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아이들’에서 나타난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나는 교직을 하면서도 어떠한 교사가 되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채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사실 앞으로 교사가 된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학급을 이끌어가야겠다’거나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겠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즉 아직까지도 어떠한 구체적인 교사관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아이들’은 나에게 가장 본질적인 교사로서의 자질과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기본 방향을 제시해주는 영화이었다.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해병대 여군장교 출신으로 교사로 전업하려 하는 루앤 존슨와 그녀가 정식 교사 자격증을 받기 위한 과정으로 교생실습을 나온 캘리포니아 북부의 빈민가 어느 특수반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루앤 존슨은 공부를 잘하는 특수반의 전임교사가 될 것이라는 말에 부푼 가슴을 안고 교실에 들어서지만 아이들은 교사가 들어와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이야기도 하면서 떠들어대었다. 그제야 그녀는 특수반의 의미를 알아채고 실망을 하게 된다. 만약 그녀가 그저 실망하고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들을 포기했더라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은 여전히 그렇게 특수하게 위험한 아이들로써 살아가다가 특수하게 위험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즉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로 자라게 되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그토록 반항적인 심리상태를 갖게 된 원인을 찾아보고 이해하려 애썼고, 아이들의 신상을 알아봄으로써 아이들의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미국의 빈민가출신의 아이들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려서부터 범죄와 익숙한 생활을 해오고 있다. 문제아라고는 해도 특별하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학교도 충실히 다니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싸움을 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먼저 죽여야 하는 상황 때문에 고민하였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깨달은 거리의 법칙에 충실할 뿐이었다. 즉 위험한 아이들은 위험에 처한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황폐한 가정환경이 만들어낸 불행한 아이들이었지만 위험한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책을 펴놓고 줄줄 가르치는 학습이 아닌 조금 특별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기 쉽게 가라대를 가르쳐 주거나 시를 가르쳐 주었고, 그녀가 내는 질문에 대답을 하면 초콜렛을 주기도 하였다. 또 아이들의 집에 방문해서 부모님께 아이의 칭찬을 하기도 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점차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자기 자신을 포기한 아이들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극 중 정식교사도 아닌 임시교사였던 루앤 존슨은 어쩌면 세상에서 손꼽힐 만큼 훌륭한 교사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다른 교사들이 포기한 이 특수반 아이들을 특수하지 않고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이들이 원래부터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험하게 만든 그 원인을 찾아내서 그것을 치료해주고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아이들 즉 평범한 아이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엿 볼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은 차별하지 않는 자세인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초, 중, 고등학교 교육을 받아오면서 학교에서 적지 않게 존재하는 차별을 느꼈다. 교사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판단하고 그것은 차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차별을 받으면서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많은 교사들은 알고 있을까? 인생은 성적순이 아닐지라도 교사의 학생에 대한 사랑은 성적순이라는 사실은 비참한 현실을 반영해주고 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공부를 잘 할 수도 있고, 축구를 잘할 수도 있고, 노래를 잘 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학생을 성적이라는 한가지 면에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고 거기에 따라 판단하고 칭찬해주어야 한다.두 번째는 포기하지 않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아이들의 마음에 문을 열어주고 그녀의 진심을 전달하기까지는 그녀에게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서 힘들지만 참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그녀의 진심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은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토록 끔찍한 무관심을 받고 자라난다면 위험한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위험한 어른이 될 것이다.세 번째는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봤던 눈높이 교육이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반항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보통은 화를 내고 나가버리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의 눈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봄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반항의 눈빛의 이면에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원하는 눈빛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주려 그녀는 애썼다. 누구에게나 개개인의 입장이 있고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일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남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교사는 성숙한 어른이고 아이들은 아직 미성숙의 단계이기 때문에 교사가 좀더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해해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교사는 끌어주는 사람이고 아이들은 그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는 아이들을 이해해야 하고 아이들은 자신을 이해하는 교사에게서야 비로소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네 번째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루앤존슨은 “너희들에게 모두 A를 줄테니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너희들 몫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주는 희망적인 말이다. 또 선생님은 학생간의 싸움이 일어났을 때 집으로 직접 정학 맞은 학생의 집을 찾아가자 싸움을 한 아이의 부모님은 선생님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우리 아이가 말썽을 피워 죄송하다며 아이를 혼내 주겠다고 말한다. 매번 찾아왔던 교사들이 부모에게 자신의 아이를 나쁘게 인식하게 만들었고 아이가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꾸중과 처벌 대신 루앤존슨은 아이가 자신의 반의 가장 자랑스러운 학생이라고 말하자 학부모와 학생 모두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만약 학생이 잘못하였을 때 체벌하면 다음에 더 나은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 학생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을 때만이 그 학생이 다음에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학 습 지 도1. 학습(1) 개념1) 행동의 변화로서 학습① Hilgard : 학습은 “주어진 사태에 반응함으로써 어떤 행동이 발생하거나 변화되는 과정을 말하는데, 다만 이런 행동의 변화의 성격은 생득적 반응경향, 성숙, 유기체의 일시적 상태에 의거하여 설명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② Morgan : “정보?지식?이해?능력?기능?습관?태도?가치관 등의 비교적 영속적인 변화와 변용을 획득하는 과정?훈련이나 경험의 결과로 발생하는 비교적 영속적인 행동변화이다”라고 한다.③ 종합 : 이러한 정의를 추스려 보면, 학습이란 “개체가 주어진 상황 안에서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그 상황에 대한 개체의 행동과 행동잠재력이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단, 이 같은 행동변화는 개체의 생득반응 경향이나 성숙 또는 일시적 상태(피로, 마취, 충동)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2) 학습개념의 도식화 : 학습을 행동변화로 규정할 때 함축된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학습이라는 것이 좋은 방향이건 나쁜 방향이건 행동변화로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변화가 경험이나 훈련 또는 연습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으로 성숙에 의한 변화는 제외된다. 또한 생득적 반응경향도 학습개념에서 제외한다.L = A - (B + C + D)L = 학습A =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B = 생득적 반응 경향에 의한 변화C = 성숙에 의한 변화D = 일시적인 변화3) 심리적 과정으로서 학습① 학습이란 변화된 행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결과로서의 학습이란 ‘환경’이라는 전제조건을 ‘경험’이 매개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② 객관적인 환경이 있고 환경과 개인의 상호작용이 있으며, 그 결과로 개인에게 주어지는 변화가 있다. 이것을 도식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환경(교수) → 경험(매개체) → 학습※ 교수의 개념 : 다른 사람들을 학습하도록 도와주는 기술로서 그것은 가르치는 일에 필요한 지시나 정보, 적절한 상황 또는 조건을 준비하는 일과 학습을 촉진하도록 신발달의 정도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개념이다. 준비도의 중요 하위요인으로는 성숙, 생활연령과 정신연령, 선행경험, 개인차 등이 있다.)① 성숙성숙은 성장과 다른 개념으로 성장은 자연적인 상태, 지식을 말하지만 성숙은 성장과 주변 습득, 지식, 경험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신적인 성장도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성숙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훈련을 시키는 것보다는 성숙이 된 다음에 훈련을 시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따라서 성숙되지 않은 면의 학습을 억지로 시키면 학습자와 교사 모두가 실패감과 좌절감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이 성숙요인을 요즘의 조기교육 붐과 관련지어볼 때 어린이가 학습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성숙은 아래의 ②,③,④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② 생활연령과 정신연령생활연령 요인은 모든 교육적 기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학습에 있는 똑같은 생활연령을 가진 학생이라 할지라도 정신연령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③ 선행경험어떤 학습이든지 그것을 학습하기 이전에 학습자가 어떤 경험을 하였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다. 고차적인 정신기능을 필요로 하는 학습일수록 그전에 이러한 학습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누적된 경험을 요구한다. 예컨대 원의 넓이를 구해 본 경험이 없는 학생에게 부채꼴의 넓이 구하기를 학습시키기는 힘든 일이다.④ 개인차준비도를 생각할 때 개개인에 따른 개인차를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인차는 지능, 선행학습정도, 신체적 성숙도, 정서적 특성 등 다원적인 개념이다. 또한 개인차를 고려할 때는 개인간의 차이와 더불어 개인내의 차이에도 주목해야 한다.(3) 학습지도의 원리1) 자발성(자기활동)의 원리① 학습자 스스로 자발적으로 학습에 참여하는 데 중점을 둔 원리로 동기유발의 원리이면서 창의성도 발전의 기반이 된다.② Pestalozzi의 노작교육, Dewey의 문제해결법, Kilpatrick의 구안법 등이 원리에 중점을 둔 것이다.③ 구현방안㈀ 상?벌에 의한 동기 단원학습법이라든가, 교육과정에서 특별활동의 비중을 교과활동과 같이 둔 것은 모두 이 원리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③ 구현방안㈀ 교재의 통합 : 저학년의 경우에 국어, 체육, 산수와 음악을 구별하지 않고 종합적으로 학습하게 한다.㈁ 인격의 통합 : 협동적인 태도를 육성하게 함으로써 전인적 인격을 쌓는다.㈂ 지도방법의 통합 : 생활지도와 학습지도를 통합시킨다.㈃ 지도방향의 통합 : 교사의 일관성 있는 지도가 필요하다.6) 사회화의 원리① 학습내용을 현실사회와의 사상과 문제를 기반으로 학교에서 경험한 것과 학교 밖에서 경험한 것을 교류시키고, 공동학습을 통해서 협력적이고 우호적인 학습을 진행하는 원리로 지역성의 원리와도 상통한다.② Dewey의 학교는 사회의 축도가 되어야 한다는 ‘축도사회로서의 학교’, Olesn의 지역사회학교는 이 원리를 구현한 것이다.③ 구현방안㈀ 토의법 : 의견발표를 통하여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분단학습 : 학생들간의 협력적인 학습을 통하여 사회성이 육성된다.㈂ 문제해결법), 구안학습법 :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각종 클럽 활동과 자활활동 : 개성을 살리며 소속집단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도록 한다.7) 흥미의 원리① 흥미는 사물이나 사건에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활동에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② 학습자가 학습의 목적을 이해하고 학습과제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 교사의 활동은 보다 능률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따라서 학습이 용이하게 된다.③ 교사는 이러한 흥미의 중요성을 이해함과 동시에 흥미의 내용이 다양한 것이고 개인에 따라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학습과제의 특성, 교사의 인성 등에 좌우되는 바도 크다는 사실을 특히 유의해야 한다.④ 이런 점을 감안하여 다양한 흥미유발기법을 창안하는 것도 좋지만 학습자가 이미 생활경험에서 가지고 있는 흥미를 이용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또한 흥미를 노력을 통해 일어나기도 한다.8) 과학성의 교수효과를 올려 보려는 것이다.④ 특징 : 협동적인 계획, 특정목표에 알맞은 학생집단 편제, 보조직원의 활용, 개별교사의 재능을 인정하고 분할?활용하는 일, 교수장학체제의 향상, 교사용 보조기재의 활용 등이다.⑤ 단점㈀ 협동적인 팀 구성이 어렵다㈁ 고도의 전문적 능력을 가진 주임교사를 찾기가 힘들다.㈂ 교사의 자유를 제한한다.㈃ 학년 및 학과별 편제를 바꾸는 데 혼란을 일으킨다.5) 문답법(Questions method)① 질문과 대답에 의해서 학습활동이 전개되는 형태로서 강의법과 함께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학습형태의 하나로 질문법으로도 불리우고 토의법에 포함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체계화하여 진리탐구 및 학문 전수방법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② 장점㈀ 학습한 문제점을 명백히 밝혀주기 때문에 초점이 분명한 학습활동을 조성할 수 있다.㈁ 학습에 자극을 주어 활기있고 적극적인 학습을 이룩할 수 있다.㈂ 기습사항의 정리 및 정착에 효과적이다.㈃ 적극적인 흥미와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다.㈄ 학생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발표력과 학생의 주체적인 학습이 가능하다.㈅ 학생의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 교사와 학생간의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진다.③ 단점㈀ 사고의 통일과 연속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 교사중심으로 되기 쉽다.㈂ 사고의 영역을 한정시키기 쉽다.㈃ 우수아 중심의 수업으로 흘러 부진아들에게는 좌절감을 주기 쉽다.㈄ 학습속도가 지연된다.6) 문제법(Problem method)① 학생이 현실에 당면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식, 기능, 태도, 기술 등을 종합적으로 획득하도록 하는 학습방법이다. Dewey의 반성적 사고에서 주장되고 있다.② 문제해결 학습의 학습과정㈀ 문제의 인식 단계(문제 확인)㈁ 학습계획(가설 수립)㈂ 자료수집 및 조사 연구㈃ 학습활동의 전개(가설 검증)㈄ 결과의 발표 및 검토(원리의 적용)③ 장점㈀ 학습자의 자발적인 학습이 이루어진다.㈁ 학습자의 구체적인 행동과 경험을 통한 교육을 한다.㈂ 생활을하여야 한다.학습지도안은 일정한 교재를 정해진 시간 안에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목표를 세워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그 유용성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2) 필요성1) 그때그때의 지도목표와 그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절차나 방법?수단 등을 제시한다.2) 교재에 바탕을 둔 지도내용을 명료하게 조직하여 제시해 준다.3) 학습지도의 효율성을 높이고, 교육의 성과를 극대화시켜 준다.4)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학습지도 뿐 아니라 지도를 용이하게 해준다.5) 잘 짜여진 학습지도안은 학습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고 학습자의 학습을 용이하게 해주기도 한다.(3) 성격학습지도의 계획은 학습자들의 심리적?사회적인 면을 고려하고 교재내용의 성격적인 면을 고려하여 교재내용의 성격에 따라 치밀하고 역동성 있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러한 학습계획의 본질에 따라 학습활동을 전개하고 학습목표를 달성하려면 학습계획이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녀야 한다.1) 목적에 적합한 계획이어야 한다.① 학습지도 계획은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어떠한 학습이든 학습목표가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② 그 교과나 교재만의 분과적, 단편적인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③ 계획 상호간의 상호관련성과 일관성에 의하여 교육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계획이 되도록 해야 한다.④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은 고정된 응용력이 없는 지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탄력성 있는 지식에 의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2) 과학적이어야 한다.① 학습 계획은 작성한 사람에게는 의미와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이익이 되지 못한다.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학습계획이 어느 특정인의 요구를 충족시키거나 제한적인 필요로서의 기능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② 학습 계획은 모든 사람이 타당성을 인정하는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 계획되어야 하므로 학습 계획을 할 때는 지도나 전개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사회주의의 확산 배경3?1운동 이후 시대적 상황에 의해 국내 민족해방운동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주의의 사상과 운동이었다. 사회주의가 한국에 유입되는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이지만 사회주의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확산되어 사회운동의 각 부면 즉 청년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및 예술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가 대두하게 된 요인에 대해서 당시 「동아일보」의 ‘사회주의의 의의’라는 논설에서도 지적하고 있는데 첫째로, 일본이 식민지 경제구조를 강권적으로 구축한 결과 조성된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인 사회?경제적 모순의 현재화로 농민?노동자 등 사회기층의 생존권투쟁에 있어서 유효한 행동지침으로서 사회주의가 주목되었다는 점과 둘째로, 기본의 항일 민족운동의 좌절의 경험과 그 한계성에 대한 반성과 특히 아시아 민족운동에 관한 중요 논점이 제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민족?식민지 문제 테제(1920. 7)와 더불어 반제민족해방운동의 국제적 연대의 이념으로서 급진적 운동권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다시 말해서 사회주의가 짧은 기간 동안 급속히 확산된 것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국제정세의 영향이라는 두 요인 때문이다.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펼친 경제정책은 하나의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경제를 자국의 재생산체계 순환 속으로 편입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식민지 조선에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를 확립시켜 일본자본이 식민지에서 자유롭게 토지투자를 행할 수 있게 보장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일본은 조선경제를 원료와 자원을 공급하는 곳으로 재편성하고자 했다. 식민지 통치당국은 쌀?면화?누에고치?소의 개량과 증산을 독려하였고 이것을 일본으로 원활하게 이전시키기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도로?항만 등의 생산기반을 급속히 확충시켰다.이뿐만 아니라 일본은 정치적 지배구조인 총독부 권력으로 조선이 일본의 상품시장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 조선의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일본자본의 침투를 조장하기 위한 회사령을 실시하고 저율관세를 존속시키는 등 일련의 법적 조치를 하였다.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조선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의 지주제는 온존되었고 식민지 통치당국의 보호 하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로 인해 지주계급이 조선사회 내부의 보수적 지배력을 여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1919년 일본인 회사자본은 조선에 있어서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공장공업은 성장이 저지되어 당시 형성 중에 있던 미약한 조선인 부르주아지는 원료?상품?금융 등의 측면에서 자체의 시장을 박탈당했고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일본독점 자본과 첨예한 모순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농민과 도시 소상공업자들은 끊임없이 파산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조선은 일제 독점자본의 식민지 시장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소경영의 안정화를 보장할 수 있는 조건들을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10년대 일제의 토지약탈과 지세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의 강행으로 농촌사회의 계층 분화가 진전되었다. 농민 가운데서 빈농층이 70%~80%를 점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주-소작 관계에 짓눌린 채로 과중한 육체노동과 궁핍한 생활수준을 감내해야 했다. 극빈 속에서 근근히 생명을 부지한 그들은 농촌에서 쫓겨나서 실업자 혹은 도시에서 열악한 노동자로 전락되기도 하였다. 도시에서는 일자리를 구하는 산업예비군이 넘쳐흘렀고 만주?일본 등지로 떠나는 해외이주민 대열이 줄을 이었다.우리 나라 노동자들은 민족적 차별 아래 가혹한 노동조건과 그 계급적 처지에서 점차 민족적 및 계급적으로 각성하여 1910년대 말에는 상당수의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노동쟁의(勞動爭議)가 발생하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은 1919년 현재 약 20만 명 정도 형성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약 4만 2000명의 공장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2~17년 기간에는 연평균 10건에도 미치지 않던 노동쟁의 건수가 1918년에 들어 50건으로 증가했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84건을 기록했다. 노동쟁의는 일본인 또는 총독부 직영의 대공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노동자들은 노동쟁의 외에 반일시위운동에 적극 진출하고 있었다. 만세시위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1919년 3~5월 시기에 투옥된 8511명 가운데 노동자는 4%에 해당하는 328명이었다. 이것은 당시 전인구 중에서 노동자층이 점하고 있던 비중에 비하면 여타 계급?계층보다 4배 이상 되는 수치이다. 이러한 양상은 도시 지역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는데 예를 들어 서울 지역에서 운동에 참가한 죄로 일제에 의해 기소된 사람들 가운데 노동자는 17%를 점했다. 이것은 3?1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투쟁경험에 의거하여 독자적 정치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3?1운동에서 표출된 광범한 대중의 정치적 진출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경험에 의거한 독자적인 정치의식의 단초를 형성케 했다. 물론 당시에는 민족구성원 대다수가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폭넓게 공유하고 있었고 그에 대신하는 별개의 정치사상이 유포되어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3?1운동에 참가한 대중들은 자신의 정치적 경험 속에서 맹아적 형태로나마 독자적 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민족독립만이 아니라 재산균분?토지분배라는 민중적 이해에 기초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전망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10년대 말 1920년대 초엽 한국사회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양호한 토양이 마련되었고 거기에는 대중의 빈곤, 민족적 차별, 정치적 압박, 광범한 대중의 정치의식의 성장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조선에서 사회주의를 급속히 확산시킨 계기 가운데 하나는 국제정세의 영향이다. 특히 1917년 러시아혁명이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끼친 영향은 다대했다. 신생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은 혁명 후 즉시 「러시아인민 권리선언」을 비롯하여「평화에 관한 선언」,「러시아 및 동양의 모든 근로자에 대한 선언」등을 발표하여 이를 통해 러시아 내 각 민족들 간의 평등, 각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 모든 민족적 특권과 제한의 철폐 등이 약속되었고 이 약속들은 주로 제정러시아 영토 내의 소수민족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시아의 식민지?종속국 각 민족에게도 고무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로부터 식민지?종속국의 민족해방운동은 볼셰비키 혁명정부의 물질적?사상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한국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러시아혁명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은 역사발전의 당연한 결과이며 한국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민족주의 지도자인 박은식(朴殷植)은 자신의 저서인 『조선독립운동지혈사(朝鮮獨立運動之血史)』에서 러시아혁명은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여러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으며 그것은 세계개조의 첫 신호탄이 되었다고 하며 러시아혁명에 대한 찬사를 표명했다.러시아혁명에 대해 특히 희망찬 반응을 보였던 것은 한국의 청년?학생들이었다.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러시아혁명은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에 기초한 신국가를 건설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 상해 지역의 한국인 학생들도 갖고 있었다. 1920년 2월 13일 상해에서 재상해 유일학우구락부 주최로 제1회 공개강연회가 개최되어 ‘볼셰비즘’이란 제목으로 이광수(李光洙)가 강연을 하였다. 그는 혁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볼셰비즘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을 국권 회복 운동일 뿐 아니라 신국가?신사회 건설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이광수의 인식은 상해에 망명한 한국인 청년?학생들 인식의 일단을 드러내주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여부에 상관없이 볼셰비즘과 혁명운동에 지대한 관심과 호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 4월 5일 제2회 강연회에서도 「사회주의에 대하여」가 연제에 올랐다. 강연자 손두환(孫斗煥)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호감을 표시했고 한국독립을 진정으로 돕는 자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뿐이라고 주장했다.「독립신문」도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표시했는데 창간호(1919. 8. 21) 사설을 보면 한국인들이 오등(五等)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신학술과 신사상을 섭취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독립신문」은 신사상의 소개를 자기 사명 가운데 하나로 꼽았는데 사회주의가 배제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도리어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중세대학과 스콜라 철학Ⅰ. 서론중세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에서부터 1453년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여 르네상스 운동 직전까지 1,000년간을 말한다. 지중해 세계에서 통합된 정치세력의 형태는 서로마가 사라진 후 정치적으로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공백기가 왔을 때이고 동시에 문화적으로 서양문화권이 크게 3분되었다. 이 기간 중에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기초를 확립하여 기독교적인 세계관인 학문, 예술, 정치, 사회를 지배하였고, 스콜라철학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내세를 위한 준비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리스의 자유적인 것과 로마의 실제적, 사회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문화가 형성되어 갔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봉건주의가 성립되었다. 또한 이러한 봉건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적 생활을 위한 장원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한 기사제도 그리고 사회의 정신적 안정 및 윤리?도덕적 지표로서 교회제도가 필요했다. 그리고 11세기말에서 약 200여 년에 걸쳐 실시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교황권의 실추와 봉건제도 및 기사계급이 몰락됨에 따라 신흥도시가 발달되고 신흥자본가의 세력은 확대되었으며, 새로운 지식과 세속적인 교육의 필요성이 더해감으로써 대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중에서 중세문화의 기틀로써 중세를 대표하는 중세대학과 스콜라철학에 대해 살펴보겠다.Ⅱ. 본론1. 중세대학중세대학의 출현은 중세 사회의 변화와 의식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대학은 도시를 요람으로 해서 탄생했으며, 유럽의 도시는 10세기말에서부터 서서히 발달하여 11세기초에서부터 12세기에 걸쳐 급성장 하였다. 도시의 발달은 무엇보다 농업분야에서의 변화, 즉 경작지의 확장, 식품종류의 증가, 삼포제 경작의 확산 등으로 인한 인구 증가 특히 상업의 부활에 힘입어 일어났다. 이렇게 성장한 도시에서는 광범위한 문화적 지적수준의 향상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지고 부를 축적하게 된 시민들은 권리의 신장과 부의 확보, 신분 상승을 위한 폭 넓은 지식의 필요성을 승하였다. 특히 교회가 방대한 농지 수익의 일부를 기증함으로써 대학 성립의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었다.중세 시대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 못지 않게 개인의 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나 지적 발달이 이루어 졌다. 이러한 지적 발달은 무엇보다도 교육의 부활로서 나타나고, 특히 12세기에 이르러서 단순한 교육의 부활 이상의 광범위하고도 활발한 지적 운동이 교회의 주도 아래 보다 합리적 의식을 가지고 있던 시민 계층과 궁정 문화에 뒷받침되면서 전개되었다. 로마법과 라틴어, 고전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부활로서 특징 지워지는 12세기 르네상스운동은 중세대학의 창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12세기의 지적 부흥은 과학의 영역에서 가장 돋보인다. 이슬람 세계와 십자군 전쟁 등을 통한 교류 등은 아라비아의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전래를 가져왔다. 이러한 것은 아랍인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 유산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고, 이것은 유럽의 과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 12세기 과학의 부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또한 12세기 르네상스에서의 로마법은 법학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세의 법은 관습법이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원거리 무역 등에서는 보다 고차원적인 법의 필요성이 부각되었고, 그 결과 성문법과 상법, 해양법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더욱 발전하여 보편 타당성의 원리에 기초한 공통법, 즉 로마법의 부활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와 도시 문화의 번성을 반영한 법학의 부흥은 지식과 학문의 위상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과거에 교회와 성직에 의해 독점되었던 학문과 지식을 다른 집단, 즉 법률지식과 문장에 더욱 능한 전문적인 집단에게로 넘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부 이탈리아의 경제적 중심지인 볼로냐에 법학 중심의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성립되게 되었다.이와 같이 학문에 대한 자극이 컸기 때문에 종래의 수도원 학교나 교회학교로는 이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새로운 교육제도가 대두한 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어서 친지들이 거주하지 않는 타지에서 생활의 안전과 상호 부조를 위해 조합을 만들었던 것이다.모든 대학은 세속 군주나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치권을 얻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교수와 학생은 주교로부터 자유로움은 물론, 통상적인 시민의 의무인 병역이나 사법권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늘날의 대학에서 주장되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나 자치는 이러한 중세적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대학의 교과 과정은 그리스 이해의 7교양 학과로 문법, 수사, 논리의 3교과와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4교과로 구성되었다. 3교과를 수료하면 문학사(Bechelor of Arts) 학위를 받았다. 이후 5~6년간의 수업을 더 거쳐 4교과를 마치면 문학석사(Master of Arts) 학위를 받았고, 교사나 행정가로 진출하였다.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전문학부인 법률, 의학, 신학 등을 공부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이 과정은 규칙상 최소한 8년의 기간이 필요하나 보통 14년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신학은 가장 정통성이 있고 이수하기 어려운 학문이었으며, 어떤 다른 학위보다 명망이 높았다.대학에서는 공식어로 라틴어를 사용했으며, 귀족이나 성직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등록을 했다. 초기의 대학은 거의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도서관은 물론 강의실과 책상조차 구비되지 않아 보통 교회의 건물을 이용하여 강의를 받았으며, 아직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손으로 써서 책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책은 매우 귀했으며 값도 아주 비싸 학생들이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해 스스로 필기하며 어렵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학생들은 하루 1~2강좌, 한 강좌당 3시간의 강의를 받았다. 강의 방법은 주로 교수의 강의와 토론에 의존하였다. 교수는 교재를 천천히 읽고 주석을 붙여 설명을 하였고 강의 후 토론과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저녁에는 촛불조차 구하기 어려워 공부하기 힘들어 많은 학생들이 주점으로 몰려들었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먹고 마시며 유흥을 즐겨, 교회의 다. 오늘날 단과 대학을 가리키는 칼리지(college)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부유한 독지가가 기숙사를 설립해 준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런 기숙사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무료 혹은 아주 싼값으로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교사가 함께 생활하면서 학습을 도와주었다. 칼리지 중에 유명한 것은 1258년 파리의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봉이 세운 소르본 대학, 영국의 주교 머튼의 월터가 세운 머튼갈리지 등이 있다.유럽의 대학은 중세 말까지 약 80개나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도 볼로냐 대학은 법학으로, 파리 대학은 신학으로, 살레르노 대학은 의학으로 매우 유명했다. 명성 있는 학자들은 대부분 대학에 소속되어 있었고, 대학 졸업자는 교사, 법률가, 관리, 고위 성직자 등 전문적인 직종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학은 중세 문화의 꽃으로 불렸으며, 자유 정신을 고취시켜 게르만의 침입이래 침체된 중세 문화를 일으키는 기틀로서의 역할을 했다.2. 스콜라철학중세철학이 독창성에서 뒤떨어진 이유는 중세사회가 고대 그리스에 비해 사고의 자유가 없는, 교회의 권위에 압도된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중세학문 가운데 가장 지배적인 것은 신학이었다. 한마디로 신학은 오늘날의 철학을 포함한 것으로 ‘학문의 여왕’이었다. 신학이 발달된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가 기본적 가르침을 통일하고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1세기에 이르러 신학 연구의 새 방법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학자들은 성서 속의 모순을 점차 깨닫게 되면서 종교적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추구하였다.중세 신학을 발전시킨 핵심세력이 대학교수였으므로 신학은 ‘학교(schola)'에서 하는 학문, 즉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란 말을 듣게 되었다. 신학교수들의 대다수는 파리 대학과 관련이 있었고, 이 분야에서 파리 대학은 다른 대학을 능가하였다.스콜라주의의 주목적은 가톨릭 교회의 보편적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교리를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체계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자유로운장 두드러진 것이었다.이러한 철학적 대립은 비잔틴에서 보존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이슬람을 거쳐 그리스도교 사상 속에 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때 그리스도교 이전의 형이상학적 사상이 알려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논리의 인도를 받는 자연 이성의 가치가 인식되었다. 이리하여 논리는 신앙과 조화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초기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앙과 지식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이성의 힘을 부정한 것이 아니며 계시된 진리에 의해 밝혀질 때만이 타당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는 아베로에스를 거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완전한 종합을 이루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그것은 실재에 관한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었다. 여기에 대해 교회 안에서 보편적 개념이 실재이며 감각에 의해 알려진 개체는 실재가 아니라는 실재론과, 참다운 실재는 개체이며 보편적 개념은 개체들에 붙인 공통된 명칭에 불과하다는 명목론이 대립하였다.실재론과 명목론의 두 견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의견차이로 파악될 수 있다. 플라톤은 실재란 등급이 매겨진 여러 ‘이데아’들로 구성되며, 이러한 이데아들 가운데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중요한 것이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어느 특정 대상물은 영원불변한 보편적인 이데아의 본질을 구현할 때만이 비로소 실재한다는 것이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여 개체는 그 자체로서 이미 실재하며 영원불변의 일반성과는 관계없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개별 존재물이 실재하기에 앞서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이데아’가 존재할 수는 없었다.중세 실재론자(realists)에 따르면 보편적 이데아는 ‘실재’(res)이며, 개별명칭이 거기에 붙여지든 말든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명목론자(nominalists)에게는 보편적 이데아와 같은 추상적 관념은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며 실재하지 않는 것이었다.간단히 말해 절대 실재는 개별 존재물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대한 고찰1. 서론2. 본론(1) 배경(당시 시대상)(2) 개혁 세력(신돈, 신진사대부)(3) 개혁 내용3. 결론1. 서론공민왕(恭愍王)은 고려의 31대 왕으로 고려시대 때 원(元)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던 왕이다. 공민왕 이전에도 원의 지배에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있었지만 공민왕 때의 개혁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보면 공민왕의 개혁은 한계를 가지고 있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공민왕의 개혁으로 고려가 원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과연 개혁 정치를 실패로 봐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개혁 정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2. 본론(1) 배경권문세족(權門勢族)들이 강대한 원의 세력과 결탁하고 있는 동안은 이들로 말미암은 폐단들을 개혁하려는 운동은 성공하기가 힘들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던 해(1298)에 사림원(詞林院))의 신진학자들과 더불어 일으킨 개혁운동이나 충목왕(忠穆王) 3년(1347)에 설치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개혁운동이 실패한 것은 그러한 예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이 한족(韓族)인 명(明)의 흥기로 인하여 북방으로 쫓겨가는 원?명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에 의하여 개혁이 어느 정도나마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차이에서 이해될 수 있다.(2) 개혁 세력① 신돈(辛旽)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하고 그를 통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365년 신돈을 왕의 스승으로 삼아 정치에 참여하도록 한 다음 그를 중신으로 정치세력을 재편하였던 것이었다. 먼저 권력에 핵심에 있던 무장들과 권문세족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로써 왕권은 회복되었고 신돈이 왕권을 대행하는 정치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개혁정치가 추진되었다. 이때의 개혁은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는 12세기 때부터 문제가 되어왔는데 공민왕 때 1352년, 1356년 두 차례의 걸쳐 개혁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대토지 소유를 주도하고 있는 권문세족들이 오히려 개혁을 추진함으로서 개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돈에 의해 주도되었던 개혁은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이전의 개혁정치와는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전민추정도감에서는 권문세족이 탈점하고 있던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권문세족에 의해 억지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다시 양인으로 환원시켰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어 사람들이 신돈을 가리켜 성인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족들의 엄청난 반발을 일으키게 하였고 그래서 공민왕과 신돈은 권문세족들과 정치적 세력을 달리하는 신진관료들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에게 주목했다. 신진사대부들은 지방중소지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과거를 통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학문체계인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경제적 기반들도 있었다. 이들은 신돈의 개혁에 동조하고 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개혁정치를 통하여 이들이 독립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신돈의 등장 이후 공민왕과 신돈, 신진사대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개혁정치는 신돈이 제거되면서 중단되었다. 신돈이 제거된 것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첫째, 개혁정치가 진행되면서 신돈이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려 하였다. 이것이 공민왕과의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한 것은 권문세족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떠한 세력기반도 갖지 않아 자신의 개혁의지를 충실히 반영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개혁이 진행되면서 신돈이 점차 자기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공민왕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공민왕18년(1369) 신돈이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고자 하여 사심관 제도의 복구를 주장하자 공민왕이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 그 예이다.둘째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원, 명 교체에 따른 대륙정세의 변동과 그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의 필요성이다. 1368년 명이 건국된 뒤 명과의 외교 관계가 급진전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1370년 공민왕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였다. 이는 곧 신돈의 실각으로 이어져 다음해에 신돈이 유배되고 그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었다. 신돈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가 성장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2)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공민왕 때에 이르러서 중국 내에서 명의 세력이 점차 성장하고 원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공민왕 5년(1356)에 원의 세력을 차단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를 단행했으나 여기서 사대부의 큰 활동은 없었다. 그러나 곧 이어 왕은 14년에 신돈을 등용하여 신진문신 즉, 사대부와의 연결을 짓고 다시금 개혁을 시도하는 등 개혁에 대한 강한 열의를 보여주었고 이와 같은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신진사대부 세력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당시에 두드러진 사대부들이 대다수 성균관(成均館)의 학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교육개혁을 통해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강의하면서 친진(親進)의 문신들이 성균관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속에서 그들이 착실한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고 이 속에서 그들이 착실한 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이다.공민왕 14년의 개혁에 대해 좀 더 상술(詳述)해 보면, 당시의 권문세족이 관권으로 막대한 경제기반을 구축하고 그 농장의 전민을 바탕으로 하여 보다 강력한 세력을 확대시키려 했고 심지어는 대농장주로 화한 사원들과도 연결되어 불교의 세속화 내지는 타락을 심화시켰다. 더구나 왕 5년의 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 왕권을 강화함과 아울러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적인 위치를 확보하려던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무장세력의 대두로 왕권의 약화를 초래한 결과가 되자 권문세족과는 전혀 연계가 없는 신돈을 등용하게 된 것이다. 이에 신돈은 세력기반이 약한 신진사대부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확장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이때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의 진출이 활발해졌고 이것이 그들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3) 개혁 내용공민왕의 개혁은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억압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즉, 공민왕은 원의 연락기관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철폐하고, 기철(奇轍)을 위시한 친원파를 일소하고, 옛 관제를 복구시켰으며, 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무력으로 철폐하고 그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후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동녕부(東寧府;흥경, 興京))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원정치는 원과 친원파의 반발을 사서 김용(金鏞) 등이 공민왕을 해하려는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이 있었고(공민왕 12년), 원은 일방적으로 공민왕을 폐한다고 선언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강경책은 이를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명과 서로 사신을 교환하여 친명정책을 추진하였다.이같이 대외적으로 친명반원정책을 쓰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각종 개혁으로 권문세족의 세력을 억압하려고 하였다. 공민왕은 우선 정방(政房)을 폐지하였다. 무인정권 시대에 최씨의 독재기관의 하나이던 정방은, 무인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왕권을 견제하며, 또 신흥사대부의 진출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인데, 공민왕이 이를 폐지한 것이다. 공민왕은 후일 신돈을 국사(國師)로 임명하고, 또 삼중대광령도첨의(三中大匡領都僉議)란 직을 띠게 하여 국가의 정치를 총재 하게 하였다. 이같이 무명의 승려인 신돈을 중히 쓴 것도, 개혁정치의 실시가 권문세족과는 인연이 없는 인물을 등용해야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이공수(李公遂) 등의 권문세족 출신을 축출하고, 문벌이 한미한 자들을 등용하였다. 또, 국왕에게 청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공민왕 15년), 자신이 그 판사(判事)가 되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하거나 해방하여 주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권문세족들은 맹렬히 반대했다.이에 공민왕과 신돈은 왕권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필요로 하여 신돈과 신진사대부 사이의 정치적인 제휴가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