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난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창덕궁과 창경궁의 구분을 잘 못했었다.창덕궁이 뭔지,창경궁이 뭔지,비원은 또 뭔지...역사..특히 조선사와 근현대사를 좋아하는 나 였지만...궁궐이라곤 경복궁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진학하게 됐고,처음으로 레포트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그게 바로 창덕궁 답사기이다.교수님께서 처음에 과제를 내주셨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귀찮아하는 눈치였지만...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가 됐다. 원래부터 어디 여행다니는걸 좋아하는 성격이고 이참에..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창덕궁에 가게되었으니 말이다.답사일자를 미루고미루다가 5월 7일 일요일로 정했다. 원래는 친구들이랑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다들 사정이 있어서 결국 나 혼자 가게됐다. 일기예보상으로는 5월 6일부터 7일까지 비가 온다고 해서...내심 실망했지만 ‘빗속의 운치있는 궁궐’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답사일이 되자...날씨는 예보와는 달리 아주 맑고 화창했다.조금 더운감도 있긴 했지만...외출하는데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사정상 17시 15분...마지막 관람시간에 가게 되었는데, 표를 끊고 대기하다가 돈화문으로 입장을 했다. 큰 안내판 앞에서 가이드를 만났고, 간단한 소개와 함께 본격적으로 궁궐관람을 시작했다.맨 처음 만난 것은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조선 제 3대왕인 태종 11년(1411년)에 만들어졌으니 올해로 595살이 된다. 이 금천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데, 이렇게 튼튼한 다리를 만들 수 있던 것은 우리 선조들의 장인정신과 임금이 사시는 곳에 다리를 만든다는 자긍심 덕분일것이다. 금천교를 통과하고 조금 들어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 도착했다.인정전 뒤에는 언덕이 있었고, 앞에는 여느 궁궐의 정전과 마찬가지로 박석이깔려있었고,거기엔 신하들의 지위가적힌 품계석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직접 인정전 안을들여다봤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천장엔 큼지막하고 괴상하게 생긴 전등이 있고,바닥도 전돌이 아닌 일본식 마루가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겠지만, 인정전의 모습은 너무나도 일본의 냄새가 가득했다. 이런 상황도...역사의 일부일 수 있겠지만..웬지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인정전 앞에 깔린 박석도 옛날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옛날에는 최대한 자연의 미를 살리기 위해 돌을 대충 깎아서 박석이 울퉁불퉁 둥글둥글 했으나, 일제가 이를 다 걷어버리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잔디를 깔아 버렸다. 아마도 창덕궁 잊넝전을 일본식 정원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최근에와서야 잔디를 걷어내고 기계로 만든 반듯반듯한 박석들을 다시 덮었다. 덕분에 원래의 둥글둥글하던 자연석의 모습은 없어져버렸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들더라도 이왕의 옛것을 복원할 작정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유사하게 만들어야 하는데...현실은 그렇지 못했다.인정전에서 살짝 충격을 받고 그다음 코스인 희정당으로 향하던 도중, 선정전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선정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인데, 보통 편전은 정전의 뒤에 있어야하지만 창덕궁의 지형특성상 정전인 인정전의 옆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정전의 가장 큰 특징은 기와가 청기와라 는 것인데, 햇빛의 방향에 따라 기와의 색이 밝 또는 어둡게 변한다고 했다. 경복궁 근정전도 임진왜란 이전엔 청기와를 썼다고 한다.선정전에 대해선 간단한 설명만 듣고 희정당으로 갔다. 희정당은 창덕궁의 침전이다. 경복궁으로 말하자면 강녕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희정당에 대한 설명을 듣던 도중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희정당이 강녕전을 헐어 만들었다는 것이다.원래 희정당은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에 재건되었는데, 1917년 큰 화재로 인해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제는 자금 부족의 이유로 강녕전을 헐어버리고 그 재료로 희정당을 지었던 것이다. 게다가 희정당의 덩치도 상당히 커졌다고 한다. 나는 답사 당시엔 앞에서만 봐서 몰랐지만,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희정당은 다른 전각에 비해 상당히 덩치가 컸다. 크기 면에서는 인정전보다도 더 커보였다. 또 희정당엔 자동차가 들어끝나고 희정당의 내부를 보았다. 그리고는 인정전에서보다 더 깜짝 놀랐다. 내부는 조선시대 건물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여러 시설들이 있었다. 바닥은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테이블과 의자,커튼,전등도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식 건물에 서양식 내부라....상당히 어색한 조합이 아닐 수 없지만, 이를 나쁘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그에 따라궁궐도 모습이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희정당의 내부를 보고, 희정당 앞쪽에 있는 대조전에 가봤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중궁전..중전마마께서 살던 곳이다. 대조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대조전이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고, 순종황제께서 승하하신 곳이기도 하다는 말을 듣자...엄숙한 기분이 들었다. 조선의 519년 종묘사직이 끝난곳...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왕의 인생이 끝난 곳.... 대조전은 조선 마지막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조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조전을 뒤로한 채 낙선재로 향했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다른 궁궐 건물과는 달리 건물이 시골의 한옥 같았다.이 낙선재는 1847년 헌종때 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순종황제가 잠깐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1926년, 순종황제가 승하한 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승하할 때 까지 이 곳 낙선재에서 사셨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이 조선 왕실의 재산을 압수할 때도 윤 황호는 낙선재를 끝까지 지켜내셨으며, 6.25전쟁 때 북한군이 쳐들어오자 “네 이놈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더냐? 이곳이 나라의 어머니 가 사는 집이니라. 당장 나가지 못할까!!!” 하면서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마지막 황후의 자존심이며, 조선 왕조의 자존심이셨던 것이다. 윤 황후 말고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여사도 이곳에서 사셨다고 한다. 일본인이었던 이방자여사는 모국 일본의 만행에대해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하시며 평생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면서 사셨고, 끝내 자신도 이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하셨재의 내부에는 ‘애도’라고 쓰인 화환이 있었다. 이것은 작년에 돌아가신 영친왕 아들 이구씨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못들었다.) 낙선재를 지킨 또다른 왕실 가족이 있는데,바로 고종황제의 막내 딸인 덕혜옹주이다. 고종과 귀인 양씨사이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조선왕조의 혈통을 끊어 버리려는 일제에 의해 억지로 일본 왕족과 결혼하게 되었다.그 뒤 이혼을 하고, 정신질환까지 앓으며 고생하다가 1962년에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셨는데....이방자 여사가 돌아가시기 9일전인 1989년 4월 21일에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한다. 낙선재는....힘없는 조선의 최후를 목격해야했던 한맺힌 여인들의 숨결이 잠든 곳이다.낙선재 관람을 마치고 관람객 일행은 후원으로 향했다.후원으로 향하는 길은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이었다.이는 마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서히 망해갔던 조선의 역사와 비슷해보였다. 후원은 원래 비원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옛날 기록에 ‘후원’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해서...이름을 후원으로 바꿨다고 한다.후원은 창덕궁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크며, 임금의 사냥,무예연습의 장소로 이용 되었으며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했고, 규장각이 설치되기도 했다고 한다.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내리막길을 따라 후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다.궁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아름다웠다. 특히 부용지와 부용정의 조화는 환상적이었고, 부용지 뒤쪽의 주합루도 멋졌다. 부용지는 사각형의 연못이었고, 중간에는 원형의 섬 같은게 있었다. 이는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옛사람들의 우주관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부용정의 모습은 마치 나그네가 바지를 걷고 물에 발을 담근 형상처럼 보였다.자유시간이라 여러군데를 둘러보다가 부용지의 한쪽 모서리에 물고기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못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모습은 백성 또는 신하와 임금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로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즉,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못 살듯, 임금이 없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부용정의 맞은편에는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인 어수문이 있었다. 어수문 위쪽으로는 주합루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서책을 보관했던 서향각이 있었다. 어수문은 오직 임금만이 지나다닐 수 있었고, 신하들은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통행했다고 한다. 어수문으로 오르는 계단을 잘 보면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비단 어수문 계단 뿐 아니라 궁궐의 많은 전각들을 보면 계단에 구룸 문양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구름은 하느로가 땅을 연결해 준다고 믿던 우리 선조들이 왕의 세계로 오를 때 구름이 그 다리 역할을 해줄 거싱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합루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2층만 주합루이고 1층은 규장각이었다고 한다. 조선 22대왕 정조가 당파로 얼룩진 조정을 종율하고자 탕평책을 추진할 때 그 중심이 되었던 곳이 바로 규장각이다. 규장각의 수많은 장서들은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빼앗겨갈 뻔했는데,아쉽게도(?) 미처 일본으로 빼돌리기전에 일제가 패망하는 바람에 겨우 일본행을 막을수 있었고, 현재는 서울대에 규장각 책들이 보존 되어있다고 한다. 아무튼 부용정-부용지-어수문-주합루에 이르는 절경은...정말 감탄이 절로나왔다.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는데..솔직히 창더궁에 가기전에 그 사실(세계문화유산에 등재)을 알았을 때는 창덕궁을 경복궁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 뭣 때문에 유네스코에 등록되었을까’하고 의문을 품었지만, 그러한 의문이 완벽하게 풀렸다.부용지 옆에는 영화당이 있었고 그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었다. 이곳은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영화당안에는 시험감독관의 대기실 같은게 있고, 응시자들은 앞에 있는 광장에 앉아서 시험을 봤다. 영화당의 건물은 상당히 오래되어 보였는데, 현건물은 숙종 때인 1692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것이다. 이곳에서 시험을 보던...조선의 선비들은 유혹을 참아가며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을까..생각하니 공부보다는 놀거리만 찾아다니는보였다.
평소에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왔기에 이번에 읽은 비명을 찾아서는 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 되었다. 기숙사 룸메이트인 형이 이 강의를 듣는데 그 형의 책을 빌려보게 되었다.이 책은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마치 6.25사변 때 우리가 북한에게 점령당해 공산국가가 되었다면?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면?과 같이 ‘이토히로부미가 합이빈에서 안중근에게 총격을 받았으나 부상만 입었고,일본이 한국을 계속 지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우리 입장에서는 최악의 경우를 설정하여 쓴 소설이다. 제출기한이 임박한 가운데 읽은 탓인지 중간부분은 약간 대충 읽은 감이 있기도 하지만.....먼저 내용을 요약해보겠다.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히데오(조선어 이름은 박영세)라는 사람이다. 그는 아내와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고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를 향해 가고 있는 39살이다. 시를 좋아해서1년에도 백여편이나 시를 쓴다. 도끼에라는 26살짜리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녀를 통해시상을 찾고, 시를 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에 약간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는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회사에서 승진에 실패하는데 어느날 서점에서 ‘조선고시가선’이라는 책을 읽게된다. 조선의 고전 시가가 쓰여있는 책인데, 위에 말했다시피 시쓰기를 좋아하는 그는 조선 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되고 조선어를 배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신문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기사를 읽게된다. 그는 공항에서 조선 관련 책을 갖고 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가 갱생교육을 받는다. 갱생교육을 받고 풀려나와서는 “조선여자는 내지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면서 딸 게이꼬와 아내 세쯔꼬를 농락한 아오끼 소좌를 살해한다. 아오끼 소좌를 살해한 후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남기고는 상해로 망명한다.맨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소설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만약’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라는 ‘만약’속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당시의 한 사건의 시점이 변화를 통해 우리 조선의 한 역사를 새롭게 쓴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된다.음.. 만일 이 소설에 역사적 가정을 뺀다면 사실 지극히 평범한 무역 회사 직원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의 실제 역사적 사실을 인용을 통해 표현했다. 소설에 묘사되고 있는 한반도의 일본 군부 통치 상황은 우리나라의 1980년대 정치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고, 일본 공군의 수뇌들이 미국 회사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미국에서 폭로된 사건은 율곡비리 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생각해보자. 이 책은 히데오의 망명으로 끝이 난다. 즉 사건이 시작되면서 끝나는 소설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결말부분을 보고 나서 허무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름대로 망명이 성공했을지 궁금해 하며 비명을 찾아서 2부의 내용을 상상해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조선어를 근본으로 따로 만든 언어가 없는 이상 이제 쓰지 않는 조선어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인이라서 승진에서 떨어지는 등의 일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런데 히데오는 과연 왜 떠났던 것일까? 작가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조국을 위해 싸우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안정된 직장과 안락한 가정을 가지고 그 생활에 만족했던 자가. 어쩌다 알게 된 조국에 휘말려 망명을 택했다고 그러는 것일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나로서는 조금 이해하기가 힘든 설정이라고 생각한다.어떻게 돌아보면 허상일 뿐인 조국은 잊은 채로 끝을 맺을 수도 있었겠지만, 히데오의 망명 후의 이야기… “그것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망명을 기점으로 그 후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저 망몀만이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결말을 맺음으로써 우리나라 미래의 운명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조선인들이 조선어를 잊었기 때문에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선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다스릴 사람들을 뽑는 체제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한다면… 조선어를 잊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대책 없이 상해로 떠나는 히데요 역시 터무니없는 선택은 아니며 역사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