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강 ? 김선희 장편소설-책을 고르던 중 ‘더 빨강’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을 보고 무슨 내용일까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빨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읽고 보니 매운 음식과 관련이 있는 제목이었다. 나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매운 음식을 먹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주로 스트레스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먹으면서 푼다고 들었다.아버지는 이삿집 센터 사장이었다. 아버지는 일꾼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불만이었다. 일을 하면서 많이 다쳐서 엄마한테 아버지가 다쳤다고 전화 왔을 때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휴대전화로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는 심각했다. 7층에서 떨어지는 서랍장에 머리를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 달쯤 뒤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아버지 나이가 쉰일곱 살인데 정신 연령이 일곱 살이 되었다. 아버지는 형한테는 큰형, 나한테는 작은형이라고 했다. 앞으로 평생 그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사고로 일을 할 수 없어서 엄마는 치킨집을 열었다. 직장을 구하고 있던 형이 엄마를 도와 배달을 하고 내가 아버지를 돌봤다. 우리 동네에는 온통 재건축 바람이 불고 있다. 엄마와 형이 의논한 끝에 우리는 보장비로 치킨집을 차렸던 것이다. 아빠가 아프고 난 뒤 엄마는 우리 집의 모든 경제권을 형에게 맡겼다. 엄마는 대학 나온 형에게 많이 의지했다. 형의 꿈은 과학자가 되는 거였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꿈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방 대학에 들어갔고 꿈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래로 내려갔다. 지방대 졸업 후 정규직으로, 정규직에서 이제는 비정규직이라도 좋으니 월급을 받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년 내내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녀도 형을 오라는 회사는 없었다. 한때는 형처럼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형과 반대로 살 생각이다. 형은 엄마가 모은 돈을 주식으로 몽땅 날렸다. 그러곤 집을 나갔고 엄마는 실의에 빠졌다. 형이 집을 나가고 일주일 뒤 이번에는 아버지가 사라지는 소동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가족의 이야기는 이사 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결말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책을 읽었다. 제목은 더 빨강인데 왜 가족이야기를 하나 싶기도 했다.제목이 ‘더 빨강’인만큼 빨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나는 요새 오미령에게 관심이 생겼다. 내 절친 희우의 친구다. 희우는 오미령의 오랜 친구인데도 오미령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성과는 있었다. 오미령은 어려서부터 매운 것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병적으로 즐긴다고 했다. 그리고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들의 모임 ‘더 빨강’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카페에 가입했다. 나는 어렸을 때도 김치를 물에 씻어서 먹었을 만큼 매운 음식은 못 먹었다. 그래도 미령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하지만 ‘더 빨강’이라는 모임이 매운 음식 먹는 모임이 아닌, 동반자살모임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자살카페를 만들어서 회원들이 다 같이 죽기로 했는데 한 아이가 바로 전날 마음이 변해 이 사실을 학교에 알려서 강제 전학을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미령이가 어릴 때 유괴 당한 적이 있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미령이가 10월의 마지막날 회원들과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따라가서 미령이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령이는 자살하려고 한 적이 없고, ‘더 빨강’은 정말로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친정엄마 ?고혜정 지음-*딸은 언젠가는 떠나 보낼 자식*고향이 전북 정읍인 나는 서울예전에 들어갔다.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니 부모님은 잠이 제대로 안 왔었나 보다. 서울로 올라간 후 학교 다니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집에 내려갔다. 아버지는 딸을 보기 위해서 한 달 용돈과 하숙비를 직접 내려와서 가져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집에 내려갔다. 그날도 한 달 용돈을 타기 위해 고향집에 갔다가 기차 시간에 맞춰서 올라오려는데 엄마가 역까지 배웅을 나오겠단다. 엄마는 돈을 아껴서 모은 동전을 나에게 줬다. 엄마는 이 동전을 모으면서 재미있다고 하셨고 동전 많이 모아서 나 줄 생각에 신나고 좋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나한데 더 못해줘서 눈물 나고 딸은 언젠가는 떠나보낼 자식이라 늘 마음이 짠하다고 하셨다. 엄마 말이 맞았다. 학교 졸업 후에는 일 때문에 서울에 있어야 했고, 그 다음엔 서울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해서 새 둥지를 틀어서 엄마와 아버지의 둥지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새 둥지에 살면서 엄마가 더 그리워진다. 남편과 생활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엄마를 더 이해하게 되고 엄마 때문에 눈물이 난다.*딸은 주고 싶은 도둑*이모네집 근처에서 자취를 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생활비를 타러 내려가기도 했지만 가끔 엄마가 반찬을 해서 나를 보러오곤 하셨다. 엄마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역으로 마중 나와 줄 것을 늘 부탁하셨다. 그날도 엄마가 오신다는 시간에 맞춰서 서울역에 나갔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허리가 굽어 더 작아진 우리 엄마가, 고개가 삐뚤어지게 뭔가를 이고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오고 계셨다. 손에 들었던 짐은 내가 받아들었다. 내가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엄마는 걸어가자고 하신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걸으면서 얘기를 한다. 엄마가 땀을 뻘뻘 흘리셨지만 인정머리 없는 딸은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하기도 하고 신경질만 냈다. 집에 거의 다 와서 고갯길을 올라가는데 엄마가 머리에 인 보자기가 풀리면서 안낸다. 몸도 안 좋은데 왜 이렇게 많이 해 보냈냐고 말한다. 엄마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해 줄 것이고 딸은 주고 싶은 도둑이라고 하신다.*이름이 예뻐야 여자지*내 이름은 고혜정. 엄마가 아니었으면 이 이름은 내 이름이 안 될 수도 있는 이름이었다. 우리 집안에는 딸이 좀 많다. 또 딸을 낳았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큰 아버지는 이름을 성의 없이 지어 주셨다. 그런데 엄마는 그 이름이 맘에 안 들었다고 한다. 정읍에 이름 잘 짓는 작명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이름을 지으려면 오천 원을 줘야 했다고 한다. 엄마는 열심히 돈을 모아서 나의 이름 ‘고혜정’이라고 지어온 것이다. 우리 가족이 분가를 하게 되자 엄마는 호적을 바꾸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알렸다. 엄마는 사람은 이름이 좋아야한다며 이름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 덕에 좋은 이름을 갖게 돼서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생일에 먹었던 팥칼국수*엄마는 내 생일에는 항상 팥칼국수를 해주셨다. 내 생일은 음력7월. 양력8월이다 보니 더운 날씨에 딸이 좋아한다고, 딸이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해마다 생일상을 차려주셨다. 나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며 지냈던 거 같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 마음도 알게 된거 같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생일에 한 번도 팥칼국수를 먹어 본 적이 없다. 늘 내 걱정을 해 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엄마가 안 챙겨주면 내 생일을 살뜰하게 챙겨주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결혼하고 나서는 많이 들었다. 내 생일은 엄마는 늘 알고, 생일날 아침이면 전화를 주신다. 그래서 결혼한 후 내 생일이 오면 엄마에게 조금씩 돈을 부쳤다. 그리고 나 낳느라 고생했다고 시원하고 맛있는거 사 드시라고 말한다. 처음 그렇게 했을 때는 엄마가 너무 놀라고 감격해서 우셨다. 그리고 두고두고 그걸 자랑하셨다. 그 다음 해부터는 그렇게 해드리면 울지 않고 좋아하시며 맛있는거 사먹었다고 전화도 해주셨다.*너 땜시 이러고 산다*우리 엄마는 매맞는 아내였다. 아버지게 그때부터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해진 거 같다. 맨날 엄마 때문에 못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진심이 아니다. 엄마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엄마한데 고마워하고 있다.*엄마 때문에 못살아*나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나는 그냥 그랬는데 남편은 저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헤어졌는데 그 날 이후 남자는 무작정 방송국 앞에 와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무작정 오지 말고 약속을 정하고 만나자고 했고 거의 매일 만났다. 거의 매일 만나면서 일 년 정도 연애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의 아버지가 보자고 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만났는데 나에게 호의적이셨다. 며칠 후 남자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어려운 자리이고 생전 처음보는 나의 가족이 될 사람들이라 잘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반가운 초대가 아니었다. 아버님 말고는 나의 조건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고 있었다. 어머님이 나오셔서 나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서 소리 지르면서 얘기하셨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나왔다. 나는 결혼을 안 한다고 버티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급히 서두르셔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상견례 하는 날 엄마한데 시어머니 되실 분이 반대한다고 말했다. 역시나 상견례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엄마는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 점잖고 품위 있게 말씀하셨다. 잘난 아들이 부모 돈으로 대학 다니고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 내 새끼는 못난 부모 때문에 돈 벌어서 부모 도와준다고 집에 돈 부치고 동생들 학비 댔다고. 그런 이유로 시어머니는 내가 싫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인연은 어쩔 수 없는지 그해 11월에 결혼을 하고 바로 아기를 가졌다. 8월에 예정일보다 빨리 아들을 낳았다. 시어머님이 소고기 두 근과 미역 한 가닥을 사다가 엄마한데 주시고 가셨다. 그런데 이틀 먹고 나니 떨어졌다. 아들 낳은 며느리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속상해하셨다.*처음이 중요허당게*큰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가 집에 와 있었다. 내가 아 가자고 했는데도 가지도 않고 경찰차를 타라고 했는데도 타지도 않고 파출소 앞까지 갔지만 들어가지 않고 앞에 서있었다. 엄마는 아기 걱정만 한다고 서운해 하면서 울었다. 금쪽같이 생각하며 키웠던 딸한데 서운해서 울고 있었다. 난 아직도 그때의 일을 엄마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그저 엄마가 잊었기만을 바랄 뿐이다.*이런 애가 크믄 이뻐*내가 첫아이를 낳던 날 남편은 일이 바빠서 병원에 오지 못했고, 갑자기 집에서 양수가 터져서 마침 우리 집에 와 계시던 친정엄마와 함께 병원엘 갔다. 분만 대기실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데 아파 죽을 것 같아서 엄마 생각이 절로 났다. 14시간을 진통하고 첫아기를 낳았을 때 엄마는 나를 붙잡고 엉엉 우셨고 나는 엄마를 보며 “잘할게”이렇게 진심으로 약속을 했었다. 그렇게 첫 아들을 낳은지 2년 후, 또 딸을 낳았다. 둘째는 딸을 원했는데 다들 내게 딸일 거 같다고 해서 내심 빨리 딸을 보고 싶어서 설레기까지 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은 애기의 두상 얘기만 했다. 퇴원을 하니 친정엄마가 연락을 받고 올라오셔서 집에 계셨다. 아기를 엄마한데 줬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친정엄마 역시 두상 얘기만 했다. 엄마는 시어머니에게 아기를 건네주면서 “이런 애들이 크믄 이뻐요”하셨다.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예쁘기만 했다. 몇 년이 흐르고 유치원 여름방학이 되어 친정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우리 딸을 보더니 예뻐졌다고 해주셨다. 하지만 한참 더 이뻐져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우리 딸이랑 나는 진짜 많이 닮았다.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 딸이 못났다고 해도 내 눈에는 예쁘다.*아이고, 우리 사우 이뻐라*남편은 꽤 괜찮은 사람이다. 사람도 꽤 잘해서 돈도 잘 벌고, 가족들에게도 잘하는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3년 전 하던 일이 잘 안되어서 빚만 잔뜩 남기고 망하고 말았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게 뭐냐고 물어보니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공부해서 변리사가 되고 싶단다. 나중에 늙어서 처자식 때문에 하고 싶은걸 포기하고 살았다는 후회를 남기였는데 이제는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엄마의 약속*사실은 내 위로 세 살 위인 언니가 하나 있었다. 언니가 일곱 살, 내가 네 살 때 언니는 죽어다. 물어보면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단다. 엄마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임신중이여서 친할머니가 엄마 힘들까봐 언니를 본가로 데려가셨다. 하지만 엄마가 힘들어도 내가 키워야지 보고 싶어서 안 되겠다며 아버지에게 언니를 다시 데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며칠 수 아버지는 언니를 데리러 갔는데 갑자기 마당으로 뛰어나가 ‘엄마’ 이렇게 부르더니 그대로 푹 쓰러져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언니를 가마니로 둘둘 말아 산 속에 땅을 파서 묻어버렸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같이 집으로 왔다. 엄마는 아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사실대로 얘기했고 엄마는 울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엄마는 잘 차진 밥상을 들고 마루로 나왔다. 엄마는 나랑은 인연이 아니라고 하셨다. 살아서는 내 옆에 있는 새끼들한데 잘해주고 나중에 그 아이 옆에 가서는 다 못해준 거 몇 배로 다 해준다고 하셨다. 엄마는 자신에게 약속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나는 지금까지 크면서 엄마가 죽은 언니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그놈의 개 때문에*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버지가 개를 좋아하셔서 키웠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엄마가 혼자 계시기 무섭고 적적하다고 키우신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진도에 놀러가시게 되었는데 진돗개 2마리를 50만원에 샀다. 엄마한데는 2마리에 5만원에 주고 샀다고 거짓말을 했다. 엄마는 탐탁치는 안았지만 아버지가 개를 좋아하시기도 하고 집안에 허전하기도 해서 키우기로 했다. 진돗개가 좀 크니 아버지는 비상금을 털어 철공소에 가서 철근으로 넓고 크게 만든 개집을 특별주문해서 만들어 오셨다. 아버지는 자식 키우듯 공들이며 사랑으로 키웠다. 일 년 정도 키웠을 때, 지나가던 아저씨가 할 일 없이 우리 집 마당에 와서 개들하고 놀다 가는 날이 많았다. 며칠 후 아저씨가 엄마에게 개
가시고기 ?조창인 장편소설-백혈병이 걸린 다움이 곁에는 아빠가 있다. 아빠는 담배를 많이 피우지만 다움이는 그런 아빠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싫은 일도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다움이 앞에 있을 때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된다.다움이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생활하고 있다. 검사받을 때 다른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빠는 차라리 다른 아이들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다면 속이라도시원하겠다고 생각한다.아빠는 어렸을 때 강원도에 살았다. 아빠의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막장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 아버지는 밤낮으로 술을 마셨고 소장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래서 아버지는 친적 집으로 들어갔다가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아버지와 짜장면을 먹은 후 아버지가 건낸 것은 쥐약이였다. 아빠는 죽기 싫다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그의 손에서 쥐약을 걷어갔고 혼자 힘으로 살아라고 파출소 앞까지 데려간 게 마지막이였다.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생각은 들었다.그는 결혼을 했고 아내가 임신을 하고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 그는 몹시 난감했다.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이름의 끈. 그건 참 기이한 감정의 교류였다. 아이가 삶의 구심점이 된 것이다.아이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수치가 떨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간의 투약에도 불구하고 2만4천이라는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정상의 네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민과장은 골수이식이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이식은 혈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지만 형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 쪽엔 상당한 인척이 있었다. 하지만 민과장은 친형제가 아닌 이상 일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퇴원하기로 결심한다. 남은 시간마저 항암 치료의 끔찍한 고통을 아이에게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이년이 넘도록 고통 속에서만 살아온 아이였기 때문이다.유치원 때 엄마 아빠는 이혼을 했다. 아빠는 엄마가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고 했다. 아내는 그림을 그리던 학생이었다. 아내는 그와 결혼하면서 친정과 그림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그림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졌다. 결국 둘은 이혼을 했고 아내는 프랑스로 떠났다. 재혼을 한 뒤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아내를 찾아갔다.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얘기했고 엄마가 귀국했다는 사실을 안다고 얘기했다. 아이를 만날 생각이면 사흘 안에 와야 된다고 얘기했지만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 뒤 그는 아이를 퇴원시키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정선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우리는 평창방면으로 갈 예정이었고 노인은 반대방향이었지만 예정일뿐 반드시 가야할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노인을 데려다 주기로 했다. 노인은 산에 살고 있었다. 그는 노인에게 아이의 건강이 좋지 못해 요양할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노인은 있을 때까지 있어보라며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건강해지는 듯싶었지만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큰 병원의 응급실로 갔다. 아내가 찾아와서 아이와 조건이 맞는 골수가 있다고 얘기했다. 골수 공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아이를 서울로 옮겨왔다. 맞은 골수를 찾아내긴 했지만 골수이식수술비와 치료비는 부담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신장을 팔기로 결심한다. 검사 중 간암말기 진단을 받게 된다. 간암이었기 때문에 신장 기능이 약화되어 기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수술비를 위해서 각막을 팔아 6천만 원을 받게 된다. 암으로 사망한 사람도 다른 장기와는 달리 각막은 기증할 수 있다. 다움이는 수술을 무사히 마쳐 완치를 하게 되었지만 간암말기인 아빠는 병세가 악화된다. 남은 삶을 하루라도 더 연장하려면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하루의 연장을 위해선 아이와 떨어져 있어야하고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아이를 보낼 결심을 한다. 걱정할 다움이를 생각해 그는 아이에게 모진 말을 했고 아이는 아빠와 살게 해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다. 다움이가 프랑스로 떠났고 그는 아이와 추억이 있는 강원도 산골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어린시절로 가는 티켓 웅우옌 니얏 아인-인생이 지루하고 따분하다라는 것을 깨달은 나이는 여덟살 때였다. 여덟살이란 나이는 그 시기만의 따분함을 지니고 있었다. 인생이란 뻔하고 지루했다.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슨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고 어머니가 깨우면 양치질과 세수를 했다. 식탁에 앉아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학교와 집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등굣길에는 정신없이 뛰어야했다. 아버지는 내 나이때에 자신은 잠자리에 들기전에 준비를 다해놓고 잤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학교에서는 맨 뒷줄에 앉았다. 맨 뒷줄에 앉으면 친구들과 이야기하거나 장난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매일 똑같았다. 그래서 나는 쉬는시간에만 관심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서로 쫓고 쫓기며 싸움질하는 것이 우리들의 놀이였다. 몸에 상처가 나고 옷은 지저분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학교생활이 끝나면 고장 집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점심을 먹기 전까지 외출금지였다. 점심을 먹은 후엔 억지로 낮잠을 자야했다. 잠에서 깨면 숙제를 해야했다. 가끔 밖에서 놀긴했지만 다시 책상앞에서 교과서를 외워야했다. 과제검사는 항상 아버지 몫이였다.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다시 외워야했다. 다 외우기전에 잠이 몰려와서 침대로 향했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끝이났다.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 인생을 이야기하는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어른들은 이것을 안정이라고 한다. 계획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어디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여덟살 때 엄마,아빠 소꿉놀이를 했다. 역할을 바꿔가며 했다. 자식들에게 일반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숙제를 하고 있으면 게으름뱅이라고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싸우라고 했다. 친구들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 멋진놀이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소꿉놀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모님들에게 똑같이 말했다가 혼났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부모님에게 매를 맞았다. 내가 만든 새로운 규칙들이 친구들을 곤경에 빠뜨렸다.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올바른 아이들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단조로움에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혁명가였다. 단어들을 바꿔 말하기 시작했다. 닭은 닭이라 부르지 않고 새를 새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른들이 정한 규칙에 따르기 싫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날보고 멋지다고 했다. 우리들에겐 바뀐 단어들의 의미를 알았지만 어른들은 몰랐다. 이것은 아이들만 생각해낼 수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사고를 쳤고 그 대가를 치러야했다. 수업시간에 우리들만의 언어로 말하는 바람에 교장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우리들은 단어를 똑바로 부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어른들에게 혼란을 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정의할 수 없었다. 어른들이 우리의 놀이는 금지한 이유는 어쩌면 샘이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나에겐 삼촌이 있는데 니엔 삼촌은 린 누나를 사랑했다. 두사람은 연인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나와 띠의 관계와는 달랐다. 진짜 남편과 아내가 되려는 사이였다. 띠는 내 결혼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띠의 요리실력 때문이였다. 나는 라면이 먹고 싶을 때마다 띠의 집으로 가서 해달라고 했지만 할때마다 맛이 없었다. 결국엔 직접 내가 끓이겠다고 소리치고 말았다. 요리는 사랑과는 별 상관없지만 결혼생활과는 아주 밀접한 문제다. 하지만 요리는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고 요리실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띠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치명적인 실수였는지 모른다. 니엔삼촌과 린누나에 대해 이야기해볼까한다. 니엔 삼촌은 린누나에게 매일 사랑을 담은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나는 그 내용이 흥미로워서 뚠에게 똑같이 보냈다. 하지만 삼촌과 누나는 성인이였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해서는 안될 말들을 했는데 내가 똑같이 따라서 보내는 바람에 나는 아버지에게 혼나고 말았다.이 글은 원래 워크숍에서 발표할 연설문의 초안이었다. 하지만 워크숍에서 발표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하이였다. 두 번째 이유는 뚠 때문이였다. 하이는 어느 기업의 이사였고, 뚠은 교장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자신들을 아는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냐면서 내용을 지워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름으로 바꿀 것이라고 했다.문자 사건이 있은 후 휴대전화 사용금지령이 내렸다. 나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이전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삶을 돌아가게 만들 수 있었다. 목이 마를 때는 물컵 대신 음료수 병을 사용했다. 밥그릇 대신 양푼이에 밥을 비벼먹었다. 그것을 본 하이는 그대로 나를 따라했다. 부모님들은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였다. 왜그러냐는 질문에 나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는 큰소리로 나를 훈계했다. 어른이 된 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이상한 짓을 한다는걸 알게되었다. 그건 미친 짓이 아니라 창의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한다.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지 말고 똑같이 행동하면서 살아라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세계에 산다. 어른들은 기능과 용도에 따라 물건을 사용하지만 아이들은 기능 따위에는 별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골칫거리를 안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 있어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해진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쓰임새에 따라 물건을 이용했다.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하기 전에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지만 집중되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기 바빴고 공부가 아닌 다른 것들을 떠올렸다. 알파벳을 외우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가르쳐준대로 외우지 않고 나름대로의 연상을 떠올리면서 알파벳을 기억했다. 나는 어떤 아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부에 집중했다. 교과서를 읽자 아버지는 나를 칭찬해주었다. 반면 어머니는 걱정스러워하셨다. 선생님 역시 어머니처럼 나를 걱정하셨다. 나는 매일같이 최고 점수를 받는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찬양세례를 받았다. 나는 그 상황을 즐겼다. 하지만 좋은 성적은 받는 것이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의욕을 잃었고 공부에 관심을 끊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고 어머니는 나를 또 걱정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내가 망가지는 것을 기뻐했다.
스물아홉 생일,1년후 죽기로 결심했다. -하야마 아마리-이 책은 미생의 안영미 책으로 유명하다. 그때 읽지 않고 29살 생일에 선물로 받게 되어서 읽게 되었다. 나름 의미있는 책이다. 책의 제목이 그다지 밝은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였고,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이 책은 주인공이 스물아홉 생일로부터 1년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1년이라는 삶을 시한부 인생으로 스스로 선고하고 살아간다. 안정된 직장,애인,돈...뭐하나 갖추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인생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였다. 스물아홉 생일을 혼자만의 파티를 시작한다. 작년에도 혼자였다고 위로한다. 파견사원을 하고 있어서 정사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인 사람이 된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은 살쪄있었다. 20대 초반에는 금융회사의 정사원이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고 재취업한 회사는 계약이 중단되는 바람에 계속해서 파견사원으로 일해야했다. 20대 초반에 정사원이라는 자리를 내팽개쳤던 날을 후회했다. 지금 내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 공감할 수 있었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정직원으로 일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일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고 있지나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딱히 하고 싶은게 없었다. 공부는 웬만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중학교때까지였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성적이 떨어지고 열등생이 되어버렸다. 여덟살이 많은 오빠가 다녔던 대학에 들어가기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의지대로 했던게 없었다. 엄마가 하라고 한것은 무조건 다했고, 고등학교도 엄마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엄마의 인형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걸 좀 더 빨리 깨달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좋아졌을까, 아님 지금보다 더 안좋아졌을까? 무미건조한 대학생활에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바뀌었다. 졸업하고 스물다섯쯤에 결혼을 하고 임시로 취업했던 회사에서 퇴사하고 전업주부가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스물다섯살에 차이게 된다. 남자친구는 자기 인생도 짊어지기 벅찬데 네 몫까지 책임지려하니까 힘들다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가 말한것처럼 내 인생을 남에게 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쁜일은 이어달리기처럼 다가왔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회사일까지 바빠서 독립을 결심했다. 아빠의 간병의 엄마에게 떠넘기고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3평짜리 원룸을 구했다. 기댈곳을 잃은 나는 무력감에 모서리쳤고 그때부터 먹어대기 시작했다. 점점 살이쪘다. 나에게 또다시 나쁜일이 일어난다. 계약을 갱신하지 못하고 잘렸다. 무슨일이든 해야했기에 파견사원이 되었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널브러져 있었는데 티비에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의 거리가 나왔다. 특히 카지노에 끌렸다. 어차피 죽을거라면 인생의 전부를 걸고 승부를 펼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른이 되는날 미련없이 목숨을 끓을 생각을 했다. 그날부터 인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라스베이거스 관광이 아니라 사치를 즐기다가 마지막날 카지노에서 목숨을 건 승부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인터넷에서 '긴자 호스티스'를 발견했다. 하지만 70kg이 넘는 여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긴자 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중년남자가 클럽사와라는 곳에 데려갔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살을 빼면 일급 8000엔에서 1만엔으로 올려준다고 했다. 가명 '아마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낮엔 평범한 회사원으로 밤엔 긴자의 호스티스로 일하게 되었다. 호스티스를 하기 위해선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드레스,구두,액세서리,화장도구 등등..돈이 없어서 싼드레서, 화장도 머리손질도 직접하기 위해서 매일 연습했다. 첫날은 무사히 끝났다. 조금씩 가게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잘들어주고 성의껏 칭찬하는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순간부터 나를 찾은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중생활도 제법 익숙해졌다. 하지만 나보다 세살위인 레이나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레이나는 알게 모르게 나를 걱정해주고 신경써주었다. '치카'라는 호스티스도 있었는데 버는 족족 연극활동에 쏟아붓고 있었다. 연극활동을 하기 위해 정작 본인은 작은 원룸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마담은 나에 대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긴자에서 일하려면 좋은 옷을 장만해둬야한다. 더 많은 돈을 모아야했다. 메구미는 나에게 누드모델 일을 제안했다. 메구미는 치카의 극단후배이다. 나는 거절했지만 통통한 사람이 인기 좋다는 얘기에 망설이다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절박하면 생각지도 못한 힘이 솟았다. 하지만 같은 자세를 오래하려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시 세상에 만만한 일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델을 한 뒤로 거울앞에 서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울앞에서 내몸을 자주 볼수록 동료들에게 보기 좋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되었다. D-8개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일외에도 개인적으로 해야 할일이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와 겜블에 대한 공부를 해야했다. 책도 읽고 트럼프를 갖고 다니며 카지노게임을 연습했다. 도서관에서 여행회화책을 빌려봤다.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낮과 밤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낮에는 멋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야근을 하면 안되서 집중해서 일하는 바람에 똑부러지게 일하느 파견사원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D-6개월, 마담이 나를 보더니 예뻐졌다했다. 몸무게도 20kg이나 줄었다. 일급도 1만엔으로 올랐다.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살다보니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어느날, 클럽사와에 한 남자가 나타났는데 내가 파견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어린나이에 혼자힘으로 회사를 성공적으로 세운 핸섬한 외모를 지닌 사람이였다. 역시나 사장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폐점시간이 다가오고 사장은 나에게 애프터 신청을 했다. 그날 이후로 사장은 클럽에 들를때마다 내게 애프터 신청을 했다. 몇번의 거듭된 만남으로 사장에게 점점 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장의 애프터를 자꾸 거절하다보니 발길이 뜸해졌다. D-4개월무렵 한통의 엽서가 날아왔다. 고교동창회의 초대장이었다. 그곳에서 미나코를 만나게 되었고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내게도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기게 되었다. 그날 이후 종종 주말마다 미나코를 만났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돈은 계속 모으고 있고 블랙잭 연습도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문제는 영어회화였다. 롯폰기에서 영어권 사람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다는 조건으로 영어회화를 배웠다. 그리고 카지노게임들은 대부분 카지노 측에 유리하도록 되어있지만 블랙잭을 다르다. 숫자만 잘 다루면 기회를 가져올 수 있는 게임이다. D-1개월, 라스베이거스 행을 위한 최종점검에 들어갔다. 모든것이 완벽했는데 아직 불안한 것은 역시 카드게임이였다. 친구들을 만나 카드게임 연습을 했다. 결국 과로로 입원하게 되었다. 라스베이거를 가기로 결심하고부터 지금까지 1분1초도 헛되이 보내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퇴원후 파견사원 일 외에는 다른일은 잠시 멈추었다. 준비된 것들을 점검했고 서른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7월의 어느날,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년동안 간절히 바랬던 거리로 나가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잠을 잤다. 일어난 후 라스베이거스를 구경했다. 3일동안 라스베이거스의 구석구석을 배회했다. 그리고 마지막날을 위해 카지노를 수차례 들락거리며 사전답사를 하고 또 했다. 카지노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려고 작은 게임부터 시작했다. 분위기에 주눅들어 초보적인 실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사흘을 보낸뒤 운명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오늘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자, 스물아홉 살이 끝나는 마지막 밤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뒤 카지노를 향했다. 50달러 베팅부터 시작했다.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계는 11시 59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나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칩을 현금으로 바꾼 뒤 방으로 들어왔다. 카지노에 가지고 갔던 액수가 1만달러였다. 가지고 갔던 것과 똑같은 액수였다. 백을 뒤집어 털었는데 5달러짜리 지폐가 나왔다. 내가 딴돈은 달랑 5달러였다. 인생최대의 승부에서 내가 승리한것이다. 다음날, 예정대로라면 나는 수면제를 먹고 죽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5달러사 새로운 시작이라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나는 더이상 죽지 않기로 했다. 서른살 첫날, 내가 많은 선물은 생명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클럽사와를 그만두고 누드모델도 그만두었다. 파견회사도 그만두었다. 1년동안 일했던 모든 곳을 그만두었다. 1년후, 나는 파이낸셜플래너 자격을 취득했고 글로벌 회사에서 정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 라스베이거스에서의 6일을 떠올리곤 한다. 6일을 위해 1년을 살았고, 삶을 끝내기 위해 6일을 불태웠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