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화 표지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1. 머리말담화 표지(discourse marker)란 일정한 발화의 명제 의미 또는 진리 조건적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말하는 이의 믿음, 전제, 태도 등을 보여주는 언어적 형태를 가리킨다. 담화 표지에 대한 연구는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90년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담화 표지를 전통문법에서는 의지 감탄사라고 하였거나 군말, 머뭇거림 입버릇, 머뭇말, 덧말이라고 하여 국어 연구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영역이었다. 전통적으로 담화 표지는 통사적으로 불필요하고 의미적 차원에서도 내용 전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군더더기와 같은 요소로 보아온 것이다. 또한 이러한 표지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 사용의 실수이며, 이를 사용하는 화자의 발화는 유창하지 않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일정한 언어 형식의 의미를 발화 장면과 관련이 있는 언어 외적 특성과 관련하여 분석하는 화용론의 차원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면서, 담화 표지는 그동안 담화 내용 표지, 담화 표지어, 화용 표지 등의 용어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조명되었다.본고는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담화 표지에 대한 성과를 짚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담화 표지에 대한 연구는 앞선 연구로는 개별적인 담화 표지가 가지는 기능에 대한 연구, 문법화 차원에서 담화 표지의 형성 기제 및 그 기능을 다룬 연구, 담화 표지의 습득과 발달을 다룬 연구 등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최근에는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에 관련된 담화 표지에 대한 연구와 담화 표지를 교재 및 교수 내용으로 포함 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된 것은 한국어 교육으로서의 담화 표지 연구로 묶어 알아볼 것이다.2. 담화 표지에 대한 연구 성과2.1. 개별적인 담화 표지의 기능에 대한 연구1990년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담화 표지 연구는 개별 담화 표지가 지니는 기능에관한 것이다. 다양한 연구 성과들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임규홍(1995)에서는 담화 표지를 어휘적 담화 표지( 형식의 담화 표지를 발화함으로써 들을이를 자기에게 가까이 끌어 들이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한편 담화 표지 '있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의문 대상이 전제된 '있지1'이고, 다른 하나는 의문 대상이 전제되지 않은 '있지2'이다. 먼저 의문 대상이 전제된 '있지1'의 기능을 살펴보도록 하자.4)ㄱ. 그 있잖아, 불곰이라 하는 놈, 그 놈 이번에 내가 처치하겠어.ㄴ. 너도 아는 영숙이 있지, 어제 영화관에서 어떤 남학생하고 영화보러 왔더라.4)에서 ㄱ의 '있잖아'의 의문 대상은 '불곰이라 하는 놈'이 된다. 그리고 ㄴ은 '영숙이'가 의문의 대상이 된다. 의문 대상이 전제된 '있지1'의 기능은 의문 대상을 주제말로써 들을이에게 '확인'하는 기능을 하고, 뒤에 이어지는 새정보에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반면에 의문이 대상이 전제되지 않은 '있지2'의 보기는 다음과 같다.5)ㄱ. 그런데 있쩨, 우리 담임 선생께서 다음 주에 결혼하신단다.ㄴ. 모른다카다가 아이가, 주인이 나타난께 아이가, 내가 했다캤다 아이가.5)ㄱ의 '있쩨'와 ㄴ의 '아이가'는 표면 형식은 의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마는 의문의 전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러한 '있지2'는 선행 정보에 대한 담화적 기능보다 후행하는 정보에 대한 담화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하면 '있지2'는 선행 정보의 존재(있다)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이에게 후행 정보에 대해서 '주의 집중'을 기대하는 표현인 것이다.또 다른 담화 표지에 대한 연구로는 김영철(2010)에서 이루어진 담화 표지 '막'에 대한 연구가 있다. 담화 표지 '막'은 출현의 위치가 자유로워 발화의 첫머리 뿐만 아니라 어중과 어말에도 자연스럽게 분포한다.6)ㄱ. 요즘은 막 그 가면 사진 놓고 뭐 만들어 놓았잖아, 옛날에는 어떻게 되어 있었어요?ㄴ. 요즘 같은 데 보면 그 막 그 장례식장 가면 꽃 많이 보내잖아요?ㄷ. 방에 이제 가지고 안하고 이제 마당에다 불을 이렇게 나무를 막 철야나 무라고요.ㄹ. 지금같이 막, 어디 그냥 막, 관에 가서'막'역시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신정보의 선행 발화와 구정보의 역할을 담당하는 후행 발화의 경계를 알리는 언어형식으로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담화표지 '막'은 앞선 발화의 내용에 좀 더 새로운 내용을 부연하여 선행 발화에 대한 보충 설명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8)에서 담화 표지 '막'은 흙일을 하는 사람들이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통하여 선행 발화에 대한 보충의 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담화 표지 '막'은 화자가 청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하여 청자들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9)는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여러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화자가 청자의 주의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담화 표지를 활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10)에서 담화가 진행되는 발화의 중간 중간에 특정 사물에 대하여 어휘가 생각나지 않을 때 보충 설명 하면서 담호 표지 '막'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화자가 다음 발화의 내용을 생각하고 조합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막'을 중간 중간에 사용하면서 후행 발화 내용을 적절하게 생각해내는 이른바 '시간 벌기'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2.2. 문법화 차원에서의 담화 표지 연구앞서 논의한 임규홍(1995)에서 담화 표지를 어휘 형태의 유무에 따라 분류한 것과는 달리 김태엽(2000)은 어떤 담화 표지가 본디부터 그 기능을 가졌는지 아니면 다른 기능을 수행하던 말이 담화 표지의 기능을 가진 말로 바뀌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본디 담화 표지와 전성 담화 표지로 분류하였다. 전성 담화 표지는 본디 명제적 의미를 나타내는 내용어가 양상적 의미를 나타내는 내용어가 양상적 의미에 관여하는 기능어로 문법화(grammaticalization)한 말과 그리고 다른 기능어이던 것이 담화적 기능어로 문법화하여 담화표지로 기능하는 말을 모두 가리킨다.문장의 명제적 의미를 나타내는 내용어가 그 형태상으로는 아무런 변화없이 담화표지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용어가 화하여 담화적 기능어로 사용되는 것이 있는데, 기능어가 담화 표지로 사용되는 예로서 '요','로','에'를 8)에서 보기로 하자.13)ㄱ. 철수가요 교실에서요 떠들었어요.ㄴ. 내가 거기 가이께로 아무도 없더라.ㄷ. 비록에 그렇더라도 너가 가면 되나.13)의 담화 표지 '요','로','에'는 화자의 양상적 태도가 반영되어 청자에 대한 화자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서 더욱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그런데 김태엽(2002)에서는 이전의 연구에서처럼 문법화 차원에서 담화 표지를 논하였으나 약간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본디 담화 표지를 감탄사, 부사어, 지시어, 운소로 분류한 것과는 달리 본디 어형의 형태적 갈래를 크게 단어와 구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단어는 다시 명사, 대명사, 관형사, 부사 따위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구는 다시 명사구, 동사구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명사가 문법화하여 담화표지로 기능하는 형태에는 어머님, 아버님, 선생님 따위가 있고, 대명사가 문법화하여 담화 표지로 기능하는 형태에는 어디, 뭐, 저, 거, 거시기, 왜 따위가 있으며 관형사가 문법화하여 담화 표지로 기능하는 형태에는 무슨과 웬이 있다. 그리고 부사가 문법화하여 담화 표지로 기능하는 형태에는 가만, 참, 아니, 이제, 그냥 따위가 있다. 또 명사구가 문법화하여 담화 표지로 기능하는 것으로는 뭘과 어디요가 있으며, 동사구가 문법화하여 담화표지로 기능하는 형태에는 말이야, 뭐야, 있잖아, 뭔가 하면, 그러잖아도 따위가 있다.이들 담화표지는 문장의 명제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각 형태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담화의 전달 효과를 높이는 공통의 담화적 기능을 가진다. 이러한 담화 표지가 문장의 명제 내용에 관여하지 않는 사실을 통해, 이들 형태가 문장 문법의 층위에서는 수의적 요소이지만, 담화 문법의 층위에서는 필수적 요소임을 잘 알 수 있다.2.3. 담화 표지의 습득과 발달에 관한 연구그동안 담화 표지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개별 담화 표지의 기능에 대한 연구가 대다수담화 표지 '있잖아/있지','말이야'등이 출현 했다. 이 가운데 '어, 으','-요','있잖아/있지'와 '그런데/근데'등은 연령별로 출현이 고르게 나타나며, 사용 인원도 다른 담화 표지보다는 높아 유아 단계에서 보편성을 지니고 사용되는 담화 표지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담화 표지 사용 비율은 5세까지는 증가하다가 6세에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 연령별로 꾸준한 증가나 감소 경향은 보이지 않았다.초등 단계에서는 지시어 담화 표지 유형이 새로이 출현하였으며, 각 담화 유형별로 새로운 형식이 추가적으로 출현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연령이 높아지면서 담화 표지의 축약형, 활용형 등 변이형의 습득과 사용이 다양해졌다. 초등 단계에서 새로이 나타난 형식으로 감탄사 표지 '에, 자', 접속어 담화 표지는 '그러니까/그니까/근까, 그래, 긜고', 지시어 담화 표지는 '이, 그, 저, 이거, 그거/거, 저거, 거기, 거시기, 저기, 이렇게/이케, 그케', 부사어 담화 표지는 '왜, 아니, 정말', 구절 담화 표지 '뭐지/뭐냐/뭐야'등이다.초등학생 단계에서 담화 표지의 사용 비율은 학년에 따라 증가와 감소를 거듭하는 양상을 보여 일정한 경향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담화 표지 사용 비율은 학년에 비례하여 높아지다가 3학년을 기점으로 다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유아 시기 보다는 사용 비율이 약 2배 이상 높아 담화 표지의 사용 빈도에 연령 변인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담화 유형별 사용 빈도에서는 고학년에서는 감탄사 담화 표지의 상대 빈도가 낮아지고, 지시어 담화 표지의 사용 빈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특징을 보였다.유아 단계에서는 감탄사 담화 표지와 '있잖아','근데','-요' 등 특정 담화 표지만을 사용하는데 반해, 초등학생 단계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담화 표지를 습득하면서 특정 담화 표지가 담당하던 기능을 새로이 습득한 형식으로 대체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며, 또한 담화 표지를 보다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유아와 초등학생 단
Ⅰ. 서론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1789년 5월의 삼부회 소집으로 시작하여 1799년 11월에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끝나는 10년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프랑스 혁명은 그 발발 당시부터 이미 세계사적 사건으로 인식될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었다. 혁명은 단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절대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뀌는 것을 시발로 군주제가 공화정으로 바뀌고 공화정도 자유주의체제에서 민중민주주의로 탈바꿈하고 그리고는 다시 부르주아 체제가 들어서고 그 속에서 공산주의의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이 와중에 국왕과 왕비를 위시로 하여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했고, 수많은 농민과 민중들이 혁명을 위해 또는 혁명에 반대하여 희생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혁명가들조차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혁명은 거의 모든 프랑스 인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단지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이루어진 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민적 자유와 평등의 원칙, 국민주권과 국가의 비종교주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등은 모두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인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유산을 낳은 프랑스대혁명의 전개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배경① 구제도의 모순인두세는 프랑스에서 부과되었던 어떤 세금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이 세금은 농민에게만 부과되었고 전체 인구의 2%도 안 되는 성직자와 귀족들은 왕국 전체 토지의 30~40%를 차지한 채 막대한 부와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조세와 부역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다. 당시 소농민들이 보유했던 토지는 당시 프랑스의 전체 경작지의 거의 반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영주에게 현금 혹은 수확물로 여러 종류의 부과조를 지불해야만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위기 속에서도 귀족들은 건재하였다. 그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뒤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② 전반적인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의 확대18세기 서유럽의 번영은 두드러져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으로 증가되었으며 공업생산과 시장의 확대, 생산자본의 증대가 이루어졌다. 물질적 생활상태의 개선과 함께 인간관계의 부드러움도 생겨났으며 보다 자유롭고 역동적이며 다양한 사회로 발전되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의 증대와 더불어 새로운 부는 장인과 소상점주, 부농들에게도 혜택이 미치고 있었다. 농민들도 이전보다 자유로워졌고 경제적으로도 이전보다 나은 상태에 있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본건영주나 귀족들의 종속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의 성장과 자유의 확대는 오히려 민중의 구체제에 대한 불만을 격화시키고 낡은 제도들에 대한 증오심을 끓어오르게 함으로써 봉건적 잔재와 악습들을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던 문필가와 계몽사상가들은 민중으로 하여금 사회변혁과 계급적 투쟁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혁명에의 참여를 부추기고 있었다.③ 경제위기이 경제위기야말로 프랑스혁명 발생에 가장 직접적이고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18세기의 전반적인 번영은 주로 부르주아지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더구나 미국의 독립전쟁과 그것이 야기한 재정위기, 영국 매뉴팩춰들과의 경쟁과 그에 따른 대규모의 실업은 섬유공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프랑스는 1778년부터는 경제적 침체를 경험하였으며, 이러한 경제적 후퇴 속에서 10년간이나 가장 큰 고통을 받아온 민중들은 1788년의 흉작과 기근, 대량실업, 물가폭등을 수반한 ‘1788~1789년의 경제위기’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혁명적 사건들에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④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18세기 전반적인 경제적 성장으로부터의 이익은 주로 특권층과 부르주아지에게 돌아갔으며 반대로 경제적 후퇴와 경제위기로 인하여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가난으로 고통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날품팔이꾼들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면서 부농들을 약탈하고 사회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실업자들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또는 임금의 인상과 빵 가격의 고정화를 위하여 이따금 폭력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1789년 봄부터 프로방스, 브르타뉴, 알자스, 부르고뉴에서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곡물창고를 약탈하고 곡물 수송차량을 정지시켰으며 부과조의 납부를 요구하는 영주들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파리의 생탕트완 교외에서는 일자리를 얻지 못한 노동자와 파업자들이 레베이용 벽지공장을 약탈하다가 군대에게 학살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젊고 원기 왕성하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한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존재는 비록 계급의식은 갖지 못했지만 폭발적인 혁명세력으로 동원될 만한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2)프랑스 대혁명의 전개① 삼부회의 소집(1789.5.5) - 왕실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는 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은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떠안고도 삼부회에서 늘 귀족과 성직자에 밀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에 대해서 가장 불만을 품은 것은 부르주아(Bourgeois)들이었었다. 그들은 지식인이었고, 상공업으로 많은 돈을 만지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귀족, 성직자에게 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프랑스 혁명을 지도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평민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들에 가깝다. 이들이 품은 특권계층에 대한 앙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결국 민중들의 봉기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즉, 지도는 부르주아가 했으나 참여와 주도는 민중들이 한 것이라고 하겠다.②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 (1789.8.26) -구제도의 모순, 바스티유감옥습격 ? 혁명의 열기가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프랑스 왕권은 1789년 7월 11일 삼부회의 최고책임자인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자 혼란이 발생하여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성문을 일컬어지는 프랑스 인권 선언은 라파예트 등이 기초하였으며, 프랑스의 계몽사상, 특히 루소(Rousseau)의 정치사상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인권 선언은 앞으로의 혁명의 목표를 제시한 것이었지, 실제로 법적 효과는 없어 여기에 선언되어진 원리들은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하나씩 실현되어 갔다.④ 입법의회와 국민공회의 소집 (1791.10.1~1792.9.20)-국민공회의 루이16세 처형 ? 혁명의 과격화, 입헌군주제 헌법제정, 입법의회 구성1791년 헌법제정의회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헌법(이른바 91년 헌법)을 9월 말에 제정한 뒤 해산하고 10월 1일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91년 헌법에서는 일원제의 의회를 갖는 입헌왕정이 국시로 되었고, 참정권은 규정된 금액 이상의 직접세를 지불하는 성년 남자에 한해서 인정되었다. 입법의회에서는 우익의 푀양파, 좌익의 지롱드파가 대립하였다. 지롱드파는 지방의 무역상·기업가·유산시민에 지반을 두고, 혁명의 혼란을 이용하여 외부로부터 프랑스 경제의 교란을 획책하는 여러 외국의 음모를 경계하였다. 이들은 의회를 독려하여 91년 10월 말에 해외로 도피한 에미그레(망명 귀족)에 대하여 2개월 이내에 귀국하도록 명령을 발하였다. 의회는 망명 귀족의 배후에서 줄곧 프랑스를 견제하고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파급될 것을 두려워하는 유럽 열강의 획책과 공작을 무엇보다도 우려하였다. 사실 독일에서는 혁명열이 유행병처럼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1792년 9월 20일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다음날 국민공회가 성립되었다. 국민공회는 프랑스 왕정의 폐지, 공화정의 채택을 선언하였다. 이전의 좌익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에서 우익으로 돌았고 좌익에는 새로이 산악파가 등장하였다.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처음부터 적대감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항쟁하였다. 지롱드파가 의회주의를 내걸고 자유주의경제·지방자치의 우선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공화파라면, 산악파는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반혁명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청하였다. 공안위원회는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 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의 ‘혁명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93년 가을부터 다음해에 걸쳐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먼저 반혁명의 이름 아래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 명사들이 처형되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롤랑 부인도 같은 운명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처럼 약 1년 동안에 1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쳐있던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1794년 7월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공회 내의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한다.⑥ 총재정부 수립(1792.10.27) - 로베스 피에르 처형, 총재정부 수립 ? 나폴레옹 등장테르미도르 반동은 국민공회가 1795년에 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끝이 났는데 그 지도자들은 공화국을 유지하고 이와 동시에 유산계급의 우세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1795년의 헌법은 국민의 25%에 달하는 극빈자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았고 공직에 입후보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규정하였다. 또한, 입법의회로서는 양원제를 수립하였는데 하나는 '오백인회'이며 다른 하나는 '원로원'이었고, 국민공회가 결정한 정부설치령에 따라 5명의 총재로 구성된 행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오백인회가 지명권을 갖고 원로원이 선출하였다. 1795년에 집권한 총재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하였으며 항상 입법의원과 충돌하여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 되었다. 총재들과 의원들은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정치적 균형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소모했고 그 결과 서로 헌법의 정신을 침해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경제문제에 치중하였는데 영국에 대한 전쟁의 방법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실업가에 대한 양보로서 고율의 보호관세를 부과하였다. 또, 실업계의 세력에 호응하여 당시로는 .
Ⅰ. 서론민간 신앙은 오랜 세월에 거쳐 우리나라의 문화 속에서 형성되고 변천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민간 신앙에서 우리 민족만이 가지는 고유한 문화적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민간 신앙이란 무엇이고 또 그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겠다.Ⅱ. 본론1. 민간 신앙이란?민간 신앙은 제대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않은 채 민간의 생활 속에 이어져 온 여러 형태의 신앙을 말한다. 우리 민족의 민간 신앙에는 자연물에 대한 신앙이나 동물 신앙, 점을 치는 일, 금기, 주술, 조상 숭배를 비롯하여, 수호신들을 섬기는 집안 신앙과 마을 신앙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따라서 민간 신앙 속에는 우리 민족의 자연과 신, 인간에 대한 고유한 생각이 간직되어 있다.2. 민간 신앙의 종류1) 천신(天神)하늘을 모시는 신으로 제일 높은 위치에 있으며 부족국가 시대에는 천신에게 제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 과 부족장뿐이었다. 이러한 유래는 중국에서 왕 즉, 하늘의 아들이라 하여 천자(天子) 즉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같은 칭호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여 하늘에 대한 제사 또한 조선 시대 에는 지낼 수가 없었다. 그 뒤 조선의 고종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원고단을 만들어놓고 천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시 일제강점기에 민속 문화 말살정책 으로 사라졌다가 근래에 와서 유림이나 성균관에서 주관하여 다시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2) 산신(山神)하늘신 다음으로 일반인 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으로 큰 산을 중심으로 숭배의 대상을 나누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아래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동제의 성격으로 산신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다.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산신당을 건립하고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는 풍습이 많았으며 지역에 따라서 특정한 나무를 대표로 지정하여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특히 산신의 경우 사람들이 매일 같이 친숙하게 접하는 것이 아니어서 아버지의 성격이 강한 신이며 특정한 시기에만 찾 밀접하게 친숙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신앙이다. 특히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에 산을 중심으로 사찰을 건립하면서 산신각을 짓고 호랑이와 노인을 대표적인 산신으로 봉안하여 모셔지는 것이 민간신앙과 제일 밀접한 사례이다. 그러나 대관령 산신의 경우처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3) 서낭당우리는 흔히 성황신(성황당) 과 서낭신(서낭당)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나 성황신은중국에서 성(성주)을 돌봐주는 신을 이르는 표현으로 잘못된 표현이며 우리가 부르는 명칭은 [선왕신]으로 부르는 것이 옳은 것으로 이러한 연유는 한자가 중국으로 부터 전래되면서 선왕신의 발음이 서낭으로 구전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서낭당 또는 서낭신으로 부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라 하겠다.지금은 도시화 와 자동차의 생활문화가 발달되면서 1970년대부터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의 진입로를 확장하고 포장하면서 꼬불꼬불하던 시골길이 반듯하게 선형이 잡히고 비포장도로가 없어지면서 마을입구의 정겹던 서낭당이 많이 없어져 버렸다. 시골길 비포장 길을 걸어서 마을입구 까지 도착하면 서낭당 나무 그늘에서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 돌려 쉬어가면서 찾아가고 있는 집과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걱정과 안부를 미리 점쳐보는 정이 담겨진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우리나라의 서낭당에는 마을 입구의 보호수 아래 서낭당을 짓고 주위를 다섯 색깔로 구분된 천 조각을 둘러쳐 표시하고 있었지만 점차 퇴색하면서 서낭당 고사를 지낼 때 만들어진 금줄(성역표시)이라 하는 왼쪽으로 꼬아서 만든 새끼줄에 흰 조각을 넣어서 만든 것을 주위에 둘러쳤다. 그리고 주변에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두가 일률적으로 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돌무더기가 없는 서낭당 도 흔하게 존재하였다.특히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서낭당은 제천시 봉양면 명도2리의 매골 에는 서낭당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위치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인근 마을 되비골(道斐洞)은 때부터 제천시 봉양리와 장평리를 포함한 일원이 모두 나제군의 소재지였던 지역으로 지금의 군청 소재지가 있었던 지역이다. 특히 되비골로 불리는 곳에는 군수의 관사가 있었으며 명도리 요골에는 양곡창고가 있었고 장성배기 마을과 학고개 에는 경비실이 있었다 하며, 말을 매어놓았던 마장(馬場)이 있었던 장소라고 전해져 온다. 매화나무가 많아서 매화동(梅花洞)이라 불리우는 이 마을은 일명 매골이라 하며 명암저수지 아래쪽 우측 골짜기를 대략 2km 정도 올라서면 지금도 정월 보름날에 서낭제를 올리는 서낭을 볼 수 있으며 보존되고 있는 서낭목과 서낭당집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4) 서낭신서낭당에 머물고 있는 신을 서낭신 이라 하며 큰 의미로는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잡귀를 막아주고 전염병을 물리치는 역할로 모시고 있으며, 작은 의미로는 먼 길을 떠나는 마을사람들의 무사함을 빌고 오랫동안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에 악귀를 물리쳐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모시는 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길 떠나는 사람을 서낭당 까지 배웅하며 무사함을 빌어보는 의미에서 돌 하나를 올려놓고 침을 뱉어 악령을 쫒는 행위를 하기도 하였으며 돌아올 사람을 기다릴 때에도 서낭당에서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풍습이었다. 그런가 하면 떠돌이 장사꾼은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빌기도 하였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집안에 불미스런 일이 생기거나 무병장수를 위하여 찾아 가기도 하였고, 또는 몸이 아픈 사람의 병을 거두어 가라는 의미로 환자의 옷을 걸어두기도 하던 것은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로 알고 그것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치려 했던 순수한 인간의 바람인 것이다. 이처럼 서낭신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의 공동신앙 으로 마을 어귀에 서낭당을 설치하였으며 장승, 솟대, 서낭목, 돌담(탑)과 함께 마을을 드나들던 사람과 친근하게 다가서는 모습으로 어머니의 성격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하여 오고 가는 사람마다 친숙하게 쉬어가도록 하여 청소를 하지 않고 지저분하게간과 신이 항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며 제례를 지낼 때만 청소를 하고 신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5) 장승오랜 세월동안 왜세의 침입을 받으면서 외부의 불순한 모든 것과 전염병으로 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달되어 마을의 수호신 이며 경계표시 및 이정표 역할을 겸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대개 나무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 이며 중부 이북지방 에서는 시모를 쓰고 있는 형상이 특이하며 중부 이남지방 에서는 돌장승이 많으며 벙거지를 쓰고 눈이 튀어나온 것이 특이하다. 특히 장승은 남녀 모두를 상징하는 두기를 나란히 조성하여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며 장승, 장성, 장신, 수삼록, 돌미륵, 등으로 불리어 졌으며 경상도 에서는 [벅수, 벅시], 제주도 에서는 [돌하루방, 우석목] 등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부르기도 한다. 큰 성의 문 앞에도 장승을 세워 중국에서 들어오는 역병이나 재앙을 예방하는 차원으로 장승을 세우고, 사찰에서도 장승을 세워 나라가 번성하고 왕이 오래 살기를 기원하였다고 전해 오는 것은 왜세의 침입에 시달리던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6) 솟대하늘 향한 기원(믿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민족 만의 고유한 민속의 하나로 인간과 신의 매개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오리, 기러기, 까마귀 등의 새를 긴 나무 장대위에 설치하여 풍요 와 다산 등을 기원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에 설치하였다.7) 돌탑마을 입구에는 반드시 서낭당과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가 있고 그 주변에는 하나씩 올려놓은 돌무더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지금도 서낭당 모습과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나무가 마을에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이러한 연유에서 전래된 것이며 , 나무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매개체라 믿어 서낭당 주변에 보호되어 왔으며 돌탑이나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물이었다. 지금과 달리 총이나 무기가 없던 시절에는 돌이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평상시 돌을 모아 모아두었는 정월 대보름날 마을과 마을끼리 서로 돌팔매질을 하며 돌을 던져 싸움을 하던 민속으로 이때에 다치는 것은 죄를 묻지 않았다 한다.8) 집안에 모시는 신민간신앙이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우리의 문화로 발전하기 까지 우리 민족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해결하려는 순수의 민족사상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많은 신을 모시고 가족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 드린 점에서 백의민족이라는 말과 어울리듯 순수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는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어 왔으며 그 귀신을 잘 모시는 것으로 가족과 나라가 평안 해 질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신을 집안에 들여놓으면 제일 높은 신이 집을 관장하는성주신 : 대청마루에 있는 성주단자에 모셔져 있는 집안 신터주신 : 땅 신, 이라 하는 신으로 한자리에 오랫동안 사는 사람을 터줏대감이라 하는 것에 서 유래삼신 : 아이의 잉태에서 탄생과 성장을 관장하는 신칠성신 : 사람의 목숨을 관장 하는 신으로 안방에 모셨다오방신 : 마당에서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신조왕신 : 부엌신 이라 부르기도 하는 조왕신은 물과 불을 관장 하는 신으로 섣달 그믐날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 에게 부엌 에서 일어난 1년 동안의 모든 일은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신이다. 조왕신이 올라갈 때는 아궁이 에서 나와 부뚜막을 이용하여 오르는데 이때에 는 설화가 전해지면서 우리의 속담에도 집에 빨리 가려는 사람을 보고 [부뚜막에 엿 붙여 놓았나] 라는 말을 한다.9) 측신지금의 화장실은 모두 같은 건물 안에 두었지만 옛날에는 변소 라 하여 안채의 건물과 떨어진 곳에 별도로 지었던 것은 재래식 화장실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야 불결한 냄새와 청결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소신을 정랑각시 라 하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장실에 살고 있는 처녀신 때문에 화장실을 들어가기 전 헛기침이나 노크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연유는 화장실에 살고있는 정랑각시 가 하루 종일 머리카락만 세고 있는데 노크를 하지않고 들에
영화보다는 노래로서 내게 더 익숙했던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사실 지금껏 영화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냈었다. 나름 영화를 좋아하고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좋은 영화를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불치병과 죽음을 이토록 유쾌하게 다룬 영화가 또 있을까? 무거운 주제임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마틴과 루디는 뇌종양과 골수암 말기 환자로 같은 병실에 입원하게 된다. 천국에서는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을 얘기할 뿐이라는 마틴의 말. 천국에서의 얘깃거리를 가지기 위해 떠나는 바다로 향하는 여행. 시한부 인생을 가진 이들에게 이 여행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틴과 루디 그 어느 한사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겉으로 내비치지 않는다.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현실에서도 저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하다. 그것은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여행 중에 이 둘은 자신들이 평소에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을 이룬다. 엄마에게 캐딜락을 사주고, 두 여자와 즐기는 것. 어찌보면 참 대단한 일도 아닌데 죽기 직전에야 이루다니. 나만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 돈이 없다는 핑계로 다음에 해야지 하며 뒤로 미루는 일이 다반사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도 모른 체 말이다. 아직 어릴 때,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나중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영화 중간에 루디가 사이드 미러에 적인 문구를 읽은 장면이 있었다. 영화를 볼 때에는 '왜 갑자기 저걸 보여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이건 죽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타고 달리는 그 차는 천국의 문이라는 바다를 향해 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 인상 깊었던 건 마틴과 루디가 정말 다른 건 하나도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이다. 갱단과 경찰에게 쫓기면서도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뒷일은 걱정할 필요 없으니 일단 저질러 놓고 본다. 자유로운 이들이 모습에 나도 한번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 살고 것 자체가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게 느껴졌다.마지막에 갱단의 두목이 마틴과 루디를 그냥 보내주면서 또 다시 바다 얘기를 한다. “천국은 주제가 하나야..바다지……” 그리고 이 둘은 마침내 바다에 도착하게 된다. 바다를 향해 앉은 두 남자의 뒷모습과 겹쳐 흐르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말 그대로 천국이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였다. 마틴이 담배를 피워 물고 바다를 바라볼 때의 표정과 눈빛은 잊을 수가 없다. 정말로 이 둘은 천국에서 바다 얘기를 하고 있을까?
Ⅰ. 국어과 교육과정의 변천1. 제 1차 교육과정(1954~1963)(1) 이 ‘교과 과정’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체계적인 교육 과정이다.(2) 교육 과정을 ‘각 학교의 교과목 및 기타 교육 활동의 편제’라고 정의하였으며, 이때의 교육 과정은 지적인 체계가 중심이 되어 있기는 하나 ‘생활 교육’을 교육 과정과 교과서에 반영시키려는 노력이 여러 면에서 나타나 있다.(3) 교육을 통해 현실 생활을 개선, 향상시킬 사회 개선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4) 반공 교육, 도의 교육, 실업 교육을 특히 강조하였다.(5) 특별 활동이 교과 이외의 기타 교육 활동으로 편성되어, 교과 활동과 특별 활동의 2개 활동이 처음으로 편제되었다.(6) 교과는 8개 교과로 하였으나, 지금의 도덕과는 편제표상에 편제되어 나타내지 않고, 각 학년 총 이수 시간 수의 범위 내에서 연간 35시간 이상의 시수를 확보하여 전 교과 및 기타 교육 활동 전반에 걸쳐 시행하도록 하였다.(7) 시간 배당의 기준을 총 이수 시간 수에 대한 백분율(%)로 제시한 것이 제 2차 교육 과정 이후의 편제와 시간 배당 기준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8) 특히, 이때부터 단위 수업 시간의 운영에서 분과 또는 통합 운영 지도도 가능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음은 교과의 통합적인 운영 측면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955년 8월 1일 국어 교육과정이 공포 되었다. ‘교과과정’으로 공포된 이 1차 교육과정은 ‘교수요목’과 기본방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교수요목’에 비해 학습자의 경험과 생활을 더욱 중시하였고, 기본적인 언어습관과 언어수행기능을 올바르게 기르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짓기와 쓰기를 합하여 ‘말하기 ? 듣기 ? 읽기 ? 쓰기’의 4대 영역을 확정하였는데 현재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는 ‘국어Ⅱ’에 ‘한자 및 한문’을 두어 국어교육과 한문교육을 병행하도록 하였다.2. 제 2차 교육과정(1) 교육 과정의 개념을 ‘학교의 주도하에 학생들이 가지는 경험의 총체’라고 보았다.(2) 이 교였는데, 교과 활동은 도덕, 국어, 사회, 산수, 자연, 체육, 음악, 미술, 실과의 9개 교과로, 특별 활동은 어린이회 활동, 클럽 활동, 학교 행사의 세 영역으로 편성되었다.(7) 편제와 시간 배당에서 교과 활동은 교과 간의 연관성과 학생의 발달 단계를 고려하여, 1, 2학년은 교과 간의 통합을, 3학년 이상은 분과를 원칙으로 배당되었으며, 특별 활동 시간은 3학년 이상부터 배당되어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1981년 12월 31에 공포되었다. 3차 교육과정이 표방한 가치관 중심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기능중심의 교육원리로 도입하되, 학문적 배경을 갖춘 교육과정을 추구한 것이 이 교육과정의 특징이다. 그에 따라 국어교육과정은 언어기능의 신장강화, 문학교육 강화, 언어(지식)교육의 강화, 쓰기교육의 강화, 가치관 교육의 내면화를 염두에 두고 구성되었다. 특히 국어교육의 목표를 ‘표현?이해(말하기 ? 듣기 ? 읽기 ? 쓰기), 언어, 문학’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 진술하고 배경학문으로 수사학, 언어학, 문학을 설정함으로써, 언어교과로서 국어과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지도상의 유의점’을 ‘지도 및 평가상의 유의점’으로 개선하고 ‘학년목표’를 ‘학년별 내용’과 연계하여 체재를 더욱 정교화하였다. 고등학교에서는 ‘국어Ⅱ’에 ‘고전문학’, ‘현대문학’, ‘작문’, ‘문법’ 과목을 설정하여 선택의 폭을 넓혔다.5. 제 5차 교육과정제 5차 국어과 교육과정의 형성 배경 및 그 역사와 특징을 이해하려면 앞선 시대의 국어과 교육과정의 모습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교육 과정 각 시기의 국어과 교육의 특징은 그 교육 과정에 설정된 국어과 교육의 하위 지도 내용 구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차에서 제3차까지의 국어과 교육 과정에서는 국어 교육의 학문적 성격과 지도의 목표를 학생들의 언어 기능 신장에 두었다. 다시 말해서, 국어 교과의 교과적 정체성을 언어적 의사 소통 기능의 신장에 두었던 것이다. 교육 과정의 하위 영역을 ‘말하기’, ‘듣기’, ‘읽기’, 를 추구하는 교육’을 위해서는 국어과 지도 방법 및 평가 방법에 있어서 학생의 필요와 적성과 능력에의 적합성 및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며, ‘학습자의 경험의 질을 중시하는 교육’을 위해서는 국어 교과의 내용 체계 구성에 있어서 시대적 타당성 강화와 내용 요소의 합리적 조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제 6차 교육 과정의 기본 방향은 다음과 같다.① 국어과 교육과정 구조의 체계화 ② 목표 체계의 구조화③ 내용의 정선 및 내적 구조화 ④ 지도 및 평가 지침의 구체화제 6차 국어과 교육과정은 국어과 교육의 성격 규정, 국어 교육 내용의 체계화, 교수-학습방법에 관한 사항의 구체화, 평가 방법에 관한 사항의 명료화에 중점을 두어 개정하였다 볼 수 있다.? 제 6차 교육 과정의 성격(1). 국어과 교육의 성격 규정국어과 교육의 성격에 관하여 지금까지 세 가지서로 다른 시각에서의 성격 규정이 있어 왔다. 국어과 교육을 ‘국어사용 기능을 신장시켜 주는 교육’으로 규정하거나, ‘국어 교육 관련 분야 학문이 제공하는 지식 또는 개념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규정하거나, ‘국어 교육과 문학 교육의 이원적 구조’로 파악하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 6차 국어과 교육 과정에서는 국어과 교육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서 언어 사용 기능의 개념을 확대 해석하였고, 교육 과정 접근 이론에 있어서도 특정이론에 구속 받지 않고 국어과 교육의 본질 추구를 상위 목표로 하여 여러 가지 이론을 국어과 교육의 실정에 맞게 통합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예술 교육으로서의 문학 교육을 언어 교육과의 상호 관련성 및 보완성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국어과 교육 속에 통합시켰다.(2). 제 6차 교육과정의 목표 및 영역제 6차 교육과정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전문: 국어생활?국어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가)언어 사용 기능의 신장나)언어(국어)의 기초적인 지식?바른 사용다)문학의 기초적인 지식?감상력과 상상력 함양제 6차 교육과정에서는 하위 학년 목표를 없애고 일반적이고도 포괄적인 학교급 목표만 제시하여 체계성 제7차 교육 과정은 공업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산업사회가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중요시하는 21세기의 지식?정보 기반 사회, 후기(또는 탈)산업사회를 염두에 둔 교육 과정이다. 따라서 제7차 교육 과정에서는 이런 시대적 요청을 수용하여 학교 교육에서 ‘창의성’을 크게 강조하였고, 실제 수업에서는 학생들의 현재의 수준을 고려하면서 그 수준에 적합한 교육을 하고자 하는 ‘수준별 교육’을 강조하였다. 창의성과 수준별 교육에 대한 제7차 국어과 교육 과정에서의 강조는 국어 교과서의 편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제7차 국어과 교육 과정의 또 다른 특징은 지식 기반 사회의 도래에 따른 기초 및 기본 교육의 강화이다. 우리가 이미 진입하고 있는 21세기 사회는 과학과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하고, 사회 제도가 더욱 정교하게 분화되며, 인간 개인 및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더욱 중요시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생활에 요구되는 지식 및 정보의 수준이 전보다 훨씬 높고, 기존 지식의 활용보다는 새로운 지식의 창출이 가치롭게 여겨지며, 윤리와 도덕에 기초한 인간성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개인적 및 사회적 요구가 된다. 교육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제7차 교육 과정에서는 기초 및 기본 교육을 강화한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학교 교육 과정을 초등학교 1학년에서부터 종전의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전체 10개 학년을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기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초등학교 6년 과정에만 적용하였던 종래의 국민 교육 권리를 이제는 10년으로 연장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의무 교육의 기간을 앞으로 10년까지 연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의 중요한 변화와 요구, 즉 지식과 정보 사회에로의 도입에 따른 창의성 신장의 요구, 학생 개개인에 대한 교육적 배려의 필요성에 따른 수준별 교육, 그리고 과학의 급격한 발달로 더욱 중요하게 인정되는 윤리와 도덕 교육의 강조는 총론은 물론 각론인 국어과 교육 과명시적인 구분이다.(2) 내용제7차 국어과 교육과정에서는 국어과의 지도 내용을 ‘내용 체계’와 이를 학년별로 상세화한 ‘학년별 내용’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다. 우선 내용 체계를 보면, 아래와 같다.(가) 내용 체계* 제7차 교육 과정의 내용 체계는 제6차 교육 과정과 큰 틀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서 아래와 같은 차이를 보인다.ㅇ 제6차에서는 하위 영역을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의 순서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7차에서는 ‘말하기’와 ‘듣기’ 영역의 순서를 바꾸어 ‘듣기’를 먼저 제시 하였다.ㅇ 문학 영역에서는 6차에서는 제시하지 않았던 ‘창작’을 제시하였다.ㅇ 제6차에서 ‘언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던 영역을 제7차에서는 ‘국어 지식’으로 바꾸었다.ㅇ 제6차에서는 내용을 ‘본질’, ‘원리’, ‘실제’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7차에서는 이를 ‘본질’, ‘원리’, ‘태도’, 그리고 이 세 영역에 모두 걸치는‘실제’의 네 가지로 구분 하였다.* 이 이외에 내용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ㅇ 언어활동의 영역에서는 본질의 내용을 좀 더 상세화 하여, 언어 사용자들이 고려하여야 할 지식으로 그 내용을 구성하였다. 예를 들면, 말하기 영역에서 본질의 내용들을 ‘필요성’, ‘목적’, ‘개념’, ‘방법’, ‘상황’, ‘특성’ 등으로 제시한 것들이다.ㅇ 언어활동 영역의 원리에 대한 내용들도 6차보다 더 자세히 그리고 철저히 기능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하였다. 예를 들면, 말하기 영역의 원리에 대한 내용을 ‘청각적 식별’, ‘내용 확인’, ‘추 론’, ‘평가와 감상’으로 제시한 것이 그러한 예들이다.ㅇ 국어 지식 영역은 제6차에서는 ‘언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던 것이 여기서는 ‘국어 지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영역의 이름이 바뀌면서 그 내용도 종전의 일반적이고 넓은 ‘언어’의 개념에서 상당히 전문적인 그러나 폭이 좁은 ‘국어 지식’으로 바뀌었다. 그 예로 6차에서는 언어의 본질을 ‘언어의 특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