한 규율을 갖추고서 상상력에 창조적인 날개를 달아주어야 하고 호기심과 독창성을 촉진시켜서 모험심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꿈을 위해 헌신하는 상상력은 개개인의 자유를 위해 대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상상력은 현실 상태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자유를 무시당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개인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주체자요, 사회 역사적 존재이다. 현존재의 자신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알고 자신을 더욱 이해한다면 역사에 의해 만들어짐을 알 수 있고, 역사를 만들 수도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과학적 책임성과 교육적 의무, 윤리를 고려하여 역사 속의 운동과정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프레이리의 교육목적과 교육사상프레이리는 인간 중심의 교육을 위주로 그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우리가 앎을 추구하는 h가정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리 스스로가 창출해낸 지식을 위조로 앎이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라는 등식을 성립해낸다. 또한 그는 자유라는 명백한 개념을 추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는 권위 자체를 배제해버린 자유가 아니라 필수적인 규육에 따라서 권위를 인정하는 자유이다. 즉 자유의 역동성을 저지하지 않고 규율에 맞는 권위를 내면화한 권위를 갖춘 자유인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행하는 순수 저항적 운동은 자가와 권위간의 한계 속에서 역동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주주의의 추구이다. 프레이리의 모국인 브라질은 건국 이래부터 아직도 착취라는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민중들은 착취당하고 있음을 깨닫고만 있다기식 교육자는 학생들의 사고 속에서 본인의 사고를 부단히 변형시켜 나간다. 그리고 학생의 환경과 무관한 혹은 그 관계성을 은폐하여, 학생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교육내용이 아닌, 학생의 사회적 삶과 일상의 경험과 관련성을 갖는 교육내용을 교육자와 학습자의 공동 연구를 통해서 추출해낸 교육내용을 기본적 교육 매개체로 삼는다. 학생은 문제제기식 교육을 통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관계성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인식해 나간다. 이러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대상 세계와의 교육적 관계의 핵심을 프레이리는 '대화'라 명명하는 것이다.프레이리의 사상은 한마디로 "교육은 의식화다"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이 더불어 현실 문제를 공동으로 대처하는 교육 즉, '교사-학생','학생-교사' 모두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지식을 새로이 창조하는 것이다. 즉 지식을 받아들이는 그릇으로써의 인간이 아닌, 인식화의 주체로써의 교육이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 문화, 정치적 현실을 인식하고, 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그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각을 성취하는 과정, 활동, 결과가 바로 의식화이다. 이러한 의식화를 통해 참다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프레이리의 교사론」을 읽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곳 수학교육과에 들어온 지 벌써 일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새내기의 생활을 만끽한다는 핑계아래 술먹고 놀기에만 바빴고 내 꿈을 위해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또한 부끄럽지만 교사가 되고 싶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사범대에 들어왔다기 보다는 교사라는 직업의 편의성, 여유, 안정성, 사회적 인지도 때문에 교사라는 직업을 택한 쪽이었다. 그러기에 나에게 바람직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의지, 교육자로서의 자질은 거의 없었으며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그러한 가운데 과제 때문이기는 했지만 프레이리의 교사론을 읽은 것이 나에게 새로운 변환의 기점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는 '내학적이라는 말을 듣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온몸으로 공부하고, 배우고, 가르쳐야하며 알게 된다는 것을 단순히 허튼 소리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이 책은 시작된다. "교육자로 산다는 것"이란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제 1부에서는 첫 번째 편지 "세계 읽기와 글읽기", 두 번째 편지" 난관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비되지 말라", 세 번째 편지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네 번째 편지 "진보적인 교사의 자질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네 개의 편지로 구성되어 가르침과 배움은 무엇이며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은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현장에서 가르치고 배우며"이란 제목이 붙은 제 2부에서는 "초임 교사들에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학습자들과 함께 대화하기", "문화적 정체성과 교육"이라는 제목의 네 개의 편지로 구성되어 교사가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학생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리고 제 3부에서는 "교육현장에서 철학하기"라는 제목으로 "구체적 맥락과 이론적 맥락", "다시 한번 규율 문제에 대하여" 라는 두 개의 편지를 통해 교육자의 철학과 이를 현실화하는 방안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이 프레이리의 짧은 편지 속에는 가르치면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속에서 그는 무엇보다 비판적인 자기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교사가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학생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교사는 가르치기만 하고 학생들은 배우기만 하는 식의 교욱에 대한 비판을 하며 이런 교육이야말로 모순된 현실에 체념하고 순종하며 마침내 억압을 자초하는 것이라며 이런 교육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길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입시 위주의 교육과 부모의 과잉 교육열 때문에 지식주입의 교육을 받고 있다. 거기에 교사도 동참하고 잇으며 교사는 한낱 지식전달 기계로 전락해 버렸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고...중학교 1학년때,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이책, 저책을 찝적이며 관심을 보였던 탓에 이 책 또한 시도를 했었다. 아직 「데미안」이란 소설을 이해하지 못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유명하고 내가 별났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역시나 당시에는 무리였던지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한번 「데미안」의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때보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시야의 폭이 넓어지고 사고력 또한 발달했던지,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내려 갈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와 사랑」, 「싯다르타」등 여러 작품에 심취하여 보았으나 그 내용을 다 이해하기란 무척 힘들었다. 「수레바퀴 밑에서」또한 그 시절에 읽어보고 그 줄거리만 훑어보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리고 이번 작문시간의 조별 독후감 과제를 기회로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교육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요즘, 노는 시간에 쫓겨 중·고등학생 시절보다 책을 더 읽지 못하고 책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없었는데 이를 계기로 내 생활을 좀더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반성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수레바퀴 밑에서」는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란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미성숙하고 아직 어린 주인공이 일련의 경험과 시련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을 의미한다. 이 글은 한스라는 소년이 고통과 갈등을 겪으면서 내면에 이르는 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한스만큼은 아니지만 입시 과열에 시달려 왔고 어린 시절 어머님의 자식 욕심으로 인해 이것저것 많이도 했었다. 부모님으로서는 자식이 좀더 좋은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갖추도록 좀 더 자유로운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많이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뭐든지 적당히 해야지 즉 양쪽을 잘 병행하여 해야지 어느 한쪽을 극단적으로 적용시킨다면 내 아이에게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레바퀴 밑에서의 주인공 한스는 전자의 경험을 위주로 어린시절을 보내 결국은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는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이 책의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1900년경, 남부 독일의 슈발츠바르트의 작은 동네에 사는 어린 소년 한스 기벤라트는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공부에만 쫓기고 있었다. 까닭인즉, 이 머리가 좋은 소년을 엘리트 코스로 걷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동네 목사며 학교 선생님들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첫 번째의 관문인 슈투트가르트에서 행한 주 시험에 그는 멋지게 합격한다. 드디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진학하는 길이 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준비교육을 위하여 소년은 즐기는 수영이라든지 낚시질을 할 시간도 모조리 빼앗기고 공부에만 열중하게 되는데, 소년은 차츰 여위어 살이 빠지고 게다가 때때로 두통까지 일어나게 된다. 마울브론의 신학교는 기숙제도로서, 우리들의 주인공 한스는 헤라스라고 불리우는 방에서 9명의 학우들과 기거를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 기묘한 인연으로, 수석을 노리는 모범생 한스와 시인 기질이 있는 열혈소년으로서 권위를 싫어하는 헤르만 하이루나는 친밀한 우정으로 맺어지게 된다. 그러나 하이루나가 학교로부터 탈주를 기도하다가 퇴학 처분을 받게 되자 한스는 고립된다. 그리고 학업 성적이 차츰 떨어지고 그 위에 신경 쇠약 증세까지 겹쳐서 고향으로 가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중도 퇴학을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과실주를 담그는 일을 하면서, 엠마라는 여성과 덧없는 사랑을 맺지만 결국은 그녀에게 놀림을 당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권고로 어린 시절의 학교 친구인 아우그스트가 근무하고 있는 기계 공장에 고용되어 일 만다.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몇 명의 고정된 인물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략의 인물에 대해 소개해보면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 그의 아버지, 친구 헤르만 하일러, 신학교의 교장선생님, 그곳의 젊은 선생 비트리히 등이다. 먼저 한스 기벤라트는 한마디로 무기력한 인간으로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전혀 적극적이지 못하고 방관자로서, 아웃사이더의 자리에서 주변의 환경의 모순을 인식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멸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아버지는 기벤라트가 신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바닥을 경험하면서도 괴로워하는 원인이 되는 인물이다. 정신적 지주라기 보다는 정신적 부담의 원인이 된다. 친구 헤르만 하일러는 한스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숨막히는 교육체제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천재적인 시인의 기질이 다분하며 깨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쳇바퀴의 틀 속 신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하여 한스로 하여금 더욱 암흑에 빠지게 한다. 또, 한스가 다녔던 신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권위적이고 자신과 학교의 명예에만 주력하는 전형적인 교사의 인물이다. 학생을 진정으로 위하고 아끼는 선생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만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그것만을 강요하는 선생이다. 반면, 한스가 자괴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를 자극시켜 도와주고 싶어하고 안쓰럽게 지켜보는 교장선생과는 정 반대의 자상한 젊은 선생 비트리히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엠마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한스로 하여금 사랑과 배신을 다 맛보게 하는 인물이다.이 책을 읽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인공 한스라는 인물을 두 가지 측면에서 느껴보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환경과 체제,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고찰하고 생각하여 앞으로의 교육의 방향에서 학생과 교사 그리고 사회가 해야 할 일을 내 나름대로 제시할 수 있었다.한스는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낚시하고 뛰어 놀 나이에 그러지도 못하고 아버들이 주변의 어른들과 환경들로 인해 억압당하여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고, 자신이 정작 하고 싶은 것, 흥미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스는 아이에서 성인으로의 과도기적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체가 아닌 타인이 시키는 대로, 즉 아버지의 이상을 쫓아서 달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나 또한 중·고교 시절 앞만 보며 달려왔지만 나를 돌아볼 시간과 내 정체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주체성을 가진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무척이나 답답하고 숨막히게 느껴졌었는데, 한스는 그러한 시간조차 없었으니 오죽했겠나 싶었다. 더 불행한 것은 한스는 그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나는 이러한 면에서 동정과 연민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기력에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청소년기의 미성숙한 사고력이나 판단력으로 자신의 삶을 극단적으로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주위의 어른들과 친구들로부터 조언을 충분히 들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스의 경우는 조언의 차원이 아니라 아버지가 정해준 길로 가기만 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나가고 시행착오가 있더라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가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러한 태도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그가 고통과 갈등을 극복해 내지 못하고 자멸하는 부분에서 , 그러한 결과는 그의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태도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한스가 자신에 대해서는 모른 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여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결국은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 이러한 원인에는 그곳의 억압된 교육체제가 큰 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곳은 신학교 학생들 전부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기숙 학교이다. 그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문에 몰두하도록 강요받으며, 생활 속의 실용성이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과목은 배울 수가 없다. 주조된 틀처럼 정해진 하루 일과 시간표대로, 오로지 좀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공부만 하도록 짜여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학생들이 기계처럼 그곳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 그렇게 하도록 몰아 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학업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생들을 이토록 억압하고 통제하는 교육체계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만연하고 있다. 최근에서야 한 학급당 35명의 제한인원이 정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 교실에서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붙어 앉아서 밤 10시까지 공부를 하였다. 보충수업과 정규수업을 합쳐 하루에 열 시간이 넘는 수업을 들으며 오로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이렇듯 생활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무시된, 정해진 교과 과목을 필수로 공부해야 하며 자율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계적인 생활을 해나가게 된다. 한창 꿈을 쫓아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즐거움을 만끽할 나이에 우리의 아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강요와 억압, 통제 속에 시들어가고 있다.이러한 환경과 체제는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먼저 학벌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져야 하며 그에 맞춰 교육 방침과 목표, 체제 등이 달라져야 한다. 아이들의 인성이 먼저 바로 정립되어야 그 위에 능력이 쌓여 올바른 사회인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업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인성위주의 교육, 억압된 분위기의 학교가 아니라 자율성이 보장된 정감있는 분위기의 학교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자세도 달라져야 하겠다. 교사는 학생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고 도와줄 수 있는 조언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학생 또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자신을 좀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많이 갖고 노력해 나가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학부모는 학생과 교사가 제 역할을 해 나갈.
대안교육이 누군데??몇 년 전 신문에서 대안학교에 대해 잠깐 소개해 놓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학교 부적응자들을 따로 모아서 그들을 위해 일반 고등학교와는 조금 색다른 교육 방법으로 그들을 가르치며 운영해 가는 학교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성지 고등학교가 아니었나 싶다.) 답답한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정해진 규율을 지키며 짜여진 틀에 맞춰 생활하는 우리와는 달리, 그들만의 자유를 가지고 입시위주의 공부가 아닌 일상생활 체험 위주의 교육을 받는 그들을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또, 거창 고등학교 이야기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곳 또한 지식 습득 위주가 아닌 체험과 경험을 위주로 하는 산 경험 교육의 현장이었다. 난 그 책을 보면서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고 막연한 환상과 가슴 뜀으로 인해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이런 학교들은 분명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학교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곳들을 대안학교라고 부른다. 대안학교 안에서는 말 그대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의 대안인 다른 교육의 형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안교육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 채 막연히 그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현재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막연히 그것을 지향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좀더 효과적인 교육, 깊이 있는 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안교육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등장하여 전개되어 왔는지 또한 그것이 추구하는 이념은 무엇이고 앞으로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떠한 지를 잘 알고, 후세의 우리 아이들이 올바른 교육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일단, 대안교육의 의미와 그 종류가 어떠한지 알아보자.대안교육은 영어의 'alternative educatio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미국에서 기존학교에 비해 학생들의 요구에 좀 더 부응하는 여러 실험학교들이 등장하여 이를 자유학교 , 대안학교 라 부르다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대안교육 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안교육은 기존의 학교교육이 지닌 한계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벗어나려는 다양한 실천을 모색하는 가정을 지니므로 쿠퍼는 이를 바탕으로 그 의미를 표준적인 공립학교들 이 제공하는 전통적인 것 과는 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아동과 학부모를 위하여 특별한 교수법과 프로그램, 활동, 여건 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고안된 학교교육 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전통적인 것과 다른 경험 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다양한 해석이 열려 있다. 내용만 바꾼 것일 수도 있고 형식의 변화일 수도 있고 아님 둘 다 일 수도 있다. 이는 대안교육의 다양한 해석과 애매함을 잘 보여주는 면이다. 이렇듯 대안교육은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이 지향하는 의미를 통해 대안교육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겠다.대안교육이 지향하는 이념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첫째로, 학습자 중심이다. 학습자를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존재, 교사나 부모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을 지닌 개체로 본다. 따라서 학습자는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주적인 모습은 민주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둘째로, 대안교육은 매우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향한다. 즉, 아동 개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가치를 중시한다. 이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갈등을 일으킬 때 양보와 타협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셋째로, 아동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학습 내용과 방법의 변화를 수반한다. 아동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아동에게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기면 이것이야말로 아동에게 살아있는 체험이 될 것이요, 진정한 교육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 아동을 바라본다면 좀더 체험적이고 살아있는 교육의 내용으로 좀더 개방적이고 아동 위주의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넷째로, 생명존중 사상 또는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즉, 생명에 대한 가치를 존중하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적인 관계를 강조한다.다섯째, 대안교육은 노동을 중시한다. 일과 놀이와 공부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많은 대안 학교들에서 일상 생활에 필요한 많은 물건들을 자체 노동에 의해 조달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만드는 과정은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서 놀이이기도 하고 사회적 협동을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여섯째로, 작은 학교를 지향한다. 이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간의 친밀한 인간관계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소규모의 학교는 작은 집단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이념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게 해주고 개개인의 인격 가치가 충분히 존중될 수 있다.마지막으로,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학교가 지역사회의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이며 지역사회는 학습의 무한정한 자원인 것이다.이러한 특징을 가진 대안교육은 현재 몇 개의 대안교육에서 실현되고 있는데 그 종류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제도교육과의 관련 정도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제도교육의 틀 속의 학교, 제도교육의 틀 곁의 학교, 제도교육 틀 밖의 학교가 그것이다. 제도교육 틀 속의 학교는 교육과정 운영이나 학교 운영에 있어서 국가의 감독과 통제를 받는 공사립학교, 거창 고등학교, 참교육 운동, 열린 교육 등이다. 제도교육 틀 곁의 학교는 정규학교는 아니지만 각종학교인 학력인정 고등학교와 같은 형태인데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와 영산 성지고등학교가 이에 속한다. 또, 제도교육 틀 밖의 학교는 제도교육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형태의 대안교육으로, 민들레학교, 숲속 마을 작은 학교, 예수 가정, 공부방 등이 있다. 다음으로 또 운영 형태에 따라 정규학교형, 계절학교형, 방과후 프로그램형, 유아교육프로그램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정규학교형은 일반학교와 같은 형태로 운영되는 형태로 거창 고등학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영산 성지학교가 있고, 계절학교형은 여름 혹은 겨울방학 동안을 이용하여 교육이 이루어지는 형태로 대구의 민들레 학교, 경남 산청의 숲속 마을 작은 학교, 서울 따로 또 같이 만드는 학교, 부산 창조학교 등이 있다. 그리고 방과후 프로그램형은 학생들이 학교 활동이 끝난 다음 동네에서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대표적인 것은 서울 지역공부방연합회, 여럿이 함께 만드는 학교 등이 있고 유아교육프로그램형은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기준이 여러 가지 있지만 이만 생략하기로 한다.그런데 과연 이러한 대안학교들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지 그리고 대안 교육이 어떻게 해서 등장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의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개항 이후 전통적인 학교 제도대신에 서구식 공교육체제를 받아들여 유지해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교육에 서구와의 많은 공통점이 존재했지만, 한국 교육만의 특수한 문제도 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한 타율적인 제도 수용과 남북 분단에 따른 이데올로기 통제 필요성, 그리고 이를 악용한 권위주의적 정치집단의 장기적인 권력남용 등으로 인해 한국만의 교육문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많은 문제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획일화와 경직성이다. 학교는 입시를 위한 교육, 주입식 위주의 교육을 해왔고, 갇혀진 틀 속에서 가둬놓고 억누르기만 하는 일상을 반복하게 함으로써,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강조해 왔다. 그로 인해 학생들은 똑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경직된 모습으로 오로지 입시를 위한 길을 걸어 왔다. 이들은 자신의 주체성이나 인성, 적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앞만 보고 달려가기 바쁘게 되는 상황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또한 교사들의 획일화된 수업방식 또한 학생들을 더욱 궁지로 모는 데 한몫 했다. 또한 교육재정 부족으로 인해 빈약한 시설 속에서 교실이 터져 나갈 것 같은 답답함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리 만무하지만 그런 것들은 무시한 채 무조건적으로 공부만을 강요하여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한국 교육에 발동이 걸렸다. 기존의 학교 교육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무리가 서서히 고개를 든 것이다. 특히, 90년대에 들어 세계화와 정보화가 강조되면서 개성과 창의성을 기르지 못하는 기존의 학교 교육이 당장 폐지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었다. 6,70년대의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학교 교육이지만, 이제는 그 수명을 다했으며 새로운 교육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이를 공감하여 90년대 중반 이후 대대적인 교육 개혁을 추진하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더욱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교육, 대안적인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안교육의 시발은 86년 캠프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점수 경쟁과 타율적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 기존의 교육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적 성격의 캠프였다. 이는 주위로부터 호평을 받아 캠프 또는 체험 중심 프로그램을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성지고등학교 , 간디 고등학교 등 6개의 대안학교가 정규고등학교로서 개교되었고 지금껏 지속되어 오고 있다.
동성애에 관하여...(동성애에 관한 영화 로드무비 를 보고...)동성연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다.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긍정적이지도 않다. 솔직히 말하면 동성애간의 사랑이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며 돌아보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성간의 사랑이 보편화되고 당연시되다 보니 동성애는 비정상적으로 몰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인류가 처음부터 동성애 적인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면 지금 현실에서는 아마도 이성간의 사랑이 비정상적으로 몰려질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에 대한 옳고 그름의 논란은 타당하지 않은 듯 하다. 개인적으로 이 수업을 계기로 동성애에 관한 관심을 조금이나마 갖게 되어서 기쁘다. 교수님 말씀대로 인터넷에서 동성애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고 싸이트를 방문하면서 그 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나라가 네델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캐나다가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았고, 얼마 전 캐나다가 법적으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함으로써 미국이나 근방의 나라에 있는 동성애자들이 이민을 서두른다는 보도도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한 고등학교가 얼마 전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뒤로하고 설립되었다고 한다. 또한 게이 축제나 게이 미인 선발 대회 등 놀랄만한 행사도 많이 벌어진다고 한다. 한편, 사이버 공간에서도 동성애자들의 활동은 활발하고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그토록 많은 싸이트가 있는지 몰랐는데 그들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동성애란 어떤 것이며 이것은 결코 비정상적이지 않음을 밝히고 설득하고 있다. 그리고 정기적인 모임이나 정팅을 통하여 그들만의 연대감을 돈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많은 사실들을 접하고, 나는 처음에는 기존의 나의 입장이나 주관이 약간의 혼란을 겪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이냐를 가늠하는 문제는 둘째고 일단 전과는 달리 그들을 보통 사람과는 같이 볼 수가 없었다. 그들에 대한 느낌이 뭔가 형용할 수 없게 변해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흔한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의 일종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좀더 색다른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동성애도 이성간의 사랑과 다름없는 순수한 사랑이다 를 느끼고 그들을 똑바로 보기 위해 나는 정찬, 황정민 주연인 영화 로드무비 를 보기로 했다. 그것을 통해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동성애에 관한 성정체성이 새롭게 정립되는 것을 느꼈다.로드 무비 를 보고...흔히들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시대의 사고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이에 비추어 보자면 이제껏 세상은 이성애자들의 것이었다. 영화의 중심에는 항상 이성애자들이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서양에서 영화가 동성애자들을 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별로 오래된 일이 아니다. 특히나 가족 중심적인 가부장제가 모든 사회의 가치관을 관통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는 일종의 '죄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동성애가, 그리고 동성애자가 영화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고 한국 영화에서 동성애라고 하는 것은 음란비디오물에나 등장하거나 비주류 영화에서만 다루어져 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로드 무비는 이러한 통념을 깨고 과감하게 동성애를 다룬 첫 번째 영화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를 했었다. 동성애를 순수한 사랑으로 그린 영화라기에 무척 기대를 했었다. 그리고 기대에 못지 않은 좋은 느낌을 받았다.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한 때는 유능한 펀드 매니저였으나 일 순간에 노숙자가 된 석원, 산 사나이였지만 현재는 지하철 안에서 밤을 지새우는 대식이 영화 ≪로드무비≫의 주연 배우 이다. 이들 두 인물이 노숙자 생활 에 지쳐 무작정 길을 떠나고 여행을 하는 동안 일주, 민석, 대식의 처 등의 인물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인물들간의 관계 안에서 여러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이렇게 길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로드 무비의 장르로 영화는 진행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을 장르의 이름으로 하여 이러한 전개를 더욱 인상적이게 하고 있다.그러나 더 인상적인 것은 석원과 대식의 사랑이야기였다. 다른 영화의 서로 사랑하는 이성애들 못지 않게 대식은 석원을 아껴주고 챙겨주고..항상 같이 있고 싶어했다. 대식은 석원을 성관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나는 사랑이란 이성간, 동성간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느꼈다. 단지 동성애가 비정상적으로 취급받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일 뿐이란 생각도 들었다. 동성애는 사랑의 종류에 불과한 것일 뿐인 것이다. 비록 영화에서의 동성애는 상호적이 아닌 일방적인 것이지만 동성에게 주는 사랑 또한 이성의 경우와 다를바 없었다. 마지막에 주인공 석원이 옷을 다 벗고 비오는 길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던 장면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동성애를 야유하고 비꼬고, 그런 동성애자인 대식까지 혐오하는 석원이 결국에는 대식의 참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의 힘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영화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나온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다투는 기존의 내용이 아니라 한남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한 여자가 그 한 남자를 사랑하는 아이러니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소재가 무척 인상적이고 신선했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방식,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방식을 비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이성을 사랑하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 해서 동성을 사랑하는 행위도 그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인식을 나에게 심어주었다.영화 로드무비는 동성애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룬 위험한 도박을 했다. 나처럼 좋은 인상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더욱 동성애를 혐오하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동성애를 정상으로 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이것을 가늠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이고 권리이듯이 그들에게 또한 그러하다. 그들에게 이성을 택하느냐 동성을 택하느냐 하는 문제 또한 그들의 자유이자 권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행동을 저지시키거나 참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긍정적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기 때문에 신경도 안썼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는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가 되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동성애도 사랑의 일종이고 단지 사랑하는 대상이 남자일 뿐이므로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도 귀한 것이므로 그들을 변태로 몰아 갈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혼전 순결은 꼭 지킬 필요가 없다..얼마전 한 인터넷 신문에서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혼전순결에 대한 생각을 조사한 설문 조사의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예전에 비해 사랑하는 사이라면 꼭 지킬 필요가 없다 는 입장이 훨씬 많아져 우리 사회의 성 인식에 대한 변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동거나 성 매매 등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변화된 사회에서 더 이상 성은 금기시할 대상에서 벗어났고 비일비재 공론화 되고 있다. 혼전순결의 경우도 그러하다. 최근 들어 예전과는 달리 혼전 순결을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커지고 있다. 이렇듯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지켜야만 한다고, 순결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왜 논쟁거리가 되었는지 그 사회적 배경부터 알아보고 그것을 전제로 무조건적인 강요가 왜 되어서는 안되는지, 또 올바른 방향은 어떠한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혼전 순결이란 결혼 전에 깨끗함을 유지한다는 말이다. 즉, 결혼 전에 다른 사람과의 육체적 관계를 가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것은 전통사회에서는 당연히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특히 여성에게는 순결은 목숨보다 귀중하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이르러, 많은 부분의 문화가 개방되면서 성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외국문물이 많이 들어오면서 폐쇄적이기만 했던 성 인식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성의 공론화가 시도되었던 것이다. 특히 정보화 시대가 도래한 지금, 많은 대중매체에 의해 성문화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혼전순결에 대한 인식도 혼돈을 겪게 되었다. 성 개방화의 흐름에 따라 과거 절대시 되던 혼전순결에 맞서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점차 거세지고 결국은 중고생과 대학생의 절반 이상이 그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각 입장의 의견을 살펴보고 성 개방화의 흐름을 탄 비옹호론자들이 왜 그러한 생각을 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하여 그 입장이 올바른 우리 사회를 조성할 수 있을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먼저, 혼전 순결을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성교가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애정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성교는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지, 사랑의 최종 결정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게 되면 좋아하는 마음이 발전되어 스킨쉽이 하고 싶어지고 더 나아가서 사랑의 행위가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고 사랑이 깊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것이겠는데 이로 인해 서로의 애정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고, 더욱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성교의 시기의 논란이 되는 결혼이란 행사는 형식에 불과하다. 물론 형식 없는 내용이 없겠지만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할 수는 없다. 육체적인 순결은 형식에 불과하다. 정신적인 순결은 논하지 않으면서 어찌 육체적인 순결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려 하는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결혼할 상대자에게 정신적인 순결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첫사랑이기를 원하는 바와 다름없다. 이것은 지나친 이기심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보고 육체적 사랑인 성교 또한 정신적 사랑과 똑같이 생각하고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스무살 이상의 성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갖는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고 자유인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충고나 조언은 받아들일지언정 정작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자유와 판단에 의한 행위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세월 동안 혼전 순결은 지나치게 여성에게만 강요되어 왔다. 남성은 결혼전의 성교가 용납되고 여성은 순결을 꼭 지켜야 하는 사고는 엄연히 성 차별적인 것이다. 따라서 남성에게 용납되는 것처럼 여성도 사랑하면 꼭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반대로,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의 견해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첫째로 도덕적인 문제를 언급한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속에서만 성교는 허용되어야 하고 그 외의 모든 경우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도덕적이란 표현이 얼마나 애매 모호한지 알아야 할 것이다. 도덕적이란 기준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지 자신에게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성 문란에 대해 언급한다. 혼전에 성교를 허용하면 사람들이 성에 대해 쉽게 생각할 것이고 그러하면 성이 문란한 결과를 낳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책임이란 단어를 몰랐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혼전 성교를 허용한다고 해서 쾌락을 위한 무분별한 성교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랑이 따르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전제 하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성이 쉽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한 성 문란도 우려하는 만큼의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이다. 또 셋째로, 혼전 관계에서는 그 이후의 일에 대한 대처가 어려우며, 고통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후의 일이라 함은 보통 임신을 말하는데 물론 여성에게 미혼모가 되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것 또한 책임 의식을 무시한 말임이 틀림없다. 사랑하는 남녀가 혼전에 성교를 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확신과 책임이 당연히 내포되어 있어야 하겠다. 따라서 이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성교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최근 들어 피임법의 발달로 임신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나와 있다. 이것들은 아주 적은 실패율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성이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위험을 덜어주며 문란한 성생활을 자제 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따라서 , 혼전 순결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꼭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혹여 혼전 순결의 옹호론자들의 말처럼 성을 쉬이 여기고 가벼이 여기어 문란하게 할 수 있고 많은 고통을 낳게 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준비 과정과 대처 방법이 필요하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의식을 개혁하는 일이다. 우리는 성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들 아는 포르노나 야한 잡지에서의 성이 아니라 성스럽고 귀중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성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자세를 기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성교육도 무척 중요하다. 성 의식은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청소년기를 거쳐 자리잡기 때문에 단계별 교육이 무척 중요하다. 성교육은 남녀의 성적 특성과 역할에 대해 이해하고 나아가 올바른 성 의식, 건전한 성 태도, 분별 있는 성 윤리를 다져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연령에 맞는 체계적, 지속적 교육과정을 마련하여 학교와 가정에서 성교육을 실시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올바른 성 윤리관을 형성하도록 돕는 데만 그쳐야지 이것이 일방적인 주입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더 나아가 성교육은 개인을 위한 교육의 차원을 넘어서 이 사회 전체를 건전하게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중매체의 도움도 필요하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광고나 프로그램을 방영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자극적인 행위를 유도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성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여 학생과 혼전의 남녀들에게 올바른 인식을 갖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