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문교육학점 관점에서 비추어 본 ‘굿 윌 헌팅‘굿 윌 헌팅’에 나오는 주인공 윌은 어렸을 적 버림받았던 경험으로 인해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의 천재적 면모를 발견한 랭보 교수는 그의 능력을 발휘시킬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지만 윌은 여러 차례 그에게 실망을 끼칠 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질 않는다. 랭보 교수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앙숙이 되어버린 심리학 교수 숀에게 그를 소개한다. 이렇게 하여 숀과 윌의 첫만남이 시작된다. 지금부터는 교육의 재개념화 개념들에 비추어 숀과 윌 그리고 내가 주의깊게 보았던 랭보교수에 대해서도 짚어보고자 한다.숀은 윌과의 첫만남부터 마지막 만남까지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주입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주어진 시간동안 윌이 자신을 내비칠 수 있도록 그저 기다려주었다. 여기서부터 참된 교육이 시작되지 않았나싶다. 숀은 ‘대화’로써 교육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윌은 그러한 숀의 교육적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폄하하고 조롱한다. 즉 후진(자)인 윌은 그의 품위에 따라 선진(자)인 숀 교수를 저울질하며 오히려 저압제하려고 한 것이다. 윌은 의도적으로 숀의 마음을 떠보는 질문들을 하며 숀에게서 격앙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마치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였다. 분명 윌은 수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해박하고 천재적 지능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는 단지 자신이 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자신이 모른다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윌을 숀 교수는 이해하고 역지사지의 태도로 다가간다. 자신 또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아픔과 과거에 대한 후회. 자신의 모습을 닮은 윌에게서 그동안 자신이 깨달아온 교훈을 알려준다. “It's not your fault." 이 말이 가슴깊이 전해진 윌은 스승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만다. 윌 또한 보물과도 같은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좌절된 욕구, 억눌린 희망, 이루어지지 않는 꿈으로 그동안 냉소적인 인생을 보냈었다. 비록 윌은 그의 스승인 숀을 일치감치 알아보지 못했지만 숀은 그의 제자인 윌을 일찍이 식별하고 그가 가진 불완전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를 계기로 윌은 숀을 포함해 타인들에게 쌓아놓았던 차가운 유리벽, 견고한 성을 조금씩 허물어 나가기 시작하고 스승인 숀을 신뢰하게 됨에 이른다. 즉 윌은 자발적인 배움의 단계, 상구계로 접어든 것이다. 교육이란 결국 나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깨닫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선진과 후진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기에 대화와 진심으로서 윌에게 다가간 숀 교수만의 교육 방식은 그 무엇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싶다.교육은 인생의 어떤 최종 목표를 달성시키는 수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진보의 작용 그 자체이며 그 자체 내에서 인생의 목적을 둔다. 그것을 진지하고 익숙하게 다루어 수많은 인생의 정신적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 상구계이자 하화계인 셈이다. 또한 영원한 것은 현재 뿐이며 주체는 그 속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예상한다. 윌이 자신이 가진 천재적 재능과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만 이미 떠나버린 여자 친구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숀은 오로지 한 가지만을 물어본다. "So, What do you really wanna do?" 과거도 미래도 아닌,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지금 현재 자신이 가장 원하고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는 말이었다. 행위자에게 왜 그 가치를 추구하느냐고 물었을 때 다른 이유가 아닌 오로지 그 자체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내재적 가치에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여타의 것은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것이며 수도계 자체의 추구에 전념, 몰아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숀 교수는 말해준 것이다.내가 ‘굿 윌 헌팅’에서 주의 깊게 본 또 다른 인물은 바로 랭보교수이다. 랭보교수는 자신의 일에 대한 집념이 누구보다 강하고 그만큼 프라이드가 센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 또한 쉽게 풀지 못하였던 수학 문제를 덧셈?뺄셈하듯 간단히 풀어버리는 윌을 보며 순수히 감탄하고 그의 재능을 키워주고자 노력한다. 세속계와 수도계를 아울러 오로지 교육계에서만은 자신이 제자로써 받아들인 후진자가 자신보다 더욱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때 역으로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부로 넘어갈수록 랭보교수는 한 인간으로서 윌을 질투하고 윌의 거만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못마땅해 한다. 랭보교수 또한 인간이기에 윌을 태도를 보며 이러한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 것이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윌이 가진 천재성을 인정하고 그를 진심으로 위하며 끝까지 도와주고 싶어 한다. 윌을 위해 판사에게 부탁하여 윌이 있어야 했던 어두운 감옥에서 빼내고 껄끄러운 친구 숀에게 윌의 정신과 상담을 부탁하고 윌이 자신에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단지 윌을 이끄는 방법이 숀과 달랐을 뿐이다. 비록 주인공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가장 많이 생각나고 정감가는 캐릭터이기도 하였다.
독서보고서'똘레랑스'(tolerance)의 개념과 교육적 접근평소 똘레랑스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왔음에도 이 단어가 진정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고 굳이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똘레랑스와 관련한 두 권의 책을 읽고서야 똘레랑스의 개념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는 왜 똘레랑스가 사회 곳곳에 정착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오용까지 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결국 ‘나를 인정함으로써 남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에서는 남을 위하기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존중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얼핏보면 이는 굉장히 상반된 태도인 것 같으나 조금만 더 생각해본다면 아주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러한 똘레랑스의 개념이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통용되었던 똘레랑스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특히 가부장적 사고에서 동양의 똘레랑스는 우선적으로 가진자 혹은 지배자로 대변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구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가진자가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정책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이러한 똘레랑스는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향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똘레랑스를 올바로 이해하는 그 출발점은 모두가 평등한 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인 미덕이 아니라 오로지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상 동양의 똘레랑스와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개념적 출발이 다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한 배경 때문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종종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에도 그들의 사정을 운운하며 똘레랑스라는 이름으로 너그럽게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넘어갔던 것 같다. 왜 이기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까지 똘레랑스를 보여야하는가? 혹 우리는 똘레랑스를 보여야할 때야말로 억압적 앵똘레랑스를 적용시키는 것은 아닐까?저자도 말했듯 프랑스에 똘레랑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정이 흐른다고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틀린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이라는 개념은 어떤 형태로든지 모든 곳, 모든 국가에 이미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내용 중 저자가 정식 택시운전자격증을 얻기 위해 다수의 면접관 앞에 선 부분이 있다. 그런데 저자에게 너무나 쉬운 문제가 출제되어 주심이 해당 문제에 나와 있는 두 지점의 간격이 2km도 채 안 되기 때문에 다른 문제로 바꿀 수 있다고 하며 저자를 암담하게 만들었을 때 면접관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그 근거는 옳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면접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 면접관은 택시 노조원이었는데 이러한 경우를 보면 결국 프랑스에서도 동료의식 연대의식을 포함한 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이 한국에서 얘기하는 정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은 정이라는 이름하에 합법과 불법을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본인들 고유의 영역을 구분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 분명한 기준을 주장하면서 정을 표현한다는 것이다.이처럼 아직 똘레랑스가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 문화 속에서 교육은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를 보면 옷 입는 방식부터 생각하는 방식까지 확실히 과거보다는 더욱 더 개인의 의사표출이 자유롭고 개성이 뚜렷해지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는 이전에 비해 개인의 자유나 권리의식이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면밀해보면 ‘나도 중요하고 너도 중요하다.’, ‘나를 인정함으로써 너도 인정받게 된다.’라는 똘레랑스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너는 어떻든지 중요하지 않고 그냥 나 자신만 중요할 뿐이다.’라는 생각이 더욱 지배적인 것 같다.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나 허무주의까지 빠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처럼 근본적인 똘레랑스의 결여 위에 극단적인 물질 만능 주의와 개인주의가 배제된 이기주의, 극심한 경쟁의식의 확산이 교육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고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교육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생각을 해볼 필요를 느꼈다.
프랑스 학자 뒤르껭은 그의 저서 에서 자신의 교육사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본 레포트에서는 교육과 교육학의 본질 및 역할과 교육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에 초점을 두어 논의해보도록 하겠다.‘교육’이란 용어는 그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학자마다 그 정의가 조금씩 다르지만, 뒤르껭은 ‘성인이 아동에게 끼치는 영향’으로 정의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뒤르껭은 칸트가 말한 교육의 목적―개인의 능력을 가능한 완전히 개발하는 것―과 교육에 대한 공리주의적인 정의에 대해 회의적이다. 위의 정의들은 모두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육이 실재하는 것으로 가정하였지만, 역사상 교육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기에 이 정의를 증명해주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교육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적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자문해본 경험이 있을 텐데, 여기서 대부분은 이상적 교육이 시대적?지역적 조건 혹은 제약을 초월하는 것이라 가정한다. 본인도 이러한 경우에 속했는데, 뒤르껭은 교육에 대한 제도 또한 여타의 사회제도와 마찬가지의 제도이기 때문에 위처럼 생각하는 것은 곧 교육의 체계 자체가 본질적으로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인정하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뒤르껭의 논지에서부터 교육과 사회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뒤르껭은 사회가 존속하려면 동질성과 다양성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이상이 바로 교육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즉 모든 사회는 그 나름대로 어느 정도까지는 모든 국민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교육적 기능이 있지만, 어느 관점을 넘어서는 각 사회의 구조적 환경에 따라 분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또한 뒤르껭은 동물과는 다른 인간 교육만의 특성을 ‘창조적 속성’과 ‘반영적 사고’라고 제시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수많은 능력이 복잡하게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되어 유기체적 소질의 형태를 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달라지면 교육의 여러 특성들 또한 달라진다는 점은 교육이 무엇보다도 사회적 필요에 응답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뒤르껭이 주장한 교육과 사회와의 관계를 인정한다면, 교육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즉 교육의 목적이 확정되었다면 그 다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교육의 실효성을 어떤 방법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보장될 수 있는지를 연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의 견해는, 현대사회의 교육의 사회적 역할은 그들이 사회 속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있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의 정보 혹은 방법을 미리 숙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미 경험한 세대에게서부터 피드백(Feedback)을 받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겨진다. 이 피드백의 내용은 기성세대의 수많은 시행착오로부터 나온 최종적 결과물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아직 자신들조차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겨지는 지침이 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본인은 교육의 방향을 정하는데 과거로부터의 경험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한 예상까지도 의미를 두고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나 뒤르껭은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경험의 축적, 즉 과거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다. 그의 저서 후반부의 교육학에 대한 부분에서 이를 다시 한번 강조를 해놓았는데, 즉 현재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교육제도, 교육학의 내용, 교육문화 등 모든 것이 오늘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닌 선행된 것들의 산물이라는 것에 무게를 둔 것이다. 만약 과거에 적용되었던 교육 중 어느 부분이 비판을 받았다면, 현재 교육은 과거에 끼쳤던 편견적 영향을 다시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역사적 기반을 충분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논지이다.본인이 뒤르껭의 저서를 읽으면서 가장 흥미있게 읽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뒤르껭은 교육의 목적이 정해진 후 교육 방법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 교육과 최면 암시를 비교한 심리학자 구요(Guyau)의 분석결과를 인용하였다. 피최면자는 항상 예외적일만큼 수동적인 상태이며 최면가는 권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교사와 아동간의 관계에도 적용시킨 것이다. 뒤르껭은 특히 후자―교사의 권위―에 대한 부분을 상세히 다루었는데, 이는 본인의 견해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뒤르껭의 견해를 소개하기에 앞서, 본인이 경험했던 것을 먼저 되뇌어 보겠다. 본인은 현재 학원에서 중등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가끔씩 학생들이 본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이러한 의문은 주로 본인과 학생과의 관계 중 권위에 대한 것이 대부분인데, 본인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거나 스스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의심의 여지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본인이 학생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교육의 내용이나 교육 환경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는데도 본인 내부에서 권위에 대한 흔들림이 인지된 상태에서는, 그것이 학생들에게까지 옮겨가 그들 또한 본인이 느끼는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뒤르껭은 보다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뒤르껭은 아동에게 있어 부모나 교사의 존재는 의인화한 혹은 화신(化身)화한 의무로써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그렇기에 도덕적 권위는 교사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권위란 강압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도적적 우월이라고 덧붙이며 이러한 권위는 두 조건을 전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교사가 의지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 첫 번째 조건보다 더욱 중요한 두 번째 조건은, 바로 교사가 전달하려고 하는 감성 문제에 대해 자신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권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사는 자신의 지능이나 정신의 우수성을 믿기보다는, 자신의 과업과 소명의식에 대한 내적으로부터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iaget와 Vygotsky 이론 비교해당 논문: Piaget와 Vygotsky의 인지와 언어발달 비교/문혜리,동의공업대학,2000제 2언어 습득에서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민형기,세종대 교육대학원,2004[서론]언어라는 것은 인간의 다양한 생각을 이해하고 개념화하는 중요한 인지 수단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고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 사물과 사물간의 관련성을 파악하여 통합적인 사고를 갖는 일, 즉 상반되는 듯한 두 가지 측면의 관계성을 파악함으로써 개념 및 조화로움을 획득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한 학자들은 이 두 상반된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 언어를 들었다. 이러한 언어와 인지와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온 많은 학자 중에서 Piaget와 Vygotsky가 그 대표적 학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Piaget와 Vygotsky의 인지와 언어발달에 대한 이론을 서로 비교해본 후 결론 부분에서 본인의 견해와 몇가지 제언점들을 말해보도록 하겠다.[본론]1. Piaget의 이론Freud가 어린이의 정서적 성장에 대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면, Piaget는 어린이의 지적 성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로이 밝게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하고, 알고, 지각하고, 기억하고, 인식하고, 추상화하고, 일반화하는 이런 과정들은 심성(mind)의 모든 지적 활동에 인용되는 ‘인지’(cognition)라는 용어에 포함된다.Piaget는 일찍부터 두 가지 주된 관심을 키워 왔다. 생명에 관한 연구로서의 생물학과 지식에 관한 연구로서의 인식론이 그것이다.) 그는 이 분야를 여러해 거쳐 따로 연구한 후에 통합시키는 방향을 찾아냈다. 인간은 신체적 구조를 유전 받지만 이 신체적 구조는 지적기능을 할 수 있는 한계를 지어 주므로, 어린이가 지식을 획득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식의 문제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식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기제할 수 있다. 발생적 인식론은 인식론이 오랫동안 철학위 범주에 속한 것과는 달리 인식위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학문이다. 발생적 인식론의 토대는 종의 진화론적 발달을 개체발생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고 보는 다윈의 진화론이다.Piaget에게 인간의 앎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이다. 새로운 지식은 인식주체가 대상과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인간 유기체에 의해 적극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사실상 Piaget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적인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인식론적인 시각으로 학문에 접근하였으므로, Piaget의 이론 중 상호작용이 아동의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은 아주 일부분의 이론을 도용한 것이다. 그의 이론으로 보면 어린이의 사고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성에서의 탈피가 불가결하므로 그러기 위해서 친구들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물을 자기 입장에서만 보던 자기중심적인 견해에서 탈피하여, 상대방 입장에 서서도 생각하는 견해가 생겨서, 자기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잘 협조시켜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어린이한테 논리적 사고만이 아니고, 사회적 능력이 길러져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자율성이 몸에 배어가게 된다. )인지는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이 지식과 사고능력을 습득하여 그 습득한 것을 문제 해결에 사용하는 과정’)이며 인지발달이란 아동의 사고 과정, 즉 아동이 이 세상을 지각하고 지적으로 표상하는 방식이 어떻게 발달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Piaget는 인지 발달에 있어서 인지의 발달이 선행되어야 언어가 발달한다고 인지우선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The Language and Thought of the child]에서 ‘...언어는 사고를 설명하는데 충분치가 못하다. 왜냐하면 사고를 특징짓는 구조는 언어학보다 더욱 싶은 곳인 행위와 감각운동기제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언어의 뿌리는 질적으로 감각운동의 인지에 있으므로 언어는 인지의 한 부수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P화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언어 습득은 동화와 조절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논리적 사고와 추리 능력에 따라 언어가 발달하고 그 사고 능력을 추상하는 것이 언어라고 보았다.2. Vygotsky의 이론지식에 의한 Vygotsky의 사상적 뿌리는 Marx에서 찾을 수 있으며 Marx를 상정하는 것은 과학적 정신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 핵심적 요소이다. 과학적인 인간 존재론을 전제할 때 과학적인 정신이론이 생겨날 수 있으며, Marx를 전제할 때 정확한 인간 개념을 설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Vygotsky가 인식하는 비판적 요소였다.Vygotsky는 인간의 모든 특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Marx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고, 지식은 사회에서 만들어지며 인간의 지능은 바로 지식의 근원인 사회와의 접촉을 통하여 발달하므로 인간의 인지 발달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사회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Vygotsky는 언어도 인류가 만들어낸 중요한 도구로 간주하였다. 도구를 통한 매개된 반응이란 자극에 대한 무조건 반사가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여 스스로의 행동을 조직한다는 뜻이다. Vygotsky는 인식의 형성과정을 발달적으로 설명하면서도 고등정신의 기원을 사회적 세계 속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이 특이하며 행동의 사회적 조직과 사고의 사회적 조직간의 밀접한 상관성을 강조하였고,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인식이 합치되는 고차원적 형태의 정신과정에 대한 이해는 문화, 역사적 맥락에서의 발생적인 접근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유아의 인지발달은 보다 수련된 지식과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 속에서 요구되는 지식과 기능들을 어린 유아들에게 전달하고, 유다가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지식과 기증들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며 새로이 습득된 지식과 기능들을 실행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허용하고 권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Marx주의 심리학자인 Vygotsky는 인간의 인지는 사회, 역사적 산물이며, 그것촉이므로 아동의 언어를 사회 중심적으로 보았다.) 그는 언어가 내적 표상 능력의 발달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개념화하고 언어의 발달은 4단계를 거쳐서 진행되며, 신호의 사용을 포함하는 다른 정신적인 조작의 발달과 유사한 내면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Vygotsky는 자시 중심적 언어를 새로운 단계의 사고 형태로 이어주는 중요한 도구로 보았다.) 즉, 자기중심적인 말이 단순히 아동 행위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고 계획한다는 의미에서 사고의 수단이라고 본 것이다.3. Piaget와 Vygotsky의 이론 비교)Piaget와 Vygotsky의 이론의 비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져 왔으므로, 다른 차이점을 언급하기 보다는 특별히 상호작용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살펴본 후 성인의 경우에 어떠한 이론을 적용하고 비교할 것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PiagetVygotsky자다중심언어를 말하다가 후에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한다.언어란 단지 문맥상에서 볼 수 있는 행동을 수반하여 사회적인 촉매의 수단 역할을 한다. 점차 언어가 문맥에서 분리되면서 사회적 기능과 도구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언어는 사회적 상호작용문맥과는 비교적 독립적이다.언어는 사회적 상호작용문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사고 또는 인지 우선주의 입장, 언어의 기본 구조는 사고, 인지라는 입장이다.언어구조가 사고의 기본구조가 된다는 입장이다.인지발달이란 사고과정에서의 점직적인 변화단계를 말한다.처음에 사고는 비언어적이고 말은 비지성적이다. 그러나 사고와 말이 함께 만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사고는 언어적이 되고 말은 이성적인 것이 된다.사고 발달이 언어발달을 선행한다.사고와 언어는 독립적이지만 상호 연관된 능력이다.[표1])우선 Piaget 가 성숙된 형태의 사고 발달을 위해 유아와 물리적 사물과의 상호 작용을 강조한 반면, Vygotsky는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이 유아의 형식적 사고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Piaget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덜 는 행동이 발달에 유익한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맥락 속에 포함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따라 매개된다는 가정 하에서이다.둘째로, Piaget는 언어는 지적 발달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지적 발달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보며, 언어는 행동을 표상화하고,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사고를 해방시키며, 행동을 조직함으로써 범위나 속도의 측면에서 사고의 위력을 증대시킬 수 잇다. 하지만, 유아가 하는 말은 현재 그 유아의 인지 발달 단계를 반영해주는 것에 불과하며, 인지 발달 단계의 발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에 반해 Vygotsky의 이론에서는 언어가 인지 발달에 중대한 역할을 하며 유아의 정신 기능은 핵심을 이룬다고 하였다. 또한 학습발달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Piaget는 유아의 현재 발달 수준이 유아의 학습 능력을 결정해주며, 발달 수준은 학습 그 자체에 의해 바뀔 수 없다.결론적으로, 사고와 언어 부분에서 살펴보면 Piaget는 전 조작기 아동의 언어가 자기중심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자기중심적 언어는 자기중심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자기중심적 언어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성장해가면서 점차 감소된다고 보았다. Vygotsky는 자기중심적 언어의 사용이 단순하게 자기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사고의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독립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사고와 언어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에 서로 연합되고, 이러한 연합은 아동이 발달해가는 과정에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즉, Piaget는 행동이 사고로 이어지고, 사고가 언어에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Vygotsky는 초기능력에 사고와 언어가 서로 결합하여 사고와 언어의 연합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어린이의 자기중심적 언어의 기능, 발달 순서, 구조 등에 대한 해석에서 두 학자의 또 다른 차이점도 나타난다. Piaget는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 언어는 인지 기능의 부족과 사회적 의지의 부족으로 일어나므로 유아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듯하다.
일본의 호타루와한국의 아리랑몇 년 전, SBS의 다큐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원이었던 한국인 소년비행병 박동훈 군에 대한 내용을 다룬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가미가제 특공대는 폭탄을 장착하고 적국의 전함에 돌진하여 전함을 폭파하고 자신도 함께 죽는 인간병기 전투법이다. 어쩌면 인간이 고안한 전투방법 가운데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전투방법이 아닐까. 거기에 더해 방송을 보면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서 억울하게 죽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박동훈 군이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을 지키는 230만 전쟁의 신 중 하나로 모셔져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으로 다가왔었다. 아무리 미화시켜 생각해보려 노력해도 당시 일본이 행한 잔인한 전투 속에 일본으로부터 지배를 받아온 역사적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고 억울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제로 다룬 영화 ‘호타루’를 감상하게 되었고 지금부터 이 영화를 본 후 감독이 ‘호타루’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와 본인이 새롭게 느낀 바를 중점적으로 서술할 것이다.호타루는 ‘반딧불이’를 뜻하는 일본어이다. 영화 속 한국인 특공대원으로 나온 김선재 소위는 출격 전 날 여관집 주인에게 다음 날 밤 호타루가 되어 다시 찾아오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또한 조선의 노래인 아리랑을 부르며 끓는 눈물을 흘린다. 그에게 있어 호타루와 아리랑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혹은 감독은 그것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 그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첫 째, 호타루와 아리랑은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선재라는 인물로 등장한 조선인 특공대원이 일본을 대표해 전투에 참가해야만 했을 때, 그가 진실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이 과연 일본제국이었을까. 그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휩쓸린 극한 상황에서 특공대원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 조선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죽어서도 꼭 가보고 싶은 나의 땅, 조선. 가깝지만 결코 살아서 밟아볼 수 없는 그 곳을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을 호타루에 담아 바다 건너 조국으로 건너가고자 했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둘 째, 호타루와 아리랑은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화해의 메시지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움진인다 했는가.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나마 전쟁이 가져온 아픔을 호타루 한 마리의 날개짓과 아리랑의 가련한 곡조를 통해 달래주고자 하였다. 호타루는 일본인에게 있어 일본의 정서를 대변하는 한의 상징물이며 아리랑은 한국의 정서를 대변하는 한의 상징물이다. 아마도 감독은 과거의 전쟁이 결국 모두에게 상처로 남게 되었으며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전쟁의 아픔을 화해와 용서를 통해 치유해나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다.호타루는 승리국의 입장에서 해석된 기존의 전쟁 영화와는 달리 패전국의 입장에서 영화를 담아냈다. 영화에서는 패전국으로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입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에게는 전범으로써 천황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대사를 통해 용서를 구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도미코 여사가 생일을 맞아 과거를 회상하며 "어머니라면 자식을 지켜야지 절대 죽으라고 말하지 못한다."며 통곡하는 부분은 가장 인상 깊은 장면임과 동시에 감독의 화해과 반전의 메시지가 짙게 담긴 부분이다. 얼마 전 사회학 강의 시간 때, 전쟁이란 결국 살아남는 자들의 아픔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이 영화가 불현 듯 생각났다. 즉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슬픈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조선인 김선재 뿐만이 아닌 전우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참전자, 늘 떳떳하지 못했던 짐을 진 채 조선인 김선재의 유서를 전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떠나는 주인공은 전후 일본세대의 상처를 여실히 보여준다.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내민 화해의 손길을 잡는 게 쉽지만은 않다. 선인들이 느꼈을 억울함과 분노를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청산하고 행복한 관계로 끝낸다는 것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해와 용서를 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진 과거를 왜곡 없이 껴안고 가야하는 숙명 또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 개봉 당시 일본에서는 200백 만이 넘는 관객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한국인들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그보다는 착찹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리랑에 녹아 있는 한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그리고 김선재가 유품으로 남긴 하회탈에 조선의 냄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마냥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감상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언급되었듯 진정한 어머니라면 자식을 죽음터로 몰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은 미래에 있어서도 적용 가능한 것인가.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가 없어 마냥 불안했던 것이다. 개인 관계가 아닌 국제 관계에서 용서란 정말 유효한 것인지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 ‘호타루’의 모든 장면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편치 않은 무언가가 응어리처럼 마음 속에서 느껴진 그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