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6
검색어 입력폼
  • 무라카미 하루키 - 소울메이트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群像)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후, 소설 22종 27권을 비롯한 에세이집, 산문집, 번역서 등 총 81권의 저서를 간행, 연평균 3.1권을 펴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출간되어 베스트셀러 또는 스테디셀러로 지구촌의 독자층을 광범위하게 확보하고 있다. 저서로는 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노마 문예신인상 수상), 『노르웨이의 숲』, 『댄스 댄스 댄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해변의 카프카』, 『어둠의 저편』 등이,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슬픈 외국어』 등이 있다.이토이 시게사토 1948년생. 광고 카피라이터. 1975년 도쿄 라이터스 클럽 신인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에 맛있는 생활 등의 명 카피로 한 세대를 풍미했다. 그 후 카피제작, 작사, 게임 제작, 문필 등 폭 넓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1998년 인터넷 신문 《호보일간 이토이 신문》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는데, 하루 접속자 수가 50만 명이 넘는다. 저서로는 『인터넷적』 등이 있다.목 차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 무라카미 하루키아이젠하워 Eisenhower / 어시스턴트 assistant / 아스파라거스 asparagus /아파트 apartment / 아르바이트 arbeit / 알레르기 allergie /앙코르 encore / 안티테제 antithese / 인터뷰 interview /인디언 indian / 인테리어 interior / 서부 해안 west coast / 에티켓 etiquette /엘리트 elite / 엘리베이터 elevator / 정어리 oil sardine / 올나이트 all night /어니언 수프 onion soup / 카펫 carpet / 카마수트라 kamasutra /커틀릿 cutlet / 캠프파이어 camp fire / 퀴즈쇼 quiz show /쿨 민트 껌 cool mint gum / 클럽 club / 그레이프 드롭스 grape drops /케이 K / 동전 coin / 커피 coffee / 커피 컵 coffee cup / 코카콜라 coca cola /콘도르 condor / 서퍼 surfer / 돌연사 sudden death / 샐러리맨 salary man /시즌 season / 시즌 오프 season off / 세이빙 크림 shaving cream /시게사토 이토이 Shigesato itoi / 시티 보이 city boy / 샤워 shower /정글북 jungle book / 쇼트스톱 short stop / 징크스 jinx /스퀴즈 squeeze / 슈퍼맨 superman / 스타워즈 star wars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 / 스트레이트 straight / 스페셜 이슈 special issue /스웨터 sweater / 제록스 zerox / 소프트크림 soft cream /소프트볼 softball / 다이렉트 메일 direct mail / 택시 taxi /탤컴파우더 talcum powder / 찰리 마누엘 Charlie manuel /추잉검 첫 번째 chewing gum part 1 / 추잉검 두 번째 chewing gum part 2 /디즈니랜드 Disney land / 데이트 date / 죽음의 결투 death match /텐트 tent / 도넛 첫 번째 doughnuts part1 / 도넛 두 번째 doughnuts part2 /도그 푸드 dog food / 별명 nickname / 노크 knock / 간선도로 highway /하이힐 hugh heeled / 하루키 무라카미 Haruki murakami / 빵 pan /미남 handsome / 맥주 beer / 필립 말로우 Philip marlowe /블루 스웨이드 슈즈 blue suede shoes /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blueberry ice cream /플레이보이 파티 조크 playboy party joke / 야구 Baseball / 펭귄 penguin /고래 whale / 호텔 hotel / 포니테일 pony tail / 마가린 margarine /가면 masquerade / 성냥개비 match / 매트 mat / 미러 볼 mirror ball /모차르트 Mozart / 도덕 moral / 라크 lark / 연애편지 love letter /라스트 씬 last scene / 점심 lunch / 가출 run away / 우비 rain coat /왬! Wham! / 멍멍 bowwow글을 마치며 - 이토이 시게사토쿨 민트 껌오래전의 일이지만 차콜 그래이 색상의 폭스바겐을 탄 젊은 여자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핑크색 여름 드레스를 입었고, 모양이 예쁜 가슴이 제트 엔진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얀 샌들을 신고 있었다. 어째서 샌들 따위를 기억하고 있는지 말하자면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 차를 세우더니 부스럭거리며 샌들을 신고, (그녀는 계속 맨발로 차를 운전한 것이다) 차에서 내려 내 앞을 지나 매점으로 가서 쿨 민트 껌을 샀기 때문이다.그 동안 나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몸에 완전 밀착되었기 때문에 그건 뭐랄까, 매우 멋진 광경이었다. 어깨는 매우 매끄러웠고 배는 일자로 홀쭉했다.한마디로 그녀는 1967년의 여름을 혼자서 차지한 듯했다. 그녀의 옷장 안 선반에는 1967년 여름에 관한 모든 것이 잘 정리된 속옷 같이 수납되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쿨 민트 껌의 봉지를 뜯어 한 개를 입 안에 집어넣고, 매우 매력적으로 짝짝 씹으면서 다시 내 앞을 지나갔다.그리고 차콜 그레이의 폭스바겐은 여름의 흐름을 송어처럼 우아하게 거슬러 올랐다. 그 후로 이미 14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차콜 그레이의 폭스바겐을 볼 때마다 나는 그녀를 떠올린다.ⓜ동전청량음료수 자동판매기를 발로 차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왜 그러세요?” “돈을 넣는데 나올 생각을 않잖아요.” 당시 유행한 비욘의 부츠가 자동판매기를 향해 계속 뛰어들고 있었다. 콘서트 회장의 좁은 통로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계 속에서 병이 깨져 쨍그랑거리고 있다. 여자는 끈질기게 기계를 공격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공연장 쪽으로 걸어갔다.어느 밴드의 광팬인 것 같다. 여자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되자 자동판매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억울해! 이 원수를 어떻게 갚지.” “나한테 도와 달라는 거야?” “오른쪽 밑을 보면 돈이 있어. 열쇠로 잠겨 있지만 있는 힘껏 당기면 열릴 거야. 그 돈으로 너를 고용할게.”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열어 보았지만 돈 같은 건 없었다.“뭐야, 아까 그 여자 돈도 넣지 않은 거야? 너무하잖아. 아, 정말 억울해.” “나의 수고비는 지불하지 못하겠군. 다른 손님도 없었어?” “그러고 보니 아까 관리인이 가져갔어. 운도 지지리도 없지. 슬프다.” “그럼 난 의용군이 되어야 하는 거군.”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좋아, 알았어.”그 후 나는 아까 그 여자를 찾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자는 찾을 수 없었다. “일생을 걸어서라도 찾아줘. 때리고, 차고, 백 엔짜리를 쑤셔 넣고, 못살게 굴어줘.” 자동판매기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그로부터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그 때의 여자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의뢰인도 이 세상에 없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의뢰인의 원수를 계속 찾고 있다.ⓘ커피컵인생에서 가장 슬픈 시간, 그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낸 뒤의 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침대에는 아직도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고,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커피 컵이 놓여 있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마치 물을 빼버린 수족관의 수조 바닥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한 시간. 책을 읽어도, 레코드를 들어도 머리에는 뭐 하나 들어오질 않는다. 아니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독후감/창작| 2010.11.30| 3페이지| 1,000원| 조회(350)
    미리보기
  • 빵의역사로 본 인류의역사
    하인리히 E. 야콥 - 빵의 역사 (SIX THOUSAND YEARS OF BREAD)의 저자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은 이 책과 ‘빵’을 통해 6000년간의 인류문명을 서술하고 있다. 하인리히는 빵의 역사를 빵을 주식으로 삼아왔던 모든 민족들에 대한 대서사시를 선택했다.이 책의 제목은 빵의 역사지만 그 내용은 참으로 방대하고 심오합니다.서양인에게 가장 중요한 음식인 빵을 통해 6천년의 인류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양 문명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 연구서이며 여기에는 전쟁, 혁명, 종교적 갈등, 기아, 재난, 진보, 과학적 성취, 승리에 얽힌 이야기가 가득합니다.엄청난 정보와 다양한 내용은 고대 이집트에서 1943년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꿰뚫고 있는 듯하며 빵을 통해 종교적 정치적 기술적 진보를 논하는 것도 재미있고 매력적이었으며 나일강변에서 시작된 가장 원시적인 빵 굽기에서부터 완전 기계화된 대량생산, 다시 말해 날마다 수십 톤씩 생산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빵과 제빵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인 의식주(衣食住).과거로 거슬러 가면 옷이 없었고 더 과거로 가면 집은 없었으나 식(食)은 없을 수가 없을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원시 생명체도 영양분이 없으면 살지 못 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만큼 식량을 통한 역사책이 중요합니다.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보니 역사에 있지 않고 식품 칸에 있어서 처음에는 빵에 대한 것만 있겠지 라고 생각 했었으나 빵에서 시작 하여 밀, 보리 등의 식량과 유전학 그에 다른 농경문화와 천문학부터 종교, 식량 문제로 인한 전쟁 등 인간의 모든 역사를 포함합니다. 여기서의 역사란 원시 수렵시대를 제외한 농경시대부터입니다.20년 동안 4천권이 넘는 자료를 참고로 쓴 역작이니 만큼 책 뒤편의 참고문헌만 해도 7장이니 왠만한 책 10권이상의 지식을 함유한 책이라 이 책을 요약한다는 것은 제 능력을 벗어 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지면이 허락 하질 않아 10분의 1밖에 못 적었다고 하니 놀랐습니다.이 책의 목차는 1장 선사시대, 2장 고대, 3장 중세, 4장 초기 아메리카, 5장 19세기, 6장 우리시대로 나뉘어져 있고 1장에선 농경의 시작을 2장에선 기원전 26세기경 발효빵을 최초로 만든 이집트부터 출애굽을 통해 유대인에게 그리스로 다시 로마로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전달되는 것을 보여주며, 3장은 식량으로 인해 중세 유럽과 이슬람 등에서의 전쟁과 종교에 대하여 서술 하였고 4장에선 새로운 식량인 옥수수와 감자의 전래를 기술하고 5, 6장에서는 19세기에 패권을 잡는데 혁명을 일으키는데 빵의 영향을 그리고 미국이 전후 식량을 통해 세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로마는 빵으로 흥했고 빵으로 망했다아우구스투스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모든 로마 황제는 빵 여신을 모시는 엘레우시스교도였다. 로마시대의 제빵사들은 일종의 공무원이었고,황제는 빵의 왕으로서, 빵의 무료배급표를 나누어주는 제빵사 길드의 수장이었다.로마인들은 빵을 정치적 구성요소로 전환시켰다.그들은 빵으로써 통치했고, 빵으로써 세계를 정복했으며, 빵으로써 멸망했다.로마 황제는 이집트의 옥토를 사유화함으로써 그 경제력을 밑바탕으로 거대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귀족과 부자들이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한 라티푼디움 경제체제는 농민들의 몰락을 가져왔다.농민들이 몰락하자 빵이 부족하게 되었고,더 이상 수많은 속국들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사상 최악의 토지정책만 펴지 않았다면 고트족의 침입만으로는 쉽게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중세 유럽이 힘을 잃게 된 것도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의 비옥한 토지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지요.이 이야기는 수업과도 관련되어 적어 보았는데 여태까지 몰랐던 이러한 것들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병사들의 위장이다’는 격언을 남긴 나폴레옹은 너무 빨리 진격한 나머지 빵을 실은 마차들이 미처 기병대를 따라 오지 못해 전쟁에서 졌다. 굶주린 병사들은 얼어 죽었으며 빵 한 입을 자치하기 위해 살인까지 벌였다. 빵을 위해 나폴레옹이 실제 이룩한 업적이라면 약 200만 명의 프랑스인과 동맹국 및 적국 국민 약 600만 명을 죽임으로써 빵 먹는 입을 크게 줄였으며 엄청나게 죽어간 이들의 시신이 유럽의 들판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밀 생산지가 북부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었으며 히틀러는 인공 기근을 이용해 인종 말살을 꾀한 전무후무한 전략가였다.
    독후감/창작| 2010.11.30| 3페이지| 1,000원| 조회(606)
    미리보기
  • 로마 황제의 발견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마 황제의 발견책 소개이 책은 로마 황제들의 숨겨져 있던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고대 문헌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과학적 문헌들까지 참고하여 로마 황제들의 생생한 모습을 되살려내고자 했다. 저자는 로마와 그리스의 역사학자들이 황제들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겼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시인과 작가들을 비롯해 낭만주의자들과 몽상가들이 역사적 사실을 축소?왜곡하거나 변질시켰다고 말한다.이 책에서는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발굴한 로마 황제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이야기한다. 음모와 배신, 광기와 살육, 허영과 탐욕, 사랑과 믿음 사이에서 로마 황제들이 무엇을 꿈꾸고 노력했는지를 알아본다. 영웅의 역사를 연 폭군 마리우스에서 세계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까지, 로마의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내밀한 사생활과 심리를 한 편의 이야기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저자 이바르 리스너독일의 베를린, 괴팅겐, 에어랑겐 대학과, 프랑스의 리옹, 소르본 대학에서 언어, 역사, 민속학,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유럽을 비롯해 영연방, 태평양제도, 동아시아의 미답지역, 북만주, 북극의 해안 지역 등을 17년 간 여행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주간 화보잡지「파리 마치」 제작에 참여하고, 독일의 「크리스탈」지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7년에 사망한 그는 『서양 - 위대한 창조자들의 역사』『옛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선사시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위대한 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서를 남겼다.차례들어가는 말 - 로마 황제는 누구인가1. 신화로 남은 로마의 영웅들01 영웅의 역사를 연 라이벌 폭군들 - 마리우스와 술라02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 -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03 로마의 가장 위대한 웅변가 - 키케로04 행운과 불행은 늘 함께한다 - 폼페이우스05 모든 사람이 사랑한 남자 - 카이사르06 행운이란 무엇인가 - 카이사르07 남자는 어떻게 길들여지는가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08 사랑이 태어났다. 로마의 가장 잘 알려진 연설가이자 변호사인 키케로와 평민 출신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이다. 폼페이우스는 10월 29일 생으로 그의 별자리는 천칭자리였다. 그래서인지 행운과 불행이 저울로 잰 듯 균등하게 그를 따랐다. 폼페이우스의 흉상을 보면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극히 평범한 사람’ 혹은 ‘부지런한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절대로 그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폼페이우스는 용감한 군인이었으나 특출하게 유능한 전술가는 아니었다. 그는 항상 보통 사람 이상의 신중함을 보였고 확신이 들 때에만 최종적으로 공격을 결정했다. 폼페이우스는 사리사욕이 없어 정직하고, 정이 많으면서도 냉담하고, 조금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유연하지 못한 것은 사실 사생활에서만 그랬다. 전쟁터에서는 탁월한 승마 솜씨와 뛰어난 검술을 보여주었다. 폼페이우스는 거칠고 난폭한 성격의 마리우스와 비교하면 덜 투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리우스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둘 다 형편없는 정치가라는 점이다. 마리우스는 우리에게 좀 더 이성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이는 반면 폼페이우스는 조금 지루하고 단조롭다. 그는 위엄이 있고 격식을 차리지만 순박해 보인다.폼페이우스는 전쟁터에서는 인기가 많았지만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로마 밖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사람들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평범한 시민들과의 접촉을 피했고 가능한 한 공공집회 장소였던 포룸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에너지를 자신의 계획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도 남의 일에 얽매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럼에도 폼페이우스는 화술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인격까지 사랑했다. 비록 현존하고 있는 그의 조각상을 보면 그다지 매력적인 것 같지 않지만 상당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진다.로마라수스는 인맥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관심을 둔 로마 시민에게는 직접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몹시 상냥했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하루 종일 나서서 온갖 사람들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돈이 걸린 일이라면 아무리 지루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사업이라도 상업적 기지를 발휘해서 끝까지 성공시키는 것이 크라수스의 장기였다. 그는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마도 청력이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로마인의 반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줬지만 자신이 상환금을 정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렇게 하여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그렇지만 사업가에게 정계와의 유착관계는 언젠가 꼭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크라수스는 그에게 유용한 사람, 돈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주었다.이러했던 크라수스도 점차 정치적인 욕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적인 이상이나 노선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심을 품었고 자신의 부, 인맥 그리고 계략에 바탕을 둔 가장 저항이 작은 길을 선택했다. 크라수스는 항상 폼페이우스를 시샘했으나 이러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훌륭한 장사꾼이자 로마의 걸어 다니는 은행이었지만 폼페이우스가 로마 안에 머물고 있을 때만 폼페이우스를 능가할 수 있었다. 로마의 총사령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로마 밖에서 언제나 많은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로마에 있지 않아도 크라수스보다 더 많은 명성과 권력을 누렸다.관대함이란 무엇인가 - 베스파시아누스로마의 역사에는 예수가 태어난 작은 나라가 불쑥불쑥 등장한다. 유대에 널리 확산된 새로운 사상,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데 대한 죄책감을 극복하고 갖게 된 메시아사상은 로마에 위협적이었다. 당시 오리엔트에서는 유대가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널리 퍼로 추대되었다. 사람들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예수가 행했던 것 같은 기적을 기대했다. 이집트에서 소경과 앉은뱅이가 황제에게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찾아왔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런 기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이들을 의관에게 넘겼다. 그러나 친구들은 베스파시아누스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가 이 둘을 치료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역사는 전한다. 예수는 “거짓 선지자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이 기적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황제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커졌다.이 황제에 대해서는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전한다. 그는 로마 군대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황제의 권한이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임명법에 따라 황제의 권한이 부여되었고, 이 법을 새긴 동판이 훗날 로마에서 발견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제2의 아우구스투스’였지만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약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에 당시 젊은 남자들의 여성스러운 면을 경멸했다. 포마드 향이 나는 젊은이를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네도 그냥 마늘 냄새가 났으면 좋겠네.”네로 통치기의 화재로 인해 여전히 많은 곳이 폐허로 남아 있었던 로마를 베스파시아누스가 재건했다. 그는 직접 첫 번째 화재의 잔해를 치우기 위해 삽을 들었다. 토지를 소유하고도 건물을 짓지 않은 사람들은 건물을 짓고자 하는 사람에게 토지를 몰수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포룸 근처에 평화의 신전을 세웠고, 네로의 황금궁전이 있던 도심 복판에는 훗날 콜로세움이라 불리게 될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을 세웠다.황제는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로마를 새롭게 하기 위해 원로원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노예와 불륜관계를 맺은 모든 여자들은 그 남자 노예의 주인에게 노예로 예속되어야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로마는 이처럼 모범적인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청결한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이전 황제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로마 시민들의 납부금을 올렸다. 또한 약삭빠른 사기꾼도 놀랄 만큼 훌륭하게 사업을 했다. 황제는 아내 카이니스를 시켜 흔하지 않은 물건들을 사들였다가 그 물건이 희귀해지면 큰 차액을 남기고 되팔았다. 그는 돈으로 직책을 살 수 있게 해주었고 보석금을 받고 죄수를 석방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황제를 ‘참치를 갖고 있는 행상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인색하고 이기적인 상인이라는 뜻이다.로마의 카니발이라 할 수 있는 사투르날리아가 열리면 마임 연기자 파보르가 황제의 행동과 말투를 흉내 냈다. 축제 때는 언제나 그랬다. 이때는 황제의 장례식 장면도 공연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자신의 장례식에 돈이 얼마나 들었냐고 묻자 연기는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나에게 10만 세스테르티우스만 주었어도 나를 티베르 강가에 버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돈 버는 재주는 세관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당시 사람의 오줌은 가죽 제품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재료였다. 그래서 황제는 배뇨 세금을 거둬들였다. 아들 티투스가 이 세금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자 황제는 금화의 냄새를 맡으며 이렇게 말했다. “배뇨 세금으로 거둬들인 돈이라 냄새가 나니?” 아들은 아니라고 답했다. 바로 이 장면에서 ‘Pecunia non olet(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탄생했다. 어떻게 벌어들였든 간에 돈은 돈일뿐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명이 위태로운 매우 큰 병에 걸렸을 때에도 농담을 했다. “아이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신이 되겠구나.”황제는 중간 키에 건강했지만 외모가 아름답지는 않았다. 얼굴은 항상 소화 장애가 있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마자 편지를 읽고 관청의 보고를 받았으며 옷을 입으면서 친구들을 맞이했다. 그는 계속 일을 하거나 외출을 하고 점심때는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면 냉수 목욕을 즐겼다. 훗날 그가 장 질환을 앓은 것은 너것이다.
    독후감/창작| 2010.11.30| 10페이지| 1,500원| 조회(191)
    미리보기
  • 시오노 나나미의 또 하나의 로마인이야기 평가A좋아요
    시오노 나나미의 또 다른 로마인 이야기책 소개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현재까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는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가 ‘왜 지금 고대 로마인가’라는 화두를 시작으로, 로마의 천 년여 간의 역사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이탈리아 한켠의 황폐한 언덕에서 출발하여 팍스로마나를 이룩한 로마제국의 흥망성쇠 및 그 역사를 만든 주연들의 이야기를 로마인과 현재의 동시대인 사이를 넘나들며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냉철한 비평적 서술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다.저자는 천여 년의 찬란한 역사를 통해 보여준 로마인의 관용과 포용 등의 삶의 가치관, 개방적인 시스템 구축, 전통과 정체성을 강화하며 이룬 자기 개혁과 같은 삶의 방식을 짧은 호흡으로 장엄하게 또는 간결한 비평으로 서술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이 책은 한 권으로 읽는 로마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대의 로마와 현대를 비교하며 논했기 때문에 이 한 권으로 로마를 조망할 수 있어 로마에 대한 이야기가 한 권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저자 시오노 나나미가쿠슈인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에 이탈리아에 건너가 로마 역사 연구에 천착해 왔다. 1968년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르네상스의 여인들』『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바다의 도시 이야기』『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신의 대리인』『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그리고 그의 필생의 역작인 『로마인 이야기』가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으로 1993년 신조학예상, 1999년 시바 료타로 상을 받았다. 그밖에 에세이로 『침묵하는 소수』『살로메 유모 이야기』『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이탈리아에서 보내온 편지』(1·2) 『사랑의 풍경』등이 있다.역자 한성례세종대 일문과를 졸업하고 1986년 「시와 의식」 신인상을 수상했다. 1984년 허난설헌 문학상을 수상했으며,『안도현 시선집』『최영미 시선집』등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호평을 받았다. 2007년 현재 시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실| 보수도 철저하면 혁신에 이른다 | 로마 연합이란 | 이전의 적에게도 시민권을 준 ‘로마의 지혜’ | 콜로니아 없이는 동맹 불가 | 왜 로마인은 가도를 만들었을까 | 왜 패자는 승자를 원망할까 | 운명 공동체의 필요성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조직의 로마를 뒤흔든 남자5장 한니발의 도전카르타고는 ‘평화국가’인가 | ‘자위전쟁’으로 시작된 포에니전쟁 | 세부 속에 역사의 묘미가 있다 | 육지의 로마, 바다의 카르타고 | ‘로마의 상식’에 대한 반대 명제 | 칸나에전투 | 한니발은 왜 강했을까 | 왜 로마군은 바꿀 수 없었을까 | 로마군의 전력은 주로 중장비 보병 | ‘자기다움’을 빼 버린 개혁은 무의미하다 | 조직의 로마에 대한 자각 | 한니발의 오판 | 지도자의 조건 | 스키피오의 등장 | 한니발의 ‘불길한 예언’6장 승자의 혼미급성장의 주름살 | 강대해진 원로원 | 혼미는 왜 생겼을까 | ‘새로운 현실’의 아픔 | 자작농의 몰락 | 공동화되는 공화정 | 기사 계급의 대두 | 좁히기 어려운 틈 | 로마 연합의 ‘균열’은 왜 생겼을까 | 그라쿠스 형제 | 실업 대책 | 이리하여 비극은 일어났다 | ‘내란 시대’의 시작 | ‘국경 자유화’를 시도한 가이우스의 개혁 | 쇄국주의 | ‘비장의 무기’를 휘두른 원로원 | 무기 없는 예언자는 실패한다 |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 생각지 못한 부작용 | 동맹자 전쟁 | ‘제국’의 이정표 | 또 하나의 ‘재앙’ | 유혈의 연속 | ‘정치적 인간’ 술라 | 술라 개혁의 맹점이란7장 ‘창조적인 천재’ 카이사르종신 독재관 | “술라는 정치를 몰랐다” | 진정한 개혁이란 재구축이다 | 카이사르 식 ‘평화 선언’ | 갈리아에서 온 원로원 의원 | 속주도 역시 로마이다 | ‘일석삼조’의 식민 도시 건설 | 코스모폴리스 | 집권과 분권 | 공격의 시대에서 방비의 시대로 | 갈리아 문제는 게르만 문제였다 | 카이사르가 유럽을 만들었다 | 왜 카이사르는 ‘관용’을 내걸었을까 | 카이사르의 죽음8장 ‘팍스로마나’의 길‘국가’는 누구의의 통치 체제 내에서 그 인재를 활용해 나간 로마의 방식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조직력’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회사 경영에서도 한 사람이 통치하는 기업에 비해 ‘적당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타입의 기업은 분명히 화려하지도 않고 발전 속도도 느릴 것이다. 하지만 회사 전체가 하나로 뭉쳐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조직이야말로 확실하게 목표 달성을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이런 방식이라면 사장이나 관리직이 교체된다 하여도 그로 인해 조직이 받게 되는 타격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로마는 후자 타입이었다.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제정 후 1세기 동안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 그러나 그 통일의 진도는 결코 선명하지도 않고 속도감도 없었다. ‘천하 통일’을 말하면 우리는 흔히 영웅을 떠올리지만, 그 시대의 로마에는 눈에 띄는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는 ‘강한 조직’으로 존재했다. 이 조직력으로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었다.예컨대 이 시대 로마 전쟁사에서는 명장으로 지중해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인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천재적이진 않지만 견실하게 지휘를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군단 인솔은 1년 임기로 정해진 집정관의 역할이었다. 군단을 지휘하려면 자질도 필요하지만 실전 경험도 중요하다. 그렇게 보면 한 해에 한 번씩 ‘신인’을 등용할 기회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군단 지휘관 층이 두터워지는 셈이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집정관이 쓰러졌다고 해도 로마 원로원은 경험자 가운데 즉시 후임 지휘관을 뽑을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두 가지 네트워크로마의 조직력은 공화정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이후의 로마에는 같은 시대의 다른 나라가 가지지 않은 두 가지 큰 ‘무기’가 있었다. 하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네트워크로서의 도로망, 그리고 또 하나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간 네트워크로서의 ‘로마 연합’. 이 두 가지 네트워크의 힘으로 로마는 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경우에 자국 시민권을 버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소위 이중국적이 되었지만 로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콜로니아 없이는 동맹 불가로마 연합을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는 ‘콜로니아(colonia)’였다. 콜로니아는 근현대의 식민지와는 정취가 다르다. 나는 콜로니아를 ‘식민 도시’라고 번역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근대 유럽 제국의 식민지는 현지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고 수탈하기 위한 곳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콜로니아는 그런 경제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아무리 궁리를 하고 지혜를 짰다고 해도 동맹은 동맹인지라 그들이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로마인이 생각한 것은 전략상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땅에 ‘쐐기’를 박듯 로마인을 배치해 가는 것이었다. 즉 일단의 로마 시민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살면서 방위하는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콜로니아뿐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의 마을은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따라서 만약 주변 동맹국이 불온한 움직임을 시작했더라도 중요 거점은 콜로니아라는 형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은 경거망동을 할 수 없었다. 만일 배반한다 하더라도 로마 시민이 살고 있는 ‘콜로니아’에서 보루 역할을 맡아 가로막았다. 그렇게 적의 발목을 묶어 놓고 있는 동안에 수도 로마에서 군단이 출격하는 것이다. ‘콜로니아’ 중에는 로마 시민이 아닌 동맹국 사람들이 이주한 ‘라틴 식민 도시’라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 라틴 식민 도시도 목적은 같았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식민지에 이주하여 로마와 이해를 일치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왜 로마인은 가도를 만들었을까로마 연합이 로마 방위의 소프트웨어였다고 한다면 하드웨어로서 기능한 것은 도로망이었다. 계획하여 가도를 부설한 것은 로마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가도를 단순히 물자나 사람을 수송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유기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을 해내고, 게다가 가도를 네트워크화하면 비약적인 효과를 올릴 수 있다고 깨달화되기 때문이다. 로마인 측에서 보면 다소 우회한다 해도 마을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형태로 가도를 부설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운명 공동체의 필요성또한 가도를 통해 운반되는 것은 물자만이 아니다. 로마인의 문화나 풍습도 다른 지방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것도 동맹 강화를 위해서 꼭 필요했다. 승자가 승자로서 계속 존재하려면 단순히 무력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로마 연합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로마와 동맹국, 다른 말로 하면 승자와 패자가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고 로마인은 깨닫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로만 우호를 주창해서는 의미가 없고 물심양면으로 교류가 있을 때에 비로소 승자와 패자는 융합해 간다.로마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구조 조정’의 명인들기원전 753년 건국부터 시작해 대략 8세기에 걸친 로마의 역사를 이야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새삼 통감한 것은 로마인이 ‘구조 조정’에 아주 뛰어난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말하는 구조 조정이란 현대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사업의 축소나 폐쇄, 인원 축소라는 소극적인 개량 방법이 아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인 재편성이나 재구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했기 때문에 로마는 1,000년이란 긴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같은 지중해 세계에 속하는 그리스가 문화나 정치, 경제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어도 그 빛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이 책에서 거론한 범위 내에서 로마인이 행한 정치 개혁 중에 가장 큰 것만도 3회나 된다. 최초로 이루어진 개혁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이다.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부르투스 등에 의해 제7대 왕 ‘오만왕 타르퀴니우스’가 추방당한 이후에는 한 명의 왕을 대신해 집정관을 매년 두 명씩 선출하고, 이 두 명의 집정관이 정치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두 번째는 기원전 390년에 일어난 ‘켈트 족 습격 충격’을 계기로 이루어진 공화정 체제 내부의 개혁이다. 귀족과 평민의 계급투쟁이 종지.
    독후감/창작| 2010.11.30| 11페이지| 1,500원| 조회(385)
    미리보기
  • 중국사의 대가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
    중국사의 大家, 수호전을 歷史로 읽다동양고대사전상걸 교수님20010032사학과오정수삼국지 연의와 함께 수호전은 역사를 기초로 한 소설로 유명한데 이 책은 수호전의 역사적 사실 부분을 증명해 주는 책이다.송대의 양산박은 이야기 그대로 도적과 비밀결사의 은신처였고, 송강과 휘종을 비롯한 많은 등장인물의 실제 행적이 예상보다 역사적 사실과 더 가까이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수호전은 제70회를 전후한 부분이 분수령이다. 70회까지는 108명의 호걸이 이런저런 경로로 양산박의 수중 요새에 집결한 후 세력을 정비하고 임무를 분담하는 내용으로 일단락된다. 그리고 70회 이후부터는 송강 등, 108명이 조정에 귀순해서 정부군으로서 활약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 최대의 공적은 방랍이 이끄는 반군과의 싸움이다. 여기서 송강은 적군을 격파하고 방랍을 포로로 잡아 수도로 개선하지만, 송강도 결국 조정의 의심을 받은 끝에 독주를 받고 죽음에 이른다.수호전에서 송강의 활동은 북송(960~1127)의 제8대 천자 휘종(徽宗) 황제(1101~1125, 재위)의 선화(宣和) 연간(1119~1125)에 시작된다. 휘종은 재위기간 동안 여섯 번 연호를 바꿨는데, 선화는 치세 만년의 연호다. 당시 수도 개봉의 인구는 100만 전후로 세계 최대였으며, 경제면에서도 풍요로웠다. 개봉으로는 전국의 물산이 유입되었고, 서아시아 지방의 대상들도 자주 왕래하여 금은보화나 비단, 도자기, 그 밖의 모든 상품들이 거래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당시 개봉의 상류사회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한 진귀한 물품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행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개봉의 인심이 호경기에 취해 있는 사이, 지방은 조세 부담으로 고통 받았고 백성의 경제생활은 파탄에 직면했다.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수호전에도 등장하는 ‘방랍의 반란’이며, 이어서 여진족의 신흥국가인 금의 침입을 받게 된다.수호전에서는 송강이 적을 상대할 때 적군에 의해서도 마법이 많이 펼쳐진다. 당대 말엽에서 송에 걸친 시기, 민간에서는 마법의 가능성을 믿었던 듯하다. 때로는 이것이 반란의 도구로 이용되어 민심을 선동하는 무기가 되었다. 일례로 북송 때 일어난 ‘왕측의 반란’을 들 수 있다. 왕측은 신분이 낮은 일개 졸병에 지나지 않았으나 요술을 부릴 줄 안다고 동료들을 속여서 군사를 모으고 모반을 꾀했다. 이런 송대의 민간신앙이 후세에 전해져 공손승 같은 마법사가 수호전에서 활개 치게 된 것이다.수호전은 이야기꾼들의 공연, 즉 설화 등이 모여 만들어진 민중소설이다. 따라서 수호전의 등장인물은 주로 서민과 가장 가까운 인물들, 곧 하급군인과 서리, 농민과 암거래상 등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급군인이 많이 출현했는데, 그중 활발하고 의협심이 강한 노지심이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노지심의 본명은 노달로, 온몸에 화려한 문신을 새겨 화화상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노달은 한때 군대의 소대장이었으나 우연히 사기를 당한 부녀를 도와주려다가 살인을 하게 되었다. 그길로 오대산으로 도망친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지심이란 법명을 얻었다. 하지만 경솔하고 단순한 성격 탓에 어딜 가나 말썽을 피웠다.노지심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가 오대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오대산에서 추방당한 노지심은 그길로 대상국사라는 절로 갔다. 그 무렵 노지심은 62근(37킬로그램)이나 되는 철선장을 마련해 길을 떠나는데, 이것은 그의 필생의 무기가 되었다. 대상국사에서도 노지심은 말썽을 피워, 그 처벌로 채마밭지기를 하게 되었다. 채소밭을 관리하던 어느 날, 노지심은 부근의 파락호들이 시비를 걸자 이 무거운 철봉을 휘둘렀다. 그때 지나가던 교두임충이 이를 칭찬하여 인연을 맺게 된다. 노지심은 나중에 임충이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던 중 죽을 뻔한 것을 도와준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당국의 미움을 사게 되자 절에서 도망쳐서 도적 두목이 되고, 후에는 양산박으로 들어가 송강과 합류한다.송대의 기록을 보면 사찰이 종종 범법자의 은신처가 되어 치안을 어지럽히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는 등록되지 않은 사찰들을 모조리 혁파하는 등 승려들을 단속하는 조칙을 엄격히 했다. 노지심은 송강과 합류한 후 방랍군 토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개선하는 도중에 항주 육화사에 들렀는데, 우연히 절강의 파도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노지심은 그길로 선정에 들어가 앉은 채로 입적했다.수호전에 여실히 묘사된 서리의 생태는 생생한 역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서리는 정부의 모든 관청의 말단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하급 아전을 가리킨다. 백성들이 정부와 접촉하려면 언제든지 서리의 손을 거쳐야 했다. 서리는 반드시 정부의 명령대로만 움직인다고는 볼 수 없었으며 정부와 백성 사이에서 일종의 독립왕국을 형성한 듯한 존재였다. 수호전은 어떤 면에서는 서리가 얼마나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인지 그 실태를 기록한 논픽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인공 송강이 그렇고 인기 조연으로 활약한 대종과 이규 역시 마찬가지다. 송강은 현의 서리이고 대종과 이규는 주의 서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서리로서의 생태는 공통적이다.중국에서 이른바 군현정치가 시작된 이래, 행정구획의 최소 단위는 ‘현’이었다. 송대에는 전국에 대략 1,300개의 현이 있었으며, 현의 중심은 이른바 ‘육방’으로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 6부를 두어 행정사무를 보았다. 이들 각 방에서 근무하는 서기가 바로 서리였고 각 방의 서리의 우두머리를 압사라 하였는데 수호전의 주인공인 송강은 운성현 형방의 압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리의 세계에서도 한 단계 높은 명칭으로 부르는 게 관례였으므로 송강 역시 평범한 서리였을 듯하다.송강은 운성현 송가촌의 대지주 송태공의 장남이었는데, 장남 후계권을 아우에게 물려주고 현성에 나가 서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지주들이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정권과 결탁해야 했기 때문에 송강이 일족을 대표하여 현의 서리가 된 듯하다. 그런데 일개 현 서리인 송강이 수호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수호전은 애초에 대중에게 상연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중의 공감을 얻어야 했다. 당시 일반 대중이 정치권력을 접할 때는 반드시 서리의 손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실제 민중의 눈에 비친 서리는 아마도 욕심 많고 부도덕한 부류였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송강처럼 훌륭한 서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역설이 오히려 대중에게 환영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소설 수호전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존경받는 사람은 천자나 대신, 장군 등이 아니라 실제로 도교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장천사다. 장천사야말로 천자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서도 행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해주는 법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도교에서 천사 집안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일 뿐 도교의 신을 모시는 전국의 도관이나 여기서 사는 도사들은 정부의 사부로부터 감독과 통제를 받았다. 그런데 정부는 도교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서도 장천사를 존중해주어야 했다. 처음에 휘종은 도교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아들이 생기지 않아서 도사를 불러 기도를 시켰다. 그 후 과연 연달아 아들을 얻자 휘종은 도교가 정말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종교라고 믿게 되어 도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 후 휘종은 도사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였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관을 짓기도 했는데, 이것은 재정문란의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종교는 정권과 결탁하면 타락하는 법이므로, 당시 궁중에 출입하던 도사들 중에는 부패한 속물들이 많았다.수호전은 작자 한 사람의 손으로 창작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기까지 많은 부류의 민중들이 참가했다. 부분적인 창작자, 비평가, 개정과 가필자 등 무수한 대중의 손을 거쳐 재료가 준비되었고 이것이 마지막에 100회본으로 정리되었다. 수호전이 대중과 함께 보조를 맞춰왔던 까닭에 최종 정리단계에서 작자의 개인적 이상과 기호가 보태졌다 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중국 땅에 살았던 민중의 신앙과 사상이 깔려 있었다. 수호전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도교적이다. 도교의 본래 취지는 ‘욕심이 없는 고요한 마음’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도교는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고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등 사교적 색채를 띠었다. 이런 이유로 일반 백성들은 도교를 좋아했다. 따라서 도교는 도사들이 지도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민중의 풍습이었기에 이유를 불문하고 민중들에게 무조건 존중되었다.
    독후감/창작| 2010.11.30| 4페이지| 1,000원| 조회(208)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7
7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4
  • B괜찮아요
    1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17일 일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11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