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의 탄생에서 쇠퇴까지누벨바그, 프랑스 영화를 말하다.영화에 대한 논쟁은 가히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무엇을 최초의 영화라고 인정할 것인가, 영화의 정확한 의미,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객관적인 차이 등등 셀 수도 없는 논쟁은 약 100여년이 넘게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논점의 중심에는 '프랑스 영화' 그 자체도 존재했다. 프랑스 영화는 지난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롤러코스터처럼 굴곡 있는 흐름을 가져왔고 이런 흐름 속에서 '누벨바그'가 탄생했다. 우리는 흔히 누벨바그를 '누벨 이마주'로 착각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이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누벨바그는 프랑스 영화뿐만이 아니라 영화 역사상 전체에 영향을 끼친 하나의 큰 혁명과 같은 사고 였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를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프랑스 영화에서 일어난 '누벨바그', 그 내면에 대해서 살펴보자.1. 누벨바그란?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누벨바그'는 한번 쯤 들어봤을 만큼, 이제는 널리 알려진 단어다. 누벨바그란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 스타일로써 '새로운 물결' 이라는 불어의 단어 그대로 프랑스에 파도처럼 밀려들어온 하나의 흐름이었다. 젊은 영화인들이 전통적인 영화에 반기를 들며 시작된, 특별한 체계를 가지지 않은 예술운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전의 영화내용이나 촬영방식을 전면 부인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라는 예술 자체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 내에서 일종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던 것이다.누벨바그는 이만큼이나 세계적으로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영화적 조류가 다시 나올 수 있을 까 싶을만큼,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이전의 영화사적 흐름 속에서는 가치관이나 이념들에 따라서 표현방식이 문제가 되었지만, 누벨바그는 젊음과 자유를 중심으로 이를 탈피하여 많은 호응을 이끌었다. 이러한 이 관심이 가능 했던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화 평론 잡지를 통한 탕탕한 이론적 문제의식의 재고와, 두 번째로 누벨바존주의'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현실 자체는 도외시하면서 사회참여에는 무관심했다. 예를 들어, 줄리앙 뒤비비에는 사회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 영화가 아닌 존재론적으로 추악한 세계를 주제로 한 심리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프랑스적 영화'를 대표하던 이러한 감독들은 시적 사실주의 영화들의 성공요인을 공식화하고 반복하면서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한 고급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적 특성'은 이후 누벨바그 영화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누벨바그 영화인들이 보기에 이전의 영화는 아카데미즘이 너무 지나치게 많으며, 영화에 있어서의 창의성이 무시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영화가 부르주아적인 순응주의에 물들어 버렸다는 주장도 내세웠다. 문학의 전통적인 각색에 치중함으로써 영화 자체가 가질 수 있었던 영화만의 창의적인 표현을 소홀히 했다는 점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이러한 순응주의적인 태도는 이들의 일반적인 주제에도 잘 드러나며, 특히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에서처럼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보다는 이미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수동적인 태도를 통해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는 문학작품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로 과거를 회상하는 기법을 통해 재현되어, 현실이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기 보다는 과거로 인한 운명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결과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부각시킨다.현실과 과거를 직시하기보다는 이를 회피하거나 거기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누벨바그를 주도할 젊은 영화인들에게는 실망감을 안겨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이고 독특한 방식의 영화를 꿈꾸던 젊은 영화인들은 이 당시의 감독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이는 단순히 작품에 대한 실망의 차원을 떠나서 창조적인 작업을 도외시하고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써 상품을 찍어내는 듯이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를 마구잡이로 단기간에 찍어내면서 관객을 단순한 소비자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오는 배신감이였다.이들의 영화에서는 절대적으로 시나리오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이 독일 점령기에 침체기에 빠지면서 신인 감독들이 등장할 수 있는 무대가 더 넓어졌다.4. 카이에 뒤 시네마누벨바그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를 빼놓고 누벨바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라는 영화잡지가 영화사조에 미친 영향을 막대한 것이다. 앙드레 바쟁과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장마리 로두카등이 만든 이 영화 잡지의 탄생은 세계 영화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었다.이전까지는 단순한 즐기는 거리로 간주되던 영화는 2차 대전 직후, 사람들에게 유일한 유흥거리로 남게 되었다, 나아가 영화에 대한 높은 수요는 영화와 관련된 이론적 내용들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부추겼고, 이를 이 잡지가 해결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오락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예술로서의 영화를 알리는데 기여하였고, 관객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도 많은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물론 이전까지 단순한 오락거리에 그친다고 믿겨졌던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와해시키는데 잡지는 큰 역할을 했지만, 이론적으로 과장된 측면도 분명히 많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영화는 점차 문학과 철학 못지않은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또한 이 잡지는 미장센과 영화 형식의 이론적 분석을 통해서 작가주의 라는 개념을 이끌어 내는 데도 한 몫을 했다.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이론적 탐구가 단순히 탁상공론처럼 이론에만 그친 것은 아니였다. 현실 참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던 당시, '시네클럽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을 당시 이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었다.이 잡지에 실린 비평은 당시의 젊은 비평가들로 이루어 졌고, 이들은 그 시대의 영화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배신감과 어리석음을 표했다. 그리고 이런 비평들은 역할을 점차 넓혀가면서, 영화인들의 지지를 얻어갔고 이러한 지지를 실제의 영화 제작까지 이어간 것이다. 이 잡지가 없었다면 누벨바그와 같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세계 영화의 흐름은 없었을 것이다.5.누벨바그 영화의 특성네오리얼리즘이 현대영화로 향하는 관문을 열어주었다면학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형식적인 부분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열린 구조의 누보르망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특히 알랭 레네의 작품을 살펴보면 이런 실존주의적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형식적인 면에서도 누벨바그는 그들만의 독특한 미학을 추구 하였다. 그 전에 대세를 이루었던 짜여진 구조가 아닌 '열린 구조' 혹은 '느슨한 구조'를 많이 사용하였다. 프랑스 문학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포함시킨 심리학 소설의 구조를 빌려 오기도 했으며, 이는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푸르스트 등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아 밀접한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보통 새로운 테크닉이라던가 점프 커팅, 짧은 플레시 커트 등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발견할 수가 있다.6. 누벨바그 영화들-(1959), 감독: 장뤽 고다르고다르의 첫 장편 영화. 1960년 전후 유럽의 청춘 문화를 상징하는 일종의 아이콘과도 같은 작품이였다. 즉흥연출, 현장로케, 점프 컷, 핸드 헬드 촬영 등과 같은 전복적인 영화 형식에 소통 불가능, 허무주의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담아내, 전후 급격한 현대화에 대한 부적응으로 방황하는 서구 젊은이들의 초상을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들의 상반되는 캐릭터가 빚어낸 부조화와 대비효과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동기없는 살인과 동기 없는 사랑, 동기없는 죽음 등으로 이어지는 이 두 주인공의 행동으로 삶에 있어서의 가치관을 잃어가는 현대 젊은이의 단편적인 모습을 잘 그려냈다.당대 아방가르드 예술의 브리콜라주 기법을 이용하여 이야기가 제 멋대로 전개되고, 수많은 대화의 조각들을 끼워 맞춰야 이해가능한 내러티브 구조를 취하였다. 영화는 즉흥연출이에도 불구하고 격자소설 형식의 사용이나 미완의 결말 처리등은 고다르의 뛰어난 서사능력을 보여준다.-(1959), 감독: 알랭 레네한 남녀의 일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이전 영화문법과 달리 일상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시킨 영화이다. 영화는 전통적인 줄거리를 벗어나 회상이 내러티브가 중점을 이룬다. 영화로메르는 바쟁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아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영화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또한 인물들의 연기나 장면들의 전환에 있어서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을 추구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이 있으며, 이 영화로 인해 로메르는 누벨바그 영화감독중 가장 프랑스적인 감독이라는 평을 받았다.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에는 자크 리베트도 있다. 그는 누벨바그 감독들 중에 유일하게 현장수업을 받은 사람이다. 이라는 작품은 그의 첫 장편영화인데, 당시의 평단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비난하는 쪽은 전통적 내러티브 양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문학적인 면만 지나치게 강조된 영화라고 평했고, 반대에서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가장 완벽하게 연결된 영화라며 격찬을 남겼다. 그 이후 , 등을 제작하며 예술성은 물론이고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을 이루었다. 그의 영화 특징중 가장 큰 것은 영화의 ‘제작과정’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끊임없는 탐구에서 오는데, 이는 영화를 위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미스터리 형식을 즐겨 사용하면서도, 일관성이나 통일성등은 과감히 거부했다.클로드 샤브롤의 경우는 의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먼저 시작하였다. 샤브롤은 젊은 영화인들의 새로운 사고를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기면서 누벨바그의 선두주자로 나선다. 그는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었고, 제작사의 간섭 없이 직접 배우나 주제를 선택하였으며 야외촬영, 비전문 배우, 사회적인 주제등을 고루 실현시켰다. 그러나 샤브롤은 누벨바그 감독중 가장 먼저 그 흐름에서 벗어나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평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범죄 영화라는 장르를 깊이 있게 연구하게 되고, 훗날 범죄영화의 걸작들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 등이 있다.8.장 뤽 고다르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트뤼포와는 달리 명문가 출신인 고다르는 물질적으로 전혀 모자람 없이 자랐다. 그러나 그의 삶 자체는 굴곡진 인생이었다. 청년시절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18개월동안이나 체류
사례를 통해 이해하는마케팅 컨셉의 진화 과정현재, 세계경제는 석유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석유의 가격이 크게 오르느냐 혹은 내리느냐는 단순히 석유시장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있다. 석유 가격은 경기침체나 경기호황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매우 밀접하게 경제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은 자명하다. 지구상에 이토록 한 자원이 전 세계의 경제를 쥐락펴락한 적이 있을 까 싶을 정도다.그렇지만 조금만 더 과거를 들춰본다면, 지금과 사뭇 다른 상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석유가 세계 경제의 화두로 올라선 것은 채 200년도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이전부터 석유라는 것은 존재해 왔지만, 그 사용법이 제대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저 검고 점성 높은 물에 불과했다. 석유가 산업동력으로 쓰이기 전에 일어난 영국의 산업혁명은 석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당시 석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원으로 여겨졌고, 이를 대체할 만한 동력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 석유가 보다 더 나은 에너지원으로 쓰일 수 있게 되면서, 세계는 석탄에서 석유로 눈을 돌린 것이다. 검은 물이 검은 보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었다.이렇게 사회는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한때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던 것들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높은 기술은 불과 몇 년만에 구식이 되기도 한다. 사고나 철학, 이념 역시 변한다. 처음에 옳고 더 효율적으로 보이던 것들에서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새로운 철학과 이념이 등장하는 것이다.마케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 수요가 공급보다 많았던 시기에서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시기로 옮겨가며 기업의 행동개요 역시 바뀌어야 했다. 이런 과정들은 마케팅의 중요성을 상기시켰고, 기업의 마케팅 컨셉에도 여러 차례 변화를 가져왔다.그림 1 마케팅 컨셉의 진화과정마케팅 컨셉은 각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영향 아래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이러한 마케팅 컨셉은 마케팅 사고라고도 하며, 개념이나 가에만 둔다는 것이다. 또 소비자는 경쟁제품의 가격을 완전하게 알고 있고, 동일한 제품 부류 내에서는 가격만으로 제품의 차이를 결정짓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고객을 유치하고 유지하려면 제품을 개선하고 유통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비용을 절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시기에 이러한 경향은 포드의 과학적 관리기법을 개발하게 된 계기와도 맞물린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생산성을 대폭 올릴 수 있었다.이러한 컨셉은 많은 제품을 빠르게 생산하는 것이 생산자의 경쟁우위로 이어지던 시기의 마케팅 사고이다. 즉, 노동 분업화를 통해 단위노동당 원가를 절감함으로써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킨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는 제품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경우에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마케팅 컨셉이다. 공급을 초과하는 경우, 소비자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구입하고자 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가의 기업들은 생산하기만 하면 판매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산증가에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가 있다. 즉, 품질 문제 이전에 생산량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업은 고객 욕구에 따른 다양한 상품보다는 단일 품종의 대량생산으로 수익을 극대화 시킬 수 있었던 시기였다. 만들기만 하면 대부분 무조건 팔리던 시대였으므로 경영과제의 최우선 과제는 대량생산의 실현인 듯 했다. 또한 비용 역시 절감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비용축소는 곧 가격인하와 시장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생산 지향 단계를 대표하는 시대상은 ‘산업혁명’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에 힘입은 기계의 등장으로 산업의 기술적 기초가 바뀌어 수공업적 작업장이 기계설비에 의한 자본주의적 성격의 큰 공장으로 대체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비약적인 생산성의 향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성의 증대도 더욱 빠르게 증가하는 수요를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자연히 시장의 지배력은 제품을 생산하는 공급자에게 있었다. 따라서 기업은 생산만, 그러한 능력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여러 경쟁자들 가운데 질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유는 그들의 소득 제한 때문이다. 따라서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만이 고객을 유치하고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품 지향적 경영자들은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고 품질을 개선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이러한 새로운 컨셉을 이유로 1926년, 제너럴모터스 사의 신차 출시는 포드사의 대표적인 모델이었던 모델T에 실증이 난 소비자들에게 크게 매력을 줄 수 있었다. 제너럴모터스 사는 단일 기종이었던 생산라인을 철수시키고, 여러 기종을 생산해 선택폭을 넓힘으로써 소비자의 다양성과 차별화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이다.핸리 포드가 대량생산으로 자동차를 팔아온 전체 고객군을 제너럴모터스 사의 알프레드 슬로언이 세분화하여, 각각의 세분화된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제공함으로써 소비자의 욕구만족을 통해 시장에서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생산컨셉트의 신화를 이끌었던 모델T는 생산이 중단되게 되었고, 이는 포드사의 단일품종 대량생산이라는 메커니즘을 세분시장의 기호에 맞춰 가치를 제공하는 ‘시장세분화’ 메커니즘으로 교체한 것이다. 이 예가 제품지향단계의 대표적 사례이며 동시에 효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의 경영 이슈는 대게 상품의 품질과 우월한 성능 등에 집중된다.그렇지만 이러한 컨셉은 약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소비자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무시한 ‘마케팅근시안’을 초래하기 쉽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철도 회사들은 승객들이 수송보다는 안락한 기차를 원한다고 생각했고 그저 편안함만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또 다른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기업에서 성능적으로 뛰어난 제품을 발명했다고 하자. 그렇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새로운 제품이 얼마나 효율적인지에 대한 지식을 자동적으로 알게 되지는 않는다. 또한 기업 역시 제품이 사실상 우수하다고 해도 소비 구매자 중심 시장으로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고객의 소비수준을 넘어선 생산량 때문에 만성적인 과잉재고상황에 처하게 된 기업들이 이의 원인을 낮은 판매효율 때문이라고 인식하면서 판매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판매지향단계는 소비자들이 제품의 존재와 필요성을 자발적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가정 하에 나온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다양한 촉진 도구와 대면판매 등을 이용하여 소비자를 설득하려는 마케팅이 필요한 단계이다.판매 컨셉에 대한 기업들의 반응은 대단했는데, 기업들은 유통망을 재정비하고 홍보업체를 이용해 대규모 광고를 이행했다. 또한 영업점을 중심으로 판매 사원들에게 다양한 판매 기법을 가르치고, 시장점유율을 높이거나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판촉행사를 펼쳤다. 이는 경제 불황기에 과잉공급된 상품을 소비자에게 판매하여 투하자본을 신속히 회수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며 판매촉진활동, 물류기능 등이 강조된 시기의 마케팅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소비자는 판단능력이 떨어지며 기업이 자극을 주기 전 까지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가정되고 있다.판매지향단계는 소비자들에게 제품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노력이 없는 한,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하지 않으며 구매하더라도 충분한 양을 구매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판매개념에는 몇 가지 전제된 가정이 있다. 첫째로, 소비자들은 보통, 꼭 긴요한 것이 아니면 대부분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존재로 가정된다. 또한, 판매를 자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동원함으로써 보통의 경우보다 더 많이 구매하도록 소비자들을 유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고객을 유치하고 유지하려면 강력한 판매지향적인 부서를 설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이 단계에서의 기업은 소비자에게 판매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존재이다. 또한 시장의 소비자들의 욕구와는 관계없이 대량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비정상적으로 공격적인 판매와 진 연령층이 점점 감소하기 시작했다. 즉, 전후 베이비붐 이후의 세대 증가율이 베이비붐 세대보다 작아지면서 판매 컨셉으로 소비자에게 판매를 강요하는 방법은 더욱 힘들어졌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판매 증진 정책과는 다른 새로운 경영 철학이 필요했고, 실질적으로 소비를 하는 수비자 주체에 대한 연구가 행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판매지향단계의 공격적 촉진과 기만적 판매활동은 소비자의 판매저항으로 더 이상 이와 같은 정책은 그 효과를 상실하게 되었다. 소비자는 구매 선택권이 강화되었고 기업은 고객의 욕구와 욕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개개인의 소비자는 비록 모두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공통된 특징을 지는 집단들로 나눌 수 있으며, 이중에서 기업의 역량을 고려하여 적절한 집단을 선택하고 이들에게 소비에 대한 대가로서의 가치를 경쟁 기업에 비해 더 우월하게 생산하고 전달하며 알리는 것이 기업 경영의 핵심이 되었다. 그래서 흔히 마케팅 컨셉을 시장 세분화, 표적집단화, 포지셔닝에 따른 마케팅 믹스의 마케팅 컨셉이라고 하는 것이다.이러한 분석의 결과로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마케팅지향단계, 즉 저압적 마케팅이 등장했다. 마케팅지향단계는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개념으로서 표적시장에서의 소비자의 욕구와 욕망을 발견하고 그러한 욕구와 욕망을 보다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것을 기대할 수 있도록 기업조직을 정비하는 것이 기업의 핵심적인 경영 이슈라고 생각하는 경영철학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것이 아닌, 소비자의 욕구를 발견하여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기업의 목표가 된 것이다. 이는 고객을 제대로 아는 것이 핵심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이러한 판매지향단계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우선, 기업은 소비자들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이들의 몇 개의 상이한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비자가 어느 집단에 속하든 간에 자신의 특정된 욕구와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제품을 선호한다고 가정한
한국의 성장은 계속 될 수 있을까?:법치와 사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한국 경제 성장의 지속 가능성“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심히 괴롭히고 부자들은 법을 지배한다.”- 골드 스미스 -“거부가 있는 곳엔 언제나 불평등이 존재한다.한사람의 거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오백 명의 빈자가 필요하다.“-아담 스미스베네수엘라, 베네치아, 로마, 소련.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한때 경제 부국이었지만 잘못된 제도와 사회 문제 극복 실패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바뀌면서 무역과 농경에서 오는 경제 이익을 소수가 차지하려 하는 과정에서 황폐화되었다. 베네치아는 정부가 시민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면서 점점 쇠락의 길을 갔다. 석유개발과 함께 급성장했던 베네수엘라 역시 특정 정당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경제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아르헨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르헨티나는 100년 전만하여도 세계 10대 부국 중 하나였다. 지금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은 물론 프랑스 국민들조차 젖과 꿀이 흐르는 이 풍요로운 나라를 동경하며 이민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탔다. 당시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희망을 찾아온 외국인들로 붐볐다. 황금의 도시와 같던 아르헨티나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몰락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였다. 1930년부터 1976년까지 무려 네 번의 걸친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는 번번이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극도의 포퓰리즘인 '페로니즘'은 경제의 주름살을 깊게 한 게 아니라 아예 망가뜨렸고 사실상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정치뿐만 아니라 외교 역시 폐쇄적인 정책을 사용하며 문제가 많았다. 글로벌 자본시장과의 교류는 철저히 막고 심지어 인근 국가와도 개방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글로벌 시장이 기본이 되어가고 있는 현세와 전혀 맞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여러 정책과 정치권, 혹은 사회적인 문제로 한때 경제 부국이었던 많은 국가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굴곡진 상황 있다.저성장 시대에 들어선 한국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를 기점으로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한 기적의 아시아 국가라고 불렸다.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이러한 급격한 성장은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1970년부터 1997년, 그러니까 IMF에 직면하기 직전까지 한국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7.8%에 달했다. 현재 중국의 경제성장률과 맞먹는 정도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OECD가 2040년경에는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 잠재성장률이 가장 낮을 것으로 밝힌 바 있다.위의 표를 통해서 한국의 경제성장률의 추이를 살펴보면, 이미 5%이상의 신흥개발도상국가로써의 고성장국면은 종료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에 향후 주요 중심 과제는 4% 내외에서의 안정적인 성장국면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3~4% 내외의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사실상 큰 문제는 없다.그런데 2011년 2분기에서 2013년 1분기까지, 9분기 연속 전년 동기 대비 성장률 0%대라는 전례 없는 저성장시대가 도래되었다. 이러한 정체현상은 그동안의 외환위기나 오일 쇼크 등의 외부 충격과 무관하게 우리 경제의 내재적 구조적 요인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후 다시 3%대로 경제성장률이 반등하기는 하였지만, 매년 한국의 성장률이 2%대까지 내려올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쓸려야 했으며, 잠재 성장률은 이보다 낮게 평가하는 기관도 있었다. 한때 기적의 나라라고 불리며 연평균 8~9%대의 성장을 하던 우리 경제가 불과 20여년 만에 2~3%대의 저성장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의 저성장의 또 다른 지표도 있다. 소득 2만 달러~3만 달러 시기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소득은 2007년 2만 달러를 넘어선 이후, 7년 째 2만 달러에 머물러 있다.물론 1인당 소득수준이 5,000달러였던 예전과 소득 2,8000달러의 현재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소득수준디었던 아시아 국가들 중 급격한 발전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국가 중 홍콩과 싱가폴은 특히 강력한 국가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들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성장 동력은 놀랍게도 경제 정책이 아닌, ‘법치’에 있었다. 전혀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법치 경제. 법을 잘 지켜지는 것과 경제성장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홍콩과 싱가폴은 대표적인 법치주의 선진국으로써 엄격한 법집행으로 준법의식이 문화적, 시스템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고, 그 점이 국력 성장 주된 이유였다. 즉 높은 법치수준이 안정적인 사회와 국가 발전에 견인차가 된 것이다.법규범이 명확하고, 예견 가능할 때 경제주체들은 흔히 말하는 경제적, 합리적 의사결정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법이 투명하고 평등하게 집행될 때 거래비용의 감소를 가져올 수 있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 쉽다.선진국의 경우 국부의 80%정도가 무형의 자본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특히 법적 관점에서는 국민들이 지닌 기술과 경제활동을 뒷받침해주는 장치로써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효율적인 사법제도, 분명한 재산권 등의 무형자본이 원활한 경제흐름을 도울 수 있다.더 나아가 국제사회에도 이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법치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사회전반의 안정성이 전 세계의 기업과 투자자를 유치하고, 고도성장으로까지 이어졌다.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법치’는 어느 선상에 있을까?법치는 법이 지배하는 원리로서 국민 모두가 민주적인 입법절차에 따라 제정한 법을 존중하고 준수할 때 달성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법의 지배 아래에 평등하게 있다는 상식이 통하면 권력자나 일반 국민 모두가 ‘법치’를 존중하며 준법은 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게 된다.그런데 현재 한국은 어떤가? 날 가르치시는 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너희가 생각할 때, 정말 우리나라가 법치주의라고 생각하니?”현재 우리 사회의 법치와 준법 정도를 고려해 보면, 이는 분명한 위기이다. 법치역’과 관련한 판결이 사회적 이슈로 불거지면서 유전무죄 내지 유권무죄가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설문항목응답자(명)비율(%)□ 1.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의식에 동의한다.86077.76%□ 2.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의식에 동의히지 않는다.20518.53%□ 3. 기타 / 무응답413.71%계1106100%우리 사회를 되짚어 보면, 실권을 가진 사람들이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조사를 받거나 죗값을 치렀던 사례가 많지 않다. 이는 법치주의의 기본인 법과 재판의 공정성을 크게 해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법치는 추락하고 도전받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법원(사법부)의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의견〉설문항목응답자(명)비율(%)□ 1. 불공정하다는 데 동의한다.85477.22%□ 2. 불공정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18216.46%□ 3. 기타/ 무응답706.33%계1106100%소비자연맹의 법의식에 관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법이 잘 지켜지는가?’라는 질문에 76.7%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였고, 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로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보기 때문’이라고 41.5%가 답한 충격적인 설문 결과가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콩과 싱가폴이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된 ‘준법정신’은 내가 법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익이라는 합리적인 믿음에 근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은 위법이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상황이니, 법치주의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편법과 위법이 즐비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 경제 정책을 쓰더라도 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상태에 놓여있다. 공정하게 대접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정당하게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와 상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독이 되어‘ 착하게 돈 버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 것이다. 이는 경제 성장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제대로 정립된 마이너스 성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소득불평등, 부의 집중이 경제 위기로최근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경제학자는 단연 피케티일 것이다. 그는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심각할 정도의 자본의 집중과 소득의 불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아직까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올해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세계 상위소득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한국의 상위계층 소득점유율 등 관련 통계가 지난 2일 정식으로 등록됐다. 공개된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다. 한국의 소득 상위 1% 인구는 전체 소득의 12.23%를, 상위 10% 인구는 전체의 44.87%를 차지하고 있었다.(2012년도 기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19개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따져볼 때 상위 1% 기준에서는 3위, 상위 10%에서는 2위에 해당하는 높은 집중도다. 이 수치들이 한국보다 심각한 국가는 영국과 미국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걱정의 눈길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소득불평등을 우려해야만 할까?영국의 역학자인 케이트 피켓과 리차드 윌킨슨은 소득 불평등의 파장에 대해서 매우 대담하고 공격적인 주장을 내비췄다. 그들은 심각한 소득 불평등은 사회의 유대감을 약화시키고, 사람들의 건강을 악화시키며 범죄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말했다. 피켓과 윌킨스는 심각한 불평등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정복감과 굴복감이 강화되고 이것이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와 사회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상관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인과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다.보다 보편적인 주장들을 살펴보자. 우선, 돈 많은 이들에게는 적은 금액의 돈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액수가 될 수 있고, 그만큼 돈이 귀중하게 쓰일 수 있다. 중산층 가정이 소득 1백만 원을 더 벌어들이는 경우 이것이응한다.
유한계급론을 읽고: 우리 사회는 왜 계속 과시하려 하는가?"프랑스 여성들은 전통과 가치를 따져 명품을 삽니다.일본여성들은 소속감 때문에 삽니다. 남들다 있는데 나만 없으면 튀어 보이니까.그렇다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떤가요? 한국여성들은 남들과 차별화하려고 명품을 삽니다.우리나라 여성들은 무슨 차별화를 추구하는 것인가요?명품의 가치가 희소성이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내가 말하는 차별화라는 것은 오로지 가격입니다. 남들보다 더 비싼 가방 더 비싼 구두 더 비싼 브랜드를 가져야 더 성공한 듯이 보이는 차별화 말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르테미스는 어제보다 오늘이 더 비싼 브랜드여야 합니다.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 중에서최근 경제 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기사 중에 눈에 띄는 글이 있었다. 바로 '비싸야 잘 팔리는 이상한 나라, 한국'에 대한 내용이었다. 최근 국내 경제는 미국과 일본, 중국의 영향으로 불안한 상태지만 명품업체들은 우리나라에 판매하는 제품의 가격을 오히려 올렸다. 바로 한국인들은 질보다는 브랜드 네이밍을 통해 과시할 수 있는 상품을 선호한다는 가정하의 가격 전략이었다. 가격을 올려야 장사가 된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고 모순적이어 보이는 시장 논리가 한국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비싼 명품으로 자기 과시를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일까?사실 조금만 더 자세히 생각을 해보면, 이러한 상황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고, 또 이 시대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일은 아무렇지 않게 발생하고 있고 그 시발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을 쓴 베블런은 이런 문제를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고민을 했다. 베블런은 사람들이 왜, 언제부터 명품을 선호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가 보았을 때 사치를 하는 사회는 어때보였을까?유한계급의 탄생베블런은 역사적인 시대를 총 네 등분하여 미개시대, 야만시대, 수공업시대, 그리고 기계생산시대로 보았다. 그리었다.하지만 생산력이 조금씩 증대되고 경제가 풍요로워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잉여분이 생겨났고 이를 가지기 위한 치열한 싸움으로 야만시대가 열린 것이다. 원시시대 중에서도 대략 청동기, 철기 시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야만시대에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비생산적 계급은 일을 하지 않고 남을 약탈하는 일 자체를 명예롭게 여기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약탈적인 문화는 습관화되고 고착화 되면서 마침내 '유한계급'이라는 제도를 낳게 되었다.유한계급 속에서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은 미화되지 않았다. 반대로 보다 남성적인 힘이 드러나는 폭력과 약탈이 우상화되었다. 유한계급에 빠져든 사람들은 더 나아가 약탈로 획득한 공훈에 따라 계층의 서열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공훈과 거리가 먼 일상의 노동과 생산은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유한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가 생겨났다.베블런이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꽤나 특이하다. 베블런은 사람들은 '노동이 생산한 재화'는 원하지만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은 회피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일은 하지 않지만 소비는 끊임없이 원하며, 노동은 귀찮은 존재가 된다. 물론 지금에서야 노동이 귀찮다는 시각은 일반화되었지만 이 당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했을 시대에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신이 내린 천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노동은 하지 않으면서 재화는 소비할 수 있는 계급이 베블런이 말하는 유한계급이다. 유한계급은 겉으론 노동이 신성하다며 촉진시키려 하지만 스스로는 생산 활동을 비천하게 여기며 일하지 않고 소비하고자 한다. 여기서 일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돈을 쓸 수 있다는 과시적 형태의 소비가 만연하게 된다.더 나아가 베블런은 약탈문화의 사고가 소유권을 발생시키고 유한계급의 제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베블런의 생각은 이전의 경제학이나 역사학이 소유권이 개인의 창조적인 노력이나 생산적인 노동에 근거한다는 전제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공동의 자연물 속에서 노동이라는변화에 적응해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능동적이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즉, 인간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들의 종을 보존하고자하는 능동 주체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베블런의 진화론적인 성향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화론적인 성향은 더 나은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내고 또 이를 후대에 전수하기 위해 '제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베블런은 이를 '제작본능'이라고 칭했다. 제작본능은 생명을 존속시키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활동을 높이 사는 성향으로서의 인간만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제작본능이 항상 순수하게 발현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이 매우 낮았지만 평화로웠던 미개시대에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제작본능은, 영리기업이 오히려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감축시켜 가격을 올리는 등의 행위로 인해 오염되기도 했다.베블런은 종의 존속과 공동체 생존을 위해 행동하는 인간의 속성으로 제작본능뿐만 아니라 '경쟁심'을 이야기한다. 제작본능은 유용하고 효율적인 능력은 이점으로써 취하고 이에 반하는 무익함, 낭비, 비능률은 단점으로 버리면서 인간행동의 패턴을 만들어 간다. 경제적으로 효과적은 활동은 장려하면서 무익함은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제작본능이다. 이에 반해 경쟁본능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전한다. 경쟁심은 인간이 서로 지위를 다투는 겨루기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는 데서 나타난다.경쟁은 보의 소유와도 자연스레 연결이 되었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유한계급, 즉 부유한 계층은 하류계급의 노동과정을 생략하고 금전적인 경쟁에서 성공의 증거물을 곧바로 획득하여 자신을 명예롭게 과시하는 데 주력한다. 전쟁시대에서는 폭력과 약탈로 이를 이뤄냈으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평화의 시대가 도래 했을 때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피의 전쟁에서 금전적인 경쟁으로 형태를 바꿔 새로운 전쟁을 치렀다.하지만 재산은 쌓여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것이 선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 하기 때문이다.과거에는 부는 소유 그 자체만으로도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즉 창고에 돈을 그득하게 쌓아두기만 하면 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멈춰서면 유한계급이 될 수가 없다. 노동 활동에 불참한다는 증거로서 여가를 과시해야만 한다. 이와 밀접한 예로 일본의 다도문화가 있다. 전란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찾아오자 일본에서 유명한 가문 중심으로 다도가 장려되었다. 이 다도문화는 점차 고급 계층에서 일반화 시작하면서 보다 비싼 다기를 모으는 사람들이 생겼고, 다실을 우아하게 장식하기 위해 그림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상급 계층은 농민들이 농사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과시적 여가로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그럼 조금 더 생각을 넓혀보자. 만일 일반 농민들까지 다도문화가 퍼져나가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유한계급은 이런 상황을 몹시 싫어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경쟁에서 자신을 차별화하고 구별 짓고자 했다. 과시적 소비처럼 돈이 많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과시적 여가라는 다른 것을 찾으려고 했다. 즉, 과시적 여가는 과시적 소비에 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차별화 전략이며 구별 짓기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예를 습득하고 교양을 쌓고, 세련된 화법 등을 배웠던 것이다.이런 과시적 여가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유한계층을 꿈꾸는 청년들은 시간을 쪼개서 레저시간을 만들고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보다 선진화된 나라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그리고 유명하다는 백화점, 박물관, 미술관, 식당에 들러 사진을 찍고 이를 SNS에 올리며 과시적인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누군가에게 보여 지기 위한 여가활동은 시대를 거슬러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 부유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심지어는 가지도 않은 곳을 마치 간 것 마냥 거짓으로 꾸미다 들통났다는 글이 인터넷에 가끔 올라오는 것을 보면, 노동계층이 유한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눈물겹게 발버둥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기도 하다.그렇다면 과시적 소비는 어떤 식으로 일어가다 보면, 이쯤에서 우린 하나의 모순점을 찾게 된다. 바로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고 무익을 버리고자 하는 '제작본능'과 낭비를 일삼는 '과시적 소비'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베블런은 자신의 의견을 고수한다. 제작본능은 과시적 소비와 모순되는 경우에도 여전히 혐오스럽고 용납할 수 없다는 관념을 표출한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여전히 공존하고 있는 것일까? 베블런은 '표면상 목적이 있는 유한'으로 이를 해결해 나간다고 말한다. 즉 제작본능의 혐오감을 피하기 위해 유용한 목적을 그럴 듯하게 내세운다면 이 둘의 모순점은 완화가 되는 것이다. 평소에 값비싼 외제차와 명품으로 한껏 치장하는 국회의원들도 선거시기가 되면 자선 바자회, 고아원과 같은 사회단체 행사 등에 참석해 겉으로 나마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는 시늉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제대로 된 과시적 소비는 제작본능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므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유한계급들도 과시적 소비를 쉽게 이룰 생각은 없다. 그들은 항상 남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소비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조금은 결함이 있는 명품인 수제품을 선호하게 된다. 수제품은 손으로 직접 제작한 것이라 자연스럽고 미학적이며 그 희소성 때문에 값도 비싸서 소유자의 명성을 높여줄 수 있다. 우리는 수제품이 완벽하기 때문에 값이 비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수제품은 기계가 만든 제품처럼 완벽할 수 없기에 오히려 비싼 것이다. 희소성과 불완전성이 수제품의 미적 감각과 가격을 높인다. 제작본능의 실용적인 관점에서 수제품을 만드는 데 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은 무익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러한 제품들은 과시적 낭비사회의 유한계급층의 선택을 받아 적자생존 해나갔다.이 책을 읽다보면 베블런이 기존에 있던 경제학자나 사회학자의 주장과 많이 대치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마르크스와도 알게 모르게 다른 길을 가고 있고, 아담 스미스와도 비슷.
자본주의의 이행논쟁,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현재, 세계경제는 석유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석유의 가격이 크게 오르느냐 혹은 내리느냐는 단순히 석유시장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있다. 석유 가격은 경기침체나 경기호황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매우 밀접하게 경제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은 자명하다. 지구상에 이토록 한 자원이 전 세계의 경제를 쥐락펴락한 적이 있을 까 싶을 정도다.그렇지만 조금만 더 과거를 들춰본다면, 지금과 사뭇 다른 상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석유가 세계 경제의 화두로 올라선 것은 채 200년도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이전부터 석유라는 것은 존재해 왔지만, 그 사용법이 제대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석유는 그저 검고 점성 높은 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석유가 산업동력의 주원료로 쓰이기 전에 일어난 영국의 산업혁명은 석탄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석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원으로 여겨졌고, 이를 대체할 만한 동력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 석유가 보다 더 나은 에너지원으로 쓰일 수 있게 되면서, 세계는 석탄에서 석유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는 검은 물이 검은 보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었다.이렇게 사회는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한때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던 것들이 순식간에 거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높은 기술들도 불과 몇 년만에 구식이 되기도 한다. 또한 사고나 철학, 이념 역시 변한다. 처음에 옳고 더 효율적으로 보이던 것들에서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새로운 철학과 이념, 제도가 등장하는 것이다.경제사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 서구 지역뿐 만이 아니라 아시아 거의 전역에서, 그러니까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봉건제는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그 위상을 잃었다. “태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도 지기 마련이다.”라는 페르디난트 레이먼드의 말처럼, 봉건제는 저무는 태양이 되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봉건제가 ‘자본주의’것인데, 화폐적 교환경제와 대립되는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 즉, ‘소비를 목적으로 한 경제’라고 보았다. 이 견해는 여러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긴 하지만, 농노제와 시기적으로 거의 겹치지 못한다는 딜레마를 가진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법률적’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우선 농노제를 부역이나 영주의 영지에서 직접 행하는 의무노동과 동일시 할 수 있다는 것과, 중세 말에 상업과 원격지 시장을 위한 상품생산의 발전 정도에 따라 이러한 부역노동이 소멸하고 화폐적인 계약관계로 바뀌어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의견 모두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봉건제에 대한 여러 정의들 사이에서, Dobb은 봉건제를 기본적으로 농노제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봉건제는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써, 영주의 강제적인 부역을 통한 직영지의 경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체계는 직접 생산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그의 노동의 실현과 생계수단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물적 제조건을 소유한다는 점에서 노예제와 분명한 차이점을 지닌다. 그리고 자본주의와도 여러 부분에서 다른 점들이 있다. 우선 자본제에서 노동자는 노예제에서처럼, 독립적인 생산자가 아니게 된다. 또 노예제와는 다르지만 노동자와 생산수단 소유자와의 관계는 경제적인 계약관계에 한정된다. 즉, 계약에서 약속한 의무 외에 다른 의무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봉건적 노예제에서의 생산환경을 살펴보자면, 당시 생산도구는 단순하고 생산 활동은 주로 개인적 성격에 가까웠다. 그리고 분업도 매우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이 역시도 시장을 위한 생산이라기보다는 개인적 필요와 관련되어 있었다.2. 봉건제의 붕괴상업의 성장이 봉건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사실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있어온 주장이다. 시장이 형성되고, 이곳에서 잉여생산물이 서로 교환되고, 더 나아가 시장 생산을 자극하여 장원경제의 자급자족체계가 조금씩 무너져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거의 라는 외부충격이 아닌 제도내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지배계급의 증대하는 수입욕구와 더불어 나타난 생산체제로서 봉건제가 갖는 비효율성”에서 붕괴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봉건적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수단은 거의 ‘잉여노동시간’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농민들을 착취하고 혹은 살해까지 하는 일은 그리 보기 어려운 광경이 아니었다.결국, 영주들의 수는 늘어났고 화폐 획득의 욕구가 커지면서, 생산자에 대한 과도한 압력은 노동력의 과잉착취를 불러왔다. 농노들은 영주들의 압박 속에서 단순한 도구로 취급받았기에 그들이 ‘주인의 눈앞에선 열심히 일하지만 돌아서면 게으르고 굼뜨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이 그들의 노동생산력에 자극을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농노들의 피를 말리는 이러한 상황 들은 농노들이 토지로부터 도주하게 만들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영주가 농도들을 해방시킬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생겼다. 즉, 영주가 어느 선에서 양보를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점차 인구 유인력이 높은 도시들이 생기면서, 인구가 더 줄어드는 지역에서는 직영지 경작이 쇠퇴되게 되었고, 소작인의 도주를 막기 위해 부역에의 요구도 줄이는데 강한 영향을 미쳤다.3. 자본주의의 기원시장의 발전은 봉건제 구조의 해체에 영향을 미치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도시의 성장과도 서로 맞물려 나갔다. 봉건제 하의 압박과 동시에 농업의 쇠퇴는 도시에 이주민을 공급하는 자극제가 되었고, 도시 그 자체는 하나의 도피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하지만, 사실 이 시대의 도시가 그리 발달된 형태는 아니었다. 도시의 수공업은 단순상품생산의 형태였다. 도시가 극적으로 성장한데에는 피엔느에 의하면, 지중해 해상무역의 부활에 큰 의의가 있다. 해상무역은 대륙 간 대상인들의 움직임을 자극하고, 다시 상인들의 지방 정착을 유도하며 도시공동체에 강한 유인력이 되었다.Dobb은 대부분의 도시완전한 시장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이 당시는 수요와 공급의 지역적 괴리와 정보의 부재 하에서 높은 가격의 차이가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이러한 독점적인 지위는 정치적인 특권과 상인조합의 활동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상인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배타적인 상인단체를 만들었고 이들 단체들은 시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강화하고 수공업자들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였다. 이에 따라, 수공업자들은 외래상인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 지역의 부유한 특권상인들과 계약을 맺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Dobb은 상인부르주아를 자본주의 발전의 방해자라 본 것이다.상인 부르주아는 스스로의 이익만을 눈앞에 두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혁명적인 길은 생산자 자신이 자본을 축적하여 상업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수공업 길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본제적인 기반 위에 생산을 조직하는 과정이지만, 그저 봉건세력과 타협하기에 급급했다. 즉, 앞서 본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종속이 또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인데, 이는 결코 자본주의 태동의 원동력이 아니었다. 상인 부르주아가 득세하던 14세기-16세기는 그저 기본적으로 봉건제의 연속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Ⅱ. M. Dobb에 대한 Sweezy의 견해1. 봉건제의 정의Dobb은 봉건제를 사실상 농노제와 동일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했지만, Sweezy는 이러한 정의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도약된 것이라 파악했다. 농노제는 명확히 봉건적이지 않은 체제하에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 Dobb의 분석은 보통 서유럽의봉건제에 대하여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설명은 ‘고전적’형태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봉건제적인 생산양식은 고전적 형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Sweezy는 이에 반해 봉건사회는 오히려 ‘사용을 위한 생산경제’, 다른 말로 ‘자연경제’로 파악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봉건체제에도 인구의 증가나 봉건영주와의 전영향을 충분히 파고들지 못했다는 것이다.우선 Sweezy는 Dobb과 달리 봉건제의 붕괴는 체제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도시의 성장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먼저 Dobb의 논의에 있어서 “왜 영주의 수입필요가 증대했는가?”를 고민해 보자. Dobb은 수입의 필요에서 농노를 단순히 수익원으로만 보고, 그들의 이익에 대해 무시했으며 전쟁 및 약탈은 전 기간에 존재했다는 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Sweezy에 따르면, 영주의 수입 욕구는 보다 ‘기생계급 규모의 증대’와 ‘귀족가계의 점증하는 낭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보았다.낭비 증가는 사실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이 이유는 외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교역의 급속한 확대이다. 교역이 급속하게 확대되면서 더욱 많은 종류의 상품들을 들어왔고, 자연스레 물질적인 욕구가 두드진 것이다.이제 Dobb이 언급했던 농노의 도망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보자. 그 시대에 농노의 토지로부터의 도주 역시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도망갈 곳이 없이 농노가 도주할 수 있었을까? 즉, 농노가 도망갈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는 것에 Sweezy는 좀 더 집중했다. 즉, 도시의 성장이 이를 뒤받침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던 도시는 자유, 일자리 그리고 사회적 신분의 향상을 제공함으로써 장원에서 억압받는 자들에 대해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도시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종합하여 보았을 때, Dobb은 봉건제의 해체에 대해 체제 외적인 요인을 무시하여 특정 경제사를 내재적 경향으로 오해했다.그렇다면 Sweezy는 봉건제의 붕괴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는 봉건제 붕괴의 근본 원인은 상업의 발달에서 시작되었다고 확신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교역의 증가와 이에 따른 시장을 위한 생산의 증가는 봉건체제에 여러 영향을.