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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공적연금제도
    미국의 공적연금제도는 크게 일반 근로자와 자영자(연방공무원, 군인, 일부 지방공무원 포함)를 위한 연방사회보장연금제도(OASDI), 철도직원퇴직제도, 주·지방공무원 퇴직연금제도 등으로 구분됩니다. OASDI를 제외한 다른 공적연금제도는 직종별 제도로서 그 규모가 캘리포니아 등의 일부 주정부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OASDI는 가장 규모가 큰 연방단위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으로서 미국 사회보장제도(Social Security)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미국은 공적연금 외의 사회보장제도로서 실업보험, 산재보험 등이 있지만 연방정부 차원이 아닌 개별 기업 혹은 지방정부의 선택에 의해 제공되고 있으며 공적 의료보험체계가 도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OASDI는 사회보장제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정도로 미국 사회보장에서 있어 큰 의미와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OASDI는 1935년 도입 이후 현재까지 큰 틀에서의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어 오고 있지만 최근 약 7,400만 명의 베이비 붐 세대의 연금수급 시점이 다가오면서 제도에 대한 위기론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01년 부시행정부는 제도의 일부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세 종류의 제도개혁안이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현재 상당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구요.1) 연혁우선 OASDI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935년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실시한 이후, 1939년에 퇴직노동자의 부양가족을 위한 가급연금 및 유족연금을 도입했습니다. 또 1956년에는 장애연금을, 1958년에는 장애근로자의 부양가족·유족을 위한 연금을 추가하였습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라 자동으로 급여를 연동하는 방식을 도입했고, 1983년부터는 연금급여의 물가연동방식 조정을 통해 급여를 인하하고 연금수급개시연령을 상향조정하는 한편 연방공무원 및 일부 지방공무원 등에게까지 OASDI 적용을 확대하게 됩니다.2) 적용대상OASDI는 사회보장세(Social Securty Tax) 납부를 전제로 수급권을 획득하는 보험제도이기 때문에, 일정한 소득이 있는 피용자와 자영자가 실질적인 가입대상이 됩니다. 사회보장세는 2004년 기준 피용자의 경우 연 $3,100 이상, 그리고 자영소득은 연간 순소득 $400 이상에 부과된다. 그리고 1984년 이후에 임용된 연방정부 공무원 및 의회직원, 연방의원, 연방재판소 판사 등을 당연 적용대상으로 하고 있고, 독자적인 퇴직연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주 및 지방정부의 공무원은 당해 주 및 지방정부와 연방정부간 합의에 따라 OASDI에 임의가입이 가능합니다.OASDI의 가입규모는 1940년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58%였으나 차츰 차츰 적용대상인구가 광범위해지면서 1970년에는 77%로 증가하였고, 2003년 현재 가입의무 연령인 20세 이상 인구의 88%가 가입되어 있습니다. 취업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95%가 가입되어 있으며 나머지 5%는 자영소득 $400 이하의 저소득자, 농장 등의 임시근로자 등입니다.3) 재원OASDI는 기본적으로 부과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당해년에 수급권자에게 지급되는 연금을 당해연도의 보험료수입금으로 충당하지만, 1983년 사회보장법 개정에서 고소득 연금수급자의 경우 사회보장 연금액의 절반에 소득세를 부과하여 OASDI신탁기금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사회보장세는 OASDI 뿐만 아니라 Medicare(연금수급자 의료보험제도)를 위한 재원으로도 활용되는데, 연금부분에 대한 보험료율은 피용자·사용자는 2004년 기준으로 연 소득 $87,900을 상한으로 하여 소득의 6.2%를 각각 부담하고, 자영자는 피용자와 동일 연 소득 상한으로 하여 12.4%전부를 본인이 부담합니다. 보험료의 징수는 국세청에 의해 이루어지고 별도의 국고지원은 없는 상태입니다.4) 연금급여OASDI는 기본적으로 수급권자에게 해당 사유 발생 시 일정 수급요건을 충족한 자에게 노령연금, 장애연금, 유족연금 등을 지급합니다. 노령연금, 장애연금, 유족연금은 가급연금이 지급되어 피부양 지위(배우자, 자녀, 부모 등)와 수에 따라 연금액이 달라집니다. 노령연금은 일정액 이상의 근로소득이 있고, 최소한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부하여야 지급되고, 장애연금은 완전한 가입자격을 갖춘 자가 1년 이상 지속되거나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애로 인해 실질적인 소득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경우 지급됩니다. 유족연금은 연금수급권자가 사망한 경우, 또는 완전 가입자격을 취득한 자가 사망한 경우 그 유족 즉, 배우자, 이혼한 배우자, 미혼의 유자녀, 62세 이상의 피부양 부모에게 지급됩니다.
    사회과학| 2010.04.19| 3페이지| 1,000원| 조회(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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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와 4복음서
    예수와 4복음서를 읽고서..◎ 지은이 : 존 드레인(John Drane) 스코틀란드의 스털링 대학교(Stirling University) 종교학과 교수. 본서의 자매서인 ‘바울’(Paul)은 여러 판을 거듭하였고종교계과 교육계에서 격찬을 받았다.◎ 제 목 : 예수와 4복음서(Jesus and the four Gospel)◎ 역 자 : 이중수 (도서출판 두란노 1984)◎ pp : 186◎ 6500이 책은 스코틀랜드의 스털링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인 존 드레인 박사에 의해 쓰여졌다. 존 드레인 박사는 신학적이면서도 신약의 증거에 충실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이 책을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들이 철저하고 정보가 확실하며 넓은 지식으로 쓰여져서 처음에 난 이 책의 지은이가 넌크리스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5페이지 두 번째 단락에 보면 유대인들의 경전을 ‘크리스쳔들이 부르는 구약성서’라고 정의하고 있다.이 책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소개’에 나온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 책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피고 나서 그의 가르침 중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다루었고, 마지막에 가서 복음서 자체를 논하였다. ‘ 예에 대한 그 말을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결국 이 책은 예수는 실존인물이며 그의 모든 말은 진리이며 복음서는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의 주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이다. 이 장에서는 예수의 세계, 예수의 탄생과 초년기, 예수는 누구였을까?, 예수는 왜 죽었는가?, 예수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2부의 주제는 ‘하나님의 새 사회’이다. 새 사회의 본질, 새 사회의 모습, 새 사회의 능력, 하나님의 실천적 새 사회 등을 다루면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내용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난해하고 어려웠던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3부의 주제는 ‘예수를 아는 일’이다. 복음서란 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직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게 된다. 그리고 40일동안 금식을 하고 그 후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시험은 돌이 떡이 되게 하는 시험이었다. 이는 경제적 수단을 통해 새 사회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었다. 구약에서 그린 새 사회는 굶주린 자가 배불리 먹고 만민의 필요가 충족되는 사회였다. 마귀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예수가 물질적 충족이 실현되는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가 40일 금식으로 인해 배가 고팠기 때문에 마귀가 그런 시험을 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사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한다. 그는 물질적 충족이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가 아님을 간파하였고 자기 사역에서 하나님의 강조점을 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였다.두 번째 시험은 자신을 성전 탑위에서 복잡한 안뜰로 내려던져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특징을 이용한 것이기도 하며 또 성경에 나타난 예언들을 이용한 것이기도 하다. 메시아가 성전에서 극적으로 홀연히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이 실제로 구약에 있으며 또 시편 91편에 하나님이 시험을 받는 자를 보호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마귀는 성경에도 능통했다. 이 성경 말씀을 교묘히 이용하여 예수를 시험한 것이다. 예수는 이번에도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친다. 이를 통해 예수가 구원자이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기적의 능력을 보이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세 번째 시험은 정치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엶아한 메시아는 결국 정치적 메시아였다. 그 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 세대가 도래하는 자기들이 만국을 다스린다고 의례 믿었기 때문에 예수는 열국을 지배할 수 있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다스린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마귀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그때 당시는 내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현관 문을 닫고 말았지만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주 당당하게 말했을 것이다. 좀더 일찍 이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다.예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정치적 메시아를 거절하였다. 첫째는 좀전에 여호와의 증인의 교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마귀도 예수와 주권을 나누어 갖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마귀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권적 주는 오직 하나님 뿐이다. 마귀의 능력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궁극적으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 것은 절대 안될 말이다. 두 번째의 제안은 로마제국처럼 권위와 영광으로 만국을 통치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예수는 이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마귀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 세 번째 시험은 가장 강렬하고 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단호하고 결정적인 말로 거절하였다.동정녀 탄생의 아이디어는 다른 곳에서 빌려온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신들이 인간 여성들과 동거하여 자녀를 낳는다는 그리스나 동양 신화에서 기인되었다고 더러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당성이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탕한 이야기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하등 관련이 없다. 그 분위기도 전혀 다르며 그것이 의도하는 바도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이 둘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예수는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저자는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인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종이 그것이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4복음서에서 담고 있는 주제의식과 일치한다.예수의 죽음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예수는 투쟁을 위해 죽었다. 복음서는 예수의 전 생애와 사역을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하나의 투쟁으로 그리 우리의 모범이 되기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었다는 말이다. 이는 자기 목숨을 선한 목적을 위해 희생적으로 던진 순교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셋째, 예수는 희생으로서 죽으셨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으며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흠없고 저 없는 어린양 간다’고 묘사하였다. 그렇다면 어린 양이란 무엇인가? 먼저 그 의미는 구약에서 나타난 속죄제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하려는 일은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체험에 끼친 영향처럼 그들의 삶에 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환기시켰다. 그래서 신약이 예수의 죽음을 어린 양이 희생되었다는 용어로 표현했을 때 그 뒤에는 속죄제의 어린 양과 유월절 양의 두 가지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질문, 희생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에서 희생 의식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있는 상징적인 수단이었다 바로 이것이 신약에서 예수의 죽음을 희생으로 표현한 의미이다. 크리스챤들은 예수 안에서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넷째, 예수는 대속으로서 죽으셨다. 예수는 자신이 대속물 혹은 몸값이 되려고 세상에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예수가 풀어준 사람은 참 자유를 받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 바울의 말을 통해 이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예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예수가 희생 제물이 되어 죽었다거나 몸 값을 치루었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그가 우리 대신 죽었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우리 대신 해주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예수의 부활에 관행구를 이룬다. 그런데 문맥상 여인들의 행위는 모순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전에 부어졌던 기름부음이 가지는 메시아 적인 개념 때문에 여인들의 기음부음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마태복음에 나오는 부활마태는 기본적으로 마가복음의 윤곽을 따르지만 그는 상당한 분량을 자기 자신의 자료로 추가하고 있는데, 그 자료는 주로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들과 갈릴리에 예수가 나타나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가는 두 가지 대비되는 장면을 사용하여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에 내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모든 시도들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했음을 증거 한다.(3)누가복음에 나오는 부활누가는 불신을 무덤이야기에서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 이야기에서 부활한 주님이 직접 출현함으로 의심을 극복하는 장면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이다. 이 모티브를 더 강조하기 위하여 누가는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간 이야기를 전승에서 추가해서 삽입한다.(4)요한복음에 나오는 부활공관복음에서 부활은 예수의 생애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삶을 신원 해 주고 높인 사건이며,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부활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와 반대 방향을 취한다. 요한의 복음서 전체는 부활 이후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부활이 예수가 영광을 비로소 얻는 때이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은 예수의 생애 전체와 사역의 배경을 이룬다.부활증거는 제자들이 십자가 처형으로 스승을 잃고 절망과 환멸감에 뒤덮여 시름과 실심의 나락을 헤메다가 불과 7주만에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오히려 용기와 감격에 찬 힘있는 증인들로 돌변되어 줄기차게 자라가는 교회의 씨알이 되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증거 내용의 핵심은 예수가 살아나서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극적인 변화도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한 까닭이라고 주저없이 말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이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굳게 확신하였보겠다.
    독후감/창작| 2010.04.19| 8페이지| 1,000원| 조회(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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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고분벽화와 서양의 도시벽화 비교 평가A+최고예요
    고구려 고분벽화와 서양의 도시벽화Ⅰ. 머리말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 뿐 아니라 동아시아 주요 세력들의 3~7세기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더없이 중요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구려인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당대의 역사 자료인 동시에 동서아시아를 아우르는 넓은 범위의 문화교류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자료로서의 가치 때문이다.또한 장의미술의 산물인 까닭에 고분벽화는 당대의 생활상, 문화상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관념세계까지 함께 보여준다. 고분벽화는 당대의 내세관, 우주관, 세계관이 형상화된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고대 서양의 도시벽화에서도 그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고대도시 폼페이의 벽화에 대해 조사하였다. 폼페이의 도시 벽화에서는 그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 탐구해 보고자 한다. 더불어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서양 폼페이의 도시벽화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어떤 점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사후 세계의 창조-고구려의 고분벽화1. 고분벽화가 생겨난 원인초기 고구려인은 죽은 후에 조상들의 세계로 되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죽은 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데려다 주는 사자(使者)가 필요한데, 말과 개가 그러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저 세상으로 가면 그곳에서도 현세의 삶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한자로는 ‘계세관(繼世觀)’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에 많은 고분 벽화에 생전의 생활모습을 그리고, 무덤을 마치 죽은 이의 집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등장함에 따라 사후 세계에 대한 고구려인의 생각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2. 전개과정1)제1기: 영화로운 삶의 재현3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출현하는 초기 고분벽화의 일반적인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벽화고분은 무덤칸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이 죽은 자 생전의 저택구조를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드러내도록 서로 맞물리는 경우가간, 혹은 수직적 내세공간으로 상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생활풍속은 죽은 자 생전의 사적 생활 가운데 기념할만한 것과 사적 생활의 풍요로움을 무덤 안에 그림으로써 내세에도 이와 같은 삶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벽화주제이다. 때문에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에서는 무덤주인이 홀로, 혹은 부인과 함께 좌정한 채 남녀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 대행열에 둘러싸여 출행하는 장면, 산야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연회를 베풀고 가무와 놀이를 즐기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온다. 벽화 속의 인물들은 흔히 신분과 계급 정도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몇 배, 혹은 몇 분의 1 크기로 그려지며, 모자와 머리모양, 입은 옷의 무늬와 빛깔의 다양성 정도, 소매나 가랑이의 너비와 길이 등이 다르게 묘사된다.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평양?안악지역의 고분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묵서(墨書)로 쓰인 명문(銘文)이 남아 있는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고분을 들 수 있다. 국내(國內, 현재의 중국 길림성 집안)지역의 벽화고분으로는 각저총(角抵塚), 무용총(舞踊塚)이 잘 알려졌다.2)제2기: 복잡해진 하늘세계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로 동북아시아의 지배자 고구려가 내륙아시아의 패자 유연(柔然), 중국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등과 함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4대 강국의 하나로 군림하던 시대이다. 이 시기 고구려의 외방이나 두방무덤에는 생활풍속과 사신, 혹은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그림, 장식무늬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유형의 그림들이 그려진다. 사신이 무덤칸 안에 그려질 때에는 방위나 방향에 맞추어 좌(左[東])청룡, 우(右[西])백호, 전(前[南])주작, 후(後[北])현무의 순서로 그려진다. 사신은 무덤자리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사신 형상의 지세인 사세(四勢)에 해당되지 않거나 최선의 자리가 아닐 경우, 이를 대신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생활풍속과 장식무늬, 혹은 장식무늬가 벽화주제인 무덤은 427년의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 북방의 정치?문화중 생활풍속계열 무덤에서는 생활풍속과 사신(四神)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제2기에 속하는 평양?안악지역의 벽화고분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쌍영총, 수산리벽화분, 덕화리1호분 등이다.3)제3기: 보호받는 쉼터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후기 고분벽화는 사신이 중심주제로 택해지며, 외방무덤에 그려진다. 평양과 안악지역의 말기 벽화고분으로 대표적인 것은 진파리1호분, 진파리4호분, 내리1호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이며, 집안지역의 벽화고분으로는 통구사신총, 오회분4호묘, 오회분5호묘를 꼽을 수 있다. 이 시기 고분벽화의 사신은 널방의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사실상 유일한 제재로 단순히 하늘별자리가 형상화된 방위신 정도가 아닌 죽은 자의 세계를 지켜주는 우주적 수호신이다.두 고분벽화의 천장고임에는 해와 달, 별자리 외에 해신과 달신을 비롯해 불의 신, 농사의 신, 대장장이 신, 수레바퀴의 신, 숫돌의 신 등 여러 종류의 문명신(文明神)과 악기를 다루는 천인(天人)들이 등장한다. 고구려 특유의 힘과 긴장감을 담은 자세로 해와 달을 받쳐들고 있는 해신, 달신 등은 평양지역의 고분벽화에는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시기 중국 남북조의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3. 고분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인의 생사관고구려 무덤 벽화의 주제는 크게 구분하여 생활풍속에서 사신으로 넘어갔다고 본다. 이는 중국 무덤과 벽화의 주제 변화 양상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고, 고구려의 독특한 고안으로 보인다. 이러한 무덤 벽화의 변화는 고구려인의 생사관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대행렬 장면이나 사냥 장면, 연회 장면, 기타 생활 모습 등을 제재로 하는 생활풍속계 벽화를 무덤에 그리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 가는 세계도 현세와 유사한 신분 제도 및 사회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죽은 자의 신분, 지위, 생활방식이 내세에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하여 생전의 부귀와 영화가 내세에도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 생활풍속계 고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생겨난 결과이다.사신도가 무덤 벽화의 주요주제가 된 것은 현세와 내세를 분리시킨 내세에 대한 진전된 관념의 결과이다. 내세는 현세와는 다른 무언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으로 가는 인간의 사후 존재는 현세의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재산의 규제에서 보다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생각이다. 이럴 때 내세는 현실적 감각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의해 표현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현실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아니라 정신적인 조건을 표현하는 추상적 기호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존재가 내세를 표현하는 대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생활풍속도가 두방무덤에서 주로 그려졌다면 사신도가 외방무덤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던 경향도 내세에 대한 관심과 그 집중도를 말해준다. 무덤 전체를 내세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이렇게 내세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켜 가는 것은 보편적 생사관의 진전에 따른 결과일 수 있으나, 한편 고구려의 당시 상황과도 연결될 수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관념이 현실 세계의 경험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따로 성숙되고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6세기 고구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이 쇠퇴하고 귀족간의 갈등이 거듭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은 귀족들에게 현세 삶의 고통을 맛보게 해 주었을 것이다. 자신이 누리는 이 삶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인식은 현실의 인간세계 삶 전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현세의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성공의 덧없음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현세의 부정적인 현세의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찾게 하였고, 영원을 갈구하는 자세는 이승의 생활이 아닌 내세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이 그들의 생사관의 방향을 변화시켰다. 현세의 물질적, 사회적 가치를 과시하고 그것이 내세의 삶에까지 영속되기를 바랐던 생사관이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의 삶에 가치를 두는 쪽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사관의 변화는 그들의 무덤 장식에 반영되었다. 무덤 안에는 현세적 가치보다는 내세에서의 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불교 세계관이 도처에 함께 등장하지만 현세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는 고구려인의 태도에서 한국인의 원형적인 종교심성을 읽을 수 있다. 벽화의 일상생활 표현에서 불교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사후세계를 지배하는 관념으로는 자리를 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곧 벽화 제작시기가 불교 도입 이후지만, 이 사후 관념 세계는 불교의 극락과는 좀 다른 세계로 평가한다. 대신 고구려인이 꿈꾸는 이상향의 이미지는 복합적이긴 하지만 주로 仙家 분위기가 농후하다. 오회분 4호묘에서는 선인이 연꽃과 함께 등장하고 있듯이 불교 세계관과 선가 세계관이 함께 융합된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고구려에서 僧朗에 의해 空사상을 선양하는 三論宗이 발달한 것은 노장사상과의 교섭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Ⅲ. 현실세계의 풍요와 여유-서양의 도시벽화1. 폼페이-그 곳은 어떤 곳인가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灣)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이다. 지금은 내륙(內陸)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항구도시였다.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帝政)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 발굴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 후 동맹시전쟁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化)하였다.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당시의 분화상황은 소(小)플리니우스가 실감 있게 전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財寶)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다.
    교육학| 2010.04.18| 7페이지| 1,0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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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이혼제도
    고려시대의 이혼제도목 차Ⅰ. 서 론 ????????????????????? 1Ⅱ. 본 론 ????????????????????? 21. 이혼의 용어 ?????????????????? 22. 이혼의 유형과 사례 ????????????? 33. 이혼의 절차 ?????????????????? 44. 이혼 이후의 생활 ??????????????? 5Ⅲ. 결 론 ????????????????????? 6Ⅳ. 부 록 ????????????????????? 7Ⅴ. 참 고 문 헌 ???????????????? 8Ⅰ. 서 론이혼이란 결혼에 의한 부부관계가 협의나 재판을 통해 법적으로 종결됨으로써 두 사람이 각자 독신으로 돌아가는 상황으로 전통적인 가족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가족 붕괴의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현재 4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가 중 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현재 결혼하는 3쌍 부부 중 1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현 실태는 단순한 수치상으로 이해하기 힘들 수 있으나, TV 등 여러 매체를 통하여 연예인들의 이혼, 주변의 이혼 자녀들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이혼이 급증한 만큼, 오늘날의 이혼의 종류와 원인은 상당히 많다. 남녀 쌍방의 협의에 의한 이혼 뿐 아니라, 배우자에게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악의로 유기한 때,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등 여러 법 조항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이혼제도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유교 가치관과 남녀차별 의식을 벗어나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누구나 이혼을 요구 할 수 있다.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조선시대는 남달리 성리학 이념에 따른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여 여성의 지위가 낮았으며,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보통 혼인제도에서 서류부가혼제와 재혼을 근거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하였으며 이후 계속적인 보완을 행하고 있었으나, 고려율이 현존하지 않고 고려시대의 법률이 일부 전해오는 『고려사』 형법지에는 이혼에 대한 규정이 별도로 명시되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시대 사료들을 보면 이혼에 대한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어 용어와 그 모습의 대강을 추정해 볼 수 있다.고려시대에는 이혼을 의미하는 용어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리(離)나 절(絶)은 혼인관계를 끊는다는 일반적인 이혼의 의미였다. 출(黜)은 처를 내친다는 의미였고 기(棄)는 처를 버린다는 의미였다. 또한 처첩이 일정한 이혼절차를 밟지 않고 일방적으로 도망하여 혼인관계를 파기했을 때 거(去)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離나 絶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혼과 黜이나 棄로 나타나는 처를 내치는 것, 그리고 去로 표현되는 처가 도망가는 것의 세 가지 형태의 이혼이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처의 도망은 이혼이라기보다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실제 이혼이라면 혼인 관계가 끊어지는 일반적인 이혼과 처를 내쫓는 것의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혼인관계를 끊거나 처를 내쫓는게 가능했을까. 『고려사』는 이에 대해 어떠한 해답도 주지 못한다.) 이를 해명하는 방법은 고려시대 사료에서 보이는 모든 이혼 사례를 뽑아 유형화?계열화시켜 결론을 도출하는 것뿐일 것이다.2. 이혼의 유형특히 기처(棄妻)에 대한 사료가 많은데 기처란 처를 버리는 것으로서 처가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한다. 기처란 용어에서 고려시대 이혼이 남성위주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표 1》에 의하면 오늘날과 같은 부부의 합의에 의한 합의이혼의 예는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에 의한 기처임을 알 수 있다.이러한 기처의 원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가-1. 항이 전에 대경 최온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병이 있다하여 그를 버리고 다시 좌승선 조계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처가 병이 있다 하여 이혼하고 재혼한 기도하의 자제들도 다투어 사치함을 일삼아 가난하기 때문에 버림받은 아내들이 많았다. )전자는 정치적 이유로 기처한 사례이고, 후자는 부귀를 구하기 위해 처를 버린 예이다. 이는 신라사회의 폐쇄적이던 골품제도가 무너진 뒤 혼인이 흔히 문벌을 높이는 방편으로 쓰여졌던 것이 무신 난을 겪은 불안한 사회상태에서 더욱 조장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남편의 의사에 따라 일방적으로 기처가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상의 사료들을 보면 칠거지악의 이혼사유 이외의 사유로는 정치적 요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자의나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던 시기와 무신란으로 정권이 바뀐 때 정치적 이유로 기처한 사례가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고, 무신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선 고종 이후 및 원간섭기에는 부귀나 출세 등 남편의 편의에 의한 기처가 많이 발생하였다.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시기에 따라 조금씩 그 사유가 다르지만 고려의 이혼은 곧 기처라 할 만큼 기처가 대부분이었다. 처들은 칠거지악을 범했을 때 뿐 아니라 정치적 요인으로, 또 부귀와 출세를 구하는 남편의 요구에 의해 이혼 당했던 것이다. 당시인들의 기처에 대한 인식은 아래의 사료에서 잘 나타난다.가-6. 처가 변에게 말하기를 "공께서 저의 천함으로 말미암아 유림의 청환과 중요한 관직을 밟지 못하시니 감히 청하옵건대 저를 버리시고 다시 세족에게 장가드십시오."라고 하였다.)가-7. "...처를 바꾸어 부를 얻는 자가 많은데 네가 부잣집으로 다시 장가를 가려한다면 어느 누가 아내주기를 원치 않겠느냐"고 하였다.)위에 제시된 사료는 비록 기처는 하지 않았지만 당시에 정치적?부귀를 위해 여성들이 일방적으로 기처당하는게 당연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내를 버리고 다시 장가들어 부자 되기를 구하였고, 부잣집에서도 사위 삼기를 거절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기처하고 재혼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로서 그다지 죄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세 번 혼인해 세 번 다 기처한 사례도 보인다.)3. 하였다.)나-1처럼 여가가 권세가인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왕지를 빙자하고 딸을 왕에게 드리는 경우였기에 가능했던 것을 보면 고려시대 이혼은 남편이나 시가에서 주로 행해졌고 여자측에는 거의 권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2를 통해 똑같이 배우자를 버린 행위이지만 처와 남편간에 전혀 다른 가지 기준이 적용되어 처에게 요구되던 七出도 남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기처는 허용되면서 기부는 처벌되었으며, 여자측에서의 이혼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이처럼 매우 남성 중심적인 이혼제도,) 즉 기처에 대해 고려 정부에서는 어떠한 규제책을 가지고 있었을까. 먼저 고려시대 이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잘 보여주는 사료가 있다.나-3. 부자 집에서는 아내를 3~4인씩 맞아들이고 조금만 맞지 않으면 곧 이혼한다.)나-4.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여 전례를 본받지 않으니 진 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두 사료는 모두 『고려도경』의 기사로 '조금만 맞지 않으면 이혼한다'거나 '헤어지기를 쉽게 한다'는 표현은 고려시대 이혼에 대한 법적 제재가 엄중하지 않았으며 이혼이 쉽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형법지에 의하면 '부모와 의논하지 않고 까닭 없이 처를 버린 자는 벼슬을 빼앗고 부처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는 삼별초의 난으로 점령당한 지역에서 기처가 빈번해 사회문제가 되니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을 뿐이다. 더구나 이 조항을 뒤집어 생각하면 '부모와 의논하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처를 버릴 수 있다'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 고려정부는 기처에 대해 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4. 이혼 이후의 생활부부관계는 이혼 하나만으로 깨끗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생활공간을 따로 만들어야 하며, 부부 사이 자녀의 양육에 관한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또한 재산분배도 그러하다. 왕실의 이혼 이후의 생활과 일반인의 이혼 이후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일반인은 이혼 이후 자녀양육과 재산분배에 대한 사소한 문제들이 발생하여 처리를 요하혼 시 재산에 대한 권리도 지켜졌는지 의심스럽다. 고려시대에는 남녀균분상속이었으며, 여성의 재산이 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의 사료와 같이 재산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처를 취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다-2. 김유?이제현?박충좌 등이 왕에게 상소하여 이르기를 "…(강윤충은) 현재 본처가 있는 데도 아직 상복도 벗지 못한 조석견의 처에게 장가들어 석견의 유산을 횡취하였습니 다.…"라 하였다.)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여성에게 상속권은 있었다고 보여지나 어느 정도의 재산관리 처분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여성의 재산은 여성 사후 자손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기처당한 여성의 경우 그 재산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Ⅲ. 결 론앞서 살핀 바와 같이 고려에서 기처가 빈번히 행해지고, 국가에서도 별 제약을 가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고려가 처계나 모계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부계 뿐 아니라 처계나 모계 모두 존중하여 족보나 묘지명에서 외손과 친손을 차별하지 않았고 상속 도한 남녀균분상속으로 이루어졌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여러 사실들을 통해 고려 여성의 지위가 높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남자우대, 장남우대가 행해지고 출가외인 사상이 강해지는 조선 후기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절대적인 면에서 여성의 지위가 지금 오늘날처럼 높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원인은 고려가 재혼이 금지된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일 것이다. 재혼이 가능한 사회였으므로 상대적으로 기처하는 데 부담이 덜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주장할 때 근거로 제시하는 이러한 요소들이 오히려 기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지금까지 고려시대의 이혼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의 이혼제도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자면 기처와 정치적 목적이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기처란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은 이혼의 성립조건이나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이혼 뒤의 삶 등 그 어느 쪽도 내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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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경제제도
    - 목차 -Ⅰ. 서론고려시대에는 경제가 어떻게 바뀌었는가?그에 따른 각 계층의 삶의 모습과 경제 활동을 알아보자.Ⅱ. 본론1. 경제 정책① 농업 중심의 산업 발전② 국가 재정의 운영③ 수취 체제④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2. 경제 활동① 귀족의 경제 생활② 농민의 경제 생활③ 수공업자의 활동④ 승려의 경제Ⅲ. 결론고려 시대의 경제 활동에 대해 조사한 결과.Ⅳ. 참고문헌고려시대의 경제 제도.Ⅰ. 서론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와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한 수취 체제를 정비하면서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농업에서는 농업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사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민간 수공업으로 발전해 갔다. 송, 원을 중심으로 거란, 여진, 일본 등과 무역을 전개하였다.‘고려의 경제’ 라는 주제로는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전시과를 위주로 한경제제도의 간단한 흐름과 각 계층의 경제 활동을 살펴보기로 하겠다.Ⅱ. 본론1. 경제 정책① 농업 중심의 산업 발전고려는 재정의 토대가 되는 주요 산업인 농업을 중심으로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개간한 땅은 소작료를 일정 기간 면제하여 개간을 장려하고, 농번기에는 잡역 동원을 금지하여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였다. 재해를 당했을 때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고리대의 이자를 제한하였으며, 의창을 실시하는 등 농민 안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고려는 개경에 시전을 만들었고, 국영 점포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농업 장려를 위해서 행정기구를 따로 조직하여 권농조직을 편성하였다. 아울러 화폐처럼 유통되는 곡물이나 삼베를 대신하여 쇠, 구리, 은 등을 , 향리, 군인 등 국가와 관청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으로는 호부와 삼사를 두었다. 호부는 호적과 양안을 만들어 인구와 토지를 파악 관리하였으며, 삼사는 재정의 수입과 관련된 사무만 맡고 실제의 조세 수취와 집행은 각 관청이 하였다.재정은 관리의 녹봉, 일반 비용, 국방비, 왕실 경비 등에 지출하였다. 녹봉은 중앙과 지방의 문무관, 종실 등에게 지급하였다. 재정의 쓰임새는 왕실의 공적 경비, 각종 제사 및 연등회나 팔관회의 비용, 건축의 건물이나 수리비, 왕의 하사품, 군선이나 무기의 제조비 등이었다, 특히, 국방비로 많은 비용이 들었다.각 관청은 관청 운영 경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토지를 받았으나 경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필요한 비용을 각 관청에서 스스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농업 장려 정책임금이 명령을 내리기를“…몰락한 사람들에게 조세를 면제해 주고 농업을 권장하지 않으면 어찌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될 수 있으랴.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자는 농토로 돌아가게 하며, 곧 대사면을 행하여 함께 휴식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진전(황폐해진 경작지)을 개간하여 경작하는 자는 사전(개인 소유지)의 경우 첫해에는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2년째부터 경작지의 주인과 수확량을 반씩 나눈다, 공전(국가 소유지)의 경우는 3년까지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4년째부터 법에 따라 조를 바친다. ③ 수취 체제고려의 세금은 토지에서 거두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물, 장정의 수에 따라 부과되는 역이 있었다. 세금을 걷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호적과 양안을 만들었다.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다. 거둔 조세는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서 개경의 좌·우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다.공물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등이 상소를 올리기를 “(고려) 태조가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들을 맞이하면서 ‘최근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가혹해지면서 1결의 조세가 6석에 이르러 백성의 삶이 너무 어려우니 나는 이를 매우 가련하게 여긴다. 지금부터 마땅히 10분의 1세로 하여 밭 1부의 조를 3되로 하여라.’라고 한탄하여 말하였는데…”라고 하였다. 편성의 호는 인구와 장정이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부역을 시킨다. ④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등급시기12345*************415161718경종시정전시과전지*************85*************4542393633시지*************858*************4540353025목종개정전시과전지10*************656*************272320시지7**************************510문종경정전시과전지*************656*************25222017시지5*************211815121085고려의 토지제도는 전시과)체제를 근간으로 하였으며,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지가 분배되었다.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일찍이 태조 때에 역분전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토지였다.※ 시정 전시과: 경종 때에 공복 제도와 역분전 제도를 토대로 전시과 제도를 만들었다. 이 때는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여 토지를 지급하였기 때문에 운영에 문제가 있었다.※ 개정 전시과: 목종 때, 시정 전시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관직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의 체계로 정비하였다. 관직의 고하에 따라 1과에서 18과로 나누어 토지를 분급한 것이다. 종래의 막연한 기준이 지양되고 관직에 따라 토지를 분급한 것은 관료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때 현직주의, 문관우월주의가 반영되었다.※ 경정 전시과: 문종 때, 다시 재편성되었는데, 18과로 나눈 것은 변함없으나 한외과가 없어지제도:한인전: 6품 이하 하급 관료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인데, 이것은 관인 신분의 세습을 위한 것이다.군인전: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였고 군역이 세습됨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구분전: 하급 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지급하여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내장전: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두었다.공해전: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지급하여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사원전: 사원에지급하였다.민전: 매매, 상속, 기증, 임대 등이 가능한 사유지였다. 민전은 귀족이나 일반 농민들이 상속, 매매, 개간을 통하여 형성되었고 소유권이 보장되어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토지였다. 민전의 소유전은 국가의 일정한 세금을 내어야 했다. 대부분의 경작지는 개인 소유지인 민전이었지만 왕실이나 관청의 소유지도 있었다.점차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전시과 제도가 원칙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다시 분배하여야 할 토지를 세습하는 것이 용인되면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런 폐단은 무신정변을 거치면서 극도로 악화되었다. 전시과 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일시적으로 관리의 생계를 위하여 녹과전을 지급하기도 하였다.이런 미봉책으로는 권문세족이 토지를 독점하는 폐단을 막을 수 없었다. 권문세족이 권력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토지와 몰락한 농민을 모아 농장을 형성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져 국가 재정은 고려 말에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2. 경제 활동① 귀족의 경제 생활귀족의 경제 기반은 대대로 상속받은 토지와 노비, 과료가 되어 받은 과전과 녹봉) 등이 있었다.과전은 관료가 사망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유족의 생계 유지라는 명목으로 그 토지를 일부분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공음전이나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계속 관직에 나갈 수 없다면 경제 기반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귀족들은 과전에서 생산량의 10분의 1을 조세로 받았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러운 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외출할 때는 남녀 모두가 시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방에서 즐기기도 하였다.귀족들은 전문 기술자가 짜거나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당시 전문 기술자들이 만든 비단, 고운 모시 등은 왕실이나 귀족들이 쓰거나 중국에 수출도 하였다.♧ 귀족의 생활김돈중 등이 절의 북쪽 산은 민둥하여 초목이 없으므로 그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소나무, 잣나무, 삼나무, 전나무와 기이한 꽃과 이채로운 풀을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의 방을 꾸몄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하고 대의 섬돌은 괴석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이 곳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쪽 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휘장, 장막과 그릇이 사치스럽고 음식이 진기하여 왕이 재상, 근신들과 더불어 매우 흡족하게 즐겼다.김준은 농장을 여러 곳에 설치하고 가신 문성주로 하여금 전라도를 관리하도록 하였고 지준에게는 충청도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두 사람이 다투어 재물을 탐내어 마구 거둬들이기를 일삼아 백성들에게 벼 종자 한 말을 주고 나중에 으레 쌀 한섬을 거두었다. 김준의 여러 아들들이 이를 본받아 무뢰배를 다투어 모아 세도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여 남의 땅을 침탈하니 원성이 매우 많았다. ② 농민의 경제 생활농민은 조상이 물려준 토지인 민전을 경작하거나 국가 공유지나 다른 사람의 소유지를 경작하였다. 또 품팔이를 하거나 부녀자들이 삼베, 모시, 비단들을 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대개 농민은 소득을 늘리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웠다. 농민이 진전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면 국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소작료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경작하던 주인이 방치해서 황폐해진 토지인 진전을 개간할 때 주인이 있으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고, 주인이 없으면 개간한 사람의 토지로 인정해 주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연해안의 저습지와 간척지도 개간되어 경작지가 확대되어 갔다.농업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졌다.
    교육학| 2010.04.18| 9페이지| 1,000원| 조회(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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