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 및 교육사 Term Paper우리는 교육철학 및 교육사를 다루면서 지금까지 많은 시대의 교육의 모습, 사상가를 알아보았다. 그 중 서양의 교육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등장했던 것은 단연 고대의 교육인 그리스와 로마의 교육이었다. 우리는 그리스의 교육을 다루면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를 배우게 되었고,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가 후에 일흔의 나이로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변호했는지를 볼 수 있는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이는 물론 소크라테스 자신이 쓴 것은 아니고, 후에 플라톤이 쓴 책인데, 이를 보면서 그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삶 속에 녹아있는 교육의 모습까지도 알 수 있었다.재판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2가지이다. 첫 번째는 아테나가 인정하지 않은 ‘나쁜 신’을 섬긴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죄목으로 서게 된 법정에서 소크라테스는 해명을 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은 표면상으로는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 등이었지만 사실 그를 재판에 걸고 사형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세 사람 이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고소인”들이며 멜레토스 등은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고소인들”을 상대로 해명을 하기 시작한다.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어느 날 델포이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가 하고 신탁을 청했는데, 이에 대한 여사제의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나는 조금도 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셨을까? 신께서 거짓말을 하셨을 리는 없다.’라고 생각하며 숨은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그 날부터 신의 말이 과연 정말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자신보다 지혜롭다고 이름난 이와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이 가장 잘 알만한 문제에 관하여 물어보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가, 시인, 기술자 등등 소문난 현자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들에게 질문을 하는 동안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문제에 대하여 아는 것처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명백해졌다.“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현명해보이고, 더욱이 자기 스스로도 현명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자신은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게 하려고 애썼습니다.”“나는 이사람 보다 현명하다. 알지 못하기에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런 조그만 차이 때문에 그보다 현명해 보이는 것이다.”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매우 간단하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다시 말해, 무지의 지가 곧 소크라테스의 지혜인 것이다. 이는 동양 유학의 이념인 위기지학과 통하는 데가 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도 적용해 볼 수가 있다. 한번 유명세를 타고 나면, 이 분야 저 분야에 대해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이 ‘전문가의 견해’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는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만 가졌을 뿐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결국 이러한 많은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차차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신에게 사명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신은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진정한 지혜는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 즉 무지를 자각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남은 생애를 신께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에게 그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뒷부분에서는 변명 전체를 꿰는 세 가지 핵심 주장이 나온다.1) 사람은 모름지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고 그른지에만 신경을 써야한다.2) 부나 명성, 명예보다는 자신의 영혼을 올바로 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3) 무엇보다 자신의 뛰어남을 기르는데 힘써야 한다.또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그것은 ‘등에론’이다. “크고 혈통도 좋지만 큰 덩치 때문에 게으르고 굼뜬 말에 달라붙어서 잠 못 들게 따끔하게 찔러대는 등에처럼, 아마도 신은 저를 도시에 달라붙게 했겠지요. 그대들 한 사람 한사람을 일깨우고 설득하고 논박하는 일을 하루 종일 어디에서건 하도록 말입니다.” 이 사실 역시 현대사회의 지식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겠다. 지식인이란,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한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여러 분야를 연구하여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지식인은 당연히 미움을 산다. 이러한 비판적 역할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스스로 도맡아 하는 것이다.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판결을 받게 되지만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지”야 말로 신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 생각하며 자신은 단지 신에 대한 의무를 행하였을 뿐이라 말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저항한 것이다.결국 정리해보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때문에 참으로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관련 지식에 대해서 아느냐’에 인간의 성패가 좌지우지 되어있는 현대의 교육의 한계를 알아 볼 수 있는 부분이었으며, 우리의 교육이 아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뿐 아니라 ‘모르는 것’에도 초점이 맞춰져야 함을,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GIS를 이용한 수업 계획★ 관련 교과서 주제: 고등학교 교과서 한국지리(법문사, 이순용 외) V. 여러 지역의 생활 1. 수도권 (2) 다양한 서울의 모습★ 수업 방법: 서울시 GIS포털 시스템사이트에서 도시 정보 지도를 이용하여 다양한 서울의 모습 중 도심 지역의 특성을 직접 파악해 본다. 지도와 사진자료 외에도 GIS를 이용하는 것이 다양한 정보 중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직접 찾아가면서 배울 수 있음을 학습할 수 있다.3. 종로구와 중구일대(시청과 종로를 중심으로 한 도심지역 중심)의 법정동과 행정동에 대하여 지리정보시스템을 이용하여 직접 탐구한다. (교사는 법정동과 행정동의 의미를 설명하고, 서울지역 지도를 이용하여 왜 이 지역은 법정동에 비하여 행정동이 특히 적은 것으로 나타날까를 학습하게 한다.)1. 서울시의 대략적인 지도를 확인한다. (특히, 중구와 종로구 일대)서울지역법정동서울지역행정동2.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지하철이 많이 통과하는 것을 확인한다.4. 업무시설부분을 클릭 하여, 서울지역 중 업무시설이 집중되어있는 지역 중 한군데가 중구와 종로구 일대임을 찾아낸다. 그 다음, 그 지역 일대로 확대하여 업무시설이 밀집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왜 그렇게 많은 업무기능이 밀집되었을지 생각해본다.6. 아파트와 연립주택을 선택하여, 도심 일대에 주거기능이 발달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왜 도심 지역이 주거지로 사용되지 못했을까를 생각해본다.왼쪽*서울지역아파트&연립주택분포7. 참고사항으로 우리가 쓰던 주소체제 개념은 일제강점기 때의 구분 개념임을 설명하고, 최근 사용하게 되는 새주소 사업을 안내한다. 새주소 사업이 최근의 위치정보를 나타내는 데의 장점을 설명한다.
교육과정과 교육평가 과제1. 서론 - 지식중심 교육? 경험 중심 교육?평등교육 정책과 무식한 대학생 [헤럴드경제 2006-09-26][사설] 평등 만능의 교육정책이 무식한 대학생을 양산, 대학 경쟁력이 날로 떨어지고 있다. 상아탑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이 한 교육기관에 의뢰, 15개 대학(경제학과ㆍ수학과ㆍ컴퓨터학과) 신입생 757명을 대상으로 수학 성취수준을 측정한 결과 응답자의 23.9%가 초등학교 6학년 백분율 문제를 틀렸고, 초등학교 4학년 그래프 통계를 해독하지 못한 대학생도 39.1%나 됐다. 한마디로 전공 부문을 따라잡기 불가능할 만큼 대학생 저학력 실태가 심각한 수준인 것이다. (중략) 한국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서울대 신입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대가 신입생의 15% 내외를 정상적인 대학영어ㆍ수학 과목의 수강이 어렵다고 보고 먼저 기초영어ㆍ수학을 수강토록 하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타 대학의 현실이 어떨지 일제 조사라도 해봐야 할 판이다. (이하생략)위의 신문 기사는 요즘 말이 많은 대학생의 기초 학력 저하에 대한 기사이다. 우리 주변에도 ‘대학 수업’을 듣기에 부족한 기초 학력을 보이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7차 교육과정은 6차 교육과정과 달리 선택형 교육과정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반선택과목과 심화선택과목이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7차 교육과정의 문제가 대학 현장에 더욱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수리 나형을 응시하고 공학 및 자연과학대에 들어와서 대학 수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학생도 많다. 게다가 내가 대학을 다니면서 충격을 받았던 것은 경제학과에서 필수인 미분 적분을 수학 1에서는 다루지 않기 때문에 7차 교육과정을 공부한 학생들은 그래프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과학 교양을 배우면서 문과 학생들은 과학자 이름과 간단한 이론조차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점은 우리의 수능 제도와 무관하지 않고 근본적으로는 교육과정의 부정적 영향이다. 따라서 먼저 내가 생각하는 교육과정을 제시하고, 현재의 수능제도가 어떻게 교육과정에 연계되는지 고민해보려고 한다.2. 본론 - (1) 내가 지지하는 교육과정나는 지식 중심 교육과정을 지지한다. 지식 중심 교육과정은 ‘지식을 주된 내용으로 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교육과정’이다. 사실 우리의 학교는 전통적으로 지식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교과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학문적 가치’에 중점을 둔 것이다. 멀리서는 그리스시대의 ‘7자유학과’로 시작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하에서 ‘인문교과’등으로 이어지는 등 지식 중심 교육과정은 계속되다가 20세기 초반에 듀이의 역할로 경험주의가 유행하게 된다.나는 이러한 20세기 초반의 경험중심교육과정 비판을 통해 먼저 접근 하고자 한다. 경험중심 교육과정은 교육에 있어서 인간생활의 제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교육내용을 조직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서 이것만으로 교육내용을 조직한다면, 배운 문제를 해결하고 실제에 적용하는 능력은 늘어날지 모르나 더욱 고차원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는 부족하다. 즉, 흥미와 관심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에 고차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길러지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대학의 탐구방법에 적응하기 어렵다.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육과정에 포함되어야 하는 교과목은 무엇일까? 나는 지식 중심 교육과정을 통하여 이를 기술해 보고자 한다. 사실 현 7차 교육과정 체제로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교육과정은 대부분의 ‘지식’은 다 포함되어있으나 ‘선택가능’한 지식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수능과 연결되어 다음 문항에서 더욱 살펴볼 것이지만, 학교에서 배운다고 해서 그것이 그 과목의 성격대로 운영되지 않아 일부 과목 시간은 다른 ‘대학수학능력시험 과목’을 위해 할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국민공통 교육과정에 있는 과목과 선택과목 중 몇 가지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대학 수학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국어(문학, 독서), 윤리, 사회(공통사회), 역사(국사, 세계사), 지리(한국지리) 수학(인문사회계열은 현 수1체제에서 미분과 적분 포함, 자연계열은 선택과목인 미분과 적분 포함), 과학(공통과학), 영어(독해, 듣기, 회화) 음악, 미술, 체육.국어와 영어는 언어적 사고능력, 윤리, 사회, 역사 및 지리는 민주시민의 자세를 기르고 시간, 공간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과목들이며, 수학과 과학은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서 이성의 세계로 가는 발판이며, 기억력뿐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를 길러줄 수 있는 과목이다. 특히 수학의 중요성은 플라톤의 학원인 아카데메이아에서 ‘기하학을 모르는 자 들어오지 말라’라고 할 정도로 강조되어 합리적 사고를 기르는데 필수적이다. 음악과 체육, 미술은 인간의 감정, 감각 및 신체를 발달시키는 데에 중요한 과목이다.즉, 나는 정신도야론의 입장에서 이 같은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도야론은 정신과 신체의 비유를 통해 이론을 전개하면서, 인간의 신체가 근육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도 몇 가지 능력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본다. 따라서 교육은 이러한 능력을 도야시키는 역할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교과는 물론 대학수학을 위한 ‘내용’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교과를 통해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삼각형을 배우고, 원을 배우는 것은 대학수학을 위한 기초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성의 세계에 한걸음 접근하는 길인 것이다.본론 - (2) 수능시험과 교과과정수능시험에서 포함되는 교과목은 과거 학력고사 시대와는 달리 과목이 많이 줄어들었다. 특히 7차 교육과정에서는 상당한 부분의 선택과목이 생겨나서 교과 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택과목을 중시하는 이러한 교육과정은 학생의 선택을 중시함으로써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정을 표방하고 있어 학생들의 능력과 흥미, 적성을 더욱 고려한 교육과정이 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전통주의적 교육사조에 경험주의 교육 사조를 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필수적인 과목과 선택 가능한 과목으로 분류해볼수도 있다.수능시험에 포함되지 못하는 과목들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서 나는 ‘개설은 되어있으나 선택되지 못하는 과목’도 포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필수포함과목, 선택포함과목, 포함되지 않는 과목의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한다.필수 포함되는 과목은 언어(국어), 수리(국민공통교육과정+수1), 외국어(영어)이다. 물론 응시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대부분의 대학에서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필수라고 분류하였다. 이러한 과목은 우리의 소위 주요과목 ‘국?영?수’를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대표과목이며 시수가 단연 많은 과목으로 교사수도 가장 많아 주요과목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과목들은 수능 과목 + 내신과목 모두 해당되므로 학생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며 사회와 과학과목의 선택화로 중요성이 더욱 가중되었다.선택적으로 포함되는 과목은 사회탐구영역(정치, 경제, 사회문화, 법과사회, 경제지리, 세계지리, 한국지리, 세계사, 국사, 한국근현대사, 윤리)과 과학탐구 영역(물리1?2, 화학1?2, 생물1?2, 지구과학1?2), 직업탐구영역(과목생략), 제2외국어(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 한문), 수학 일부영역(수2, 미분적분, 이산수학, 확률통계)이다. 이러한 과목들은 7차 교육과정 이후로 생긴 가장 큰 변화로 자연계열에서는 사회관련 과목, 인문사회계열은 과학관련 과목을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큰 관심을 모았던 부분은 국사가 필수과목이 아니라 선택과목이 되었다는 점이다.이러한 선택적 포함 과목은 나중에 대학 졸업 후 취직과 관련되어 도움이 될만한 과목(예를 들어 중국어, 일본어), 선택 학생수가 많아 변환표준점수 산출시 유리한 과목(예를 들어 사회문화, 윤리, 한국지리)등으로 몰리는 현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선택되지 못하는 과목들(예를 들어 법과사회, 경제지리, 아랍어, 이산수학)은 학교 현장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개설되어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수업으로 이용되거나 특기적성 교육형식으로 간신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따라서 현재 7차 교육과정의 많은 선택과목은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에 따라서 시기별로 특정 과목이 중요한 과목이 됐다가도 그렇지 않은 과목이 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선호와 적성 등을 고려해 기회를 준 것이 사회 발전을 불균형으로 이끌 수 있는 지적 기반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수능 시험에 포함되지 못한 과목은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국민 공통 기본교육과정에 포함은 되어있으나 수능시험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실과(가정), 음악, 미술, 체육으로 이러한 과목은 학교 급이 올라갈수록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필수로 부여되는 과목들이지만 사실 특정학과 진학을 제외하면 ‘대입’과는 무관한 과목이며 교과의 중요성을 학생들이 거의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고등학교 내 이러한 과목들을 파행적으로 운영하여 예체능 시간 중 1시간을 주요교과에 할애하기도 하며, 학생들에게는 내신을 따기 위한 과목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상당수의 학생들은 이러한 과목들의 ‘실기 중심 수행평가’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수능에 들어가지 않는 도움 되지 않는 과목’으로까지 이해하고 있다.
내가 만난 과학자 Albert Einstein뉴턴의 물리학이 신의 이론이라면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은 악마의 이론?1. 서론 - 왜 아인슈타인을 선택했나?만약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생각하는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상당수가 ‘아인슈타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특히, 과학을 체계적으로 접해보지 않은 나 같은 문과생에게는 더욱 ‘아인슈타인’이 멀기만 한 천재과학자일 뿐이다. 또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천재 과학자는 ‘뉴턴’이라고 말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해 냈다던,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는 미분과 적분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뉴턴은 다가갈 수 없는 또 다른 천재 과학자로 다가온다.과학의 지형도를 수강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비과학’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된 내 자신의 변화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대해 마냥 비난만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에 대해서 쉽게 생각해버린 나의 태도가 수업을 들으면서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과학에 대하여 한 발짝씩 다가가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한 가지 더 배운 점이 있다면, ‘절대적 진리’이며 ‘영원히 보편타당할 것만 같은 법칙’들이 항상 시대가 지나면서 연구하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깨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과학도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 읽었던 토마스 쿤의 저서가 이해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내가 보고서의 주제로 아인슈타인을 생각해 본 것도 이와 멀지는 않다. 뉴턴이 활동하던 시기도 모르고 뉴턴이 이야기한 이론은 모두 맞는다고 생각해버린 나의 생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과학의 지형도 수업에 사용하는 ppt자료를 접하면서이다. ppt를 읽다보니 뉴턴의 이론도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에 주변 공학도들과 자연과학도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들 어려운 이론이라며 자세한 설명은 기피하였고,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 과제의 주제를 생각해보면서 아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들이 존재한다는 것 발견1898 톰슨이 음극선을 수년간 연구한 끝에 그것이 전자의 흐름이라는사실을 밝힘1899 뉴질랜드 출신 영국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방사선에알파선과 베타선의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1900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에너지는 ‘양자’라고 부르는 작은덩어리 단위로 존재한다는 개념 도입19세기 말엽에는 물리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3) 아인슈타인, 그의 생애와 업적을 밝히다.?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울름에서 출생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파울리네 코흐 아인슈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대부분이 상인이거나 기술자들이었고 크게 말해 유태인이었다.?1880년 가족이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 아인슈타인이 한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울름에서 뮌헨으로 이사를 한다. 소년 아인슈타인은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오히려 미숙한 아이였다. 말을 순조롭게 하지 못했으며, 늘 환상에 잠겨있었다.? 1885년 페터스 슐레, 1888 루이트폴트 김나지움 입학 열 살이 되어 들어간 레오폴트 김나지움에서는 험한 독일식 훈육을 끔찍이 싫어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을 알게 된 것은 수학을 통해서고, 전기기술자인 숙부 야코프 아인슈타인도 자극제가 되었다.?1894년 밀라노 이주 아버지의 사업이 다시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1894년에 아인슈타인 가족은 뮌헨을 떠나 밀라노로 옮겨가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김나지움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혼자서 뮌헨에 남았는데, 얼마 안가서 다시 퇴학하고 가족을 찾아갔다.?1895년~1896년 스위스 Aarau 주립학교 그는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연방공과대학에 들어가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김나지움을 중도 퇴학했기 때문에 학력 검정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험 결과, 수학과 물리학은 뛰어난 성적이었는데 어학과 박물학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아인슈타인은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대학 학장의 권유로 아한 사색에 충당할 수가 있었다.? 1903년 학생시절 친구 Mileve Maric와 결혼? 1904년 아들 Hans Albert 출생? 1905년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을 Annalen der Physik에 발표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특수상대론 논문 “On thw Electrodynamics of Moving Bodies" 발표1905년 초에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유명한 월간 학술지 〈물리학 연보, Annalen der Physik〉에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이라는 논문을 냈는데, 이 논문으로 나중에 취리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 해의 〈물리학 연보〉에 4개의 더 중요한※ 브라운 운동 ; 1827년, 영국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1773~1858), 꽃가루를 물 위에 띄우고 현미경으로 그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꽃가루가 매우 무질서하게 움직인다.논문을 발표했고 이는 인간의 우주에 대한 견해를 영구히 바꾸어 버렸다.이중에서 첫 번 째 논문인 를 썼다. 이 논문에서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확립했는데, 이에 따르면 어떤 양의 물질이 갖는 에너지는 그 물질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 즉 E=mc2(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진공 속에서의 빛의 속도)이다. 후에 원자력의 해방의 열쇠가 된 것은, 바로 이 결론이었다.? 1908년~1914년 Berne, Zurich, Prgue 등의 대학에서 강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한동안은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이름도 없는 특허국의 청년 기사의 논문의 가치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플랑크였다. 플랑크는 1907년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그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둘러싸고 토론을 하였고, 1908년에는 질량이 속도와 더불어 변화한다는 상대성 이론으로부터의 결론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학교의 인정을 받게 되어, 1908년에 베를린 대학의 강사가 될 수 있었다. 그 후로 급속히 명성이 대성 이론은 태양의 중력으로 주위의 공간이 굽는다는 것을 예언하였다. 1919년 영국 관측대가 일식 때의 별의 위치를 조사하여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16년 일반상대성 이론의 기초를 물리학 연보에 발표레이저의 기초가 된 방사광의 흡수와 방사에 대해 연구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에 완성. 이 이론은 빛의 진로가 강한 중력의 장 속에서 굽어진다는 것을 예언. 이 예언이 옳은지는, 개기 일식 때에 태양 바로 옆에 보이는 별의 위치를 측정하면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별에서 나오는 빛이 태양의 중력으로 굽어진다면, 별은 평소의 위치에서 어긋나 보일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된 1919년 5월 29일에 그것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의 학자들은 개기일식의 관측대를 파견했다. 그 관측 결과는 신중히 검토 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예언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사실이 발표되자 온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뉴턴의 권위를, 뒤덮어 놓은” 위대한 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일반 사람에게도 급격히 널리 알려지게 되어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고 편지가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1921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고, 이 때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프랑스?미국 영국?남아프리카?일본 등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으며 각지에서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918년 통일장 이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서 평생을 계속함 새로운 연구, 즉 전자기와 중력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이것은 전자로부터 행성까지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작용을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발견하는 첫 단계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단일한 방정식이나 공식으로 물질과 에너지의 보편적 속성들을 연관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나중에 “통일장이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나머지 삶을 차지한 성과 없는 질문으로 판명되었다.?1919년 사촌 Elsa와 결혼 그의 아버지의의 이론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이 전자장을 중력과 똑같이 공간의 성질로서 통일적인 이론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통일장 이론의 연구이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끈기있게 연구를 계속하여, 죽음 직전에는 커다란 자신을 가진 이론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진정한 해결에는 아직 먼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1939년 원자력 에너지의 가능성에 대해 루즈벨트에게 편지2차 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Little Boy'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우라늄의 핵분열이 발견되었다. 이 뉴스를 들은 아인슈타인은, 만약 나치 독일이 이것을 무기로 이용하는 데 성공한다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것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연합국에서도 원자 폭탄의 가능성을 미리 연구해 두는 일이다”라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채택되어 미국의 맨해튼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착실히 진전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전에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에게는 생각 밖의 일이었다. 나치가 원자폭탄을 갖는 것을 막는 것만을 염원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에 깊이 책임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원자무기를 없애기 위하여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를 괴롭힌 핵공포에 자극받아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단지 의도만 해서는 안 되고, 세계 안전에 필요한 속박된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적극적인 열성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날로 격심해져 가는 핵무기 경쟁을 우려하고, 아인슈타인이 죽음의 직전에 영국의 철학자 러셀과 의논해서 발표한 성명에는 세계 각국의 저명한 과학자 11명이 서명했으며, 전쟁 회피를 위하여 각국의 과학자가 의견을 교환하는 모임인 의 계기가 되었다.그의 72주년 생일 기념사진. 왜 이런 포즈로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1940년 미국 시민권 획득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항상 유럽인으로 생각했다.? 1952년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헌법 Term-paper 목 차Ⅰ. 서론Ⅱ. 본론㈎ 각 공화국의 정치적 특색과 개정의 배경, 내용1. 제 1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1) 제헌 헌법(2) 제 1차 헌법 개정(1952.7.4 발췌 개헌)(3) 제 2차 헌법 개정(1954.11.27 사사오입 개헌)2. 제 2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1) 제 3차 헌법 개정(1960.6.15)(2) 제 4차 헌법 개정(1960.11.29)3. 제 3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1) 제 5차 헌법 개정(1962.12.17)(2) 제 6차 헌법 개정(1969.10.21 3선 개헌)4. 제 4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1) 제 7차 헌법 개정(1972.12.27 유신 헌법)5. 제 5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1) 제 8차 헌법 개정(1980.10.27)6. 제 6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1) 제 9차 헌법 개정(1987.10.27)㈏ 대한민국 헌정사와 헌법 비판 및 현재의 헌법 개정 논의에 대하여1. 대한민국 헌정사와 헌법 비판2. 현재 헌법 개정 논의에 관하여Ⅲ. 결론Ⅰ. 서론우리나라 헌법은 50년이 조금 넘는 동안 9차례 개정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개정을 거친 편이며, 우리의 헌법 개정은 정치적 변동과 큰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안정적이어야 하는 정치제도 및 선거제도는 몇 회에 의해 개정되어, 우리의 헌법 개정은 이를 위한 헌법 개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한 나라의 최고 규범으로서 헌법은 사실상 그 시대의 이념 및 정치제도, 사상 등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헌법은 다른 법률과 달리 국가를 구성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수업을 통해 다루었던 일반적인 헌법의 제정 권력은 헌법 질서를 시원적으로 창조하는 힘으로 다른 상위의 법에 의해 법적 효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는 근원적인 권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은 불가피 하기 때문에 헌법 개정 권력의 주체들은 헌법에 따라 헌법 개정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 헌법은 9차정하여 체계의 정당성이 상실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다.(3) 제 2차 헌법 개정 (1954.11.27 사사오입 개헌)1954년 5월 20일 선거에 의하여 자유당이 원내 절대다수를 차지하자(제 3대 국회의원) 이승만 정권은 이대통령의 3선을 가능하게 하기위한 개헌안을 1954년 9월 8일에 제출했다. 1954년 11월 27일 민의원에서 표결한 결과 재적의원 203명중 가 135, 부 60, 기권 7, 결석 1로서 표결결과 ⅔에서 1표가 부족하게 되었으며 국회의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에서는 29일에 사사오입이라는 수학적 계산을 도입하여 가결로 반복결의 하였다.1) 주요 개정 내용▶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 주권 제약 또는 영토 변경 시 국민 투표제 도입▶ 헌법 개정의 국민 발안제 (50만 명)와 헌법 개정 한계 명시(민주 공화국, 국민 주권, 주권 제한 및 영토 변경의 국민 투표)▶ 국무총리제 폐지, 국무원 연대책임제 폐지▶ 자유 시장 경제체제 도입▶ 군사 재판에 헌법상 지위 부여▶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의 지위 승계2) 문제점부결선언사항을 가결로 번복했다는 점, 4사 5입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지만 가결되었다는 것은 위헌이며,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2. 제 2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 [3차개정 - 4차 개정](1) 제 3차 헌법 개정 (1960.6.15)1960년 4월 19일에는 학생들이 3월 15일에 있던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데모를 했는데, 정부의 발포로 사태는 악화되고, 혁명사태로 진전하였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학생들의 데모는 그치지 않아 4월 24일에는 이승만 박사가 자유당총재를 사임하고, 이기붕 씨는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위는 교수들의 참여와 더불어 더욱 진행되었으며, 끝내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대통령 사임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으며 5월 2일에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국회는 곧 내각책임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숙원이었던 내각책임제는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법상에 규정된 헌법재판소도 구성해 보지도 못하였고, 대법원장 선거를 며칠 앞두고 5?16에 의하여 제 2공화국은 종말을 고하고야 말았다. 이들 군사혁명정부는 6개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②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더욱 공고히 한다.③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④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⑤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⑥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그러나 포고령과 계엄령으로 통치하더니 6월 6일에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공포했다. 군사혁명정권은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기 위한 과감한 투쟁을 벌여 부정선거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하고, 이들에 대하여 혁명재판으로 엄한 처벌을 하고, 기아와 빈곤에서 국민을 해방하기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착수하였다. 1961년 6월 9일에는 대법관을 전원 해임하였으며, 7월 3일에는 장도영 장군을 ‘반혁명 음모죄’로 체포하여 최고회의의장에서 해임되고, 박정희가 의장에 취임하였다.비상조치법의 제정으로 제 2 공화국 헌법은 파괴되었고, 정부는 총사퇴하였으며, 국회는 해산되고, 헌법재판소는 기능 정지되는 등 일대변혁이 일어났다. 제2공화국 헌법은 비상조치법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정이양을 위해서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이 시급하였다.완화하는 개헌안을 1969년 8월 7일 국회에 제출하였다. 계속되는 여야간의 대립 끝에 9월 14일 여당 단독으로 심야국회에서 처리되었으며, 공고기간이 끝난 뒤 10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가결되었다.1) 내용▶ 대통령의 연임을 3기로 한정▶ 대통령의 탄핵소추 발의와 의결 정족수 가중(요건을 엄격히 함)▶ 국회의원의 국무위원직 겸직 허용(제 30조 제1항을 개정하여 의원은 국무총리 또는국무위원의 직, 다른 법률로 허용된 직, 국회의 의결로 그 임기 중 행정각부처의 위원,기타 이에 준하는 직을 겸임하는 경우에는 겸직을 할 수 있도록 하였음)▶ 국회의원 정수 확대 (150인 이상 250인 이하)4. 제 4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 [7차개정]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3월의 주한 미군 1개 사단의 철수와 관련해 위기감을 고조시키면서 이를 유신선포 최대의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72년 10월 17일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서 남북대화의 적극적인 전개와 주변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체제개혁을 단행하기 위하여 약 2개월간의 헌법 일부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언하였다. 비상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①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중지시키며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② 국회의 권한은 비상 국무회의가 수행, 비상 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상의국무회의가 수행③ 비상 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붙임④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헌법질서 정당화(1) 제 7차 헌법 개정 (1972.12.27 유신헌법)비상계엄의 선포에 따라 대학에는 휴학조치가 취해지고 언론은 검열을 받게 되었다. 또 중앙대책협의회가 구성되었으며, 비상 국무회의가 열려 입법 작업과 헌법개정의 작업을 담당하였다. 10월 23일의 제 1 차 [비상국무회의법]이 통과되었고, [국민투표에 관한 특별법]과 선거관리위원회에 관한 특별법]이 의체국민회의는 폐지되고, 그 대의원의 임기도 종료되었다(부칙 제4조). 국회의 권한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대행하게 되어 국가보위입법회를 각계의 대표자로 구성하여 이날부터 입법활동을 개시하였다(부칙 제6조). 1981년 2월에는 대통령선거인단 선거가 행하여졌고, 2월 25일에는 대통령선거가 시행되어 선출된 전두환대통령의 임기 7년이 시작되었다.1) 내용▶ 기본권 신설행복 추구권, 연좌제 금지, 사생활 비밀과 자유의 불가침, 환경권, 적정 임금조항,무죄 추정의 원칙▶ 기본권 부활 구속적부심사제, 언론, 출판의 사회적 책임▶ 대 통 령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간선으로 7년 단임 선출긴급조치권을 폐지하고 비상 조치권 규정전직대통령의 예우 조항국정자문회의, 평화통일자문회의대통령 임기 조항의 개정 변경 금지▶ 국 회 국정조사권 신설, 정당 보조금 지급▶ 법 원 대법원장의 일반법관 임명권, 징계에 의한 법관 파면 삭제, 행정심판 근거 마련▶ 경 제 독과점 규제와 조정, 소비자 보호, 국가 표준제도, 중소기업 육성보호▶ 전통문화의 창달6. 제 6공화국 헌법의 내용과 개정 [9차개정](1) 제 9차 헌법 개정 (1987.10.27)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노태우 대통령은 새로운 대통령으로서 자리 매김을 시작하였으며 보통사람이라는 말을 내세워 국민과 친숙한 정부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곧 헌법개정을 단행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는 직선제개헌이 선거구호였으나 여당이 개헌 요구에 응하지 않다가 직선제 개헌을 하게 되었다. 1987년 6월 국민대행진을 계기로 민주화의 요구로 인한 6.29선언을 기초로 여야합의로 된 최초의 헌법이 제6공화국 헌법이다. 1987년 9월 18일에는 직선제 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고, 10월 12일에는 국회에서 의결, 10월 27일에는 국민투표로써 확정되었다. 10월 29일에 공포되었으나 시행은 1988년 2월 25일부터 하게 되었다. 다만, 이 헌법을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법률의 제정과 개정, 선거에 대한 준비는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