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교육의 위기와 탈학교 논쟁 교육사회학 발표수업 5 조목차 Contents 1. 공교육의 목적 2. 공교육 위기 - 외적 요인 1) 포스트 모더니즘 2) 지식기반 사회 3) 신 자유주의 3. 탈학교 논쟁 - 내적 요인 4. 공교육의 대안공교육의 목적 1꽁도르세의 교육의 목적 개인의 필요 충족 권리의 실천 의무 이해 인간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삶의 질을 개선해 나가는데 의의를 둠호레이스 만의 공교육 인간이 발견한 제도 중 가장 훌륭한 제도 학교는 사회적 질병을 치유하고 예방하고 교정하는 일을 한다 . 교육평등 실현 .포스트 모더니즘 2 -1.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지식기반사회 2 -2.과거의 지식 : 관조적 지식 산업화 , 정보화 현대의 지식 : 총체적 지식 사회성과 실용성 중시신자유주의 2 -3.공교육 vs 사교육 공교육의 우위점 ( 졸업장 등의 제도적 우위 ) 교육시장의 신자유주의화탈학교 논쟁 3탈학교론이란 ? 교육이 학교 제도에 독점 반교육적 현상 비판 학교제도의 폐지 주장원인대안학교 학생들의 특성과 요구 반영 학습자 중심 교육과정 다양한 교수방식 추구공교육의 대안 4공교육의 대안The End Q A 질문 있으십니까 ?{nameOfApplication=Show}
1. 기능론자의 관점에서 해석기능론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상황에서 제기되고 있는 경식이의 행동에 대해서는 학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능이론자들은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면서 각기 다른, 질적으로 우열의 차이가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수많은 개인 및 집단의 통합체로서, 안정과 질서유지라는 합의된 목표 아래 상호 의존하며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학교교육을 사회화와 동일시하고 있다. 사회화에서 사회선발을 하듯이 사회와 사회적 선발을 사회체계로서의 학교의 기본기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경식이의 행동이의 행동은 인체의 어느 한 부분인 것처럼 학교에서 하나의 구성원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학교는 경식이가 장차 성인이 되어 담당하게 될 정신적 자세와 자질을 길러 줘야 할 것이다.2. 갈등론자의 관점에서 해석갈등론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가 갈등론자들은 학교가 표면적으로는 교육을 하는 곳처럼 보이나, 실상은 학교 밖의 거시적인 사회구조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구명함으로써 갈등론적 사회학자들은 학교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불평들을 창출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경식이의 행동의 원인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적합한 태도와 가치관을 가르치고 기존의 불평등한 계층구조를 정당화하고 지속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사회에서 비롯되어진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는 경식이가 다니는 현 학교체제에서는 경식이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학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러므로 학교의 개혁은 무의미하고 사회적 진보를 위해서는 근원적 사회개혁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3. 해석론자의 관점에서 해석해석론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와 개인 간 에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이의 사례에서도 교육의 측면에서 보면 학교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에서 교사와 교장, 학생이 그들의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속에서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교 내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해석론적 관점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 관하여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그의 역할 인식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으므로 교사의 학생에 대한 역할은 학생들의 행동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지문에 나와 있는 ‘서 교사’와 ‘이 선생’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이 교사’와 달리 ‘서 교사’는 경식이는 정서적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성장해 감에 따라 점차 좋아지고 있다며 경식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 선생’은 경식이에 대해 편견에 사로 잡혀 그저 문제아로 치부해버린다. 또 이 시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경식이의 반응이다. ‘서 교사’와 달리 ‘이 선생’ 앞에서는 경식이가 일부로 반항심에 일탈행동을 자행하는 것이다. 이는 학생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며 교사의 상대자인 것이다. 따라서 학생에 관한 이해가 없이는 교육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4. 대안적 관점의 해석대안적 관점의 해석에 따르자면 비단 경식이의 행동의 원인을 학교 안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안적 관점 자체가 기능론, 갈등론 교육에 대한 교육이론을 비판하며 출연한 것이기 때문에 교육 그 자체의 내부적 가치를 정당화시킴으로 서 교육의 내재적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경식이의 행동의 원인을 단순히 학교 안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개인적 문제(경식이의 주변 환경)에서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경식이의 가정환경에 대해 들여다보자면 경식이의 어머니는 가정을 벼렸으며, 알코올중독자로 재활원에 수용되어 경식이 아버지인 장소팔씨가 경식이의 유일한 보호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식이의 행동은 학교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 보다는 경식이의 가정환경의 원인이 더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5. 내가 만일 김 교장 이라면?만일 내가 김 교장이었다면 이 상황에 대해서 쉽게 결정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지위자체가 한 학교의 지도자로서 어느 한 의견에 휩쓸리지 않고 중립적으로 의견을 수용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그 상황을 대처해야한다는 사실이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식이라는 학생으로 인해서 학교의 면학분위기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교직원, 학생, 학부모들로부터 제기되는 많은 불만이 있다. 경식이를 특수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에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내가 김교장의 입장이라면 경식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기능주의, 갈등주의, 해석적 관점, 대안적 관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경식이는 일탈행동의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사와 학생간의 좀 더 신뢰에 입각한 상호작용을 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문에서도 경식이가 정서적 장애아지만 무한한 능력이 있으며 이는 학교가 당연히 경식이의 특기와 적성을 찾아서 원활하게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역할은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특수학교에서 보내는 일시적인 대안 점으로 해결점을 찾는다면 항상 이러한 사건들은 반복 될 뿐이다. 갈등이론관점에서 보았듯이 정말로 경식이는 변화는커녕 한 사회로 약자로 거듭나는 반복을 겪게 될 것이다. 잠시의 책임 회피보다는 그 문제에 맞서고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육자로서의 마땅히 안고 가야할 문제이고 해결해야할 것들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고공산당 선언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라는 슬로건으로 한 과학적 공산주의의 강령적 문서이다.제1장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 제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에 대해, 제3장은 부르주아적이거나 쁘띠 부르주아적인 비(非)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조류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제4장은 당의 전략ㆍ전술의 제 원칙을 서술하고 있다.제 1장에서는 모든 사회의 기본적 발전 법칙, 즉 계급투쟁을 해명하고 각 역사적 사회 구성체의 이행을 간결하게 개괄한 후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의한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을 분석, 노동자 계급의 궁극적 목적인 공산주의를 기초로 한다.제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전위로서의 당의 역할을 해명하고 당의 강령을 서술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의 투쟁의 기본 강령적 목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기 및 사회적 소유화, 이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 및 문화ㆍ과학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의 창출이다. 그리고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의 하나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사상을 정식화하는 것이다.마지막 제4장은 공산주의자는 언제 어디서나 현 사회ㆍ정치제도에 반대하는 일체의 혁명운동을 지지할 것, 봉건제에 대한 부르주아지와의 공동투쟁도 지지할 것 등의 원칙이 지적되고 있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기본적 의무, 즉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에 기초한 계급의식을 노동자 사이에 양성하는 임무를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 노동자 계급의 목적은 현 자본주의 제도의 폭력적 타도에 의해서만 달성 가능하다는 것이 공언된다.이러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은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부르주아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점차 권력을 가지면서 기존의 권력을 무효화 시키려하고, 그로인해 전통적인 사회가 붕괴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그 대표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간의 대립과 충돌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서, 이들이 부르주아를 타파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공산주의’를 이룩해야 한다고 한다.이 리포트에서는 마르크스의 저서「공산당선언」의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가 과연 정말로 자본주의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지, 공산주의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나의 생각을 서술해 보겠다.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를 타파해야 한다고 하며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반대한다.마르크스는‘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했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는 필연적으로 투쟁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는 사회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는 투쟁 속에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 다고 생각한다. 통합과 화합을 통해서도 발전할 것 이다. 오히려 통합과 화합으로 이루어진 사회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안정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폭력과 반발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대화와 화합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 일 것이다.그리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는 진정 필연적으로 투쟁이 일어나는 가다.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는 시장을 매개로 자유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장으로 옮길 수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그만 둘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20원을 벌고 싶어 하는 프롤레타리아. 100원을 벌고 싶어 하는 프롤레타리아 50원을 벌고 싶어 하는 프롤레타리아 이렇게 세 명이 있다고 가정하자, 한 공장에서 급여를 100원을 준다면 120원을 받고 싶은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본전이고, 100원만큼 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다. 또한 50원을 보수를 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50원 만큼 더 받을 수 있다. 시장의 거래를 통해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자체가 거래 당사자 양측이 만족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당시 노동의 조건이나 환경은 안 좋았을 것이다.)그리고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부르주아는 많은 부를 축척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부르주아지들이 신대륙 개척을 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돈이 없어서, 여건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들이 신대륙으로 갈 의지가 있었을까? 만약 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갈 의지만 있었다면, 몇 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이 모여 함께 신대륙으로 갈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것에 투자할 용기와 배포가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러한 노력도 없이 무조건 부르주아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또 이들은 기계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 화 되었다고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들의 행동만을 비판하고,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기계의 발달로 인해 더 이상 인간에게는 단순한 노동을 요구하지 않고, 고도화된 지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결국 자기 개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사회구조의 문제만을 들먹인 것이다.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에서는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 대해 투쟁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려는 운동을 벌이는 집단이며,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전개하는 다양한 투쟁에서 국적과는 무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공통적 이해관계를 강조하고 관철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이 거쳐 온 여러 발전 과정에서 항상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이라고 한다.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부추기는 단체가 아닌가 싶다. 프롤레타리아가 투쟁하는 이유가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산주의자 들이 공산주의가 좋다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조작하고, 프롤레타리아는 힘든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과연 프롤레타리아들이 정치전복을 할 수 있을 것 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자본주의는 우리사회 깊은 곳 까지 들어왔고, 자본주의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부르주아 전복은 불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더라고 제대로 운영되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원칙에 따라 모두가 열심히 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열심히 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대가가 돌이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국가에서 집단창고에 불 이 났다고 하자. 그 안의 저장되어있는 물건을 꺼내야 한다고 할 때, 공산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이를 꺼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저장되어 있는 물건을 100개 건진다고 해서 건진 100개의 물건이 모두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극히 일부만 내 것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가 운영되어 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반면 자본주의 국가에서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죽을힘을 다해 물건을 꺼내려고 할 것이다. 나의 재산이 불에 타기 때문이다.‘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이 소유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시민적 소유의 폐지라 한다.’는 것은 생산된 물건을 모두 똑같이 나누어 가지면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공동으로 받은 재화를 다 소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저축해 놓는 사람도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잉여물이 발생하게 되며, 그로인해 공산주의 국가 내에서도 경제적 격차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이 쓰는 가정에게는 많은 물품을, 적게 쓰는 가정에게는 적은 물품을 줄 수는 없다.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결국은 사유재산이 생기고, 결국은 자본주의로 간다는 것이다.마르크스가 비판하는 부르주아지의 이념이 시민적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의 산물이라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공산주의 이념 또한 그들의 입장에서의 이해관계가 상충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집단의 이기와 무지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집단을 정당화 시키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이념의 나쁜 부분만 꼬집어 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높이려 한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 또한 그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사회를 지배하면 대립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과연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한다고 해서 대립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그들이 지배계급이 된다면, 계급을 폐지하고, 자기 자신의 지배까지 폐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그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분명히 그들 내부에서의 권력 갈등이 발생할 것이고, 피 지배자가 된 부르주아들의 반발을 제압,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한번 권력의 맛을 본 자는 쉽게 그 권력을 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이루어져도 자본주의의 피폐가 그대로 나타나고, 오히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한다면 지금의 자본주의를 이어 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본다.
교육 사회학 기말고사 레포트이번 사례는 직접 학교에 가서 체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생과 교사의 대립은 우연에 의한 상황이 아니라 마땅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왜냐면 개개인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과 교사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럼 이번 사례에서의 김 교장의 문제의식은 “무력한 부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을 귀찮게 해야 하는 가?”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서교사의 문제의식은 “학교는 학생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경식이의 담임선생님은 이교사의 문제의식은 “학생들 간에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이러한 문제의식을 각각의 해석론적?갈등론적?기능론적?대안론적 관점 그리고 김 교장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자.1. 해석론적 관점사회생활은 상호작용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상호작용에 임하는 사회성원 각자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상대방의 행위에 부여된 의미에 대한 음미나 해석은 중요하다. 이러한 해석론적 관점의 연구자들은 사회적 상황에서 운용되고 있는 인간행동의 규칙?역할?규범을 올바르게 해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교사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맹수조련사 형”, “연예인 형”, “낭만가 형”으로 구분할 수 있어 학생들은 교사들의 유형에 따라서 교사와 함께 상호작용하면서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이번 사례에 적용을 해 본다면 서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경식이가 학교생활을 적응해 가면서 생활하기를 바라고 있다. 서 교사는 교사로서 경식이의 마음 혹은 행동을 이해해줌으로써 경식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식이는 서 교사가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잘 행동하면서 그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을 고쳐나가고 오히려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지능지수도 높았다. 이러한 점을 본다고 하면 경식이의 지나친 행동이 학교에 영향을 준다고는 하지만 경식이가 일반 학생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비슷한 독서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학업성취도에서도 일반 학생들과 비슷한 수준을 보여주었으며, 지능지수는 평균보다 높았다 그렇다면, 경식이가 하는 행동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도움이 있다면 훨씬 더 좋은 쪽으로 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식이 역시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 적응해 가고 있기 때문에 경식이의 지나친 저항은 사회에 적응을 하기 위한 초기의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2. 갈등론적 관점갈등이론은 교육이 지배집단의 권익을 정당화하고 주입하여 기존사회 계층구조를 재생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본다. 즉, 갈등론적 관점에서 교육은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계급에 평등하게 주어지기보다는 사회 저변에 널리 깔려있는 불평등과 불공평성을 강화?유지함으로서 평등사회 실현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고 현행 학교 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당연히 교사들의 입장에서 학생의 잘못된 행동은 눈에 가시처럼 보이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경식이의 담임 했던 교사들이 경식 이에 대한 생각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또한, 갈등이론의 경우에는 교육의 내용과 시험내용이 지배계급에 유리한 것으로 되어 있어 가정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성적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러한 내용을 경식이의 사례에서 찾아보면 재활원에 수용되어 이는 경식이의 어머니와 경식이의 직접적인 보호자인 아버지가 있으나 그에 따른 책임을 회피한다고 만 보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본다면 가정의 배경의 좋고 나쁨에 따라서 교육을 받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교육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례에서 경식이의 행동을 본다면 경식이의 행동은 상층부의 어떠한 강압을 깨려고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갈등론적 입장에서의 경식이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3. 기능론적 관점기능론적 관점은 사회는 상호의존적이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각 부분은 전체 사회의 기능화에 필요한 역할을 원만하게 수행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기능론적 관점에서 학교의 주된 기능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지식 및 행동을 전수하는 곳이다. 기능론적 관점에서 이 사례를 본다면 서 교사를 통해서 경식이의 또 다른 진가를 볼 수 있다. 경식 이는 지능지수에서도 평균 보다 높은 쪽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경식 이는 사회에서 원하는 위치에서 선발되어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할 수 있다. 학교의 교육은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다라 평가를 하여 사회적으로 보상을 해 주기 때문에 경식이가 학교생활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서 교사와 같은 교사가 있다고 한다면 경식 이는 좋은 학생으로 성장함으로써 좀 더 높은 취에서 생활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서 교사가 말을 했듯이 동료학생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업성취도가 나왔고 경식 이는 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아이라고 말하듯이 경식 이는 스스로가 좀 더 열심히 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자숙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경식 이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물에 당연히 뽑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와 교사는 경식이의 재능을 더 찾아 주어 사회에 필요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갈등주의 이론에서처럼 교육이라는 것이 지배계층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교육, “대중교육”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 교장은 비록 경식 이를 장애학생위원회에서 경식 이를 정서적 장애라고 표현하였지만 오히려 경식 이는 학교시스템에 대한 불만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좀 더 인재를 발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한 것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기능주의 이론에서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4. 대안론적 관점문화적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지배집단의 이해를 반영하는 문화 교수로써 교육과정은 지배집단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선정한 문화로 학교는 사회 질서를 경제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재생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문화 재생산에 대한 보르되는 교육은 계층들 사이의 문화적?사회적 차이를 강화함으로써 사회계급 구조를 재생산 하는 데 공헌하였다고 본다.경식이 아버지인 장소팔씨에 따르면 경식이가 정서적 문제를 갖고는 있지만 좋은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경식이의 행동이 점차 호전되고 있다고 하였다. 즉, 좋은 교육이 경식이의 행동을 조금 더 변화를 시킬 수 있었고 경식이 집안의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경식이의 행동이 조금이나 변할 수 있었다. 결국에는 학교의 외의 문화가 학생들의 삶의 기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여러 교육적 장치에 대한 문화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경식이가 생활하고 있는 곳에 조금의 변화가 필요한 동시에 상류층의 문화를 너무 극단적으로만 주장해서 경식이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식이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생활태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도 본다. 예를 들면 이번 해에 나타난 FTA반대에 대한 낮은 계층의 반발을 예로 들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이처럼 경식이도 상류층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문화와 행동방식을 만듬으로써 이런 식으로 할 수 있게 된다면 경식이는 높은 문화가 잘 전달이 되기 때문에 경식이의 행동이 더 발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홍콩과 마카오의 역사문제 제기홍콩과 마카오라는 중국 남부의 도시에 대해 알아 보았다. 홍콩은 중국 대륙에 비해 크기는 작으나 엄청난 상업이 발전한 도시이다. 또, 마카오는 중국 속의 유럽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옛 유럽의 도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카지노와 같은 유흥업과, 관광업이 발달한 도시 이다. 중국이라는 커다란 사회주의 국가 속에, 어떻게 해서 이러한 자본주의 도시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아 보려고 한다.당시 서구의 강국이었던 포르투갈과 영국이 마카오와 홍콩을 지배하게 된 원인과 그 과정에 대해 살펴 보고, 이 도시들이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 오게 되는 과정을 알아보고,이 도시들의 반환이 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미치게 될지, 생각 해 보려고 한다.홍콩과 마카오의 지리적 환경.마카오:마카오는 중국 3대 강의 하나인 주강(珠江) 삼각주에 위치한 작은 반도이다. 그리고 마카오는 마카오 반도와 타이파, 쿨로와네 등의 부속 도서를 포함하여 약 20.96km²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지도를 보면 주강 하구 삼각주의 동쪽이 홍콩이고 맞은편인 서쪽 끝이 마카오이다. 그리고 행정적으로는 광동성(廣東省) 중산현(中山縣)의 남부에 위치해 있다. 마카오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까지의 거리는 대략 65km이고, 광동까지는 약 145km 떨어져 있다. 기후는 아열대성에 속하여 따뜻하며 습기가 많고 강우량도 적지 않다. 또한 마카오는 아열대의 항구 도시로서 기후 조건이 좋아 식물이 무성하며 사계절이 항상 푸르다. 그리고 주변이 바다여서 해산물이 매우 풍부하다.16세기 동서 무역의 중개지로 급성장 하였고, 기독교 포교의 기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무역량의 증가와 더불어 국제 무역의 주도권이 대규모 선박의 입항이 가능한 홍콩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오랜 정체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체로 인해 마카오는 과거 유럽의 도시와 같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간직할 수 있었고, 최근에는 유럽인들의 향수를 부채질하게 되어 관광지로 관심마카오의 무역을 경영한시기.3단게; 1849년부터. 중국의 주권을 침범하고 마카오를 탈취하여 식민통치를 강행한 시기.1510년 포르투갈 함대는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여 동방 확장의 근거지로삼았고, 1511년 말레이시아 반도 남단의 말라카 해협을 점령했다. 그후 몇년간 중국 해안 방비의 정보를 수집하고 중국 상인들을 매수하여 침략준비를 했다.1517년 포르투갈 식민지주의자들은 대포를 실은 함대를 보내 광주지역을침입하게 했는데 이때, 함대가 중국에 올때에 사절단이 따라와서 광주와북경에 들어가 교섭을 벌였다. 그들은 아랍인의 복장을 하고 말라카인이라고 속여 중국과 무역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식민지주의자들이해안지역에서 약탈 행위를 하고 양민을 매매하는 등 폭력을 사용해 중국사람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고, 말라카 국왕이 명나라에 편지를 보내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포르투갈 특사들은 옥에 갇히고, 식민지주의자들은축출당했다.그 이후 1537년 포르투갈은 다시 광동성 둔문에 들어왔다. 이들은 중국 연해에서 사적활동을 벌이는 한편 중국 관원들을 매수해 1553년 마카오에 거주하는 것을 허가받았다.“가정 32년, 배를 타고 호경에 온 서양 오랑캐는 배가 파도에 부딪혀 틈이 벌어져 가져온 공물이 모두 젖었으니 잠시 땅을 빌려 햇볕에 말리겠다는 핑계를 대었다. 이에 해도부사 왕백이 뇌물을 받고 허락하였다”이 글은 당시 포르투갈인이 해도부사 왕백에게 뇌물을 주는 수단을 써서마카오에서의 무역을 허가받게 되었음을 보여준다.당시 명정부는 다른 곳을 봉쇄하고 낭백오(Lampacao)를 임시 대외무역항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로써 마카오가 낭백오를 대신해서 서양국가와통상할 수 있는 항구이자 중국 유일의 대외무역시장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아편전쟁 이전까지의 마카오포르투갈? 인들은 1557년부터 1564년 사이 약 1000채의 건물을 지어마카오를 규모를 갖춘 작은 항구 도시로 변모시켰다. 포르투갈 인들은마카오에 있어서 세가지 권리를 얻게 되었다.1)거주권포르투갈 인은 마카오에서 건물을 짓거나 장기간 거 권리를 갖는다. 다만 중국 측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마카오를 다른 나라에게양여할 수는 없다. 아울러 마카오의 경계는 현상을 유지하며 피차가 서로 증감하지 않으며, 또 고쳐 나갈 때는 다시 조약을 체결한다.”이 조약은 마카오에 있어서 식민 통치를 합법화 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일반 식민지와는 다른 점은, 포르투갈 인이 영구 거주와 마카오 관리의 권리를 얻기는 했지만 마카오를 중국의 영토로 승인 했다는 점이다.2. 홍콩(Hong kong)당시 중국의 시대 상황1) 폐쇄적인 봉건 사회중국의 역사는 고대부터 나라밖에 관심을 보였다가 다시 나라 안으로 관심을 돌리는 시계추 같은 움직임을 반복해 왔다. 1796년에는 관심의 방향이 다시 중국 안으로 들어오는 시기였다.당시 중국이 내향성을 지향하게 된 까닭은, 로마의 종교 재판소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16세기 중반 마태오 리치 신부는 조상 숭배와 유교 의식을 인정하는 ‘현지 적응’적인 선교를 했는데,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중국 황실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그러한 선교방식을 포기하라고 명령을 하면서, 중국의 황실과도 마찰을 빚었다. 이에 중국 황제는 대부분의 선교사를 쫓아버림으로 맞대응을 했고, 이로써 중국은 지식의 근원이자 유럽과의 교량 역할을 하는 자들을 제거한 셈이었다.이후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사절단들이 협상을 제안 했지만, 중국으로서는 다른 나라와 평등한 관계에서의 협상을 해 본 적도 없었고, ‘황제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또한 중국은 물자적으로도 풍부했기 때문에 상거래 적으로도 ‘다른 국가에서 오는 제품들은 전혀 필요치 않다’ 고 생각했다.2)제국의 해체정부의 부패로 국가 기반이 흔들리고, 탐관오리의 횡포로 황폐해지고, 민중들의 반란에 청 왕조는 점점 힘을 잃었다.영국인들이 들여온 ‘아편’중국 황제의 명으로, 외국 상인들은 외국 통상의 독점권을 지닌 소수의 중국 상인들과만 협상이 가능했고, 중국 표준어의 기초를 배우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또한, 포르투갈인들의 지역인 마카오 00년간 이어온 역사에 무역·조공(朝貢)이라는 관념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⑦ 의 관세 자주권의 포기는 그후 중국이 근대 산업을 육성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난징조약은 다음해 공포된 5항통상장정과 호문채 추가조약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으나, 이 조약은 중국이 근대 유럽 제국과 최초로 체결한 불평등 조약으로서, 이로 인해 중국은 문호를 개방 하게 되고, 구미 열강의 반 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제 2차 아편전쟁(1856-1860)애로 호는 홍콩에 선적을 둔 중국인 소유의 배로서 선장이 영국인이었다. 이 배가 광동성에 정박하고 있을 때 중국 관리가 배에 올라 영국 국기를 끌어내리고 해적 혐의로 중국 선원 12명을 체포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광동의 영국 영사 파크스는 양광 총독에 항의하고 사건의 마무리를 위한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영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를 공격하고 청의 관청에 쳐들어갔다. 병사들은 베이징(북경)까지 진격했고, 난징 조약에 이은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영국인들은 추가로 11개 항구의 개방을 강요했고, 서구 열강의 선박은 양쯔강(양자강)을 따라 중국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또한 청 왕조는 전쟁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고, 수도 안데 외국 공사관을 세워야 했으며,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선교활동도 인정해야 했다. 외국인을 ‘야만인’으로 지칭하는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외국과의 수교를 전담하는 부서를 개설해야 했고, 아편 무역도 합법화 되었다.또한 홍콩과 분리되어 있는 구룡반도를 영국인들에게 영구히 넘긴다는 조항도 있었다.홍콩과 마카오의 반환 과정과 이것이 중국에 미치는 영향.1. 홍콩(Hong kong)중국으로의 반환 과정홍콩에서는 주권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과 중국 간에 교섭과 충돌이 계속되었다. 중국은 개혁 개방을 통해 세계인이 놀랄만한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힘입어 1982년 영국 대처 수상의 중국 방문을 시작으로 22회에 걸친 협상 끝에후 자유 방임을 기초로 한 홍콩에 대한 영국의 정책을 신뢰하고 몰려들었던 세계 투자가들에게 중국 정부와 홍콩 행정청의 개입은 불신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제 교류가 홍콩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만과 홍콩의 관계가 일국양제에 의한 대립으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97년 8월부터 동남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 가치 하락으로 홍콩에 투자하고 있던 동남 아시아 자본들의 본국 환류는 홍콩 시장의 침체를 강하시켰다. 홍콩 정부는 홍콩 달러를 지키기 위해 1997년 10월, 홍콩 달러를 대규모로 사들였다. 홍콩 행정청과 중국 정부가 외환 시장에 적극 개입해 홍콩 달러를 대거 매입함으로써 금리가 상승하고, 주가와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였다. 이렇게 되자 기업들은 인원 감축에 나서고, 실업률이 상승하였다. 또한 홍콩 달러의 고 평가는 쇼핑 센터로서의 매력도 상실시켜, 1997년에는 1996년보다 관광객이 11% 감소, 1997년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25.2%나 감소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여파로 홍콩의 관광객이 1997년에 8% 감소한 데 비해, 중국인 관광객은 27.1%나 늘었다.?? 중국은 시장 경제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홍콩에 대해 간섭을 자제함으로써 홍콩의 이전 모습을 유지시키고 싶어하지만 홍콩의 경제 안정을 위한 중국의 외환 시장에 대한 개입은 홍콩 경제에 대한 간섭의 시작이었다. 중국은 홍콩정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민주화 조치가 홍콩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을 연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7월 1일 민선입법국을 폐지하고, 인민 대표의 지시를 받는 임시 입법 위원회를 세웠다. 반환과 함께 대만과 외교 관계가 있는 국가의 홍콩 영사관 설립을 금지시키고, 2만 명의 대륙 인들이 홍콩의 고위 관리직을 맡도록 하는 약속을 어기는 등 중국은 적극적으로 홍콩 문제에 대해 간섭하고 있다. 이는 홍콩 인들이 중국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반환 협상이 마무리되자 1989년 50만에 달하는 홍콩 인들이 중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