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Joyce의 Dubliners 中 ‘The Dead’를 읽고 나서삶. 그것이 내가 전공으로 몸담은 ‘문학’이라는 학문의 ‘소제목’이기 때문에 나에겐 너무나 어려운지도 모른다. 사실은 영어 때문이 아니고 말이다.죽음. 나는 그것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껴본 경험이 있다. 그것은 고통, 두려움도 아니였다. 오히려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피로에 지쳐 잠에 빠져들 듯이, 너무도 편안히 방안으로 새어들어와 낮게 그리고 짙게 깔리는 연기처럼 스멀스멀 내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였고, 그것이 더욱 더 공포스러웠다. 그리고 나로부터 통제를 벗어나 무방비상태로 밀려들어오는 그것은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공포라기보다 밀려들어오는 ‘후회’였다. 그것은 내 인생의 방향을 180도 틀어버렸고, 또한 그것이 나를 감히 누군가에게 생명이라는 ‘기회’를 다시금 쥐어주는 자리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더 호러스러운 것은 그러한 사실을 감쪽같이 말끔히도 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다.The Death. ‘최고의 작품’이라는 수식어이기 이전에, 생명이 깃든 모든 것들의 최대의 관심사이기에 결코 넘어갈 수 없는 타이틀이였다.영어로 쓰여진 단편작들중 가장 뛰어난 걸작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James Joyce의 “The Dead”는 관리인의 딸인 Lily가 12월 송년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Gabriel Conroy로, 모든 일에 자신감에 차있지만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Mary Jane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이 재미도 없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도 당연히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연설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인용구가 청중들 수준에 너무 어려운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는 등 지극히 자기중식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연설을 통해 Morkan자매를 찬양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지한 여자라 비하하고, Freddy를 동정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욕설을 퍼붇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등 이중적인 모습으로 도 그려지고 있다. 그러다 그는 파티중 첫 충돌이 일어나는데 젊은 지식인인 Miss Ivors가 파티도중에 사람들 앞에서 그가 친영파 잡지에 글을 쓰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는 일이 생기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그러나 비록 그가 친영파여서가 아니라,문학적인 의도로 글을 썼다고는 하지만 Ivors에게서 그는 자존심의 상처를 받고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다.그리고 나서 파티가 끝나고 모두 밖으로 나갈 때, 음악에 멍하니 몰두해 서있는 아내의 모습에 욕정을 느껴 탐하려 하지만, 아내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자 서운해 한다. 그러나 곧 아내가 키스를 해주자, 또 다시 혼자만의 착각의 안도를 한다. 그러나 곧 Gabriel은 자신이 욕망이 최고조로 오른 상태일 때, 아내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게 되고, 또 다시 Michael Furey가 가스공장에서 일하던 소년으로 그녀를 위해 17세 나이에 말에 죽었다는 말에 더욱 충격에 휩싸인다. 아내의 과거를 듣고 혼란스러운 그는 눈 내리는 창밖을 보다가, 마침내 아내를 그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게 됨으로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곧 그는 곧 파티에서의 자신의 모든 행동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삶에 허무함을 느끼고 비록 짧지만 진정한 사랑 속에 살다간, 그래서 아직도 아내의 추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Michael Furey의 삶이 더 값진 것이라고 깨달으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가브리엘은 철저하게 신뢰하는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했지만, 그것이 무엇보다 자신의 범주안에 예속되어있다고 확신하고 의심치 않았던 아내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한 소년에 의해서 무너짐으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부와 명예 속에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것이 만족한 것 같이 화려하게 살아온 본인보다, 이미 오래전 사그러든 보잘것없는 소년이 오히려 더 살아있음을 느낌과 동시에 자괴감의 혼란을 느끼고, 짧지만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갔던 죽은 소년이 오히려 상위계층에서 지적우월감에 도취되어 살아간 포장되고 요란스러웠던 자신의 삶보다 더 영원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스로에 대한 허탈감을 느끼고, 동시에 겸손함과 같은 큰 깨달음, Epiphany을 느낀다.산자와 죽은 자의 대비, 등장인물간의 단절된 모습과 장치들...혹자 말한다. Joyce의 문학에서 마비와 단절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지겹도록. 그러나 나는 James Joyce의 Dubliners의 작품들에는 그러한 일반적인 문학도들의 의견들보다도 한발짝 더 나가는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읽으면 읽을수록 떨쳐낼 수 없는 것 같다.또한 혹자 말한다. ‘죽어야 사는 문학’이라는 것은 모두 과거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미래를 바라보는 실용적인 연구교육에 투자·집중해야 한다고... 무조건 그르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각기 이 세상을 살다 대자연의 구성성분으로 돌아간 모든 이들은 본인들만의 사연이 있고,깨달음이 있다. 수십년전에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수많은 극, 작품이 현대에 시대의 흐름과 걸맞는 영화와 같은 새로운 대중 매체로 재탄생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삶은 시대가 흘러도 배경이 달라질 뿐이지 그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허나 본인은 이러한 문학에서의 진정한 가치는 과거로서의 이념과 시각에 맞추어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데에도 의의가 있지만, 그것보다 현대시각과 이념으로 문학 자체에 재접근할 수 있어야 참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자세로서 순수하게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마비’라는 것, 어떤 이념이나 민족의 계몽을 위한 비판을 위한 시도일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사실 ‘우리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본디 ‘마비’의 연속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Dubliners의 몇몇 작품들, 특히나 이 ’The Death‘을 읽고 난 후에 머리에 맴돌았다.살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몇 번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고등학생 시절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 밤늦게 학교 앞에 아버지 대신 형이 처음 데리러 왔을 때였다. 아버지 차의 운전석에는 당연히 있어야할 아버지가 아니라 형이 대신 앉아있었는데, 옆자리 보조석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분명하게도 내게 밀려왔고,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의 알 수 없는 무게감을 동반했었다. 그 순간까지 운전이라는 것은 완전한 어른들의 세계의 것이였고, 우리는 영원히 운전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우리가 그렇게 영원히 멈춰있는 줄로만 알았다...나는 25년을 매순간 지나치는 초침이 아까워, 해보고 싶은 것은 이 내 몸뚱아리로 직접 다 겪어봐야겠노라고 하며 살아왔다. 제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 최선의 선택이 무얼까’ 머리를 싸매고 살아오려 노력했지만, 정신차려볼 때 마다 어느새 나는 벌써 내가 알기도 전에 너무 많이 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고 조급해하곤 한다. 벌써 숨막히는 영화에서 혈투에 나가는 듯했던, 웅장하고 감성적이기까지 했던 첫 수능도, 영하 40도의 최전방 DMZ에서의 2년의 군생활도, 자괴감, 창피함, 도전의 환희과 두려움의 일환으로 뒤엉킨 두 번째 수능과 힘겹게 시작된 24살 늦깍기 신입생 대학생활도,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큰 실망감과 혼란을 스스로에게 안겨줘 버렸던 나의 이별마저도... 나는 여전히 초등학생때 마법소녀 리나 엽서를 정신없이 모으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고 느껴지는데, 정신 차리니 영원히 내가 겪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미 지나버려 있었다.
James Joyce의 Dubliners 中 'Clay'를 읽고 나서한때 카피라이터가 되는 것을 소망했었던 때가 있었다. 극이나 소설은 스토리를 전개해 나감으로써 기승전결이 있다. 클라이막스 부분이 있고, 때론 반전도 있으며, 열린 결말이라는 장치를 두는 등의 여러 기법과 용어도 다분하다. 그러나 어찌되어든 간에 그것들의 공통점은 흐름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며, 수용자에게 얼마간의 작품을 소화는 ‘시간’을 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고카피는 다르다. TV프로그램 중간의 30초 짧은 순간. 혹은 스쳐지나가는 버스 옆면에 부착된 광고 문구는, 관심도 없이 흘려보는 이들에게 하여금 강렬한 메시지와 가슴속 울림을 선사해야만 한다.허용된 시간은 스쳐지나가는 1초. 주어진 공간은 오직 한 문장. 그 절제되고 한정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초 고도로 함축된 언어학적 향현... 인생의 경험과 깨달음과 군중에 대한 깨달음이 모두 한데 고농축으로 압축된 진주알과 같은 글쓴이 영혼의 집합체. 고요한 마음속의 호수에 돌멩이 한 개를 던져주듯,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마음의 파동으로 남겨두는 것. 그것은 가히 예술이라 표현해야 맞는 것이다.단편소설의 매력이 바로 이 광고카피와 맞물린다는 생각이 강의시간을 통해 들었다. 대하드라마 장편소설로 써도 부족한 할 사람의 사연이라는 것을 으래 그 삶이라는 녀석의 속성이 그러하듯 찰나와 같은 짧은 시간과 공간 안에 함축적으로 담아내버리는 묘미. 그 점에서 매력을 느껴, 학기를 시작하면서 구매한 더블린 사람들 중 가장 ‘짧은 단편’은 어떻게 짜여졌나 골라 읽어 보았다.이야기는 개신교에서 세운 윤락여성 재활원에서 성실히 일하는 마리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성격이 좋고 일을 잘하며 언제나 중재자로써 Peace maker로 인정받는 그녀는 만성절 휴일을 맞이해 조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거울 앞에서 옷을 단장하고 나와 아이들에게 선물해줄 건포도 케이크를 신중히 고른 후 전차에 올랐는데 호의를 베풀어준 신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케이크를 두고온 것을 조의 집에 도착한 후에서야 알게 된다. 그녀는 서운해하지만 곧 조의 식구들과 소녀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만성절을 맞아 점을 치는 놀이를 하게 되고, 어리둥절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리고 곧 도널리 부인의 피아노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를마무리를 짓는다.나는 James Joyce의 Araby에서 충격으로 단편의 마지막 마무리가 그리 쉽지만을 않으리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서도 역시나 답을 주는데 인색한 작가임을 또한번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가 찍은 Clay의 마지막 마침표는 카피라이터의 그 돌멩이처럼 내안으로 던져진 채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Dubliners의 주제가 ‘마비’라는 사실을 이미 강의시간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실마리로 역추적해서 풀어나가 보려는 수차례시도로 나름대로 숨은 그림 찾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우선 마리아는 우리에게 이중적이고 대비적인 모습을 시사하고 있었다. 초반부에서 주변에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안정된 여인으로 그려짐으로서 시작된다. 그리고 일터에서 인정받고 그녀로 인해 ‘다툼을 참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작품 초반부에 평화, 조화적이고 따뜻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흡사 테레라 수녀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이타적이며 또한 그녀의 이름까지 맞물리면서 전체적으로 성스럽기까지한 분위기로 비춰진다.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단락이 지나감에 따라 사실과 대비되는 모습을 빠르게 보이고 있었는데 사랑도 모르고, 결혼 따위 관심도 없다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그녀 스스로가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순수한 소녀가 되길 바라는 듯한 초반부의 묘사와 달리, 사실 작가의 그녀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작은 왜소한 체구를 재차 강조해가고, 긴 코가 날카로운 턱에 찔릴 듯한 노파의 초라한 이미지로써 재차 그려지고 있으며, 또 어느덧 보모로 키운 아이들이 성장하여 새로 아이들을 낳고 가정을 꾸린 것으로 보아, 나이는 이미 상당한 중년에 일으렀음을 알 수 있다. 중년의 늦으막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운 주인공 마리아’는 아직도 남모르게 거울 앞에서 소싯적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으며, 반지, 결혼과 연관된 남들의 농담과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차에서 중요한 케이크를 두고 내릴 정도로 ‘이성’의 호의에 정신이 팔리는 등의 모습으로 보아, 아직도 이성과 사랑에 대한 미련을 초연하지 못하고 미련속에 있는 누군가 한명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약한 중년’ 의 모습으로 대비되고 있는 듯하다. 초연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욕구와 충동을 속으로 억압하고 숨기고 있는 것이다. 초반에 그려졌던 Peace maker의 모습도, 사실 조의 집에서무너지는데, 오히려 힘없는 나약한 존재의 모습으로 대조되어 보이기도 했다. 조의 집에서 그녀가 동생과 화해시키려했을 때 오히려 화만 돋구어 말다툼이 일어날 뻔하고, 그녀의 중재로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라 조가 스스로 특별한 날이니 참는다며겨우 분위기는 누그러드는 것이다. 겉묘사와는 달리 실제로는 그리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아닌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온화하고 신뢰받고 평화롭게 묘사된 마리아의 초반부 모습은 실제 그녀라기 보다는, 마리아 본인이 생각하는, 아니 본인이 믿고 싶어 하는 이상, 스스로의 갇힌 자기애의 모습이 였는지도 모른다. 또 나는 오히려 주변에서 주는 신뢰와 배려들이 사실은 그녀를 향한 ‘동정심’ ‘연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들었고, 그것이 그녀 본인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어떤 무언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이미 마리아는 온화와 편안함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연민과 동정을 받아야할 존재인 것이다.특히 바로 이 ‘연민’ 부분은 만성절 전야 놀이에서 선택한 것이 물컹이는 그 ‘무엇’이였을 때, 뚜렷하게 이르는 것 같았다. 집안사람들 모두가 순간 당황하여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녀는 홀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눈이 가려진 체, 주위와 동떨어져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나이든 여인, 마리아...또 하필이면 그것이 죽음을 상징하고 본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이나 다시 부랴부랴 선택하게 한 것이 기껏해야 ‘신에게 기도’를 상징하는 성서인것에서 측은지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마지막 도넬리 부인의 피아노 연주와 부르는 노래는 그러한 연민의 감정을 최고조로 이르게 해준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을 꿈꾸었네”의 2절을 부르지 못하고 1절을 부르는 그녀는 이제 2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쇄약해져 버린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필이면 1절의 노래가사는 찰나 같은 인생을 보내버리고 끝내 못 이룬, 그러나 아직도 가슴속에 담아둔 소박한 소망을 노래의 그 제목처럼 담은 체, 그녀의 진심에 사무치게 우러나와 등장인물과 우리 모두의 가슴속 깊은 곳을 헤짚어 놓는 것만 같다. 그래서 조의 눈물은 사실, 마리아가 본인 생각처럼 더 이상 ‘평화를 몰고 다니는 여인’이라기 보다 이젠 이미 하염없이 나약해져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그러나 정작 본인이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받쳐 안타까워함을 자아내고, 조의 눈물처럼 작품의 마지막 글에는 마침표가 찍혔는데에도 마음속에는 잔잔함이 너울치고 있었다.
‘영국 문학사조의 흐름’과 ‘Postmodernism’에 대하여.1. 들어가면서한 세기전 쓰여진 Joseph Conrad의 Lord Jim에서 2008년 개봉한 Dark Night의 감동이 재발견되었다. 개인적으로 신선한 충격이였으며, 두 작품간의 세기를 넘어 일치하는 ‘대중을 울린 code와 messege’를 비교분석하고 정리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처음엔 이것이‘과거와 현재의 재미있는 우연한 만남’이라 생각했었던 반면, 조사가 보다 깊어짐에 따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단순한 과거와 현재의 우연한 일치가 아니라, 곧 ‘동시대 한 큰 흐름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며, 그 큰 흐름이란, 바로 우리가 일컫는 ‘문학사조’라는 이름으로 크게 싸인곡선을 그리며 역사속에서 요동치고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영문학도로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영문학 사조에 대해서는 분명 총체적으로 스스로 하나씩 짚고 넘어갈 필요와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에, 영국문학사의 작가와 작품을 시대별로 한번 정리해보면서, 본인이 느꼈던 바로 그‘싸인곡선’를 완성해보는 것을 본 과제의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고, 또 나아가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려는 근본적인 목적의식과 부합하여, 그 시대적 싸인곡선 흐름 속에서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는 어디이며, 무엇인지, 그리고 짧은 기간동안 modernism이라는 단어앞에 'Post'라는 접두사가 붙게 된 사회적, 환경적 요인에 대한 견해를 ‘가치의 충돌’과 ‘초고속인터넷’,‘정보의 쓰나미’와 연관시켜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2. 영국문학사 흐름○ 중세역사 Catholicism-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 기독교문화, 게르만문화의 3대요소가 게르만 민족에 의하여 융합되어 이루어진 중세 유럽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선 그것이 그리스도교 중심의 문화라는 점에 있다.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정식공인되면서 서서히 시작된 유럽의 중세 역사는 거의 1000년에 이르는 강력한 기독교 중심 문화를 이룩한다. ) 중세 사회는 기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사람들은 엄격하고 철저한 종교적 틀 안에서 벗어나, 보다 더 자유롭고, 쾌락적 삶을 향유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과학적 발전이 뒤따라, 천동설은 지동설로 뒤바뀌고, 콜롬부스는 신대륙을 발견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정교하고 과감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로 정보의 유통이 더욱 활기차게 되었다.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 등의 위대한 문인들이 대거 등장해 인간세계의 신비와 위대함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그리며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창조해 냈다.○ 신고전주의 Neo-classism-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에 눈 뜨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탐익했던 인간사회에는 성적 방종과 종교적, 도덕적 타락 등의 부작용이 동반되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또다시 보다 더 종교적이고, 엄숙하고, 정돈된 사회를 지향하는 새로운 문화기류가 형성되는데, 인간의 상상력을 증폭하는 예술 보다는 과거의 고전 속에서 많은 교훈을 얻고 배운다는 측면에서 17세기와 18세기 이르러 신고전주의적 시대가 도래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예술에 나타난 명확. 통일, 이성, 법칙. 절도, 등의 특성을 존중하고 이것들을 예술상의 규범으로 삼았고, 자아의 절대적 자유, 감정과 공상의 존중, 무한성과 혼돈을 강조하는 특성으로 하는 낭만주의와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낭만주의 Romanticism- 그러다 또다시 이러한 답답한 시대가 거의 100여년간 지속되면서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다시 인간의 가능성과 낭만을 노래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합일과 교류를 상상하며, 신화를 꿈꾸는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해, 또 다시 문화 예술의 전성기를 탄생시킨다. 기사도, 모험 및 애정의 이야기들과 관계되어 있었으며 허황한 감정, 비개연성, 과장 및 비현실성과 같은 것, 곧 건전하고 합리적인 인생관과 정반대되는 요소들로 특징지어져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침체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지향을 보이는 등 퇴폐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경향도디로 갑자기 인류 사회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경제적, 정신적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며, 이에 따른 다른 유형의 문화, 예술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때부터 우리가 소위 실험 예술, 또는 전위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새로운 예술적 실험들이 있어왔으며, 전위라고 부를 만큼 기괴한 것은 아니더라도, 많은 예술작품들이 사실주의 예술을 비롯해 그 이전의 예술물들이 담아낼 수 없었던, 추상의 것,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인간의 내면 세계, 심층심리,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어떤 틀, 인간 삶의 수수께끼 같은 신비 등을 드러내고 묘사하기 위해 "the stream of consciousness"를 비롯한 각종 실험적 기법을 동원하거나, 상징, 이미지 등의 적극적 도입을 기하게 된다.- 이렇듯, 서구 역사는, (동양의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변증법적인 정반합의 진화과정을 통해 싸인파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복되는 굴곡의 선을 정리해보니 아래와 같은 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영국 문예사조의 싸인파형 (파동형) 흐름주관주의ClassicimRenaissance(15c-16c)Romanticism(early 19c)Postmodernism(1960 -)- 그리스로마의고전문학- 고전주의적 시뛰어남- 고상함일상어x- 영웅- 획일주의에서 탈피욕구- 인본주의 등장-‘인간’과‘개성의발견’- 인간찬미↑- 인간존엄성↑- 지나친 개인자유방주의- 인간의 가능성 중시- 낭만을 노래- 자연과 합일 지향- 정열, 도덕성, 창조성-정의하기힘듬-현재 진행중Mordenism(early 20c)-사실주의 전면부정-표현주의, 다다이즘, 추상적객관주의- 신앙중심의 사회- 절대 봉건적 체제- 로마교황의 권위- 과학발달 불가능- 개개인 무시- 객관주의- 르네상스 반감- 질서중시, 규제제시- 계몽사상- 신고전주의(객관주의)- 개인=무력- 낭만주의 이상- 비합리- 공동의 현실을 인식 촉구- 있는 그래로의객관적 실재주의 추구- 사회부조리 고발- 개선, 개혁의접두사 'Post'를 가르는 원인을 , 최첨단 기술에 힘입은 지금까지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 개방된 정보 쓰나미와 기존의 세대로부터 학습과 교육을 통해 물려받은 이상들의 충돌, 그 상호작용에서 찾고자 한다.○ Multi-Idea , 현대인의 자아관 혼란우리는 19세기의 유산으로 낭만주의적(romanticist) 자아관을 이어받았다. 그것은 정열, 영혼, 창조성, 도덕성 등으로 대표되는 인간 개인의 깊이를 요구한다. 이런 낭만주의적 자아는 헌신적 사랑, 진실한 우정, 인생의 목표 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그러나 20세기 초에 근대적 세계관이 등장하면서 낭만주의적 취향은 위협을 받게 된다. 근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적 깊이가 아니라 이성(reason) 또는 합리성에 있다. 근대인은 상식적이고(상식적이라 함은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임) 정직하며 성실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제도를 신봉하고, 건전한 가정생활과 도덕교육을 중시하고 합리적인 결혼상대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 상충되는 자아관에서 우리는 시대적으로 뚜렷한 인생의 기준을 제시하기 힘든 상황에 이미 놓여져 있는 것이다.○ Multi-Media1) 초고속 인터넷과 유비쿼터스 기술사회가 다양해지고 그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정보매체의 힘은 거의 절대적이고 독보적인위치에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전자매체라 함은 TV와 인터넷을 들 수가 있는데,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유비쿼터스적으로 변한 ‘초고속 Wireless 인터넷망’이다.이것은 30여년전, 짧게는 10년전인 TV시대와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TV는 같은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에서 정보취득의 불평등를 해소하는 데 기여한 반면, 단일방향으로 흐르는 TV는 정보를 전달하기만 했지 사람들의 의견이나 사건에 대한 반응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근 10년사이 쌍방향통신이 가능한 PC를 이용한 통신이 일반화되고 개개인 모두가 PC를 보유하는 1인 1컴퓨터시대가 도래을 그려왔기 때문일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각자 개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면 그것을 최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에 이으러,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이와 같은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는 것이 꼭 좋은 것일까하는 의문이 바로 이 최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해 겪는 정보 쓰나미현상으로 인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정보혁명으로 인해 우리는 분명 보다 자유로워졌다. 본디 자유스럽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나 신념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대상이 너무나 많다면 이야기를 달라진다. 예를 들어 TV채널이 하나만 있을 때는 재미있건 없건 하루종일 한 방송만 시청하면 되지만 채널이 100개가 넘는다면 어떨까. 여기도 약간 재미있고 저기도 약간 재미있고... 재미있는 프로를 고르기 위해 수십개나 되는 케이블채널을 여러번 돌리는데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그것은 마치 시험기간 공부할 과목이 너무 많은 것과 비슷하다. 시험이 내일인데 서로 연관성이 없는 과목들(예를들면 영어학 개론, 언론과 사회, 중문학 개관 등등)을 한정된 시간에 다 공부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기준이 모호한 상황에서 무자비한 선택의 자유권은 오히려 혼란을 더욱 야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정보도 마찬가지이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쓰나미 속에서 어떤 정보를 접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고, 또 접했다 하더라도 그 정보의 내용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살이 쪄서 고민인데 전문가들의 조언이너무 많다: 무조건 굶어라, 고기는 먹지말고 야채만 먹어라, 생선은 괜챦다, 아니 생선도 등푸른 생선만 괜챦다, 고기를 안먹으면 몸이 허해지니 적당히 먹어라, 뭐든지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 된다, 등등 의견이 끝이 없는 것과 같다.)3) 윤리, 가치관의 홍수이 기준이 모호한 상황에서의 무자비한 선택의 자유에서 오는 혼란은 정보뿐만이 아니라 사실 윤리나 가치관도 역
- 목 차 -1. 서번트 신드롬의 정의· · · · · · · ·p22. 서번트의 원인· · · · · · · ·p43. 출현률· · · · · · · ·p74. 일반적 능력· · · · · · · ·p85 후천전 서번트· · · · · · · ·p106. 경두개 자기 자극법· · · · · · · ·p117. 일반아동 VS 서번트· · · · · · · ·p128. 서번트들의 치료· · · · · · · ·p139. 서번트 증후군의 사례· · · · · · · ·p1410. 서번트를 소재로한 영화· · · · · · · ·p1711. 시사점· · · · · · · ·p1912. 참고문헌· · · · · · · ·p21○ Savant Syndrome의 정의1. 천재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1) 정신질환을 지니고 잇든 온전한 상태이든 높은 지능과 뒤어난 능력을 보이는 광범천재(Extraordinary Minds)2) 정신지체나 발달장애, 자폐증 등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비범한 능력을 보이는바보천재(Idiot Savant)IQ검사에 따라서는 광범천재는 정신질환이 있는 경우에도 상관없이 높은 지능수치를 보이고 있고 바보천재는 평균 이하의 낮은 지능점수를 가지지만 반대로 특정한 분야에 놀라운 천재성을 보이게 된다.2. Savant(Idiot savant)라는 용어는...‘다운 Syndrome’이라는 병명을 최초로 명명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정신과 의사 John Langdon Down 박사가 30년간 얼즈우드 요양원(Earlswood asylum)의 책임자(superintendent)로 일하면서 이 흥미로운 인물들을 관찰하여 1887년 런던 의학 협회에서 소개한 용어로, “전체적인 지능이 낮은데도 상당히 크게 발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재능을 지닌 아이”라는 뜻으로 정신 지체의 한번 인정된 분류 수준을 결합하는 것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당시에는 'idiot'이라는 용어가 현재와는 달리 바보로 격하시키는 따위의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Treffert, 2006)○ Savant Syndrome의 원인1. 명확하지 않은 Savant Syndrome의 원인1) Savant들이 정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시각적 상상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각적으로 빠르게 내용을 스캔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저장하고 회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이론이 모든 자폐증 Savant들을 설명해주지 못하며, 모든 Savant들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어떤 Savant들은 시각장애인이라서 어떤 것도 스캔할 수 없기 때문이다.2) Savant들은 부모로붙 능력을 유전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도 Savant들이 태어나며, Savant들도 정상적인 자녀를 낳을 수 있기에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없다.3) Savant들이 감각박탈과 사회적 철회를 경험했다는 주장이다. 일부 Savant들에게는 맞는 말이지만 이것은 Savant Syndrome의 증상이라기보다는 결과라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또한 많은 Savant들이 정상적인 양육을 받았다는 것도 이론과 상반되는 내용이다.4) Savant들은 추상적인 사고능력이 손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Traffert 박사는 이 관점은 원인의 설명이라기보다는 상태를 그래도 기술한 것뿐이라고 말한다.5) Savant들은 장애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난 기억력과 같은 보상 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Traffert 박사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6) Savant들은 기질적인 뇌 손상의 희생자들로, 한 쪽 반구로 기능이 편재되어 좌우 뇌 기능이 극히 불균형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많은 Savant들이 EEG와 CAT스캔 결과가 정상이었고, 기질적인 뇌 손상도 없다고 한다(배도희,2006).7) 가장 오래된 설은 Savant들이 원래 천재로 태어날 운명이었지만 태어나기 전이나 출산 중에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의 모든 재능이 파괴되거나 돌이킬 수 가 도전할 만한 연구영역임이 분명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Savant Syndrome의 출현률Savant Syndrome은 자폐증환자 열 명 중 약 한 명꼴, 뇌손상이나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 2천 명 중 대략 한 명 꼴로 나타난다. 알려진 Savant들 중 적어도 반은 자폐증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Rosemarie, 2002). 하지만 정신장애가 발생할 확률이 자폐증 발생률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자폐증 환자라 약 50%를 차지하고, 나머지 50%는 정신지체나 뇌질환 같은 다른 발달장애 환자가 차지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Savant가 모든 자폐증 환자는 아니며, 또한 모든 자폐증 환자가 Savant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성비에서의 출현률을 보면 남성에서 자주 일어난다. 천재 현상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여자 아동들보다 남자 아동들에게서 더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Goldsmith, 1987). 여기에는 최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천재가 발견되는 집단은 여성보다 남성들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고 (EX. 체스). 거기에는 여자 아동들이 음악이나 수학 같은 분야에 참여하고 인정받는 것에 반대하는 편견의 오랜 역사가 존재해왔다. 또한 여아들의 참여가 허락되면, 아마추어에 속하게 되거나 비전문가 단체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요구했다. 특히 천재 여자 아동에 대해 발행된 논문에서 이러한 사례들이 실려 있다. Savant 증상 또한 대략적인 비율로 남성대 여성이 6:1이다(Traffert, 1988).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자폐성 질병을 앓는 환자의 10%가 Savant Syndrome 환자이며, 자폐증이 발병되는 확률 역시 남성이 여성보다 4~6배 높기 때문이다. Galaburda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태아의 발전 과정에서 좌뇌반구가 우뇌반구보다 나중에 발전하는 것이 이유라고 설명했다. 좌뇌반구가 우뇌반구보다 손사이나 상해에 더 오랜 기간 동안 노출되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 또한 복잡한 기계를 조립하거나 수리하는 기계적인 능력, 난해한 지도나 길을 외우는 능력 등이 드물게 나타나기도 한다.그들의 능력은 단순히 특정한 해의 어떤 날짜의 요일을 맞추는 것 이상이다. 이런 능력에는 예를 들면, 앞으로 100년 이내에 부활절이 3월 23일이 되는 해가 언제인지 혹은 20년 이내에 7월 4일인 해가 언제인지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된다. 여러 보고서에서 날짜 계산 능력을 가진 쌍둥이라고 언급된 조지와 찰스의 경우, 4만년을 앞뒤로 오가며 날짜를 계산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성인이 될 때까지의 모든 날의 기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컨대 내가 열여섯 살이던 해의 7월 4일 날씨는 어떠했다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수학 및 계산 재능의 Savant들로는 앞서 설명한 벤자민 러쉬박사가 1789년에 보고한 수학 Savant 킴픽, 토마스 풀러, 제네디아 벅스톤 등이 있다.이 외에도 다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거나 시각이나 촉각이 특별히 예민한 경우도 있다. 또한 시계를 보지 않고 정확하게 시간을 말할 수 있다든지 통계학, 역사학, 항공학 같은 특정 영역에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일반적으로 Savant Syndrome 환자는 이런 능력 중 하나만을 지니지만 몇 가지 사례에서 연구된 바로는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재능을 고루 지닌 경우도 있다. Savant 능력은 종류와 관계없이 항상 비범한 기억력과 함께 나타나는데, 기억력이 매우 제한적인 분야에 국한한다는 특징이 있다.(이양희,2006)○ 후천적 SavantSavant Syndrome은 선천적이거나 출산 시에 형성되거나, 또는 이후의 유년기에 충주신경계의 입은 질병으로 발생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청소년기 이후에 나타나는 후천적 형태의 Savant Syndrome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잠재된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1980년, T.L. Brink 박사는 좌뇌반구에 총상을 입는 바람에 언어장애, 청각장애, 전신마비 상태까지 동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 그의 그림 재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말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다. 나디아는 일곱 살 때 특수학교 입학 후 많은 노력 끝에 언어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자폐아 학교에서 말하는 법과 숫자 세는 법을 배웠지만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바로 능력의 이동이라는 것인데 언어능력을 회복한 나디아는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고 그린다 하더라도 예전의 그림 실력은 완전 상실돼 있었다. 나디아의 미술능력이 뇌의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하더라도 다시는 그 능력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 나디아의 사례는 Savant Syndrome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많은 과학자들은 그림실력이 사라진 나디아의 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접근이 가능한가에 ‘뇌의 손상’을 거론한다. 나디아의 뇌 검사 결과와 두개골 모양으로 보아 측두부에 위치한 언어 담당 영역에 손상이 일어나 있었고 왼존잡이이기에 우뇌반구가 우세했으며 이에 미술적 능력이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허나 뇌 손상은 언어습득의 방해로 이어졌고 특수학교에서 노력 끝에 얻은 언어능력의 회복은 우뇌영역의 미술적 재능의 명백한 교환이었다. 하지만 다른 Savant의 대다수 경우에도 뇌 손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러한 식의 능력 교환은 일어나지 않았다.오늘날 Savant들에 대한 치료 방안은 결론지어졌다. 장애를 치료하는 데 초점을 맞추느냐, 아니면 재능을 더욱 키우는 쪽이냐에서 결론은 후자이다. 재능을 꽃피우는 것이 장애를 보완하는 지름길임이 지난 오랜 기간의 연구 결과 결론지어졌기 때문이다. 불치의 장애와 신이 내린 재능을 동시에 갖고 있는 Savant들이 보여주는 절대적 믿음과 사랑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뇌가 가진 창조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Savant Syndrome의 사례Savant Sy다.
Joseph Conrad 와 Lord Jim1. 예술로서의 문학과 정의나는 예술을 사랑한다. 아니, 감히 예술에 몸담고 있는 이들도 함부로 담지 못하는 무거운 표현이 예술에 문외한인 대학생 입에 오른다는 점에서 이글을 읽는 이들에게서 일 수 있는 반감을 우려한다면, 적어도 ‘그것이 무언가 나를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고 다시 말할 수 있다.나는 문학이란, 인간만을 위한 고유의 선물이며, 이는 그 성격이 그러한 만큼 예술의 범주에서부터 재고찰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예술과 그 범주속 문학이란, 어떤 매개체와 같다. 보내는이 Sender가 세상을 통해, 또는 내적 탐구를 통해 받은 어떤 보이지 않은, 그리고 결코 가볍지 않은 영감을 하나의 ‘마법상자’에 담아내 다른 이들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법상자’를 열어봄과 동시에, Sender가 메세지를 담는 바로 그 찰나의 느낌, 보이진 않지만 분명 마음에서 부터의 일어나는 무언의 진동, 바로 감동, 그것을 느낀다. 여기서, 감동을 담아내는 Sender가 상자에 얼마나 투명하게 잘 담아내는지, 동시에 상자를 열어보는 이가 느낀 진동과 감동이 Sender가 담으려 했던 그것과 얼마나 씽크로 되는지. 얼마나 clear 하게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훌륭한 예술인이다, 그렇지 않다’를 가늠하는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그 감동을 담는 ‘마법상자’가 선과 면, 색감으로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은 ‘미술’이라 부르고, 규칙적, 불규칙적인 공기진동의 역학적 에너지와 그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을 ‘음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마법상자가 우리가 사용하는 ‘text’적인 형태를 띤 ‘언어’로서 이루어 졌을 때, 그것은 바로 ‘문학’으로 일컬어진다. 이것이 내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문학’의 개인적이고 근본삼는 개념이다.그러한 연유로, 문학은 바로 Review를 20세기초 간판 문학인 Lord Jim과 비교하고 재조명해보면서 두 번째 Report를 흥미진진한 ‘살아있는 문학활동’하게된 계기가 된 뜻깊은 경험을 하게 되었음을 밝히고자 함이다.)2. 작품 Lord Jim에 대한 분석과 고찰,1) 빈번한 시간의 전도Lord Jim에 대해 논할 때 빠지지 않은, 요소들중 하나가 바로 ‘시간의 전도법’이다. 예를 들면 파트나 호가 침몰을 모면했다는 사실을 짐이 심판정에 섰다는 사실보다 뒤에 밝힌다든지, 브라이얼리 선장의 자살을 짐이 배에서 뛰어내린 상세한 경위보다 앞세운다든지 함으로써 콘래드는 이 소설을 처음 읽는 사람들을 상당히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바로 이 기법이 Lord Jim을 20세기 소설문학의 기념비로 만든 요소중 하나로 작용한다.이 새로운 기법에 대해 출판사 yes24에서의 비평을 인용해보면, ‘콘래드가 짐의 행위가 지닌 심층적의미를 캐기위해 짐이라는 현대적 주인공의 종잡기 어려운 정체를 파악하고 그의 행동이 지닌 도덕적 함의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시간전도의 기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성공적이였다. 그리고 콘레드를 역사 밖로 이끌어 내었다’고 거창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Lord Jim의 당시 새로운 문학적 장치에 대해 예찬하는 것에 대한 필자 본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20세기 현대소설의 기념비라 불리우는 Lord Jim을 읽고나서, 여러 생각을 공유해 보기 위해 한 포털사이트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몇몇 블로그 운영자들과 온라인 상에서 짧은 만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초점을 어떻게 잡고 글을 써내려갈까 고민해보려 자리에 참여했었지만 그곳에서 흘러들은 ‘인간의 다분적인 모습을 시간을 뛰어넘어 표현했다’라던지, ‘시간의 연개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뜯어붙혔다’는 둥의 수많은 100년이나 넘게 계속 되어오고 있는 작품은 20세기 기념비로서 만들어주고 있는 ‘Great Comment!’들은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100여년 전에 써진 리뷰들이한 장치가 도래하기 시작하였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21세기, 지금에 와서도 그런 일말의 장치를 가지고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라고 묻는다면, ‘뭐하는 사람이지? 문화적 혜택을 전혀 못 받고 살고 있는 사람인가?’라는 의문만 생겨날 뿐이다. 순수한 감동이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영화, 문화 컨텐츠들을 통해 이와같은 혹은 이보다 더한 획기적인 전개방식을 봐오지 않았는가.(한때 흥행코드라 불리던 ‘반전’은 모두 인간의 보이지 않는 다면적인 모습에서 나오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에서는 사건진행방향이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완전한 역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정리하자면 로드짐을 읽고나서 앞서 말한 답답한 감상평이 나왔다면, 현대 쏟아지는 문화콘텐츠, 수많은 유비쿼터tm 매체와는 단절된 채 살아가는 수도인이 거나, 글쓴이의 책 읽는 내내 진도도 안나가고 답답함에 허우적대며 낑낑대는 모습만 상상될 뿐이다.오늘날 우리가 현대소설을 개관해 볼 때 더 이상 관점과 시간 순서의 다양한 변동이라는 기법은 이제 별로 낯설지 않다. 작품을 읽고 정리해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Lord Jim을 접하고 평할 때, 이러한 수식어와 감탄사가 나와서는 안되지 않나’하는 나지막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2) 다분한 관점의 변동콘래드는 시간의 전도법뿐만 아니라, 전지적 작가와 짐의 친구 말로, 그리고 말로가 쓴 기록을 읽은 작가 등 다양한 시점을 사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모두 45개장으로 나눠져 있는 이 소설에서 처음 4개의 장은 전지적임이 분명한 작가 콘래드에 의해 서술되고 있으므로 지금까지 보아온 3인칭소설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 다음 31개의 장은 짐을 직접 만나 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짐의 행적을 목격하기도 했던 이야기꾼 말로의 입을 통해 서술되며 작가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거의 모두 대화체 혹은 인용문 속에 담겨있고, 마지막 10개장은 있다고 생각된다.(이야기꾼 말로는 독자들에게 이 같은 ‘고뇌거리’를 던져주는데 그칠뿐 Jim의 모습에서 도덕적인 판단을 명쾌하게 서술하거나 평가하지 않음으로써, 답을 제시하고 유도하는 기존의 작가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3) 모호한 표현기법 - 인간의 본연의 모습, 그 모호성에 대해이 문학의 세기가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시간의 전도법’혹은 ‘관찰자 시점의 변동’등 테크닉적인 장치에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다 느꼈을 정리하기 어려운 긴 호흡의 표현들의 ‘모호함’ 그 자체에 있으며 그것이 이 글의 본 매력과 짚고 넘어가야할 숨은 참된 맥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에세이’. 누군가의 작품을 접하고 작가에게서 받은 영감을 되쏟아내는, 앞서 말한 그런 것의 묘미는 어쩌면 어떤 틀이나 형식에 구속받지 않은 채 써내려가는 내 마음에 솔직한 흔적이라는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 글속에 담긴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무형식’이라는 형식만으로 뿜어나오는 서투른 향기랄까. 그 본질의 향말이다.대게 글을 읽다보면, 고등학교때 보았던 수학정석 해설집을, 혹은 최근 선거관련 대질논의에서 서울시 예산안 집행에 관한 야당후보 발언관련 기사를 읽는 듯한 간결한 문장구조의 인과적이고 체계적인 기사 글을 읽어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경우가 있는 반면, 구구절절이 길다 긴 호흡의 묘사가 줄줄이 이어져, 다소 정리되지 않은 듯 한 글을 읽었을 때, 마주앉아 있는 친구에게 정확히 뭐라 딱히 꼬집어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해주기는 어렵지만, 이 글쓴이의 생각이 무엇인지, 이 글쓴이가 이 글을 하얀종이 위에 써내려갈 때 의도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정리하기 어려운 ‘느낌’으로 와닿을 때가 종종 있다.어떤 때는 이런 문장체의 글을 접할 때 우리는 영화필름이 순간 느리게 돌아가며 시각적인 장면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듯, 사건시간의 흐름이 늦춰지면서 묘사되는 시간이 더뎌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몽환적명한 대화내용이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는 그렇다면 무어란 말인가.정립하기 어려운 모호한 소설 속 주인공내면의 모습과, 그것을 본인이나 그를 탄생시킨 조물주, 작가가 아닌 제 3자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는 감각적이고 긴 호흡의 모호한 표현, 그리고 그것을 다시, 담아넣고 있는 정리 되지 않은 듯한 시공간을 뛰어넘는 빠른 배경전환... 현대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원화 될수록 인간내면의 모습은 더욱 복잡, 부각되기 시작함에 따라, 이러한 새로운 양상의 내면을 가진 인간을 작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콘래드는 흔히들 쓰여온 작중인물을 제시할 때 성격을 확정지은 후, 이를 공들여 묘사하고 그 인물이 일련의 사건과 상황에 처해 드러내는 형태를 통해 성격을 구현 되게하는, 종래의 기법으로는 한계가 있었음을 느꼈을 것이고 새로운 장치를 모색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그가 도입한 어떤 새로운, 저수지 위를 굴러다니는 아침 해가 뜨기 직전에 물안개와 같은 이 책에서의 어려운 묘사법은 해석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현대인 짐의 모호한 내면을 그려내기에는, 모호한 그 표현처럼 어떻게 코드가 절묘하게 맞았다고나 할까...이것이 바로 Lord Jim을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예술로 불리게 만들어주는 참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작품내에서 일어난 복잡한 인물대립양상과, 세세한 사건하나, 문장하나를 전부 이해할 수 없었더라도 읽고 난 후, 그 아리송한 느낌을 독자가, 바로 내가 받았다면 이미 그 형식만으로도 짐을 잘 이해한 것이 아닐까. 그 알듯말듯한 다소 답답한 혼란스러운 모호함! 그것이 본디 사람내면의 모습, 설명할 수 없는, 정의하기 부단히 어려운, 그 모호한 혼돈자체가 세상의 참 모습이며, 그것이 곧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 ‘감동’인 것이다.3. 참조하면서 - Joseph Conrad낭만적인 생애에다가 그에게 제2외국어인 영어로 글을 써서 영국소설의 대가가 되었다는 이색적인 후광이 따르고 있는 Joseph Conra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