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고려시대의 교육< 차 례 >1. 고려시대의 사회와 문화12. 관학(官學)1가. 학교제도의 성립11) 국자감 설립 이전의 학교12) 국자감(國子監)23) 향교(鄕校)64) 동서학당(學堂)73. 사학8가. 사학 십이도8나. 서당94. 과거제도95. 불교의 융성과 교육적 영향116. 국학의 부흥과 성리학의 수용12가. 안향의 국학진흥12나. 성리학(性理學)의 수용127. 참고문헌130. 고려시대의 사회와 문화고려는 918년 왕건이 왕위에 올라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1392년 조선의 개국 때까지 475년간 존속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이후 숭불정책을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채택하였다. 이는 불교를 바탕으로 국가를 통합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불교가 기본적으로 수신(修身)의 도라면, 유교는 치국(治國)의 도로서 사회적 질서를 수립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이념과 원리를 제공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의 사상 면에서 본다면, 적어도 주자성리학이 도입되기 이전의 고려사회에 있어서의 정신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였다. 비록 유학이 형식적으로는 존숭되었지만 유관심불(儒冠心佛)이라 하여 사상의 기저에는 불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불교사회로 규정지을 수 있다. 불교는 신라사회에서도 크게 성행되었지만, 고려사회에서는 더욱 발달하여 우리 역사상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리하여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고 의천(義天),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이 나와 한국적 불교의 체계를 이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일변도의 사회 속에서도 유교는 왕권강화와 형식적 국가체제를 지탱하는 이념으로 강조되어 그 영향력이 면밀히 확대되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학교교육과 과거제도라고 할 수 있다. 여말에 있어서 주자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의 등장은 여말의 제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이념으로서의 유교가 그 역사적 기능을 완성하였다. 따라 예라고 할 수 있다.성종 6년(987)에 전국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각 1명씩을 파견하여 지방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는 기사와 동왕 8년의 ‘교서를 내려 12목과 모든 주(州), 부(府)의 경학박사, 의학박사들을 장려하고 술과 음식을 주었다.’는 기사는 성종 6년에 지방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내용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보아 중앙의 학교가 설립된 뒤에 할 수 있는 조치로 보여진다.1) 국자감(國子監)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성종11년(992) 12월에 비로서 국자감(國子監)이 설립된다. 이 국자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성에 있던 학교를 개편 ?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국자감은 고려가 여진과 거란의 침입 등 외환에 시달리면서 재정적인 지원책이 미흡하여 큰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사학 십이도(十二徒)가 형성되어 큰 발전을 보게 된다. 한편 국자감은 예종 대에 이르러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예종은 국자감의 교육을 진흥하기 위하여 7재(七齋)를 설치하고, 교육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학진흥책을 펴게 된다. 그리고 인종 때에는 일종의 식목도감(式目都監)을 두고 일종의 교육법인 ‘학식’이 제정됨으로써 그 체제를 완비하게 된다. 예종과 인종의 국학진흥책으로 국자감은 크게 발전하다가 이후 무신정권과 대몽 항쟁 기에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국자감은 고려 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충렬왕 대에 안향의 노력으로 섬학전(贍學田)을 설치하는 등 국자감에 대한 새로운 진흥책이 마련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그 명칭이 국학(國學) ? 성균관(成均館) 등으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국자감은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인재를 양성하고 관리등용에 대비하는 기구라 할 수 있다. 국자감 설립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병인년의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왕이 된 자가 천하를 화민성속(化民成俗)함에는 학교가 먼저니(…중략…) 유사(有司)에게 경치 좋은 땅을 얻어서 학사(學舍)흫학조교는 종9품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한편 고려 국자감은 묘학제를 갖추고 있었다. 묘학제는 향사의 기능을 가진 문묘와 강학의 기능을 가진 학당을 갖춘 학교의 체제를 말한다. 고려 국자감은 공자를 위시한 유교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를 별도로 둠으로써, 문묘를 학당 안에 두었던 신라 국학과는 달리 비로소 완전한 묘학제를 갖추게 되었다.고려의 관학은 끊임없는 외침과 귀족사회 내부의 문제 등으로 인하여 침체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려사?곳곳에 등장하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문종 17년 (1063) 8월에 명령하기를 ‘국자감 학생들이 근래에 학업을 폐(廢)하는 자가 많으니 그 책임은 학관(學官)에게 있다. 지금부터는 그들을 특별히 면려(勉勵)하고 연 말에 그 성적을 비교하여 출학과 재학을 결정하라. 유생(儒生)으로서 국자감에 재학한지 9년이 되고 율생(律生)으로서 재학한지 6년이 되었어도 공부에 어두워 성과가 없는 자는 모두 출학 시킬 것이다’고 하였다.숙종 7년(1102) 윤 6월에 재상(宰相) 소태보등이 제의하기를 ‘국학(國學)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데 경비가 적지 않게 드니 실로 인민에 대한 피해로 되며 또 중국의 법을 우리나라에서 실행하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이를 폐지시켜 주십시오’ 라고 하였으나 회답을 주지 않았다.예종 2년에 명령하기를 ‘학교를 세우고 어진 이를 양성하는 것은 삼대(三代) 이래 정치의 근본이다. 그런대 유사(有司)등의 의논(議論)이 아직 결정되지 못하였으니 응당 신속히 시행하라’고 하였다. 예종이 바야흐로 교육사업을 지향하여 마침내 이 명령을 내리니 선비들은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대신 중에서는 한 사람도 이를 받드는 자가 없었다. 당시 여론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었다.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종(睿宗) 이전 까지는 내외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관학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학(私學)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된다.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고려는 국학인 국자감을 유교적정치의 제일의 과제게 하였다. 왕도 또한 내고(內庫)의 돈과 곡식을 내여 이를 원조하였다. 안향이 남은 재산을 가지고 중국 강남(江南)에 사람을 보내어 육경(六經)과 제자(諸子)와 역사 서적을 구입하여 왔다. 이러한 노력을 결실로 이 때부터 학업을 지망하는 선비들과 7관(七館) 십이도(十二徒)의 학생들로서 경서를 끼고 수업(受業)하는 사람이 수백 명에 달하는 등문풍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해 6월에 국학의 대성(大成)전이 낙성되어 문묘제도를 보완하게 되었다. 그 이후 충선왕도 양현고에 은 50근을 주고 예문관에 명령하여 군, 현의 무재(茂才)를 불렀다가 첩임(牒任)을 주고 훈도(訓導)로 임명케 하는 등 흥학에 힘썼다.충숙왕, 공민왕, 공양왕 대에도 다양한 흥학책이 제시되나 교육실제는 부진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는 공양왕 원년(1390) 조준의 상소에도 잘 나타나 있다.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이므로 나라의 다스림과 어지러움, 정치의 잘되고 못됨이 다 디에 유래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전쟁으로 인하여 학교가 헐고 무너져 무성한 풀이 자라고 있으며 향원(鄕愿)들이 선비라고 핑계하여 군역(軍役)을 회피합니다. 5, 6월이 되면 한가하게 어린이들을 모아 당송절구(唐宋絶句)나 읽다가 50일이 지나면 파(罷)하고 이를 하과(夏課)라 합니다. 수령된 자는 이것을 범연(泛然)히 보아 개의(介意)치 않으니 이러고서야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선비를 얻어 국가의 융성 도우려 한들 될 리가 있겠습니까.그리하여 조준은 “원컨대 지금부터는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박학(博學)한 사람으로 교수관을 (敎授官) 삼아 5도에 각각 한사람씩 파견하여 군, 현을 두루 순행케 하되 그에게 필요한 말과 접대비는 모두 향교에 맡겨 주관하게 할 것이며 또 지방에 한가히 사는 유자(儒者)를 그 고을 의 교도(敎導)로 임명하고 자제들에게 항상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게 하며 사장은 읽지 못하게 하며 교수관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엄격한 과정표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학생들의 통달 여부를 논란(論難)하여 이름을 올리고 테서 비롯된다. 최충의 교육은 당시 유학계에 거대한 반응을 일으켰다. 당대의 명유들도 최충을 모방하여 개경에 11개의 학교를 세우니 합하여 이를 십이공도(十二公徒)라고도 하였다. 「고려사」열전「최충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현종(顯宗) 이후에 전란이 겨우 멎었으나 미쳐 문교(文敎)에 힘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 때 최충은 후진을 모아 가르치길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학도들이 모여 들어 거리와 골목에 차고 넘치었다. 그래서 최충은 드디어 악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 등 구재(九齋)로 나누어 교수하였으니 세상에서 그들을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불렀다.무릇 일체 과거를 보려는 자제들은 반드시 먼저 그의 학도로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을 빌어 하과(夏課)를 열었는데 학도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학력이 우수하면서도 아직 관직에 취임하지 않을 자들을 선발하여 교도(敎導)로 삼고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교수하였으며 간혹 선배들이 와서 촛불에 금을 긋고 시간을 정하고 시나 부를 지어 그것을 평정하며 그 순서에 따라 방을 붙이고 호명하였다.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좌우로 기혼자와 미혼자가 정렬하여 앉히고 술잔을 돌리는데 모든 행동에 예절이 있고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가 정연했으며 서로 더불어 수창(酬唱)했으며 해가 저물면 일동이 모두 낙생영(洛生詠)을 짖고서 파하니 보는 사람마다 누구나 칭찬하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가 죽으니 시호를 문헌(文憲)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모두 구재에 적(籍)을 두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렀다. 또한 유신(儒臣)들이 세운 도(徒)가 열 한 개가 있었으니 흥문공도는 정배걸이 설립한 것으로 일명 우천도 라고도 하였고 광헌공도(匡憲公徒)는 참정 노단이 설립한 것이요, 남산도(南山徒)도는 좨주도 김상빈이 서원도(西園徒)학도는 복야 김무체가, 문충공도는 시다.
목 차서론 …………………………………………………………… p 3본론1. 음식과 요리 ……………………………………………… p 32. 옷과 장식 ………………………………………………… p 53. 집 …………………………………………………………· p 74. 언어 ………………………………………………………· p 85. 결혼 ………………………………………………………· p 9결론 …………………………………………………………… p 11참고문헌 ………………………………………………………· p 121980년까지 우리 고대생활사는 몇 줄 안 되는 문헌자료 내용이나 간간이 발견되는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바탕을 두고 서술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다가 90년대에 이르러 고구려 고분벽화가 담고 있는 풍부한 자료적 가치가 재인식, 재평가되면서 생활사 연구는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되었다.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고분벽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마치 현대의 매스컴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기록으로 나타내 주는 신문이라면, 벽화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텔레비전 영상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사의 상당량이 외국 기자들이 피상적으로 쓴 외신을 인용 보도한 것이 많지만, 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제작한 생생한 화면 뉴스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인의 의식주 일상생활의 세세한 모습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대외교류 양상, 종교관, 내세관, 우주관에 대한 정보까지 담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된 까닭이다.이제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롭게 알려지거나 재인식된 생활사 자료들이 담고 있는 역사문화 정보들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파악하고 설명하는 일이다.1. 음식과 요리우리나라에서 신석이 이후 유적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되는 곡식과 토기의 바닥에 찍혀 있는 곡물의 자국에서 식물을 재배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농경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오늘날처럼 벼농사를 지어 쌀밥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섭취해야 할 염분이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을 통해 확보되었다. 내륙 국가였던 고구려는 동해안에 자리 잡고 있던 동옥저를 정복하여 백성들이 필요로 하던 소금과 생선을 공급받았다. 압록강과 같은 큰 강 연안에는 일찍부터 소금가마를 등에 지고 강변길을 오르내리던 소금장수들이 있어 골짜기를 마을사람들에게 필요한 소금을 팔았다.중국 사람들의 눈에도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식품을 잘 만드는 것으로 보여 삼국지에 특별히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안악 3호분의 고분벽화에는 우물가에 된장 같은 발효식품을 저장해 놓은 듯한 장독들이 보이며,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에는 술, 고기와 쌀 그리고 된장이 창고에 가득하다는 글이 자랑삼아 적혀있다.)삼국시대에는 철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쇠로 만든 솥이 조리를 만들기 위한 필수도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신라의 고승 전정법사가 출가하기 전 품팔이를 하면서도 끝내 지니고 있었떤 것처럼, 일반백성들에게 쇠솥은 아무리 궁해도 내다 팔지 않으려 했던 생존 수단의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음식물을 담는 데에는 토기와 목기가 많이 쓰였지만, 귀족들은 놋쇠로 만든 유기를 쓰는 경우가 많았고, 음 은 청동제 그릇을 사용하기도 했다. 귀족이나 왕족 사이에서 특별히 인기가 있었다. 밥과 같이 물기가 남아 잇도록 곡식을 쪄 먹거나 죽처럼 만들어 먹는 음식이 발달하면서 삼국시대 사람들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여 식사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물기가 많고 차지며 따듯한 음식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처럼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기 힘들다. 백제 무령왕릉 등에서 청동수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왕족이나 귀족은 청동이나 놋쇠로 만든 수저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일반백성들은 나무수저를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무용총 고분벽화에서도 확인되듯이 삼국시대의 구족들은 독상을 받았으며 식사도중 음식이 모자라지 않도록 별도의 상에 커다란 음식그릇과 차병, 술병 등을 올려놓아 시종이 따로 덜어 주인과 손님의상에 올려놓을 수 있게 하였다.신라지배층의 무덤인 경주 황남대총에서는 금은 출토된 관련유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인들도 식물섬유나 동물섬유를 짜서 만든 편포(編布)와 가락바퀴나 베틀을 이용해 만든 직포를 옷감으로 해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삼국시대에 확립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의상을 보면 상의로는 저고리, 하의로는 바지와 치마, 여기에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띠를 매어 고정하며, 발에는 신을 착용하여 몸을 완전히 감싸는 형태를 하고 있다. 동시에 그 위에는 두루마기를 덧입어 냉대성 기후에 적합한 북방유목민 계통의 의복구조를 하고 있다.두루마기는 기본 의상 위에 덧입는 옷이었지만 기후가 온화한 신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4두품 이상 귀족 남녀 사이에 소매 없는 겉옷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저고리의 아랫자락은 엉덩이까지 내려오게 되어있어, 허리춤에 띠를 둘러 묶어 활동하는 데에 불편하지 않게 하였다. 허리띠에는 여러 가지 장식물을 더하였는데, 동물투쟁문이나 신화적인 짐승과 새를 장식한 장식물을 붙이기도하고, 짧은 칼과 숫돌 같이 실용적인 것과 물고기 모양 장식처럼 주술적 의미를 담은 것들을 늘어뜨리기도 하였다.)고구려의 복식은 별다른 기록이 없어 다만 고분변화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각저도 인물에서 보면 마치 오늘날 씨름할 때 사용되는 삽바와 비슷한 형태임을 알 수 있고 무용총현실동벽우부에 있는 무용도 및 남녀인물도 복장을 보면 절풍이라 보여 지는 관모를 쓴 남자와 수발을 곱게 손질한 듯 한 여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의 복장은 모두 길이가 긴 저고리에 바지를 착용하고 있고 저고리의 깃, 도련, 수구 등에서 다른 색의 천으로 선을 둘렀고 허리에 띠를 매고 포 밑에는 주름이 있는 치마를 치마 밑에는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보여진다. 또한 귀족과 서민은 구별이 있어 귀족은 통이 넓은 바지와 그 길이가 상당히 길고 앞여밈도 서로 교차하는 교임식에 반해 서민복은 모두 통 좁은 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있으며 소매는 곡선이 없는 직수인 것 같고 앞여밈도 교임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앞이의 관리들은 뿔이 난 듯한 뭄ㄴ관 모자와 뒤가 높은 무관 모자, 새 깃을 꽂은 고깔 모자 등을 썼으며, 일반 평민들은 검은 머릿수건을 했다.)“갑옷과 말갑옷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원조다.”고대 한민족의 무구가 북방민족이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것이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학설이 제기됐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는 8일 언론인회관에서 열린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런 내용의 논문 ‘고대 한국갑옷의 원류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을 발표했다.논문을 보면, 고조선의 영역에 있던 숙신에서 뼈갑옷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또 고조선 영역인 대목단둔, 범의구석, 흑룡강성 경화 유적 등에서 장병형 뼈갑편이 출토되어 한민족의 뼈갑옷 생산시기는 신석기시대 후기까지 소급되고 있다.이에 비해 중국쪽은 기록이 없을 뿐더러 서기전 1300년경에 조성된 상왕조의 왕실 무덤에서 출토된 게 가장 이른 시기다.그것도 가죽 갑편이다. 왕실의 무덤에서만 발견된 점과 가죽 갑편의 형태가 고조선의 뼈갑옷의 장방형인 점에서 고조선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특히 가죽갑옷의 잔줄무늬와 구름무늬는 고조선영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문양과 일치한다.철갑 역시 고조선의 것이 중국보다 훨씬 앞서 중국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묘 출토 철갑은 장방형의 철편을 물고기 비늘처럼 엮은 것으로 서기전 3세기 고조선 후기에 철갑이 생산되었음을 보여준다.이에 반해 중국은 춘추시대까지 철갑을 만들지 못했다. 섬서성 임동 출토된 진나라 무사 도용은 모두 가죽갑옷을 입고 있다. 서한 초기에 이르러 철갑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그나마 고조선의 것이 갑편을 쇠줄로 연결한데 비해 가죽끈이나 비단끈으로 연결하는 형태였다.또 고구려 안악 3호 고분에 보이는 철 말갑옷은 중국 북조 초기에 속하는 초역파 1호 고분의 철갑옷 말도용보다 훨씬 앞선다. 강원도 철령 유적에서는 안악고분보다 앞선 서기 3세기경의 철갑옷말 모형이 출토되었다.5~6세기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닥 난방 시스템이라고 하겠다. )한국 고유의 난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모든 민가(民家)에 사용된다. 온돌의 채난원리(採暖原理)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것인데, 방바닥 밑에 깔린 넓적한 돌(구들장)에 화기를 도입시켜,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로 난방하는 것으로 전도에 의한 난방 이외에 복사난방과 대류난방을 겸하고 있다.이와 같은 원리로 난방을 하는 곳은 중국의 동북부와 몽골[蒙古]의 일부인데, 중국 동북부에서는 방의 일부 즉 잠자는 곳에만 설치하고, 몽골에서는 파오(게르) 바닥에 이것을 이용한다.온돌은 한국의 독특한 난방법으로 열의 효율이 좋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고장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구조체에 빈번한 손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등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열전도에 의한 난방이므로 방바닥면과 윗면의 온도차가 심하여 누워 있는 사람의 건강에 좋지 않으며,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방을 밀폐하므로 환기가 잘 되지 않고, 습기가 없어져 건조되기 쉬우며, 가열시간이 길고 온도조절이 어렵다는 등 단점도 있다. )온돌은 집 구조의 주요한 부분으로 여기도록 만든 이러한 바닥난 방법은 고조선, 옥저, 고구려 등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지역 나라들에서 적극 개발되어 서쪽으로는 북중국 일대,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로 전해지면서 지역별 기후조건, 생활조건에 맞도록 개발되고 바뀌어졌다.4. 언어중국 역사책에 나오는 한ㅂ민족 고대 나라들의 언어를 비교해보면, 고구려에 대한 기록에서 “ 동이족(= 배달민족 = 한민족)들이 서로 말하기를고구려는 원래 부여인들이기 때문에 언어와 법이 많이 같다고 한다.”“고구려는 동이(한민족)의 옛말에 원래 부여인들이라 하는데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많이 같다.”“고구려는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많이 같은데,그 성질과 의복은 다른 데가 있다.”----------------------------------------------------------------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東夷舊語以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국가와 종족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흥망을 거듭하고 세력 교체가 이어지는 다원적 역사가 전개되었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주체는 만주, 한반도의 삼국과 가야, 일본열도의 왜, 중국 대륙의 중원왕조, 북방초원지대의 유목국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원지역의 정치적 상황이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1~3세기에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국가와 정치적 집단이 주로 중국군현과 교섭하거나 충돌하였다. 고구려는 기원 전후 시기부터 중앙권력을 강화시켜, 2세기대에는 중국 군현에 대한 공세를 귀하였다. 공손씨(요동에서 활약한 호족세력)의 요동진출로 중단되었던 고구려의 대중외고는 중국이 삼국으로 나누어지면서 그 폭이 확대되었다. 위와 교섭하여 공손씨 세력을 제거하고, 한편으로는 오와 통교하여 위의 위협을 견제하였다. 3세기초에는 북방 유목적의 남하와 진세력의 후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반도에서 중국 군현을 퇴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삼한 소국의 경우, 낙랑군, 대방군 등 군현과 이루어진 교섭은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기 보다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중국 군현의 분열정책이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그러나 주변 소국을 통합해 간 백제와 신라는 3세기 중엽 이후 서진과 통교하면서 점차 국제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4세기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새롭게 변동하는 시기였다. 4세기는 5호 16국시대라는 북중국의 정세를 배경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면서 국제질서의 변동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합하여 대표자로 등장하였고,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일본열도에서도 독자적인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한반도와 일보열도사이에 정치적 관련성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 왕조가 추진해온 동방정책의 전진기지인 변방 군현이 소멸하면서 중국세력과 동북아의 여러 세력 사이의 교섭이 이제는 국가 대 국가의 외교교섭단계로 접어들었다.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주도하는 존재는 고구려와 백제 및 전연, 후연이었다. 요동지역을 놓고 쟁패를 벌이던 고구려와 전연, 후연사이에는 외교과 전쟁의 국면이 반복 교차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전연, 후연과 책봉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당시 세력관게에 따른 일시적인 성격으로 보기도 하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배경으로 황제국이라는 전연의 국가적 위상 및 고구려의 세력권을 상호 이정하는 형태로 조공과 책봉관계가 수립되었다는 견해도 있다.한편 한반도 안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면서 새롭게 국제질서가 재편되었다. 먼저 고구려는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이후 신하 왕의 즉위에 개입할 정도로 신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해갔다.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는 당시 국제 정세에서 백제, 가야, 왜의 연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고구려의 전략으로 이해된다.백제는 4세기 중엽이후 외교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가야 및 왜의 교섭을 중심으로 이루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자신의 정치적 세력권과 대외교섭망을 구축해갔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반도 안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420년 송의 건국, 433년 백제와 신라의 동맹 등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 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130여 년이나 계속된 중국의 5호 16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북위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성립되었다. 북위를 가운데 두고 송나라와 유연, 동의 고구려는 서로 연결을 꾀하며 북위를 포위하고 견제하는 한편, 각자 북위와 우호관계와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당시 이들 국가 사이에 맺어진 적대 관계의 중심축은 북위 대 남조국가, 북위대 유연이었다. 특히 최강대국인 북위를 사이에 두고 남조 국가와 유연은 상호 연결을 하여 북위를 남북 양쪽에서 위협하였다. 이는 우월한 국력을 갖는 북위가 끝내 남조나 유연을 정복하지 못하였던 국제적 배경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공통사회 교재론]지도를 가르치기 위한효과적인 교수학습방법지도를 가르치기 위한 교수학습방법현재 우리나라 교육제도에서 초등학교 4학년에서부터 6학년까지 사회과 교육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초등학교용 사회과부도가 있고, 중학교에서는 중학교용 사회과부도, 고등학교에서는 지리와 역사가 분리되어 지리부도와 역사부도가 별도로 사용되고 있다.사회과부도하면 엄연한 교과서이면서 교과서 같지 않는 교과서로 인식되는 것은 실제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지도’라는 교과목이 설정되어 있지 않고, 학습지도요령도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부도는 이름 그대로 사회과의 원활한 학습을 위한 학습보조 자료로 인식된다.보통 학생들이 지도학습을 어려워한다. 축척과 방위, 대축적지도, 소축척지도 등 지도와 관련된 내용이 우리현실에 많이 적용되는 것들이 아닐뿐더러 지도를 직접 그리고 이해하는 과정없이 지도에 필요한 개념들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지도를 딱딱하고 재미없는 수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지도는 지구표면의 일부나 전부의 상태를 기호나 문자를 사용하여 실제보다 축소해서 평면상에 나타낸 것이다. 오늘날 토지에 관한 각종 조사연구, 사업계획, 행정, 교육, 군사 등에 널리 이용되어 인간의 모든 생활에 걸친 필수 자료가 되고 있다.점점 지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효과적으로 지도를 학습할 수 있는 교수학습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게 었다. 개인적인 나의 생각에서 지도를 가르치기위한 교수학습방법 몇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첫째, 지도는 우리 일상생활의 표면을 나타낸 자료이기 때문에 교사의 설명과 안내는 줄이고 학생들이 지도를 보고 읽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이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대부분의 수업이 강의식수업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도학습 역시도 교사의 설명과 학생들은 듣는 형식의 수업이 진행된다. 지도는 지식의 주입의 측면보다는 직접 읽고 해석하는 안목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학습이 필요하다.둘째, 여러 시각에서의 안목이 필요하다. 지도는 어떤 각도에서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도의 성격이 달라진다. 어느 나라를 기준으로 지도에 표시하는냐에 따라 지도의 모양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여러 시각에서도 지도를 읽어낼 줄 아는 시각을 길려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한가지의 지도를 수업에 이용하기 보다는 여러 가지의 지도를 많이 접해볼 수 있도록 시각자료를 많이 이용해야한다,
사회과 교수 ? 학습 계획안대단원 : Ⅲ. 다양한 지형과 주민 생활소단원 : 산지· 평야· 해안 지역의 주민생활주 제 : 바다가 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차 례Ⅰ. 수업연구의 동기 및 목적Ⅱ. 사회과의 목표(1) 사회과의 총괄 목표(2) 내용 조직의 원리Ⅲ. 단원 분석1. 교재 및 단원명2. 단원의 개관3. 단원의 학습목표4. 단원의 연계성5. 지도상의 유의점6. 단원 지도 계획Ⅳ. 본시 학습의 전개1. 단원명2. 본시 학습 목표3. 본시 교수-학습방법4. 교수-학습계획안참고문헌Ⅰ. 수업연구의 동기 및 목적교사로서의 전문성을 양성하기위해 사범대학에서 4년동안 배운 내용을 실제 학교에 가서 학교생활모습과 교실상황, 현재의 교육의 상태 등에 대해 배우고 느끼는 한 달을 보내면서 3주차와 4주차에는 직접 수업을 하면서 수업을 전문적으로 하기위한 교수-학습을 배우고 연구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사회수업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수업에 잘 참여시키는가? 하는 것은 성공적인 수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학생들을 수업에 잘 참여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전문성과 수업능력, 교수 학습 자료 등과 학생들의 심리상태 등 여러 가지가 서로 조화와 잘 어울려야 한다.아직 수업을 진행하고 조절하는 부분에서 많이 미흡하지만 실제 교직에 종사하게 될 때 수업을 전문가답게 할 수 있기위해 수업기술을 터득하고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Ⅱ. 사회과의 목표1. 사회과의 총괄 목표2007년 개정 사회과 교육 과정은 제 7차 교육 과정과 마찬가지로 사회과의 목표를 크게 교과목표와 단원목표만 제시하였다. ‘교과 목표’는 사회과 전체의 목표를 제시하는 총괄목표와 지리, 역사, 일반 사회 및 지식, 기능, 가치, 태도의 영역별로 제시되는 영역별 목표로 구분된다. ‘단원 목표’는 교육 과정 대강화에 따라 대단원 아래의 소주제가 삭제된 관계로 제 7차 교육과정보다 더 상세하게 제시되고 있다.개정 교육 과정에서는 사회과의 총괄 목표를 ‘사회 현상에 관한 기초적 지식과 능력 현대 사회의 문제를 창의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공동 생활에 스스로 참여하는 능력을 기른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발전은 물론 국가, 사회,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기른다.’ 라고 제시하고 있다.사회과의 총괄 목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을 가진다.첫째, 사회과의 목표는 지식, 기능, 가치·태도 3가지 영역으로 제시되었고, 사회 현상에 대한 지식과 기능, 정보 활용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 공동체 생활의 참여 등은민주 시민의 자질을 육성하기 위한 도구적 특성을 지닌다.둘째, 사회에 대한 인식과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사회 현상에 대한 기초적 지식과 능력, 기본 개념과 원리의 탐구능력, 지식 및 탐구 방법의 이해가 기본적으로 요구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셋째, 민족적 정체성과 신념을 강조하던 과거 교육 과정과 달리, 민주 시민의 자질이 핵심 목표로서 강조되고 있고, 개인과 사회의 균형적인 발전이 강조되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2. 내용 조직의 원리민주 시민의 자질을 육성하기 위해 개정 사회과는 내용 선정의 기준에 의거하여 중학교 사회과 교육내용을 다음과 같은 원리에 따라 조직하였다.첫째, 핚교급의 성격, 학문의 고유성을 고려하여 통합 교육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사회과는 지리, 역사, 일반사회 영역에서 중요한 개념, 일반화, 이론 등을 각 주제에 따라 병렬적으로 조직하는 다학문적 접근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영역 통합을 지향하여, 지리는 한국지리와 세계지리의 통합을 통해 한국과 세계의 관계를 비교하도록 하였고, 역사는 국사와 세계사의 통합을 통해 우리 역사를 세계사와 연계하여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일반 사회는 정치, 법, 경제, 사회, 문화의 통합을 통해 복잡한 사회현상과 문제를 종합 적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조직되었다.둘째, 세계화와 정보화 따른 간접경험의 확대, 학습자의 인지 발달과 학습 준비도 등을 고려하여 환경 확대법을 탄력적으로 적용하였다. 학생들이 주변 지역에서개념과 이론을 구체적 사례와 문제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내용의 복합성과 깊이가 집중하도록 나선형 교육과정의 원리에 따라 조직하였다.넷째, 사회과의 통합성과 역사, 지리, 일반사회 영역에서 학문의 계통성 사이에 조화를 추구하였다. 사회과의 내용은 지역, 국가, 지구촌과 관련된 내용 간의 균형, 과거, 현재, 미래와 관련된 내용 간읙 균형도 고려하여 조직되었고, 내용과 방법의 통합, 지식·기능·가치의 통합을 통하여 고차적 사고력을 기르도록 구성되었다.다섯째, 사회과학의 기본개념과 아이디어를 다양한 학습 활동과 결부하여 제시함으로써 학생의 흥미와 능력에 차이에 대응하는 다양한 학습경험을 제공하도록 하였다.Ⅲ. 단원 분석1. 교재 및 단원명(1) 교재 : 중 1사회, 비유와 상징(2) 단원명Ⅲ. 다양한 지형과 주민생활2. 산지·평야·해안지역의 주민생활2.3 바다가 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2. 단원의 개관본 단원은 산지·평야·해안 지역에 분포하는 다양한 지형의 특징을 알아보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미들은 지형을 어떻게 이용하면서 살아가는지 파약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화산과 지진활동으로 인해 나타나는 독특한 주민생활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한다. 이를 통해 자연환경의 차이가 의·식·주를 비롯하여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도록 한다.3. 단원의 학습목표· 세계의 독특한 지형 경관을 통해 지형의 다양성을 이해한다.· 세게의 다양한 지형의 분포와 형성 작용을 알 수 있다,· 산지 · 평야 · 해안지역의 특색을 파악할 수 있다,· 화산과 지진 활동의 원인과 현상을 이해한다.· 다양한 지형을 보고 지형 형성 작용을 유추할 수 있다.· 세계와 우리나라의 주요 산맥과 하천의 위치를 말 할 수 있다,· 산지 · 평야 · 해안지역의 주민생활 모습을 사례를 들어 지형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 화산과 지진 활동의 피해 대책을 제시할 수 있다.· 다양한 지형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주민 생활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화산과 지진 활동의 피해 대책의 행동 요령을 실천하는 자세를 사실을 주지시킨 다.·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여 해안 지역의 주민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도록 한다.6. 단원 지도계획단원소단원차시시간학습주제 및 요소학습활동세계의 다양한 지형1.세게에는어떤 지형들이 있을끼?14지형 형성 작용, 세계의 다양한지형과 분포 및 형성 작용· 지형을 형성하는 지구 내부의 힘과 외부의 힘 이해하기· 세계의 다양한 지형을 찾아보고 분포와 형성 작용 알아보기2.세계와 우리나라의 산맥과 하천2세계의 산맥과 분포, 세계의 하천과 분포· 세계의 주요 신기습곡산지와 고기 슴곡 산지의 위치및 특징 알아보기· 세계 대하천의 위치 확인하기산지·평야·해안지역의 주민생활산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3우리나라의 산맥과 분포, 우리나라의 하천과 분포다양한 형태의 산지지역산지 지역의 주민생활· 우리나라의 산맥과 하천의 분포 및 특징 알아보기· 다양한 형태의 산지 지형의 형성작용 파악하기· 산지의 특색과 주민 생활 알아보기사람들이 많이 사는 평야지역바다가 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4511다양한 형태의 평야지역,평야지역의 주민생활다양한 형태의 해안지역해안 지역의 주민 생활· 다양한 형태의 평야 지형의 형성 작용 파악하기· 평야 지역의 특색과 주민 생활 알아보기· 다양한 형태의 해안 지형의 형성작용 파악하기· 해안 지역의 특색과 주민 생활 알아보기화산과 지진땅속에서 시작되는 화산과 지진활동61화산과 지진의 발생화산과 지진활동으로 인한 피해화산과 지진활동의 피해 대책· 화산과 지진 활동의 발생 원인 이해하기· 화산과 지진활동으로 인한 피해와 대책 제시하기불리한 환경속에서 사는 사람들71화산과 지진 활동이 활발한 지역의 주민생활· 화산활동과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 확인하기· 화산활동이 활발한 지역의 이점과 이를 이용하는 주민 생활 알아보기Ⅳ. 본시 학습의 전개1. 단원명 : 바다가 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2. 본시 학습목표 : 해안 지역의 특색을 설명할 수 있다.해안 지역의 주민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할 수 있다.3. 본시 교수-학습방법(1) 개념학습중심으로 나선형으로 구성되어있다.(2) 강의식 수업강의식 수업은 교사가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대해 설명을 하면 다수의 학생들이 수동적으로 듣고 학습하는 수업방식을 뜻한다. 대부분의 학교수업에서 많이 행해지는 수업방식으로 지식과 정보의 주입식이라며 부정적 시각을 가진 입장도 있다. 하지만 강의식 수업의 주요 목표는 강의와 관련된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과 그 내용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강의식수업은 교사가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연속적으로 설명하고 중요 내용을 요약해 주면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듣고 내용을 받아 적는다. 강의식 수업은 짧은 시간에 다수의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의 효율적 교육이 가능하다. 협동학습이나 토론 수업등의 소집단으로 구성하는 학습과 달리 강의식 수업은 많은 학생들을 한명의 교사가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대집단학습 형태를 취한다.*강의식 수업의 과정단계교수-학습활동1. 강의의 시작 단계: 흥미유발, 학습 목표와 내용 소개·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사용하여 학생의 흥미를 유발한다.· 학습의 내용과 목표를 제시하고 수업의 줄거리를 소개한다.2. 강의의 전개 단계: 학습 내용의 효과적인 전달· 학습 내용을 논리적 순서대로 설명한다.· 학습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자료와 실제 사례를 적절하게 제시한다.3. 강의의 정리 단계: 학습 내용의 요약· 중요한 학습 내용을 요약하고 칠판에 정리해 준다.· 학습 내용과 관련하여 학생 스스로 사고하도록 질문한다.4. 교수-학습계획안단원Ⅲ.다양한 지형과 주민생활2. 산지 ? 평야 ? 해안의 주민생활소단원(3)바다가 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차시2차시학습목표해안 지역의 특색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다.주민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할 수 있다.학습시간45분교과서p83 ~ p85학습자료교과서, 학습지, PPT자료, 사진, 지도일시2010년 5월 18일수업자최소영학습단계학습과정학습활동자료 및유의 사항교사 핵심 발문 전략예상되는 학생 활동도입(5분)전시학습확인동기유발학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