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먼저 접하게 된 것은 영화가 아닌 책이었다. 책 읽기를 즐겨하는 내가 ‘현대적 고전’이라 평가받고 있는 이 책을 접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책은 ‘현대의 지성’이라고 평가되며 전세계들의 독서가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되고 있는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이다.때문에 이번에 이 작품을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에는 책을 읽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용이했고 같은 내용을 다른 두 매체로 표현한 점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작품 속의 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내가 나름대로 느꼈던 부분을, 다른 이(여기서는 장 자크 아노 감독)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로웠던 시간이었다.하지만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라온 사람이라고 하여도 같이 공감하는 부분은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작품의 실제적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가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책을 보면서 느낀 윌리엄 수도사를 거의 비슷하고 흡사한 모습으로 감독은 표현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윌리엄 수도사는 흔히 서구인들에게는 ‘유년기’에 해당하는 시기인 중세 시대에 존재했던 현대적인 인물상이었다. 영화 ‘장미의 이름’의 감독 장 자크 아노 역시 내가 느끼기에는 시대를 앞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여기서는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를 중심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선구적이고 이성적인 면에 집중하여 작품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암흑 시대라고도 불리는 중세는, 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진행된 시대였다. 당시의 문화와 사람들의 세계관은 모두 종교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을 정도로 신심의 정도가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때는 최후의 심판날로 예언된 주후(A.D) 10세기를 훨씬 넘겨, 신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때문에 당대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계 종말과 최후 심판에의 예감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로는 암흑 속에서 태동하던 계몽주의와 인간성에 눈을 뜨는 인문주의적 신학으로부터 근엄한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수도원은 그 어떤 것보다 신을 위한 믿음과 학문을 지켜내야만 했다. 이 작품은 시대적인 흐름을 바라보지 못하고 맹목적이고 독단적이며 신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방식까지 동원하며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려 했던 수도사들과 종교인의 이야기이다.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금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편의 공표를 막기 위해 살인과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호르헤 수도사나, 종교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재판하고 화형시키는 베르나르 귀라는 이단심판자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삶을 바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결여되어 있다. 반면 전통적 대립구조를 보여주는 신.구의 갈등에서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들이 있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윌리엄 수도사와 그 제자 아소이다. 물론 아델모, 베난티오 등 교회가 금하는 책에 관심을 갖는 젊은 수도사들도 엄격히 구분해 보자면 새시대의 변화에 동참하는 인물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일 뿐, 시대적으로 앞서는 인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구시대의 유물격인 중세의 모습을 대변하고 전통을 고수하는 수도원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바로 윌리엄 수도사이다. 그는 비전형적인 인물이며 박식하며 세상을 넓고 멀리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살인을 악마의 소행을 돌리는 무지하고 미신적인 수도사들 중에서,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합리적으로 추리해 나가는 유일한 인물이다. 흡사 셜록 홈즈 또는 맥가이버와 같이 뛰어난 통찰력과 추리력, 관찰력을 지니고 있는 이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대적이고 신지식인적인 인물의 활약으로 수도원의 미스터리한 사건은 풀리게 된다.하지만 그가 현학적이고 지적인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현대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변화의 조류를 타고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중심의 세계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그는 진정한 인간 중심의 인물이었다. 그는 이전에 이단을 찾아내어 정죄하는 심판관이었지만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면에 회의를 느끼고 거기서 물러나와 세상을 떠돈다. 물론 자신의 이성적인 면에 그 일이 생리에 맞지 않아 그만 두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권위를 맹목적으로 세우는 다른 심문관들과 달리 그는 부당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 평민들을 수호하려 애썼고 그 대가로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다.이런 사람에 대한 애정은 자신의 제자 아소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평상시에 세세한 가르침과 따끔한 충고를 하는 윌리엄은 아소가 이름 모를 여인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 고해 성사를 할 때에 그를 아래 사람으로만 여기고 나무라지 않았다. 친구이자 스승, 또는 사람을 사랑하는 성직자의 모습으로 커다란 아소의 과실을 이해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노력한다. 그의 이런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인간에 대한 존엄과 연결되며, 그 어느 시대보다 인간에 대한 존엄이 존중되는 현대에 걸 맞는 모습이다.이처럼 윌리엄 수도사는 시대적인 감각을 앞서나간 인물로써 중세 시대 속에 위치한 현대적인 인물상의 요소를 갖춘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또한 작품에서는 이처럼 시대를 앞서나가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나가고 있는데 그 상징적인 소재가 바로 이 아소에게 준 안경이다.수도자로써 금기시하는 이단의 문명임에도 그 시대에 흔치 않았던 안경을 윌리엄은 착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신지식인임을 다시금 나타내고 있는 소재이다. 이 안경은 후에 아소로 전해지며 안경의 숨겨진 의미인 ‘진실을 보는 눈’이란 의미가 후세로 전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상’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지금까지 작품 속에서 나타난 현대적인 인물상과 그것이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음모, 타락, 부패, 폭력, 독선의 악취를 풍기는 소설 속의 수도원은 당대 사회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소우주이다. 이런 시대를 보면서도 독자가 끊임없이 시대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시대를 앞서가는 지혜를 가진 인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윌리암 수도사라는 인물을 그린 이유 역시 이런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는지.시대는 나날이 발전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현실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시대에 대한 희망과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는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나의 이러한 시대와 세계에 대한 낙관을 작가 역시 갖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이번에 수업에 행하였던 작품의 감상은 나에게 삶과 세계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며 아울러 중세 시대의 모습과 그 찬란한 문화(이를테면 아름다운 그림이 섞여있는 필사본)을 볼 수 있었던 것 역시 기쁘게 생각한다. 다음에 또 다른 방법으로 시대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PAGE PAGE 1
목 차서 론본 론 ① : 종군 위안부 바로 알기2-Ⅰ. 종군 위안부의 정의2-Ⅱ. 종군 위안부 여성의 피해 실태2-Ⅲ.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및 운동3. 본 론 ② : 법적인 측면에서 문제 해결3-Ⅰ. 시모노세끼 재판과 최고 재판소 일괄 기각 사건3-Ⅱ. 최고 재판소 일괄 기각 판결의 문제점1. 원고들의 청구 및 청구 배척 이유2. 법적 논쟁점 (일본정부에 의한 사실 인정과 처벌 의무)3. 문제 해결의 가능성 (일본의 전쟁 범죄 재판 수락과 처벌의 예)3-Ⅲ. 다른 국가들의 사례와 해결 방안다른 국가들의 전후 책임이행 사례2. 해결을 위한 우리의 노력4. 결 론1. 서 론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에서는 세계는 진실과 선(善)이 승리하며 어떠한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늘 진리가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세뇌 될 만큼 들어온 이러한 논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 의심이 없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의 삶과 역사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꼭 세상이 정당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악인이 선인을 지배하고, 거짓 속에 진실이 묻혀버리는 아이러니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쉽게 발견된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세계의 부조리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비단, 이 논리를 인류와 세계의 역사로 확대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부조리한 역사의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말이다. 흔히 ‘한의 역사’라 일컬어지는 우리 나라의 역사는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동족간의 싸움으로 점철되어졌다. 그 중 일본에 의해 36년간 식민지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일제 강점기 때의 여성의 삶은 가장 부조리한 역사의 단면이다. 물론 당시를 살았던 한국 남성의 삶 역시 순탄치는 않았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더욱 그 강도가 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삶이다.왜 한국의 순결한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야이상, 심한 경우에는 90명까지 군인을 상대해야 했으며, 위안소가 없는 지역에 파견되면 임시 막사를 설치하고 그 부대의 전 인원을 상대해야 하기도 했다.위안부들 중 상당수는 군인들에게 반항하여 맞기도 하고 소수는 목숨을 끊기도 하는 등 성폭력에 대해 극심한 반발을 하였다. 다수를 상대하는 일을 하여 성병에 걸린 여성들도 많았으며 일평생 동안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은 채 고통을 겪은 여성들도 매우 많다고 한다. 이런 위안부들의 고난은 일제 패전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들은 일제 패전 후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일본군이 퇴각 당시 이들을 그대로 버리고 가거나 한데 모아 죽이기도 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온갖 어려움을 헤쳐야 간신히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고 타국에 머물러 일생을 보내게 된 경우도 많다.이렇듯 ‘종군 위안부’들은 외출을 제한 당한 채 매일 수많은 군인을 상대하는 성 노예로써 생활하였으며 이 경험은 평생 숨겨야 할 그들의 치욕스러운 과거가 되었다. 그들의 삶은 이 경험으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개인적인 행복마저 빼앗아갔다. 종군 위안부는 일제의 전쟁에 직접 동원된 인원 중 가장 참혹한 피해자들이다.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되어 일시적이나마 아시아 평화구축을 위한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라는 환영에 사로 잡히기라도 할 수 있었던 사람과는 그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경우이다. 영문도 모르고 전선으로 끌려간 그들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발견했을 때부터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들이다. 애초부터 그들은 천황의 영광된 과업을 수행한다는 착각조차 가질 수 없었다. 자신의 피해를 밝히기조차 꺼리며 과거의 가해 책임자로부터 어떠한 피해배상도 받지 못하여온 이들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전쟁 피해자들이다.강제 종군위안부 피해자는 현재 대부분 고령이며, 피해의 성격상 광복 이후 정상적인 가정생활이나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없어서 상당한 생활고에 시달려 왔다. 이들에게는 배상의 충분성 만큼이나 조치의 신속성 역시 요구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수십, 수만 명’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한 청구일본정부가, 보상입법안 작성.제출, 법적 책임 인정, 사실조사 등을 하지 않은 것이 ‘도의적 국가이어야 할 의무’ 위반이라는 것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 및 공식사죄의 청구나가노 시게토 전법무대신의 발언에 의한 원고들의 명예 내지 인격적 가치의 침해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 및 공식사죄의 청구시모노세키 재판에서는 위의 내용을 기각하고, ‘위안부’피해자들에 관련한 일본의 국회 의원들의 입법부작위를 이유로 한 배상청구만을 받아들였다. 또한 2003년 3월 25일 최고 재판소는 이 중 어느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원고 패소 결정을 확정 지었다.청구가 배척된 이유에 대해 살펴보면,ⅰ. 1)의 청구에 대해서는, 제시된 선언 및 “일본국헌법 전문을 근거로 하는 한, 법적 의무로서, 피해자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사죄와 배상이 피고에게 입법상 의무지워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ⅱ. 2)의 청구에 대해서는, 대일본제국헌법은 “늦어도 일본국헌법의 시행에 의해 전면적으로 실효했고” 패전 전에는 손실보상에 관한 “법률의 명문규정”이 없음.ⅲ. 3)의 청구 중 ‘정신대’ 원고들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신대’ 원고들의 “피해의 성질과 정도는”, ‘위안부’ 원고들의 그것과 달리, “당시의 제국일본의 식량사정, 학생생도에 대한 근로동원체제, 압도적인 군국주의적 풍조와 신민의 무권리상태, 전국의 상황, 자연재해의 발발 등의 제사정, 제2차세계대전 당시 제국일본의 전지.식민지 제국민이 입은 전쟁피해, 전쟁의 참화 - 가해자인 제국일본신민의 그것도 시야에 넣을 때 - 여전히 그 피해가 특별한 것이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이 일본국헌법상 무시하기 어려운 중대한 인권침해를 초래하고 있다고까지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피해는 “정치부문인 입법부, 행정부의 재량 아래 있는 것”ⅳ. 3)의 청구 중 공식사죄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법에 의한 사죄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이것이야말로 정치부문의 독자적인 판단과 재량에 의해 결정할 사항이며 사법재판소가 개입할 수 을 예로 한다면, 1965년 한일간에 체결된 ‘재산 및 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 협력에 관한 일본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에 의해 완전하며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재산 권리 및 이익에 관한 문제는 법률 상의 근거에 의해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실제적 권리 및 양 체결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을 말하는 것이고, 동 협정에 관한 합의 의사록 제 2조 이러한 일본의 범죄 처벌 의무를 해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살펴본 사항만으로도 일본 정부는 이러한 법률적인 문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라 사료된다.3. 문제 해결의 가능성 (일본의 전쟁 범죄 재판 수락과 처벌의 예)일본은 과거의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에 대해 이전에 그 형사 처벌을 승인한 예가 있다. 이것은 현재 해결을 보고 있지 않은 아시아 지역의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물론 이 예 역시 일본군 스스로가 처벌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종군 위안부에 대한 범죄 책임을 물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일본은 극동국제군사재판 및 기타 연합국의 BC급 전범재판 법정에서의 처벌은 포츠담 선언의 수락,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체결(동 11조)에 즈음해서 일본으로서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영.미 등 연합국의 포로에 대한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에 반한 처벌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중에 네덜란드 여성을 피해자로 하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범죄책임자에 대해서 네덜란드 군 사법당국에 의해 수사, 고소, 재판, 처벌(사형을 포함)의 승인도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은 피해자인 일본군위안부가 백인일 경우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한다는 것, 범죄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야 할 것을 인정한 것이다.이러한 점으로도 보면 종군 위안부 노릇을 해야 했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적 노예제라고 하는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에 대해 이것을 범죄로 인정하고 처벌을 가능케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위주로만 진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과거 자국의 전쟁에 동원되었던 구식민지등 외국출신의 군인 군속 기타 민간인 피해자에 대하여는 각종 원호관계법의 적용을 철저하게 배제하여 왔으며, 심지어 자국인이라 할지라도 외국귀화를 하면 그 적용이 중지되고 있다.또한 일본 국내분은 피해자 개인에게 지불된 돈으로 희생자에 대한 직접적인 원호가 되고 있으나, 해외분은 그 대부분이 상대국에 일괄 지급됨으로써 일본군에 직접 동원되었던 피해자 개인에 대하여는 현실적인 보상이 별로 실시되지 못하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제도적으로나 금액상으로 볼 때 일본은 대외책임이행, 특히 희생자 개인보상을 소홀히 하고 왔으며, 특히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전쟁의 피해에 대해서는 거의 지급을 하고 있지 않다.2. 해결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종군 위안부의 문제의 본질은 한국국민이 일본의 범죄행위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한국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보다 더 적극성을 가지고 이 문제 해결에 고심해야 할 것이다.하지만 한국정부는 다른 피해를 입은 서구 국가에 비해 매우 소극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때로는 한국의 입장은 1965년의 한일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종결되었다고 볼 정도이다. 하지만, 그러한 입장은 타당하지 않다. 우선 1965년의 한일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종결된 것이 아니다. 한일협정은 일본의 범죄행위에 대한 배상청구에 관해 아무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한국정부는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여 일본에 대해 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 만일 한일협정이 위의 배상청구도 포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북한과 일본 사이에 위의 배상청구가 논란 되고 있는 지금은, 협정 체결 당시에 존재하였던 사정에 관련하여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므로, 한국정부는 협정의 종료 또는 협정으로부터의 탈퇴를 주장할 수 있다. 만약정부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피해자들의 권리에 대한 침해라고 까지 볼 수 있겠다.한국정부가 ‘인도에 대한 죄’를 범E 3
일본의 종교목 차1.머 리 말2. 본 론 ① : 일본의 종교Ⅰ. 일본에서의 종교 형성Ⅱ. 신도* 가미* 신사* 신도식 결혼식* 카미다나Ⅲ. 불교* 불교의 역사* 부츠단* 불교식 장례식Ⅳ.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의 역사* 크리스트교의 낮은 비율Ⅴ. 신흥 종교* 신흥 종교의 대표적 교단3. 본 론 ② : 일본인의 종교관과 국민성Ⅰ. 싱크레티즘 (중층 신앙)Ⅱ. 교단귀속과 종교적 관심Ⅲ. 가정의 종교와 개인의 종교Ⅳ. 절대성과 관용성4. 맺 음 말1. 머 리 말2002년을 되돌아보며 떠올릴 수 있는 핫이슈 중에 특히 손꼽을 수 있는 하나는 베를린 영화제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 베를린 영화제의 최우수 작품상을 어떤 작품이 차지하는가는 매년 영화인들 외 일반인에게도 큰 관심이었으며 이야깃거리이다. 하지만 2002년의 베를린 영화제 시상식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최우수 작품상인 금곰 상을 애니메이션이 차지했기 때문이다.그 영화는 다름아닌 일본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 작품은 이미 한국에도 2002년 여름에 개봉되어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한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했으며, 이어서 아카데미상 장편 애니메이션상까지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여기서 우리는 이 애니메이션의 어떠한 부분이 전세계인을 감동시키고 열광하게 했는지 궁금해진다. 갈수록 '지구는 하나'라는 말이 실현 되어 가고 있고,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와해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다분히 일본적 색채가 짙은 이 작품은 어떤 부분에서 세계의 관심을 모았는가?그것은 바로 일본 고유의 정신 문화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를 리드하며 많은 분야에서 세계의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현대적인 나라인 일본. 하지만 전통적이고 정신적인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일본. 이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인 일본인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세계인들은 그 차별화 된 일본 문화의 특수성으로 인해 일본 문화와 사회의 진수에 대해서 느꼈기 때문카미다나나 일가의 조상신을 참배하는 일을 각지에서 행한다. 또한 신부측에서는 혼례당일이나 전날 이웃, 친척들을 불려 연회를 여는 곳도 있다. 신도결혼식에는 신랑, 신부, 나코오도 부부, 가족, 친족만이 참석한다. 간누시가 신을 향해 노리토(祝詞)를 읽은 후, 신랑이 신에게 서약을 한다. 그리고 나서 신랑과 신부 사이에 「산산구도의 술잔(三三九度の杯)의식」을 행한다.-신도식 결혼식의 순서① 일동이 식장에 들어가 앉는다. 입장순서는 신랑, 나코오도, 신부, 나코오도 부인, 이어 신랑측 부모, 신부측 부모 ,신랑측 가족, 신부측 가족 순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② 식이 시작되면 전원이 기립한다. 간누시가 누사(ぬさ)와 다마구시(玉串)로 액풀이를 하는 동안 가볍게 머리를 숙인다.③ 신랑, 신부가 신전으로 인도되어 간누시와 함께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치고, 한 번 절하고 자리로 돌아온다.④「산산구도의 술잔의식」을 시작한다. 신랑은 가장 윗 잔을 양손으로 들고 미코가 따르는 술을 받는다. 이를 3번에 나누어 마시고 다음은 신부 다시 신랑의 순으로, 세 번째 잔은 다시 신랑, 신부, 신랑의 순으로 반복하여 모두 아홉 번의 술잔을 비우게 된다. 이로써 두 사람은 부부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때 결혼반지 교환을 하는 경우가 많다.⑤ 신랑, 신부는 다마구시안 앞에 서서, 신랑이 신전을 향해 결혼서약서를 읽으면 신부는 마지막에 자기이름을 말한다. 다음은 각자 다마구시를 신전에 바친다.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치고, 한 번 절하게 되는데, 이 때 참석자 일동도 기립하여 두 사람에 맞추어 행한다.⑥ 양가를 대표하여 나코오도 부부가 다마고시를 바친다.⑦ ‘친족결합의 술잔의식’으로 옮겨져 일동이 함께 세 번에 나누어 술잔을 비운다.⑧ 간누시가 식이 종료되었음을 알리고 일동을 향해 축사한다. 일동 기립하여 가볍게 한 번 인사하고, 신랑, 신부, 나코오도 순으로 식장을 나온다.* 카미다나일본인은 신앙생활에 있어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재 일본의 가정에는 신단(카미다나)과 불단(부츠단)이 함께 있는 경우도 흔하다.부츠단은 사자(死者)의 영혼을 위한 공양의 제단으로, 중앙에는 본존 또는 시조상(氏組像)을 안치하고 위패를 세워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었을 당시, 즉 불단이 아직 서민 사이에 보급되기 이전에는 집안의 신을 모셔 놓은 카미다나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불교가 점차 민중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자 사령의 제사는 불단으로 바뀌고 카미다나는 오히려 주기가 끝난 선조의 차례나 제사를 올리는 선반이 되어 버렸다.① 부츠단의 기원일본서기 제29권에 「서력686년에 텐무(天武)천황이 제국의 각 가정마다 불당을 만들고, 불상, 경권(경문을 적은 두루마리)을 놓아두어라 라는 칙령을 내리게 되었다.」라는 의미가 적혀져 있다. 이것은 일본의 각 가정마다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을 만들어 라는 말이고, 당시의 귀족은 다투어서 지불당(수호신인 부처님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었다. 이 지불당이 불단의 원형이라고 일컬어지고 오늘날의 부츠단으로 발전했다. 유력자의 사이에 불당을 갖는 것이 널리 퍼지는 것은 카마쿠라 시대이지만, 불단이 일반민중에게 보급되는 것은 훨씬 나중인 에도 시대부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불단이 보급되기 이전은 일반민중은 집안에 여러 가지 형태로 우지가미(그 고장의 수호신)나 조상을 모시는 제단을 갖고 있었지만, 무로마치 시대에 쇼인츠쿠리(書院造:무로마치 시대에 발생하여 모모야마 시대에 발달한 주택 건축 양식(선종의 서원 건축 양식)이 공가(公家)나 무가(武家)의 집에 채택되어서 생긴 것으로 현관·토코노마·선반·장지문·맹장지가 있는 집 구조, 현재 일본 건축의 주택은 거의 이 양식을 따름 라는 주택형식이 생겨, 그것이 토코노마로 변화했다. 이 토코노마가 먼 선조를 모시는 카미다나와 가까운 선조를 모시는 부츠단이 된 것이다.② 부츠단을 선택하는 방법-놓을 곳을 정해둔다. 예를 들면 부츠마(佛間, 불상이나 위패를 모신 방), 토코노마, 옷장 등을 택한다.-종파에 맞는 불단을 흥종교’라는 용어가 사이비적이고 불순한 뉘앙스를 풍긴다 하여 대체용어로서 쓰여지기 시작했으며 이후 나쁜 이미지를 벗고 기존종교와 대치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에너지와 참신성을 담은 적극적인 의미로 쓰여진 경우가 많았다.많은 신도를 가진 불교와 일본도에서는 신자로서의 의식이 낮고 거의 종교활동을 하지 않으나, 신흥종교의 신자는 신자로서의 의식이 높고 종교를 자기생활화하고 신자 모두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종교는 우리나라에서도 신자가 있는 덴리쿄와 창가학회, 그리고 성장의 집 등을 들 수 있다. 또 요즘은 만 명도 되지 않는 미니종교가 많이 생겨 성행하고 있다. 얼마 전의 오움진리교의 사건은 커다란 사회문제를 야기 시켰다. 오움진리교는 특유의 폐쇄성과 극단적인 행동으로 국민과 정부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창가학회나 덴리쿄 등의 경우는 세계 각지로의 해외선교 까지 성공하여 미국, 브라질, 한국, 대만 등에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일본뿐 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최근 일종의 붐으로 신종교의 성격을 가진 단체들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뉴에이지 운동이 관심을 불러 일으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여호와의 증인, 한국의 통일교, 기타 기 수련이나 무예단체같이 종교로서의 성격이 모호한 단체 등도 각자 나름대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신흥 종교의 대표적 교단*덴리쿄: 나가야마 미키라는 미망인이 자신의 몸에 머물러 있는 신을 전륜왕 미코토라고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며 이들을 상대로 포교해나갔다. 러.일 전쟁 때 많은 국방헌금을 냈기 때문에 1908년 교파신도의 하나로서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직도 미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덴리대학, 덴리 도서관, 훌륭한 스포츠 시설 등의 부속 기관을 갖고 있다.*다이혼쿄: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중심 인물로서 이 교단에는 군인 신자가 많았다. 다이혼쿄는 우익 혁명단체로 오해를 받아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고소를 당하고 교단이 파괴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무죄 판결을불교에는 정령신앙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는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불교와 신도, 절과 신사 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들을 동시에 신앙하며 한집안에서 불단과 신단을 동시에 모신다.일본인들 중에 신도와 불교를 이중으로 신앙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점의 하나는 일본은 종교적으로 신도 국이냐 불교 국이냐 하는 질문을 외국인으로부터 받거나 할 때 간단히 대답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통계상으로는 신도가 91.6%인데 반해 불교가 76.3%이기 때문에 신도 국이라 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명치시대부터 종전(終戰)에 이르기까지 ‘신도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배워 온 역사와 현재까지도 설교라든가 장례식 등 종교라고 생각할 만한 행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을 신도국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든다.그와 같은 이유로 일본이라는 불교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쟁 후 하나의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한 신도는 91.6%의 신자수를 헤아리고 있고 일본인의 생활 속에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일본은 불교국이자 신도국이라밖에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인 대다수의 신앙이 불교이자 신도라는 사실은 싱크레티즘이나 중층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Ⅱ. 교단귀속과 종교적 관심종교통계학적으로 보면 일본인들의 약 8할이 신도와 불교 신자이다. 그 8할의 사람 모두가 자신들이 불교신자이며 동시에 신사의 우지꼬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제까지 여러 단체에서 종교의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신앙을 가지고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30-35%에 불과하였다. 결국 자신이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으며, 신앙을 가지고 있다라고 자각하고 있는 일본인은 35%정도밖에 안 되는 셈이다.이와 같은 사실은 나머지 65-70%의 일본인은 무종교인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종교 혹은 신앙에 대해 관심은 크다. 15
19C의 이탈리아(1789-1914)[CHAPTER 1] 19C 유럽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시대19세기 유럽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념이 가장 크게 대두되던 시기였다. 자유주의는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가직 물질적 풍요와 사회 신분의 불일치를 느끼며,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미 ‘가진 자들인’ 자유주의자들은 정의보다는 자유, 생존권보다는 정치적 권리, 철저한 혁명보다는 개혁을 지지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역시 자유주의처럼 상층 계급 혹은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아간다. ‘평등한 시민의 정치적. 사회적 공동체’를 nation으로 간주하면서 이들은 민족주의를 정치적 의지의 주체로 삼았다.[CHAPTER 2]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등장.흔히 ‘자유 민족주의’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과정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리소르지멘토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겠지만-는 바로 부흥 민족주의이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형제애의 이념에 영향을 받아 발달한 이 민족주의는 정치.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자유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인민의 자치정부를 민족 국가 속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은 불가분의 것이며, 각 민족의 권리와 문화적 독특성을 옹호하고 민족 구성원 모두의 권리와 발전을 지지했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은 이탈리아의 민족 문제를 의제로 나타났다고 하는 점에서 지적. 정치적 충격이며, 다른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다.[CHAPTER 3] 나폴레옹 점령기.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9C에 이르기까지 통일된 정부가 없는 분열된 도시국가로서 외세와 교황의 지배 하에 있었던 이탈리아는 많은 군소 국가들로 분열되어 상호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는 자코뱅의 영향을 받은 살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1794년-95년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학생이 주도하는 많은 반란이 나타난다.나폴레옹 1세지를 우리는 프랑스의 점령기로 보고 있는데, 이 20년간의 시기는 이탈리아에서는 커다란 변화기였다. 효율적 중앙 관제와 군대 관리가 적용되는 등, 나폴레옹의 지배를 통해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적이고 효과적인 국가 체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 인에게 프랑스의 점령은 민족적 일체감. 통일감을 갖게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다. 분열상태 속으로 빠진 이탈리아를 통합하려 1820년 카르보나리 Carbonari가 반란을 일으키고 든다.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이탈리아는 1848년 초 2월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여러 지역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은 민족주의의 봉기로 이어졌다.) 이렇듯 자유주의의 물결과 함께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이탈리아의 해방운동은 통일 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CHAPTER 4] 1815년 이후의 복고의 시대.빈 회의 이후, 1815년 왕정이 복고되면서 이 시대에는 이탈리아의 민족 문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언급된다. 이전 프랑스 혁명의 모델을 이탈리아에 투영하려 했던 소수는, 프랑스가 해방의 상징이자 압력의 상징이라는 모순에 빠졌었다. 그러나 복고 시대에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이탈리아를 독립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와, 이들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된다. 즉, 7개의 복고 왕국들을 어떻게 개혁하고 오스트리아로부터 해방하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이탈리에에는 복고 왕정에 저항하는 까르보나리 Carbonari라는 단체가 나타나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면서 종교적인 관용을 지닌 이 단체는 이탈리아의 프리메이슨이라 표현하면 적당할 듯 싶다. 이 단체는 입헌주의자, 공화주의자 등 넓은 정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단체 내부의 이념적 통일성 부재, 자코뱅과 같은 대중과의 無접촉 등으로 이어져 결국 까르보나리의 활동이 결정적인 소득을 얻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혁명은 사실상 소수의 엘리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820년 나폴리에서 최초로 나두었고 나아가 “전능한 신이여, 이탈리아를 축복하소서!”라는 말을 통해 그 스스로의 이탈리아적 감정을 표현했다. 교황의 개혁은 조베르티가 그의 책에서 예고한 계몽적 교황으로 비추어져 국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 결과 이탈리아 전역을 통해 자유.애국주의적 봉기들이 크게 일어났고, 이것은 헌법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여 反 오스트리아 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CHAPTER 5] 1848 혁명기.유럽 전역에서 정치적 자유와 민족의 통일 및 해방을 위한 혁명이 일어나 1848년을 우리는 흔히 ‘혁명의 해’로 부른다. 1846년의 흉작, 빵값의 급등, 재정 위기에 따른 도산.실업.임금 하락 등의 생계 위기로 인한 민중의 식량 폭동은 1848년 초 까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빈발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제적 곤궁이 대중이 기존체제에 대한 불만을 악화시킨 이유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자유의 부재가 유럽 인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혁명은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자유주의자들과 온건 공화파들의 승리는 유럽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곧 독일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오스트리아의 문제, 즉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여러 민족들의 자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이와 같은 외세의 지배를 종식하고 통일된 자유주의적 민족국가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은 북부에서 민족주의 운동으로 연결되고 3월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는 오스트리아 군을 몰아낸다. 특히 밀라노에서 일어난 ‘영광의 5일’로 불리는 3월 18일부터 23일까지의 격렬한 시위는 가장 성공한 이탈리아의 혁명으로 기록된다.이외에도 각지에서 통일 운동이 일어나 베네치아는 3월에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피에몬테 왕국 역시 같은 달에 교황 세력의 지지를 받아 對 오스트리아 전쟁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피에몬테는 미비한 군사적 준비와 교황의 노선 탈퇴)로 7월 쿠스토자Custoza커다란 타격을 받게 된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갑자기 손을 뗀 일 뿐아니라, 로마에서의 도망, 가에타에서 보여준 태도는 피우스 9세의 도덕적 비열성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대의를 외국군에게 의지했기에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속권은 완전히 힘을 잃게 되었다. 속권의 상실은 로마가 이탈리아에 수복되는 1870년이 아니라 1849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는 각별히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던 전통을 대변하는 주요 토착 세력의 하나가 제거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 유럽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또한 이 혁명은 프랑스 혁명 이래 처음으로 people(정치화 되기 이전의, 무정형화 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이곳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계급적이지 않았으며, 이질적인 부류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혁명에 대한 뚜렷한 이념 없이-심지어 마르크스 조차 민주주의자로써 참여하였다- 자신의 정치적 자유와 민족 통일을 위해 선진적이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마지막으로 이 혁명의 실패는, 이탈리아 애국파에게 3가지 값진 교훈을 주게 된다. 첫째는 프랑스나 오스트라아 같은 강력한 외세를 해결하지 못하면, 혁명의 과정 속에서 통일의 과제를 스스로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까부르(Camillo benso di Cavour, 1810∼1861)같은 이들은 주변 열강과 결탁하여 통일을 외교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둘째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통일된 비전이 없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통일된 전망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애국파들은 만일 이탈리아가 스스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은 군대이며, 유일하게 군대와 국가 체제를 갖춘 피에몬테로 인하여 이탈리아 통일이 실현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CHAPTER 6.] 1861년 이탈리아의 미완된 통일1848년 혁명 이후 49년에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즉위하고 52년에는 카부르가 피에몬테의 수상으로 취임한다. 카부르a에서 단독으로 오스트리아와 휴전조약을 맺는다. 이에 비토리오 엠마누엘레는 합의 했으나 카부르는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게 사보이, 니스 등을 할양하고 교황의 세속적 주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중부이탈리아의 피에몬테에의 병합을 나폴레옹에게 인정받는 일에 성공했다.마치니 등은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전적으로 외교정책에 입각한 사르데냐 왕국의 팽창으로 추진되는 일에 불만을 품고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하려고 애썼다. 특히 공화주의자 가리발디는 외세에 의존하는 카부르의 방법에 격렬이 항의하며 이탈리아는 독자적으로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60년 5월 1000명의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의 부르봉 왕가의 지배를 종식시켰으며 6월에는 팔레르모, 9월에는 나폴리를 장악했다. 이와 같은 ‘소수 정예 행동주의squadrismo'를 통해 부르봉 군대의 극단적 취약성에 대해 알 수 있다.가리발디의 로마 진입과 그에 따른 외세 간섭을 막기위해 카부르는 가리발디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목적하에서 회담을 한다. 가리발디가 남부 이탈리아를 사르데냐에 바치면서 1861년 3월에 남,북부는 통일된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국왕으로 추대됬으며 로마와 베네토가 아직 수복되지 못하였기에 토리노를 수도로 정한다.그러나 신생 이탈리아 국가의 탄생은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탈리아의 ‘영원한 수도’ 로마는 아직 교황령에 속해있었으며 베네토도 수복되지 못했다. 니스와 사보이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의 손에 넘어갔다. 또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여전히 ‘2세’ 남아있었다. 이것은 신생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낡은 사르데냐 왕국의 연장임을 뜻한다.) 즉, 통일된 이탈리아는 새로운 민족 국가의 진정한 창건이 아니라, 기존의 한 이탈리아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합병하는 식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그 다음 이 통일은 대중의 진정한 동의나, 대중적 계획이 아니라 일부 엘리트의 제한적 계획이었다했다.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에 나타난 동아시아 공동체 문제에 대하여Ⅰ. 서론동아시아의 지역 협력, 혹은 동아시아의 공동체에 관한 담론은 1990년부터 시작된 가장 중요한 인문학.사회과학적 담론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2000년 한국의 국가적 비전으로 ‘아시아 중추국가론’이 선택되고), 나아가 2002년 출범한 노무현 정권이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목표로 하면서, ‘동북아 시대’에 대한 담론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 이런 동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지역의 협력에 관한 논의와 관심이 증대되면서 각 동아시아국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동북아의 3대 국가로 여겨지는 한.중.일은 동아시아 협력을 통해 앞으로의 아시아의 미래에 자신이 중심국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경제적 후진국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동아시아 협력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기를 고대한다.하지만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시아의 개념조차 정식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동아시아의 협력은 가능한 것인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질서라는 것이 진정으로 설립할 수 있는 것인가? 동아시아의 협력과정에서의 발생할 갈등이나 문제점은 없는가? 이제부터 나는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지역 협력에 대한 고찰을 하면서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도록 하겠다.Ⅱ. 본론첫째로 제기해보고 싶은 문제는 ‘동아시아’라는 개념의 정립과 그 통용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시아’의 개념은 아직 정확한 개념으로 정립되어 통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는 관례적으로 한.중.일 3국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세계은행이 한국.타이완.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 소국들의 급속한 성장을 소재로한 『동아시아의 기적』이란 책을 발간하면서 경제중심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버렸다. 특히 이 개념에서는 북한이 배제되어 있는 등 강력한 미국중심주의적 지리문화 편향이 깃들어 있다.) 사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백영서의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에서 더 깊게 논의된 바 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핵심은 하나의 모아진 개념으로써의 동아시아의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흔히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로 알려진 동아시아의 개념은 극히 지역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이제는 동아시아라는 개념이 정의가 학자들의 연구이든, 동아시아 협력 기구들의 협의이든 그 무엇을 통해서든 정립되어 아시아 각국들, 넘어서 세계적으로 통용되어야 할 시기가 아닐까?둘째로 제기해보고 싶은 문제는, 과연 동아시아로 일컬어지는 국가들의 동질성과 정체성이 과연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단순히 지역의 근접성만으로는 국가, 그리고 국민.민족 간의 동질성을 형성하기 힘들다. 특히 동북아의 한.중.일과 동남아시아 간의 인식적 동질성 확보는 더욱 어렵다. 물론,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중국에서 베트남으로의 견직기술 이전, 17세기부터 시작된 타이(시암)의 조선업 기술 이전 등)을 통해 상호 교류가 있었고, 베트남의 경우에는 같은 한자. 유교 문화권이며, 대부분의 동남아시아국이 일본. 혹은 다른 나라으로부터 ‘피식민지 시대’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 한류 등 20세기 들어서 각국의 문화에 대한 교류도 이전보다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동아시아 각국들간의 상호 연대적인 인식은 아직도 부족하며 공통의 동질성.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단순한 경제협력이나 안보적 이해관심으로 시작된 동아시아의 협력이라고 해도, 세계체제 속에서 구미의 영향력에 눌리지 않는 더욱 발전된 동아시아 지역 협력체로 진정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국의 동질성이나 정체성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단편적인 역사의 공감이나 문화의 교류를 벗어나는, 진실로 하나의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어떻게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설지, 또 국민국가의 틀을 넘지 않고도 형성할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금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제기해보고 싶은 문제는 협력론에서 제기되고 있는 그 협력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필요한 내용에 따라서 그에 맞는 기능 공동체가 생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 아니면 단순한 국가발전 전략을 넘어서는 역내 구성을 하여 이미 유럽이 실현한 역내 협력 및 통합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 앞으로의 구상이 필요하다. 또한 만약 후자의 길을 걷는다면 앞서 말했듯 공동의 동질성이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기능 공동체 외에도 가치 협력체를 만들어 나가는 등의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발전 모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가장 발전적이고 긍정적이 효과를 낳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Ⅲ. 결론이상으로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가 다루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 협력 혹은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해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개념의 정립과 통용, 동아시아의 지역 동질성과 정체성 형성, 동아시아 지역 협력의 범위와 정도. 발전 방향 모색 등 크게 세가지로 그 가능성과 발전 방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