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史왕건의 그림자에 가려져야 했던 견훤상경대학 상경학부32041128 김승환Ⅰ. 머리말 Ⅴ. 내부 분열과 후백제의 멸망Ⅱ. 견훤의 성장과정과 역사적 배경 Ⅵ. 견훤의 정책 성향Ⅲ. 후백제의 성립 Ⅶ. 맺음말Ⅳ. 궁예, 왕건과의 충돌Ⅰ. 머리말견훤[甄萱, 867-936, 재위 900-935]은 後百濟(후백제)를 세운 인물로, 後三國時代(후삼국시대)의 대표적인 軍陣勢力(군진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 같은 시기의 弓裔(궁예), 王建(왕건) 등과 함께 다루어지며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견훤이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최근에 이르러 견훤을 ‘견훤’이 아닌 ‘진훤’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甄’자를 성씨로 부르는 경우 ‘견’이 아닌 ‘진’으로 읽어야 하며 ≪三國遺事≫에 나온 그의 出生說話(출생설화)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후삼국시대의 승자는 왕건이기 때문에 견훤의 이름 문제뿐만 아니라 견훤의 여러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다소 소홀하게 쓰였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려는 견해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여기에서는 견훤의 성장과정에서부터 후백제의 건국 및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내용들을 알아볼 것이며, 또한 견훤과 후백제가 10세기 혼란스럽던 신라 하대 - 후삼국시대에 어떠한 영향과 의의를 갖는지 살펴보겠다. 더불어서 견훤이 오늘날까지 후삼국시대의 악역으로 그려졌지만 그 이면에 그가 가졌던 야망과 포부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한다.Ⅱ. 견훤의 성장과정과 역사적 배경견훤은 尙州(상주) 加恩縣(가은현),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성씨는 이였는데 훗날 견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는 阿慈介(아자개)로 상주지역의 농민 혹은 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머니는 확실치 않으나 아자개가 上院婦人(상원부인)과 南院婦人(남원부인) 두 처를 두고 있으므로 이들 중 한 명으로 보인다. 형제관계는 견훤이 5남 1녀 중 장자로, 그의 동생으로 能哀(능애), 龍盖(용개), 寶盖(보개), 小盖(소개)와 누이 大主刀金(대주란한 정치는 부패해 가는 신라 왕실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Ⅲ. 후백제의 성립신라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백성들의 원성은 견훤이 23세가 되던 해인 889년 상주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인 元宗(원종)과 哀奴(애노)의 난으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왕경에서 진압군이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규모가 크고 분위기를 압도했던 탓인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견훤의 부친 아자개가 장군이었다는 견해에 대하여 같은 상주지역의 원종과 애노의 난으로 인해 농민출신이었던 아자개가 세력기반을 확립하였음에 무게가 실린다고 볼 수 있다.고향에서 반란의 소식을 접한 견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경주의 귀족들과 그러한 귀족들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백성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더 이상 현업에 머무르지 않고 드디어 892년에 예하의 병력을 이끌고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견훤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호응이 메아리처럼 따랐으며 뒤를 따르는 대열은 한 달 사이에 5천 명으로 불어났다. 견훤은 이를 기반으로 현재의 광주광역시인 武珍州(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공식적으로 稱王(칭왕)하지는 않고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使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지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공 식읍 이천호)라고 자칭하였다. 같은 시기 北原(북원)에서는 도적 良吉(양길)이 강성하여 궁예가 그의 부하로 들어간 상태였다. 견훤은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무진주 성주인 池萱(지훤)과 현재의 순천지역 출신인 朴英規(박영규), 金摠(김총)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였다. 신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초기 세력이 대부분 피폐한 생활고를 참지 못해 일어난 농민, 초적들로 이루어졌던 것에 반해 견훤의 세력은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정규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현재의 전남지역을 석권한 견훤은 북상하여 전북지역으로 진출하여 현재의 전주인 完山州(완산주)에 입성하였다이었다. 신라가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이래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원수지간이라는 점에서 반당적 정서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견훤은 당나라와 일체의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그러나 견훤은 국제 정세에 밝은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서남 해안을 지켜왔기 때문에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백제와의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의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견훤은 吳越國(오월국)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오월국에서는 답례로 檢校太保(검교태보)라는 벼슬을 내려 기존의 관직에 더하였다. 기존의 직위에 더했다 함은 이미 견훤이 오월과의 교류로 인해 받은 爵位(작위)가 있음을 나타낸다. 渤海(발해)를 멸망시킨 契丹(거란) 및 옛 백제의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었던 일본과의 외교를 시도하여 발해를 통합한 고려를 견제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견훤은 확장된 세력을 바탕으로 35세였던 901년에 大耶城(대야성)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난다. 대야성은 현재의 합천으로 이미 삼국시대에도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54세였던 920년에 1만의 군사로 함락시키기 전까지 대야성은 신라의 최후방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굳건히 지켰다.Ⅳ. 궁예, 왕건과의 충돌어떤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면, 필시 근방의 다른 세력과 대립하거나, 교류하는 등의 접촉이 불가피하다. 견훤도 마찬가지였다. 무진주에서 시작된 그의 행진은 완산주를 수중에 넣고 도읍을 정하였으며 옛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남지역까지 그 세력이 확장된다. 같은 시기에 한반도 중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궁예였다. 궁예는 신라 제 47대 임금인 憲安王(헌안왕) 혹은 48대 임금인 景文王(경문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갓난아기 때 신라 왕실이 궁예를 제거하려고 하자 도망치던 과정에서 한 쪽 눈을 잃게 되었다. 이후 僧侶(승려)의 길을 걷다가 신라 왕실에 깊은 원한을 품고 기훤, 양길의 부하를 거쳐 스스로 자립하여 고려(후고구려)918년 8월에 아버지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歸附(귀부)한 일이었다. 견훤이 처음 무진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을 때에 자신의 관직명에 상주군을 명시했듯이 그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상주를 잊지 않고 있었지만 궁예에 이어 왕건은 전략적인 요충지인 상주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궁예 때부터 발생한 상주에서의 양측간 전투에 후백제가 연달아 패했고 결국 아자개는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귀부한 때가 918년인 것은 당시 왕건의 정변 직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 호족에 대한 저자세 포섭 노력이 있었으며 아자개가 고려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력보다는 고려의 공작에 의해 귀부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혹은 견훤이 일찌감치 15세 때 아자개에게서 독립하여 군인이 되었기 때문에 아자개의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상주에 그대로 있었던 동생들과의 갈등이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이러한 어려움 끝에 견훤은 드디어 920년에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현재 김해 일대로 추정되는 進禮城(진례성)까지 진격하였다. 즉 합천과 김해를 거쳐 경주까지 진격하겠다는 의도였는데, 위급함을 느낀 신라에서는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이에 응하여 군대를 보내자 견훤은 군대를 물렸다. 아자개의 귀부 이후 견훤의 신라 공격이 왕건으로 인해 좌절되자 그 이후부터는 후백제와 고려간의 갈등이 더욱 심각해졌다. 924년 견훤은 출병하여 현재 경북 의성으로 여겨지는 曹物城(조물성)을 공격하여 이듬해에 이르렀다. 왕건도 출병하여 조물성에 왔는데 이 전투에서 견훤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불리해진 왕건은 화친을 제안하여 견훤을 尙父(상부)라는 존칭을 부르고 볼모를 교환하자고 하였다. 견훤은 이에 응하여 고려에서는 王信(왕신)을, 후백제에서는 眞虎(진호)를 볼모로 각각 보냈다. 화친으로 고려를 묶은 견훤은 다시금 군대를 일으켜 전북지역(혹은 경북지역)의 20여개 성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볼모로 보냈던 진호가 926년에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진호를 죽인 것으로 간주하고 현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왕건의 충신이었던 申崇謙(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고 고려군은 대패하였으며 왕건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이후 벌어지는 후백제와 고려와의 전투에서는 후백제가 백전백승하였다. 그러나 왕건을 완전히 무릎 꿇게 하려던 청주 전투에서는 고려의 馬軍將軍(마군장군)이었던 유금필의 활약으로 후백제가 패한다. 그러나 여전히 후백제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으며, 계속된 세력 확장으로 인해 호남지역과 영남지역 서부, 충남지역이 모두 후백제의 판도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특히 나주를 탈환하여 후방의 걸림돌을 해소하였다.Ⅴ. 내부 분열과 후백제의 멸망경주를 함락시키고 이후 고려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한반도 남부에서 고려를 완전히 축출하려던 견훤의 의도는 현재 안동인 甁山(병산) 전투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侍郞(시랑) 金渥(김악)이 고려군에 생포되는 손실이 발생하여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탈환한 나주를 기반으로 함대를 조직하여 고려의 심장부인 예성강 일대까지 침공하는 등 반격을 도모하기도 하였으나 934년에 현재 충남 횡성인 運州(운주) 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바람에 견훤의 참모였던 술사 종훈과 의자 훈겸이 생포되었고 이 패전 소식이 알려지자 웅진 이북의 30여개 성이 일제히 고려에 항복하였다. 운주 전투는 견훤이 직접 지휘한 마지막 전투로, 이 전투를 패함에 따라 견훤은 후계 구도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견훤의 슬하에는 神劍(신검), 良劍(양검), 龍劍(용검), 그리고 이 셋과 이복형제였던 金剛(금강)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적자승계원칙에 따라 신검이 양위를 받았어야 했지만 최근 고려와의 전투에서 밀리고 측근들이 고려에 생포되거나 귀부하는 등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원칙보다는 실리를 추구할 필요성이 있었다. 막내였던 금강은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언제나 견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결국 견훤은 자신의 寶位(보위)를 이을 왕자로 금강을 선택했고, 나머지 세 아들은 伊?(이찬) 能奐(능환)과 함께 모반을 준비한다.견훤이 69세였던 935년
제 15장가격의 결정과 관리화 학 과 32047123 권미연 회 계 학 과 32041128 김승환 중어중문학과 32067143 김준환 시각디자인과 32050401 조수민 법 학 과 32052519 최혜민 경 제 학 과 32051197 하주희목 차1.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2. 가격결정의 목표3. 가격결정방법4. 가격전략의 실행 및 최종가격결정1.1 소비자 1.2 원가 1.3 경쟁 1.4 유통경로 1.5 정부의 규제2.1 매출중심적 가격목표 2.2 이윤중심적 가격목표 2.3 현상유지적 가격목표 2.4 기타 가격책정의 목표3.1 비용중심적 가격결정 3.2 소비자중심적 가격결정 3.3 경쟁중심적 가격결정 3.4 통합적 가격결정4.1 심리적 가격전략 4.2 초기고가전략과 시장침투가격전략 4.3 가격할인과 공제 4.4 가격차별화 4.5 제품결합을 통한 가격책정1.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가격 결정소비자유통경로원 가경쟁환경법적 규제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1.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소 비 자원 가경 쟁유통경로정부 규제1.1 소비자(Consumer)가격판매량수요곡선※ 수요의 법칙: 소비자들은 제품의 가격이 낮을수록 더 많은 양의 제품을 구입한다.1.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소형 경승용차대형 고급승용차탄력적인 수요와 비탄력적인 수요의 비교가격 (만원)가격 (만원)수량(대)수량(대)7006005,0004,000※ 수요의 가격 탄력성: 제품의 가격이 변화함에 따라 판매량이 얼마나 변화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 ※ 다만 모든 소비자들이 가격 변화에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소 비 자원 가경 쟁유통경로정부 규제30,000100,00030,00050,0001.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1.2 원가(Cost)원가: 가격의 하한선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비용보다 낮게 제품가격을 책정하는 경우 ① 기업이 일시적으로 경쟁사와의 가격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②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③ 현금의 유동성 을 저가로 공급해야 하는 할인점 특성상 납품가격을 일시에 인상하는 것은 불가능소 비 자원 가경 쟁유통경로정부 규제1.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1.4 유통경로(Distribution Channel)자기점포의 매출 확대, 적정이윤 확보로 제조업자의 제품가격 결정에 영향도,소매업자가 적정이윤을 확보하는 방법납품받은 제품의 재고분 반품 요구마진이 적은 제품의 납품 거절경쟁사 제품을 같이 진열제조업자가 가격통제력을 확보하는 방법전속적 유통경로 선택가격할인 지향적인 중간상과 거래 지양강력한 브랜드 이미지 구축소 비 자원 가경 쟁유통경로정부 규제1.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1.5 정부의 규제(Government Regulation)*제품가격에 대해 정부의 규제가 이루어지는 경우 ① 생필품의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법적으로 제품가격을 일정수준으로 동결 ②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제품들에 대한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최저가격 설정 ③ 세금을 부과하여 일정수준 이상으로 가격 유지 ④ 제조업자들 간의 가격담합, 유통업자들 간의 가격담합, 제조업자와 유통업자 사이의 가격담합을 법적으로 규제정부 규제의 사례 – 50가지 생필품 지정소득계층 40% 이하의 소비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품목 선정쌀, 돼지고기, 밀가루, 배추, 무, 마늘, 달걀, 우유, 라면, 학원비 등강제적인 가격 통제보다는 수급 조절을 통한 적정 가격 유도소 비 자원 가경 쟁유통경로정부 규제2. 가격결정의 목표마케팅 목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가격결정 목표 설정 시가격 목표매출 중심적기타 목표현상 유지적이윤 중심적2. 가격결정의 목표2.1 매출중심적 가격목표(Sales-Based Objectives)매출 중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시장 침투가격을 채택한다.침투가격이 효과적인 경우표적소비자들이 가격에 민감할 때규모의 경제가 확보 가능할 때경쟁자들의 진입 을 저지 가능할 때매출중심적이윤중심적현상유지적기타 목표2. 가격결정의 목표2.2 이윤중심적 가격목표(Profit-Based Obje하는 경우가격 = (10,000,000 + 20,000 X 200 + 1,000,000) / 200 = 75,000(원)3. 가격결정방법(2)가산이익률에 따른 가격결정(Markup Pricing)제품 한 단위당 생산비용이나 구매비용을 계산한 후 적정이익을 남길 수 있는 수준의 가산이익률을 결정하여 가격 결정예) 무선전화기 제조업체가 제품생산 단위당 2만원의 비용이 들고 이에 50%의 가산이익률을 부가하여 판매하고 싶은 경우가격 = 20,000 / (1 - 0.5) = 40,000(원)비용중심적소비자중심적경쟁중심적통합적3. 가격결정방법(3)목표투자이익률에 따른 가격결정 (Target Return Pricing)기업이 목표로 하는 투자이익률을 달성할 수 있도록 가격을 설정예) 무선전화기 제조업체가 신도시에 공장을 건설하는 데 2천만원을 투자하고, 이 투자비용에 대한 목표투자이익률을 30%, 표준생산량은 200대, 단위당 2만원의 비용이 드는 경우가격 = 20,000,000 X 0.3 / 200 + 20,000 = 50,000(원)비용중심적소비자중심적경쟁중심적통합적3. 가격결정방법(4)손익분기점 분석에 의한 가격결정(Break-Even Analysis)손실을 면하는 범위에서 손익분기점 분석을 해서 가격을 책정예) 위에서 언급했던 무선전화기 제조업체 – 총 고정비 2,000만원, 판매가격 4만원, 단위당 변동비가 2만원인 경우비용중심적소비자중심적경쟁중심적통합적3. 가격결정방법손익분기점(판매량) = 20,000,000 / (40,000 – 20,000) = 1,000(개) 손익분기점(매출액) = 20,000,000 / (1 – 20,000 / 40,000) = 40,000,000(원)비용 · 매출 (만원)수량(대)4,0002,000고정비1,000손실(loss)이익(profit)0손익분기점(BEP)비용중심적소비자중심적경쟁중심적통합적3. 가격결정방법3.2 소비자중심적 가격결정(Consumer Based Pricing)생산비용보다는 표적시장에서의 소비자들의 상품에 대한 평가제시4,000,0000.140,000,00080,000,000120,000,0006,000,0000.230,000,00080,000,000110,000,00010,000,0000.520,000,00080,000,000100,000,0007,000,0000.710,000,00080,000,00090,000,000기대이익입찰 성공확률이 익비 용입찰금액비용중심적소비자중심적경쟁중심적통합적3. 가격결정방법3.4 통합적 가격결정(Combination Pricing)실제로 기업이 가격을 결정하는 데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가격결정방법 세 가지를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비용중심적 가격결정소비자중심적 가격결정경쟁중심적 가격결정비용중심적소비자중심적경쟁중심적통합적종합4. 가격전략의 실행 및 최종가격결정최종가격 결정심리적 가격전략초기고가 전략,시장침투 가격전략가격할인과 공제가격차별화제품결합을 통한 가격책정최종적인 제품가격의 결정과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검토4. 가격전략의 실행 및 최종가격결정일반적으로 판매가격을 책정할 경우 35,000원과 같이 단위 수를 맞춰서 책정되지만 쇼핑몰에는 34,900원에 판매하여 35,000원에 비해 저렴하다는 인식을 줌4.1 심리적 가격전략가격과 품질간의 연상관계 형성 – 가격을 품질의 지표로 사용단수 가격 설정화폐단위로 가격 책정 시 가격을 실제보다 저렴하게 지각하게 하는 방법단수 가격 설정의 사례 - 잭필드 춘추정장바지심리적초기고가, 시장침투가격할인 및 공제가격차별화제품결합4. 가격전략의 실행 및 최종가격결정준거 가격소비자들이 심리적으로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가격수준 자사제품의 준거 가격을 높게 설정하도록 유도한 뒤 준거 가격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심리적인 구매 욕구를 자극하여 판매심리적초기고가, 시장침투가격할인 및 공제가격차별화제품결합준거 가격을 이용한 사례 – 할인점의 1+1(One Plus One)우유부터 시작해서 두부, 음료수 등에 이르기까지 가격 인상을 시행하면서도 할인점과 연계하여 끼워팔기를 함으로써 고객이 집중되는 시간과 한가한 시간에 따라 다른 가격 적용가격차별화 사례 – 국제전화하루 동안 이용자가 많지 않은 심야 시간대에 할인을 하여 피크 타임(peak time)과는 다른 가격대 형성 이외에도 가격대를 주말과 평일로 구분하는 숙박, 레저시설, 계절로 구분하는 국제항공요금 등심리적초기고가, 시장침투가격할인 및 공제가격차별화제품결합4. 가격전략의 실행 및 최종가격결정4.5 제품결합을 통한 가격책정(Product-Mix Pricing)(1)가격계열화(Price Lining)한 제품의 단일가격이 아닌 품질이나 디자인에 따른 다양한 가격대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구체적인 가격 설정가격계열화 사례 –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브랜드 런칭심리적초기고가, 시장침투가격할인 및 공제가격차별화제품결합Emporio ArmaniGiorgio Armani4. 가격전략의 실행 및 최종가격결정(2)2부제 가격(Two-Part Price)2부제 가격 사례 - 놀이공원놀이공원을 들어가기 위한 기본입장료와 각 놀이기구를 이용하는데 따른 추가적인 사용료 지불(3) 제품묶음 가격결정(Price Bundling)기본적인 제품과 선택사양, 서비스 등을 묶어서 하나의 가격으로 제시하는 것서비스가격 이원화제품묶음 사례 – 소프트웨어 패키지오피스 제품군의 경우 각각의 프로그램을 별도로 구매하는 것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꾸러미 판매심리적초기고가, 시장침투가격할인 및 공제가격차별화제품결합로 그 일 지1차 모임: 방과후 강의실 모임모임 일시: 2008년 6월 25일 오전 11시 40분 경 모임 장소: 강의실(법경관 507호) 참여 인원: 총 6명 중 6명 참여 회의 내용: 조원 소개, 역할 분담, 과제물 작성 방향 결정, 조 클럽(카페) 개설 (싸이월드 클럽 – 2008년 여름계절학기 마케팅 5조 모임, url=http://club.cyworld.com/dkumkt05)조원 구성 및 역할 분담조 장: 김승환(회 계 학 과 32041128): 각 단원별 사례조사 및 PPT 작성, 발표(3,4단원) 조 원:
양명학의 한계와 비판상경대학 상경학부32041128 김승환양명학은 지행합일을 강조하여 이론에 국한된 주자학의 대안으로 양명 왕수인이 주창한 유가철학의 한 학파이다. 주자학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여 주로 명나라 시대에 유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양명학은 조선시대 두 차례의 왜란 이후 조선 사회에서 깊이 뿌리내렸던 성리학의 무력함을 자각하여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주로 남인과 소론 계층을 위주로 양명학 사상을 연구하였는데, 기존의 보수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경전 해석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성리학이 조선의 절대적인 중심 사상이었던 탓에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우암 송시열은 주희의 경전 해석에 반하는 모든 의견들에 대하여 ‘사문난적’이라 이단시하여 소론을 탄압하는 등 조선에서의 양명학은 널리 유행되지 못하였다.중국에서는 성리학에 대해서 주로 양명학자들이 비판하던 것에 비해 조선에서는 양명학이 크게 보급되지 못한 대신 청나라가 들어서고 난 후 고증학의 영향으로 인해 비슷한 시기에 실학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양명학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양명학이 갖는 한계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우선 사람이 별도로 깨닫지 않고도 저절로 깨닫게 되는 양을 별도로 깨달음을 통해 치를 이룬다는 양지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고 백성이 임금을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인데, 이를 효심이 있고 충심이 있어 따르게 된다고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을 기반으로 인간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불인지심을 기반으로 하는데, 심즉리를 통해 인간의 내면에 천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행합일을 기반으로 ‘양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해 끊임없는 실천으로 치양지설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다산 선생은 왕수인이 갖는 이중성에 대해서도 비판했는데, 양명학이 당초 주자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이면서 경전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인 계층과 글을 읽기 어려운 일반 백성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어떤 면에서는 계급의식을 조장했다고도 볼 수 있는 측면을 지적하여 비판하였고, 누구나 인간의 본성을 통해 양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왕수인 역시 경전을 해박하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일반 민중들 역시 왕수인과 같은 치양지를 불인지심으로써 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인간의 끝없는 소유욕에 대해서도 본성이라 하여 이를 양지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양명학은 천리가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만물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여겼는데, 이는 천리로 하여금 만물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를 추구하게 된다. 고로 만물에 대한 인식도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불인지심으로 인한 인간 본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만큼 만물에 대해서도 인간이 바라보고 사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양지를 이루는 치양지에 대해 양명학에서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는데, 양지를 달성하는 데 규범이 있다고 주장한 우파에 비해 좌파는 인간의 순수한 감정으로서 양지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파는 양지에 대한 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치양지라고 보았지만. 좌파는 인간의 감정에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을 치양지로 보았던 것이다. 우파의 경우 지속적인 인격수양을 기초로 한 주자학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으나, 좌파의 경우 치양지를 인간의 욕망에 근거할 우려를 안고 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통해 치양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인간의 감정을 제재하는 규율에 반대하면서도 인간의 행동이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과연 양지를 추구하는 길인가의 설명, 즉 양지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내면에 위치한 심성을 체계화하고 내면의식을 공유하여 최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정약용보다 앞선 때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중 하나인 퇴계 이황 선생도 양명학에 대하여 비판했는데, 주로 양명학의 불교적인 측면을 지적하였다. 심즉리는 물(物)에 대해 사물의 이가 아닌 심의가 있는 인간사라고 주장한 것인데 최초로 심즉리가 언급된 것은 양명학이 아닌 당나라 시대 불교학자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불교학자뿐만 아니라 도교학자들과 유교학자들도 연구하였던 원각경의 경우 청정원각이라고 하여 깨끗한 본성을 통한 수행을 일컫고 있는데, 곧 왕수인이 주장하는 치양지도 인간의 참된 본성을 언급하였고 그러한 본성을 통해 양지를 확충시키는 격물치지, 즉 심즉리에 이르는 것과의 유사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퇴계 선생은 양명학에서 호호색이라 하여(호색을 아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일치한다고 주장)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같다는 지행합일설을 비판하는데, 지행합일은 형기라는 본능적 측면에서만 인정될 뿐 윤리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와 행은 사람의 다리나 새의 날개, 수레의 바퀴와 같이 하나가 아닌 서로 나뉘어 조화를 이루는 상수 병진을 내세워 지행병진설을 주장하였다.양명학에 대한 비판은 청대 이후 유행하였던 고증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고증학은 경세치용을 주장하여 민생 안정과 고전에 대한 실사구시를 강조하여 매우 실증적인 성격을 갖는 학문이었다. 본래 양명학은 주자학의 엄격한 유교적 성격과 규율 등에 반발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던 학문이었으나, 명 말기 혼란에 빠진 사회에 대해 양명학의 극단을 이루었던 좌파는 사회 문제에 대하여 비판하지만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치양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던 것이 문제였다. 공자가 제시한 사상들을 단순히 똑같이 답습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주자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참신한 접근방법으로 볼 수 있지만, 새롭게 바뀌고자 하는 사회상에 대한 방법 및 그로 인한 영향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명학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탁오는 당시 사회의 엄격한 유교적 사고관과 사회 모습들에 대하여 전적으로 비판하였는데, 기존의 유가에서 중시했던 사상들 및 당시에 이르기까지 통용되었던 역사의식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폭군으로 인식되고 있는 진시황에 대해 그의 업적 등을 주장하며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는가 하면 유교 사회에서 당연시 되는 여성 차별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하기도 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며 극단적인 내용들이었다. 이는 혼란하면서도 기존 사회의 폐단이 나타났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냈으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이 되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즉 당대의 사회가 갖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는 있었지만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의 부재로 인해 객관성을 이루는 기준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양명학이 사회의 변화를 주장하면서도 그 변화를 위한 실천이 실제로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궁극적으로는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 자체를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만 야기하였기 때문에 실사구시의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함을 보여 청대에 이르러 고증학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양명학이 명대에 다루어졌던 학문이었다는 측면에서 청대에 새롭게 등용된 학자들이 직전 왕조의 학문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기 어려웠으리라는 생각도 가능할 것이다.
동양사상의이해 - 서평과제“유교 아시아의 힘”상경대학 상경학부32041128 김승환“유교” 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는 우선 전통 한옥에서 유교 사서로 글공부와 글짓기를 하는 조선시대 선비와 어르신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서주 시대의 이상향을 그려 왔던 조선시대의 틀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유교는 과연 우리 사회에 지금까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이 남아있는지 궁금함을 갖게 되었다. 『유교 아시아의 힘』을 읽게 된 계기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산업혁명 이후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동양에서도 서구 중심의 사회 발전이 이루어졌다.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기존에 채택했던 전통적인 사상을 버리고 서양의 사상들을 수용하였으며, 전통적인 문화는 국가의 근대화를 저해했던 악습으로 취급하고 폐기하는 데 앞장선다.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의 요지는 유교가 아시아의 근대화에 정체를 가져온 측면도 있지만, 유교야말로 21세기 현대사회 발전의 원동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 생각에도 유교가 아시아 발전에 보이지 않는 공헌을 이루어왔다고 생각한다.유교가 현대 아시아 국가들의 발전에 공헌한 데에는 도덕적인 측면이 많이 작용했다고 본다. 핵심 사상인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하여금 인간의 심성을 바로 잡아 매사에 옳고 그름을 확실히 판가름하여 임하는 것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농경 사회는 가부장적인 대가족 위주였는데, 이러한 가족 제도 때문에 유교의 정착이 더 용이했다고 볼 수도 있다. 대가족 제도는 다양한 연령대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가정 밖에서 촌수가 없는 사람을 대할 때에도 가족과 같은 대우를 펼치는 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경우에도 서슴지 않고 인정으로 하여금 도와주는 모습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가 통용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대가족 제도에 기인한 사회 형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오늘날 많은 기업들에는 도덕적 윤리의 규범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바로 윤리 경영이다. 단기적인 이익과 폭리만을 추구하여 소비자에게 피해를 끼치는 기업들은 오래 가지 못하여 소비자의 외면을 받는 법이기 때문에, 당장 직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두에게 더불어 이로울 수 있는 기업의 윤리관을 제시하여 공생을 추구하는 기업이 성공한다고 하였다. 본서에서는 중국 휘주 지방의 상인 계층이었던 유상과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 오늘날 아시아의 기업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상도(商道)를 다루었다. 분명 윤리 경영은 서구 국가들의 기업들이 표명한 경영 기법이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윤리 경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뿐, 이미 윤리 경영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유교는 교육 측면에 있어서도 우리가 알고 있던 고리타분함이기보다는, 올바른 교육의 청사진으로 제시되고 있는 전인교육의 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였다. 단편적인 글공부뿐만이 아닌, 지덕체(智德體)를 함양하는 음악, 활쏘기 등의 다양한 수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최근 문제시되고 있는 획일화된 교육에 대해서도 이에 반해 유가 사상의 교육이 이루어졌던 당시에는 같은 질문이라도 제자들의 개성에 알맞게 서로 다른 답변을 통한 맞춤형 교육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본서를 읽어보면 유교가 지금까지 동아시아 국가들이 발전을 이루었던 원동력으로 서술하였고,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도 개인주의로 인해 얼룩진 사회의 해결책으로서 다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교가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를 저해했다는 측면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없어져야 할 악습은 결코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그러나 유교가 과연 동아시아 국가들을 쇠퇴시키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우선 우리나라의 경우 동시대의 다른 국가들은 물질적으로 상당한 근대화를 이루고 있는 와중임에도 불구, 실체가 확실치도 않았던 서주 시대의 모습을 계속 지향해왔다. 서구 열강들이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발명품으로 사회 발전을 이룩하는 동안, 조선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결국 일제에 의해 수동적인 근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유교를 전면적으로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극단적이고 위험한 접근이다. 그리고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서 조선 사회의 전통을 본받아야 할 점도 많이 있겠지만, 철저한 숭유국가였던 조선의 유교에 대한 접근 방법에는 진부한 측면이 역력하다고 볼 수 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많은 책을 읽고 되새기는 것은 좋았지만, 그 것이 끝이었다. 오로지 선대에서 이어져 왔던 관점에 입각하여 유교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국제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와중에 융통성 있는 정책을 보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에 대해 지나친 모화사상을 일으켜 국가의 자주성을 침해하였고, 사농공상에 입각한 사회 질서는 경직된 계급구조를 보였다.그러나 유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경우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개혁 요구는 표면적으로는 전통적인 유가 사상의 틀에서 동떨어졌다고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 역시 유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인지했던 경우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많지 않았다. 다만 미시적인 틀에서 인의예지와 예로 하여금 당대(當代)에 미덕을 보여준 사례들과 오늘날 선진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론들 속에는 이미 동양의 유교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내용들이 상당수 함축되어 있다. 즉, 동아시아 사회는 유교로써 정신적 · 물질적의 양면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근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예(禮)에 너무 집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유가 사상의 초석이 마련되던 무렵의 동아시아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여성에 대해 차별적이며 조직 내부 구성원간의 엄격한 상하 위계질서를 갖는 관료적 성향을 보였기에 그러한 모습을 정상적으로 바라봤겠지만, 수많은 세월이 흐른 현대 사회에까지 이를 짜 맞추기에는 무리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만약 공자가 오늘날 혹은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19세기에 살았다면 과연 어떠한 주장을 펼쳤을까? 급격한 사회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을 공자는 서구 문물이 도입에 대해 위정척사 사상만으로 일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일본 근대화를 성공으로 이끈 메이지 유신이나 비록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지만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나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사용함에 있어서도 근본은 유교 사상의 가르침으로 하여금 그 사용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민주주의의 바탕이 철저한 개인주의로 인해 집단과 개인을 이분화하고, 비인간적인 산업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 소외 문제, 갈등적인 성향으로 인해 공생하지 못하고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음과 동시에 피해를 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동아시아의역사와문화 서평과제맹자(孟子)상경대학 상경학부32041128 김승환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왕도정치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책 「맹자」는 맹자가 전국시대에 각국을 거치면서 그 나라의 왕과 나눈 이야기들을 위주로 담고 있다. 그 이야기에는 맹자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올바른 정치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혼란이 극도로 치닫던 전국시대의 와중에 그가 생각했던 이상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접근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맹자는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백성들의 생활을 과하게 착취하지 않으면 보다 풍족한 삶을 영유할 수 있으므로 그 이후에 대외팽창 정책을 펼친다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0쪽 5편).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는 보민 정책을 통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24쪽 7편). 이처럼 맹자는 국가의 세력을 확대하거나 세력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 백성을 동원하는 것에 대해 우선적으로 백성의 안위부터 살핀 후에 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서 군대를 일으켜 천하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27쪽 7편 4째줄). 이러한 맹자의 주장을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민 복지정책을 강화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을 구제하고 생업에 종사토록 하여 나라 안 곳곳이 풍요로움을 이루게끔 하는 것이다. 병장기를 들게 하고 군대를 일으켜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세력을 넓히는 것은 백성들의 삶이 풍요로워진 이후에 행하라는 것이 순서의 요지일 것이다.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취지는 좋지만, 과연 그 후에 군대를 일으키는 등 국가 팽창을 추구해도 될 정도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함이 있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기 때문에 과연 풍요로운 삶을 영유한 이후에도 국가의 동원을 많은 부담을 안겨줬을 것이다. 이토록 임금이 백성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백성들은 임금의 뜻을 마냥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국민과 함께 하는 여민동락의 모습을 보일 때(혹은 보이고자 노력할 때), 국민들은 정치인들에 대해 전제적이고 위압적인 정치로 멀리 떨어진 느낌이 들기보다는 공감대와 친근감이 발생하여 정치인들이 펼치는 정책에 대해 기꺼이 따르리라 본다. 동아시아 역사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에서도 성군으로 칭송받는 왕들은 대개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함과 동시에 부국강병책을 펼친 군주들이 많이 있다. 전제 정치를 통해 왕권을 확립한 군주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고 볼 수는 있겠으나 당시대 백성들이 그 군주를 바라보는 시각은 오늘날의 시각에 비해 결코 좋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다.왕도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맹자는 국가의 규모가 전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63쪽 3편) 이는 국가의 양적인 수준보다 질적인 수준의 중요함을 둔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있는데, 세계 경제 대국들을 보면 국가의 규모를 키운 강대국들도 있지만 영토와 군사력이 보잘것없음에도 높은 부를 창출하는 국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오늘날의 방향과 방법이 옛날과 다른 면이 많지만 국민들이 잘 사는 국가가 반드시 국력이 강대한 국가인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역으로 국력이 강대한 국가에서도 빈곤에 처한 국민이 많은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당장 국가가 놓인 상황보다는 자신의 삶이 어떠한가부터 살펴보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 과연 객관적인 삶의 질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삶의 질인지에 의해서인지에 대해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공산주의 사상의 경우 많은 국민들이 평등을 이루어 생활할 수 있었지만, 객관적인 토대로서의 삶의 질은 열악했던 것을 보면 모든그만큼 백성이 국가 발전에 있어서 최우선순위에서 다루어야 할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이 말과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안위되면 어떤 사람이 정치하는지에 대해서 고집하지 않거나 덜 고집하게 된다. 점차적으로 국민들에게 인정받는 정치인들은 설령 그 이후에 다른 이들로 바뀌게 되더라도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추구하는 이상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국가 발전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맹자는 남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인 불인지심을 다루고 있다(66쪽 6편). 여기에서 확대되어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시비지심) 등을 나타내고 있다. 확대된 네 가지 단을 통해 인간에게는 누가 따로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특별한 목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행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타고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곧 맹자의 성선설과도 연결되는데, 배움의 목적은 선하게 타고난 본성이 변질되지 않도록 인의예지를 꾸준히 연마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등 견해가 나눠지기 때문에 확실하게 결정짓는 것이 어렵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순자의 경우 성악설을 주장하며 인간이 나쁜 본성을 타고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꾸준히 배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맹자 역시 인간의 본성을 보는 견해만 다를 뿐 배움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떠한 본성을 타고났는지가 중요하기보다는 배움으로써 본성을 선하게 하게끔 하는 데에 중점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어린 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때를 예로 들었는데, 이는 인간이 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심리가 묘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다지는 것도 별도의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자연스은 사람들은 동양 사상의 경전들을 구시대의 유물이라 하여 현대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맹자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이란 마치 서양 르네상스 인문학의 이성주의와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이고 보다 궁극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핵심이 되는 본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더 멀리 나아가 이는 청교도의 금욕주의와도 상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맹자는 공자의 유가 사상뿐만 아니라 도가 사상을 일부 수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도 볼 수 있다(133쪽 17편).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을 따름이다.”라는 구절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원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임해야 할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연시되는 현상은 마치 도가의 무위자연과 같이 자연의 이치에 알맞게 두라는 뜻을 가질 수도 있다. 인위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자연적인 것을 분류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맹자는 인간의 불인지심을 무위자연의 범주에 포함시켰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불인지심을 통해 인간의 삶이 영유될 수 있고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보았을지도 모른다.벼슬에 오른 관리가 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맹자는 탕 임금 시대의 이윤 이야기를 하였다(102쪽 7편). 탕 임금은 폐백을 갖춰 이윤을 초빙했는데도 이윤은 거절하였는데, 이는 군자의 도리가 부귀영화에 있지 않음을 보이고 있다. 이윤은 요순임금 시대의 도를 행하기 위하여 이러한 탕 임금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훗날 이윤은 탕 임금을 도와 덕행을 통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데에 앞장서는데, 옳지 못한 수단으로 얻어지는 부는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사뭇 다른 이윤의 이야기가 있었다(109쪽 1편). 백이가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관직에 임하지 않고 안빈낙도를 추구했는데 반해 이윤은 ‘누구를 섬긴들 군주가 아니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여 치세와 난세에 나아다는 당장에 가시적인 성과, 혹은 대인관계를 필요로 하며 목적에 어긋나는 대인관계는 소홀히 여기는 현상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교제에 있어서, 대인관계 형성에 있어서 물질이 주가 아닌, 마음이 주임을 일깨워줄 수 있는 구절이라고 본다. 지나치게 물질을 추구해오면서 단순히 인간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물질 추구에 입각한 의사결정을 내리게 되고, 국가들도 서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게 되어 국가 간의 분쟁이 비롯되는 것이 지금까지 역사상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교권의 입지가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맹자는 가르침을 행하는 선비, 스승에 대해 왕과 제후들이 갖는 자세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제후뿐만 아니라 왕(천자)도 자신의 스승을 섬김으로 대하며 부르거나 벗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스승과 동일선상에 놓인 채로 학문을 연마한다면 옳은 가르침을 배울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오늘날의 경우 사제간에 있어서 인간 대 인간으로 동일한 인격체로 놓고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맹자가 말하는 스승의 모습과는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성 면과는 달리 제자가 스승을 대함에 있어서는 부모를 대하듯 섬김으로써 공경해야 비로소 스승의 가르침을 새겨듣고 몸소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승을 섬기지 않거나 업신여긴 채 학문을 추구한다면 결코 그 가르침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지기란 무리일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차마 어쩔 수 없는 선한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는 학문을 추구하는 것을 강조했는데(144쪽 38편), 이는 곧 교육과도 직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위해 끝없는 배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배움을 이루게 해주는 교육자가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이다. 교육이 강조되고 올바르게 확대되기 위해서는 스승을 모시는 자세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추락된 교권이 바로 잡혀질 수 있도록 교수학습내용의 발전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인격체를 형성할 수 있는 체계화된 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