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빈처」를 읽고신권에 그려 넣을 여성 위인을 결정할 때였다. 난 신사임당보다 유관순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국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신권을 장식하게 되었다. 실망이 컸다. 신사임당은 정적인 현모양처이다. 조선시대 안에서는 완벽한 역할 모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가 한정하여 정한 것이며, 지금 존경받아야 할 여성상은 신사임당이 아니다. 훨씬 동적이고, 사회가 정한 틀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 수많은 여성들은 아직까지 체제 안에서 고통받고 있다. 은희경의「빈처」에 나오는 ‘아내’ 또한 그렇다.은희경의 「빈처」를 보기 전에 현진건의 「빈처」를 본적이 있다. 현진건의 「빈처」에 등장하는 ‘아내’는 가난한 작가인 남편 대신 끼니를 잇기 위해 옷가지 등을 전당포에 맡긴다. 가난에 힘들어 하면서도, 언제가 성공할 남편을 믿고, 떠받들고, 위로하며 산다. 그녀는 남자들이, 이 사회가 바라는 헌신적인 아내상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런 ‘아내’를 동정하고, 그 희생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선에서 그치게 된다. 반면, 은희경의 「빈처」는 아내들의 희생을 그저 납득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과연 아내와 남편의 바람직한 관계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은 아이들을 생산하고, 돌보고, 남편 뒷수발이나 해주고, 집을 지키는 것이 아내의 역할이라는 일반적인 사회의 통년에 대해 비판을 던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남편을 주인공으로 한 1인칭 시점인데도, 아내의 일기라는 소재를 통해 아내의 내면세계까지 엿볼 수 있으며, 오히려 화자에 대한 거리감을 생기게 한다. 발단은 남편이 아내의 일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부터이다. 남편은 아내가 일기를 쓴다는 것을 몰랐다. 또 아내에게는 뭔가를 쓴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무관심과 소홀한 태도, 무시하는 성향을 볼 수 있다. 또 남편은 아내에게 글재주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글에 나타난 아내의 일기장에 써진 글이 재주가 없는 문장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진솔하고, 충분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한계를 긋는 남편의 편협한 사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연히 가계부이겠거니 생각한다는 것은 아내를 ‘여성’이라는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인식하는 게 아닌, 그저 살림하며 가계부나 쓰는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으로 보인다.아내의 일기에서 남편은 ‘애인’이라. 지속적인 만남이 이뤄지지 않고, 일회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쓸쓸함을 스스로 위로하려는 듯한 느낌이 안쓰럽다. 남편은 그저 ‘바깥양반’이다. 사회생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매일 술자리에 나가고, 외박하는, 가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인생에 결정적으로 심각한 그늘을 드리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안사람’인 아내는 ‘바깥양반’이 밖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은 “난 당신을 포기했어.”라고 말하게 된다. 그녀가 스스로 그렇게 선언하기까지 얼마나 외로워하고 속을 태웠을지 생각하니 안타깝다. 그것을 남편이 몰라준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고 화가 난다.아내는 아이들이 아빠를 찾을 때, “아빠는 함께 계시지 못한다.”라고 하면 불행한 느낌을 줄까봐 조바심을 낸다. 아이들 못지않게 아내의 쓸쓸함과 고충은 한 없이 클 것이다. 아내 자신이 남편과 함께 있지 못한 것을 불행하다가 생각하기에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남편의 부재는 아내에게 충분히 상처가 되고, ‘인생의 심각한 그늘’이 될 수 있는 것이다.아내의 일기를 본 후, 남편은 아내 손에 들린 무거워 보이는 봉지를, 익숙하지 않은 동작임을 깨달으며 엉거주춤 받아든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웃기고 흐믓하다. 아내의 일기가 남편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에 저절로 은근한 미소가 떠오른다.식사 중에 친구들 얘기가 나오면서, 연애할 때는 아내를 데리고 다녔는데, 결혼 후에는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는 남편의 속마음이 나온다. 남편은 죄책감과 불편한 마음에 자기 변명을 한다. 그런 이기적인 생각에 화가 난다. 그러나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긍도 한다. 남편이 의도한 따돌림이 아니기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비단 여성만의 얘기는 아니겠지만, 특히나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이란 인생의 분기점이다. 사회는 여성의 결혼을 기준점으로 삼아 차별한다. 남성에 비해 결혼한 여성에게는 제약이 많이 따르는 편이다. 직장도, 모임도 그렇다. 가정도 사회의 한 단위이기에 발맞추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여성은 ‘기혼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찬밥 신세가 된다.친구들끼리의 담화 부분에서, ‘친구’도 사회를 맛보기 전, 옛 추억을 쓸어볼 때의 ‘친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각자의 사는 얘기로 들어서면 은근한 과시와 견제, 경쟁과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부친에게 상속받은 부동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 요령만 늘고 거들먹거리는 사람, 벌써 세 번째 아파트를 사고, 돈을 굴리는 재미를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 공부도 노력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으며 성실하게 일해 번 돈의 몇 배를, 앉아서, 돈으로 돈을 불러들인다. 자본주의의 있는 자만 굴릴 수 있게 만다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다.다음 화제에서는 직장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도피를 꿈꾸는 가장들의 현실이 나온다. 전반적으로 아내의 고충에 대해 동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가 이쯤 되면 남편들의 세계도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촌지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아이의 얘기에 분노했다. 몇몇 자격 없는 사람들 때문에 더렵혀진 교권이 안타깝다. 촌지교사에게 당한 가족은 한국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결국 이민을 간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는 “그 정도 힘도 안들이고 어떻게 살겠느냐, 이민 간 곳에서는 주인행세 할 것 같냐.”며 힘들어도 자국에서 사는 게 낫다고 한다. 남편은 그러한 아내의, 일반적인 ‘마누라’들의 무턱대고 부러워하는 반응과는 다른, 신랄함과 주관을 보고 놀란다. 남편은 아내를 집안이레 소질이 있을 뿐인 ‘아줌마’로 치부해왔던 것이다. 결혼 전 시국을 논하며 울분을 토했던 ‘그녀 자신’으로 봐주지 않았다. 그녀와 길게 얘기해 본 적도 없음을 깨닫는 남편을 보고, 부부간에 그렇게 무관심하고 소홀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랐다.남편은 아내가 연애를 하고 싶다고 써 놓은 구절을 보여 잠시 놀라다가도, 곧 새 남자와 연애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다. 아내를 무시하는 태도이다. 아내는 그저 남편과 시간을 함께하고 싶을 뿐인데, 남편은 ‘그냥 좀 바쁠 뿐인’ 사회생활로 어설픈 자기변명을 한다.아내의 일기를 보면, 혼자 이삿짐을 풀다 허리를 다쳤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도 남편이 피곤하다며 일찍 들어오겠다고 하자, 아이들이 보채고, 말썽 피우고, 기름에 팔목을 데이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한다. 그러나 그 때 걸려온 남편의 늦는다는 전화 한통. ‘대체 몇 시간 동안 무슨 짓을 한 건가’ 허탈해하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남편이 괘씸했다. 돌아온 남편은 아내에게 미련스럽게 혼자 이삿짐을 옮기다 다쳤냐며 상처에 기름을 붓는다. 나라면 남편을 정말 미워했을 텐데, 아내는 남편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추스르고, 애써 익숙해지려고 노력한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을 이루나 당연한 것처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더라.’는 아내의 말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상이라. 정말 그렇다면 결혼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자는 왜 결혼을 하면서 사랑을 잃고, ‘여자’를 잃고, 자아로서의 정체성을 버려야 하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남편은 자신의 이른 귀가가 벼슬인 양 적선하듯 거만하게 군다. 아내는 남편과 같이 조금이랑 더 함께하고 싶어서 설거지를 서둘러 빨리 끝내려 하지만, 남편은 친구 전화를 받고 나가버린다. 포기했다고는 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이 애처로웠다. 아내는 아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못 찾고, 혼자서 병 소주 나발 불며 돌아온다. 고독과 이로움에 괴로워하는 외로운 여자의 지친 뒷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술도 못 마시는 그녀에게 술을 마시게 한 원인은 남편에게 있다. 남편의 소홀함과 무관심 때문이다. 남편이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며, 사회가 술을 권하기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겠지만, 이 상황에서는 남편의 애정도와 성격, 태도에 가장 큰 문제가 있고, 그 책임을 전가시켜서는 안 된다.아내는 자신의 것은 돌보지 않는 다. 가족들의 시중들이게 바쁘다. 욕실에서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자아 정체성을 지닌 독립된 한사람의 ‘여자’임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 곧 욕조를 닦아야 하는 ‘아줌마’가 되어버린다. 외판원의 상술을 꿰뚫어 볼 줄 아는 꽤 똑똑한 여성인데, 여성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어머니’이자, ‘아내’로서만 살아가고 있다.다음 날 남편이 간 술자리의 화제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의 인기 하락’에 대한 것이었다. 한강을 보며 주부들이 투신 충동을 느낀다는 것이다. 남편들은 이를 팔자 좋은 투정으로 안다. 일하느라 한가하게 인생을 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들의 불평은 아내와의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입장 차에 의한 남편과 아내의 깊은 골은 대화와 함께하는 시간 없이는 절대 해결 할 수 없다. 갈등이 생겨도, 아내는 참다 참다 말한 대화의 시도가 남편이 사회생활을 들먹이면 바로 단절되고 발언권을 뺐겨 침묵하게 된다.
2010-2, 중간고사 문제Ⅰ. 다음 용어에 대해 간략히 답하시오.1. 아이러니간단히 말하면 반어(反語), 비꼬는 말로, 문장에서 표면의 뜻과 반대로 표현되는 용법이나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진의(眞意)와 반대되는 표현을 말하며, 쉬운 예로, 한심한 자식에게 부모님이 “참 잘~한다!”라고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 또한 아이러니의 표현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아이러니는 그 표현 안에 날카로운 지적을 포함하고 있으며, 표현과 의미의 차이에서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특성을 지니는 풍자적인 성격을 띤다.또한 인물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일어나는데, 이는 독자나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보면 뜻하지 않은 의미가 모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비극적 아이러니’ 라고도 별칭하며, 비극적 인물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아이러니의 문학작품에서의 예를 들자면,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서 김첨지나, 김동인 「감자」의 복녀, 채만식의 「태평천하」의 윤직원 등이 있다.2. 객관상관물형식주의 비평의 선구자 T.S.앨리엇이 주창한 개념이다. 시인의 정서와 감정은 그대로는 온전히 도달할 수 없고 변형되어 나타나므로 독자에게는 온전한 전달이 안 되기 때문에, 시인은 그 수단으로 자신의 정서와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객관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을 통해야 한다. 독자는 객관상관물을 통해 시인의 정서와 등가의 정서를 경험할 수 있다.객관상관물은 작품 내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외관상 객관적으로 보이는 사물이 화자의 심정에 영향을 미칠 때 사용되어, 작가가 경험하고 의도한 정서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이시킨다.우리 문학사에서는 객관상관물을 잘 구사한 대표격으로 정지용 시인을 꼽을 수 있다. 정지용은 순수시를 지향하며 언어의 정제성을 높였는데, 감각적인 이미지를 잘 구사하여 대상에 대한 자아의 느낌을 살려냈다. 객관상관물의 예는 「바다2」에서 바다에 도마뱀을 비유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ex) 바다는 뿔뿔이 달아날려고 했다. /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3. 고현학고현학은 쉽게 생각해서 ‘현대를 고찰하는 학문’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사전적인 정의로는, 현대의 풍속이나 세태를 계통적으로 조사·연구하여 현대의 진상을 구명함으로써 장래의 발전에 바탕이 되게 하려는 학문을 나타낸다.고고학이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학 범주에 속한다면, 고현학은 현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 범주에 속하므로 '풍속세태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무리 문학사에서는 박태원의 문체와 표현기교에서 보여준 과감한 실험에서 고현학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그는 문장 그 자체의 예술성을 중시했고,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기 위해 몽타주 같은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노트 한 권에 그날의 일기를 기록하듯 써내려가는 고현학적 방법을 실험하여, 초기 모더니즘 소설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Ⅱ. 의 줄거리- 핵심정보 단위 중심으로 정리.①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은 김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선형에게 차츰 연정을 품게 된다.② 갑자기 찾아온 옛 은사의 딸인 영채가 찾아와 재회하고, 은사 박진사가 억울하게 옥사했고, 영채가 부친을 구하려 기생이 되었다는 그간의 일을 듣는다.③ 영채가 갑자기 돌아가고, 형식은 영채의 순결을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론 그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한다.④ 형식은 학감 배명식에게 불만을 품고 찾아온 학생들을 달래 돌려보내고, 학감에게 중재하다 도리어 미움을 산다.⑤ 형식과 친구 우선은 배명식과 김현수에게 농락당하는 영채를 구해내지만, 영채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져서, 형식이 뒤를 쫓지만 곧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아온다.⑥ 배학감은 형식이 기생(영채)을 쫓아 떠났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학생들도 이를 놀리자 사직하고 김장로의 중개로 선형과 약혼하여 미국유학을 가게 된다.⑦ 영채는 자살하러 가다가 음악을 전공한 신여성 병욱을 만나 깨우치고 살기로 결심하여 병욱을 따라가 함께 유학을 가기로 한다.⑧ 형식, 선형, 영채, 병욱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잠시 애정의 갈등을 겪지만, 수해가 나 지연된 삼랑진 기차역에서 수재민들을 위해 모금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면서 그 갈등이 스러짐을 느낀다.⑨ 그들은 수해현장을 조선이라 받아들이고, 조선 민중을 계몽할 저마다의 각오를 지고 미래를 설계한다.⑩ 각자가 자신의 공부를 이루고, 유학생들의 귀국으로 계몽을 이룰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이 제시되며 마무리된다.Ⅲ. 다음을 설명하시오.1. 한문문학과 지역문학이 근대에 들어와 쇠퇴하게 된 원인20세기로 들어서며, 소중화의 유아적 나르씨시즘이 사회진화론으로 무장한 문명의 침범에 무너져 내렸고, 계몽주의자들은 문명을 수용하기 위해 번역을 시도했다. 효과적인 번역을 위해서는 국문과 문법을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국어는 근대적 국민을 견인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로써 발견되었다. 『독립신문』,『매일신문』,『황성신문』등의 매체가 국문론에 관심을 기울이며 국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계몽적 지식인들은 조선의 부강을 방해하는 것이 한문이라고 주장하며 배우는데 시간을 낭비하는 한문 대신 간편한 국문을 배워 실상 학문과 사업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 속에는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한문은 기득권층의 언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기득권이 힘들게 익혀온 권위주적 문자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임을 내세우며 국문을 사용한 인민의 학문을 높이자는 주장을 펼쳤다.또, 사전을 편찬하는 것 또한 우선시된 작업인데, 이는 근대국민국가의 ‘국어’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전국의 방언을 수집, 분류하고, 특정 지역의 말을 인위적으로 표준어로 만들어 근대국민국가가 요구하는 ‘균질적인 국민’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항목이었으며, 이를 통해 문법적 속박을 가하고 통일된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국민’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문문학과 지방언어로 된 지방문학은 설자리가 좁아졌고, 국문 수도권 언어의 문학이 주류에 자리 잡게 되었다.2. 국문문체 혁신의 역사적 필연성띄어쓰기를 한 국문체는 『독립신문』이 강조해왔으나 한문의 중력도 만만치 않아서 기존 한문에 토만 다는 ‘한문현토체’와 한문식 표현을 국문어법에 맞게 재배열하는 정확한 의미의 ‘국한문혼용체’가 대결했고, 이러한 혼란은 국민에게 지식을 보급하는 데 걸림돌이 되엇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문현토체는 국한문혼용체와의 경쟁에서 물러나며 교과서나 저널리즘 등 공적인 담론 영역에서 힘을 잃고, 국문체와 국한문체의 대결로 좁혀져, 학생용 독본과 신소설 등은 국문체가 담당하고, 국한문본 신문과 학회지 전기 등은 국한문체를 사용하며 경쟁하고 있었다.표기법과 국문체의 확립, 사전 편찬, 문법제정 등은 국가적 차원의 강제가 필수이나, 대한제국은 그럴만한 실질적인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문체상의 혼란이 일었고, 결국 1905년 통감부 설치로 일본 교육시스템이 이입되어 국한문체가 국문체보다 우위에 섰다.계몽기 지식인들은 번역과 번안, 창작을 통해 문체의 근대적 혁신을 모색했으며, 최남선은 『소년』에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번역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모범으로 설정하려 했고, 근대 단편소설의 문체와 크게 다르지 않는 대사와 지문의 분리와 행갈이, 부호 사용, 현재시제 사용 등으로 문체 혁신을 일으켰다. 이광수는 새로운 문학개념과 근대적 문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체가 필수임을 인식하고 직접 실험했다.번역은 한국 근대소설 문체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소년』은 순문학 작품들을 번역하며 근대적 소설문체와 문학에 어울리는 문체를 발견했고, 그것이 향후 한국 근대소설문체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3. 근대적 문학제도의 양상현대문학은 사회?역사?문학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실증적 근대문화제도-매체?출판?등단제도?사회운동과의 관계-의 일부라는 상호의존적인 측면과, 문학의 독자성을 가정하는 근대문학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학 자율성의 두 제도 개념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며 얽혀있다. 이 두 차원은 구분된다기보다 문학의 사회적 존재 상태 자체가 복합적 층위에 걸쳐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실증적인 문화제도라는 차원과 문학의 자율적 가치를 정립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학제도는 1920년대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제도로서의 문학은 다양한 정치사회적 운동과 조직 등 다양한 차원이 결합되어 있어, 구체적으로 매체의 문제와, 수용과 관련한 독자의 문제, 사회운동의 다양한 차원이 개입된다. 근대 매체는 지식체계를 근대적으로 전환시켜, 익명의 대중 전체에게 개방했고, 공동체의 구성원을 언어공동체의 평등한 성원으로 만들었다. 근대문학은 이런 근대 지식체계를 기반으로 향유될 수 있었다.근대적 문학제도의 성립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시기는 단연 1920년대이다. 초반은 3.1운동의 실패로 좌절감과 허무주의, 문예사조의 혼류 등의 특성을 띠었지만, 문화통치로 언론, 출판의 문화 영역이 한꺼번에 열려 비록 검열을 통했지만 지식과 정보가 언론매체를 통해 확장된 문화공간에서 지식과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시기에 자연주의, 상징주의, 유미주의 등 문예사조의 혼류와 창조파와 폐허파의 난립이라고 회고되는 이유도, 다양한 문화담론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문학교육의 관점과 이상적인 문학교사상-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가자-우연히 어떤 그림과 눈이 마주쳤다. 그림 속 인물의 깊은 눈이 나의 생각을 묻는 듯한 그림이었다. 색채도 아름다웠지만, 인간의 삶과 존재의 방향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과 통찰이 담긴 것 같은, 어딘가 쓸쓸한 듯한 그 그림의 구성이 나의 눈을 머무르게 했다. 그것은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그림이었다.문학교육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이 그림을 떠올렸다. 우리는 왜 문학을 갈구하는가. 왜 그것을 교육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어디서 왔고,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인지의 고갱이 한 그 물음만큼, 확실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단순히 생각하면, 문학을 교육하는 것은 문학에 대해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뭔가. ‘문학’에 대한 고찰은 고갱의 질문 그 자체, 혹은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다.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고갱은 그림을 통해 고민했고, 우리는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 내부에 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문학을 하고, 문학을 향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묻고 확인하고 싶어 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생을 말하고, 인간 존재의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결코 풀릴 것 같지 않는 질문에 나름대로 열심히 답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번민한다. 문학은 삶의 반영이다. 문학을 배우는 것은 삶을 배우는 것과 같다. 기본적으로 문학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바라보고 있고, 자신이 누구인지, 또 앞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언어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결국 문학이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며 인류를 비추는 녹슨 거울이다.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일단 학생들에게 이러한 고민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짧은 소견과 부족한 소양으로는 아직 추상적이고 허황된 것 같은 소리밖에 못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떠돌던 생각들을 언어로 정착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에 늘여놓아 본다.단순히 ‘이 작품의 장르는 뭐고, 주제는 무엇이며, 핵심 단어, 문장은 이것이고, 중요한 부분은 저것이다’라는 둥의 개념적 지식만을 주입하며 손가락질 해주는 것은 달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닌, 손가락 끝을 보게 하는 방법이다. 궁극적으로는 달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왜 나타내고 있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문학을 통하여 삶의 진실한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있게 만드는 실마리를 찾게 한다면 더 이상의 어떤 뛰어난 문학교사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문학에서 인생의 답을 찾고 배우려한다. 그러나 그 작품을 쓴 당사자들도 똑같은 질문으로 번민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다. 문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자기 자신 또 우리네 인생에 대해 이해한다는 개념으로 확대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확대된 이해는 암기된 지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입시위주와 경쟁과열의 살벌한 교실에서 예술적감성과 인생을 논할 분위기를 감히 허락하지 않는 요즘이지만, 목표로 하는 이상적인 문학교사상 안에 ‘외워!’만을 외는 입시 외골수 교사는 교사로서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배움을 구하는, 배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가련한 아이들에게 그저 창과 방패만 쥐어주고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들여보내는 가혹한 모순의 학업 현실이라도, 그렇게 등 떠밀려 미로같은 학습과 현실에 뛰어들지라도, 어둠과 혼란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빛나는 눈과 인간과 생에 대한 관점이라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라도 그 허리춤에 묶어 보내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거다.그러나 모름지기 달을 보려면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아야한다. 손가락의 지시 없이도 달을 찾아내어 그 황홀한 빛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축복받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을 통해 보는 연습을 매우 많이 한 경우일 것이다. 목적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단이 필요하다. 문학적 지식이 문학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문학을 교육하려는 우리는 우리의 손가락 없이도 제 스스로 달을 좇을 수 있도록 우리 제자들에게 시선의 독립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수단을 다루는 연습을 시켜야할 것이다. 독립된 시선을 갖출 수 있도록 충분한 문학적 지식과 도움 되는 정보들을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이 생긴다. 바로 수단과 목적의 가치전도 현상이다. 나 또한 전도된 가치를 답습하며 살아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것 같이 많은 학생들이 처한 상황이다. 문학교육 뿐 아니라 모든 교육에 있어서 당면한 공공연한 익숙함을, 그 식상함을 괜히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타까운 일이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이미 예전부터 교육은 입신양명을 위해서 높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암기해야할 지식을 전수하는 기능만을 담당하며, 문학적 감수성을 말하는 것은 불편한 일인 것처럼 되어왔다. 문학에 대한 탐구가 수단으로써 이뤄지고 문학의 본령은 뒷전이 된 세태가 안타깝긴 하지만 그 또한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의 한계이다.그러나 문학은 그러한 현실과 이상의 교합점을 집요하게 잡아내려는 학문이다. 문학에 대한 교육이 현실에 부딪쳐 이상을 포기해 버린다면, 불편함을 무시하는 편안함을 누리게 된다면 문학교육에 더 이상 의의가 있을까. 교사라면, 특히 문학교사라면 이러한 불편함을 끊임없이 제기해야한다. 불편함에 대한 인식을 깨워주는 것이 문학과 문학교사의 역할이다. 불편함 없이는 발전도 없다. 우리가 이러한 기계적인 문학교육에 대한 불편함을 인식하게 되는 것도 일보의 전진일런지도 모른다.학생들에게도 불편해서 편안해지는 문학수업을 만들어주고 싶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하는 성격이지만, 내 자신의 역량이 부족해 아이들의 학습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절대로 피하고 싶다. 아이들의 수업을 책임진 입장에서는 나 또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궁극적으로 찾아오는 편안함을 위해 끊임없이 아이들을 조르고 흔들어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구성주의 수업방식을 존중하되, 그 바탕은 튼튼하게 다져주어야 한다. 교과서 텍스트의 이해를 위해 읽어오라는 숙제를 포함해 다함께 소리내어 읽어 친숙해질 수 있게 하며, 교과서 텍스트 이외에도 독서지도와 신문활용교육(NIE)으로 기반을 다져주고 싶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도 물어보고, 기습적으로 돌아다니며 찔러보기도 게을리 하지 않고 싶다. 문학을 어려워하고 기피하는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해 일기를 쓰게 하고, 나 자신의 유치하고 소소한 일기를 발표하며 차츰 시로 표현하거나 문학적인 수사를 알게 하며 같이 성장해나가고 싶다. 나 자신이 문학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문학을 전도할 수 있는 문학중매쟁이가 되어주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격앙되어 삐져나온 감정이지만, 정말이지 명석하게 빛나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품은 능력 있는 국어선생님이, 간절히 되고 싶다는 마음에 평소 성인군자처럼 조용하던 내 심장도 설레며 뻐근하니 두근거린다.
『탁류』의 줄거리와 시점의 교차양식목차Ⅰ. 머리말Ⅱ. 『탁류』의 줄거리Ⅲ. 『탁류』의 화자시점서술과 인물시점서술의 교차양식검토1. 화자시점서술과 인물시점서술2. 『탁류』의 경우Ⅳ. 맺음말※참고문헌Ⅰ. 머리말이 과제는 『탁류』를 대상으로 하여 작품의 줄거리와, 화자시점서술과 인물시점서술의 교차양식을 정리하였다. 이는 소설의 이야기와 담론적 측면을 살펴보는 의미가 있다. ‘이야기’적 측면은 줄거리를 정리하며 살펴보고, ‘이야기하기(담론)’의 구성전략인 시점을 살펴보는 순서로 전개하겠다.줄거리는 정보단위로 번호를 붙여 간략히 정리하였고, 화자시점서술과 인물시점서술의 교차양식에 대해서는 먼저 개념을 정리하고,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을 예시로 들어 정리하였다.Ⅱ. 『탁류』의 줄거리① 정주사는 군산에 이주하여 미두(투기 노름)에서 소일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외상 받으러 간 한참봉 집 부인 김씨로부터 큰딸 초봉의 중매제의를 받는다.② 초봉은 세들어 사는 남승재를 좋아하고 있으며, 제중당(약방)에서 일하다, 약국주인 박제호에게 같이 서울로 약국을 이전할 것을 제의받는다.③ 은행원 고태수는 은행 돈을 횡령하여 장형보를 거쳐 미두를 하나, 시세 하락으로 실패하고, 간통해온 김씨에게 초봉과의 중매를 청한다.④ 김씨는 태수가 돈이 많다며 정주사에게 혼담을 꺼내고, 제호는 부인 윤희에 의해 초봉과 서울로 가지 못하게 된다.⑤ 초봉은 가족을 위해 혼담을 받아들이며, 형보는 태수를 빨리 제거하고 초봉을 차지하려는 흉계를 품는다.⑥ 초봉이를 가엾게 여긴 승재는 태수가 화류병을 고치려 병원에 오자 그를 죽이려다 그만둔다.⑦ 초봉이와 태수가 결혼하고, 승재는 하숙을 옮기고 계봉이는 승재를 자주 찾으며 애정이 싹튼다.⑧ 형보가 태수와 김씨의 간통 사실을 한참봉에게 전화로 폭로하여, 김씨와 태수가 맞아 죽고, 형보는 초봉이를 협박해 겁탈한다.⑨ 초봉은 장례식이 끝나자 마음 좋은 아저씨 제호를 찾아 서울로 갈 결심을 하고, 역에서 제호를 만나 같이 떠나고, 온천에서 그의 여자가 된다.⑩ 초봉은 제 빌려서 서술하지만, 그 인물을 ‘나’라고 하지 않고 ‘그’나 ‘철수’ 등 인칭대명사로 나타낸다. ‘나’로 나타나는 1인칭 주인공 시점보다 객관화되어, 화자가 주인공으로 취급되어도 '그'라고 객관화함으로써 거리를 갖고 보여지고, 그만큼 작가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어 1인칭시점에서 제한받던 전지적 권한이 발휘될 수 있다.‘그’를 ‘나’로 바꿀 수 있으면 ‘3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가상적 존재자’는 감저이입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인물매체(시점)을 빌려야만, 직접성의 감각을 불러올 수 있다. ‘그는 매우 슬펐다’와 같이 자유간접문체를 활용하는데, 서사적 과거 ‘었’과 지정사 ‘그녀’의 화자적 개입은 무시되고 감정이입이 되지만, 거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화자의 서술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1인칭 주인공 시점’보다 객관적인 시점을 지향하게 된다.2. 『탁류』의 경우? 소설 초반에는 ‘가상적 존재자’인 화자가 금강과 그 주변의 지형에 대해 설명하면서 군산이라는 항구에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린다고 운을 뗀다. 구어체는 아니지만, 변사와도 같은 태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예) 금강…….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가만히.......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여인네의 달콤한 이야기는 못된다.? 누군지 모르는 특정하지 않은 화자에 의해 정주사가 소개되고, 계속해서 화자의 시점으로 고태수와 장형보의 모습이 드러난다. 화자는 정주사의 내력에 대해 압축적이고 주석적인 서술을 한다. 정주사의 형편에 대한 서술이 길어지면서, 정주사라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고, 점점 ‘정주사’라는 인물에게 시점이 이동하여 정주사의 시점으로 정주사의 생각과 상황이 서술되는 ‘인물시점서술’로 전환된다.예) 스물한 살 먹은 맏딸 초봉이를 우두머리로, 열일곱 살 먹은 작은딸 계봉이......지금으로부터 열두 해 전, 정 주사가 강 건너 서천땅에서 이곳 군산으로 이사를 해올 때, 그의 선대 유산이라고는......(정 주사의 내력에 먹었기를 바라는 생각이다......초봉이 저를 보려고, 자주 물건을 사러 가게에 온다는 그 사람인 게로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그러나 초봉이는, 웬일인지 아까 첫 번과는 달리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그 사람 고태수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더니.....생김새로든지 처지로든지 승재가 훨씬 못한 것......승재를 위해서 고태수한테 시기가 난다.? (초봉이의 생각에 의존하여 서술하다가 제호가 등장하고, 곧 제호의 속내도 보여준다.)예) 제호는 아내에게 늘 볶여 지내기만 하지, 가정에 대한 낙이라고는 없다. 그러한 그에게 이쁜 초봉이를 손닿는 데 두어두고 시시로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초봉이를 놓치고 싶질 않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초봉이에게 시점이 넘어온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전지적이고 주석적인 서술을 하는 화자시점서술을 기본으로 하여, 내용과 맞물려 초봉이가 등장할 때마다 초봉이의 입장에 서게 하는 ‘인물시점서술’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예) 서울! 서울! 늘 가고 싶던 서울이다. 승재와 매일 전화도 못하고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 이것이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애개개! 요게 겨우 언니 밥이야?” 하나 이건, 그게 혹여 제 몫일까 봐서 꾀를 쓰는 소리다. (화자가 해설을 달며 서술에 나서고 있다.)초봉이는 승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다 못하고 저러나 싶어서 그의 하던 양이 우습기도 하거니와 한편 궁금하기도 했다. 안방에서는......(초봉이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다가, 가상적 존재의 화자에 의해 장면전환이 이루어진다.)? ‘.......생애는 방안지라’ 편에서는예) 에피소드는 이렇다. (경매 장면 제시)......(태수의 시점으로 넘어와서) 태수는 거리로 나와서, 어디로 갈까 하고 잠깐 망설인다. 이런 때는 어떤 조용한 데, 가령 서울 같으면 찻집 같은 데로 가서 혼자 우두커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앉아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울서는 별반 다녀 보지도 못한 찻집이 불현듯이 그리웠다....태수는 초봉 없었다.? ‘조그마한 사업’ 편에서는, 승재의 시선을 활용한다. 장면제시는 가상적 존재자인 화자의 시선으로 서술되고, 차츰 승재의 시점으로 옮겨간다.예) 그의 등 뒤에는 승재가 낡은 왕진가방을 안고 따라 들어오고.....먹곰보네 아낙은 어린것의 가슴에 손을 대보다가 아직 따뜻한 온기가 있으니까, 그것이 되레 안타까워 미칠 듯이 날뛴다....승재는...주사라도 한 대나마 놓아주는 시늉을 하지는 않고서 되레 타박을 한 것이 후회가 났다.? 명님이가 등장하며 다시 대화와 장면제시를 하며 화자시점서술이 주가 된다예) “아녜요! 아이참...” 명님이는 승재가 혹시 농담으로 그러는 줄 알고서......? ‘천냥만냥’ 편에서는 초봉이에게 유씨가 고태수 얘기를 꺼내자 초봉이의 시점에 의존하여 전개된다.예) 초봉이는 고태수라는 이름을 듣자, 앗! 기어코 여기까지 바싹 들이대고 육박을 했구나! 하고, 몸을 떨었다.....초봉이는 승재를 자꾸만 추켜 앉히고 싸고 돌고 해도 그럴수록 태수는 자꾸만 더 드세게 파고들었다. (계봉이가 끼어들고, 유씨가 핀잔하며 유씨의 생각이 서술되고 다시 화자시점서술로 장면제시 된다)? (초봉이와 태수의 약혼날,) 형보는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보는 초봉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는 절절히 탄복하면서, ‘아, 요놈이!’하고, 샘을 더럭 내어 태수를 쳐다보았다. (이 부분에서 화자는 형보의 의식을 연이어 드러내며 ‘선택적 전지’를 발휘하고 있다.)? ‘외나무 다리에서’ 편에서는 계봉이의 시점에서 승재를 바라본다. 문장 부호가 상실되며 시점이 인물에 더욱 밀착되어 화자의 개입이 더욱 옅어지고, 더욱 계봉이의 시점으로 다가가며 완전히 인물시점서술에 가까워진다.예) 계봉이는 형 초봉이가 승재를 떼쳐 놓고 달리 결혼을 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그러면서도 그는 승재가 저 혼자 외따로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불쌍하기도 했다....아 참, 우리 언니가 이번 스무사흘날....꼬옥 참례를 해야 한다고.? 다시 계봉이 생긴 조게, 갈 데 없이 내 것이 될 텐데...’ ....사실 그는 가만히 앉았으면 오늘이고 내일이고, 아니 이따가 저녁때쯤 태수가 경찰서로 붙잡혀 갈테고, 붙잡혀 가는 날이면 ‘조 것’은 내 것이 될 터라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형보의 꾀임에 넘어가 저지른 부정이 탄로나려 하는데 대한 고태수의 내면갈등이 제시되며 고태수의 시점이 한동안 유지된다. 따옴표가 없고, 느낌표와 물음표 등의 활용으로 인물의 생각을 직접 느끼듯이 볼 수 있고, 인물의 내면을 더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예) 그러고 나서 같이 죽자고 한다. 초봉이가 싫다고 하면? 그러거들랑 네 속을 보느라고 그랬다고 웃으면서 안심을 시켜 잠이 들게 하지. 잠이 들거든 허리띠 같은 것으로-. 가만 있자! 영감님 장사 밑천을 마련해 주지 못했지? 좀 안됐다. 돈 천원이나 빼내서 주웠더라면 좋았을 것을...그러나 뭐 인제는 할 수 없는 이리고. 그러면 다 됐나? 아뿔싸!......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나는 도둑놈이요, 못된 놈이요, 그리고도 불효한 자식! 태수는 마침내 생각지 못했던 회심에 다들려 후-길게 한숨을 내 쉰다.? 초봉이를 빼앗기 위해 장형보가 계략을 펼치고, 장형보의 내면이 조명된다. 장형보에게 초봉이가 유린당하고 점차 초봉이에게 감정이입된다.예) ......아까 일이 꿈결같이 아득하여 도무지 정말인가 싶지 않았다......사뭇 구역이 나는 것 같았다...푹푹 삶아냈으면 한다. 그것도 시원칠 않으니, 드는 칼로 어디를 싹싹 도려 냈으면 한다.....그렇지만 만약에 그랬다가는 내 부끄러운 것이 내가 죽은 뒤에라도 드러나고 말테니, 또한 못 할 노릇이다. 속시원하게 원수 풀이도 못하다니 가슴을 캉캉 찧고 싶다. 대체 이이는 어떻게 된 셈인고? 장가 놈이 말한 대로 한 참봉네 집엘 가서 정말 그렇게 하고 있는가? 설마 그러려구? 장가 놈이 괜히 꾸며낸 허튼 소리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따위 소리에 가뜩이나 기가 질려 가지고는 맘껏 항거라도 해대덜 못했던고! 분한지고! 이 원한을 못 풀고
의 문학 교수-학습 방법의 독특함무언가 독특하다는 것은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독특함’은 차이성에 기반하는 것이고, 보편을 벗어난 ‘다름’은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다. ‘독특하다’고 지칭하는 것도 군중 중심의 시선에서 확보되는 특성이다. 정작 그 대상은 자신이 ‘독특한 존재’로 주목받는 것을 불편하고 이상하게 느낄지도 모른다.사람들은 타인을 인식할 때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나’와 타인과의 차이성에 긴장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타인의 독특함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면 누구든 침묵이 자연스러운 사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 간극을 견뎌내지 못하고 배척하며 다른 사람의 특별함을 특이한 기형의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에게 편하고 익숙한 것만을 고집하려는 지향의 관성법칙에 지배받으며 살아간다.이러한 복종의 관습을 깨고, 닦여진 일반 궤도를 부정하며 세상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독특함’을 고수한 것이야말로, 독특하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의 기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들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제 뼈를 깎아 보편적 기준이라는 프로크로테스의 침대에 맞추며 자신의 개성과 신념을 포기해버린다.의 왜냐 선생의 수업방식이 독특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 선생은 자신의 신념을 믿고 그에 기반한 수업내용을 전개하고, 교원 노조에 가입하여 교육 현장의 보편적 기준의 눈 밖에 났고, 결국 학교라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거부당하고 만다. 왜냐 선생은 그의 신념과 자신만의 길을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그 신선함에서 일어나는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며, 그의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는 활동영역을 박탈당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진정한 개척정신으로 학교의 프로크로테스에 저항하려 했다.의 ‘나’가 인식하는 학교의 풍경은 이러하다. 학생들은 똑같은 노릇을 날마다 되풀이하고, 군인들처럼 줄지어 서서, 줄곧 하지마라 소리나 들으면서 학교생활을 한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생은 월급 때문에 수업을 하고, 자율학습이란 것도 결국 말장난에 놀아나는 꼴이고, 학교는 세뇌하는 수용소이다. 그러나 ‘나’는 윤수를 지키고 있던 양호실의 조용함이나 편안함 따위는 시험에 안 나온다는 현실의 논리도 파악하고 있으며 그에 항의하지 않는다. ‘나’는 판옵티콘의 질서에 순응하는 척하며 적당히 살아가고 있다.‘나’의 인식세계 속에서 왜냐 선생은 그들의 끝없이 긴 행렬을 돌아보기 위해서 잠시 멈춰서며 뒤를 보는 형상이다. 비장한 음악이 흐르는 영화 속에서 보았던 이미지에 왜냐 선생을 겹쳐 보이며 그의 투쟁정신을 읽어내고 있다. 왜냐 선생은 학교라는 환경에 있어 아름다운 적이다. 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계에 의해 상처를 받지만 그의 마음은 당당하며, 슬픈 투쟁정신을 가진 존재이다. ‘나’는 그런 왜냐 선생을 존경하는 듯하다. 그러나 곧 현실의 한계를 인식하는 ‘나’는 이것이 말이 안 된다며 금방까지 타오르던 가슴의 여린 불씨를 황급히 훅-불어 꺼버린다.‘나’는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상상 속에서 버스가 사고를 내 다들 죽는 꿈을 꾼다. 그러나 곧 무언가 서운함을 느낀다. 중요한 무엇, 자신이 아니면 못하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살았어야 된다고 이내 생각을 고치며 현실에 발을 붙이는 사람이다.윤수는 왜냐 선생의 수업 시간이 질문 공포의 연속이라고 해도 왜냐 선생이 좋다고 한다. 왜냐 선생은 그 별칭답게 ‘질문하는 교사’이며 왜냐, 왜냐, 하시며 이 사람 저 사람 지적하며, ‘너는 왜 그런 말을 한거냐?’는 질문공습을 퍼붓는다. 덕분에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항상 긴장하며 스스로 생각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며, 사유하는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로 거듭난다.이것은 마치 개인적으로도 전부터 동경하고 목표로 삼던 교수법인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보는 듯하다. 완성된 모범답안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닌, 학생 스스로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사고를 분만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이다. 현대의 개더 고차원의 사고까지 닿을 수 있도록 도움닫기가 되어준다.현재 일반적인 학교의 교육현장에서는 정전에 대한 정답을 정리하는 정규적인 수업을 선호한다. 연역적으로 답부터 던져주는 획일적인 수업방식에서는 학생들이 주거니 받거니 해서 구체적인 사고로 전진해 나가기보다는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정답을 알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왜냐 선생은 이런 일반적인 수업방식을 깨고, 학생이 답하게 만드는 ‘왜냐’식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들은 누군가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조금만 더 생각하도록 도와주기만 한다면 스스로도 고차원의 사고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 선생은 정전과 정답 위주의 교실을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자신만의 답을 내놓을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었다. 동철이가 교과서적인 답변에 가깝다면 윤수는 자신만의 허생을 꿰뚫어 보았다. 왜냐 선생은 주로 아이들에게 발언권을 돌리며 제 생각을 말할 기회를 준다. 권위주의적인 일방적 교수 방식이 아닌, 학생들이 개성적이고 독특한 자신만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민주적인 교수 방법을 펼쳤다. 교사가 답을 건네주는 것 대신 학생 집단의 발언을 통해 상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귀납적인 도달 방식을 활용하였다.다만 학생들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있어서 질문이 당혹스럽고, 일반적인 정답이 아니면 대답하길 꺼려하는 소심쟁이들이 되어버린 상태이다. 왜냐 선생은 윤수와 같은 소심한 아이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기다리며, 칭찬해주고, 모자란 표현이 있으면 보충해준다. 그 결과 왜냐 선생은 수업도 잘 이끌어 나가고, 윤수와 같은 소심한 아이의 마음에도 깊은 감동과 의지를 전달해 변화하게 만든다. 사실 가르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마음을 사로잡는 수업을 한 것이다.비판적 지식인 같은 ‘나’ 또한 왜냐 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나’는 교지에다 소설도 쓰는 등 섬세하고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학생이다. 그에게 왜냐 선생이 글은 결국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무어든지 자꾸 말로 그려내라고, 글감이란 게 어디 고상한 데에 따로 있는 것이 3차시로 잡았다. 첫 차시를 들어가기 전에 왜냐 선생은 허생전을 읽고 그 줄거리를 잡아오라는 숙제를 냈다. 이 숙제에서부터 허생전을 향한 학생들 각자 나름의 공부가 시작된다. 윤수는 허생이 결국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허생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다고 표현한다. 이에 대해 ‘나’는 윤수를 다시 보게 되고, 대화를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허생전을 배우는 첫 번째 시간은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수업을 흥분과 긴장의 연속으로 만들 수 있고, 키득키득 웃으면서 배울 수 있는, 수업이 짧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재밌는 수업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수업도 중요하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흥미를 어떻게 불러일으키느냐이다. 아이들이 키득거릴 수 있게 만드는 수업의 즐거움은 왜냐 선생의 수업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이다.왜냐 선생이 줄거리 잡기 숙제를 낸 이유는 소설의 줄기, 핵심된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났느냐를 붙드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한다. 3차시에 토론과 스스로의 사고 중심의 수업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읽어오고, 그 줄거리를 파악해 오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게다가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조차 제각각이다. ‘나’의 허생전과 ‘윤수’의 허생전, ‘동철이’의 허생전이 다 다른 것이다. 이 과제 하나에도 ‘허생전은 이런 것이다’라고 제시하지 않으며 개인의 감각을 존중하는 왜냐 선생의 민주적인 교수 목표가 반영되어 있다.‘허생은 왜 과일과 말총을 사 모았을까요? 돈은 왜 벌었나요? 왜 자기와 아내를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을까요?’ 등의 연쇄 질문으로 끊임없이 학생들의 머리를 굴려간다. 답에는 우선 칭찬도 하고, 모자란 부분은 지적도 하고 적절한 표현을 권유한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생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제기할 줄 아는 센스도 갖추었다. 대답을 하더라도 ‘어째서? 왜? 하필이면?’등의 메타인식의 질문을 연이어 물어댄다.왜냐 선생은 허생 인물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여러 가지 관련 지식과 사실들을 참고해야 하며, 주어진 뼈대와 틀에다 독자가 '읽어 넣는, 읽어 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준다. 토론수업을 하며 자신들의 생각으로 허생전을 읽어낸 학생들에게 이 말은 크게 공감 갔을 것이다. 허생전이라는 텍스트 하나에 한정하지 않고, 문학과 문학에 대한 태도 등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들며 시나브로 교훈을 쌓아주고 있는 것이다.‘나’ 또한 영향 받아 ‘박지원도 허생전을 쓰면서 자기 뜻대로 의미를 붙이고, 뭘 넣거나 빼 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고, 온몸으로 신변잡기의 소재까지 동원해 글쓰기에 부딪히기 위해 일기를 쓰며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며 성찰한다. 허생전 수업은 ‘나’에게 있어, 윤수에게 있어 단지 문학 텍스트가 아닌 것이다. 삶과 연결되어 확장된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삶과 연관된 사고야 말로 진정 왜냐 선생이 학생들에게 키워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단지 문학책에 코를 박고 구성과 형식을 읽어내는 것에서 벗어나, 좀 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세상과 삶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이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투쟁과 전념으로 이어갈 원동력이 되기까지를 바라는 것이다.허생전 수업의 1차시는 사건들, 그것이 연결되어 이루는 줄거리 중심으로 살펴보았고, 2차시는 허생이 누구냐, 허생이란 인물이 과연 어떤 기질과 생각을 지닌 사람이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다른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잘 읽고 생각해 오기로 한다. 수업이 재개되기까지는 그 사이에 일이 있어 좀 더 시간이 걸린다.이 소설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의 성격묘사와 그의 생각이다. 주인공은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고, 급우의 줄거리에 대한 해석에 지적하면서도 지적하는 행위가 좀 지나치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해버린다. ‘나’는 자신이 투사가 아닌, 행려병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 싸우려 하지 않는, 투사가 되지 않는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진 배를 채우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스스로 격하하는 것이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