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구현하는 조기교육- 사회적 인간활동을실현하는 조기교육목차Ⅰ. 서론Ⅱ. 조기교육의 개념1. 일반 조기교육1) 지적 조기교육2) 신체적 조기교육2. 특수 조기교육Ⅲ. 조기교육의 의미의 역사적 변천1. 서구사회 조기교육의 변천과정2. 우리나라 조기교육의 변천과정3. 조기교육의 의미의 변천Ⅳ. 조기교육의 본질 구현의 필요성1. 의미의 재정립 필요성 - 조기교육의 일반적 인식의 범위 확대2. 지적인 조기교육의 변화의 필요성1) 필요성2) 사회적 인간활동을 구현하는 조기교육(1) 사회적 인간활동(2) 사회적 인간활동의 요소Ⅴ. 결론Ⅵ. 참고문헌Ⅰ. 서론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반기 이후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교육열, 이에 편승한 유아 조기교육 산업체의 상업성 추구, 세계화에 따른 조기영어교육에 대한 관심 등이 어우러져 다양한 형태의 조기교육, 즉 유치원에서의 특별활동, 사설학원에서의 교육, 가정방문교사에 의한 학습지 교육, 온라인 유아교육, CD 타이틀 등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 정규 유아교육의 상당부분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조기교육이 각광 받고 보편화되어가면서, 일각에서는 조기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기사와 글 또한 상당부분 제기된다. 즉, 조기교육의 효과성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논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기교육의 개념이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편협하게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조기교육의 사전적 정의는 “학령(學齡)에 도달하지 않은 아동에게 일정한 커리큘럼에 따라 실시하는 교육”이다. 대체로 만 4∼5세 아동을 대상으로 유아의 지적 잠재력을 조기에 개발하거나 훈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조기교육의 영역은 지적, 신체적, 정서적 발달 등이 있으며, 이뿐만 아니라 교육의 대상에 따라 특수조기교육과 일반조기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조기교육의 개념은 포괄적이고 방대한 데에 비하여 대부분의 조기교육의 효과성에 대한 논의는 일반조기교육의 지적 영역에만 인 측면)에서 인정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선진각국에서는 이를 위한 시설확충이 잘 되어있는 데에 반해 우리나라는 사람들의 인식과 더불어 시설적인 측면에서도 신체적 조기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기에는 아직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있다.2. 특수조기교육‘특수조기교육’이란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유아와 그들의 가족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이 조기특수교육이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수조기교육은 장애를 지닌 어린 유아에게 교육 또는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나, 이 때의 교육적, 치료적 활동은 유아의 가정과 지역사회의 환경전체를 고려한 폭넓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환경에 의한 지능의 변화 가능성 이론과 유아 발달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에 대한 제 연구 결과는 장애 유아에 대한 조기교육의 요구를 증가시켜 왔다.) 특수조기교육의 이점으로는 첫째, 장애유아의 발달을 가속화시키며, 장애의 악화 방지 및 2차적 장애를 예방한다. 둘째, 조기 교육과 함께, 학령기 동안 지역사회에서 교육을 하는 경우 시설에 수용하는 경우에 비해 상당한 교육비 절감을 초래한다. 셋째, 조기교육활동을 통해 부모들 또한 상당한 원조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들로 알려져 왔다.Ⅲ. 조기교육의 의미의 역사적 변천위와 같이 조기교육은 전체적인 개념이며, 아동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긍정적인 기제이며, 이런 점에서 그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기교육의 실현은 고대부터 계속해서 주장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편협한 개념적 통념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 서구사회와 우리나라의 조기교육의 변천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 안에서 의미의 변화도 알아보도록 한다.1. 서구사회 조기교육의 변천과정서구사회에서 조기교육은 학령기 아동과 유아가 구별되어 교육되면서 그 논쟁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프뢰벨에 의해 유치원이 세워지면서 유아의 발달에 적합하지 않은 교육을 의미하는 조기교육이 유아교육의 논쟁 속에 들어오게 되 지닌 조기교육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치원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기교육으로서의 유치원 교육은 현재와 같이 유아에게 적합하지 않은 교육의 의미보다는 일찍 교육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더 보편화되었을 것이다.1980년대 우리나라의 유치원 교육은 획기적인 변화의 기로에 섰다. 그것은 새로운 성격을 지닌 개정된 유아교육과정에 따른 유치원 변화와 유아교육의 양적 발전이었다.) 이 시기에 유치원 교육은 조기교육이 아닌 유아의 발달을 고려한 적합한 교육으로 인식되었다.1990년대 우리나라 유아교육계에 또 다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조기교육과 유치원 교육의 관계에 대해 재인식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198년대 유아교육의 양적성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미국에서 도입된 조기교육 프로그램은 우리 유아교육 현장에 점차 영향을 주기 시작해서 1980년대 중반기 이후 학부모의 유아교육에 대한 관심 고조, 조기교육 산업체 등과 결부되었다. 점차 유아의 발달과 학습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학문적 기술을 강조하는 조기교육이 과열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특히 1988년 올림픽이 개최된 후, 세계화, 국제화에 따른 영어에 대한 관심은 1997년 초등교육과정에 영어교과목의 도입을 계기로 유아 영어교육의 필요성과 연결되었고, 유아영어교육은 그동안 이루어져 왔던 학문적 기술과 예체능 등 다양한 종류의 조기교육과 더불어 과열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조기교육의 대상 연령도 하향화되어 심지어 태어나면서부터 교육을 시키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조기교육은 이제 더 이상 정규 유치원 교육활동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정규교육과정을 점진적으로 대신하고 있으며, 정규 유아교사 대신 유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전담 외래강사에 의해 정규교육과정과 연계 없이 교육되고 있다.1990년대 조기교육의 열기 속에서 유아교육계는 질적 발전을 위해 유치원을 공교육 체계 속에 제도화시키기 위한 노력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실제 유치원 현장에서의 교육은 조기교육의 확대로 유아의 발달에 적합한 질적교육은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물론 지적 영역의 조기교육 또한 오랫동안 논쟁이 분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하나의 이상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제도적인 측면이 사람들의 인식보다 더욱 빨리 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또한 이 변화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도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조기교육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지적인 조기교육의 변화를 우선적으로 주장한다. 비록 여러 해 동안 논의해오고, 그럼에도 대안이 나오지 않은 어려운 문제이지만, 필자는 부끄럽게도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바로 사회적 인간활동을 구현하는 조기교육이다.2) 사회적 인간활동을 구현하는 조기교육(1) 사회적 인간활동‘사회적 인간활동(a practice)'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립된 협동적인 인간 활동을 수행하는 모종의 정합적이고 복합적인 양식으로서, 그 활동양식에 적합하며 이 활동양식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규정하는 탁월성의 기준이 있어서, 이 기준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활동에 내재된 가치가 실현되며, 그 결과로, 탁월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능력 및 그 활동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인간의 사고가 체계적으로 확장된다. 이는 학생을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적 실제에 입문시킴으로서 다양한 실제적인 가치와 변화에 대처하려는 시도이다. 교과의 명제적 지식의 전달이나 기능의 습득을 넘어서서, 사회적 실제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구성요소 전체로 확장시킨다. 이는 지적인 영역 뿐 만 아니라, 신체적, 정서적 영역 등 모든 영역을 모두 골고루 발현하여, 궁극적으로 조기교육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2) 사회적 인간활동의 요소메이어는 명제적 내용, 서술적 이야기, 기술, 습관과 덕, 정서, 판단, 법률적 틀, 형이상학적 틀, 합리성의 양식, 취향 등 열 가지 구성 요소들을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메이어의 10가지 구성 요소들을 검토하면서 이를 실현하는 조기교육을 생각해 본다.첫 번째 구성요소는 ‘명제적 내용’이다. 이는 그 방향으로 이루어질 때에 의미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넷째로는 ‘습관’과 ‘덕’을 들 수 있다. 습관과 덕은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인간활동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활동에 내재된 가치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덕’은 사회적 인간활동의 본래의 목적과 가치를 지키는 무기로서 그 활동에 부합되는 인격을 기르는 교육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재된 가치들의 갈등이 있을 때를 위해 ‘습관’의 요소가 제시된다. 이는 그 활동의 탁월성의 기준이 가지는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태도와 선택과 선호와 취향을 복종시킨다는 뜻이다. 특히 어렸을 때엔,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 시기이고, 특별히 이 요소들은 형성되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기초이자 방향이 될 수 있다. 즉, 이 때 익힌 ‘습관’과 ‘덕’의 요소는 앞으로 그 아동이 살아가는 인생의 지침과 기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다섯째로는 ‘정서’라는 요소를 들 수 있다. 정서는 활동에서의 정적인 영역으로서, 사회적 인간활동을 배우는 데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공동체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느낄 수 있다든지, 공동체의 규범을 적절히 받아들인다든지, 그 활동에 요구되는 정서적 특성을 가지고 적절한 정서적 반응을 하는 것은 사회화를 통해서 또는 칭찬이나 벌, 규제 등을 통한 학습을 통해서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조기교육은 거의 학습 위주로 이루어지고, 정서보다는 지식 전달이 위주이기 때문에 유아의 사회성, 배려하는 마음 등이 길러지기 어렵다. 유아들이 또래들끼리 같이 할 수 있는 놀이 등을 장려하여, 협동심과 사회성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즉, EQ(Emotional Quotient)를 장려해야 한다. 다니엘 골맨은 EQ에 대한 능력을 7가지로 들고 있다. 자신감)과 호기심), 계획성), 인내심), 동료 의식), 의사소통 능력), 그리고 협동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7가지 요소를 키우려면 놀이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술래잡기를 들어보면, 아이는 놀이를 하는 동안 어떻게 하면
【대교수학】에 나타난코메니우스의 교육적 혜안교육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백년지대계라고도 불리며 예전부터 중시되어 왔던 우리의 전통을 되돌아 볼 때, 교육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사안인 만큼, 많은 교육자들의 연구가 있어왔으며, 교육에 종사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 받아 왔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이슈도 끊임없이 가십거리처럼 등장하고 있다.교권이 붕괴되고, 참교육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교육개혁은 끊임없이 자행되고, 그 속에서 피해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교육학을 4년 동안 배웠고, 남들이 보면 교육에 대하여 뭔가 좀 알고 있을 것 같은 내가 직면하는 것은 기초적인 질문이다. 교육은 무엇인가. 참교육을 위한 방법은 있는 것일까. 그게 무엇일까.이 질문에 대하여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많은 교육서들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교육이 이렇게 파행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아주 이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답은 없다. 그저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선생님이 되기를 꿈꾸며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도 이 답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시간, 옛 교육자의 지혜를 빌려볼까 한다. 많은 이들은 역사를 배우는 목적으로 제일 첫 번째로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을 꼽는다. 현대의 교육과는 무척 다른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기초적으로 쓰인 것이라며 경시하기 쉽지만, 우리는 지금 어쩌면 그 기초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그런 의미에서 근대 교육자라고 불리는 코메니우스의 대교수학을 통하여 그의 인간상, 교육관, 교수법 등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라왔고, 신앙과 교육을 접목하는 기독교 교육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더욱 공감이 가는 책이었다.우선 그의 인간관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 중에 가장 높으며, 가장 절대적이며, 가장 탁월한 존재라는 이 한 문장으로 인간을 정의내리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인간관은 인간 존중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은 남녀노소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것으로, 여성도 차별 없이 학교에 가야 한다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주장이 나오게 된 아주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이러한 긍정적인 시각은 또한, 인간 안에 내재한 가능성을 보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믿고, 아주 좋아한다. 특히나 초등학생 아이들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며, 교사가 기대를 거는 만큼, 성장하고 바뀌는 것을 교생 때도 경험하였고, 교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실제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사가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기대를 갖기 위해서는, 아이들에 대한 잠재적인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관, 인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또한 탁월한 존재라는 그러한 관점이 우선 나에게 심겨지고,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교사들에게 심겨지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그러나 저자인 코메니우스가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장에서 ‘우둔한 정신을 가진 사람도 보편적인 교육을 통해 성품이 온화해 질 수 있고, 모든 청소년이 적절하게 조직된 보편교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모두 평생 동안 선한 일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선을 따라가며 행하게 될 것이다.’라는 이유(이것이 전적인 이유는 아니고, 이유들 중에 발췌하였다.)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한다고 하였을 때, 제도적인 측면, 기술적인 측면 등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고,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 이 현대의 교육현실에서 이 이유를 증명할 수 없음이 정말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게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를 들어 학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이 주장을 보면 학교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결과이자 역할이라는 것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실제 학교교육을 실행해 보았더니 이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교교육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논조로 이어져야 할까? 심지어 코메니우스가 살아있어, 자신이 예상했던 학교교육의 결과가 나오지 못하는 현 현실을 볼지라도, 그의 주장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돌려서 이야기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교육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러므로 교육의 방향, 방법 등을 바꾸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코메니우스의 전인적인 교육관에서 약간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위에 잠깐 인용한 구절은, 학교교육에서 성품의 변화, 도덕성의 함양을 기를 수 있다는 요지의 글이다. 나는 코메니우스의 대교수학을 읽으면서 전인교육의 2가지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중 2번째 측면과 연결이 될 것 같다. 우선 첫 번째로는 머리와 몸이 하나되는 교육이라는 측면에서의 전인교육이다. 코메니우스의 대부분의 생각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연의 많은 현상에 대한 비유로 교육에 대한 생각과 논조를 펼치고 있는데, 그는 광대한 자연 안에서 인간을 보고, 교육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하나의 단편으로, ‘교육만’ 보는 현대의 우리와는 다르다. 그는 인간 전반에서 교육을 파악하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외치고 있는 전인교육의 참 실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외치는 전인교육이란 단순히 전 교과목을 두루 배우는 것이라는 아주 협소한 측면에서 실행되고 있지 않은가. 전통교육이 강조했었던 건강이나 노작 교육 등의 교육이 아주 불필요한 것으로 경시되고 있다.개인적으로 나는 아이들의 건강을 무척이나 아끼고 건강에 관심이 있다. 학교 앞에서 버젓이 팔리고,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불량식품이나 학교 급식 파행 등에 분개하던 나는 절도 있는 식습관과 육체의 단련, 자연이 공급하는 휴식을 사용하여 생명과 건강을 오래 보존하는 방법까지 말하는 코메니우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는 ‘지’의 틀 안에서 전인교육을 주장하고 있는 데에 반면하여, 지(知)와 신(身)을 전인적으로 생각하는 코메니우스의 의견은 머리와 몸이 하나 되는 전인교육을 말하고 있다.두 번째로는, 정신, 마음과 머리가 하나 되는 전인교육을 말하고 있다. 물론 책 전반으로 보면 이 셋이 통합적으로 주장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렇게 나누어 정의 내려 보았다. 도덕성의 하락을 통회하며, 인성교육, 인성교육 운운하면서도 지적 교육을 공공연하게 우선시하고 있는 교육계와 학부모 계가 꼭 읽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던 학교 교육의 결과 중 하나로 생각하는 코메니우스의 결과도 이러한 관점에서 전인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때에 가능할 것이다. 신체가 형성될 때, 자연은 필요한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한 지식, 덕성, 신앙을 골고루 발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공교육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신앙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약간 미묘한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둘째 치더라도, 지식과 덕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코메니우스의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도덕, 신앙의 교수법을 열거하고 있는 그의 교수법이 모두 옳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의 주체라면 교사든, 학부모든 이러한 원칙을 스스로 내면에 세워야 하지 않을까. 효과적인 학습을 위한 방법은 정말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이 시대에 덕성을 위한 교육에서는 얼마만큼의 성과가 나오고 있으며,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느냐 하는 질문에 아무도 선뜻 yes! 라는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갖지 않더라도, 적어도 교사, 그리고 학부모는 이에 대한 관심과, 자신 만의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어서 일관적으로 교육에 적용시켜야 하며, 또한 이것이 서로 공유되어 교육 전반의 장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자연에 기초하여 주장하는 교수법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관적인 교수법을 주장하는 그의 견해였다. 공교육이 정착되지 않아, 학교의 체계가 잡히지 않았던, 그래서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고 불명확하던 그 당시에 꼭 필요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현대에서 교사의 인간관, 교육관 등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내용면에서는 동의하지 않으며 이에 관하여는 뒤에 이어서 서술하고자 한다.) 인간관, 교육관 등은 교육을 형성하는 아주 밑바탕이 된다. 절대 교사마다 이러한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정한 기초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에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는 모든 교사의 교육관과 인간관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좋아서 선생님의 꿈을 꾸던 예전과는 달리, 선생이라는 직분의 안정성을 보며 교사를 꿈꾸는 것이 현실인 이 시대에서, 아주 기초적인 이러한 생각도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를, 불행히도 나는 주변에서 보았다. 교사 직전 교육을 하고 있지만, 지적인 학문 연구를 전달하기에도 급급한 4년의 직전 교육 기간 동안, 예비 교사들이 자신의 교육관을 정립해서 졸업을 하는가에 대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부끄럽지만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아직 확고한 교육관을 세우지 못한 것 같다. 교사들의 교육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이러한 토대에서 교사들마다 약간이나마의 일관성이 있어야, 그들과 함께 교육의 전제에 대한 의심 없이 교육의 방향성을 논할 수 있으며, 교육의 진보를 함께 꿈꿀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욕망과 규범의 갈등-「상사뱀 설화」와 「변강쇠가」를 중심으로-▶ 차 례 ◀Ⅰ. 들어가며Ⅱ. 「상사뱀 설화」속 욕망? 사회적 규범의 구현 양상1. 상사뱀 설화 전반2. 욕망의 발현3. 사회적 규범의 제약Ⅲ. 「변강쇠가」속 욕망? 사회적 규범의 구현 양상1. 변강쇠가 전반2. 욕망의 발현3. 사회적 규범의 제약Ⅳ. 작품 속 욕망? 사회적 규범의 구현 양상 비교 ? 대조Ⅴ. 마치며※ 참고문헌Ⅰ. 들어가며태초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도 등장하듯, 인류의 기본적인 감정 중에서 사랑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사랑은 문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역사 깊은 모티브이며, 이들은 약간의 시대성을 가미하여 현대에도 반복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동시에 욕망이라는 이름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사랑에 필수 불가결한 또 하나의 기제가 된다.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살아간다. 때문에 뜻밖의 상황에서 본인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욕망에 대해 깨닫고 스스로에 놀랄 때가 있다. 이는 정신분석학이나 성 심리학에서 설명하듯, 욕망은 무의식과 자아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통제할 수 없는 힘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조들 또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 욕구를 지니고 표출했을 것이라고 응당 생각하지만, 그 방법은 매우 신중하며 조심스러웠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다. 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조선 후기에 성행했던 유교적 시각을 기준으로 전체 고전 문학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류일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성에 대한 욕구를 부끄럽고 부정한 것으로 인식하고 행동한 것이 현재의 우리들의 사고에도 아직 잔존해있다(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는 해도).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정조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유교적 관습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게 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현대의 문학의 갖가지 사랑처럼 고전문학 속 사랑 또한 여러 욕망을 품고 있지만, 다양한 사회적 규범 속남자가 죽거나 잠이 든다.(다) 남자는 뱀으로 변신하여 나타난다.(라) 상사뱀을 속임수로 물리친다.(마) 상사뱀은 사람으로 변신하고 상사 대상은 일상으로 돌아온다.두 번째 속임수로 물리치기 유형은 상사 주체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 뱀으로 변신하는 것까지의 기본 서사 구조는 다른 유형과 같다. 상사 주체는 상사뱀으로 변신하여 상사 대상을 찾아온다. 상사 대상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방적으로 당한다. 그러나 상사 대상 주변의 인물이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상사 대상에게 상사뱀을 물리칠 방법을 미리 일러 준다. 이 유형의 공통 단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사 주체인 남성의 신분은 대부분 중이고 그 사랑의 대상은 대체로 부잣집 딸이거나 아름다운 처녀들이다. 사촌 누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도 있다.(가) 한 남자(여자)가 한 여자(남자)를 사랑한다.(나) 상사 주체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상사병으로 죽는다.(다) 상사 주체는 뱀으로 환생한다.(라) 상사뱀은 상사 대상을 해코지 한다.(마) 원조자의 도움으로 상사뱀을 물리친다.(바) 상사뱀은 죽거나 사라지고 상사 대상은 일상으로 돌아온다.세 번째 ‘원조자 도움으로 물리치기’ 유형은 상사 주체가 신분상 차이로 사랑을 이루지 못해 상사병으로 죽어 뱀으로 변신한다는 것까지는 공통된 서사구조이나 상사뱀이 상사 대상을 찾아와 해코지를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앞의 두 유형과 다른 점이다.상사뱀 물리치기 실패형은 비극적인 서사 구조를 지니는데 여기서는 상사뱀의 한을 풀어주려는 상사풀이 무당굿도 소용이 없다. 상사 대상이 상사뱀의 보복을 받는데 그 정도에 따라 상사 대상 죽기, 상사 주체와 대상 함께 죽기. 죽음 옮겨가기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 사랑한다.(나) 상사 주체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상사병으로 죽는다.(다)상사 주체는 상사뱀으로 환생한다.(라)상사뱀은 상사 대상을 찾아가 해코지한다.(마) 결국 상사 대상은 죽는다.첫 번째로 ‘상사 대상 죽기’ 유형은 상사뱀이 상사 대상의 성별과 관계없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뱀의 세모난 머리와 긴 몸체 형상이 남성 성기와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뱀의 교미 시 생리적 특징, 허물을 벗는 집요한 생명력 등은 이 설화에서 뱀이 성적 상징성을 갖는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에서 상사 주체의 뱀으로의 변신 ? 재생, 그 후 뱀의 다양한 행위, 뱀의 외양 등에서 뱀의 성적 상징을 찾아 볼 수 있다.이것 외에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 구조에서도 전승 집단의 욕구가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설화의 원형이 형성된 당시에 봉건 사회에서 이러한 신분 제도는 절대적이어서 개인의 힘으로는 그런 제도 변화를 꿈꾸기조차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환경의 사회에서나 개인의 본능적 욕망은 늘 그만큼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억압된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간접적으로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상사뱀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비극적인 결말 구조는 사회 제도와 규범을 바꾸고자 하는 전승 집단의 내면적인 욕구를 강하게 내비치는 문학적 장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 사랑의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개인의 본능적인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 제도에 상사 주체와 대상의 비극적인 죽음을 내세워 폭력적인 사회를 바꿔보고자 하는 전승 집단의 열망이 나타난다.3. 사회적 규범의 제약앞에서 「상사뱀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를 살펴보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사 주체와 상사 대상은 신분의 차이가 있거나 상사 주체가 자신의 성 ? 사랑에 대한 욕망을 표현할 수 없는 신분적인 위치에 있다. 이러한 신분 차별 의식과 남녀 차별 의식이 결국 상사 주체로 하여금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문제 상황을 만들게 된다. 이 설화가 전승되던 조선시대를 포함한 전 시대에는 신분제 질서가 뿌리 깊게 박혀있던 사회였다. 또한 남녀의 유별을 구분하던 사회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신분 차가 나는 이들끼리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았을 뿐더러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도 큰 제약이 따랐다.「상사뱀 설화」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상사 주체와 논팔도의 장승이 강쇠에게 한 가지씩의 병을 주기로 함온갖 병에 걸린 강쇠는 곧 죽게 되고, 죽으면서 옹녀에게 유언을 남기고 장승죽음(삼년상 후 자신을 따라 자살할 것, 재가하지 말 것)옹녀가 혼자 치상을 할 수 없어, 망부가를 부르며 길가로 나섬강쇠의 초상을 치러주고, 옹녀와 함께 살려던 남자들(중, 초라니, 풍각쟁이 패 등)은강쇠의 유언대로 죽거나 화를 당함한풀이를 하자 귀신들이 감동하여 각설이와 뎁득이를 제외한 송장들을 풀어줌뎁득이가 한풀이를 간절하게 하자 이들 또한 붙어있던 몸이 떨어지고,여덟 송장을 북망산에 묻어줌강쇠와 옹녀의 결합과정에서 나타난 性의 묘사가 아주 노골적이라서 초기에는 음란한 판소리 정도로 취급되었으나, 최근에 들어서는 성적 측면을 벗어나 계급간의 갈등, 혹은 민속신앙에 대한 반항 등으로 그 주제가 넓혀지고 있다. 「변강쇠가」는 이렇게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본고에서는 강쇠와 옹녀를 중심으로 한 性적 측면에서 작품을 바라볼 것이다. 「변강쇠가」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2. 욕망의 발현「변강쇠가」에서는 성과 사랑이 대부분 희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판소리라는 장르가 기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변강쇠가」에서 성과 사랑은 직접적인 성행위만 묘사되지 않을 뿐이지, 다양한 자극에 노출되는 현대의 독자들이 얼굴을 붉힐 정도로 대담한 성적 표현이 드러난다. 특히 강쇠와 옹녀가 만난 지 하루 만에 혼례를 치루고, 대낮부터 서로를 탐하는 대목이 절정이다.“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패였다. 콩밭 팥밭 지났는지 돔부꽃이 비치였다. 도끼날을 맞았든지 금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 옥답인지 물이 항상 고여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옴질옴질 하고 있노.(중략)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 있고, 제사상은 걱정 없다.”결국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들에게 서로를 몸을 통해 욕망을 해현되었지만, 그 마무리는 비극적이다. 강쇠는 죽고, 강쇠의 유언에 따라 옹녀와 결합하려던 남자들도 송장이 된다. 그리고 옹녀도 다시 재가하지 못하고 안정적인 정착 생활과도 거리가 멀어진다.3. 사회적 규범의 제약「변강쇠가」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성적 욕망을 탐하던 등장인물은 모두 죽거나,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옹녀의 정착이 수포로 돌아간 것 등) 부정적 결과로 귀결된다. 아마도 이는 사회적 규범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내가 만약 죽거드면, 염습허고 입관 헐 제, 자네 손수 허여주고, 출상 헐 때 상부배행, 시묘살이, 조석 상식, 삼년상을 지낸 후에 비단 수건으로 목을 졸라서 황천으로 들어오면, 차생의 미진함이 단현부속이 되지마는, 내가 지금 이래도 죽어노면, 서방이라고 맹새하고, 자네 몸에 손을 한 번 대던가, 이 집 근처에 얼른얼른하면은 즉각 급살을 할 것이니, 부디부디 명심을 허소.이는 주인공인 변강쇠의 ‘기막힌 유언’이다. 그는 색만 밝히는 망나니 임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긴다. 자신의 삼년상은 물론이고, 재가를 하지 말며, 삼년상이 끝나면 비단 수건으로 목을 졸라 자살할 것까지 말한다. 세상에 둘도 없던 망나니가 갑자기 양반처럼 온갖 예를 갖추어 줄 것을 요구하고, 옹녀에게 정절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면서 살아갈 것을 명하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개과천선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유분방했던 강쇠는 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더욱 잔인한 인물로 돌변한 것일까?작품 전반을 살펴보면 비록 성적 표현이 노골적이고, 자유롭긴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성을 부정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변강쇠가」가 改作된 19세기는 이조의 봉건적 유교질서의 기초인 사회신분제도가 급격하게 붕괴된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 많은 하층민들이 유랑하게 되고, 그들 중 특히 여성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남자의 힘을 빌어야 했다. 그런 방편 중 하나가 재가를 하는 것인데 이는 옹녀가 계속 다.
갈래론의 새로운 방향 모색갈래의 정의는 여러 가지다. 보통 분류의 개념으로 사용하여 왔는데, 좁게는 문학의 종류나 관습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갈래는 문학의 종류를 작품의 특성에 따라서 분류할 때에 사용하는 개념이다.) 갈래 설정의 기준은 학자마다 다르며, 분류도 2분법, 3분법, 4분법 등 다양하다. 우리 문학이 가진 본래의 특성을 고려한 갈래론의 모색은 우리 문학에 대한 반성적 접근이며, 나아가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이미 많은 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통하여 갈래론에서의 많은 연구 논의를 이론으로 정립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을 포괄하는 데에 있어서 문제를 지적받고 있는 만큼, 좀 더 발전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존 갈래론 연구사례를 바탕으로 좀 더 나아간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기존 갈래론의 대표적인 사례로 조동일의 4분법과 김흥규의 갈래론, 성기옥의 이원론적 시각을 검토하고, 그것에 대한 의의와 문제점에서 시사점을 추출하여 새로운 갈래론을 모색해 보겠다.조동일의 갈래이론이 가진 장점은 고전문학에서 현대문학까지의 우리 문학의 전단계에 적용할 수 있는 갈래론의 개념과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것은 조동일이 시도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우리 문학에 대한 통사적인 고찰이 곧 갈래론의 정립임을 보여주는 것이다.조동일은 자아와 세계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세분하여 갈래를 네 가지 분류로 정의한다. 첫째는 세계의 자아화로 서정이다.) 둘째는 자아의 세계화로 교술이다.) 셋째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인 서사다.) 넷째는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 없이 전개되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인 희곡이다.) 조동일은 이와 같은 4분법이 우연이 아니며, 일상생활에서나 문학작품에서나 자아와 세계의 대립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전환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거나 서로 대결하면서 구체화되므로, 서정, 교술 쪽과 서사, 희곡 쪽은 구분된다고 한다.) 이 네 가지 갈래는 각각 다시 구분될 수는 있어도 이 넷과 같은 비중을 가진 다른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조동일의 연구는 교술 장르의 설정을 통해 분류체계를 광의의 문학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국문학의 모든 영역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국문학의 현상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현상까지 포용할 수 있는 이론의 일반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더 확대될 수 있다.그러나 김준오는 조동일의 이론이 전환여부, 완전여부, 특정여부로 구분되는 큰 갈래에 대한 정의가 일관되게 화자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때로는 화자를, 때로는 세계를 기준으로 하여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애매성을 노출시킨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또한 조동일이 교술에 포함시킨 가사의 경우, 비전환표현이 아니거나 적어도 너무 비좁은 범위라 지적한다.) 김문기는 조동일의 갈래 이론에 대해, 갈래 구분의 기초가 되고 있는 자아와 세계라는 용어의 개념이 과연 대립의 체계로 문학 작품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가사와 경기체가 등을 자아의 세계화로 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경기체가, 가사 및 창가의 갈래들의 작품적 질서를 찾아 명시해야 한다고 했다.김흥규는 갈래에 대해 폭넓은 정의를 내리고, 중간?혼합 갈래라는 새로운 갈래를 설정함으로써 가사와 경기체가 등과 같은 특정 갈래의 귀속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김흥규는 갈래를 일정 범위의 작품들을 완전하게 귀일시키는 특성, 원리의 조직체라기보다 ‘친족적 유사성’을 지닌 다수의 작품에서 추출되는 범례적 일반형이라고 정의한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별 작품은 그것이 속한 갈래의 범례적 일반형에 충실하기도 하고 어긋나거나 변형되기도 하므로 갈래의 변화와 부침은 편차와 역사적 동태를 포괄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큰 갈래가 초시대적, 범문화적 실재성을 믿는 논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시대, 문학에나 통용되는 보편적 범주, 완전한 체계일 수 없다며, 그러나 수천 년의 문학이론, 비평사를 통해 숱한 갈래론이 등장하고 또 현존하는 데에는 큰 갈래 구분 자체의 역사성이라는 근본 요인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또한 큰 갈래들의 경우 뚜렷한 범주적 개별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문학 현상들의 역동적, 입체적인 관련과 상호간의 넘나듦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는 갈래를 좌표적 개념틀로 이해한다. 용어에 있어서도 서정, 서사 등과 같이 불변의 범주성을 전제하는 명사류 대신 서정적, 서사적 등의 갈래들이라는 관형어적 구분을 택한다.김흥규의 갈래론은 특정 갈래 안의 개별 작품들의 변형이나 확장 및 이탈을 설명하기에 용이하며, 문학을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 성질의 집합체로 파악한 것이 장점이다. 그리고 우리 문학의 갈래론에서 계속적인 논란을 제공하는 가사나 경기체가, 가전, 몽유록 등을 기존의 갈래에 편입하지 않고 중간?혼합적인 갈래에 귀속시킴으로써 명쾌한 구분을 제시했다.그러나 중간?혼합의 설정은 그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 김흥규는 중간?혼합적 성격의 갈래들을 다면적 연관성을 존중하는 접근방법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우리문학은 큰 갈래간의 혼합현상이 매우 두드러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중간?혼합갈래를 설정하여 분류에 논란이 많은 여러 문학갈래를 거기에 귀속시키는 것은 매우 편의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역사적 갈래로서의 작은 갈래들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분석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큰 갈래에 대한 보다 폭넓은 검토와 이해가 필요하다.위와 같은 논의는 모두 단일 분류체계의 수립을 지향하는 일원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원론적 관점은 특수성을 보편성 속에 매몰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르의 실상을 오독할 우려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기옥은 문학적 분류론이 이원론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바로 질적 기반이 다른 두 개의 분류모형을 독립된 체계로 받아들여서, 문학적 분류론을 두 개의 접근 틀로 이원화시키는 것이다. 보편적 분류모형에 대한 연구인 양식론, 역사적 분류모형에 대한 연구인 장르론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양식론은 보편적 분류모형인 장르류(일원론적 관점에서의)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장르론은 역사적 장르인 장르종에 대한 연구로서 국문학의 특수성을 밝힐 수 있고, 개별 장르의 미학적인 성격 해명, 양식적 복합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일원론적 관점의 장르론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원화의 논리가 정리되지 않은 점, 한문학의 국문학 장르체계로의 편입 문제 등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기존 갈래론의 검토 결과, 우리 문학의 복합적인 특성을 포괄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좌표적 개념틀 속에서 유기적, 역동적인 문학을 인정하며, 새로운 분류체계를 만들어 복합성 장르들을 귀속시키려고 했던 김흥규의 이론이 좀 더 발전된다면, 단일 체계로서 우리 문학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김흥규는 중간?혼합적 성격의 갈래를 설정하여 복합성 장르를 포함하였지만, 그 갈래의 속성이 혼합적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김흥규의 주장과 같이, 문학의 속성이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사의 역사적인 흐름을 보면, 조선 전기의 가사는 조화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물아의 합일을 추구하는 서정적인 정조를 띠었고, 조선 후기에서는 서정성이 퇴조하며 서사적인 성격이 강해지고, 개화, 애국계몽기의 가사는 교술적인 성격이 강해진다. 그래서 이러한 복합적 특성의 가사를 어떤 성격으로 규명할 것인가에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역동적인 역사를 한 눈에 보기 위하여 김흥규의 좌표적 개념틀을 확장하고자 한다. 김흥규는 마름모 모양의 좌표를 삼아, 서정적, 서사적, 극적, 교술적, 그리고 그 사이의 중간?혼합적 성격의 갈래를 표현하도록 하였는데, 나는 이렇게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떠한지에 대한 의견을 내 본다. 정사각형 밑면의 각 꼭지점에는 서사적, 교술적, 서정적, 극적의 속성을 둔다. 그리고 세로로는 수치를 나타내어 속성의 정도를 표시하도록 한다. 앞에서 예를 든, 가사와 같이 역사적, 시대적 흐름에 따라서 그 속성이 변화하는 경우, 그것을 뭉뚱그려 어떤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는 것은 장르의 속성을 알고자 시작한 장르론의 본질과는 어긋나는 것이며, 오히려 그 속성의 정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의 흐름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바로 장르론의 본질과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김흥규의 이론에서 문제가 되었던, 중간혼합적 갈래 또한 저 모형의 입체적인 지점에 표시를 하여, 어떠한 속성을 띠는지,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장르에 귀속시키는 기존의 장르론에서 탈피하여, 서사적, 극적, 교술적, 서정적 속성, 각각의 척도의 수치가 바로 그 장르의 성격,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다. 가사와 같이 역사적인 흐름을 갖는 장르인 경우에는, 그 수치의 변화를 가사의 역사 흐름 순서대로 나열한다면 한 눈에 그 변화양상이 파악될 것이다.물론 문학을 분류하는 것부터가 우리나라의 정서가 아닌, 외국의 개념부터 시작한 장르론에서 정도를 수치화까지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사회학, 행정이론 등에서 이렇게 수치화를 이용하여 명확하게 표현하는 이론에서 생각을 착상한 것으로 오히려 더 명확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4분류에 비교적 주되게, 명확하게 분류가 되는 장르에서도 속성의 미묘하거나 복합적인 변화를 잡아내어 표시할 수 있을 것이며, 문제가 되고 있는 중간?혼합적 갈래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교육과정과 개혁Ⅰ. 서론학교는 흔히 공동체에 비유되기도 하고, 공동체의 한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교육실습을 나가, 아이들에게 공동체에 대해 교수하면서 공동체의 한 예로 우리 학교, 우리 교실을 들었었다. 중학교 2학년 도덕 교과서에서 공동체는 ‘같은 관심사를 지닌 개인들이 모여,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그런데 공동체의 예로 학교를 들면서, 마음속으로 학교가 진정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현재의 학교가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선뜻 ‘그렇다’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현재의 학교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변화의 선상에 서 있다. 제일 변하지 않는 곳이 바로 교육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말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장기적으로 보면, 교육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변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변화의 성과가 즉각적으로 피드백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변화를 한 번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학교 현장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공동체로서 모든 구성원들이 원하는 목적일까? 지금의 변화가 어딜 향하고 있고, 그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지, 변화의 흐름 가운데에서 자문해 보고 그 방향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에서는 작지만 분명한 학교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학생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이 목소리는 분명 학교 변화, 개혁의 방향인 공통의 목적을 결정짓는 데에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시도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확인해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첫 번째는,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이는 일치하는 것인가? 그리고 현재 교육이 나아가고 있고 지향하는 방향이 이를 잘 반영하여 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이조용하고 자기의 주장이 강하지 않고, 성적도 중간 정도,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한 아이였고, 세 번째는 학교 성적에는 관심이 거의 없고, 미용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이 세 명에게 어떠한 학교, 어떠한 교육을 바라는지 물어봤을 때 바로 나에게 되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어떠한 면에서요?’라는 것이었다. 교육현장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모여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나는 포괄적으로 교육내용이나, 선생님, 학교 전반적인 사항 등의 구분을 해 주었다. 너무나 세세하고 구체적인 항목으로 나누어 주면, 학교에 바라는 우선순위라든지, 이상 등을 말하기보다, 전반적이고 포괄적인, 일반적인 것들을 말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이 세 명의 공통적인 목소리는 학교가 즐겁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학교가 많이 변화하고 개혁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즐겁지 않다는 요인으로 공통적으로 뽑은 것은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었다. 머리의 길이나, 양말, 신발의 규제 등 학교 규율은 단순히 그들의 외모를 억누르기 때문에 싫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율성, 그리고 인권으로 연결지어, 아이들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나아가 그들 자신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처사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어른이고, 외적인 규제가 결코 아이들을 통제하는 기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세 명이 생각하는 정도는 다르긴 했다.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는 분명 규제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고, 심하다고 하는 학생들의 의견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는 이러한 규제를 불필요하고 학생들을 귀찮게 하는 장애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규제의 정당성이나 의의가 학생들 모두와 공유가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이렇게 서로 간의 상호작용의 부재는 결국 아이들의 불만을 낳는 요인이 되었고, 한편으로 또한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학교를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간주하고금 받고 있는 너무나 방대한 학업량은 불필요하고, 과목의 특성상 묶이기를 바랐다. 이를테면 서로 비슷한 성격의 사회, 도덕, 국어를 꿰뚫고 있었고, 이러한 것은 통합되었을 때 좀 더 깊게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 연관되는 내용이 많지만 구분되어 배우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흥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한 주제를 정하여 한 학기 동안 배우는 외국의 커리큘럼을 선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가에 대한 생각도 좀 더 깊음을 알 수 있었는데, 정의적인 성격이 강한 예체능 같은 경우는 지금과 같이 이론을 외우는 것으로 주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실제적인 평가 장면에서 평가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인지적인 성격의 주요과목에서는 그 성격에 맞게 인지적인 것을 평가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그 능력에 맞게 분별할 수 있도록, 형평성을 보장할 수 있는 평가를 원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생활교과의 성격이 강한 도덕은 공자나 노자의 사상을 글자 그대로 암기하는 것 보다 그러한 이론들을 현장에,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는지의 여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학업 성적이 반에서 중간 정도 하는 아이는 교육내용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을 갖질 못했다. 특별히 불만도, 특별히 만족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공부에 대한 뚜렷한 목표나 생각이 정립되지 않은 채 맹목적인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목표를 정립하지 못하는 것은 학습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낮은 동기는 곧 열망을 갖지 못한 채 학습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학업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는, 이론적인 공부는 필요치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꿈과 관련한 내용을 배우는 것이 더 실용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자신과 적합한 실용교육의 부재인 학교의 장에서 학생은 겉돌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학습실패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었다.학생들이 자신들의 학습에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다른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업 기술이나 수업 내용에 있어서 전문적인 선생님들이 계신 학교의 배경이나, 아니면 학업의 내용은 학원에서 보충할 수 있는 배경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결국 학생들은 자율적인 학교, 인간적인 교사상을 꿈꾸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간의 소통이 활발하고, 서로의 인격과 흥미가 존중받는 학교현장을 꿈꾸고 있었다.Ⅲ. 교사의 목소리앞에서 살펴본 학생들의 목소리는 학교와 관련한 여러 각 요인에 이상을 외치고 있었고, 그 이상과 배치되는 학교 현실에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에게는 ‘학교측’으로 분류되는 교사의 입장에서, 그들이 갖는 목소리는 과연 어떨까? 어떤 이상을 갖고 있을까, 알아보았다. 인터뷰를 해주신 선생님은 40대 초반의 선생님으로서, 졸업 이후 바로 숙명여자중학교에 부임하셔서 이곳에서 17년 동안 교편을 잡고 계신 분이셨다.교사로서 학교에 제일 바라는 것은 자율성이었다. ‘공부를 하려는 아이도 공부를 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전문가인 우리는 어떻겠는가.’하는 말을 하시면서, 구속이나 강압이 없을 때에 발전을 향한 의욕이 생긴다고 하셨다. 실제로 이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무척이나 의욕이 넘치신 듯하다. 여러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하루에 2, 3번, 못해도 한 번은 꼭 복도를 순시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교사들의 수업에도 예고 없이 불쑥 들어오셔서 참관하시는 경우가 많고, 특별히 당신이 학부 때 전공을 했던 사회 과목은 기간제 교사의 수업까지 일일이 참관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회의 때에 교육 전반에 걸쳐 교사에게 일일이 지시를 내리고, 수업내용이나 수업방법에 있어서도 세세한 조언과 지도를 하시며, 매 업무마다 교사에게 맡기는 것보다 당신 자신이 직접 확인을 하시는 등의 모습은 교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수준을 넘어, 교권의 남용이라고 간주하고 계셨고, 이는 교사의 행동이나 발전에 대한 동기를 떨어뜨리고, 자아개념 또한 하락시켜, 부정적인 자아개념이 형성되는 한 첫 번째로 원하는 것은 전문가인 교사의 자율성을 존중해달라, 하는 것과, 행정직과 교사의 영역은 엄연히 다르고, 이 구분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그리고 두 번째로는 부모의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교육의 주체로서 학부모는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가 교육과 대치되는 입장에 설 때, 교육은 정말 큰 추진력을 잃게 된다. 아직까지도 학생들은 자신의 주관과 의견보다, 학부모의 주관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행동을 하게 된다. 교사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도 학부모인 것이다. 학부모가 학교나 교사에 대한 비하를 단 한 마디를 하면, 그 한마디가 각인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학생들이다. 하지만 요즘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많이 감싸고, 학교나 학교 선생님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많은 문젯거리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공교육보다 사교육을 훨씬 중요시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하는 여러 프로그램이나 교육내용에 대해서도 신뢰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므로, 교사는 학부모가 전적인 신뢰를 하고 뒷받침해주는 교육을 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학부모와 교육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가정과 연계할 수 있는 확대된 교육의 장을 원하지만, 우선 기초적으로 학부모에 의해 폄하되거나 비하되지 않고 존중받고 신뢰받는, 그리고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인하여 격려받는 학교 현장을 꿈꾸고 있다.이러한 기초적인 배경이 탄탄하게 자리 잡았을 때, 교육은 변화될 수 있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교육의 변화와 개혁을 위한, 교장 선생님이나,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대한 열망이나 동기는 갖질 못했고, 오히려 잡무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문서화되어 내려오는 제도나 정책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잡무로 인식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제도는 행정가에 의해 계획된 제도는 아직까지도 현장과 유리된 수준의 것이 많아,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학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