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를 통한기호학적 비평기호학의 정의기호학이란,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과 기호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기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공유하는 행위와 그 정신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호학의 전통은 철학의 전통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스토아학파,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 근대 철학자들이 모두 기호와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중국에서는 역(易)의 체계가 바로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 해석을 시도한 작업이었다.기호학이 의미 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면서도 특히 의미 작용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정신적 과정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만일 인간의 삶 전체를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야말로 기호 작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질서에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번역, 해석하여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바꾸어 나간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호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살다가 그 안에서 죽는 것이다. 오늘날 기호학이 기호가 가진 힘과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몫뿐만 아니라 기호의 과잉에 따른 위험을 지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기호학과 문학문학은 담화를 토대로 글로 만들어 지고 문학 고유의 언어를 이루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텍스트의 기호학적 분석은 모든 담화가 어떤 거시기호나 기호들의 집합이 아니라 발화 작용이 맡고 있는 의미작용의 진행과정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기호학적 이론은 의미작용의 총체로서 여겨진 담화의 분절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기호학적 이론은 그것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 ‘의미작용의 총체’ 를 분할해야 한다. 그 가능한 방법 가운데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개개의 텍스트 안에서 상당한 숫자의 형식적 단위들을 인식하는데 있을 것인데, 그 한계는 독서에서 알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단절들, 즉 공간적 단절, 시간적 단절, 행위적 단절 등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다. 결국엔 ‘최소 단위’ 의 문제와 부딪치게 되고 그 절단이야 말로 작업이 스스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기호학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호들의 접근을 대상으로 마련되었다기보다는 텍스트들의 접근, 살아있는 담화들의 접근을 대상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기호학이 일찍부터 문학 텍스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상당히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기호학이 신화와 옛날이야기들에서 경험을 쌓은 방법들로 문학텍스트를 연구한다는 것을 곧바로 명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 기호학은 그 점에서 문학 텍스트에 관한 일종의 ‘구조인류학’ 이었다. 물론 새롭고 풍요로운 조명이지만 문학전문가들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기호학은 점차적으로 일종의 담화 기호학이 되었다. 즉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출발 당시에 지향했던 것을, 다시 말하면 기호의 이론이 아니라 의미를 나타내는 집합들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기호학은 살아있는 담화를, 발화되고 있는 담화를 파악하게 해주는 도구들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 담화는 고유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구조들과 동기들과 상황들과 결합들의 미리 설정된 ‘보고’에서 구조들과 동기들과 상황들과 조합들을 끌어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기호학은 자기자리 전체를 텍스트 속에서 발화 작용의 ‘종사자’ 의 재현에만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발화 작용 행위에, 발화적 조작에 되돌려 줌으로써 특정한 형식을 제시하는 하나의 발화체로서 뿐만 아니라 특정한 발화 작용으로, 자크 제니나스카가 말하는 하나의 ‘문학적 파롤’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기호학이 협력하고 있는 개개의 학문분야에 그 고유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 기호학이 아니다. 반면에 기호학은 어떤 점에서 어떤 문제를 어떤 학문분야에서 지적할 능력이 있고, 다른 분야에서 어떤 다른 문제에 반향한다. 따라서 기호학은 가설들과 개념적 도구들과 해결책의 교환을 위한 가교를 제안한다. 기호학적 문제를 제기 했을 때 기호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방식을 제안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또한 기호학적 성격의 문제를 제기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담화의 기호학적 이론을 제안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방법의 용어로 제기된 문제에 대한 기호학적 관점의 공헌이 어떤 것일 수 있는 지 증명하는 것이다.우리나라 문학관에 비춰진 비평 방법(한국 시를 통한 기호학적 비평)기호학의 중요성은 여러 문학 중에서도 ‘시’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시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언어로 되어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그것은 체 계와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호학과 가장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시의 리듬, 이미지, 정조는 언어를 통해 해석될 때 의미를 가진다. 해석되지 않은 것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언어적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는 언어적인 해석을 통해 드러날 밖에 없다.또 시의 언어를 일상어나 자연어와는 다른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상정한다. 이것은 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시적인 여러 요소들의 배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시는 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것이다. 시 해석의 정답은 없다. 독자는 자신 이 놓여 있는 시공간 안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시는 독자에 의해 해석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시의 언어가 일정한 체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분절이 필요하다. 분절이란 구조화되지 않은 막연한 덩어리를 구조화하는 것이다.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 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나그네」 전문이 시는 무엇을 기준으로 분절할 수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분절했을 때 이 시가 가지는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을까? 이 판단은 물론 해석자에게 있지만 해석자의 그것은 시 텍스트를 여러 번 정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시 텍스트를 해석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하이데거는 ‘은폐된 의미들의 탈은 폐’라는 말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은 어떤 도구적인 연관성 없이 숨어 있는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구적 연관성 없이라는 말은 먼저 ‘텍스트 그 자체’에서 해석의 길을 트라는 것을 뜻한다. 텍스트 그 자체의 문맥에서 보면 이 시에서 중심적인 지배소는 ‘간다’는 단어이다.‘간다’는 이 시에서 3번(가는2, 건너서1) 드러난다. 이것은 이 시의 해석에 시간성을 분절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해석의 온전함이라는 측면에서 타당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간다’라는 지속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는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간다’는 말이 드러내는 계기적인 질서는 공간성으로 투영되면서 명확하게 드러난다.(시간은 언제나 공간과의 결합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간다’는 시간성은 ‘강나루’, ‘밀밭 길’, ‘구름’, ‘달’, ‘남도 삼백리’, ‘노을’, ‘마을’ 등의 공간성과 만나면서 보다 구체화된다. 즉 시간성이 공간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공간성은 다시 a와 b로 분절된다. a는 천상이고 b는 지상이다. a는 초월적인 시공의 의미가 강하고, b는 현실적인 시공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a와 b는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만일 a와 b가 대립적이라면 이 시는 천상과 지상 사이의 비동일성의 의미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a와 b는 대립이 아닌 대응, 좀 더 정확히 말하면 a가 b를 감싸는 의미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천상의 시공성이 지상의 시공성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가 천상과 지상 사이의 동일성의 의미구조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상과 지상 사이의 동일성이 뜻하는 것은 시인의 걷기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그를 청록파 혹은 자연파 시인이라고 하는 지를 그의 시의 시공간에 대한 의미구조를 좀 더 자세하게 해명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시는 은유와 환유로 구조화되어 있다. 은유란 한 기호가 기호내용의 유사성, 즉 계열적 관계에 의해 다른 기호로 전환하는 것을 말하며, 환유란 한 기호가 기호내용의 인접성, 즉 통합적 관계에 의해 다른 기호로 전환되는 것이다. 즉 은유는 계열적 전환이며, 환유는 통합적 전환이다.말아, 다락같은 말아/너는 즘잔도 하다마는너는 웨그리 슬퍼 뵈니?/말아, 사람편인 말아,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이말은 누가 난줄도 모르고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잔다- 정지용의 「말Ⅰ」 전문이 시는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텍스트이다. 이 시의 은유와 환유는 시행 하나 하나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말아, 다락같은 말아”를 보자. 이 구문은 유사성을 토대로 한 은유이다. “다락같은 말”(s1)이라는 비유 속에는 높다라는 의미소와 오르다 라는 의미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비유 속에는 뛰지 못한다는 의미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구문에서 “말아”(s2)라는 시구는 의인화의 비유적 틀이 숨겨져 있다. s1과 s2는 2행과 3행의 ‘점잖다’와 ‘슬프다’와 연결되면서 의인화의 과정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구조주의 (소쉬르, 레비스트로스)1. 배경 및 개관구조주의는 인문학과 사회 과학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미친 흐름이다. 근본 요소들 사이의 상호 관계 위에 정신적, 언어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가 성립하며, 그 구조에서 특정 개인이나 문화의 의미가 생산된다고 본다.구조주의가 학계에 등장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 중반이다. 특히 문화, 언어, 사회와 관련된 학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시작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연구한 언어학으로 여기며,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도 나타나있다. 구조주의는 사회적 문화적인 현상들이 단순히 물리적 대상이나 사건이 아니라 복잡한 의미체계를 지닌 대상과 사건이라는 소쉬르의 이론에서 결정적인 영감을 받았다.이로써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가 크게 유행하며, 미셸 푸코와 루이 알튀세르 및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구조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2. 이론의 요점Ⅰ. 소쉬르의 구조언어학1) 언어기호의 변별성첫째, 언어는 기호이다. 기호는 무엇을 대신한다는 의미이며, 언어기호는 양면을 지닌 일종의 정신적 실체다.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명칭과 사물이 아니라 기표와 기의 즉 청각영상과 개념이다. 따라서 청각 영상과 개념의 결합이 기호이며 소쉬르는 청각영 상을 기표, 개념을 기의라는 용어로 대체하였다.둘째, 언어는 자의성을 본질로 한다. 이 말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어떤 필연성도 없 음을 의미한다.셋째, 언어기호는 변별적 특성을 보여준다. 기표가 다를 때 의미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말과 발의 다른 의미는 ㅁ 과 ㅂ의 음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음소, 기표가 다를 때 의미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음소란_더 이상 작게 나눌 수 없는 음 운론상의 최소 단위이다.넷째, 언어기호는 체계이다. 언어가 구조라는 말은 변별성 개념, 곧 음소 개념이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2)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소쉬르에 의하면 언어활동(Language)은 랑그와 빠롤로 구성된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말들이 존재하지만, 이 말들이 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심층에 문법을 소유한다. 랑그와 빠롤은 소쉬르가 처음 사용한 언어학용어로서 랑그는 언어공동체가 수용하고 있는 기호들이 맺는 관계의 체계이다. 빠롤은 말하고 듣기 위해 이 랑그를 이용하는 개인적 행위이다.3) 통시성과 공시성통시성은 어원적으로 두 시점(two times)을 뜻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인다. 공시성은 어원학적으로 동시성(same time)을 뜻한다. 소쉬르는 공시성을 논리적 또는 심리적 관계들이 어떤 하나의 체계 속에 공존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예를 들면 은 , 두 요소를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공시적이지만, 이 두 요소들이 시간을 따라 어떤 사건으로 전개되는 것 (흐름)은 통시적이다. , , 같은 표현에서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은 동시성을 띠고 공존하고 있다.4) 계열체와 통합체일차적으로 텍스트는 자연언어의 저장고에서 선택한 요소들을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며 ‘ 모든 단어의 선택은 자연언어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진다. 주어+서술어’ 또는 ‘관형어+주어+목적어+서술어’ 와 같은 구문 형식으로 결합한다.수직의 축, 곧 계열적 관계에 있어서는 시간적 질서를 따르지 않고, 서로 교환될 수 있으면, 언술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서로 유사한 관계에 있게 된다. 계열적 관계에 있는 요소로는 '소'의 경우 '당나귀. 노새. 말'등이, '짐'의 경우 '꼴, 덤불, 장작'등이, '운반 한다'의 경우 '나른다, 옮긴다, 싣고 간다' 등이 있다.통합적 관계란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시간적 질서를 따르고, 언술의 표면에 드러나며 서로 교환될 수 없고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통합적 관계는 시간적 계기성을 따르며, 수직의 축 위에서 진행된다. 예컨대 '소가 짐을 운반 한다'는 문장이 그렇다. 이 문장에서 언술을 구성하는 세 요소는 위에서 지적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요소들이 통합적 관계에 있는 것을 통합체, 계열적 관계에 있는 것을 계열체라고 부른다.Ⅱ.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레비스토로스는 새로운 합리성, 즉 ‘초합리성’ 을 찾으려고 하였다. 레비스트로스가 상 정하는 무의식은 범주적이며 조합적이고, 비 무의식은 우주, 사회, 개인, 사고, 언어 등에 내재되어있는 구조적 법칙으로 나타난다.또한 레비스트로스는 에서 인류학의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구조를 언어의 음운체계와 가장 유사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친족체계는 일종의 언어체계와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개인과 집단사이에 어떤 형태의 교환을 보장하도록 되어있다.레비스트로스의 친족체계는 이원적 대립으로 나타낼 수 있는 교환, 비교환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대립으로 나타낼 수 있다.혼인을 지배하는 것은 호혜적 교환이다. 즉 여자가 나가면 반드시 여자가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혼인은 여성교환이라는 개념으로 모델화할 수 있다.조화적 체계는 거주규칙과 혈통규칙이 동일한 체계를 말한다. 즉 부측거주와 부계혈통, 모측거주와 모계혈통은 조화적체계이다. 한국친족체계의 경우는 복합구조이며 (말하지 말기-일반교환이며) 조화체계에 속한다. 기본구조는 특정한 친척들과 혼인하도록 권장하는 친족구조로서 고대 중국과 인도 그리고 여러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 복합구조는 특정한 친척들과 혼인을 금지하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과 혼인을 허용하는 친족구조이다.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친족연구에 이어 신화연구로 넘어간다. 레비스트로스는 에서 “잡다한 것을 가지고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브리콜뢰르’라고 하는데 신화란 바로 이들이 만든 작품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창틀, 깨진 가구 등으로 새로운 책상을 만들었다면 창틀의 한 부분은 책상의 한 부분으로 가구조각은 책상을 유지하는 다리로 사용되어 책상이라는 체계(신화)속에서 새로운 역할, 즉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신화는 과거의 사건이나 잡다한 진실, 자연적 우주의 현상, 인간의 애증, 인간의 관계들을 엮어서 새로이 만든 가구(신화)와 같은 것이다.3. 다른 비평론과 구분되는 특징구조주의 VS후기 구조주의구조주의는 후기 구조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하나하나가 그냥 행해지는게 아니라 어떠한 구조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이 바로 구조주의이다. “다양한 것들의 근저(말 no! 사물의 뿌리나 밑바탕이 되는 기초)에 있는 구조를 보편적이고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찾으려는 시도” 라고 볼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는 “우리의 삶은 완전히 완벽하게 구조적으로 되어있지 않다. 어느 정도의 우연도 있지 않다” 는 것을 뜻한다. 구조주의에서 강조하는 절대적인 구조와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진리 탐구의 방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목차Ⅰ.포스트모더니즘이란 ···3Ⅱ.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학 ···3현대시와 포스트모더니즘 ···4~7현대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 ···7~11Ⅲ. 포스트모더니즘과 예술 ···11연극과 포스트모더니즘 ···12영화와 포스트모더니즘 ···13~15음악과 포스트모더니즘 ···15~16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 ···16~17Ⅰ. 포스트모더니즘이란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용어는 원래 건축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경우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반발하여 1970년대에 전개된 새로운 지적운동을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 가장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이유는 종래의 관습적인 문학양식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20세기 후반의 대사건들의 연속과 대중적 전자매체의 확산, 믿을 수 없는 정치, 사회적 현실상황 등이 작가들로 하여금 글쓰기에 대한 반성, 언어의 제현능력에 대한 회의,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문학양식을 주도하고 있는 고답적이고 귀족적인 모더니즘이나 문학의 현실반영능력에 대한 낙관적인 리얼리즘 모두에 대해 반발하며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시에 포스트리얼리즘(Postrealism)이라고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전통적인 모더니즘과 전통적인 리얼리즘1)의 정신은 계승하면서도 그것들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태도를 갖고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Ⅱ.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학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현재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논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각 장르별로 그러한 징후의 점검이나 작품자체의 분석과 평가보다는 그 이론적 배경이나 개념정의, 논거의 존립가능성 등에 쟁점이 모아지고 있다. 이는 창작방법론과 관련하여 논의할 만한 작품이 그 만큼 많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외에 현 단계에서의 우리나라의 포스트모더니즘 존의의 시발적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스스로 제기한 것처럼 그 대념정립 자체에 관련한 몇 가지 의문점, 포스트모던 시는 1961년 루벤 다리오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이 쇠퇴한 이후의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다. 또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합 핫산 중심개념의 대부분이 중남미 문학의 에 그 모델을 두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중남미의 경우 포스트모던 시를 실천한 옥타비오 파스가 1972년 포스트모더니티로 이해되는 문학의 종말을 선언한다는 점이다.둘째로 중남미 포스트모더니즘은 전기 아방가르드에 속하고 영미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아방가르드에 속한다. 특히 중남미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네오 바로크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명된다. 바로크가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추구했다면, 네오바로크는 무질서, 곧 무질서 자체를 조화롭게 보는 태도로 정의된다.그런가 하면 독일의 경우에는 포스트모던 시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른바 모더니즘의 미락을 해체하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첫째로 독일의 경우 초기 포스트모던 시는 50년대 후반 이른바 구체시의 등장을 계기로 한다. 이성 중심의 로고센트리즘을 뒤집고 자의적인 시피니앙을 무한대로 텍스트의 질료로 삼고 있는 구체시인들의 창작태도는 초기 포스트모던 시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본격적인 포스트모던 시는 70년대에 들러나가는 바, 그것은 피터 한트게, 브링크만, 백커 등에 의해 실천된다.둘째로 독일시에서 읽을 수 있는 포스트 모던한 특성은 이른바 신주관주의 라는 용어로 정의된다. 신주관주의란 미래에 대해서는 열려져 있으나 정치적인 미래낙관주의와는 연결되지 않으며, 또한 탈승화된 세계상, 예술어와 일상어, 이념과 현상 사이의 골을 메우려는 개념으로 자기경험이 곧 세계경험이라는 새로운 현실주의를 토대로 한다.이상에서 살펴본 서양의 포스트모던 시의 특성들은 한마디로 모더니즘의 미학에 대한 부정을 기본 개념으로 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는 아방가르드적 양상을 갖지만, 그것이 후기자본주의 시대와 관련된다는 특성을 거느린다. 이런 미적 현상이 우리시의 경우에도 드러난다. 이른바 해체개념이 왔던 미학적 관습만으로는 더 이상 생명력을 지속하기가 어려우며 그것은 또한 오늘의 세계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나 상상력의 방식들과는 더 이상 의미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식을 전제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중의 한 시기에 해당된다는 것이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주장이다.20새기 후반의 미국소설 형식의 변화는 20년대의 경제공황, 2차 대전, 50년대의 냉전시대, 60년대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사상, 흑인문화, 여성해방운동, 반문화, 비틀즈 류의 음악의 열풍과 마약과 성의 개방 등의 사회변동과 관련한 개방성과 자유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이미 소진되어 버린 과거의 이념과 기법으로는 더 이상 오늘의 문화적 비상사태나 종말의식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소설은 그리하여 이러한 후기의식 혹은 종말의식이 특별하게 강화된 경향으로서, 첨단산업화, 정보산업화, 대중화로 바뀌어 가고 있는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문화적 대응이라 하겠다.포스트모던 소설은 미국의 존 바드 등에 의해 모더니즘 소설의 종말론이 대두된 이래, 어빙호우에 의해 그것이 이라 명명되고, 소설은 이제 부조리에 관한 게 아니라 부조리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하여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이탈현상이 지적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논리적이고 인과론적인 이야기의 구성과 모티프의 구사, 혹은 완전한 이해나 전달이 전제된 관례적인 수서, 작중인물들의 자아의 형성과 발견의 계기, 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항과 고발의식, 완경된 하나의 형태로서의 소설 등 정통소설의 일반적인 관례들에 대한 불신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1)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surrealism]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超自然主義]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의로 고쳤다고 한다.초현실주의는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용되기도 하는 메타픽션의 한 양상을 보이는 경우이다.이들의 작품에 보이는 일련의 특징들을 일정한 틀로 범주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편으로 그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 성향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은 스스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한 바는 없었지만 그것들은 이른바 반-, 비-, 탈-, 해체-, 혹은 후-와 같은 접두사를 사용함으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는 현상, 넓게 말해서 정통소설의 형태나 기법에 대한 회의와 부정 및 이탈현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위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소설의 몇 가지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작품들은 지금까지의 소설의 관습에 반하는 형태와 기법들을 시험하고 있었고, 그것들이 야기하는 개방성과 혁신성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작품들은 기왕의 소설이라는 장르에 내려진 정의에 승복하거나 관습적으로 반복하고자 하는 태도에 대한 자기성찰을 시도한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라 보았다.1)패러독스 [역설 逆說, paradox]참된 명제와 모순되는 결론을 낳는 추론(推論). 배리(背理) ·역리(逆理) 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고도 한다. 명확한 역설은 분명한 진리인 배중률(排中律)에 모순되는 형태로 인도하는 것이 보통이다.-9-오늘의 한국소설의 일부는 이미 포스트모던 소설의 징후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들은 분명히 어떤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늘의 우리사회의 변화의 산물이거나 그 징후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이탈이며 현재에 대한 은유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형태파괴와 기법의 실험성 또한 두드러졌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포스트모던 소설인가? 이 질문은 매우 부질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요건에 얼마나 부합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부합되고 있느냐일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논점들과는 별도로 소위 포스트모던 소설 혹은 메타픽션의 이념적, 기법적 특성은 근본적으로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타 장르와의 융화력이나 친화력 혹은 다양하고 파괴적인 역동적 상황에서 연유한예술이 지닌 기본적 성격이 확고한 고정범주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극도로 탄력적 속성 흡사 가족성·유사성을 띠면서 각 영역사이를 왕복운동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어떤 특정분야의 문화논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어떤 공통된 인식소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는 궁극적 사실주의, 자기 회의성, 패러디, 메타적 요소, 매직 리얼리즘 등으로 정리 할 수 있으며 이는 모방론에 대한 회의인 동시에 반발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이런 현상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11-▶연극과 포스트모더니즘우리 문화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소개와 토론이 활발해진지 상당시간이 경과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모호하며 조심스럽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자체도 풍부한 체계가 잡혀있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한국적 평가나 수용문제 등에 대한 분한 모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국내연극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개별공연의 논의는 현재까지 찾아보기 어렵다.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불명확하고 광범위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여러 문화예술의 영역 중에서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연극은 그 역사적 기반도, 풍부한 철학적 기반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경계가 그리 분명치 않다는 점은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지만 이는 연극의 경우 특히 심하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 연극은 그 기점이 불분명하다. 결국 연극의 범주에서는 문학이나 미술의 경우처럼 모더니즘의 영역이 분명치 못할 뿐 아니라 연극에서는 다른 예술처럼 모더니즘의 영역을 증명하려는 노력도 부족하다. 스티븐코너는 이런 이유를 연극예술의 상업적 취약성, 고급예술을 오가는 연극의 속성, 그리고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의 전통적 연극에서의 모방과 재현의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얘기되는 아르토가 연극을 연극의 본질적인 요소로 환원시키는 미니멀리즘1)적 요소 때문에 모더
권현숙 소설집 [인간은 죽기위해 도시로 온다]삐뚤어진 외모지상주의 세태 ‘순장’외롭다는 감정은 혼자 있거나 가까이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 매우 쓸쓸하다는 말로 정의되어 있다. 늘 마음 속 어딘가가 허전하고 이유 없이 휑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나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없는 감정,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선의 한계는 어디에 있을까.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날에는 더욱 심한 감정의 소용돌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이루고 소통하고 그런 과정 안에서도 무한한 행복을 느끼다가도 뒤돌아 걸어가는 길이면 늘 외롭게 느껴진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권현숙 작가의 [인간은 죽기위해 도시로 온다] 는 이런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6편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단편들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내세우며 진행되지만 그 이면에 깔린 분위기는 어둡다. 조용하고 섬세하게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내 의식의 흐름과 거리가 좀 있어서였을까. 쉽게 읽힐 줄 알았던 문구들이 조금은 무겁고 담대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선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현실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며 언젠가는 내가 겪어야 할 일부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6개의 단편이라고 해서 흐름이 끊길 정도로 서로 동떨어지지는 않았다. 연작소설처럼 주인공이 겹치지는 않았으나 첫 번째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두 번째 소설의 여자 주인공과 두 번째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세 번째 소설의 남자 주인공과 닮은 구석이 있는 등 등장인물에는 작가 특유의 공통적인 생각과 행동이 녹아 있다. 대화와 생각은 주절거리는 듯한 말로 때로는 문장 구조를 생략하면서 표현되고 색깔과 관련된 표현이 다른 소설에 비해 많이 나타난다. ‘외로움’ 이라는 코드 하나로 결코 가볍지 않은 색채를 가진 여섯 편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것이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야기들. 진정한 단편 소설의 맛이 아닐까 한다. 각각의 단편들은 소설 의 주인공은 외롭게 살며 개에 대한 관심만 드러내던 남자와 일정한 직업이 없어 집안에서도 무시 받는 여자이다. 세 번째 소설은 내란으로 소란스러운 도시에 홀로 투숙한 남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섯 번째 소설을 제외한 나머지 소설 속의 주인공은 대개는 극단의 외로움 속에 살고 있다. 주인공들은 외로움을 즐기지 않기에 작은 것에도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외롭게 산 사람 답지 않은 과감한 행동을 한다. 어쩌면 외롭기 때문에,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삶과 죽음으로 크게 구분되어지는 인간의 삶은 결국 남자와 여자의 연속적인 삶으로 대체되고 그것은 결국 그리움, 외로움, 절망감, 소외감 등으로 변질되어 간다. 외로움과 사랑이 교차하면서 서로 보완하고 또한 그것이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위대함이 책 속에서 보여 진다. 작가는 남자와 여자라는 인물들을 폐쇄적인 공간에 등장시켜 그들의 본능적인 행위를 통하여 결국 그들을 너무나도 냉소적이고 허무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기술을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소설에서 접하는 아름다운 애정 내지 순정은 사치스럽게 보여지기 까지 한다. 무서울 정도로 사랑한 대상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다른 대상으로부터 그 공허함을 메우고 싶고 또한 사랑을 죽을 때까지 갈구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내용을 곱씹을수록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었다. 정념으로 통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처럼 치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나 적나라하기에 씁쓸하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든지‘사랑’이‘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면적 외로움을 단지 욕정으로만 다스리려 한다면 아무리 취하여도 갈증을 없애지는 못한다.그러나 대화와 만남 없이 혼자 살아서일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를 즐겨하는 주인공은 지나친 상상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무리한 행동으로 일을 벌이기도 한다. 마치 평온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스쳐가는 얼굴들을 떠올린다. 가부키에 열중하고 있는 일본연극배우의 얼굴과, 경극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손끝을 바라보던 그 짙은 화장 속에 가려진 중국 배우들의 얼굴을. 짙게 그려진 화장 뒤에 가려진 얼굴이 행여 사랑이라는 존재의 얼굴은 아닐까? 때로는 너무 아름답게, 그러나 때로는 너무 아프게 다가오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존재. 끝없이 유혹하는 손길로 우리를 부르는 사랑. 작가의 말처럼 이 시간이 지나자마자 추억이 될 추억의 씨앗들을 위해 우리는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의 감정은 연인관계를 떠나서도 존재한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선후배간의 관계에서 내 자아를 정립하지 못한 지금 이 순간에도 불쑥 고개를 들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 만큼 애매모호하고 불연속적인 성격을 띄는 감정, 외로움이란 그런 것이다. 절대적인 인간의 표상이요. 삶의 순간마다 고요히 잠들어 있다가 나의 엔돌핀이 수그러들 때 찾아오는 일깨움이 아닐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외로움은 그들의 내면에 영원히 상주하게 될 것이다.소설 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외모지상주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소설 속의 주인공은 여자라기보다는 남자에 가까운 체구, 존재감 없는 존재,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소설은 미인과 추녀의 차이를 단 2mm 라고 규정짓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장’ 에서는 추녀가 미인이라는 지상최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성형수술대에 오르는 장면과 미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산 채로 생매장되는 장면을 번갈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가 지속적으로 교차되면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이며 초라한 존재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그다지 잘나지도, 예쁘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주인공한 인물이다. 대학도 졸업하고 부모님도 계시며 동생도 있는 평번한 집안의 여성이지만 어디 하나 갈 곳이 없는, 그래서 더욱 자신감을 잃은 인물이다. 동창생의 대학발전기금 전화도 한 통 받지 못하는 그런 주인공은 그 모자란 외모 덕택에 연예기획사의 로드매니저가 된다. 예비 연예인들을 성형외과에 데려다 주고 수술부위를 건드리지 않고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각종 미용기구에 관심이 없던 주인공은 성형외과를 드나들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본 성형수술은 마법 그 자체였다. 보형물을 넣으면 솟아오르는 콧대, 이마, 가슴. 누구나 깎고 높이고 키우면 미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한다.작품을 읽는 내내 주인공 여자가 너무 가여웠다. 못난 생김새 때문에 한 번도 기를 펴보지 못했던 주인공. 이젠 능력이나 성격이 중요하다고 떠들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 중요한 것은 외모라는 생각이 든다. 외모가 예쁘면 재판정에서도 ‘정상참작’ 이라는 걸 받는다. 주인공은 받지 못했던 호의이다. 길 가다가 참외 몇 개 깨먹은 죄로 징역을 살고 나온 주인공이 참 가여웠다. 못난 외모지만 착하고 남을 이용할 줄 모르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 호감이 갔다. 그래도 주인공의 발은 참 예쁘다. 발목은 가늘고 뒤꿈치 선이 곧고 발가락 틈이 부챗살처럼 벌어져 있으면서 굳은 살 없이 매끈한 발. 미인들의 외모만큼이나 예쁜 주인공의 발이다. 예쁜 발을 사진으로 찍어서 ‘예쁜 발 선발대회’ 에 보내려고 동생의 하이힐을 신어보다가 들켜서 얼떨결에 빌려달라는 말을 한다. 이를 무마하려다가 ‘게이’ 같다는 말을 듣는다. 가장이 되어 먹여 살리며 키워온 동생이 주인공에게 한 말이다. 발은 예쁘지만 얼굴이 예쁜 것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주인공은 안타깝게도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발만이 예뻤던 것이다.꽤 이상하고 심오하고 환상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장’ 이라면서 대뜸 성형 수술하는 장면이 나오고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그것이 참 매력적이었다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온다. 고대에 왕의 총애를 받은, 순장 당한 10대 소녀를 보면서‘미’에 대한 기준은 예로부터 외모에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왕들이 죽을 때 자신의 부인이든 하녀든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함께 묻는 이 시대에서 '충격' 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풍습인 ‘순장’ . 사랑의 존재는 옛날 왕들의 순장의 대상이 됐다는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것은 남녀간의 외모지상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 시대의 왜곡된 세태를 정면으로 받아치고 있다. 순장이라는 풍습과 성형수술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교하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적 동네의 동굴에서 언젠가 본 순장당한 소녀의 유골. 60대 남자 인골과 15세 전후 소녀의 순장 인골. 삼국사기에는 순장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살아있는 처녀를 죽은 왕하고 한 구덩이에 쓸어 넣은 신라의 왕과 소녀 벽화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생각해본다. 왕이 죽으면서까지 데리고 가고 싶었던 미녀는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걸까. 주인공이 본 인골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았었는데 말이다.학급문고에서 봤던 붉은 대문 이라는 전래동화. 사람이 죽으면 저승길을 가는 길에 문이 두 개가 나온다고 한다. 하나는 칠하지 않는 솟을 대문, 또 하나는 붉은 칠을 한 평대문. 아무것도 칠하지 않는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면 신선이 되고, 붉은 대문으로 들어가면 옥황상제께 소원을 빌고 다시 이승에서 새 삶을 살 수 있단다. 주인공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라면 예쁘게 해달라고 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굴에 갇혀 있던 어린 그녀는 그저 굴을 나가게 해달라고 빌었고 아버지에게 발견되었다. 그 굴, 즉 돌방이 바로 천년의 한이 서린 아름다운 백골이 묻힌 곳이었다. 천년 전 왕과 함께 굴에 던져진 아름다웠던 소녀 벽화의 백골. 사촌오빠는 해골을 보고 미인이라고 한다. 자신이 보기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았던 그 백골에게 예쁘다는 표현을 쓰는 사촌오빠를 보면서 주인공은 경악한다. 옛날엔 미인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인은
박민규의 소설적 경향 문단의 괴짜스타일로 화제를 모은 박민규는 새로운 한국문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박민규의 소설은 구어체만큼 쉬운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또한 서사에 있어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플롯을 자신만의 해학과 위트사이에 숨긴다. 쉽게 말하면 권위 부리지 않고 제 할 말을 다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의 소설은 심오한 세계관을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문체를 빌어서 그가 갖고 있는 심오하고 고독한 세계관을 재미나게 풀어놓는다. ............박민규의 문체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자유로운 문체가 ‘박민규 스타일’이 아니냐고 묻자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 이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카스테라`를 쓰고 1인칭 시점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 다. 대학(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시를 전공했지만 솔직히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않아 체계적으로 배운 건 없습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은 게 글쓰기 공부의 전부나 마찬가지죠." ............박민규의 상상력박민규의 매력은 단연 천상 이야기꾼이라 할 만한 날개 달린 상상력이다. 그의 세계에선 소중한 것이나 해악이 될 만한 것은 무작정 냉장고에 넣어버릴 수 있고 너구리가 등을 밀어주기도 하며 기린과 펠리컨을 만나고 대왕오징어나 외계인의 습격도 실재한다. 이미 세계는 어떤 거짓말을 해도 그렇고 그렇게 들릴만큼, 그렇고 그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 그리하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완전히 모호해지는 대단한 거짓말이 성립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